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양명이 40대에 학생 서애(徐愛)와 양기(楊驥)를 잃은 슬픔과 좌절(「祭徐曰仁文」、「奠楊士德文」)
2021년 4월 20일
왕양명은 학생들을 자식처럼 아끼고 사랑하였습니다. 왕양명은 먼저 세상을 떠난 학생들을 보내면서 애달프고 슬펐습니다. 서애와 양기가 세상을 떠났을 때는 좌절하였답니다. 매제 서애에게 쓴 제문과 학생 양기 영전에 올린 제문을 보면 정말로 안타깝습니다.
왕양명은 학생들 가운데 서애(徐愛, 1487-1518)가 세상을 떠났을 때 슬퍼서 통곡하였습니다. 제문을 몇 번이나 썼습니다. 학생 양기(楊驥)가 1519년 5월에 감주로 찾아와서 공부한 뒤 광동성 조주로 돌아가서 1520년 여름 7월에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왕양명이 듣고 또 통곡하였습니다. 사실상 왕양명은 정서적으로 좌절하였습니다. 그래서 왕양명은 그의 아우 양난(楊鸞)을 잘 가르치려고 애썼습니다. 양난이 왕양명 51살(1522)에 소흥부로 찾아오자 강서성 감주와 남창에서 제시한 양지를 자세히 가르쳐주고 다른 학생들에게도 잘 가르쳐주라고 당부하였습니다. 그런데 양난(楊鸞)마저 1526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두 형제를 떠나보낸 왕양명의 슬픔이 아주 컸답니다.
이뿐만이 아니고 관직에서 쫓겨나서 좌절한 학생들도 몹시 걱정하였습니다. 진구천이 좌천되고 평민으로 강등되었을 때 왕양명이 무척 걱정하였습니다. 56살에 광서성으로 가는 길에 남창에서 진구천을 잠깐 만났으나 긴 이야기를 나누지 못하였습니다. 왕양명은 광서성 남녕현에 가서도 그를 불러서 걱정거리를 들어주려고 하였으나 기후가 나빠서 기침하고 설사하면서 진구천에게 병이 날까봐 부르지 않았습니다. 왕양명이 세상을 떠나자 진구천이 당장 달려왔습니다. 나중에 진구천은 세상을 숨다시피 피하고 은거하였는데 왕양명 문인들도 왕양명이 얼마나 진구천을 아꼈는지를 알기에 서로 나서서 진구천을 세상 밖으로 나오게 하였답니다.
왕양명은 정이 깊고 많아서 사람들과 헤어지는 것을 엄청 안타까워하였습니다. 심지어 유양정 때문에 주신호와 내통하였다는 의심을 받을망정 그를 도우려고 생각하였던 적도 있습니다. 유양정도 왕양명이 구해줄 것이라고 생각하였구요. 주신호 반란에 가담하여 도왔던 유양정(劉養正)도 사실상 왕양명의 벗이며 문인이라고 합니다. 주신호가 포로로 잡힌 뒤에 유양정이 처형될 때는 왕양명도 어쩔 수 없이 모른 척하였습니다. 유양정의 처가 잡혀가서 북경에서 노비가 되었을 때도 왕양명이 많이 걱정하였답니다. 나중에 유양정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왕양명이 유양정 아들을 대신하여 묻어주고 제문도 지어주었답니다.
왕양명이 정이 많았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태주학파 후학들은 양명 후학들 가운데 이런 모습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왕간(王艮)을 비롯하여 안균(顔鈞)과 그의 문인 하심은(何心隱)과 나여방(羅汝芳)도 보통이 아니었답니다. 이탁오조차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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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양명,「서애 제문(祭徐曰仁文)」︰
정덕 12년(1517) 7월 15일 강서성 감주 좌첨도어사 왕수인은 열 번째 아우 왕수문을 시켜 맑은 술을 영전에 따라 올리며 울면서 서애에게 알립니다.
아이구! 서애야! 너는 차마 나를 버리고 죽었느냐? 나는 어떻게 너를 버리고 살아가겠느냐? 아이구! 서애야! 네가 죽었으니 내 여동생은 앞으로 어떻게 살란 말이냐? 늙은 우리 부모님이 이런 불행한 일을 겪게 하다니 너를 얼마나 그리워하시겠느냐? 너희 늙은 부모님은 이런 불행을 겪게 하다니 어떻게 살란 말이냐? 이것이 이 세상에서 차마 말할 수 없는 가장 지극히 고통스러운 것인데 내가 차마 무슨 말을 하겠느냐? 아이구! 가슴 아프다! 내가 무슨 말을 하랴! 내가 무슨 말을 더하겠느냐! 향음하길 바란다.
王陽明,「祭徐曰仁文」︰
維正德十二年(1517)七月十五日,寓贛州左僉都御史王守仁,使十弟守文,具清酌之奠,哭告於故工部都水司郎中妹婿徐曰仁之柩曰︰
鳴呼曰仁!乃忍去吾而死耶?吾又何以舍子而生為乎?鳴呼曰仁!子則死矣,而使吾妹將何以生乎?使吾父母暮年遭此,何以為懷乎?又使子之父母暮年遭此,何以為生乎?此皆人世之至酷極烈所不忍言者,吾尚忍言之乎?鳴呼痛哉!吾復何言!吾復何言!尚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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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양명이 49살(1520) 학생 양기(楊驥) 영전에 올리는 글(「奠楊士德文」):
아이구! 양기(楊驥)는 뛰어난 자질을 타고났고 성인이 되겠다는 의지를 갖고 믿고 용감하게 공부하여 정말로 학술을 맡겠다는 책임감을 가졌고 나를 찾아와서 공부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중도에 목숨을 빼앗겼는데 하늘이니 내가 누구 탓을 하겠느냐? 양기가 평소 많이 아팠는데 지난겨울에 강서성 회옥현(饒州府 懷玉縣)에 있는 문인의 서신을 받았는데 “양기가 1520년 2월 북경 회시에 참가하였다가 아파서 시험을 그만두고 광동성 조주(潮州)로 내려왔다.”고 하는데 전에도 있었던 일이려니 생각하였다. 가을에 너의 아우 양난(楊鸞, 字仕鳴)이 감주에 와서 북경에서 너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고 전해주었다. 나는 믿어지지 않았고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몰라서 믿지 않겠다고 말하였다. 그런데 설간(薛侃)이 그의 사망 소식을 전해왔는데 정말로 세상을 떠났구나.
아이구! 양기의 불행에 마음이 몹시 아프다. 서애(徐愛, 1487-1518)가 재작년(1518)에 세상을 떠나서 가슴이 얼마나 아팠는지 참을 수가 없었다. 지금 다시 양기마저 세상을 떠나 마음이 더욱 아프다. 내가 이를 어찌 감당할 수 있겠느냐? 설간이 나에게 말하길 “광동성 조주에는 봉황 두 마리가 있습니다.”고 소개해주었는데 바로 양기와 양난 너희 두 형제이다. 두 형제가 1517년에 나를 찾아와서 공부하였다. 나는 학술이 발전하려는 좋은 조짐이라고 생각하였는데 지금 봉황 둘 가운데 하나는 잃었다. 아이구! 그를 잃어 마음이 아프다! 아우 양난이 조주로 돌아가는 길에 너의 영전에 올리는 글을 지어 보낸다. 아프다! 양기야! 지금은 네가 없으니 내가 무슨 말을 하겠느냐? 내가 무엇을 더 가르쳐주겠느냐?
王陽明,「奠楊仕德文」:
鳴呼!士德之資,精一之志,篤信往勇,真足以任重致遠,亦既有聞矣。忽中道而奪之,天也,吾誰歸咎乎?士德素多病,得去冬,懷玉書云︰“扶病還潮”,謂亦常耳。秋初,士鳴過贛,凶變適傳,且疑且愕,謂為不信。既而尚謙報至,而果然矣。
鳴呼!痛哉!其之不幸。往歲曰仁(徐愛)之慟,吾已不忍其烈,今復慟吾士德,其何以堪之?昔尚謙為吾言︰“潮有二鳳”,蓋指士德昆季也。後皆相繼為吾得,自以為斯文之瑞,而今失其一矣。鳴呼傷哉!士鳴歸,聊附一奠。痛哉士德!今日已矣,復何言?復何言?
出處︰
1. 束景南,『王陽明佚文輯考編年』(下),「奠楊仕德文」,『饒平縣志』,卷二十。
2. 『潮州耆舊集』,『薛中離集』,薛侃,「楊毅齋(楊驥)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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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陽明,「與楊仕鳴(楊鸞)」(辛巳,1521, 왕양명 50살):
差人來,知令兄已於去冬安厝,墓有宿草矣,無由一哭,傷哉!所委志銘,既病且冗,須朋友中相知深者一爲之,始能有發耳。
喻及“日用講求功夫,只是各依自家良知所及,自去其障,擴充以盡其本體,不可遷就氣習以趨時好。”幸甚幸甚!果如是,方是致知格物,方是明善誠身。果如是,德安得而不日新!業安得而不富有!謂“每日自檢,未有終日渾成片段”者,亦只是致知工夫間斷。夫仁,亦在乎熟之而已。又雲:“以此磨勘先輩文字同異,工夫不合,常生疑慮。”又何爲其然哉?區區所論致知二字,乃是孔門正法眼藏,於此見得眞的,直是建諸天地而不悖,質諸鬼神而無疑,考諸三王而不謬,百世以俟聖人而不惑!知此者,方謂之知道;得此者,方謂之有德。異此而學,即謂之異端;離此而說,即謂之邪說;迷此而行,即謂之冥行。雖千魔萬怪,眩瞀變幻於前,自當觸之而碎,迎之而解,如太陽一出,而鬼魅魍魎自無所逃其形矣。尙何疑慮之有,而何異同之足惑乎!所謂“此學如立在空中,四面皆無倚靠,萬事不容染著,色色信他本來,不容一毫增減。若涉些安排,著些意思,便不是合一功夫”,雖言句時有未瑩,亦是仕鳴(楊鸞)見得處,足可喜矣。但須切實用力,始不落空。若只如此說,未免亦是議擬仿象,已後只做得一個弄精魄的漢,雖與近世格物者症候稍有不同,其爲病痛,一而已矣。詩文之習,儒者雖亦不廢,孔子所謂“有德者必有言”也。若著意安排組織,未有不起於勝心者,先輩號爲有志斯道,而亦復如是,亦只是習心未除耳。仕鳴既知致知之說,此等處自當一勘而破,瞞他些子不得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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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陽明,「祭楊士鳴文」(丙戌,1526,왕양명 55살):
嗚呼士鳴!吾見其進也,而遽見其止耶!往年士德之歿,吾已謂天道之無知矣,今而士鳴又相繼以逝,吾安所歸咎乎?嗚呼痛哉!
忠信明睿之資,一郡一邑之中不能一二見,而顧萃於一家之兄弟,又皆與聞斯道,以承千載之絕學,此豈也出於偶然者!固宜使之得志大行,發聖學之光輝,翼斯文於悠遠。而乃栽培長養,則若彼其艱;而傾覆摧折,又如此其易!其果出於偶然,倏聚倏散,而天亦略無主宰於其間耶?嗚呼痛哉!
潮郡在南海之涯,一郡耳。一郡之中,有薛氏之兄弟子侄,既足盛矣,而又有士鳴之昆季。其餘聰明特達毅然任道之器,後先頡頏而起者以數十。其山川靈秀之氣,殆不能若是其淑且厚,則亦宜有盈虛消息於其間矣乎?士鳴兄弟雖皆中道而逝,然今海內善類,孰不知南海之濱有楊士德、楊士鳴者爲成德之士?如祥麟瑞鳳。爭一睹之爲快,因而向風興起者比比。則士鳴昆季之生,其潛啟默相以有績於斯道,豈其微哉!彼黃馘槁斃,與草木同腐者,又何可勝數!求如士鳴昆季一日之生以死,又安可得乎?嗚呼!道無生死,無去來,士鳴則既聞道矣,其生也奚以喜?其死亦奚以悲。獨吾黨之失助而未及見斯道之大行也,則吾亦安能以無一慟乎!嗚呼痛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