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機緣品- 10 智常
僧智常은 信州貴溪人이라
髱年에 出家하야 志求見性이러니
一日에 參禮한대
師問曰, 汝從何來며 欲求何事오 曰,
學人이 近往洪州白峯山하야 禮大通和尙하고
蒙示見性成佛之義나 未決狐疑일새 遠來投禮하오니
伏望和尙은 慈悲指示하소서
師曰,
彼有何言句오 汝試擧看하라 曰,
智常이 到彼하여 凡經三月이로되 未蒙示誨라
爲法切故로 一夕에 獨入丈室하야 請問,
如何是智常의 本心本性이니까하니
大通이 乃曰, 汝見虛空否아 對曰, 見이니이다
彼曰, 汝見虛空이 有相貌否아 對曰,
虛空이 無形이어니 有何相貌리이까
彼曰, 汝之本性이 猶如虛空하야 了無一物可見이
是名正見이요 了無一物可知가 是名眞知며
無有靑黃長短하고 但見本源淸淨한 覺體圓明이
卽名見性成佛이요 亦名如來知見이라하야늘
學人이 雖聞此說이나 猶未決了하오니
乞和尙은 開示하소서
師曰, 彼師所說이 猶存見知故로 令汝未了니
吾今示汝一偈하리라
不見一法存無見하면 大似浮雲遮日面이오
不知一法守空知하면 還如太虛生閃電이로다
此之知見瞥然興하면 錯認何曾解方便이리요
汝當一念自知非하면 自己靈光常顯現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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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지상이라고 하는 스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여기가 기연품 이라고 해서
육조스님께서 평소에 제자들을 가르치시는
법문만을 내용별로 정리해서 묶은 그런 글이 있는가 하면,
사람 따라서 뒷사람들에게 상당히 참고가 되고,
귀감이 될 만한 그런 인연들을 모아서 이렇게
육조단경에 소개하고, 있는 내용들도 있습니다.
여기
지상이라는 스님도 육조스님의 제자 중에 한 사람으로서,
물론 상당히 많은 스님들이 육조스님 밑에서 지도를 받았고,
깨달음을 얻었지만, 그래도 육조단경에 기록으로 남길만한
스님들은 사실 불과 몇 안 되거든요. 그 중에 한 분이고,
또 귀담아 들을만한 내용들이 있어서 이렇게 소개가 되고 있습니다.
僧智常은→ 승. 지상이라고 하는 분은
信州貴溪人(신주귀계인)이라→ 신주 귀계 사람이다.
髱年(초년)에 出家하야→
“髱年”이라고 하는 것은 단발머리 초자인데, 7~8세.
아마 그 당시로서는 “7~8세 상당히 어린나이에 출가했다.”
는 뜻입니다.
출가
연령이 근래에 와서는 우리나라의 경우로 보면
상당히 높아졌어요. 그것을 어떻게 할 길이 없는데,
옛날에는 “협 존자”라는 분은 80에 출가한 이도 있어요.
80세에 출가해서 사람들이 “노인이 뭘 하겠단 말이냐?”
고 하니까 분발심이 나서...
“노인이 지금 와서 뭘 하겠냐?”
고 핀잔도 주고, 꾸중도 하고, 또 견책도 하니까,
거기에 분발심을 일으켜서 한 번도 허리를 땅에 대지 않고,
나무에 기댄다던지, 제대로 잠다운 잠을 자지 않고,
수행을 남보다 더 많이 해서, 80에 출가했지만
깨달음을 이룬 분도 있어요.
깨달음을 이뤄도 보통 이룬 것이 아니고,
부처님의 正脈(정맥)을 이을 정도로...
그래서
역사에 길이 남는 그런 이들도 있습니다. 80에 출가해도...
어려서 출가했다고 “천지도 모른 사람이 뭘 알겠느냐?”
하지만, 이런 스님도 그렇고 또 천하 “고불”이라고,
“조주고불”이라고 하는
“옛 부처님”이라고 할 정도로 추앙을 받는
조주 스님 같은 이들로 8세인가 9세에 출가 했거든요.
10세 이전에 출가를 했어요. 그런 근기들도 있고,
그런 인연들도 있습니다.
나이 따라서 공부를 잘 한다. 못 한다.
이것은 도저히 우리가 가늠할 수가 없어요.
특히 불교공부는 더욱 더 그렇습니다.
물론 有識. 無識에 딸린 것도 아니고요.
나이 들어서 출가 했다고 꼭 조건이 좋은 것도 아니고,
어려서 출가 했다고 꼭 좋은 조건도 아닌데요.
그래도 옛날 스님들의 생각은,
그래도 세속물이 덜들었을 때 어려서 출가하는 것을
좀 “이상적인 출가”라고 보는가 봐요. 그래서
“발원문”에도 보면, 뭐라고 되어 있지요?
“아이로서 출가하여”
그렇게 되어 있어요. 번역을 “아이로서 출가하여
세속 물들지 않고 그렇게 하고 싶다.”하는
그런 이산혜연 선사 발원문이지만, 아이 때.
아이라면 열 살 전을 말합니다. 대개...
그 당시
아이라면... 그것을 가장 “이상적인 출가”라고 그러는데,
그것이 꼭 좋은 것만도 아니에요. 어려서 출가 했다고
하면 옛날에 제가 해인사에 학인으로 있을 때,
그 밑에 비구니 사찰 삼성암. 약사암. 금선암.
비구니스님들이 계시는 암자가 많은데요.
대개 어린 아이들이 출가하는 경우가 있어요.
더 많아요. 비구니스님들이...
무슨 사연으로 그렇게 왔는지
초등학교도 다니기 전에, 절에 와 놓으니까
절에서도 초등학교로 보낸다고요. 머리를 깎아 가지고도
보내고, 긴 상태에서도 보내고...
학교에서 놀다가 절에 와서도 저희 또래끼리...
초등학교 1~2학년 돼가지고...
요즘은 볼 수 없지만 그 때 고무줄넘기 있잖아요?
그것을 절에서 팔짝팔짝 뛰면서 아이들이 하고 있으니까
관광객들이 지나가다가 가만히 보니 우습거든요. 머리는 깎고
스님은 스님인데, 어린애이고...
그것도 어린애가 하는 고무줄넘기를 하고 놀고...
노는 것을 가만히 보다가 물었다는 것입니다.
해인사에서 유명한 이야기인데, “너희 어째서
출가 했느냐?” 하고 물으니까 줄넘기 팔짝팔짝
하다가 딱 서가지고는 “인생이 무상해서요.”
그러고는 언제 대답했느냐는 듯이 또 줄넘기를
열심히 하더라는 거예요. 그 얘기가 한참...
우리는 가끔 그 얘기를 해요. 그 때 해인사에서
살던 스님들 만나면 그 얘기를 하는데요.
“인생이 무상해서 출가했다.” 고 그런 이야기를 하는데,
누가 노스님, 참 잘 가르쳤어요. 어쨌거나 아무튼...
어떤 이유에서 했던지 간에 무조건 인생이 무상해서
출가한 걸로 돼야 하니까요. 그렇게 가르쳐가지고
누가 묻거든 “너희들 그렇게 대답해라.”
아마 이렇게 가르쳐놓았나 봐요. 그러니까
아주 판에 박은 듯이 묻자마자 대답이 즉답으로
그냥 머뭇거릴 것도 없이 나왔다는
그런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기도
“髱年.” 단발머리 초자인데, 髱年(초년) 出家(출가).
이분도 상당히 어려서 출가 했던가 봅니다.
어려서 출가한 이로서 제일 부러운 분이
조주스님 같은 분입니다. 그 분은 천하의
“조주古佛(고불)”로 “80에 유行脚(행각)”이라.
80살이 될 때까지, 행각을 했다는 것입니다.
60살이 될 때까지 은사스님 시봉 했다는 겁니다.
그 당시 60 이면요. 40만 되어도 노인이거든요.
40만 되어도 노인취급 받던 때입니다. 그런데
60 이 될 때까지 시봉을 했다는 겁니다. 견성 다 하고...
견성성불 다 하고 60 이 되었는데도,
은사스님이 돌아가시지 안 해 놓으니까
그 시중을 돌아가실 때 까지 다 들었다는 겁니다.
밑에 어린 사람들 시켜도 되는데 자신의 수행이
그만치 되어있는 자기가 해야 된다는 그런
마음에서 60살이 될 때까지 그렇게 하고,
그리고 은사스님이 돌아가시니까 비로소
그 때부터 걸망을 지고 행각을 했다는 것이지요.
그래 가지고 무려 20년간 80살이 될 때까지
행각을 했다는 것이지요.
80살 되고 나서부터 비로소 정착을 하기 시작해가지고,
중생교화를 무려 40년 했어요. 그래 120세에 돌아가셨다는
아주 수행자 중에선 제일 본보기가 될 만한 그런 분인데...
그 분이 아홉 살엔가 아주 어린 나이에 출가를 해서
그렇게 수행자 중에선 가장 모범이 된 분이라고,
기억이 됩니다. 어려서 출가하긴 했어도
워낙 선근이 있어서...
志求見性(지구견성)이러니→
마음에. 뜻에 늘 견성할 것을 구하고 있었다.
어떻게 하더라도 특히 선종에서는 “견성성불”
자기 본성을 확연히 깨달아 아는 것을
제일 목표로 하고 있으니까 견성을 아주 중요하게 여깁니다.
자기 본성 보는 것을 마음에 아주 갈구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一日에 參禮를 한대→
육조스님을 찾아왔어요. 육조스님을 찾아 왔는데...
師問曰→ 육조스님께서 묻기를
汝從何來며 欲求何事오→
그대는 어디로부터 왔느냐?
그 뭐 대개 만나면 그래요. “어디서 왔느냐?”
이렇게 묻겠지요? “뭐 하러 왔느냐?”
欲求何事오? “뭣하러 왔느냐?”
“무슨 일을 구하려고 왔느냐?”
曰, 學人이→ 학인이 대답하기를
近往洪州白峯山(근왕홍주백봉산)하야→
홍주라는 지역에 백봉산 이라고 하는 산이 있는데
거기에 갔었는데,
禮大通和尙하고→대통화상이라는 스님께 예배를 하고,
蒙示見性成佛之義나→
견성성불! 이것이 禪家에서 늘 하는 말입니다.
性品(성품)! 자기 본성 보는 것이 곧 성불이고,
또 성불! “부처가 되었다.”고 하는 것은,
곧 자기 자성자리. 자기본성. 그것을 자성을 본다.
또는 마음을 깨닫는다. 표현은 여러 가지입니다만,
그 자성자리 보는 것. 자기자성. 본성 깨닫는 것을 “성불”이라고
하고 “성불은 곧 그것이다.” 그래서 見性成佛이 붙어 다닙니다.
선가에서는요.
見性成佛에 대한 도리를 보여주는 것을 입었다.
가르침을 받았다는 것이지요.
견성성불에 대한 이치를 듣기는 들었는데,
未決狐疑(미결호의)다→해결하지 못하고서 의심하고 있었다.
호의. 계속 그 문제에 대해서 의심하고 있었다.
이것이 선종에서 특히 傳通禪에서
모든 불자들의 공통적인 화두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하면
내 본성을 제대로 깨달을 수 있을까?
이것이 천형 같은 과제지요. 선가에서 말하는
불자의 가장 큰 과제는 바로 이 겁니다.
遠來投禮하오니→멀리서 와서 投禮. 예배를 드립니다.
그러니까,
伏望和尙은→
伏望. 엎드려 바라노니, 화상께서는, 큰 스님께서는,
慈悲指示하소서→
자비로서 좀 잘 지시해 주십시오.
이렇게 두 분이 만나서 서로 대담이 나누어집니다.
공부를 전혀 아니한 사람 같으면 차라리 쉽겠는데,
대통화상이라고 하는 스님 밑에서 공부를 하다가
온 사람이니까, 어떻게 공부 했는가? 라는 것을
육조스님께서 좀 다소 알아야, 이 사람이 병이 어디에 있고,
또 어떻게 가르쳐야 되겠다는 것을 알 수 있을 테니까요.
일단 상대를 좀 알아야 하겠기에 묻습니다.
師曰
彼有何言句오→
대통이라는 화상이 어떤 말씀을 하더냐?
彼는 그 분을 가리키는 것이지요?
汝試擧看하라→그대는 한 번 시험 삼아
그 분에게서 공부하던 내용을 한 번 잘 드러내 보이라.
曰, 智常이 到彼하여→거기에 이르러서 대통화상한테서
凡經三月이로되→ 석 달을 지냈는데,
未蒙示誨(미몽시회)라→가르쳐 주는 것을 미쳐 입지를 못했습니다.
爲法切故로→
석 달 동안 아무 것도 가르쳐 주지 않기 때문에,
법을 위하는 마음이 간절해 석 달을 가만히 기다려도
아무것도 안 가르쳐 주기에, 제 마음속에는
법을 알고 싶은 것이 간절해서 그래서
一夕에
獨入丈室하야→
하룻밤에는 제가 쳐들어갔지요. 이런 말입니다.
獨入丈室이라. 방장실. 방장스님이 계시는.
조실이 계시는 방을 “丈室” 그렇게 합니다.
홀로 하룻저녁에는
방장스님이 계시는 방에 쳐들어갔었습니다.
請問→ 묻기를
如何是智常의 本心本性이니까→
이렇게 물었다는 것이지요.
어떤 것이 저의 본래의 마음. 또 본래의 성품입니까?
本心이나 本性이나 두 가지로 말을 해도
뜻은 하나입니다. 이런 데는 性과 心을 그렇게 크게
나눠서 이야기를 하지 않지요.
어쨌든 “내 본심이.” 또는 “내 본성이 뭔지 궁급합니다.
내 본성이 뭔지 좀 가르쳐 주십시오.” 하고
석 달 동안 아무 가르침이 없으니까 스스로 들어가서
그렇게 물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大通이 乃曰→ 대통화상이 말하기를,
汝見虛空否아→그대가 허공을 보느냐?
선지식을 찾아갔을 때도 선지식 따라서
가르치는 것이 다 다르지요.
오자마자 잘 가르쳐주는 이들도 있고...
여기 3개월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는데,
어떤 이들은 몇 년을 아무 말도 안 하고
계속 일만 시키는 그런 경우들도 있고...
제가 옛날에 중국의 만화를 하나 보니까,
어떤 어린아이가 아주 천하의 대 화가한테 가서
그림을 배우려고 하는데, 몇 년 동안 그 어린아이를
데리고 다니면서 산천만 구경 시키고, 자기가
그림 작업을 하는 데는 한번도 보여주지도 않고...
문 닫아 놓고 자기 혼자 그림 그리고...
어린아이한테는 보여주지도 않고...
어린아이는 계속 몇 년을 데리고 다니면서...
어디 놀러 다닐 때는 데리고 다니고...
그런 식으로 교육을 시키는, 그림공부를
또 그렇게 시키는 경우도 있고요.
특히 선가에서는
더 여러 가지 교육 방법이 아주 다양하지요.
“구지화상”이라고 해서 간단하게 손가락을 보여서
하는 이들도 있고요.
또 어떤 이들은 솥은 잘 제대로 잘 걸려 있는데
괜히, “솥이 삐뚫어 졌으니까 새로 걸어라.”
해가지고 몇 번씩 새로 걸게 해서 근기를 성숙 시키는
그런 과정들을 둔다던지, 어쨌든 그랬어요.
이 분은 삼개월동안 아무 가르침도 못 받았는데,
그러다보니까 거기서 큰 해결을 얻지를 못하게 됐어요.
그래서 어쨌거나 들어갔고 들어간 이상 질문을 했고,
질문을 하니까 대답이, 그대는 허공을 보느냐?
對曰, 見이니이다→ 봅니다.
彼曰, 汝見虛空이→ 그대가 보는 허공이
有相貌否(유상모부)아→모양이 있느냐 이겁니다 허공이...
對曰, 虛空이→ 대답해 가로되
無形(무형)이어니→허공은 형상이 없지요.
허공은 형상이 없는데
有何相貌리이까→무슨 모양이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彼曰(피왈)→
저 분이 말하기를. 대통스님이 말하기를
汝之本性이→ 그래 그처럼 너의 본성이
猶如虛空이야→
너의 본 성품도 마치 허공과 같다. 그래서,
了無一物可見이→
마침내 한 물건도 너의 성품 속에서 볼 수 없는 그것이
是名正見이다→ 그것이 성품을 바로 본 것이다.
설명은 아주 그럴 듯해요. 그럴듯한데,
제대로 보게 하는 그런 교수법은 아닙니다.
이것이...
그런 지도는 아니지요. 이렇게 지도해 가지고는
이론적으로 지도 할지언정 제대로
본성을 스스로 보게 하는 가르침은 못되는 것을
짐작할 수가 있어요. 설명으로는 아주 그럴듯하지요.
한 물건도 너의 마음속에서 볼 수 없는 것.
그것이 너의 본성을 바로 보는 것이다.
물론 그 말에도 모순을 찾으려면 많습니다마는,
또
了無一物可知가→
마침내 한 물건도 너의 성품 속에서 알 수 없는 그것이
是名眞知다→
이것이 그대의 성품을 참으로 아는 것이다.
眞知. 참으로 아는 것이다.
無有靑黃長短하고→
성품 속에는
푸른 것도 누른 것도 긴 것도 짧은 것도 없다.
그렇지만 또 이 성품이 푸르고 누렇고
길고 짧은 것을 다 분별하지요.
분별하는 것은 또 마음에 분별할 줄 아는
靑黃長短이라는 요소가 있어서 분별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네 성품 속에는 靑黃長短이 없어. 없고
但見本源淸淨(단견본원청정)한→
다만 本源. 근본이 텅 빈. “淸淨”이라고 하는 것은
텅 비었다는 것이지요.
참으로 깨끗한 것은 텅 빈 것을 불교에서는
깨끗하다고 하기 때문에 淸淨이라는 의미는
대개 그런 뜻입니다.
本源자리가. 근본자리가 텅 비어서
覺體圓明(각체원명)한것→지각하는 그 자체. 이
“覺體” 라는 것은
知覺(지각)하는, 우리가 무언가를 감각하고 지각하는
그 자체가 뚜렷이 완전하게 밝다는 이 말이지요.
“圓明”이라는 것은요. 완전하게 밝은 것이,
卽名見性成佛(즉명견성성불)이요→
곧 이름을 見性. 성품을 보고, 또 부처가 되었다.
부처를 이룬 것이라고 하고,
亦名如來知見(역명여래지견)이다→
또 여래가 알고 보는 것이다.] ←이렇게 가르치더라는
것입니다.
대통스님이 그렇게 가르치거늘
學人이→ 지상이지요. 자기를 가리킬 때는
“공부하는 사람이다.”해서 이런 말을 해요.
학인이
雖聞此說이나→비록 이런 설명을 듣기는 들었으나,
猶未決了(유미결요)하오니→
오히려 그거 해결이 돼가지고,
뚜렷이 완전하게 알거나 그렇게 하지는 아직 못하고 있다
마음에 뭔가 석연치가 못해요. 설명은 들었는데...
듣고 보니 그럴듯하기는 한데, 시원하지가 않아요.
물 설명은 실컷 들었지마는,
한 모금도 먹지를 못했으니까요. 목은 마른데...
물에 대한 설명은 잔뜩 들어서 그럴듯하기는 한데,
한 모금도 먹지를 못했으니까 속은 답답하기 이를데없다.
이겁니다. 그것이
“猶未決了”입니다.
오히려, 해결이 돼서 풀려가지고 제대로 이해되지 못했으니,
乞和尙은→ 비옵노니 화상은,
開示하소서→ 구걸한다. 이 말입니다.
乞和尙은 비옵노니 화상께서는, 잘 열어서 보여 주십시오.
내가 그래서 당신이 있는 여기 까지 찾아오지 않았소?
그런 이야기입니다.
師曰, 彼師所說이→
저 스님이 네가 말한 대로라면. 대통스님이 말한 것이
猶存見知故(유존견지고)로→ (猶오히러 유)
이거 중요한 말입니다.
오히려 見과 知가 있다. . 왜냐하면
하나도 보지 않는 것이 참으로 보는 것이고,
하나도 알지 않는 것. 그것이 참으로 아는 것. ←
이런 표현이 있었거든요.
[但見本源淸淨한 覺體圓明이 卽名見性成佛이다]
또
[了無一物可知] 한 물건도 앎이 없는 것.
아는 것이 없는 그것이 참으로 아는 것이다.
하는 그런 형식으로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육조스님께서 거기서 허물을 집어내는 겁니다.
그 말을 가만히 들어보니까 그 스님의 설명에는
오히려 본다고 하는 것과 안다고 하는 것이 있다
이겁니다.
그러면 육조스님의 소견은 드러난 것이지요?
본다. 안다고 하는 것 까지도 떨어져야 된다는
그런 뜻입니다. 본다. 안다고 하는 것이
우리 마음에 남아있으면 그것은 아직도 흔적이고,
뭔가 찌꺼기고 때다 이겁니다.
진짜 때 없는 마음. 텅 빈 마음에는 안다느니
뭘 본다느니, 뭘 볼 것이 없다느니 알 것이 없다느니,
그것도 역시 일종의 보는 것이고 아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 가지고는 안 된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令汝未了(영여미요)니→
그대로 하여금 알지 못하게 된 까닭이다.
조금 이치로라도, “사량 분별”이라고 그래요.
우리가 사변으로 이렇게 궁리를 해서
깨달은 사람이 터득한 그런 경지를 우리가
추리를 해서, 어느 정도까지 접근하려고 하는
그런 노력을 불교에서는 “사량분별 이다.” 그래요.
“사량 분별”
생각하고 하나하나 분석해서 어디까지나
접근할 수 있는데 까지 접근해 보려고 하는 것.
그런데 그런 것으로라도 어느 정도 정확한 짐작은
할 수가 있거든요. 정확한 짐작은...
그런데
여기 “봄이 없다.”라는 것도 “봄이 없다.”고 하는
그 말에는 “보는 것이 있다.”는 그런 말입니다.
육조스님말씀은...
“앎이 없다.” “아는 것이 없다.” 라는 그 말에는
“아직도 아는 것이 남아있다.” “자취와 흔적이 남아있다.”
예를 들어서 마당을 쓰는데,
쓰레기를 쓰는데, 쓰레기는 다 잘 깨끗하게 쓸었는데,
빗자루 자국이 남아있지요. 그러면 그 빗자루 자국 어떻게 해요?
그래서
그 왜 유명한 禪詩 있지 않습니까?
[대 그림자 마당을 쓸어도 먼지하나 일지 않고,
흔적하나 남기지 않는다.] 하는...
그 다음에 달빛이 못 밑을 뚫을 정도로 그 빛이 비추지만,
물에는 하나 틈이 없어요.
달빛이 물을 뚫고 저 못 밑까지 달빛이 스며들었지만,
물에는 전혀 흔적이 없잖아요. 그 아주 많이 소개된
게송으로,
불교 책 한 둬 권만 읽어도 만날 수 있을 정도로,
그 글을 만날 수 있도록 흔하게 人口에
膾炙(회자)되는 글인데요.
달그림자. 대나무 그림자가 뜰을 쓰는데,
그것 뭐 흔적이 남을게 있습니까?
바람이 부니까 일렁일렁 하는 그 모습을
“대나무 그림자가 뜰을 쓴다.”
이렇게 표현하거든요.
선시에 맛 들여 놓으면 딴 거 못 봐요.
하도 맛이 있고 재미가 있어서...
참 묘하지 않습니까? 그 흔적이 없다는 거요.
그런 설명으로 우리가 이 내용을
어느 정도 사량 분별로. 사변으로 짐작하려면
좀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吾今示汝一偈하리오→
내가 지금 그대에게 한 게송을 너에게 보이겠다.
불교에 시 형식으로 된 글을 “게송” 이라고 그러지요.
본래 경에 있는 것인데, 경에 장문으로 설명한 것을
요약해서 다시 정리해서 정형 시 형식으로 간추려서
다시 요점 정리하는 형식을 “게송” 이라고 되어 있어요.
대개... 그것이 조사스님들의 선문에도
그대로 전해져서 흔히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不見一法存無見(불견일법존무견)하면
大似浮雲遮日面(대사부운차일면)이오→
한 법도 보지 아니해요.
저기서 아무것도 안 본다 그랬거든요.
대통스님이...
그것을 그대로 이어 받아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한 법도 보지 아니해서, 보는 것이 없다고 한 것을 보면,
보는 것이 아직도 있다. .
“한 법도 보지 않는다.” 하면
“안 보는 것은 있다.” 이 말입니다.
어떻게 보면 말장난 같은데, 상당히
육조스님 생각으로...
깨달은 사람의 생각으로는
이 이상 어떻게 표현할 길이 없어서 하는 말입니다.
“안 본다.”
하는 그 말이 뭡니까?
그 어딘가
“보고 있다.”고 하는
“본다.” 는 것이
“안 본다.”
고 하는 그 봄이 남아있는 것이지요.
그것이 마치
大似浮雲. 크게 같다. 똑 같다. 너무 같다.
이 말입니다. 大似는...
뜬구름이 태양을 가리는 것하고 너무 같다.
그렇게나 같다는 겁니다. 깨달은 사람의 입장에서는...
“아무것도 안 본다.”
하면 우리는 아, 정말 안 보이니까 ‘
그 사람 눈에 정말 아무것도 안 보이는가 보다.’
이렇게 우리가 생각할 텐데,
깨달은 사람이 보니까 당치도 않은 소리입니다.
당치도 않은 소리라고요.
안 보는 데는 그것이 너무 크게 흔적이 남아 있다.
이겁니다. 큰 흔적이 남아 있어요.
그 흔적이 어느 정도 되느냐?
구름이 태양을 가린 것 하고 너무 같아요.
그 만치 크게 흔적이 남아 있다.
그 안목이 너무 참 다르지요?
그 한 줄에서 우리가 그 안목의 차이를.
우리와 깨달은 사람의 안목의 차이를 알 수가 있습니다.
“아무것도 안 본다.”
고 하는 그 안 보는 것이 있는 것. 안 본다고 하는
그 사실이 너무나도 큰 흔적과 큰 허물을 남기게 됐다.
不知一法守空知(부지일법수공지)→
이것도 같은 뜻이지요.
한 법도. 어떤 하나의 사실도.
“하나의 사실도 알고 있지 않다.” 라는 것.
알고 있지 아니해서 허망한 앎을 지키고 있는 것.
空知를 지키고 있다. 허망한 앎을...
차라리
어떤 사물을 보고, 사물을 알든지
그렇게 해버리면 차라리 괜찮을 텐데...
“아무것도 안 본다.” 하는 그것. 또
“하나의 사실도 나는 알고 있지 않다.” 하는 그것.
그것이 얼마나 허망한 “앎” 이냐? 이것이지요.
육조스님
보기에는 그것도 너무 아는 거예요. 그것이
還如太虛生閃電(환여태허생섬전)이로다→
還如= 똑 같다. 태 허공에.
허공에 번갯불이 번쩍하는 것하고 똑같다.
태 허공에 번갯불이 번쩍하면
그냥 아주 큰 흔적을 남기는 것이지요.
그 보다 더 큰 흔적이 어디 있습니까?
최소한도 그 번갯불을 보는 사람의 주변에는
그냥 완전히 어떤 자취를 남기는 것입니다.
그래 위의 구절하고 똑 같은 내용입니다.
“본다. 안다.”
두 가지니까요. 말이 두 가지라서 그렇지
내용은 똑 같은 것입니다.
此之知見(차지지견)이→
이 “안다.”고 하는 것과 “본다.”고 하는 것이
瞥然興(별연흥)하면→
문득 일어나면, “안다.” “본다.”하는 것이
우리 마음에서. 진짜 우리 텅 빈 마음을
사량 분별이지만,
상상을 하면서, 정말 아무것도 없는 텅 빈 마음을
우리가 상상하면서, 거기에 우리가 “안다.” “본다.”
하는 것을 좀 놓아보면 조금 짐작이 가요.
이 “안다.” “본다.”하는 것이 문득 일어나면,
錯認(착인)이예요.→
잘못 아는 것이지요.
錯認= 그릇 아는 것이다. 오해다 이것이지요.
何曾解方便(하증해방편)이리요→ 잘못 아는 것이라
어찌 일찍이 방편을 알겠는가?
정말 참다운 뜻은 모른다 이겁니다.
여기 방편을 알겠는가? 방편을 방편으로 알면,
참다운 뜻을 알 수가 있는 것이지요.
말이라는 것은 아무리 미묘하더라도,
아무리 근접 했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방편입니다.
아무리 사과 맛을 잘 그려낸다 하더라도
그것은 사과는 아닙니다.
더운 날 시원한 물맛을 아무리 잘 그려낸다 하더라도
오히려 목이 더 마를 뿐이지요.
방편이라는 것은 설명이지요.
그 방편을 방편으로 알면 방편 그 너머에 있는
진실을 이해할 텐데... 그래서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잘못 아는 것이라 어찌 일찍이 방편을 알겠는가?
汝當一念自知非(여당일념자지비)하면→
이것이 중요한 구절입니다.
위에 석 줄은 다 하나마나한소리이고요.
(1.不見一法存無見(불견일법존무견)하면
大似浮雲遮日面(대사부운차일면)이오.
2.不知一法守空知(부지일법수공지)하면
還如太虛生閃電(환여태허생섬전)이로다.
3.此之知見瞥然興(차지지견별연흥)하면
何曾解方便(착인하증해방편)이리요.)
汝當一念自知非(여당일념자지비)라.
그대가 마땅히 한 생각에, 한 순간입니다. 이것은...
“잠깐” 하는 한 순간. 불교에서 가장 짧은 순간을
“一念”이라고 그래요.
一念. 보통 우리가 한 가지 생각. 두 가지 생각.
그것이 아니고, 여기서 一念은 그대가 마땅히
한 순간에 스스로 아무것도 안 보는 것이라서
“없다.” 또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기 때문에 “텅 비었다.” ←
이것이 잘못된 줄을 알면. 스스로 잘못 이라는 것을 안다면,
거기에는 큰 흔적이 있고,
앞에서
不見一法存無見(불견일법존무견).
그것이 大似浮雲遮日面(대사부운차일면). 또
不知一法(부지일법)이 守空知(수공지).
還如太虛(환여태허)에 生閃電(생섬전). ←
이런 큰 허물. 이렇게 잘못된 허물을
그대가 만약에 안다면, ‘아! 이건 잘못 아는 거구나.
내가 참으로 잘못 알았구나.’ 하는 사실을 안다면,
自己靈光(자기영광)이
常顯現(상현현)하리라→
이 말이 제일 중요하지요.
自己靈光이 常顯現.
진짜 자기의 신령스런 광명!
본성의 광명!
한 마음의 저 깊은 한 마음의 신령스런 광명이 항상
顯現하리라. 늘 환히 드러나있다.
이것이 사실 환히 드러나 있어요.
우리가 지금 사실 다 自己靈光이 常顯現 하고 있어요.
모든 사람들이 불교를 알든 모르든,
불교를 칭찬하는 사람이든 불교를 비방하는 사람이든
어떤 사람이든 간에...
自己靈光이 常顯現 하고 있는데,
이것을 의식하고 있는 사람이 없고,
또 마음공부 하는 사람들은 이것을 알려고
상당히 관심을 기울인다 하더라도,
대개 이 분. 지상스님같이 이런 상태에 까지
겨우 이르고 마는 것이지요.
이 상태에 겨우 이르고 마는 것입니다.
그럼 “아무것도 안 본다.”
“안 본다.”고 하고, 또
“아무것도 앎이 없다.”
“내가 어떤 하나의 사실도 아는 것이 없다.”
고 하는 거기에 아직도 덜 떨어진,
떨어지다가 조금 남은 정도의 덜 떨어진 것이 아니라,
너무 큰 장애가 아직도 남아있다고 하는 사실.
상당히 공부가 된 입장이지요.
다시 말해서
마당에 쓰레기가 잔뜩 있는데
빗자루의 흔적만 남기고,
쓰레기는 다 치워버린 그런 상태라고나 할까요?
쓰레기는 다 치웠는데 빗자루의 흔적이 있어요.
그런 상태입니다.
그것마저 떨어져야, 우리의 마음에 그것마저...
“나는 앎이 없다. 나는 보는 것이 없다.
나는 무심이다. 무념이다. 뭐 일념이다.”
라는 말이 참 좋은 말이지요.
상당한 경지에 이른 말입니다.
“무념이다. 무심이다. 일념이다.
마음 비웠다.”
그것마저 떨어져야 제대로 되는 것이지요.
그러면
自己靈光이 常顯現입니다.
자기의 신령스런 광명이 항상 환히 나타나있다.
이 마지막 두 줄이(汝當一念自知非(여당일념자지비)라.
自己靈光(자기영광)이 常顯現(상현현).)
상당히 중요합니다.
사실 이 自己靈光이
항상 신령스런 빛이 항상 顯現하게 드러나 있지 아니하면요.
우리가 말할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습니다.
추운지 더운지도 모릅니다.
추운지 더운지 알고 말할 줄 알고, 들을 줄 아는
그 능력이 사실은 “自己靈光” 이예요.
“自己靈光”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그러나
우리는 온갖 우리 나름의 어떤 線(선)과 기준과 틀.
자기의 관습과 자기의 어떤 지식과
자기의 살아온 경험과 이런 것들이 많이 축적이 돼서,
그 바탕 위에서 우리가 판단하고 보고 듣고 안다고요.
그러나
그것은 제대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제대로 아는 것이 아니라고요.
알고는 있지만...
그러니
제가 뭐라고 이야기 하더라도
여러분의 경험에 따라서 전부 받아들이는 것이 달라요.
사람마다 다 다르다고요. 지금까지 들은 이야기를
돌아가서 딴 사람한테 하고 또 그 사람이 또 하고 또 하고,
그래서
다섯 사람만 지나가 버리면 무슨 소리가 나올지 모르지요.
ㅎㅎㅎㅎㅎㅎㅎㅎ
그래가지고 나중에 다섯 번째 사람들끼리 모여가지고
한번 이야기 해보며는... 경전에 그런 말이 있어요.
경전에...
TV에서 무슨 오락 프로에만 나와 있는 것이 아니고
경에 그런 말이 있어요. 전해지고. 전해지고 그래서
법화경에 보면 50번 째 사람까지 전하고 마는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또 우유 이야기도 있고요.
우유가 城(성) 안에 우유가 아니라야 진짜다.
목장은 성 밖에 있잖아요? 거기서 짠 우유가 진짜다.
성 안에만 들어오면
한 사람 손 거치고, 두 사람 손 거치고, 세 사람 손 거치고,
도매에서 소매로 소매에서 중간으로. 중간으로. 중간으로
이렇게 해서 구멍가게에까지 오면 우유가 물이 얼마나
타 져서 몇 %가 들어있는지 모른다는 겁니다.
이것은 옛날 우유지요? 지금은 공장에서 바로 나오니까
동일하지마는, 옛날 우유는 여러 사람 손 거칠 때 마다
물이 타 지기 때문에, 그 우유 한 컵에 정말로 진짜 우유가
몇 %나 타져 있는지 모른다는 경전에도 그런 말이 있어요.
그렇듯이
우리가 “自己靈光”으로서
우리의 마음의 신령스런 광명이지요.
이 마음이야말로 정말 신령스런 광명입니다.
이것으로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고,
모든 것을 느끼고 알고 보고 듣고 감지하고
판단하고, 또 멀리 있는 집도 용케 잘 찾아가고
직장도 잘 찾아다니고,
그런 능력이 우리들에게 다 있긴 있는데...
그러나
거기에는 정말 툭 트이게 깨달은 사람의 어떤
그 “自己靈光”과 또 우리 보통 사람의
“自己靈光”과는 또 엄청난 차이가 있겠지요.
거기에. 이
육조스님의 게송에 요점이 들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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