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 답사 기행문
1. 온양 민속박물관 소장의 안산 유물
(충남 아산시 권곡동 403-1)
일년 중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삼복더위 중에서도 가운데 토막인 뻘뻘 끓는 중복을 이틀 앞둔 2005년 7월23일 답사팀 일행 120명은 버스 3대에 나누어 타고 안산 문화원 앞에서 출발 한 것은 아침 9시 20분이었다. 마침 모든 학교가 방학에 들어가 어린 학생들이 엄마를 따라 여행길에 들어 선 것이 이채로웠다.
답사여행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나이기에 내 나름대로 여유 있게 떠나기 나흘 전에 입금을 시켜 신청하였건만 벌써 마감이 끝났다고 한다. 담당자인 안산문화원 김은미 총무 간사에게 전화통을 붙들고 사정사정하여 마침 취소하는 사람이 한 사람이 있어 행운의 답사 길에 참여할 수가 있었다. 이러한 경우를 아마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하나 부다.
서해안 고속도로가 안산에 인접 해 있어 온양까지는 1시간 여 만에 도착 할 수가 있어 옆에 앉은 길동무와 사귈 시간이 너무 짧아 아쉬움을 남겼다.
차량 20여대를 세워 둘 수 있는 주차장 앞에 담을 친 정문은 주황색의 삼문(三門)으로 짜여져 있었으며 가운데 문은 두 짝으로 되었고 좌우 양쪽 문은 한 짝씩 달려 있었다. 수직으로 온양민속박물관(溫陽民俗博物館)이라는 한문으로 쓴 간판이 걸려 있었으며 수평으로 된 현판은 역시 한문으로 설화문(雪華門)이라고 씌어 있었다. 정문 앞에는 대형 문신석 2개가 세워져 있었으며 또한 정문 옆에는 귀여운 동자석(童子石)이 양편에 정문을 장식하고 있었다.
입장 수속(입장료 3000원)을 마친 후 정문을 들어서니 끝이 보이지 않는 숲 속의 장원(莊園)이었다. 박물관 본관 건물도 숲으로 가려져 지붕만 보일 정도였으며 전지(剪枝)로 잘 가꾸어진 관상수에, 길도 산책로(散策路)로 차분하고 훤하게 닦아져 한국 제일의 사립 박물관이라는 면모를 보여주었다. 곧바로 박물관 본관의 뒤쪽의 담장에 위치한 안산의 유물인 가묘(假墓 .박물관에서 칭하는 구역)에 이르러 안산 문화원 이현우 사무국장의 해설이 있었다. 이곳 온양의 문화 해설사를 의뢰하여 설명을 부탁하였으나 인원이 많아 해설을 할 수없다는 가 당치않은 이유를 내 세운 것으로 보아 아산시에는 이 방대한 박물관에 보관되어있는 유물에 대한 설명을 할 수 있는 해설자다운 인물이 없는 것으로 나는 간주하였다. 안산문화원 이현우국장은 안산 문화 해설사인 강명희씨를 소개하여 의문이 나는 점은 질문을 하라고 앞에 나오게 하여 소개를 시켜 주었으나, 답사객 거의는 자기 나름대로 보고 생각하고 판단하여 정립하는 수밖에 없었다. 강명희 해설사의 시댁에 한 분이 이 박물관 관장으로 근무한 적이있어 이 박물관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어 나는 나름대로 답사에 많은 도움을 받았다.
이곳 가묘 구역에는 1977년 반월공업단지 조성과 호주의 ‘캔버라’라는 도시의 모델로 만들려는 신도시 건설 발표 이후로 1979년 안산시 상록구 일동 구룡골(안골. 현재 안산1대학 동리)에 있던 안동 김씨의 묘의 발굴을 온양 박물관이 후손들과 계약에 의하여 이루어져 유골은 후손들이 화장하고 모든 출토품과 묘 주위의 석물을 온양박물관측이 이곳에 옮겨 놓은 것으로서 천여 평되는 야외 전시 묘역에는 이씨조선 후기 세도가로서 이조판서를 지낸 김수근의 비석과 그의 두 아들 모두가 영의정을 지낸 김병학과 김병국의 비석과, 김병국의 양자 김정규(대사헌), 또한 김정규의 양자 김용진(내무부 지방 국장)의 묘와 김병국의 부실인 김해 허씨, 김용진의 자부(子婦)여흥 민씨 등의 묘를 포함한 8기의 묘를 하나의 큰 봉분의 가묘로 만들어 놓았다.
영의정을 지낸 김병국의 비석에는 정실(正室)한산 이씨(韓山 李氏)외에 부실(副室)풍천 임씨(豊川 任氏)와 파평 윤씨(坡平 尹氏)를 합장 하였고 다른 자리에 김해 허씨(金海 許氏)의 묘를 썼으니 첩실(妾室)을 세 사람이나 거느리고 살았다. 비록 네 사람의 부인에게서 아들이 없어 양자로서 대를 이어갔으나 재산과 권력이 있어야만 이 할 수 있는 그 시대의 사회의 한 단면을 볼 수 있었다. 안동 김씨들이 살던 안골은 원래 단성 이씨(丹城 李氏)들의 집성촌(集姓村)이었으나 안동 김씨들이 빼앗은 땅으로서 두 씨족 간에는 처절한 싸움이 계속되어 단성 이씨로서는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그 당시 세도 가문에 대항하여 승산이 없자 단성 이씨들이 아편을 은밀히 안동 김씨 가문에 침투시켜 씨를 말려 버리려는 일화도 전하여진다. 안동 김씨 측에서는 족보(族譜)도 없는 종족이 이원발(李元發)을 시조로 삼아 겨우 족보를 만들어 호조판서를 지낸 7세손인 이영보(李永寶)가 경남 거창군 단성면에 거주하면서 본관을 단성으로 정한 보잘것없는 종족이라고 깔보자 재산을 탈취 당하고 멸시를 받으면서까지 살수 없어 결국에는 대부도(大阜島)로 쫓겨 가는 종족 간의 싸움이 있던 곳이 안골이었다고 한다.
가묘 구역으로 들어가는 길 양쪽에는 가이스가로 조경이 묘원답게 만들어졌으며 헛장(虛葬)인 봉분을 향하여 망부석(望夫石) 문신석(文臣石) 양석(羊石)이 차례로 한 쌍씩 마주보며 배열되어 있었으며 여기저기 세워진 비석 앞에는 상석이 놓여져 있었다. 안산에서 가지고 온 나머지 문신석과 망부석 양석들은 야외 곳곳마다 조경물로 세워진 것 같다. 가묘 옆에는 상여(喪輿)집을 지어 관(棺)과 함께 전시 하여 밖에서만 볼 수 있게 하였는데 내가 어린시절 동리에서 멀리 떨어진 산비탈 기슭의 우중충하고 아무렇게나 지어진 상여 집을 지날 때에는 그렇게도 무서웠던 기억이 났다. 1991년10월25일에는 온양박물관 개관 13주년을 맞아 이 안산에서 가져 온 석물을 가지고 ‘조선시대의 묘지석 특별전시회’를 가진 적도 있었다.
야외 전시장에는 곳곳 어귀마다 문신석 망부석 양석은 물론 부도(浮屠)까지 조경으로서 미화 시켜 놓았으며 하다못해 돌 먹이통도 길 가에 장식품으로 놓여져 있었다.
이 온양민속박물관은 대지 25.000평에 3층 본관 1900평의 전시실에 20.000여점의 유물을 갖춘 도서 출판사인 계몽문화재단이 설립한 박물관으로서 본관은 조형미 있는 건축물에 어느 누구나 편안함을 안기는 숲 속의 별장같이 느껴졌다.
현관에 들어서니 황색 돛을 단 돛단배인 통구민(FISHING BOAT)이 차지하고 있었으며 왼편으로 들어가는 1층 전시실에는 한국인의 의식주(衣食住)에 대한 것들 중 태어나 한 살이 되었을 때 받는 돌상으로부터 시작하여 전시 되었으며, 혼례인 대례식 전시품 앞에서는 내가 장가들 때 초례 식장에서 푸드덕 튀는 닭만 보았지 대나무와 사철나무가 탁자에 올려 있는 줄도 몰랐었다. 또한 평상을 보니 나의 외갓집 외할아버지께서 앉아 계시던 모습을 상상해 보면서 옛날 생각이 새로워졌다. 나막신(木履)과 미투리 전시물 앞에서는 함께 답사 온 70대 할머니 세 분이 미투리는 왕골로 신을 짜는데 여름 신발로서는 그렇게 시원할 수 없다는 말도 들었다. 전시품들은 익히 보아 온 것도 있었지만 보지 못한 것도 더러 있었다. 1989년 10월25일 개관 11주년을 맞아 안산 안골에서 파낸 안동김씨분묘출토 복식 특별전시회를 가진 적도 있었다. 이 안동 김씨 분묘 8기에서 나온 부장품이 30여개나 되었다고 한다.
2층의 제2전시실에는 생업(生業)이란 제목으로 사람이 사는데 종사하는 기구들 중 농촌에서 태어나 자란 나에게는 호롱기 풍구 절구 물레 베틀 등은 많이 보아 온 물건들이었지만 어촌의 고기잡이 기구와 그물이며 산촌의 사냥 기구들은 처음으로 보는 것이었으며 그 중에서도 뗏마(떼배, RAFT BOAT)를 인상 깊게 보았다. 3층의 제3전시실에는 민속공예와 민간신앙과 오락을 전시하였는데 민속공예품인 가구와 나무로 만든 목도장인 많은 낙관을 어디에서 수집하였는지 놀라웠으며 토속신앙인 부적(符籍)을 보면서 아직까지도 우리의 생활에 깊숙이 박혀 있는 것은 기독교와 불교만이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일깨워 주었다. 3층의 쉼터에는 식탁 2개에 의자를 8개를 비치하여 훤하게 트인 현관을 내려다 볼 수 있어서 시원하였으며 자판기 4대가 나란히 정렬되어 있어 편안한 휴식을 잠시나마 가질 수 있었다. 3층에서 관람하고 나오면 곧바로 1층 현관으로 내려가는 나무 계단으로 설계되어 본관 인테리어 내장에도 많은 신경을 써 준 설립자인 김원대(金源大)씨에게 칭찬을 보내고 싶다. 박물관 주차장 바로 옆에는 고바우 추어탕이라는 간판의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하였다. 식사를 마치고 떠나기 전 사조관광의 힌범택 사장은 우리 1호차의 인원점검을 빈 틈없이 챙기는 모습이 든든하였다. 끝
2. 이순신 장군 묘
(충남 아산시 응봉면 삼거리)
박정희 대통령이 이순신 장군을 성웅(聖雄)으로 받들기 위하여 아산의 현충사를 성역화 하고나서 한번 다녀온 적이 있었는데 나는 이순신 장군 묘도 현충사에 함께 있는 줄로 알았으나 오늘 안산문화원에서 답사 길을 안내받고서야 묘가 따로 있다는 것을 비로소 알았다. 온양시내를 빠져나와 45번 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둔포를 향하여 가다보면 응봉면 소재지 못 미쳐 영인으로 가는628번 도로로 들어서면 곧 바로 이순신 장군 묘지안내판이 보였다. 넓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정문을 들어서니 왼편에는 제기고(祭器庫)가 있고 바른편에는 관리사무소가 있었으며 일주문을 지나 150여m를 지나니 안내판과 신도비가 있었는데 안내판 바로 옆에는 손으로 읽을 수 있는 높이의 점자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많은 유적지를 다녀 보았지만 맹인들을 위하여 점자로 된 안내판은 처음 접하였다. 높게 자리 잡은 묘소를 중심으로 양쪽으로 보도가 있었으며 가운데에는 훤하게 트인 잔디로 조성되어 있어 가슴이 시원하였다. 바른편 길로 가다보면 안내판과 묘소의 중간지점에 정조대왕의 어제비(御製碑)인 또 하나의 신도비가 비각 안에 세워졌으며 1050여자의 해서체(楷書體)로 새겨있었다. 비각 옆에는 이 신도비를 설명한 한글 동판이 1979년 12월 임창수가 짓고 이상복의 글씨로서 돌 받침대에 고정시켜 놓여있었다. 묘소로 가는 보도가 끝나는 지점에서는 양쪽에서 층층대인 돌계단으로 묘역에 올라 갈수가 있었다. 석물로서는 망부석과 동자석과 혼묘석에 상석과 차일석이 있었으며 산신석은 묘지 개성에서 10여m 위로 떨어져 있는 용(龍)날 맥에 묻혀 있었다. 비석에는 부인인 상주방씨(尙州方氏)와 합장(合葬)하였다고 적혀있었다. 뒷산은 투구봉이라 하였으며 앞에는 문덕산이 길게 병풍처럼 쳐져있는 것이 보기 좋았고 좌우 청룡백호도 그런대로 무난하였다. 묘역관리는 현충사관리소에서 함께 하고 있었다.
이순신의 죽음은 왜군의 총에 맞았다는 의도적 자살설과 종전 후 자취를 감추었다는 은둔설이 있는데 하여간 선조(宣祖)로서는 이순신을 경계하지 않을수 없었다. 전쟁영웅으로 부상한 이순신을 비하하기위하여 왜군을 평정한 것은 명나라군대 덕분이며 해전에서는 원균이, 권율의 행주대첩으로 나라를 구하였다고 선전하였다. 이순신은 중국의 풍수사 두사충(杜師忠)과도 교류가 깊어 봉정두복야(奉呈杜僕射)라는 두사충에게 보내는 시가 지금도 전해지듯이 이순신이 죽었을 때 아산에까지 와서 삼정리 묏자리를 잡아주기 까지 하여 이순신의 7대손인 이인수가 쓴 신도비문에서는 고마움을 언급하였다. 그런데 응봉면 삼정리에 묻힌지 16년 만에 그곳에서 1km밖에 떨어지지 않은 현재의 응봉면 삼거리로 이장 하였는데 자손들도 이에 대한 억측은 들었으나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삼정리에는 이순신의 손자가 묻혀있다고 한다. 명사(名師)인 두사충이 잡아준 그 자리가 명당이기에 후손들의 발복을 두려워하여 왕실에서 이장을 강요하지 않았을까?
관리사무소 앞에 비치한 방명록에 안산문화원 이현우외 119명이라고 싸인펜으로 적고 나오면서 답사는 끝났다.
하산 하고나니 문화원에서 준비한 아이스크림이 땀을 싹 땀구멍으로 들어 가게 한다. 이 삼복중에도 더운 줄도 모르고 재미있게 답사 할 수 있는 것은 문화원 사람들의 프로(pro)에서 나온 연금술(鍊金術)이라고 느껴졌다. 박물관이 그렇고 왕릉 보다 더 못한 한 장수의 묘가 그럴 진데 이렇게 의미 깊은 테마여행이 될 줄이야.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