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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론 / 기독교의 중심 교리 7영리[4]
종말[終末]이란 시간이나 사건의 마지막을 의미하는데 개인적으로는 인생의 끝이요, 우주적 으로는 세상이 끝나는 시간이요, 구속사적으로는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는 때[마 24~25장]이다.
구약시대의 종말관은 대체적으로 이중적 구조로서 심판과 징계의 날인 동시에[사 11:11~16, 욜 3:16~21] 하나님의 구원과 회복의 날이다[사 29:6, 35:4].
이에 비해 신약 시대의 종말관은 철저히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언급된다. 즉 구약 선지자들이 예언한 메시야 예수께서 오셨다는 그 자체가 종말적 사건이요, 마지막 때의 증거가 된다[사 26:19, 렘 33:15~16, 요 5:25].
따라서 종말론이란 세계와 인류에게 끝이 있음을 전제로 그들 운명의 마지막에 관한 문제를 다룬 교리를 말한다.
그리스도의 재림과 인류의 부활과 최후의 심판과 새 하늘 새 땅 등으로 이어지는 종말의 진행과정을 밝히는 종말론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눈다. 하나는 죽음과 부활, 영원한 심판과 영원한 생명 같은 개인적 종말론을 다룬 것이요, 또 하나는 주님의 재림의 날에 온 우주의 기존 질서가 와해되고, 천년왕국이 건설되고, 최후 심판이 있고, 변화된 새 세계와 최후의 상태와 같은 일반적 종말론을 다룬 것이다.
구약시대의 종말론은 처음에는 죽음 후의 음부의 세계와 민족적 부활에 대한 소망으로 정착되었는데 마침내 여호와의 날에 대한 사상으로 발전되었고[암5:18~20], 이것이 바벨론의 포로기와 신구약 중간기를 거치면서 메시야 대망 사상으로 발전하게 된다[단7:13]. 그리고 신약시대에는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구약성경이 예언한 바로 그 메시야임을 확인하고 그의 초림을 종말의 시작으로 보았고 그의 재림을 종말의 완성으로 보았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 이후 예수님의 재림이 지연되자 초대 교회는 종말을 하나님의 시간 중에 있는 먼 미래로 바라보면서 종말을 세계와 역사의 마지막인 완성으로 이해하려 하였다. 그 이후 계몽주의 시대를 거쳐 합리주의적 사고로서 신앙체계를 바라보게 된 18~19세기 이후부터 종말론은 하나님의 구속역사의 개념에서가 아니라 세속화된 종말론으로 변화가 되어 단지 이 세계의 문화와 사상적인 완성으로 종말을 이해하게 되었다.
이것은 일종의 역사철학으로 종말론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이제 종말의 진행 과정과 종말을 알리는 징조를 살펴보자.
요약하면 종말의 진행과정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고, 죽은 자들이 부활되고, 그리고 최후의 심판이 있고, 세상은 끝나고, 하나님 나라의 완성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종말의 징조는 전쟁이요, 지진이요, 기근이요, 무서운 환란이요, 적그리스도와 불법한 자들의 출현이요, 배교요, 온 세상에 복음이 전파됨 등을 들 수 있다.
먼저 육체적 죽음이란 무엇인가? 살펴보자.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사람은 태어났다가 한 번은 모두가 죽어야 한다. 도대체 죽음이란 무엇인가? [전 3:19, 욥 34:15, 시 190:3].
우리 인생의 마지막 성취는 죽음이다.
하루하루 떠날 시각이 가까이 왔음을 우리는 느낀다.
그 이별의 날은 인생의 막을 내린다.
서러워도 집에 머물 수 없다. 집은 벌써 내 집이 될 수 없으니까.
나그네 같은 우리 인생은 괴롭고 서러워도 정녕 가야되는 가슴 두근거리는 떠날 시간이로다.
아! 이 죽음은 죄 값이다.
이 엄정한 공의 앞에 모든 인생은 죽었고, 살아있는 모든 인생도 반드시 죽어야 한다.
죽은 자는 모두가 돌아올 수 없다. 죽음에는 연습이 없다.
그러므로 세상 모든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사람은 죽음을 잊고 싶어도 잊을 수가 없고 어김없이 죽음이 찾아온다.
아!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왔는가? 그리고 나는 어디로 가는가?
인생에게 지혜가 있어서 이것을 깨달았으면 자기들의 종말을 분별하였으리라[신 32:29].
인생은 반드시 자기의 종말을 알아야 한다.
사람은 자기의 종말과 사후의 내세관이 엉클어지거나 흐리지 않고 똑똑하고 분명해야지 삶의 가치와 의욕을 가지게 된다.
우리는 앞에서 기독교의 중심 교리 6가지를 배웠다.
왜? 무엇 때문에 배우고 수고하였나? 그것은 7번째 종말론에서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죽음 저편에 있는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리며 영원히 살고자 함이다.
그러기에 성도는 죽음이 두렵지 않다.
슬프지 않다. 결코 허무하지 않다.
종말론을 통하여 웅장하고 위엄 있고 엄숙하며 기쁨과 즐거움의 영생을 맛보는 것이다.
오! 영화롭고 아름답고 눈부신 저 천국본향 에서 주와 함께 영원히 살리로다.
성도들아 항상 기뻐하며 주님 찬양하세.
성도의 죽음은 천국 가는 길의 디딤돌이요, 발판이다. 죽어야 부활이 있는 것이다.
성도는 가족과 함께 잠시 타국에 머물다가 고난을 감수하고 사명을 마친 후 그들의 본국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죽음을 돌아가는 것이라 했다[왕하 22:20, 수 23:14, 고후 5:8].
성도의 죽음은 하늘의 영원한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성도가 죽는 것은 형벌이나 저주가 아니요, 완전한 성화의 과정으로 생의 완성이다.
생을 정리하는 죽음 앞에서 성도는 보다 더욱 진실하고 거룩한 모습을 갖추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죽음을 놓고 떠나가는 세상 편에 서서 생각하지 말고 영접하는 천국 편에서 생각해야 할 것이다.
본향에서 영생의 행복을 가지고 기다리는 아버지의 심정에 바라보자[눅 15:11~32 / 탕자의 비유를 보라].
유대인은 세계 어느 민족 중에서도 장례를 최고의 경사로 맞이한다.
그런즉 우리도 돌이나 생일잔치 집에 가는 것 보다 장례식을 자주 찾아가야 할 것이다.
그것이 축복받는 비결의 하나이다.
죽음이란 생물학적으로는 생명을 잃고 숨이 끊어져서 물리적인 활동이 멈추고 더 이상 반응하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성경은 죽음이 단순히 자연스런 생명의 소멸이 아니라 죄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형벌이요[창 2:17, 3:19, 롬 6:23], 그리고 그 죽음은 어느 누구도 빗겨갈수 없는 필연적인 것이라 말한다[삼하 14:14, 히 9:27].
아무튼 생사화복의 권세는 오직 하나님께 있는 것이다[신 32:39, 삼상 2:6~7].
인생에게 죽음이 닥치면 호흡이 멈추고 생리적 기능이 정지되고 죽은 자의 영혼은 몸을 떠나서[전 12:5, 7, 행 5:10, 고후 5:8, 빌 1:21~24], 낙원[눅16:22,23:43] 또는 음부[눅16:23, 벧전3:19]에 거하게 된다.
그리고 육신은 흙으로 돌아간다[창 3:19, 시 104:29].
그러나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모든 인생이 육체를 입고 부활한다[마 22:31, 행17:32, 고전15:12~52].
성경에서는 죽음에 대하여 잠을 자거나 쉬는 것으로, 또는 풀이 마르고 꽃이 시드는 것으로 묘사한다.
그리고 거듭나지 못한 사람, 향락을 좋아하고 그릇된 행실과 타락한 교회, 또 죄와 율법과 세상에 속하여 자유한자를 죽었다고 표현한다.
성경은 단순히 육체적 죽음만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는 영적 죽음을 경고하고 있다.
아담은 그의 범죄로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되었고[창 3:22~24], 그의 후손인 모든 인생이 사망의 권세아래 놓이게 되었다[롬 5:12, 고전 15:22]. 따라서 모든 인생은 전적으로 부패하여 영적인 진리를 분별하거나 영적인 선을 행할 능력을 완전히 상실한 영적인 죽음을 맞게 된 것이다[창 6:3, 시 14:2~3, 렘 17:9~10, 요 3:36, 롬 3:10~12].
이 영적 죽음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부활이요 생명의 주인이신 그리스도이시다[요 5:24, 14:6, 고전 15:53~57].
하나님을 끝까지 거부한 인생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서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피할 수 없게 된다[마 25:46, 살후1:9, 벧 2:12].
그는 영원히 예비된 캄캄한 흑암에 처해질 것이요, 꺼지지 않는 불이 있는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그 역시 부활할 것이지만 그것은 다만 심판의 부활일 뿐이다.
그는 둘째 사망을 당하여 불 못에 던져질 것이다[계 20:10, 15].
이와 같은 죽음은 저절로 오는 자연적 운명이 아니라 하나님께 지은 죄의 결과로 형벌이요, 하나님의 진노요[시 90:7, 11], 심판이요, 정죄요[롬 5:16], 저주[갈 3:13]의 표현이다.
여기서 성도의 생애는 크게 3가지로 구별하여 볼 수 있다.
첫째는 사람의 출생부터 죽음까지의 인생이요, 둘째는 죽음에서 부활까지의 중간상태요, 셋째는 부활 후 영생의 천국생활이다.
첫 번째는 앞에서 밝혀 말씀드렸고, 이제 두 번째 것 죽음에서 부활까지의 중간상태를 살펴보자.
인간의 육체는 죽은 후에 흙으로 돌아가서 썩어진다.
그러나 결코 죽거나 잠들지 않는 영혼은 불멸의 본질을 가지고 있음으로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즉시 돌아간다.
의인의 영혼은 죽을 때에 거룩함으로 완전하게 되어 즉시 영광의 세계 지극히 높은 천국으로 들어가게 되며 거기서 영광 가운데 계신 하나님의 얼굴을 뵈오며 그의 육체는 부활 때 까지 무덤에서 쉬면서 육체의 완전한 구속을 기다린다.
그러나 악인 영혼은 그때에 지옥에 던져지고 거기서 고통과 어둠속에 지내며 최후의 심판을 위해 보류되어 있다.
이처럼 육체로부터 분리된 영혼은 천국과 지옥 밖에는 가는 곳이 어떤 곳도 없다.
의인이든 악인이든 막론하고 인간의 육체가 본래 흙이므로 흙으로 돌아가서 티끌로 흩어져 버리는 것이다[창 3:19].
우리는 이것을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부활할 때까지 각인이 각자의 무덤에서 쉬고 있는 상태”라고 정의 한다.
예수님께서도 죽으신 후 사흘간 무덤에 계셨던 것을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다.
죽음은 부활의 발판이다.
지금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영혼의 거듭남이지 육체가 완전히 거듭나거나 변화된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완전히 성화된 부활의 몸이 아니라는 말이다.
성도의 육체는 여전히 죄의 성품과 허물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고, 점점 늙고 병들고 쇠약해 가고 있음은 어찌할 수 없는 사실인 것이다. 이 같은 우리의 불완전한 육신이 주님의 부활체와 똑같이 변화되려면 부활의 주가 되시는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가능하다.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은 사망의 권세를 진멸하고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여 성도의 구원을 완성시키는 순간이다.
예수님의 재림과 동시에 성도의 육체는 무덤에서 나와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고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는다[고전 15:51~58].
무덤에서 나온 육체가 천국에 있는 영혼과 결합되어 영광스러운 완전 부활의 몸을 얻어 천국에서 영원복락누리며 살게 된다. 이것을 영화라고 한다.
이 때에 살아있는 성도는 죽음 없이 그대로 부활이 된다.
그러므로 흙으로 돌아간 육체는 주님이 재림할 때까지의 중간 상태가 잠시 기다리는 대기상태로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영혼은 어찌되는가?
성경은 성도의 영혼이 육신과 분리된 후 즉시 그리스도 앞으로 간다고 가르친다[고후 5:8, 빌 1:23, 계 23:43].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
거지 나사로는 죽어 아브라함의 품, 곧 천국에 들어갔다고 했고[눅 16:19~31],
사도 바울은 환상 중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갔고, 그곳을 낙원이라 언급했는데 역시 천국을 일컫는 표현이다[고후 12:1~9].
이와 같이 성도의 영혼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 모든 환난과 고통을 그치고 평안한 안식을 취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단순히 잠자는 무감각의 상태가 아니라, 거기에는 분명히 의식이 있고 생활 활동이 있음은 당연하다.
안식이란 무동작이 아니라 육체 고통이 없는 행복한 삶의 상태의 자유로운 활동을 말한다.
그리고 불신자의 육체는 죽어서 흙이 되고 그 영혼은 지옥에 떨어진다[시 9:17, 눅 16:23, 벧후 2:9, 계 14:11, 마 13:41, 42].
지옥은 다른 말로 음부[hell]라고 하는데 히브리말로는 스올이요, 헬라말로는 하데스라고 한다. 지옥은 사람이 상상도 할 수 없는 처절하고 비통한 형벌의 장소로서 영원한 유황불 못으로 묘사하고 있다[눅 16:23이하, 계 19:20].
어떤 사람은 죽은 후에 육체가 없는 영혼만의 존재는 불안하지 않는가? 의심을 한다.
그러나 천사를 생각하여 보자.
천사는 영물이면서 천국에서 전혀 불편한 생활을 하고 있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오히려 천사는 최고의 행복한 생활 때문에 교만하여 자기의 위치를 떠남으로 하나님의 징계로 지옥에 떨어지지 아니했던가! 성도에게 수종하는 천사의 생활도 이러한데 성도의 생활이야 무슨 부족함이 있으랴!
천국의 생활은 영혼 중심의 생활이 되어 육신은 영혼의 도구에 불과하다.
지나친 추상은 신앙을 깨뜨리고 자기 혼란에 빠지게 될 뿐이다.
오직 굳센 믿음 안에서 소망가운데 겸손히 말씀 앞에 아멘 할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전혀 몰랐던 먼 조상들의 구원은 어떻게 되는가? 온갖 생각을 다하고 있다.
로마 카톨릭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는 조상들의 구원과 함께 유아들의 구원을 위하여 천국과 지옥의 중간 장소라는 연옥과 선조림보, 유아림보를 생각해 냈다. 이것은 예수를 알지 못하고 죽은 자들과 신자들 중에 세례를 안 받거나 믿음이 약한 자들이 바로 천국에 못 들어감으로 그들이 일단 시련의 장소에 들어가서 그 영혼을 정화시켜서 천국에 들어가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전술한 중간상태에 대한 오해했거나 낙원과 음부를 천국과 지옥의 중간부분으로 크게 착각했기 때문이다.
※ 단테의 신곡에 보면 지옥은 9단계가 있는데 맨 아래 제9옥은 사탄이 있는 최고로 무서운 곳이요, 맨 위 1옥은 천국[연옥]도 아니고 지옥도 아닌 림보라고 하는 음침한 골짜기가 있다고 한다[단테의 신곡을 통하여 어떤 면에서 우리들에게 충격을 준다. 일독을 권하는 바이다.].
그리고 연옥[천국]은 7단계로 되어 있는데 맨 위가 바로 낙원이라, 천국에 바로 가까이 있다고 한다. 또 그밖에도 천국은 10단계가 있다는 등 별 소리 다하고 있는데 일고[一考]의 가치도 없다.
그리고 성경은 죽은 자를 위하여 기도할 수도 없고, 또한 산자가 죽은 자의 처소 앞에서 어떤 영향력도 구사할 수 없음을
단언하고 있다[신 26:14, 레 19:28].
살아있는 자손들이 죽은 자들을 위하여, 또 조상들을 위하여 헌금함으로 면죄부를 행하였던 거짓된 조작들을 단호히 멸할 것이다. 지금도 천주교는 성당에서 조상을 위한 헌금봉투가 있어 각종 조상들의 이름을 쓰는 난까지 인쇄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참으로 기가 막힐 일이다. 죽은 자를 위하여 성물을 쓰지 아니하였고 오직 주의 말씀을 청종하여 주의 명령대로 행하였으며[신 26:14], 또 죽은 자를 위하여 너희는 살을 베지 말며 몸에 무늬를 놓지 말라 하였다[레 19:28].
돈으로 죽은 자의 영혼을 구원하지 못한다[눅 12:16~21, 눅 16:27~31].
그러므로 조상의 제사행위는 물론 추도예배라는 것도 실상은 성경적인 표현이라 볼 수 없다.
“죽은 자는 죽은 자로 장사하게하고 너는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눅 9:60].
우리는 어떤 경우라도 죽은 자에 대한 살아있는 자의 어떠한 노력도 부당하며, 명복을 빈다는 말도 엄히 말해서 사용할 수 없다. 하나님이 분리해 놓으신 천국과 지옥사이의 큰 구렁[간격]에 왜 사람들은 어리석게 사다리를 놓으려 하는가? 이제 그리스도의 재림을 살펴보자. 예수께서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탄생하신 화육강생
[化肉降生]은 그리스도의 초림이요, 종말의 날에 장차 세상을 심판하러 오실 것은 그리스도의 재림이라고 한다[마 24:30, 요 14:3, 계 22:20].
재림의 약속이 약 320회 언급된다.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0].
예수님 재림전의 세상에는 중대한 사건들이 발생한다[마 24:30].
이 천국복음이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모든 민족에게 증거 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 24:14, 롬 6:25, 계 6:11].
그리고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롬 11:25~29].
온 이스라엘이란 구약의 언약된[선택된] 영적무리들을 말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언약으로 사랑을 입은 선택받은 민족인 것만은 확실하다.
주님의 재림 전까지 수많은 언약의 백성들이 불신앙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믿게 될 것을 성경은 여러 번 자꾸 비밀이라는
표현으로 언급하고 있다[롬 11:25, 슥 12:10~13:6, 고후 3:16].
또 예수 재림 전에 큰 환난이 있다.
속칭 7년 대환난이라 한다.
성경은 세상 끝 날이 가까이 올수록 죄악이 증가하고 배도와 타락이 팽배할 것을 예언하고 있다[살후 2:3, 딤후 3:1~7].
결국에는 세상은 지옥과 거의 비슷한 큰 환란이 닥치는데 창세로부터 이렇게 가공할 재난은 전무후무할 것이다.
지금은 지구를 몽땅 수십 차례 박살낼 각종 핵무기와 사람을 물에 삶은 것처럼 처참히 만들어 버리는 화학탄, 독가스, 게다가 연이어 일어나는 대형사고들, 기근, 지진, 폭발, 공해 등의 재해와 천재지변은 주님 재림이 될 무렵 하여 더욱 극심하게 발생할 것이다[계 6장~18장]. 그러나 택함 받은 자들을 위하여 그날들을 감하시리라 하셨다[마 24:22].
또 말세에는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자, 곧 적그리스도의 출현이 있다. 그리스도를 가장하고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거짓으로 유혹하고 주님의 양떼를 갈취해가는 양의 탈을 쓴 이리의 모습이 바로 적그리스도의 본체이다. 그것은 거짓선지자, 거짓사도에게도 해당된다.
적그리스도는 뿔이 난 괴물의 모습이 아니라 언제나 점잖고 예쁘고 부드럽고 거짓 감동을 주는 천사의 모습으로 우리 가운데 있어 나타나 역사한다. 정말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한다.
항상 기도하고 깨어 있어서 참된 예배를 분별하는 지혜를 가져야한다.
그리스도의 재림 시기,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신다[마 24:35].
다만 무화과나무의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짐작하듯이 우리는 세상의 되어져가는 죄악상을 볼 때 주님의 재림과 심판 날이 가까이 문 앞에 이른 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정확한 날짜와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나님 편에서 볼 때에는 재림은 언제나 임박한 것이다[히 10:25, 약 5:8, 벧전 4:7].
오늘날 기독교안에도 성경을 지나치게 문자적으로 해석함으로 인하여 재림과 천년왕국을 왜곡하여 신비주의와 환란의 도피사상으로 빠지는 자들이 많다. 성도가 세상에서 핍박과 환란을 당하는 것은 당연한 진리이다. 그런데 기독교의 축복을 물질축복과 환란이 없는 안일함에 치중함으로 요행주의 신앙을 부추기고 믿음이 약한 자들은 자연히 기복주의, 인본주의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대 환란 전날에 하늘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는 소망도 자기 중심의 안일을 위하여 기대할 것이 아니라 성경을 성경대로 해석하여 주님을 사랑하고 세상 환란과 핍박 중에도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는 일사각오의 자세로 믿음을 지켜야 한다[갈 2:20, 빌 1:20~21].
그리스도인의 참된 재림관은 하루를 천년같이, 천년을 하루같이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거듭난 영생의 의식과 재림의 종말의식을 함께 가지고 조화롭게 살아가야한다.
“오늘이 나의 시작하는 첫날이요, 또한 오늘이 나의 마지막인 끝 날이다”라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진실로 성도는 종말로 예수님 재림 앞에서 겸손하고 온유하며 고요하고 엄숙해야 한다[벧전 4:7, 살전 5:5~6, 마 5:10~12].
주님이 재림하실 때에는 오순절에 영으로 오셨던 것과는 다르게 두 번째 오실 때에는 눈에 보이는 육체적 강림하심이다[행1:11, 마24:30, 히9:28, 계1:7].
이런 놀라운 공중 재림의 강림은 지구상의 모든 사람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동시에 볼 수 있는 광경이다.
그리고 주님의 재림은 밤에 도둑같이 오시도다[마 24:43, 44, 25:1~12, 살전 5:2].
이같이 재림은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사역으로 인간에게 어떤 시간의 알림도 없이 갑자기 오신다.
이는 하나님만의 하시는 주권적인 일임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주께서 재림할 때는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살전 4:16] 영광과 승리의 재림이시다. 하늘의 구름이 주님의 마차가되고[마24:30], 천사들은 호위병이 되고[살후1:7], 천사장은 그의 전령관이 되고[살전4:16], 하나님의 성도들은 그의 영광스런 수행원들이 될 것이니[살전 3:13, 살후 1:10] 참으로 형언 못할 장관이로다.
우리 성도들은 이 장엄한 영광의 날을 위하여 일평생 환란과 핍박가운데서도 신앙의 절개를 지키며 인내하여 왔다.
의인만 아니라 악인도 보게 되는 장엄한 영광의 재림은 생각만 해도 통쾌하고 감격의 날이로다.
오!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나도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할렐루야!
마지막으로 주님의 부활과 심판과 새 하늘 새 땅을 바라보자.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5:28~29].
“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
종말로 살아남아 있는 자들은 죽지 않은 그 몸으로 변화할 것이다.
그러나 이미 죽었던 자들은 모두가 이전과 똑같은 몸을 가지고 부활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부활한 몸은 질적인 면에서 이전과 같지 않고 신령한 몸으로 변화가 되어서 그 몸은 자신의 영혼과 하나 되어 영원토록 영생복락을 누리며 살리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 8:11].
주 예수께서 세상심판권을 가지고 공중에 재림하시는 날에 산 자와 죽은 자가 모두 부활 하는데 신자는 영생이요 불신자는 영멸로 순식간에 대심판을 하신다.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 4:17].
이렇게 기기묘묘한 황홀하고 장엄한 광경을 우리는 보통 휴거[들림 받음, 옮겨짐]라고 한다.
이 같은 놀라운 일을 구약에서는 에녹과 엘리야가 체험하였고[창 5:24, 히 11:5, 왕상 2:11] 신약에서는 바울이 삼층 천에 갔다 왔고, 빌립은 들림 받아 가이사라로 옮겨진 것[행 8:39]등이 그 휴거의 사건들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유력한 휴거의 표본은 그리스도께서 하늘로 올리우신 승천 사실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주님의 승천하신 그 모습으로 들림 받게 된다.
그런데 우리는 단순히 들림 받는 의미의 휴거보다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부활이라는 표현이 지극히 합당한 말이라고 생각 한다.
구약시대에는 부활에 대한 예언의 모습은 족장시대부터 선지자시대까지 내내 계속되었고[창 47:30, 욥 19:25~27, 시 49:15, 사 26:19, 단 12:2, 겔 37:1~14], 신약시대는 복음이 부활에서 그 절정을 이루고 이로 말미암아 성도의 부활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항상 함께 하였다[고전 15:20].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리스도인의 부활의 보증이요, 약속이다[요 5:29, 6:39, 40, 11:25, 고전 15장, 살전 4:13~17, 계 20:13].
성경은 첫째 부활과 둘째 부활을 말하고 있다. 첫째 부활은 중생하여 영혼이 부활된 상태를 말하고[요 5:25], 둘째 부활이란 예수님 재림 때에 영육이 결합하여 새로운 부활체로 변하는 육체적 부활을 말한다[요 5:28~29].
그 날에 우리의 부활한 육체는 현재 우리의 신체와 똑같은 모습이다.
그러나 그 모습은 시공을 초월한 영원히 죽지 않는 신령한 모습이다[눅 24:36~43, 요 20:19~20].
부활체는 썩지 않고, 고통을 받지 않고, 병들지 않고, 죽지 않는다.
그리고 강하고, 영광스럽고, 최고로 아름다운 신령한 몸인 영체이다[요일 3:2, 고전 15:44].
부활의 육체는 세상처럼 육을 중심한 육체가 아니라 영혼을 중심한 영체이다.
그런데 놀랍고 신기한 일은 악을 행한 사람도[불신자] 부활한다는 성경의 말씀이다[단 12:2, 요 5:28,29, 행 24:15].
이 말은 불신자가 죽어서 그 몸과 영혼이 흙이나 티끌이 되어 아주 멸절되어 버려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다.
그들도 다시 살아서 그들의 지은 죄악의 값으로 영원토록 형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당연히 영생이 있듯이 영벌도 있어야 한다[마 25:46].
이것은 하나님의 공의로서 우리가 이 원리를 확실히 믿을 때에 악인의 형통이나 그들의 핍박과 억울한 누명을 얼마든지
자신 있게 참을 수 있고 그것을 무시해 버릴 수 있다.
우리는 잠시잠간 후에 반드시 놀랍고 통쾌한 그 영광을 보리라.
부활은 바로 최후의 심판으로 연결된다.
부활된 신자와 불신자는 다 같이 모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선다.
그리고 천국 가는 성도와 지옥 가는 악인을 갈라놓는 것이다[마25:31~46].
양과 염소를 갈라놓고, 알곡과 쭉정이를 분리하고, 의인과 악인을 구별하는 것이다[마 25:33, 마 13:30, 요 5:29, 계 14:14~20].
만왕의 왕 그리스도께서 심판의 주가 되신다[마 25:31, 32, 행 10:42, 17:31, 빌 2:10].
여기 심판의 권세는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에게 부여하신 것이다[요5:23, 27, 31].
왜냐하면 성자는 하나님이시오, 인간의 구속자로써 친히 대적들에게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고, 또 홀로 그만이 부활하사 인간을 심판할 자격이 있기 때문이다[빌2:6~10].
온 인류는 각인마다 심판대 앞에 설 것이요, 마귀도 심판을 받게 된다[마 8:29, 고전 6:3, 유 1:6].
우리는 여기의 재림부터 심판까지의 진행사역은 거의 동시성을 띠는 사역으로 알자.
이 심판 후에는 최후의 상태인 새 하늘 새 땅이 임하는 것이다[사 51:6, 계 21:1].
이곳은 눈물도, 고통도, 슬픔도, 죽음도 없는 영원한 삶이요[계 21:3~4 사 35:9~10],
한없이 영화로운 찬란한 새 예루살렘이다[계 22:5].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고전15:19]. 우리가 왜 수고하며 여기까지 왔는가? 천국이다.
천국 없으면 모든 것이 헛되도다.
기독교의 성경 중심 교리 7가지도 그 목적지는 천국이다.
하나님의 계시는 천국에서 완성된다.
우리는 오직 주님의 재림을 날마다 애타게 기다린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전 12:13]. 아멘.
솔 향 이 성 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