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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28년 신묘(1891) 11월 19일(기묘) 맑음
28-11-19[31] 노덕사원에 배향되어 있는 문충공 민정중의 위판을 경학원으로 옮기고 사액을 하사할 것 등을 청하는 북청 유학 조기계 등의 상소
○ 북청(北靑) 유학 조기계(趙基鍥) 등이 상소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현인을 높이고 근본적인 것을 부식(扶植)하는 것은 나라의 큰 전례이며, 스승을 높이고 학문을 진흥시키는 것은 많은 선비들의 이성(彝性)에서 나온 것입니다. 신들은 아득히 먼 지방에 살고 학문이 본래 엉성하고 천박한데, 어찌 감히 나라를 다스리는 계책을 거론하겠습니까. 그러나 삼가 생각건대 정신을 보전하면 온몸이 안정되고, 근저(根柢)를 배양하면 여러 가지가 저절로 무성해집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정신에 의지하여 살고 나무는 뿌리를 땅에 박아 번성합니다. 어진 선비가 나라에 있는 것은 사람에게 정신이 있고 나무에 뿌리가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하니 정신을 굳게 가지고 뿌리를 깊이 뻗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삼가 생각건대, 우리 열성조에서 문치(文治)를 숭상하고 사양하는 기풍을 일으킨 교화가 잘 이루어져 아주 성대하였고 사기(士氣)를 부식시키고 사민(斯民)을 양성하여 큰 덕이 아름답고 훌륭하여 천하에 알려졌습니다. 그러므로 종장(宗匠), 현사(賢師), 명신(名臣), 석보(碩輔)가 무수히 배출되었으니, 윗사람은 현명하고 아랫사람은 선량하여 당우(唐虞) 삼대(三代)에 견주더라도 부끄럽지 않았습니다. 고(故) 상신(相臣) 문충공(文忠公) 민정중(閔鼎重)은 숙종조(肅宗朝) 때에 직접 강상(綱常)을 책임지고 풍화(風化)를 책임져 태화(太和)를 불러들이고 문교(文敎)를 도와 이루었습니다. 도덕과 정충(貞忠)이 민간에 심대하게 두루 미쳤으니, 무릇 온 나라 여항(閭巷)의 부인(婦人)이나 아이들이 지금까지 흠모하여 잊지 못하며 신들은 더욱 북두(北斗)처럼 우러르는 것입니다. 당시 본도의 감사를 맡았을 때 외지고 먼 변경 지방의 비루한 풍속이 오랫동안 지극한 도를 몰랐으므로 개연히 탄식하고 가장 먼저 학교를 일으킨 다음 곧이어 《가례(家禮)》, 《상례(喪禮)》 등의 책을 교감(校勘)하고, 여러 고을의 어리석은 선비를 사방으로 널리 초청하여 역참(驛站)의 관사(館舍)에 묵게 한 다음 물품을 보내 주어 기르며 말로 학문을 전수하고 직접 가르쳐 인도하고 고서(古書)의 의리를 강명(講明)하는 데에 하루 종일 열심히 노력하였습니다. 만 1년도 못 되어 몸이 단정하고 잘 단련되어 아주 멀고 후미진 지방의 어리석고 완악한 습속을 크게 변화시켜 수업을 받고 송독(誦讀)하는 지역으로 만들었습니다. 그 밖에 공업(功業)과 교화가 사람들에게 미치고 혜택이 백성들에게 미친 것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지금에 이르기까지 말을 배우고 걸음걸이를 익히는 자도 똑같이 깊이 젖어든 것을 아는데, 남국(南國)의 백성들이 소백(召伯)의 덕을 노래하고 조주(潮州)의 사람들이 한 문공(韓文公)의 은공(恩功)을 기리는 것 같은 정도일 뿐만이 아니니, 장차 집집마다 숭배하고 집집마다 축원할 것입니다.
한 지방의 선비들이 논의가 모두 부합하여 함흥(咸興) 운전서원(雲田書院)에 배향하고 또 본 고을 노덕서원(老德書院)에 추가로 배향하였는데, 본 서원은 일곱 현인의 신위(神位)가 안치되어 제향되는 곳으로서 일찍이 선액(宣額)을 받은 곳입니다. 서원을 설치한 초기에 고 상신 문충공 이항복(李恒福)이 주벽(主壁)이 되었고 추후에 충정공(忠貞公) 김덕함(金德諴), 충정공 정홍익(鄭弘翼), 문충공 민정중, 충정공 오두인(吳斗寅), 충정공 이상진(李尙眞), 충숙공(忠肅公) 이세화(李世華) 등 여섯 현인을 올려 배향할 때 조정의 의논이 유신(儒臣) 박세채(朴世采)의 서쪽을 주벽으로 하자는 의논을 그대로 따르고 나란히 벌여 봉안한 여러 신위에 제물을 갖춰 제사 지냈습니다. 73년 뒤인 병술년에 개수하고 물건을 배열하고 도로 모실 때 본 수신(守臣)의 개인적 의견으로 인하여 다시 주된 배위(配位)를 정하였는데 이항복을 주위(主位)로 하였고 그 밖의 다른 신위는 모두 배향하는 것으로 하였습니다. 아, 사문(斯文)의 의리로 말하자면 민 문충공(閔文忠公)은 박학하고 예를 세상에 널리 폈으며 높은 덕이 있었고 홀로 충성을 다하였으니, 정(鼎)과 이(彝)에 새기고 태상(太常)에 기록하여 무궁토록 전할 뿐만이 아니라, 실로 마땅히 한 서원의 주향(主享)이 되어 사림이 백세(百世)토록 우러러보는 인물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구구하게 다른 서원에 덧붙여 배향되어 도리어 주향과 배향에 끼어들어 있는 형편이니, 사림이 억울해하는 마음을 품고 유감을 품은 지 오래되었지만 더욱 풀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지난번 신미년에 사당을 철거할 때에 운전서원도 철거되는 서원 가운데에 포함되었으므로 진영(眞影), 의복과 띠, 신과 지팡이를 노덕서원의 한쪽에 옮겨 간직해 두었는데 낮고 협소하며 구차하고 예를 소홀히 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신들의 어리석은 진심으로 보건대 불행한 것이 세 가지이고 또한 희망이 있는 것이 두 가지입니다. 왜 그러합니까? 문충공이 나라에서 본보기가 되고 유림(儒林)에서 모범이 되었으니, 송(宋) 나라의 호전(胡銓), 장준(張浚), 한기(韓琦), 범중엄(范仲淹)에게 부끄럽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사우(祠宇)를 철거하여 사기(士氣)가 힘없이 저절로 꺾이게 되었으니, 이것이 첫번째 불행입니다. 문충공이 이 문충공(李文忠公)과 덕이 같고 업(業)이 대등하니 정위(正位)에 올려야 합당한데, 지금 그 왼쪽에 덧붙여 배향함으로써 현인을 높이는 체모를 크게 잃었습니다. 이것이 두 번째 불행입니다. 또 어리석은 선비나 학문이 낮은 자가 이로 말미암아 의심이 생겨 본업(本業)을 태만히 하여 내버려 두고 거만하게 스스로 방종한 생활을 할까 두렵습니다. 그래서 문충공이 가르쳐 인도하여 다스린 것이 쓸어버린 듯이 없어지게 된 것이 세 번째 불행입니다. 다시 삼가 생각건대, 지금 밝으신 성상께서 위에 계시고 덕화(德化)가 높고 성하여 무릇 나라를 안정시키고 백성을 이롭게 하는 일은 떨쳐 일으키지 않은 것이 없으니, 혹 일시적으로 제사를 폐하라는 전교가 있었지만 반드시 결단하여 크게 마음을 돌려 폐한 것을 일으키고 위태한 국면을 구제해 주시어 문충공으로 하여금 이곳에 신위가 안치되어 제향되도록 해 주실 것이니, 하나의 다행입니다. 성상의 감식안이 크게 밝아 구례(舊禮)를 다시 시행하시어 다시 본 고을에 별원(別院)을 설치하고 그 위차(位次)를 바로잡아 노덕서원과 서로 마주 대하고 모두 함께 아름다우니, 이것이 또한 많은 선비의 다행 중 더욱 다행인 것입니다.
아, 문충공이 나라에 대하여 충정(忠貞)을 다 바치고 밝으신 성상의 은혜에 보답할 것을 도모하고, 본도(本道)에 대하여 예교(禮敎)를 숭상하고 문학을 크게 천양(闡揚)하였으니, 공리(功利)가 미친 것을 말하면 마땅히 선액(宣額)의 은전을 입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백년 사이에 차츰차츰 다른 서원에 배향되었으니, 이것이 어찌 태평한 세상에 현인을 높임에 있어 흠전(欠典)이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한 사문의 의리에 있어 만족스럽지 못한 점이 아니겠습니까. 매우 다행스럽게도 기축년 봄에 본도의 도신(道臣) 조병식(趙秉式)이 본 고을의 수신 김유성(金裕成)과 함께 많은 선비를 솔선하여 인도하고 조정의 영을 받들어 부(府)의 동쪽 향로봉(享老峯) 아래 경학원(經學院)을 창설하고 군(郡)의 선비 가운데 준수한 자 30인을 뽑아 두고 마음을 집중하여 학습에 힘쓰는 곳으로 삼도록 하였습니다. 이어서 또 문원(文垣)의 한장석(韓章錫)이 본도의 관찰사로 부임하여 개연히 사문을 부흥시키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삼아 무릇 기강에 관계되는 일과 유학자에 관계되는 일은 직접 솔선해서 하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본 고을의 사론(士論)이 똑같이 일어남으로 인하여 영학(營學)의 유생을 보내 본 고을의 장보(章甫)와 함께 노덕서원에 간직된 문충공의 진용(眞容)을 경학원으로 옮겨 봉안하여 권도(權道)를 따라 구차하게나마 편안하도록 하려는 계책을 행하였습니다. 서원 한쪽에 안치하였던 것에 비하여는 조금 억울해하는 여론을 위로하였습니다만, 위판(位板)을 옮겨 봉안하는 일에 이르러서는 조정의 신칙을 공손히 기다리며 감히 아래에서 마음대로 처리하지 못하여 예전대로 봉안하여 두었습니다. 금년 봄에 본 고을의 수신 이승재(李承載)가 다시 도신의 간절하고 지성스러운 뜻을 이어받아 재물을 내어 경학원 안에 집을 세우고 영정을 봉안하였습니다. 이것은 다 성상의 은택이 미친 것으로 도신과 수재(守宰)가 교화를 받들어 봉행한 것입니다. 그 터가 새뜻하고 아름다우며 큰 건물은 크고 널찍하니 존봉(尊奉)하기에 적합하고, 봄가을에 제사 지내는 것은 의절(儀節)을 또한 이미 구비하였으니, 조정에서 사액(賜額)하는 예전(禮典)을 받는다면 적은 재물도 소비하지 않고 밝으신 성상의 현인을 예우하는 예의가 영구히 빛날 것이며 또한 신들이 우러러보고 의지하는 정성에 유감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에 감히 천릿길을 발을 싸매고 달려와 한목소리로 성상께 합동하여 하소연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밝게 굽어살피시어 확연(廓然)히 현인을 높이고 근본적인 것을 부식하는 것을 우선으로 하여 속히 노덕서원에 배향되어 있는 문충공 민정중의 위판을 즉시 경학원으로 옮기도록 하고, 이어 사액을 하시어 더욱 오래도록 위판을 안치하고 제향하도록 하소서. 그리하여 한편으로는 선사(先師)의 위(位)를 바로잡으시고 한편으로는 사림의 억울해하는 마음을 펴 주심으로써 성상의 은택을 노래하고 민정과 풍속을 살펴 흥기할 수 있도록 하신다면, 조정에 매우 다행이고 사문에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신들은 황공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상소를 보고 잘 알았다. 서원의 서쪽에 안치하는 주벽을 누구로 하고 여러 신위를 종사(從祀)하는 것은 유현(儒賢)의 정론(定論)을 따라야 할 것이다. 사액을 청한 것에 이르러서는 당장 의논할 수 없는 점이 있다. 너희들은 물러가 학업을 닦으라.”
하였다.
[주-D001] 남국(南國)의 …… 노래하고 : 소백(召伯)이 남국을 순행하면서 문왕(文王)의 정사를 폈는데 그 덕화(德化)가 백성들의 마음에 깊이 들어가서 백성들이 그의 덕을 그리워하며 노래하였다. 《詩傳 召南 甘棠》[주-D002] 조주(潮州)의 …… 기리는 것 : 한 문공(韓文公)은 당(唐) 나라의 한유(韓愈)이다. 한유가 조주자사(潮州刺史)로 갔는데 조주(潮州)의 악어 떼가 백성과 가축을 많이 헤쳐 백성들이 고통을 겪고 있었다. 이에 한유가 악어문(鰐魚文)을 지어 타이르니 악어가 감화되어 피해 갔다고 한다. 이러하므로 조주의 사람들이 한유의 은공을 기린 것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정필용 (역) |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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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청(北靑)
노덕서원(老德書院) 숭정 갑오년에 세웠고 을축년에 사액하였다. : 이항복(李恒福)ㆍ김덕함(金德諴)ㆍ정홍익(鄭弘翼)ㆍ이상진(李尙眞)ㆍ오두인(吳斗寅)ㆍ이세화(李世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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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지도서(輿地圖書) 咸鏡道 北靑府
學校
鄕校。 在府北三里, 北門外里三角峯前。
老德書院。 白沙李恒福萬曆戊午正月, 抗章謫來, 越五月十三日易簀。 府儒全天則等欽仰忠烈, 通于洪、利、端, 合力建祠於靈德山下, 入享。 而休軒鄭弘翼仍爲追配。 崇禎甲戌, 移建于冠山下, 卽府東八里, 老德社。 再丙寅, 醒翁金德諴追配。 乙丑北御史李徵明入啓, 丁卯賜額老德。 甲戌, 老峯閔鼎重、陽谷吳斗寅, 疏請配享, 而再戊子, 晩庵李尙眞、雙柏堂李世華, 疏請追享。
여지도서(輿地圖書) 咸鏡道 北靑府
坊里
老德社。 府坐。 四方十里。 民戶八百三戶內, 男二千六百四十六口, 女二千四百七十九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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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정유고(藫庭遺藁) 김려(金鑢)생년1766년(영조 42)몰년1821년(순조 21)자사정(士精)호담정(藫庭), 담사(藫士), 담수(藫叟), 담옹(藫翁), 담원류자(藫園纍子), 한고류자(寒皐纍子), 귀현자(歸玄子), 해고(海皐)본관연안(延安)특기사항이옥(李鈺), 김조순(金祖淳) 등과 교유
藫庭遺藁卷之七 / 坎窞日記 / 北遷日錄
정조 | 21 | 1797 | 정사 | 嘉慶 | 2 | 32 | 부친이 龍潭 縣令으로 나갈 때 모시고 가다. ○ 11월, 姜彛天의 飛語事件에 연좌되어 慶源府에 유배되는 도중 특명으로 富寧으로 移配되다. |
丁巳十一月十二日丁丑。余坐姜彜天飛語獄。辭連被逮。拘留刑曹。
二十七日壬辰。陰霾。過龍岸村。踰三家嶺。午入北靑府。遇大雪不得發行。
是日陰曀。且土雨昏黑。過龍岸村。踰三家嶺。一名霜加嶺。或曰雙嶺。午入北靑。雪霔如雨。府使申學士大尹。方被臺論罷職。有拿命。自官厨供飯。且送酒欵待。使吏傳行李保重之意。是晩大雪。遂不得發行。昔光海丁巳。有金墉之變。白沙李公竄北靑。有詩曰古堠松牌記北靑。板橋西畔少人迎。羣山定欲囚豪傑。回望千峯鎖去程。公以翌年戊午五月十三日庚子。卒于謫所。是行也。終始侍側。捐舘之後。運櫬歸襄。心喪三年者。鄭錦南忠信也。
其後北靑士人。追懷德義。創書院於城外老德社。立祠以享公。號曰老德書院云。
是日余旣以雪不得行。欲馳往拜謁。本府諸吏。以迂路呵禁不許。不勝悵黯。錦南字可行。號晩雲。家世寒微。本系羅州正兵。壬辰之亂。年十七。都元帥權忠莊慄。購人可以奔問行在者。錦南自奮請行。持狀啓。穿倭陣至義州。時白沙方判兵部。一見知爲英才。召置左右。使之讀書。能讀先秦古文。遍交門下名士。如李延陽時白,張新豐維,崔完城鳴吉。皆折輩行屛人地。後奉使建州。察虜情。其酋欲試之。幽於一室而餓之。達夜念書。其聲琅然。乃左傳也。登武科。官至副元帥漢城判尹。以振武元勳。封錦南君。謚忠武。其爲乶下僉使時。有詩曰千年往迹鳥飛間。文肅公碑碧蘚斑。可笑玉門班定遠。幾年辛苦乞生還。可以想見其氣槩也。野史言錦南爲人短小。雙眸炯炯。精彩映發云。是夜。懸燈獨坐。店主人姓葛名輔漢者。乃本府旗牌。頗爽闓多識關北故蹟。語次因言近年以來北靑治績。當以林尙書蓍喆爲第一。歷叙其事。亹亹不已。且曰北靑之民。恩浹骨髓。沒世不忘。因凄然下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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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오고략(嘉梧藁略) 이유원(李裕元)생년1814년(순조 14)몰년1888년(고종 25)자경춘(景春)호귤산(橘山), 묵농(墨農)본관경주(慶州)소자육희(六喜)시호충문(忠文)특기사항박규수(朴珪壽), 남병철(南秉哲), 김세균(金世均) 등과 교유
嘉梧藁略冊六 月城李裕元景春著 / 䟽箚 / 辭咸鏡監司。請省先院䟽。
伏以時序遄邁。禮制有限。幽宮永閟。成事奄過。聖慕哀廓。益復靡及。臣於先朝。受恩罔極。而冥頑不滅。未效蓐蟻之忱。徒抱攀髯之恨。南望長號。有淚無從。仍伏念臣歲初陳籲。猥將公私懇迫之情。蘄蒙憫覆曲遂之仁。恩批隆摯。諭之以益勉分憂。臣拚命增惕。靡所止屆。洊瀆是愳。淟涊蟠泊。迄至于命。臣情益急。若窮無歸。不敢自阻於孝理之天。而妄效必呼無隱之義焉。臣之老母年旣癃衰。病又侵尋。經歲關塞。幸以支保者。恩眷攸及。便養適宜也。入此年來。一倍凘綴。政如下瀨之舟挽回不得。兼以北土風氣。寒暄多乖。水泉不服。千里客舘。又經三夏。究之事理。實有深慮。已於月前。奉還京闉。爲在家調將之計。念臣情界不可晷刻離捨。而旣不能納節徑歸。焦迫之私。度日如年。玆敢冒死仰籲。冀倖於聽卑之下。劃賜遞改。俾卽歸護。則臣之母子相依爲命。無往非感頌之日也。且臣有區區私懇。敢此尾陳焉。臣之先祖文忠臣恒福。曾因被謫。畢命於北靑。
而老德書院。卽賜額妥靈之所也。子孫之因公行過此者。輒皆往拜祠版。庸伸追慕。而臣則按藩周年。歷謁路阻。山川入望。心焉如結。計其程塗。不滿二百里之地。如得八九日之假。優可以來往。拚㫌旄而告喜。薦俎豆而展誠。幽明之間。榮感極矣。惟聖明特垂仁惻。仰禀東朝。遞臣之職。許臣之由。爲親爲先。兩得以伸情。卽我聖上初元軆下之政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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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당집(峿堂集) 이상수(李象秀)생년1820년(순조 20)몰년1882년(고종 19)자여인(汝人)호어당(峿堂), 오하(梧下), 산농(山農)본관전주(全州)일명최상(㝡相), 최수(㝡秀)시호문간(文簡)특기사항윤정현(尹定鉉), 박규수(朴珪壽), 신헌(申櫶), 서승보(徐承輔), 임헌회(任憲晦) 등과 교유
峿堂集卷之十三 / 記 / 謁二公遺像記 壬子
北靑故襄烈公靑海伯之所封也。鴈臺祠祀之。白沙李文忠公以謫沒。老德書院祠之。皆奉遺像。白沙眼有稜。眉爲卧蚕。豐厚魁岸而有愁色。遭世禍亂。備經艱危。手障狂流。以身殉義。此宜如泰山之松。磊砢多節。碩大聳秀。足以凌犯風霜。干冒日月。不爲春容之腴澤。獨怪夫靑海奮起邊裔。功冠開國。偉奇特出。百世之下。想見其英風。乃玉面朱唇。端好瑰麗。美男子耳。余謂從者曰。異哉似子房。昔張子房貌如婦人。太史公歎之。公解甲而歸。杜門自晦。固已出常人萬倍。旣又斷髮焚朝服。超然立於禍福之表。一切榮辱。無如公何。殆與謝病辟穀。願從赤松者並駕而遊。故其像亦近之歟。視白沙之貌。稱其人尤奇矣。盖功成而勿居。炳先幾而遐擧。襄烈公全身也。震而不喪。伸大義而俱終。文忠公全節也。二公皆偉人也。其晩節愈不可及云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