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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실패했어도
2010년 8월 8일 / 대예배 / 요 21장 1-14절
성경에 보면 예수님을 실망시키고 주변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한 사람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로서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르며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제자훈련을 받았을 뿐 아니라, 5병 2어를 가지고 5,000명을 먹인다든지, 물위를 걷는다든지, 죽은 아이를 살려낸다든지, 각종 질병에 걸린 사람을 고친다든지 하는 초자연적인 기적과 이적을 수없이 목격하였습니다.
그러나 실망스럽게도 그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고백했던 그 입술로 닭 울기 전에 3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그의 부끄러운 행적은 4복음서 전체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 26:69-74 / [막 14:66-72, 눅 22:56-62, 요 18:15, 25-27] 그동안 베드로는 바깥뜰에 앉아 있었다. 그때 여종 하나가 다가와서 ‘당신도 저 갈릴리 사람 예수와 같이 다니던 사람이지요?’ 하고 말하였다. 70) 그러자 베드로는 큰소리로 ‘네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하고 화를 내며 부인하였다. 71) 조금 지나서 베드로가 대문 곁으로 가니 다른 여종이 그를 보고 둘러서 있는 사람들에게 ‘이 사람도 나사렛 예수와 같이 다니던 사람이에요’ 하고 말하였다. 72) 베드로는 또 그 말을 부인하고 이번에는 맹세까지 하면서 ‘나는 그 사람을 전혀 알지 못하오’ 하고 말하였다. 73) 그러나 조금 후에 거기 서 있던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다가와서 ‘당신은 그 사람의 제자인 게 틀림없소. 당신의 갈릴리 말투를 보아 분명하오’(대제사장의 시종이며 베드로에게 귀를 잘린 사람의 친척 되는 이가 나서서 몰아세웠다. ‘당신이 감람산에서 예수와 같이 있는 것을 내 눈으로 보았는데도 그러시오.) 하자 74) 베드로는 저주하고 맹세하면서 ‘내가 그 사람을 안다면 천벌을 받겠소. 나는 정말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 하고 부인하였다. 그러자 곧 닭이 울었다.
누가 보아도 베드로는 분명히 실패했습니다. 그는 도저히 예수님 앞에 다시 설 수도 없는 부끄러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물론 베드로가 ‘닭이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고 하시던 예수의 말씀이 생각나서 밖으로 나가 통곡하였다고 하지만 명백한 실패입니다.
▶ 특히 많은 사람들이 베드로의 실패를 크게 부각시키는 이유가 있습니다.
마 26:33-35 / 베드로가 나서서 장담하였다. “비록 모든 사람이 다 주님을 버린다 해도 저는 버리지 않겠습니다.” 34) 그러자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오늘 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35) “저는 주님과 함께 죽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주님을 모른다고는 하지 않겠습니다.” …
베드로의 목소리를 높인 장담은 결국 자신을 비참한 지경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그럴지라도 예수님께서는 그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실패한 그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 여기에서 중요한 사실은 베드로의 모습이 우리와 전혀 상관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때로는 “비록 모든 사람이 다 주님을 버린다 해도 저는 버리지 않겠습니다. 저는 주님과 함께 죽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주님을 모른다고는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장담합니다. 그러다가 장담한 것에 걸려 부끄러움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는 말씀이 남의 이야기처럼 들리지 않습니다.
1. 실패한 제자들을 찾아오신 예수님
요 20:19 / 그날 저녁 제자들은 유대인 지도자들이 무서워서 자기들이 모여 있는 집의 문을 닫아걸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께서 들어오셔서 그들 가운데 서서 ‘너희에게 평안이 있으라!’
제자들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이 대제사장들과 유대인들에게 붙잡혔을 때에 다 뿔뿔이 도망쳤던 겁쟁이들이었습니다. 또 그렇게도 큰소리치며 예수님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하던 수제자 베드로조차 예수님을 3번씩이나 부인하였습니다. 그뿐 아니라 대장부처럼 강하고 담대한 줄 알았는데, 유대인 지도자들이 무서워서 자기들이 모여 있는 집의 문을 닫아걸고 있었습니다. 그럴지라도 예수님은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불안한 마음과 두려워하는 마음을 제거해 주시면서 평안을 빌어주셨습니다.
▶ 이런 일이 있은 베드로를 포함한 7제자들은 가지 말아야 할 곳을 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는 부끄럽게도 세상적인 실패를 또 경험했어야 했습니다.
요 21:3 / 시몬 베드로가 ‘고기나 잡으러 가겠소’ 하고 나서자 ‘좋습니다. 같이 갑시다.’ 하고 모두들 따라 나섰다. 그런데 밤이 새도록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다.
이것을 쉽게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젠장, 이제는 사람을 낚는 어부고 뭐고 틀렸어. 나는 고기나 잡으러 갈 거야. 내가 배운 것이 이 짓인데. 내 주제에 무슨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된다고. 모든 것이 끝장났어.” 지금까지 실패한 것도 부끄러운 일인데, 지금까지 예수님을 따라 제자로서의 수업을 받던 것을 포기하고 다시 바다로 돌아가 고기나 잡으려고 했으니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 베드로가 고기 잡으러 가겠다고 하자 함께 있던 도마, 나다나엘, 세베대의 아들(야고보와 요한)들 그리고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다른 제자 둘 이렇게 해서 도합 6명의 제자들도 ‘우리도 함께 가겠다’고 베드로를 따라나셨습니다. 사실 베드로, 야고보와 요한은 어부였지만, 도마와 나다나엘은 어부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왜 베드로를 따라갔습니까? 남이 간다고 하니까 아무 생각 없이 베드로를 따라간 것입니다. 그것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뵌 후에 말입니다. 이것은 잘못된 행동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자신들의 신앙목적을 저버리고 물고기 잡으러 가는 베드로와 그 뒤를 아무 의미 없이 따라 물고기 잡으러 간 6제자들 모두는 밤새도록 그물질을 했지만 물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또 실패하고 만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 보면 하나님이 주신 사명, 소원이나 목표를 가지고 움직이는 게 아니라, 남들이 하는 대로 성경찬송을 가지고 남을 따라 교회에 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후회합니다.
남의 뒤만 따라다니는 신앙생활보다는 창 28장에서 야곱이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을 받아 믿음으로 살아가듯이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인도하시는 역사가 있었으면 합니다.
▶ 여기에서 잠시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마 26:31-32 / 그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32)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평상시에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귀담아 들어야 하겠습니다. 자기네만의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보니까 정작 예수님이 하시는 중요한 말씀은 마음에 두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기에 7제자 모두가 다 바다에 고기 잡으려고 나간 것입니다. 만일 7제자 중에 한 사람이라도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었다면 고기 잡으려고 바닷가로 가는 것이 아니라 갈릴리로 갔었을 것입니다.
리더가 되어야 하는 우리들로서는 항상 하나님께서 들려주시는 음성에 귀를 기울어야 할 것입니다.
2. 실패자를 회복시켜 주십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이곳까지 찾아 오셨습니다. 실패한 베드로를 찾아오셨습니다. 왜 찾아오셨습니까? 실패한 사람을 회복시켜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실패한 자를 내팽개치지 않으시고 잃었던 삶의 목표를 다시 회복시켜 주시기 위해서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처음 베드로에게 주셨던 약속이 무엇이었습니까?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막1:17).”는 약속이었습니다. 그 후 그는 바닷가에서 물고기 잡는 어부에서 일약 사람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사람 낚는 어부가 되는 위대한 수업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하는 실패를 맛 본 베드로가 바다로 가서 물고기나 잡는 어부로 돌아가자 예수님은 사명을 회복시켜 주시기 위해서 디베랴 바다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요 21:6 / 그가 말하였다.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지게. 그러면 많이 잡힐 테니.’ 그래서 그들이 그 말대로 하였더니 고기가 너무 많이 걸려서 그물을 끌어올릴 수조차 없었다.
신앙에 실패한 제자들이 세상에서도 실패하자 예수님은 제자들로 하여금 재차 시도하게 하십니다. 제자들은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려 끌어올리기 힘들 정도로 많은 153마리나 되는 고기를 잡게 되었습니다. 그제야 제자들은 고기를 많이 잡게 하신 분이 다름 아닌 부활하신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세상으로 돌아간 자신들에게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들은 놀랍고 반가운 모습으로 육지에 올라오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었습니다. 피워놓은 숯불을 보고 “밤새도록 추위에 떤 우리들을 배려하시는 예수님은 역시 최고야!”라고 생각했을까요? 아닙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피워놓은 숯불을 보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을 것입니다. 모르긴 몰라도 가야바의 대제사장 뜰에서 예수님께서 심문을 받던 장면이 떠올랐을 것입니다.
요 18:18 / 날이 추웠으므로 경비병들과 시종들은 불을 피워 놓고 그 주위에 둘러서 있었다. 베드로도 그들과 함께 서서 불을 쬐었다.
▶ 그러므로 본문 9절에 등장하는 숯불은 보통 숯불이 아닌 예수님의 의도가 담긴 숯불입니다. 실패한 베드로를 회복시켜 주기 위해 숯불을 피워놓으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실패한 것을 뛰어넘지 않으면 진정한 회복을 이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실패한 것을 되씹어 보면서 다시 도전하여 극복해야 할 것입니다. 실패를 거울 삼는다는 말이 바로 이러한 말입니다.
요 21장 이후에 베드로는 이러한 일로 실패하지 않게 됩니다. 극복이 아니라 승리하게 됩니다. 이길 수 있는 방법이란 예수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의의 병기로 마지막까지 사는 것입니다.
롬 8:36-39 / … 우리가 주님 때문에 종일토록 죽임을 당하고 도살당할 양처럼 취급당하며 살아갑니다. 37) 그러나 우리는 결국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그리스도를 통해 큰 승리를 거두고야 말 것입니다. 38) 나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확신합니다. 죽음도 그렇게 할 수 없고, 생명도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천사들도 그렇게 하지 못하고 지옥의 모든 세력을 다 합친다 해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멀리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오늘에 대한 우리의 염려도 내일에 대한 우리의 공포도 39) 또는 하늘 높이 올라가거나 바다 깊은 곳에 들어가거나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간에 우리 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실 때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숯불을 준비하시고 베드로에게 물으셨습니다. “왜 세 번씩이나 부인했느냐?”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잘잘못을 따지지 않았습니다. 그저 숯불을 피워놓고 생선을 굽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야, 와서 조반을 먹으라. 같이 조반을 먹자.”라고 하셨습니다. 그 어떠한 책망도 하지 않으시고 그 어떤 말로도 따지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먼저 허기진 배를 채우게 하셨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가슴아파하는 베드로를 죄인취급하며 문책하실 필요는 없으셨습니다.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죄를 깨닫고 가슴아파하는데 무슨 말을 하실 것입니까? 그렇다고 아무 말씀도 없이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가슴을 찢어지게 만드는 책망보다는 조반을 다 드신 후에 베드로에게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야’라고 부르시지 않으시고 그의 옛 이름인 ‘시몬’이라는 이름으로 부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로 하여금 처음 예수님을 만났을 때를 회상하게 하여 새로운 출발을 하도록 하기 위한 목적으로 “시몬아! 다시 출발해. 이제는 나를 사랑하란 말이야. 그러면 일어설 수 있단다.”라는 메시지를 주신 것입니다.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3번이나 물으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베드로가 역시 3번씩이나 예수님을 부인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반석과 같은 다짐을 하게 하심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실패에 대해 관심을 가진 것이 아니라, 베드로가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되느냐 하는 것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3번씩이나 물으신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질문에 “예, 제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라고 대답하자 예수님은 “그래,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엇을 교훈하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네가 나를 3번씩이나 부인했지만, 여전히 나는 너를 사랑한단다. 나는 너의 실패해도 불구하고 나는 너를 사용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 베드로처럼 실패했습니까? 그래서 쉬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여 고민하고 있습니까? 그래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실패한 자를 찾아오셔서 회복시켜 주십니다. 3번씩이나 부인하며 저주하며 배신한 베드로를 찾아오신 예수님, “와서 조반을 먹으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힘들고 지쳐 일어날 힘조차 없는 사람들에게 오셔서 ‘일어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성전에 들어가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사람이 성전 문 앞에서 구걸을 하고 있을 때에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일어나라’고 하였듯이 우리들에게도 이러한 일이 있었으면 합니다.
누구나 과거의 실패가 있습니다. 때로는 일을 해야 할 때에 멍하니 앉아 있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제부터입니다. ‘이제 늦었어!’라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제 늦었다!’고 할 때가 가장 빠른 때입니다. 새롭게 각오하고 일어서면 누구에게나 꿈과 같은 미래가 펼쳐지게 될 것입니다.
■ 고(故) 정주영 회장은 청개구리 때문에 성공했다고 합니다. 청개구리가 버드나무에 오르려면 30번은 실패해서 기어코 오른다는 얘기를 듣고 그는 결심했습니다. “변덕 많은 청개구리도 포기하지 않는데 나는 사람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포기하지 않겠다.” 그 결심을 마음에 품고 수없이 다가오는 실패와 고난을 극복해서 결국 현대 그룹을 일으켰다고 합니다.
우리는 어떤 실패를 만나도 다시 일어서야 합니다. 그래야 나중에 후회하지 않게 됩니다. 실패 때문에 후회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진짜 후회하는 이유는 ‘그때 왜 포기했지!’ 하고 포기한 것을 후회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실패를 만나도 너무 쉽게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포기가 가장 큰 실패이고, 가장 큰 패착입니다. 우리가 실패 속에서 포기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를 다시 일으켜주실 것입니다.
■ 우리나라 볼펜의 대명사처럼 전 국민에게 사랑을 받는 볼펜이 있습니다. 바로 ‘MonAmi 153’입니다. 이 볼펜이 처음 나온 것이 1963년입니다. 당시 볼펜을 생산할 수 있는 기술도 공장도 없던 상황 가운데서 처음 볼펜을 만들게 된 것입니다. 처음 이 볼펜을 개발한 송삼석 회장이 직접 이 볼펜의 이름을 지었습니다. MonAmi는 불어로 ‘좋은 친구’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153이 중요합니다. 사람에게는 인생에 있어 어려운 고비가 있듯 송삼석 회장에게도 실업자가 되어 죽고 싶은 벼랑 끝에 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회장은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주저앉았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이 오셔서 “자네 하나님과의 삶을 멀리해서 망하게 된 것이라네. 요 며칠 동안 기도원을 다녀오게나.”라고 하자, 모나미 사장은 1주일간 기도원에 들어가 하나님께 매달리는데, 계속 회개기도만 나왔다고 합니다. 회개의 내용은 ❶ 주일을 빼 먹은 죄, ❷ 십일조를 떼먹은 죄, ❸ 새벽기도를 못한 것까지. 어느 날 실신해 있었는데, 어디선가 잔잔한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그 소리는 ‘153~, 153~’이라는 숫자를 말하고 있었습니다. 너무도 짧은 소리 ‘153~, 153~’ 이게 무엇인지 그는 계속 고개를 갸우뚱하며 이리저리 생각해도 도저히 뜻풀이를 할 수 없어 교회의 목사님을 찾아가 “153이라는 숫자가 무엇입니까?” 하고 질문하자 목사님은 요 21:11을 보여 주시며 설명해 주었습니다. 여기서 그는 깊은 뜻을 깨달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서 모나미 볼펜공장을 차렸는데, ‘153’의 숫자로 인해 죽음에서 새롭게 거듭나 살아났기에 모나미 볼펜에 ‘153’이라는 숫자가 새겨지게 되었습니다. 이름 그대로 이 볼펜은 국내외적으로 대 히트를 쳤습니다. 이 볼펜을 안 써본 국민이 없을 정도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일상 깊은 곳에 부활의 주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믿읍시다. 그분이 축복하신다는 사실도 믿어야 합니다. 세상적으로 성공도 하고 우리 삶에 숨어있는 죽음의 그림자, 실패와 절망, 불신앙이라는 어두움의 세력을 다 털어버립시다.
세상 사람들도 이렇게 목숨을 걸고 자기 힘으로 실패를 딛고 일어서는데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우리가 주저앉아서 되겠습니까? 주의 말씀이 기억나십니까?
빌 4:11-13 / 내 처지가 어렵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닙니다. 나는 가진 것이 많든 적든 즐겁게 살아가는 법을 배웠습니다. 12) 가난을 이겨낼 줄도 알고 부유를 누릴 줄도 압니다. 배가 부르거나 배고프거나, 넉넉하거나 궁핍하거나 어떤 경우에도 만족하는 법을 몸에 익혔습니다. 13) 내게 힘을 주고 강하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도움으로 나는 하나님께서 원하는 것을 다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실패할 수 있습니다. 실패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의 삶은 실패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공이라고 하는 것도 실패없는 성공은 없습니다. 살다보면 이런저런 일로 실패할 때도 있습니다. 실패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없습니다. 문제는 거듭되는 실패를 겪고 나서 실패 공포증에 빠집니다. 그러나 화살은 과녁에 명중하는 것보다 빗나갈 확률이 훨씬 더 높습니다. 우리도 빗나가는 것과 같은 실패 속에서 자기를 발견케 됩니다. 그 실패를 통해서 무엇인가를 배우며 성장해야 됩니다. 아무런 실수를 하지 않고 있다면 전혀 성장하지 않습니다. 것입니다. 실패가 사람을 만드는 것입니다.
아랍 속담에 ‘항상 햇볕만 나면 사막을 이룬다’는 말처럼 땅에는 가끔 비도 와야 합니다. 오히려 우리가 당하는 실패 때문에 잘못된 부분을 다듬고, 버리게 되며 새롭게 되는 것입니다. 고침 받아 하나님의 도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 미국의 석유 왕이었던 록펠러의 이야기는 너무나도 유명합니다. 그는 젊은 시절 광산업에 손을 대었다가 큰 실패를 경험했습니다. 깊은 좌절을 맛보아야 했습니다. 친구에게서 금광을 하나 인수 받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사기를 당한 것이었습니다. 이미 캐낼 금은 다 캐내 갔습니다. 찌꺼기만 남았습니다. 폐광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은행에서 계속 빚 독촉은 날아옵니다. 또 광부들에게 임금을 주지 못하니까 그들이 폭도처럼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록펠러는 결심을 하고서 광산 속 깊은 데로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돗자리를 깔았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응답을 받기 전에는 결코 이 자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그는 식음을 전폐하면서 기도의 깊은 자리로 내려갔습니다. 그런 가운데 큰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더 깊이 파라. 때가 되면 원하는 것을 얻으리라.” 인간적인 견지에서 생각하면 아무리 깊게 파도 금이 나오지를 않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는 예수님의 음성을 베드로가 듣고 그 말씀을 의지해서 그물을 내렸을 때,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 축복을 받았던 것을 생각하면서 록펠러는 광부들을 독려했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깊이 파내려 갔습니다. 한참 파내려 갔을 때였습니다. 갑자기 “펑!”하면서 검은 물줄기가 치솟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흔한 지하수와는 달랐습니다. 분석해 보니까 석유였습니다. 유전이 그곳에서 발견된 것입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록펠러는 미국의 석유 왕이 되었습니다. 당대 세계에서 제일가는 갑부가 된 것입니다
▶ 성경에는 성공만 기록된 것이 아니라 실패의 기록이 더 많습니다. 사실 ‘성공’이란 단어는 성경에 단 한번 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성공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 입니다. 인간의 성공이 하나님께 별 영향을 주지 않는 것처럼 성경은 성공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오히려 인간의 실패와 실수의 사건을 통한 교훈이 성경에 가득 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아담의 실패의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아담과 하와의 실패는 탐욕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들은 터무니없는 하나님과 같아지려는 탐욕을 품고 선악과를 따먹는 불순종의 죄를 짓게 됩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복된 존재로 창조하시고, 필요한 것을 다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담은 실패 했습니다. 이처럼 탐욕은 부족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감사와 만족이 없는 데서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더불어 요한계시록에서는 믿는 이들이 하나님 나라에서 살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조상들의 과거와 우리의 현실을 보여주는 동시에 미래에 대한 소망을 갖게 합니다.
▶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실패에 맞서 싸우는 5가지 방법’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첫째, ‘실패’라는 단어 대신 ‘시행착오’라는 말을 사용하라. 희망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쉽게 재기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마지막’이라는 생각을 버려라. 실패를 딛고 재도전할 기회는 반드시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셋째, 자신을 실패자로 비하하지 말라. 실패의 원인을 분석하고 반성은 하되 비하해서는 안 된다는 말 입니다.
넷째, 항상 실패를 맞을 준비를 하라. 인생은 깊은 수렁도 있고 넓은 초원도 있기 때문입니다.
다섯 째, 실패가 예견되면 빨리 단념 하라. 사람들은 가끔 차선책에 대한 미련으로 최선책을 놓치는 우를 범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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