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종 . 정철상
교리 지식에 뛰어났던 명도회 회장과 그 아들
정약종 : 1760〜1801, 세례명 아우구스티노, 서소문 밖에서 참수
정철상 : ?〜1801, 세례명 가롤로, 서소문 밖에서 참수
정약종(丁苦鍾, 아우구스티노)과 정철상(丁哲詳, 가를로)은 부자지간으로, 본관은 나주이다. 약종은 진주 목사를 지낸 정재원의 4형제 중 셋째 아들이고, 철상은 약종의 전처인 이씨의 몸에서 태어난 큰아들이다. 정약종의 탄생 시기와 장소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3형제가 모두 경기도 광주 에서 태어났고 또 그가 마혼두 살의 나이로 순교했다는 사실에서, 정약종은 1760년 마재에서 태어나 자란 것으로 생각된다.
정약종은 어렸을 때 이익(李漢) 선생에게서 사사하며 학문을 익혔다. 일찍이 그는 서학(西學)에 큰 관심을 두었던 이익의 영향과 천진암 주어사 강학(走魚寺講學)의 모임에 나가던 그의 형 약전, 그리고 동생 약용과의 관계, 또 약현의 처남인 이벽(李業, 세례자 요한)과 접촉하면서 조선 교회창설 초기부터 천주교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노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고 천주교에 정식 입교한 것은 1786년 3월로, 그의 둘째 형 약전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
비밀조직인 명도회 회장으로 선임
성격이 곧고 총명하며 탐구욕이 강했던 정약종은 일찍부터 학문에 힘써 장래가 촉망되는 인물이
었다. 그러나 천주 신앙을 가까이하게 된 뒤부터는 과거와 관직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오로지 천
주의 뜻대로 살기로 다짐하였다. 그리하여 1787년의 반회 사건(伴會事件)으로 아버지가 천주교를 금지한 때로부터 조상 제사가 문제가 된 1791년 사이에 천주교를 배척하던 집안 분위기를 피해 양근의 분원(分院)으로 이주하였다.
교리를 열심히 연구하여 교리에 무척 밝았던 정약종은,신자들을 만나면 온종일 교리를 풀이해 주었는데, 듣는 사람들도 지루해 하지 않고 잘 이해하였다고 한다. 그 결과 천주교에 대한 그의 박식함이 차차 신자들 사이에 알려져, 비록 덕망은 최창현(崔昌顯, 요한)에 미치지 못하나 교리에 밝음은 그보다 더하다는 평을 받았다. 그래서 1795년 서울에 도착한 주문모(周文膜. 야고보) 신부도 교리에 밝으며 학식으로 신자들의 추앙을 받던 정약종을 선교 활동 조직인 명도회(明道會) 회장으로 선임하게 되었다.
‘명회’ (明會)라고도 불린 명도회는 신자들 스스로가 교리를 깨치기에 노력하는 한편, 선교 활동을 목적으로 하는 교회의 비밀 조직이었다. 이 조직은 대여섯 집 내외의 신자 가정을 엮어 하부 조직인 ‘육회’ (穴會)를 이루게하고, 육회를 단위로 첨례、교리 공부 . 공동 기도에 힘쓰는 동시에, 예비신자의 교리 공부와 신심 교육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육회’ 의 책임자는 교리에 밝고 신심이 열렬한 신자였는데, 그 책임자들
은 모두 초기 교회의 지도자로서 실질적인 교회 활동을 주도하였다. 육회간
의 횡적 관계는 안전 유지를 위해 비밀 사항으로 되어 있었으며,종적으로
는 명도회 회장을 통해 주문모 신부에 직속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당시의
명도회 회장은 평신도이기는 하나,조선 교회의 선교 활동 실무를 총괄하는
전교 회장이기도 하였다.
최초의 한글 교리서 펴내
정약종은 교회의 지도자로서 활발하게 활동하던 1797년 이후, 한문에 어두운 서민들을 위해 《주교요지》(主敎要旨)라는 한글 교리서를 저술하였다. 이 책은 언문체로 쓰여진 최초의 교리서로
서 , 비유나 표현에 있어 누구나 쉽게 이해하도록 서술되어 있다. 그리하여 주문모 신부는 이《주교 요지》를 중국에서 활동하던 예수회 선교사 마이야 (馮좋正) 가 쓴《성세추요》 보다도 우수한 교리서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 교리서는 한글로 쓰여 있어 아낙네와 나이 어린 사람까지도 이를 통해 천주교 교리를 깨우치고 천주교에 입교하였다고 하며 , 교리 문제로 고민하거나 미심쩍게 생각하던 사람들도 이 책을 읽고 깨우친 바가 많았다고 한다. 따라서《주교요지》는 최창현이 엮은《성경직해》(聖經直解)와 함께 조선교회 발전에 크게 이 바지 한 한글 교리서 라고 할 수 있다.
《주교요지》에 이어 정약종은 천주교에 대한 전반적인 문제를 풀이한《성교전서》(聖敎全書)의 편찬도 진행하였다. 그러나 이 책은 작업이 절반 정도 진행되었을 때, 신유박해가 일어나 완성되지 못하였다. 실로 애석하기 짝이없는 일이지만, 그의 이러한 문서 선교 활동은 그 어느 평신도보다도 위대한 것이었음이 틀림없다.
책롱 적발사건으로박해가 전국으로 확대
한편 1800년 4월 여주에서 이중배 등이 체포된 데 이어 5월에는 양근에서 권상문이 체포되는 사건이 일어나자, 정약종은 즉시 광주 분원을 떠나 한강 뱃길을 이용하여 서울로 이주하였다. 그는 처음에는 청석동 문영인의 집에 머물다가 얼마 뒤 동생 약용의 도움으로 남대문 내 창동으로 이사하였다. 그런 가운데 6월에 정조(正祖)가 죽고 대왕대비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시작하면서 정국은 점차 천주교를 박해하는 쪽으로 홀러갔다.
결국 신유년에 접어들면서 전국적으로 천주교 박해의 선풍이 불어 닥쳤다. 그리하여 1월 10일 대왕대비의 금교령(禁敎令)이 선포되고, 유생들의 척사 상소가 빗발치는 등 세상이 매우 어지럽게 돌아갔다. 이때, 이런 분위기에 기름을 붓는 것과 같은 사건이 일어났으니,이른바 ‘책롱 적발 사건’(冊龍滿發事件) 이었다. 천주교 교리를 학문적으로 이해하고 열심히 연구하던 정약종의 집에는 여러 가지 교리서와 주문모 신부로부터 받은 편지 등이 보관되어 있었다.
그런데 박해의 분위기가 점차 고조되어 가자 정약종은 안전을 위하여 이것들을 농짝에 넣어 임대인에게 아는 신자의 집으로 옮겨 두게 하였다. 처음에 임대인은 이 책롱을 포천 홍교만의 집에 두었다가 박해가 시작된 것을알고는 서울의 송재기 집에 숨겨 두었는데, 황사영이 발각될 것을 염려하여 다시 임 대인을 시켜 자기 집으로 가져오도록 한 것이었다.
그러나 책롱을 나무 짐 속에 감추어 운반하던 임대인이 도중에 길에서 포졸들의 불심 검문을 받게 되었다. 포졸들은 당시 관에서 엄금하던 밀도살한 고기를 나르는 궤짝으로 보고 검문하였던 것이다. 그 농짝을 열어 본 결과, 다수의 천주교 책과 주문모 신부의 편지가 발각되었고,포졸들은 책롱을 압수한 뒤 이 사실을 사직 당국에 고발하였다. 깜짝 놀란 정부는 천주교 문제에 미온적이던 포도 대장을 파면 투옥하는 한편, 사안의 중대함을 깨닫고 관련 신자들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전 판서 이가환,전 승지 정약용, 전 현감 이승훈, 전 이조 정랑 홍낙민을 2월 9일에 검거한 데 이어,11일에는 권철신과 정약종을 체포하여 반역죄를 다스리는 의금부로 보내 투옥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탄압이 본격화되어,서울뿐만 아니 라 전국 각지 에서 수많은 순교자가 생겨나게 되었다.
책롱 사건이 의외의 방향으로 확대되어 천주교 신자에 대한 체포령이 발동되자,정약종은 자신에게도 체포령이 내릴 것을 각오하고 마음의 준비를 다지고 있었다. 비겁하지 않고 당당하게 대할 것을 다짐한 정약종은 정월을 지내기 위해 고향 마재에 내려갔다가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금부 도사(칡뽑)를 만났다. 그를 지나쳤던 정약종은 자기를 잡으러 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종에게 누구를 잡으러 가는 길인가를 물어 본 뒤 자기를 잡으러 가는 길이면 더 멀리 갈 필요가 없다고 전하라고 일렀다. 도사는 과연 정약종을 잡으러 가는 길이었다. 정약종은 그 자리에서 잡혀 곧장 옥으로 끌려갔다.
정약종은 책롱 속의 물건이 자기 것임을 솔직히 인정하였다. 이 일로 그는 혹독한 취조를 받아야 했고, 아울러 주문모 신부의 거처를 대라는 심한 고문을 받았다. 그러나 정 약종은 점잖게 신앙을 고백하고 천주교 교리를 설명하면서, 목숨을 구하기 위하여 천주님을 배반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하게 피력하였다. 관에서는 그의 가족에게 사람을 보내어 주 신부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면 목숨을 건질 수 있으니, 그를 대신하여 가족들이 신부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가장의 신앙과 결심을 아는 가족들은 그의 뜻을 받들어 그런 일은 알지 못한다고 대답할 뿐이었다.
순교 마당에서 보여준 의연한 몸가짐
당시 정 약종은 두 가지 죄명으로 다스려지고 있었다. 하나는 국가가 금하는 사교를 신봉하고 있다는 것이고,다른 하나는 국왕에 대한 불경과 국가에 대한 모반죄였다. 박해자들은《주교요지》에 나오는 “육신과 세속, 마귀를 원수처럼 여기고,유감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야 한다”는 ‘삼구설’(三他說)을 부모와 국왕, 인륜을 어기는 잘못된 것이며, 국왕에 대한 불경과 국가에 대한 모반을 선동하는 악질적인 주장이라고 몰아쳤다. 결국 정 약종은 1801년 2월 26일(양 4월 8일) 이승훈 - 최창현,최필공 - 홍교만、홍낙민 등과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 마흔둘이었다고 한다.
순교 때 보여 준 정약종의 의연한 몸가짐과 신앙에 대한 확신은 교회의 지도자다운 모습이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옥중과 법점을 가리지 않고 선교 활동을 펴 온 그는 형을 집행하는 장소에서도 “스스로 존재하시고, 무한히 홈숭하올 천지 만물의 대주재자이신 천주께서 여러분을 창조하셨고 보존하십니다. 당신들은 모두 회개하여 당신들의 근본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 근본을 어리석게 멸시와 조소거리로 삼지 마십시오. 당신들이 수치와 모욕으로 생각하는 그것들이 내게는 곧 영원한 영광이 될 것이오” 하고 큰소리로 외쳤다. 이에 놀란 형졸들은 그의 말을 막으며 참수대 나무 위에 머리를 대라고 지시하였다. 정약종은 하늘을 볼 수 있게 머리를 누이면서 “땅을 내려다보면서 죽는것보다 하늘을 쳐다보면서 죽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하였다. 사형 집행인인 망나니는 벌벌 떨면서 제대로 그의 목을 내려치지 못해. 목은 절반밖에 끊기지 않았다. 그러자 정약종은 벌떡 일어나 보란 듯이 크게 십자 성호를 긋고 조용히 다시 그 자세로 돌아가 치명적인 일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 장렬한 순교의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에게는 깊은 감명과 함께 천주 신앙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순간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그의 유해는 훗날 가족에게 인도되었으나, 마재의 선산에 모셔지지는 못하였다. 그것은 그의 큰형 약현이 천주교를 멀리하던 사람이기 때문이기도 였지만, 신유박해로 그의 형 약전과 동생 약용이 흑산도와 강진으로 유배당하는 재앙이 일시에 닥쳐 그의 유해를 선산으로 모시기가 어려웠기 때문이 었을 것이다. 그의 유해는 마재에서 10여 리 정도 떨어진 윗배알미리 뒷산에 모셔졌다가, 이후 몇 차례의 이장을 거쳐 천진암(天眞著)묘역으로 옮겨졌다.
아버지와 같은 장소에서 순교한 정철상
정약종에게는 아들 둘과 딸 하나가 있었는데, 큰아들 철상은 전 부인 이비 소생이었고, 작은아들 하상(夏鮮)과 외동딸 정혜(情惠)는 둘째 부인 유(柳) 체칠리아의 소생이었다. 이들 3남매와 부인 등 일가족 모두는 천주 신앙을 증거하고 순교하였는데, 이런 점에서 정약종 일가는 성가정(聖家庭)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가운데 큰아들 철상은 1801년 4월 2일(양 5월 14일) 부친이 순교한 서소문 밖에서 다섯 명의 남녀 신자들과 함께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정철상은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었기 때문에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정약종은 어린 철상에게 천
주교 신자가 지켜야 할 본분을 철저하게 가르쳤으며, 같이 실천하기에 힘썼다. 아버지의 재혼으로 새어머니가 된 유 체칠리아도 남편 못지않게 열심한 신자였는데, 철상을 명도회 회장의 자제답게 키우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철상이 스무 살쯤 되었을 때에 신유박해가 일어났다. 아버지와 삼촌 두 분이 체포 투옥되자 철상은 당시의 풍속에 따라 옥 근처에 가서 옥바라지를 하게 되었다. 이때 취조관은 여러 차례에 걸쳐 주문모 신부에 관한 정보를 제공해 주면 아버지와 삼촌을 풀어 주겠다고 꾀었으나, 철상은 아버지의 뜻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이를 단호히 뿌리쳤다. 아버지에게 지독한 고문이 가해져도,그는 아버지의 뜻을 어기거나 하느님을 배반하는 말과 행동을 하지 않았다. 이런 시련을 눈앞에서 겪으면서도 그는 옥 근처를 맴돌며 옥바라지 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아버지 정약종이 모역죄로 처형되자, 철상은 연좌법에 의하여 체포 투옥되었다. 그는 아버지와 형제들을 생각하며 오로지 한 가지 소원, 즉 천주님의 가르침을 증거하고 순교하기를 바랐다. 결국 철상은 그의 뚯대로 아버지가 순교한 같은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순교하였다. 정약종,철상 부자는 이처럼 신유박해 순교자로 고귀하게 삶을 마쳤다. 그리고 남은 식솔인 유 체칠리아와 하상,그리고 정혜는 이후 험한 세상에서 38년 간이나 더 시련을 겪다가 1839년 기해박해(己玄迫害) 때에 순교하였으며 , 이들은 모두 1984년 5월 6일 시성되어 성인품에 올랐다.
정철상은 그의 아버지와 삼촌이 체포 투옥되자
옥 근처를 맴돌며 옥바라지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자료: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순교는 믿음의 씨았이되고』 [신유박해 순교자 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