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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운대의 일출 2017.1.1
새해에는 희망의 혁명을 노래하자
연말(음력이라도 마찬가지다)에 자주 듣는 음악으로 베토벤의 제9번 교향곡 〈합창〉이 있다. 곡의 하이라이트를 장식하는 〈환희의 송가〉는 듣는 이로 하여금 전율하는 감동을 준다. 고난을 극복한 뒤의 환희를 노래하는 합창의 장중함은 새해가 열리는 제야의 설렘과 어우러져 주체하기 어려운 희열과 감격으로 메마른 영혼을 울려든다.
모두가 알다시피 베토벤은 귀머거리 장애인이다. 그의 대부분의 음악이 귀가 먼 뒤의 작품이었다는데 우리는 경이로움과 더불어 그의 초인적인 위대성에 찬사를 아끼지 않는 터다.
귀머거리라는 치명적 손상에도 불구하고 침묵의 세계에서 맛보아야 하는 절대 고독과 육체적인 고통, 더할 나위 없는 가난과의 싸움을 벌이면서도 베토벤은 〈환희의 송가〉와 같은 찬란한 기쁨을 〈합창〉으로 재현한 위대한 영혼의 승부사였다. 역설적이게도 베토벤은 그 같은 역경과 고난이 있었기에 고통을 뛰어 넘은 환희가 얼마만큼 크다는 믿음을 아는 음악가였다. 로망 롤랑이 이 위대한 음악가의 생애를 범상히 넘겨버리지 않고 쟝 크리스토프라는 작품으로 승화시킨 까닭도 따지고 보면 고난과 시련을 이기고 승리한 인간의 표상으로 삼으려했음이 아니었을까.
장애는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선천적으로 또는 후천적으로.
실수로 다치기도 하고, 한순간의 방심으로 화(禍)를 자초하기도 한다. 사고로 몸이 망가지고, 재해로 육신을 다치며, 이따금 약물이나 알콜의 중독으로 선천성, 또는 후천성 장애를 입기도 한다.
비운의 체조요정 김소영도, 〈클론〉의 강원래도, 〈바퀴달린 사나이〉 개그맨 박대운도 , 발레리나의 꿈을 접은 최혜영 교수도 모두 그런 사람들이다. ‘네 손가락의 피아니스트’ 이희아, 존스홉킨스병원의 ‘슈퍼맨 닥터’ 이승복은 또 어떤가. 이들 모두는 한결같이 장애를 입고 있으면서도 만난을 극복하고 우뚝 일어선 휴먼석세스 스토리의 주인공들임에 이견이 없다.
전제덕의 하모니카 음악을 듣는다.
하모니카라면 60년대 중, 고등학생 시절의 꿈과 동경과 낭만이 생각난다. 비록 「문방구 하모니카」로 부는 것이었지만 감색 바지 흰 상의 교복의 사춘기 청소년이 바위고개를 서툰 음계로 불어대면서 으쓱해 하던 모습이란! 하모니카에 얽힌 아련한 추억들. 입가에 미소를 떠올리게 하는 회상의 장면들이다.
하모니카도 많이 진화를 했는지 이름도 생소하고 종류도 다양한 것이 몇 만 원대에서 수십만 원을 호가하는 고급제품도 있었다. 옥타브 하모니카, 트레몰로 하모니카, 다이아토닉 하모니카, 크로매틱 하모니카…
전자기타와 어울리면 재즈가 되고, 드럼과 짝을 지으면 라틴 뮤직이 되며, 바이올린과 동행하면 발라드가 되는 하모니카의 놀라운 변신.
전제덕은 하모니카로 시를 쓰고 노래로 신을 찾는 구도자인가 보았다.
심금(心琴)을 울린다고 했던가, 전제덕의 음악에는 영혼의 심해(深海)에서 건져 올리는 구원의 절실함과 눈물겨운 절규가 있었다.
그가 입술을 대면 하모니카는 슬픔을 간절한 기도로 바꾸었고, 그의 호흡이 하모니카에 가 닿으면 음률은 구도의 춤으로 나타났다. 화사한 봄 나비의 날개 짓으로도 나타나고, 격렬한 폭풍우와도 같은 정열의 리듬으로 옷을 갈아입기도 한다. 재즈, 팝, 발라드, 라틴 등 청춘의 고뇌와 성숙한 인간의 은은한 속삭임이 그의 음악에 있다. 놀라운 하모니카의 변신이며, 기특한 감성과 테크닉의 어울림이 창조해낸 감동의 퍼레이드다. 세계적 재즈 기타리스트 존 스코필드가 그와 함께 무대에 서고 싶다는 의견을 피력한 것도 전혀 무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전제덕에게서 레이 찰스나 루이암스트롱의 영감을 발견한다는 것도. 그들 모두는 영혼을 노래한 뮤지션이었으므로.
전제덕은 시각장애인이다.
출생 보름 만에 열병을 앓아 눈을 잃었다고 한다. 들을 수 없어 하기 어렵기나, 볼 수 없어 하기 어렵기나, 음악가에겐 천형(天刑)이나 다름없는 장애인 셈이다. 절망할 수밖에 없고, 좌절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이럴 경우 사람들은 부모를 원망하고, 나아가 신을 저주하기도 한다. 폭력으로 타인에게 상처를 전가하기도 하고, 자해로 인생을 타락시키기도 한다. 그런데 전제덕은 인내와 의지로 하많은 고통과 역경을 극복해냈다. 절박한 생존의 위기에 놓여서도 그는 자신의 내면 깊숙이 잠재되어 있는 재능을 발견하고 그것을 갈고 닦기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이 점이 그를 탁월한 음악인으로 태어나게 한, 인간승리로 돋보이게 한 원동력이 된 듯싶다.
마음으로 보는 훈련과 감각으로 암기하는 노력, 머리로 연주하고 입술로 작곡하는 작업을 잠을 잊은 세월로 메우며 오늘에 이르렀음을 알 수가 있다. 시행착오도 있었으리라, 좌절도 있었으리라, 어찌 눈물이 없었을 거며 세상을 향한 비난과 원망이 없었으랴.
영혼을 노래하는 사람들의 공통적 특징은 하나같이 상처입고 고통받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이다. 기교로 할 수 없는 표현을 영혼으로 나타내는 사람들. 영혼에서 우러나와 영혼을 울리는, 영혼으로 노래하고 영혼으로 말하며 영혼을 울리는 사람들.
정말이지 상처를 받아본 사람이 남의 상처에도 깊이 연민하며 가슴 아파하는 것이다. 자신의 아픔을 깊은 울림으로 승화시키는 사람들.
성서에 나타난 장애인에 대한 기사를 본다.
[예수께서 길을 가시다가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소경을 만나셨는데 제자들이 예수께 “선생님, 저 사람이 소경으로 태어난 것은 누구의 죄입니까? 자기 죄입니까? 그 부모 죄입니까?”하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자기 죄 탓도 아니고 부모의 죄 탓도 아니다. 다만 저 사람에게서 하느님의 놀라운 일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요한복음9:1~3)]
이희아는 그랬다. “손가락을 두 개 주신 하느님께 감사합니다” 라고. 이것이야말로 「하느님의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얻어먹을 수 있는 힘만 있어도 그것은 하느님의 은혜 」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꽃동네」의 모태가 된 최귀동 할아버지의 살아생전의 삶과 실천의 덕목이 된 깨달음이다.
삶은 고달픔이다.
허기진 삶에서 절망하고 아득한 희망에서 좌절하기 십상이다. 흔히 미래가 없다기도 하고, 살아봐야 고통뿐이라고 낙담하는 이웃과 더불어 초점 잃은 시선으로 멍하니 사는 것이 우리들의 일상이 아닌지 모른다.
그러나 일어서야 한다. 눈이 멀고 귀 먹으며 다리 버린 사람들도 저렇듯 훌륭하게 인생을 꾸려오지 않은가. 희망은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 우리들의 생명력이다. 다시 찾아 일어서야 하는 소중한 삶의 자산이다.
돈에 쪼달리고, 건강에 시달리며, 시험에 떨어지고 취업에서 밀린 풀죽은 인생들이 우글거리는 헬조선, 용기를 내어 다시 삶에 활력을 불어넣어 보자. 그리하여 〈환희의 송가〉를 힘차게 부를 그 때까지!
설날이 온다.
새해에는 부디 희망의 혁명을 노래하자!
첫댓글 감동의 이야기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