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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세상의 소금이 되라
2012년 9월 23일 / 대예배 / 마태복음 5:13, 16
본문은 그 유명한 예수님의 ‘산상보훈’입니다. 예수님은 먼저 ‘팔복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팔복’은 성도들에게 삶의 지침서입니다. 그리고 본문에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신 2가지의 상징적인 용어를 쓰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에 빛이다.’라고 하는 용어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는 글은 많은 교회들의 표어가 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한마디로 묶어서 해석한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제 구실을 하라’는 뜻입니다.
보통 ‘빛과 소금’이라는 단어를 신앙인들은 자주 씁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니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그리고 그 다음에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였습니다. 순서가 빛과 소금이 아니고, 소금과 빛입니다. 순서가 바뀌면 먼저 빛나고, 그 다음에 녹아지는 소금이 되려 하지만 순서가 소금부터 입니다. 소금처럼 먼저 녹아져야 맛을 내고, 부패를 방지하여 소금의 사명이 다하게 되어 빛을 비추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희생도 없이 세상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합니다. 광을 먼저 내려고 하면 반드시 부작용이 생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렇게 행동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책망을 하신 것입니다.
마 6:2, 5, 16 / 가난한 사람에게 자선을 베풀 때에는 위선자들이 하는 것처럼 하지 말라. 그들은 자기들의 자선행위를 드러내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나팔을 분다.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그들은 이미 받을 상을 다 받았다. 5) 또 기도할 때 경건한 체하는 위선자들처럼 하지 말라. 그들은 남에게 보이려고 큰길 모퉁이와 회당에서 드러나게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그들은 이미 받을 상을 다 받았다. 16) 금식할 때 위선자들이 하는 것처럼 침울한 표정을 짓지 말라. 그들은 얼굴을 창백하고 텁수룩하게 하여 보는 사람에게 측은한 생각이 들도록 한다.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그들은 이미 받을 상을 다 받았다.
만일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이 먼저 소금과 같은 사람이 되었다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필요도 없었을 것이요, 그들에게 책망도 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세상에는 소금보다 더 좋은 것들이 많은데 왜 예수님이 ‘너희는 이 세상에 소금’이라고 하셨을까요?
1. 우리에게 ‘소금’이라고 하신 것은 성도의 가치를 알라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금, 은, 다이아몬드, 보석들이 비싸고 가치가 있어 소유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금이나 보석이 없어도 살지만 소금이 없으면 살 수 없는데 이것이 소금의 가치입니다. 요즘에 직장인들이 월급을 타는 사람을 샐러리맨(salary man)이라고 부르는데 샐러리(salary)라는 어원은 라틴어의 소금(salt)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살던 시대에는 로마 나라에서 공무원들에게 소금으로 월급을 주었다고 합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돈보다 소금이 더 귀하고 비싼 가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성도들이 세상에서 자신의 가치를 알고 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의 걸작이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어서 구원하신 귀한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온 세상과 온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가치가 있는 존재입니다.
▶ 예수님께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영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실 때 또 중요한 뜻이 있는 줄 압니다. 그 당시로서는 믿는 이들의 수가 너무나도 적었기 때문입니다. 겨자씨처럼 미미했습니다. 그러나 겨자씨에는 놀라운 생명력이 있습니다. 시작은 미미하지만, 나중에는 심히 창대해지는 것이 바로 천국의 특성입니다. 따라서 우리 눈앞에 보이는 현실이 겨자씨처럼 미미할지라도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 하나님이 나에게 맡겨주신 하나님의 일이 겨자씨처럼 하찮게 보일지라도 그것을 소홀히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싹트고 확장되어 나가는 것입니다.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 시작됩니다. 한 방울의 물이 모여서 강과 바다를 이룹니다. 한 줌의 눈은 그 무게가 얼마 되지 않지만, 계속해서 쌓이면 나뭇가지를 꺾어버립니다.
■ 미국의 어느 주일학교 교사의 이야기입니다. 하루는 교회를 가는데 골목길에서 코흘리개 아이들 4 명이 놀았습니다. 그는 아이들을 잘 설득해서 교회로 전도했습니다. 사랑을 다해서 매 주일마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당시 아이들에게 심겨진 믿음은 겨자씨 한 알만큼 미미했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삼십 수년이 흘렀습니다. 그는 생일을 맞아 4통의 축하 전보를 받았습니다. 삼십 수년 전의 코흘리개 어린 아이들이 모두 장성해서 어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의 생일을 기억하면서 축하 전보를 보내냈습니다. 첫 번째 사람은 선교사가 되어 중국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두 번째 사람은 미국 연방 은행의 총재가 되었습니다. 세 번째 사람은 백악관에서 대통령을 보좌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었습니다. 네 번째 사람은 바로 백악관의 주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미국의 31대 대통령이었던 허버트 클라크 후버 대통령으로 우리에게 후버댐으로 잘 알려진 인물입니다.
▶ 하나님 나라는 겨자씨처럼 작게 시작합니다. 한번 역사를 뒤돌아보십시오. 하나님 나라는 팔레스타인 지방의 갈릴리라는 조그마한 동네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겨우 고기잡이 어부들이나 당시에 천대받고 손가락질 당하던 세리와 창기 등과 같은 보잘 것 없는 사람들, 연약한 사람들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기독교는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오늘날 97% 이상의 언어로 성경이 이미 번역되었고, 5대양 6대주의 거의 모든 지역으로 복음이 확산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다스리심과 하나님의 통치하심을 받는 그리스도인들이 겉으로 보기에는 겨자씨와 같이 나약한 존재이지만 스스로를 부끄럽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겨자씨가 자라듯이 우리에게도 미래가 있기 때문입니다. 씨앗은 작지만 나중에는 거창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세상의 원리로는 큰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큰 것을 선호합니다. 특별히 한국 사람들은 시작을 거창하게 하고 큰 것을 좋아합니다. 한국 사람들은 조그만 나라에서 태어나서 그런지 유별나게 큰 것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나라 이름부터 큰 대(大)자를 앞에다 붙여 대한민국이라고 부릅니다. 왕도 그냥 왕이 아니라, 큰 대(大)자를 사용하여 양평대군, 수양대군, 세종대왕이라고 대(大)자를 넣어 불렀습니다. 요즈음에도 최고수반을 큰 대자를 앞에다 집어넣어 대통령이라고 부릅니다. 최고 학부도 큰 대(大)자가 앞에 붙어 대학교, 대학원이라고 부르고, 외교 사절도 대사라고 부르고, 길 이름도 강남대로, 양재대로, 다리 이름도 한강대교, 성수대교, 잠실대교, 다 대(大)자를 붙여 부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유달리 큰 것을 좋아하는 반면, 작은 것은 무시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체어맨이나 에쿠스 같은 대형차를 운전하는 사람은 프라이드 같은 소형차를 운전하는 사람을 우습게봅니다. 이러한 모습이 아이들에게도 나타나는데, 32평짜리 아파트에 사는 아이들은 13평짜리 아파트에 사는 아이들하고 함께 놀지도 않습니다. 대그룹 회사를 다니는 부모를 둔 아이들은 구멍가게에서 일하는 부모를 둔 아이들을 아예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세상에서는 작은 것은 곧 좋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무시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정반대의 원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낮아지면 높여줍니다. 약할 때 강하게 됩니다. 반면 나중 된 자가 먼저 됩니다. 약한 자를 통해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합니다.
▶ 하나님께 아름답게 쓰임 받았던 인물들을 보십시오. 그들이 결코 훌륭한 조건들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주님께 쓰임 받았던 것은 아닙니다. 삭개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그에게는 키가 작은 핸디캡이 있었습니다. 신약 성경의 가장 첫 번째를 기록할 수 있는 영광을 얻은 마태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그는 당시에 탐관 오리였던 세리 출신이었습니다. 수가성 우물가의 여인의 과거는 어떻습니까? 과거가 대단히 복잡하여 남편을 다섯 번이나 바꾸고 동네 사람들로부터 따돌림을 받던 여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는 갈릴리 바다에서 어릴 때부터 고기잡이로 잔뼈가 굵은 사람으로, 본래 학문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 쓰임 받았던 사람들은 하찮은 겨자씨처럼 별로 내세울 것이 없는 사람들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만났을 때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을 받았습니다. 세상이 감당치 못할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세상을 복음으로 뒤집어엎는 거룩한 복음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비록 겨자씨처럼 연약하게 보인다할지라도, 스스로를 부끄럽게 여기지 마십시다. 우리들이 겨자씨와 같이 연약한 존재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스스로를 부끄럽게 여기지 마십시다. 살짝 불면 날아가는 겨자씨 같은 조그마한 존재처럼 보인다할지라도 스스로를 비하하지 마십시다. 우리 안에 엄청난 가능성이 있고 무궁무진한 잠재력이 있습니다.
2. 소금이라고 하신 것은 소금처럼 녹아지고 희생하라는 말씀입니다.
최고로 좋은 소금은 바닷물을 햇볕과 바람에 증발시켜 만들어진 천일염입니다. 소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소금이 잘 녹아서 짠 맛을 내야 합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땅속에서 캐내는 암염(巖鹽)이 있었는데, 암염이 비를 맞거나 물에 젖게 되면 소금기가 빠집니다. 이 암염이 짠맛을 잃어버리면 더 이상 소금의 가치가 없어 밖에 버려 사람들에게 밟힙니다.
이와 같이 성도가 이 세상에서 맛을 잃어버리면 아무런 가치가 없이 욕을 먹고 비난을 당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13절에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소금으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맛을 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녹아야 합니다. 이 세상은 옛날보다 날이 갈수록 인심과 사랑이 메말라가고 욕심과 이기주의가 더욱 늘어나고 극성이지만 이럴 때일수록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 말씀대로 소금처럼 녹아지고 희생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너희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 오라.”(마 16:24)고 하셨는데 십자가는 ‘자기를 희생하고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촛불이 자신을 태워 어둠을 물리칠 수 있듯이 우리들도 녹아지는 희생을 통해 어둠에 악한 세력을 물리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세상을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요즘 세상에는 우리가 전도할 때 ‘예수 믿으라’는 말로는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 없고 행동으로 보여야 하는데 그 행동은 바로 희생과 섬김입니다.
▶ ‘노블레스 오블리제’라는 말은 ‘노블레스’라고 하는 말은 귀족, 사회지도층 그리고 ‘오블리제’라는 말은 책임과 도덕적인 의무를 말합니다. 사회지도층의 도덕적인 책임의무를 뜻하는 말로 혜택을 받은 자의 특권이요, 특권계층의 솔선수범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로마제국은 역사상 가장 강한 나라였고, 가장 생명력이 긴 나라였습니다. 2000년의 역사를 넘나들고 있습니다. 로마만큼 역사적으로 강한 나라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이 로마에는 ‘노블레스 오블리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초기 로마의 왕국은 평민보다 앞서서 솔선수범과 절제된 행동으로 말미암아 강한 나라, 부흥한 나라, 생명력이 긴 나라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포에니 전쟁 때입니다. 원로원의 의원들이 경쟁적으로 자기 수레에다가 자기의 돈을 실고 나라에 갖다 바쳤습니다. 이것을 본 평민들도 앞 다퉈서 세금을 나라에 바쳤습니다. 끊임없는 전쟁으로 나라의 국고가 바닥이 날 때 국채를 발행했는데, 이 국채는 전쟁에서 지게 되면 받을 수 없게 됩니다. 이긴다고 할지라도 언제 받을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원로원의 의원들과 정부 관료직에 있는 사람들이 이것을 구입을 했습니다. 평민들에게는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로마의 지도층들은 먼저 전쟁터에 나가서 나라 위해 목숨을 바쳤습니다. 로마에 대한 전쟁 이야기를 보면, 전쟁을 원로원 의원들이 의논을 하는데 ‘누가 대표로 나가겠느냐?’ 하면 원로원 사람들이 서로 ‘나도 나가겠다, 자녀들이 전쟁터에 나가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노블레스 오블리제’입니다. ‘특권층이 특권을 포기하고 의무를 감당하는 일에 있는 자, 사회지도층이 먼저 앞장 서야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로마제국의 비결입니다.
■ 조선 500년 역사가 얘기를 하는데, 500년 명문가 이야기 가운데에 경주 최부잣집 이야기가 노블레스 오블리제에 해당됩니다. 부굴대라고 해서 부자는 3대를 가지 못한다고 했는데, 이 집안은 9대동안 진사로 지내고 12대를 만석을 한 집안으로 유명합니다. 12대를 만석을 했다는 것은 한 세대를 30년이라고 하면 근 400년을 부자로 산 것입니다. 조선 500년 가운데 400년을 부자로 살았다는 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닙니다. 아마 전쟁이나 이런 어려움이 없었더라면 이 부잣집은 더 오랫동안 지속됐을 겁니다. 이 부잣집도 그냥 된 것이 아닙니다. 경주 최부잣집의 가훈, 원칙을 소개를 합니다.
1. 진사 이상의 벼슬을 하지 말라. / 진사는 양반의 최소한의 자격 요건입니다. 가진 자가 권력까지 가지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권력을 가지고 남을 돕는 일을 하던지, 소유를 가지고 남을 돕던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2. 만석 이상 불리지 말라. / 재산을 불리지 말라는 겁니다. 최부잣집은 자기들의 생각을 넘으면 사회에 환원을 원칙으로 했습니다. 그래서 동네사람이 최부잣집의 돈이 늘어나기를 바랐습니다.
3.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 1년에 3천석의 수입이 들어오는 가운데, 1천석은 집안일을 위해 쓰고 또 1천석은 나그네 대접하는데 쓰고 남은 1천석은 가난한 이웃들에게 쓰라는 겁니다.
4. 흉년에는 논을 사지 말라. / 헐값으로 가난한 사람의 그 마음에 상처를 주지 말라는 겁니다.
5. 시집 온 며느리는 3년간 무명옷을 입어라. 사치하지 말고 검소하라는 말입니다.
6. 사방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내 식구, 내 집이 아니라 100리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책임진다는 겁니다.
이것이 400년의 역사를 만석꾼 집안으로 살아왔던 경주 최부잣집의 성공 비결입니다.
▶ 소금처럼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묵묵히 녹아 남에게 유익을 주는 성도의 본분을 다 한 사람은 틀림없이 하나님 앞에 섰을 때에 이런 말씀을 듣게 될 것입니다.
마 25:34-40 / 그리고 왕인 나는 내 오른편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사람들아, 와서 천지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이 나라에 들어가라. 35) 너희는 내가 배고플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 되었을 때에 너희 집으로 따뜻하게 맞아들였다. 36) 또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병들었을 때와 감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와 주었다.” 37) 그때 그 의로운 사람들은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이 배고프신 것을 보고 잡수실 것을 드렸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렸습니까? 38) 또 언제 주님이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도와 드렸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렸습니까? 39) 언제 주님이 병드셨거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찾아가 뵈었습니까?” 40) 그러면 왕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너희가 여기 있는 내 형제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곧 내게 해준 것이다!”
3. 소금의 역할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물건마다 자기 역할이 있습니다. 시계의 역할은 시간을 알리는 것이요, 마이크는 소리를 내는 것입니다. 자기 역할을 하지 못하면 무용지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소금이 맛을 내지 못하면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라.”고 했습니다(13).
① 소금의 역할은 방부제 역할입니다. 예수님이 사시던 팔레스틴 지역은 온도가 높은 무더운 사막 지역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냉장고도 없던 시절, 식품을 오래 보관하기가 매우 힘들었는데 소금만 넣으면 식품을 오랫동안 신선하게 보존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 안동 간 고등어가 전국에서 유명하게 된 이유도 바다와 멀리 떨어져 있어 생선을 보관하기 위하여 소금에 절였던 것이 지금에 와서 이렇게 유명하게 된 것입니다. 지금도 어부들이 배를 타고 고기를 잡으러 나가서 고기를 잡으면 바로 냉동시키거나 아니면 소금을 붓는 이유는 생선이 변질되거나 부패되지 않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신 말씀은 세상의 방부제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여러 가지로 변질되고 썩어가고 있는데 그 이유는 죄 때문에 썩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피로 죄 용서 받고, 죄악에서 구원을 받은 자입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들은 세상 사람들과 같이 썩지 말고 이 세상이 썩고 부패되는 것을 막을 책임이 있습니다.
▶ 바닷물의 평균 염분은 3%입니다. 적도 부근은 비가 많이 오므로 1%정도 밖에 안 되고 이스라엘 나라에 있는 사해 바다의 염분 농도는 20%입니다. 바다에 3%의 염분만 가지고 있어도 바닷물은 썩지 않습니다. 아무리 더러운 물이 들어오고 썩은 물이 들어와도 바닷물은 다 정화시키고 깨끗하게 합니다. 그런데 한국은 20%의 성도가 있는데도 아직도 이 사회가 썩어 구린내가 진동하고 있는 이유는 예수를 믿는 성도들이 그만큼 소금의 역할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대 교회처럼 살았다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었기 때문이고, 에베소 교회처럼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기 때문이고,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미지근하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같이 썩었기 때문이고 짠맛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부패를 방지하는 소금의 사명을 다해야 합니다.
② 소금은 맛을 내는 조미료입니다. 사람들이 먹는 음식은 대부분 소금이 들어가 맛을 냅니다. 성도들도 세상에서 맛을 내고 살라는 말씀입니다. 소금은 귀하고 꼭 필요한 존재입니다. 사람이나 짐승도 소금이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소금은 음식의 맛을 조절합니다. 단맛, 쓴맛, 매운맛, 신맛은 없어도 음식을 먹을 수 있으나 짠맛이 없으면 음식을 먹을 수 없습니다. 너무 짜도 안 되지만 너무 싱거워도 안 됩니다.
소금이 짠맛을 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세상에서 맛을 내야 합니다. 맛을 내지 않는 소금은 소금이 아닙니다. 소금의 핵심은 맛입니다. 여기에 맛이란 인생의 의미와 인생의 목적을 말합니다. 권력과 돈이 많은 사람들이 왜 자살합니까? 인기 많은 가수나 탤런트들이 왜 자살 합니까? 그것은 인생의 맛과 의미를 잃어버렸기 때문이고, 인생의 맛과 의미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께로부터 와서 하나님을 위하여 살다가 하나님께로 가는 존재인데 세상 사람들은 인간이 어디서 와서, 무엇 때문에 살고,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하기에 인생의 의미도 모르고, 사명과 목적도 모르고 돈만 위하여 살아가 죽습니다. 이렇게 사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소금처럼 맛을 내어 저들이 인생의 맛과 의미를 찾게 해야 합니다.
소금이 맛을 내려면 녹아져야 하듯이 우리도 세상에서 맛을 내려면 나를 포기하고, 희생하며 녹아져야 합니다. 내가 살아서 욕심 부리고, 교만하고, 손해를 안 보려고 하면 이런 사람은 맛을 낼 수가 없고 이렇게 사는 사람들은 아무런 쓸모가 없어 밖에 버리어 사람들에게 밟히고 마는 것입니다
4.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라(마 5:16)
마 5:16 / 너희 빛을 가리지 말고 모든 사람들에게 환하게 비추어라. 모든 사람에게 착하게 행동하라. 그래서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라.
소금이 소금의 역할을 잘 할 때에 세상에 빛이 되어 빛의 역할까지 하게 됩니다. 소금에서 빛이 되어 온 세상에 아름다운 영향을 끼치려면 누군가의 헌신과 희생이 필요합니다. 먼저 성도에게 요구되는 것은 결코 큰 것이 아니라 작은 것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다.
■ 조그만 등대가 대한민국을 건졌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1950년 9월15일은 인천 상륙 작전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7만 5천의 병력과 261척의 함정이 자정에 인천에 상륙해서 완전히 패망하고, 인민군에 밀려 낙동강 전선까지 잃어버리고, 부산, 제주도만 남았을 때에 그 중간 허리를 끊고, 한국을 살려낸 인천 상륙 작전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가 잊을 수 없습니다. 노르망디 작전 못지않게 우리에게는 중요합니다. 1950년 6.25일 주일 아침, 고요한 아침에 전쟁이 일어나, 느닷없이 폭격과 침공을 받아서 우리는 남으로 피난을 갔습니다. 아마 피난길에 여러분들이 피난 보따리를 들고 피난하신 일들을 기억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저도 피난 갔던 것을 기억을 합니다. 전쟁의 그 비참함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1950년 낙동강까지 밀려, 부산밖에 남지 않고 전국이 함락되는 위기에서 맥아더 장군은 인천 상륙 작전을 계획했습니다. 당시 목사님과 기독교인들이 부산에 모여 기도를 했습니다. 기독교인은 공산화가 되면 다 죽으니까, 살 길을 찾아 남으로 피하여 제주도까지 모였는데, 부산과 제주도에서 기도회를 가졌습니다.
“하나님! 이 민족을 살려 주셔야지, 그렇지 않으면 모두 망하게 되었습니다.”라고 회개하고 기도하는 중에, UN에서는 UN군을 파송하기로 결정하여 10만군의 지원군과 각국의 함정들이 인천에 상륙할 것을 기획했던 것입니다. 사실 인천은 조수 간만의 차가 세계에서 가장 심합니다. 게다가 수로가 험하고, 암초가 많아서 그런 해안의 조건에서는 야간에 등대의 도움 없이는 상륙 작전을 엄두도 못 내는 절대 불가능한 상황입니다. 인천 앞바다의 조그만 섬인 ‘팔미도’라는 작은 섬에 작은 등대 하나가 있는데 넓이는 2m, 높이는 7.9m 입니다. 등대의 불빛이 지나다니는 모든 배들에게 암초와 방향들을 알려 주었습니다. 당시에 인민군 수중에 들어가 있고, 팔미도 등대의 불을 완전히 꺼버렸기 때문에 켜지지 않으면, 상륙 작전은 밤에 감행할 수 없다는 것이 결론이었습니다. 미국과 영국, 캐나다, 호주의 7만 5천명의 연합군과 261척의 함정이 상륙하기에는 등대 하나가 결정을 해 준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맥아더 장군은 7월에 Blue Hearts 작전을 세웠습니다. 미군이 적의 남하를 저지하지 못해 취소되었지만, 맥아더 장군은 인천 상륙 작전에 대한 집념을 포기하지 않고, Chromite라는 이름 아래 한국인 3명, 미국인 3명(유진 클라크 美 해군 대위, 클락 혼 美 육군 소령, 존 포스터 美 육군 중위, 계인주 육군 대령, 연정 해군 소령, 최규봉 KLO 고트隊 대장 등 6명이었다.)을 특공대로 그 섬에 보내게 됩니다. KLO 켈로 부대라고 하는 이 특수 부대가 최규봉 씨를 대장으로 해서 이 조그만 섬을 탈환, 등대를 장악하게 됩니다. 9월 10일에 등대를 탈환하라는 명령을 받고, 9월 15일 00:00시에 등대를 밝히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등대까지 올라가 적과 싸워 등대를 점령하고 보니, 등대에 불이 꺼져 있었습니다. 불을 켜는 반사경의 전선이 나사가 풀려 어찌 할 바를 모르고, 시간은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261척의 배와 7만 5천의 군인이 어둠 속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이 불이 켜져야만 항로를 찾아서 상륙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생존하고 계신 당시의 부대장 최규봉 옹(80세)은 당시에 청년이었는데, 나사를 찾는데 3시간이 소요되었다. 대원들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3시간가량 나사못을 찾아 헤매다 포기하고 기진맥진해 엎드려 있었다. 이때 등대 바닥에서 崔대장의 손에 「선뜻한」느낌의 금속이 잡혔다. 바로 나사못이었다. 특공대는 드디어 등대의 불을 밝히는 데 성공했고, 아군이 점령했음을 알리기 위해 등대 鐵材(철재) 난간에 星條旗(성조기)를 게양했다. 팔미도를 애타게 바라보던 연합군 함대가 등대의 불빛을 본 것은 1시간 40분 늦은 2시 20분 이었다고 합니다. 초조하게 기다리던 맥아더 장군은 등대의 불빛과 성조기를 확인하자, 인천 앞바다로 진격 명령을 내렸습니다. 7개국 연합군의 함대는 서슴없이 등대의 불빛을 받아가면서 위치를 확인하고, 인천 상륙 작전을 성공하게 됩니다. 9월 28일에 서울이 다시 수복이 되고, 한국이 살아나게 된 것입니다. 이 등대의 빛이 없었다면 상륙 작전은 불가능 했을 것입니다.
등대의 불빛 없이 그냥 달려서 무모하게 갔다면, 그 진흙 바닥에, 수많은 병력과 군인들이 거기서 망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 사건은 빛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가르쳐 줍니다. 등대가 중요합니다. 한 사람의 등불이 수많은 사람을 살리고, 한 작은 등대가 한 나라를 살리고, 한 작은 불빛이 수많은 전쟁을 이기게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대단히 중요한 교훈을 주는 것입니다.
■ 차범근 선수가 독일 분데스리가에서 축구를 할 때 얘기입니다. 어느 날 기도하는 가운데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축구 선진국에 와서 축구선수로 뛸 수 있을까?’하는 감사와 겸손의 생각이 들더랍니다. 그리고서는 성경을 보니까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다’는 그 하나님의 말씀에 감동을 받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나한테 주는 말씀이구나’하고 믿고, 이때부터 축구를 하는 목적과 이유가 분명해졌는데 주를 위하여 축구를 한다는 것입니다. 돈 벌고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축구를 하는 게 아니라 「주를 위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영광을 위하여」이 목표를 정했습니다. 하루는 시합에 나가서 뛰는데 독일 선수들이 이 차선수를 우습게 생각을 하며 ‘동양에서 온 선수가 뛰면 얼마나 뛰겠나’ 싶었답니다. 근데 생각보단 잘 하니까 상대편 선수들이 ‘그냥 두면 안 되겠다’고 싶어 집중적으로 태클을 했습니다. 함부로 꼴 넣을 생각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러다가 하루는 굉장히 큰 부상을 입었습니다. 누가 보아도 고의적으로 한 부상인데, 축구를 못하는 것뿐만 아니라 불구가 될 정도로 허리부상을 당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침대에 누워있는 차선수를 보고 “고소(告訴)해라. 고소하면 된다. 명명백백 상대편 선수의 잘못이니까 십만 마르크(30년 전에 10만 마르크는 지금의 7천만원정도)는 받을 것이다.” 독일 사람의 상식으로는 고소가 당연합니다. 그런데 차범근 선수는 억울한 일을 당하고 선수 생명은 물로 몸이 불구가 될 수도 있다고 하는데도 고개를 흔듭니다. 나를 뛰게 하는 것도 하나님이시고 나를 부상에서 병상에 누워있게 하신 것도 하나님이시라는 겁니다. “나는 살아도 주를 위해서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서 사니 나는 고소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믿습니다. 안 하겠습니다.” 고소하지 않는다는 말이 독일의 여론이 알게 되자 병실에 꽃다발이 쌓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름,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 꽃다발을 병실에 쌓아놓으면서 차선수를 격려하고 위해서 기도하였습니다. 칭찬하고 인정하는 겁니다. 그 후로 10년 동안 외국인 선수로 가장 오래 뛰고 가장 득점을 많이 하였습니다.
■ 크리스마스 때만 뉴욕에 나타나는 특별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크리스마스 때가 되면 돈뭉치를 들고 나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10불씩 나누어 주었습니다. 이번 크리스마스에도 무려 3천불을 나누어주었다고 합니다. 전에도 자기가 사는 도시에서 그렇게 했었습니다. 이것이 화젯거리가 되자 기자들이 그를 찾아와 그가 누구인지, 왜 그런 일을 하는지 물었지만 아무 대답도 듣지 못하다가, 끈질기게 묻자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사연인즉, 그가 20대 초반에 직장도, 먹을 것, 돈도 몇 푼 없었답니다. 어느 날 마지막 남은 돈을 들고 식당에 가서 점심을 먹으면서 ‘오늘 저녁부터는 어디서 먹고 잘까?’ 고민하고 있는데, 웬 할아버지 한 분이 지나가면서 허리를 굽혀 바닥에서 뭔가 줍더니 “젊은이, 자네가 여기 돈을 떨어뜨렸네.”하면서 10불을 주고 나갔답니다. 사실 그는 돈을 떨어뜨리지 않았습니다. 젊은이가 혼자 점심을 먹는 모습을 식당 저편에서 지켜보던 그는 수심 가득한 이 젊은이에게 큰 문제가 있는 걸 알아채고 일부러 그 옆에 와서 10불을 떨어뜨리고는 주워주는 척하면서 돈을 주고 간 겁니다. 선(善)은 감동을 일으킵니다. 선한 말 한마디, 선한 행동 하나가 빛이 됩니다. 어둠 속의 이 젊은이는 빛을 보았습니다. 그 후 이 젊은이는 사업에 성공을 했습니다. 20대 초에 그 할아버지를 통해 느꼈던 빛이 그의 마음속에 살아있어서, 크리스마스 때마다 모르는 사람들에게 10불씩 나눠주며 빛을 비춰 삶의 기쁨을 사람들에게 안겨주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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