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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삼국(三國)을 통일(統一)한 신라 화랑도(新羅花郞道)
태자시절에 김춘추는 김유신과 함께 큰 계획을 세웠다.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키고 천하를 통일하려면 어떤 방법으로 싸워야 할까?"
태자가 김유신에게 물었다.
"지금 우리 신라에는 임전무퇴(臨戰無退)의 화랑도 정신과 무력을 당할 자 없나봅니다.
그러나 한 나라만 상대하면 문제없지만 두 나라의 연합군을 한 번에 물리치기는 힘에 겨운 일입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그래서 무슨 묘안이 없을까 궁리 중일세."
태자 김춘추도 동감이었다.
"만일 당나라를 우리편으로 권유해서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으로
여제연합군(麗濟聯合軍)을 공격하면 반드시 승리하고 삼국 통일의 숙원을 우리 대(代)에 이룰 수 있습니다."
"음, 그럼 누구를 청병사(請兵使)로 당나라로 보낼까?"
"동궁(東宮--太子)께서 직접 가셔야 성공할 것입니다.
일이 너무 중대하고 비밀도 지켜야 하기 때문에 다른 신하를 보내는 것보다 동궁이 제일 좋습니다.
장차 등극하실 동궁께서 당나라의 왕실 규모와 선진 문화를 배워 두는 의미에서도 한 번 여행을 하고 오십시오.
등극하신 후에는 여행을 하실 기회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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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은 적극적으로 태자에게 직접 청병사로 가라고 권했다.
춘추는 그의 권고에 따라서 당나라로 가서 군사동맹의 비밀외교를 했다.
그러나 당나라 황제는 태자가 장차 왕위에 오른 뒤로 미루고
우선 김유신으로 하여금 화랑도 정신으로 강병을 양성하라는 충고를 했다.
그러나 당나라는 당시의 진덕여왕이 약해서 제대로 정치를 다스리지 못하고 있었으므로
아무리 태자 김춘추와 명장 김유신이 있더라도 한반도를 통일할 시기가 못 된다고 단정했기 때문에
태자가 왕이 된 후로 미루었던 것이다.
그러나 태자 김춘추의 인품이 비상함을 알고
그는 당나라에 두고 열렬한 친당파(親唐派)로 만들려고 했다.
"삼국통일의 큰 포부를 위해서는 우선 왕자(王者)로서의 대기(大器)를 이루어야 하오.
그러니 우리 나라에 몇 해 머무르면서 학문을 연구하고 돌아가는 것이 좋을 거요."
당나라 황제가 간곡히 청했다.
그러나 김춘추는 이러한 황제의 호의를 여러 가지 구실로 사양하고 귀국했다.
그 자신도 당나라에서 적어도 왕자학(王者學)을 연구하고 돌아오고 싶었다.
그러나 일국의 태자의 몸으로서 정치적 인질(人質)이 될 위험성을 경계했던 것이다.
당시 당나라를 중심으로 한 국제정세는 복잡 미묘했다.
당나라와 군사동맹을 맺는데 성공한 나라가
한반도의 통일 왕국이 될 수 있다는 공산(公算)은 거의 상식적인 정세에 놓여 있었다.
고구려도 백제도 신라 못지 않게 군사동맹의 비밀교섭을 하고 있으리라고 판단한 그는
자기가 당나라에 오래 머무르고 있는 동안에 만일 국제정세가 신라에게 불리하게 되면
속절없이 인질이 될 것이 냉혹한 국제관계였기 때문이다.
☆☆☆
그래서 그는 나당군사 동맹을 자기가 왕이 된 훗일로 미루고 귀국했다.
무열왕으로 등극한 후에 그는 김유신과 더불어 모든 정치를 삼국통일의 계획 밑에서 쌓아 올렸다.
그리고 역사적 일대비약의 시기만 노리고 있었다.
천운은 신라에게 유리하게 돌아서 우선 백제가 병들어서 망국징조를 계속 나타내고 있었다.
백제 제 31대 의자왕(義慈王)은 태자 시절에는 문무에 뛰어나고
부왕(父王)에게 효성이 지극해서 해동증자(海東曾子)라는 칭찬까지 받았다.
그러나 호왕(虎王)의 뒤를 이어서 왕이 된 뒤에는
사람이 돌변해서 삼천 궁녀를 거느리고 주색에 빠져서 나라 일을 완전히 돌보지 않았다.
그 때문에 관기가 문란하고 백성이 도탄에 빠졌다.
"이런 세상이 망하지 않은 역사가 없다."
백제의 식자들은 조국의 운명이 풍전등화(風前燈火) 같은 상태에 있음을 한탄했다.
그리고 망국의 해괴한 징조가 계속적으로 일어나서 민심이 각박해졌다.
이 때 백제의 좌평(佐平=총리대신) 성충(成忠)이
의자왕에게 궁중의 음란을 규탄하고 백성의 도탄을 구제하라는 상소문을 올렸다.
그러나 왕은 도리어 충신의 말에 노해서 그를 잡아 옥에 가두고 사형에 처하려고 했다.
죽음을 무릅쓴 성충은 마지막 힘을 다하여 백제의 망운(亡運)을 걱정했다.
그러나 의자왕은 자기의 잘못을 간하는 충신의 말이 듣기 싫어서 성충을 잡아 죽였다.
그 후로는 감히 왕의 잘못을 말하는 자가 없었고 궁중은 마침내 주색의 마굴로 화해 버렸다.
성충의 억울한 처형 이후 2년 동안이나 해괴한 흉조(凶兆)가 나타났다.
오회사(烏會寺)에서는 붉은 말이 일주야 동안 절 주위를 돌면서 부처에게 절을 했다.
그 정상은 마치 불에 타는 말이 구원을 청하는 듯했다.
여우가 조정에 침입해서
성충이 앉아 정사를 보던 책상 위에 올라앉아서 캥캥 울고 똥오줌을 쌌다.
태자궁에서는 암탉 꼬리에 참새가 올라앉아서 해괴한 교미(交尾)를 했다.
그것은 한 궁녀를 부왕과 태자가 서로 번 갈아서 희롱하는 꼴과도 같았다.
사자수(白馬江) 강가에는 30척이나 되는 괴어가 나타나서 죽었으므로
굶주린 백성이 다투어 뜯어다 먹고 모두 중독이 되어서 죽었다.
내궐 안의 느티나무 고목이 밤중에 여자의 곡성을 내고 밤새도록 울었다.
백제 안의 우물이 모두 피 빛으로 변해서 사자수 강물도 피 빛으로 변해서 백성을 공포에 떨게 했다.
두꺼비 떼가 수만마리 모여와서 나무 위에 오르고 인가 지붕에 오르므로
이에 놀라서 도망하던 백성이 혼란 통에 밟혀 죽는 자가 속출했다.
산 위에 있는 왕흥사(王興寺) 절 문턱까지 바닷물이 밀려들고
큰배가 절문 안으로 들어와서 중들이 부처를 업고 도망하는 소동을 일으켰다.
어느 날 밤에는 귀신이 궁중에 나타나서
"백제는 망한다. 음락가무(淫樂歌舞)의 삼천 궁녀 젊은 몸도 일조에 물귀신이 된다." 하고
노골적인 저주도 퍼부었다.
▶저주하는 소리가 난 장소를 파고 보니 거북의 등에
"백제는 보름달이요, 신라는 초승달이다." 하는 수수께끼 같은 글자가 무늬로 새겨져 있었다.
의자왕이 그 괴상한 글자풀이를 명했더니
점쟁이는 그것이< 백제가 신라에게 망할 징조라 >고 고지식하게 말했다.
왕은 점쟁이의 이런 판단에 분개하여 그를 잡아죽인 뒤에 다른 점쟁이에게 다시 물었다.
그는 또 바른 대답을 했다가는 자기도 죽을 것이 두려워서 왕이 기뻐하도록 거짓말을 했다.
"보름달은 왕기(王氣)의 충만을 상징하고 초승달은 희미한 왕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백제의 위엄이 태양이라면 신라의 기상은 희미한 초승달에 지나지 않습니다.
장차 싸움이 일어나면 백제가 신라를 통합해 버릴 것입니다."
의자왕은 크게 기뻐하고 종전의 방탕한 생활을 계속하고 조금도 반성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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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무열왕은 백제에서 의자왕의 정치가 문란해서 민심을 잃고
천재지변(天災地變)의 흉조가 계속된다는 정보를 듣고 곧 김유신과 상의했다.
"백제가 극도로 부패하고 혼란에 빠져 있는 모양이니 이때 일거에 멸망시키고
그 여세(餘勢)로 고구려를 공격하면 우리 평생 소원인 삼국통일을 성취시킬 듯한데 어떤 전략을 쓰면 좋겠는가?"
"때가 왔습니다. 역시 당나라와 군사동맹을 맺고 연합군으로 백제를 쳐야 합니다.
청병사(請兵使)로는 왕자 인문(仁文)을 모시시오."
김유신은 자신 있게 말했다.
"당나라에서도 내가 태자 시절에 약속한 것이 있으니 이번에는 우리 청에 호응하리라."
무열왕도 자신을 갖고 인문을 당나라로 보냈다.
그러나 당나라는 당나라대로 한반도에 대한 야심이 있었다.
▶당나라는 한반도의 세 나라를 모두 속국 취급으로 조공을 받았으나
때에 따라 모두 충실치 못하기도 했고 세 나라를 상대로 하는 외교관계가 복잡 불편했다.
그래서 신라의 국세가 가장 강해진 이 시기에 신라로 하여금 한반도를 통일토록 도와주고
그 뒤에 신라 하나만 완전히 감시하고 신복(臣服)시키면 편리할 것만 같았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당나라의 직할 속국으로 만드는데도 신라 하나로 통일된 경우가 좋았던 것이다.
▶신라를 앞세워 삼국 통일한 뒤 신라를 그들의 수중에 넣을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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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에서는 대장군 소정방(蘇定方)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좌위장군(左衛將軍) 유백영(劉伯英)과 우위장군 빙사귀(憑士貴) 등에게
삼십만 대군을 주어서 신라를 도와 백제를 치게 했다.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이 동서에서 협공(挾攻)해 오자
백제는 비로소 당황하였으나 극심한 문란으로 갈피를 못 잡고 상하가 혼란에 빠졌다.
소정방의 대군은 서해를 건너서 백제의 덕물도(德勿島)까지 육박해서 상륙작전을 준비하고
신라의 정병 또한 김유신 장군 지휘로 질풍 같은 공격을 개시했다.
백제의 의자왕은 조정에 문무 백관을 소집하고 비상대책을 강구했다.
이 자리에서 좌평(佐平) 의직(義直)과 달솔(達率) 상영(常永)이 전술상의 의견 대립으로 격론을 벌렸다.
의직은 당군을 먼저 막아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웠다.
"당군은 대군을 거느리고 만리 항해를 해와서 피로해 있습니다.
그들은 해전(海戰)에 미숙하니 그들이 피로를 풀고 상륙하기 전에 먼저 치면 승전할 줄로 압니다.
당군만 물리치면
당군을 믿고 오만해진 신라군은 사기가 땅에 떨어져서 제대로 싸우지도 못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당군은 만리원정의 기백이 바야흐로 클 것입니다.
그리고 동원된 군대가 30만이나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신라군은 종전의 싸움에서도 우리에게 항상 패해 왔으므로
당군이 상륙해서 저희들을 돕기 전에 신라군만 먼저 전멸시키면 지리에 어두운 당군은 당황할 것이요,
우리가 그들을 희롱하면서 장기전을 꾀하면
그들은 보급물자가 떨어지고 지루한 싸움에 염증이 나서 전멸하거나 도망할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의 연합된 힘을 충분히 발휘하기 전에 약한 신라군을 먼저 공격해서 한 팔을 꺾어버려야 합니다."
의자왕은 작전에 어두운데다가 우유부단한 성격이라
이 문제도 결정하지 못하고 일각이 급한데도 우물쭈물하고만 있었다.
"이럴 때 충신 성충을 죽이지 않았더라면 능히 국난을 타개했을 텐데...
그를 죽인 뒤에 나라의 운수가 기울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이런 최대 국난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죽을 때 말한 대로 육로의 신라군이 탄현을 넘지 못하게 하고,
수로의 당군이 기벌포를 건너오지 못하도록 양면 작전을 하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한 신하가 이렇게 말했으나 의자왕에게 아첨하는 간신이
"성충은 국왕이 저를 사형에 처하시게 되자 그 보복을
제가 죽은 뒤에 하려고 그런 필패(必敗)의 용병술(用兵術)로 저주했습니다.
만일 그 놈의 말대로 싸우다가는 큰일 납니다.
그 놈의 말을 반대로 듣는 것이 상책입니다.
즉 신라군은 탄현 이쪽으로 끌어들이고 기벌포 이쪽으로 끌어들인 뒤에
복병 했던 아군이 일제히 공격하면 양군 모두 그 요해(要害)에서 퇴로가 막혀서
독 안에 든 쥐 모양으로 전멸하고 말 것입니다."
의자왕은 성충의 유언을 반대로 해석하는 간신의 말에 찬성하고
나당의 대군이 백제의 요해지를 넘어오기까지 기다리는 어리석은 전술을 쓰고 말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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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나당의 대군이 충분한 휴양을 하고
요해지인 탄현과 기벌포를 지나서 부여에 가깝게 온 뒤에야 작전을 개시했다.
이 때 신라군을 거느린 김유신 장군은 질풍같이 진격해서 이미 황산(黃山) 벌판에 이르렀다.
백제의 5천 정병을 거느린 계백(階伯) 장군은 황산벌판으로 급거 출동해서 김유신의 공격군과 맞서서 일대격전을 전개했다.
계백장군도 당대의 명장으로서 김유신과 상대가 될 만한 인물이었다.
그는 처음 싸움에는 네 번이나 이겨서 백제군의 기세를 올렸다.
그러나 군사는 적고 지쳤으며 끝끝내 그 사기를 계속하지 못했다.
김유신은 처음에는 고전했으나
부하에는 화랑출신의 젊은 용사가 많아서 일당백(一黨百)의 용기로 사기를 돋우어서
마침내 백제군을 전멸시키고 계백 장군까지 전사하여 신라군은 크게 이겼던 것이다.
황산벌판의 싸움에서는
신라의 화랑도를 천추에 빛낸 여러 가지 용사의 여담을 남겼을 뿐 아니라
백제에는 결정적인 패인(敗因)을 가져왔다.
동쪽 적진을 돌파한 김유신의 신라군은 백마강가에서 소정방의 당군과 합해서
일격지하에 백제의 도읍지를 점령할 기세를 올리고 있었다.
그러나 백제복병의 돌연한 기습에 소정방은 짐짓 물러서고 말았다.
능글맞은 당군의 장수들은 힘드는 싸움은 신라군에게 미루고
자기들의 희생은 내지 않으려는 야비한 꾀를 부리고 있었다.
김유신 장군은 불만이었으나 멀리서 온 동맹군의 기분을 상하지 않으려고 불만을 표시하지는 않았다.
이때 마침 괴상한 검정 새가 소정방의 본진(本陳) 위를 빙빙 돌고 있었다.
당군은 진중(陳中)에서 미신을 믿는 습관이 있었다.
"저 검정 새가 우리 진지 위를 날고 있는 것이 웬일이냐?"
하고 본국에서 데리고 온 종군 복술자(從軍卜術者)에게 점치게 했다.
"검정 흉조가 본진 위를 돌고 있는 것은 불길한 징조입니다.
잠시 이 지점을 피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소정방은 이런 점 꽤가 나왔으므로 모처럼 점령한 좋은 진지를 버리고 후퇴하려고 했다.
그러나 김유신은 당나라의 대군을 통솔하는 유명한 장군이
미신에 좌우되어서 중대한 작전을 변경하려는 경솔한 판단에 놀랐다.
그리고 그의 후퇴를 강력히 말렸다.
"소장군, 지금 백제군이 아군의 진격으로 당황해 있고
대세가 또한 순천응인(順天應人)해서 결정적 승리가 눈앞에 보입니다.
그런데 그까짓 괴조 한 마리로 후퇴를 꾀하려 합니까?"
"그러나 흉조가 불길한 징조를 나타낸 이상 신중을 기하는 것은
결코 적군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천리에 따르려는 것이요."
소정방 장군은 매우 주저하는 빛을 보였으나 유신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소장군, 소인이 저 새를 화살로 쏘아 떨어뜨리겠습니다.
만일에 저 새가 내 화살을 피하면 후퇴하셔도 좋습니다.
그러나 나르면서도 소인의 화살을 피하지 못하고 맞아떨어지면
진중의 먹을 것을 노리러 온 주린 새에 불과하니 후퇴하시지 마십시오."
소정방은 김유신의 말에 일리가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장담하는 김유신이 새를 쏘아 맞추지 못한다면 그의 자부심을 꺾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허락했다.
"좋소. 어디 김장군의 활 솜씨를 보여 주시오."
"그러나 혹 실수해도 비웃지는 말아 주시오.
한 번 실수는 병가(兵家)에도 있을 수 있는 일이니까요. 허허허"
김유신은 여유 있는 농담을 하고 활을 당겨서 나는 새를 쏘았다.
화살은 보기 좋게 검정 새를 맞추어서 소정방 발 밑에 떨어뜨렸다.
"흠, 과연 신라의 궁술(弓術)이 놀랍소."
"소장군, 이 새가 비록 흉조라 해도 인제 액운을 제거했으니 아무런 걱정 마십시오."
"아 고맙소, 액운이 이걸로 풀렸으니 후퇴하지 않겠소."
김유신은 당군을 후퇴시키지 않는 작전상의 우세를 확보했을 뿐 아니라
신라를 도와주러 왔다는 거만한 태도에 일침(一針)을 준 것이기도 했다.
"자아, 연합군으로 총 공격을 개시하십시다."
유신은 작전의 주도권을 장악한 기개로 소정방을 격려했다.
그래도 소정방은 선봉으로 공격하려고 하지 않았다.
"소장이 선봉을 맡고 쳐들어가겠습니다.
귀국 군대는 좌우에서 포위태세로 적군의 도망을 막고 추격전을 가해 주시오."
"좋소!"
이리하여 나당연합군은
수적으로도 압도하는 대병력으로 물밀 듯이 백제의 도읍지를 향해서 당당히 쳐들어갔다.
이때 백제군은 감히 출격해서 막지 못하고 도성(都城)으로 후퇴 집격해서
성문을 굳게 닫고 농성(籠城) 방위의 소극적 태도밖에 취하지 못했다.
이 전쟁터에서 백제군은 만여 명이나 전사하고 사기가 극도로 떨어져서 자멸의 운명을 기다리게 되었다.
의자왕도 도저히 나당연합군을 막을 수 없다고 단념하고 비로소 충신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다.
"아아, 내가 일찍이 성충의 충간(忠諫)을 들었다면
이런 망국의 대 환을 당하지 않았을 것을..."
☆☆☆
의자왕이 서울을 버리고 도망쳐 버리자
왕의 둘째 아들 태(泰)가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그는
왕위만 탐내고 왕의 허락 없이 왕을 자칭했으나 물론 적군을 막을 도리는 없었다.
"나라가 다 망하는 판국에, 왕과 태자가 도망친 틈에 왕이 되려는 태의 역적행위는 하늘이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군대도 백성도 이 태의 허울좋은 왕좌를 비웃고 모두 달아났다.
그리하여 백제는 결국 망하고
왕실의 추태까지 연출하여 세인의 빈축을 사고 말았다.
소정방은 백제의 항복을 받고 의자왕, 태자 그리고 잠시 왕을 자칭한 태까지 모조리 잡고
장수 88명과 국민 43,107명과 함께 당나라 서울로 납치해 갔다. 실로 사상 최대의 포로였다.
백제의 항복을 받은 뒤에 당나라는 임시로 백제에 무인정치를 베풀고 있었다.
신라의 무열왕과 김유신은 백제의 영토와 백성을 신라에서 통치하려고 했으나
소정방 장군은 그러한 신라의 뜻을 알면서도 무시해 버리고 말았다.
신라로서는 아직 고구려라는 적이 남은 이때
전리품을 다투려고 는 하지 않고 고구려를 공격할 준비에 몰두하고 있었다.
물론 고구려를 쳐들어가는데 있어서도
당군이 주동적 역할을 하고 신라군이 응원하는 태세가 되었다.
☆☆☆
백제를 멸망시키고 무인정치를 실시한 소정방은
이번 전쟁으로 고구려까지도 자기나라의 속국으로 만들려는 야심을 품었다.
그래서 고구려 점령 시에는
되도록 신라군은 발언권을 주지 않으려고 주동적인 작전을 전개했던 것이다.
김유신은 대군의 선두에 서서 직접 평양성을 함락시키고 싶었으나
소정방이 그의 전공(戰功)을 시기하고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래서 신라군은 후방에서 주로 당군의 보급임무를 맡게 되었던 것이다.
당군이 평양 근처까지 육박하였으나
고구려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포위 당하고 식량마저 떨어져서 전멸할 상태에 빠졌다.
당군은 신라군에 시급히 막대한 군량을 공급해 달라고 호소해 왔다.
이런 급한 호소를 받은 무열왕은
막대한 군량을 당군 진지까지 운반할 용장을 누구로 할 것이냐 하는 문제로 긴급회의를 소집했다.
"적진을 뚫고 군량을 나르는데는 용병(用兵)의 자유가 있는 전투부대 투입보다도 열 배나 힘든 일이다.
그러나 동맹군 군대가 아사할 위기를 구제하지 않을 수 없다. 누가 능히 용감 신속히 이 임무를 수행하겠느냐?"
이때 아무도 말하는 장수가 없었다.
그러나 김유신이 무엇을 결심한 듯한 비장한 얼굴로
"소신이 이 임무를 수행하겠습니다."
"소신도 김 장군을 도와서 같이 가겠습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왕자 김인문이 따라 나섰다.
김유신의 용맹과 김인문의 지혜가 합쳐진다면 이 왕은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대들이 신라의 체모를 살리는 구료... 군량 2만석을 당군에 운반해 주오."
김유신은 수만 명 부하 장병 가운데서
가장 용감한 열기(裂起)와 병천, 두 장수를 군량운반의 선두 장군으로 기용하여 행장을 수습했다.
군량 수송을 하는 신라군은 엄동설한(嚴冬雪寒) 중에 지나친 강행군으로
많은 전사자와 동상자(凍傷者)를 내었으나 끝까지 싸우며 북진을 계속했다.
이때 소정방의 부대는 평양성을 점령했으나
고구려군은 초토작전(焦土作戰)으로 성내의 식량과 가옥을 전부 불살라 버리고 나와서
당군이 성안에 들어간 뒤에 주위를 포위하고 당군을 굶겨 죽이려는 작전을 하고 있었다.
김유신의 군량 수송이 평양에 접근했을 때는
평양성내의 모든 당군은 기아와 혹한에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그러나 쇠퇴한 병력을 감추기 위하여 성의 주위에는 깃발을 높이 올리고
북과 피리의 군악을 울려서 성안의 군대가 사기왕성하다는 위계(僞計)를 쓰고 있었다.
마침 대동강에 이른 김유신은
그날 밤이 새기 전에 군량을 평양성으로 보내려고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그러나 얼어붙은 대동강을 건너던 신라군은 고구려군의 기습을 받아 수천 명이 몰살당하고 후퇴했다.
그 뒤로는 감히 강을 건너가려는 군사들이 없었다.
"많은 병사의 희생으로 여기까지 와서 목적을 포기하면 전우의 영혼에 부끄럽다.
그뿐 아니라 남은 부대도 여기서 전멸 당한다.
강을 건너가면 신라의 신의를 빛내는 동시에 너희들도 살지만
여기서 겁을 내고 주저하다가는 나라의 신의도 잃고 너희들도 개죽음을 당한다.
최후의 용기로 활로를 개척하자!"
김유신은 진두에 서서 질타했다.
이때 열기와 병천의 두 용사가 칼을 빼어들고 적국을 향해서 돌격을 감행하자
다른 군졸도 용기를 회복하고 진격을 개시했다.
김유신 장군은 그들 진두에 서서 대항하는 고구려 군대를 차례로 몰살시키면 진격해 나갔다.
드디어 군량은 평양으로 반입되었고 소정방이 거느린 수만 명 군대는 아사를 면했던 것이다.
"김장군, 장군과 무열왕은 동맹국의 신의를 훌륭히 지켰을 뿐 아니라
우리의 생명을 구해 준 의인(義人)이며 은인(恩人)이오."
하고 소정방은 감격적인 치하를 했다.
☆☆☆
이리해서 고구려도 완전히 항복했다.
그러나 소정방은 김유신에 대한 생명의 은혜도 일시적인 치하였을 뿐
그가 신라의 독립성과 민족성을 주장하는 충신이라는 것에는 처음부터 경계하였다.
앞으로 한반도를 당나라 마음대로 하려 하는데 김유신과 무열왕은 눈의 가시같이 귀찮은 존재다.
백제와 고구려에 대해서 승전후의 군정을 영속화하고
장차는 신라까지 직접 지배하려는 소정방의 야심을 채우는데 누구보다도 김유신이 방해물이었다.
형식으로는 나당연합군이었지만 소정방은 사실상 나당연합군의 총사령관이었다.
그런데 총사령관인 소정방에게 김유신은
국가체면 문제는 물론 작전상 문제 등으로 소정방과 여러 번 대립해 왔었다.
그들이 처음 격론을 한 것은
백제를 칠 때 진중에서 일어난 김문영(金文潁) 장군 문제였다.
소정방은 황산벌판에서 적국의 저항이 치열해서 그것을 전멸시키기까지 시일이 걸렸으므로
당군과 합세할 기일을 부득이 며칠 지연시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 책임으로 김문영의 목을 베겠다고 호령했던 것이다.
김유신 장군은 소정방의 무책임하고 오만한 태도에 격분하여 과격하게 항의했다.
"장군은 황산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던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완강한 적의 대항을 마침내 전멸시키고
전쟁의 태세를 이미 유리하게 전개시킨 그 황산 전투를 치하하지는 않고
합군 기일을 다소 지연시킨 것만을 무자비하게 책하고
공 있는 장수를 죽이겠다는 것은 천만부당하오.
만일 김문영을 사형에 처하겠다면 그의 수령인 내 목을 대신 베시오.
소장군이 만일 그러한 태도로 우리 신라군을 대우한다면 군 동맹도 당장 파기하겠소.
그 뿐 아니라 우리는 당군과 먼저 싸운 뒤에 백제군과 싸울 셈이요."
김유신의 정의감으로는 당나라 대장군 소정방도 두렵지 않았다.
김유신은 허리에 찬 보검의 칼자루를 잡고 결투의 자세로 당군의 장수들을 호령했던 것이다.
이에 당황한 당군의 장수 동보량(董寶亮)이
"김장군 말씀대로 황산전투에서 신라군이 당한 고통과 전공이 컸으니
김장군의 실수는 불문에 붙이는 것이 전우(戰友)의 정의일까 합니다." 라고 하여
소정방의 양해를 구해서 김유신과의 충돌을 무마시켰던 것이다.
소정방은 싸움의 공을 김유신에게 빼앗길까 두려워하고 김유신을 항상 경원했다.
그러나 그의 공이 위대했기 때문에 당나라 고종황제도 백제를 정복한 뒤에
김유신의 공을 높이 칭찬하고 백제 땅의 일부를 김유신의 식읍(食邑)으로 주겠다는 특지(特旨)까지 내렸다.
그러나 김유신은 나라를 위해서 싸운 공으로
사사로운 영지(領地)는 받지 않겠다고 사양했던 것이다.
백제와 고구려를 정복한 뒤에 소정방은
군대를 한반도에 영주시키고 침략하려는 근성을 노골적으로 나타냈다.
신라에 대해서도 모든 제도를 당나라 식으로 고치라고 강요하는 동시에
그 전에 없던 내정간섭까지 하는 소정방은 마치 당나라에서 파견된 총독 행세를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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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열왕은 이런 예상치 않은 중대문제를 토의하려고 중신회의를 열었다.
"삼국통일을 하려는데 만 급해서 외국군을 국내로 청해 온 것이 잘못이었소.
우리가 동족의 피를 흘린 결과가 당나라의 영토를 확장시켜주는 것이 된다면 어찌 본래의 통일 이상에 부합되겠소.
빨리 당군을 한반도에서 철수시켜야 하겠는데 화전(和戰)간 좋은 방책을 강구해야겠소."
그러나 무열왕의 본심은 비록 승전은 했으나 백성이 전쟁으로 피로한 이 때
또 다시 당나라의 대군과 싸운다는 비상수단은 취하고 싶지 않았다.
일시의 민족적 감정이나 국가적 체면으로 옥쇄(玉碎)하려는 것은
도리어 나라와 백성의 근본까지 멸망시키는 경솔하고 위험한 결백성이라고 경계했던 것이다.
되도록 평화적으로 당군의 철퇴, 또는 당군의 내정간섭을 피하는 길로 낙착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는 왕실의 주인이오 신라의 주인이었기 때문에 일시적 민족 감정으로
통일 신라의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는 우행(愚行)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충신 다미공(多美公)과 명장 김유신 장군은 감정적인 명분론(名分論)에 급해서
"당군과 일전(一戰)하더라도 소정방의 오만한 꼴은 보기 싫습니다.
그들이 비록 대군이지만 후속부대와 무기 군량의 보급이 없는 고립상태에 놓여 있으니
장기전으로 임하면 격파할 자신이 있습니다."
김유신이 군사적 견지에서 주전론(主戰論)을 내세웠다.
"김장군의 실력과 충성을 나는 잘 아오. 그러나 그것으로 당나라와의 전쟁은 끝날까?
장군은 바다를 건너서 당나라를 정복하고 개선 할 자신과 포부가 있소?"
무열왕은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우리는 당나라의 침략을 막을 뿐이지 당나라까지 쳐들어 갈 야심도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당나라 황제의 항복을 받지 못하면 열 명의 소정방을 잡아 죽여도
당나라의 간섭은 막지 못하고 도리어 심한 압제를 자초(自招)하는 결과밖에 안 될 것이오.
참는 것도 용기니까 참는 용기로 소정방을 구실러 보내고
안으로 목전에 닥친 통일사업에 힘쓰는 것이 현명하지 않겠소?"
무열왕의 이런 의견에 대해서 강경론 자인 김유신도 다미공도 침묵을 지켰다.
"그러나 김장군도 다미공도 그 일전을 사양치 않겠다는 각오는 버리지 말고
만일의 경우를 생각하여 만반의 태세는 갖추는 것이 좋을 줄아오."
무열왕은 주전론자의 체면도 세워 주는 동시에 그라는 것이 또한 필요했으므로 격려했던 것이다.
"대왕의 분부가 지당합니다."
▶이런 긴급회의의 결과는 곧 소정방의 치밀한 정보망을 통해서 그의 귀에 들어갔다.
그는 신라와 싸우려면 당나라 황제의 허락을 받아야 했으며 사실 그것은 어려운 일이기도 했다.
소정방은 공연히 신라의 미움을 받기도 싫었으므로
개선장군으로서 당당히 본국으로 떠나고 말았다.
그 뒤에 김유신은 다음 임금 문무왕(文武王)때에야
고구려를 완전히 정복하고 삼국통일의 위업(偉業)을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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