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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姜遵; ) 임진왜란 의병장 곽준(郭䞭;1551~1597)의 둘째 사위.
*곽준 : 자는 양정(養靜)이고, 호는 임재(任齋), 존재(存齋)이다. 본관은 현풍(玄風)이고, 경상도 청도(淸道) 출신이다.
■ 구전선생강원일록 (苟全先生講院日錄)
『구전선생강원일록(苟全先生講院日錄)』은 김중청(金中淸 ; 1567~1629)의 1615년(광해군 7) 3월 16일부터 1616년(광해 8) 10월 15일까지의 일기이다. 당시에 정언 벼슬에 있으면서 조정에서 있은 일들을 자세히 기록해 놓았다. 체제 및 내용은 월일, 그날의 일진과 날씨를 간략하게 쓰고 그날에 조정에서 있은 일들을 기록하였다.
본인과 생각이 같지 않은 부분은 맨 끝에 가소(可笑)라고 기록하였고, 당시 정치 중심에 있었던 이이첨, 이원익, 정인홍 등등 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거론되었으며, 과거를 시행하고 창경궁을 수선하는 일등과 일식 월식과 유성이 나타나는 일까지 자세하게 해서로 기록하였다. 여행 중에도 찾아온 사람, 숙박한 곳 등을 빠짐없이 기록해두었다. 이 일기는 광해조 7~8년의 중앙 정계의 기록으로 역사적으로도 중요한 사료적 가치가 있다.
김중청의 자는 이화(而和), 호는 만퇴헌(晩退軒), 구전(苟全)이며,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첨지중추부사 몽호(夢虎)의 아들이며, 월천 조목의 문인으로 1610년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했다. 전적, 예조정랑을 역임했으며, 1614년 성절사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오고, 1615년 정언이 되어 이원익을 논핵하라는 대북파 정인홍의 부탁을 거절하여 파면되었다. 1621년 승지로서 선유사가 되어 호남을 순행했다. 이후 산직(散職)에 머물면서 인조반정 후에도 조정에 나아가지 않았다. 봉화의 반천서원(槃泉書院)에 제향되었다.
병진년(1616년) 정월에 강준이 충청도 연동 현감으로 재직하는 기록이 있음.
(丙辰正月)十八日(己丑) 晴。飯于沃川西亭里安敏善家。憩于接同 里。舟渡接同江。暮投永同縣內村家。主倅姜遵出見。
■ 동사록(東槎錄) 천계 갑자년(1624년) 일본 회답사 행중좌목(天啓甲子日本回答使行中座目)
조선 중기의 문신 도촌(道村) 강홍중(姜弘重 1577(선조10) ~ 1642(인조20))이 통신 부사(通信副使)로 일본에 다녀와서 보고 느낀 것을 기록한 사행일록(使行日錄)이다. 당시 사행이 자날때의 지방관원과 지명을 파악하는 자료가 됨,
상사(上使) | 형조 참의 | 정입(鄭岦) | |
부사(副使) | 승문원(承文院) 판교(判校) | 강홍중(姜弘重) 자(字)는 임보(任甫). 정축년(1577, 선조 10)에 출생. 선조 계묘년(1603, 선조 36)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 선조 병오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강원 감사(江原監司)에 이름. | |
종사관(從事官) | 예조(禮曹) 정랑(正郞) | 신계영(辛啓榮) | |
역관(譯官) | 가선(嘉善) | 박대근(朴大根) | |
이언서(李彥瑞) | |||
통정(通政) | 홍희남(洪喜男) | ||
상통사(上通事) | 전 정(正) | 박언황(朴彥璜) | |
강우성(康遇聖) | |||
전 직장(直長) | 이형남(李亨男) | ||
장선민(張善敏) | |||
한학(漢學) | 송예수(宋禮修) | ||
정충헌(鄭忠獻) | |||
사자관(寫字官) | 이성국(李誠國) | ||
화원(畫員) | 이언홍(李彥弘) | ||
의원(醫員) | 곽금(郭嶔) | ||
황덕업(黃德業) | |||
서사(書寫) | 김신남(金信男) | ||
별파진(別破陣) | 유태길(劉太吉) | ||
김신종(金信宗) | |||
포수(砲手) | 백사길(白士吉) | ||
김덕련(金德連) | |||
상사 군관(上使軍官) | 절충(折衝) | 노세준(盧世俊) | |
전 부정(副正) | 이동룡(李東龍) | ||
전 경력(經歷) | 정국빈(鄭國彬) | ||
전 감찰(監察) | 김현달(金顯達) | ||
전 만호(萬戶) | 이영서(李榮瑞) | ||
내금장(內禁將) | 송영(宋嶸) | ||
사과(司果) | 이안농(李安農) | ||
부사 군관(副使軍官) | 절충(折衝) | 김사위(金士偉) | |
전 주부(主簿) | 지학해(池學海) | ||
전 선전(宣傳) | 강덕취(姜德聚) | ||
강수(姜綬) | |||
전 만호(萬戶) | 남궁도(南宮櫂) | ||
정득선(鄭得善) | |||
한량(閒良) | 강홍헌(姜弘憲) | ||
종사관 군관(從事官軍官) | 출신(出身) | 강의(姜毅) | |
정몽득(丁夢得) | |||
방진(方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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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十八日庚戌
晴。平明發行。過安富驛踰鳥嶺。中火於龍湫。金山郡守洪瑞龍。聞慶縣監趙弘瑞以支待來。金泉察訪申寬一。安奇察訪金是樞。昌樂察訪李慶厚皆以夫馬差員來。與上使從事同會一處。對水看山耽翫不厭。相與小酌而罷。夕抵聞慶縣。館於衙軒。尙州牧使李好信咸昌縣監李應明以支待來。幽谷察訪申易于來見。申錫茂申錫弼李惇善蔡慶宗姜己生來見。山陽守庄奴及咸昌墓直奴等來謁。○忠淸道人馬交替而去。
맑음. 평명에 발행(發行)하여 안부역(安富驛)을 지나 조령(鳥嶺)을 넘어 용추(龍湫)에서 점심을 먹었다. 금산 군수 홍서룡(洪瑞龍)ㆍ문경 현감 조홍서(趙弘瑞)가 지대차 나왔다. 김천(金泉) 찰방(察訪) 신관일(申寬一)ㆍ안기(安奇) 찰방(察訪) 김시추(金是樞)ㆍ창락(昌樂) 찰방(察訪) 이경후(李慶厚)는 모두 부마 차사원(夫馬差使員)으로 왔다가 상사ㆍ종사와 한자리에 모여 산수를 마음껏 구경하고 잠깐 술을 나눈 다음 파하였다.
저녁에 문경현(聞慶縣)에 당도하여 관사(官舍)에 사관을 정하였다. 상주(尙州) 목사(牧使) 이호신(李好信)ㆍ함창(咸昌) 현감(縣監) 이응명(李應明)이 지대차 왔고, 유곡(幽谷) 찰방(察訪) 신이우(申易于)가 보러 왔으며, 신석무(申錫茂)ㆍ신석필(申錫弼)ㆍ이돈선(李惇善)ㆍ채경종(蔡慶宗)ㆍ강이생(姜已生)이 보러 왔고, 산양(山陽)의 수장노(守庄奴 농장 지키는 종)와 함창(咸昌)의 묘지기 등이 뵈러 왔다.
충청도(忠淸道)의 인마(人馬)는 이곳에서 교체되어 돌아갔다.
二十九日辛亥
晴。食後發行。上使從事直向龍宮。余則以先塋拜掃向咸昌。雖是數日之別。同行十日。却分兩路。別意轉覺依然。中火佛藏院。開寧縣監姜遵以支待來。申碩慶朴成美姜弘涉來見。夕抵咸昌縣。善山府使沈惀令公自狗灘站所來見。暫話卽去。申謹申謳申諶金遠振李基禎鄭彥寯等諸戚丈來見。姜弘祿姜弘信自尙州來見。李蘤柳應期邊胤宗申碩亨朴成敏李錫成來見。姜弘順之壻趙鐸金大鼎來謁
맑음. 조반 후 길을 떠났다. 상사와 종사는 곧장 용궁(龍宮)으로 향하고, 나는 선영(先塋)에 성묘하기 위하여 함창(咸昌)으로 향하였다. 비록 수일 동안의 이별이기는 하나, 10일을 동행하다가 두 갈래 길로 나뉘니, 작별하는 심정이 자못 서글펐다. 불장원(佛藏院)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개령(開寧) 현감(縣監) 강준(姜遵)이 지대차 오고, 신석경(申碩慶)ㆍ박성미(朴成美)ㆍ강홍섭(姜弘涉)이 보러 왔다.
저녁에 함창현(咸昌縣)에 다다르니, 선산(善山) 부사(府使) 심론(沈惀) 영공이 구탄 참소(狗灘站所)로부터 보러 와서 잠깐 담화하다가 바로 갔으며, 신근(申謹)ㆍ신구(申謳)ㆍ신심(申諶)ㆍ김원진(金遠振)ㆍ이기정(李基禎)ㆍ정언준(鄭彥寯) 등 여러 척장(戚丈)이 보러 왔다. 강홍록(姜弘祿)ㆍ강홍신(姜弘信)이 상주(尙州)로부터 보러 오고, 이위(李蘤)ㆍ유응기(柳應期)ㆍ변윤종(邊胤宗)ㆍ신석형(申碩亨)ㆍ박성민(朴成敏)ㆍ이석성(李錫成)이 보러 왔으며, 강홍순(姜弘順)의 사위 조탁(趙鐸)ㆍ김대정(金大鼎)이 뵈러 왔다.
一日壬子
晴。平明往良範先塋。尙州知禮等官。以監司分付。備祭床而來。設行於高祖曾祖養曾祖墓。省掃展拜。又以茶禮床奠尙根墓。日月易逝。宿草離披。不覺痛哭失聲。祭後以餕餘。分給墓下奴婢。卽發行。行十餘里。主倅設祖帳於路左以待之。暫入開酌。過飮至醉。過頭山申謹氏家。哭尙根几筵。見其妻子。諸鄕族之來會者甚多。而行忙不能穩敍。小酌卽發。夕宿龍宮縣。比安縣監朴浚。以支待來。主倅李裕後來見。全絳全以性金遠振卞𣈫權敬中蔡得湖金克諧蔡克稽高是恒來見。○上通事邢彥吉聞喪奔去。
맑음. 평명에 양범(良範 지명) 선영(先塋)에 가니, 상주(尙州)ㆍ지례(知禮) 등 관원이 감사의 분부로 제물상(祭物床)을 마련해 왔으므로 고조(高祖)ㆍ증조(曾祖)ㆍ양증조(養曾祖)의 묘소에 차려놓고 제를 지내고 또 다례상(茶禮床)으로 상근(尙根)의 묘에 제를 지내는데, 세월은 덧없이 빨라 무덤에 묵은 풀만 우북하니, 부지중에 실성통곡(失聲痛哭)을 하였다. 제를 지낸 뒤에 그 퇴물[餕]로서 무덤 아래의 노비들에게 나눠주고 바로 길을 떠났다. 10여 리를 가니, 주인 원이 길가에 전별연[祖帳]을 베풀고 기다리므로, 잠깐 들어가 술자리를 벌였는데, 과음하여 만취가 되었다. 두산(頭山) 신근(申謹)씨의 집에 들러 상근(尙根)의 궤연(几筵)에서 곡(哭)하고, 그 처자를 만나보았다. 여러 향족들이 매우 많이 모였으나 갈 길이 바빠 조용히 이야기하지 못하고 몇 잔 술을 들고는 바로 떠났다.
저녁에 용궁현(龍宮縣)에서 유숙하는데 비안(比安) 현감(縣監) 박준(朴浚)이 지대차 오고, 주인 원 이유후(李裕後)가 보러 왔으며, 전강(全絳)ㆍ전이성(全以性)ㆍ김원진(金遠振)ㆍ변욱(卞𣈫)ㆍ권경중(權敬中)ㆍ채득호(蔡得湖)ㆍ김극해(金克諧)ㆍ채극계(蔡克稽)ㆍ고시항(高是恒)이 보러 왔다.
상통사(上通事) 형언길(邢彥吉)이 초상(初喪)의 부음(訃音)을 듣고 그 본가로 달려갔다.
二日癸丑
晴。平明發向馬山行茶禮於鄭進士曾祖墓。祭物自本官備來。展拜結城墓。往見仁輔兄於本家。鄭沚權汝諧持酒來見。入內拜主嫂。鄭忻亦在座。仁輔兄爲設餞盃。盤羞極豐。味兼水陸。各行酒以勸。發行直向醴泉南面。哭季父墓。墓在田頭。宿草離離。不勝嗚咽。本官備祭床。行茶禮。祭罷憩元百家。韓評事妹氏爲見余。已於數日前來自榮川矣。見張忠義戚丈。謁延福君眞像。諸族人及洞中之人。無不來會。椎牛設酒。各把盃以勸。日沒後辭起。抵郡裏。夜已黑矣。奉化縣監柳袗以支待來。
맑음. 평명에 마산(馬山)으로 떠났다. 정 진사(鄭進士)의 증조(曾祖) 묘소에 다례(茶禮)를 행하였는데, 제물은 그 고을에서 마련해 왔다. 결성(結城 생전에 결성 현감을 지낸 자)의 묘에 참배하고, 인보(仁輔) 형 본가(本家)로 찾아가 보았다. 정지(鄭沚)ㆍ권여해(權汝諧)가 술을 가지고 찾아왔다. 내실(內室)에 들어가 주수(主嫂 인보의 부인)를 뵈었는데, 정흔(鄭忻)도 또한 한자리에 있었다. 인보 형이 나를 위하여 전별연을 베풀어 주는데, 수륙 진미(水陸珍味)가 소반에 가득하였다. 서로 잔을 들어 권하였다. 길을 떠나 곧장 예천(醴泉) 남면(南面)에 이르러 계부(季父) 묘소에 참배하였다.
묘소는 밭머리에 있어 묵은 풀만 우북하니, 흐느껴짐을 금할 수 없었다. 본관(本官)이 제물상을 마련해 왔으므로 다례(茶禮)를 행하고, 제사가 끝난 후 원백(元百)의 집에서 쉬었다. 한 평사(韓評事 평사는 벼슬)의 매씨(妹氏)가 나를 보기 위하여 벌써 수일 전에 영천(榮川)에서 와 있었다. 척장(戚丈) 장충의(張忠義)를 찾아보고, 연복군(延福君) 진상(眞像)에 배알하였다. 여러 친족과 동리 사람들이 모두 모여, 소를 잡고 주연(酒宴)을 베풀어 서로 잔을 돌려가며 권하였다. 해가 진 뒤에 작별하고 일어나 마을에 들어가니, 밤이 이미 깊었다. 봉화(奉化) 현감(縣監) 유진(柳袗)이 지대차 왔다.
三日甲寅
晴。主倅洪履一來見。榮川郡守李重吉。以豐山站上使支待出來。過上使行後。爲見余持酒而至。主倅及奉化皆設酌。各行盃以別。日將午。乘醉發行。中火豐山。眞寶縣監李岦以支待來。金慶祖來見。家在豐山縣云。有卞斗壽者謂有族分來見。權櫓自榮川持酒來見。遠地委到。厚情可見。朴檜茂以書問訊。日西入安東府。上使從事方留待矣。府使李尙伋來見。豐基郡守宋錫慶。以宴享助辦。寧海府使尹民逸。以支待來。○玉汝兄落後於醴泉
맑음. 주인 원 홍이일(洪履一)이 보러 오고, 영천 군수(榮川郡守) 이중길(李重吉)이 상사(上使) 지대차 풍산참(豐山站)에 나왔다가 상사가 지나간 후에 나를 보기 위하여 술을 가지고 왔다. 주인 원과 봉화 현감이 모두 술자리를 베풀어 각각 잔을 나누고 작별하니, 날이 거의 정오가 되었다. 술이 거나하여 길을 떠나 풍산(豐山)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진보(眞寶) 현감(縣監) 이입(李岦)이 지대차 나왔다. 김경조(金慶祖)가 보러 왔는데, 그의 집이 풍산현에 있다고 한다. 변두수(卞斗壽)라는 사람이 척분이 있다 하여 보러 왔고, 권노(權櫓)가 영천(榮川)으로부터 술을 가지고 보러 왔는데, 먼 곳에서 일부러 와 주니 두터운 정분을 알 수 있다. 박회무(朴檜茂)는 서신으로 안부를 물었다. 해가 서산으로 기울 무렵에 안동부(安東府)에 들어가니 상사와 종사가 바야흐로 머물러 기다리고 있었다. 부사(府使) 이상급(李尙伋)이 보러 왔다. 풍기(豐基) 군수(郡守) 송석경(宋錫慶)은 연향(宴享)의 비용을 보조하였고, 영해(寧海) 부사(府使) 윤민일(尹民逸)은 지대차 나와 있었다. 옥여(玉汝) 형은 예천(醴泉)에서 뒤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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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三日辛酉
陰。仁同府使禹尙中來見。食後發行。到善山界。未及海平縣五里許。拜朴進士弘慶妻氏。卽洪順川室內之弟。於余七寸叔母也。中火海平縣前川。義城縣令李景閔。比安倅朴埈以支待來。姜維父子來謁。過月波亭。日西抵善山府。府使沈惀令公來見。居昌縣監李滈以支待來。金宣傳起先來見。前年自榮川來寓此地云
흐림. 인동(仁同) 부사(府使) 우상중(禹尙中)이 찾아와 보았다. 조반 후에 출발하여 선산(善山) 지경에 이르렀다. 해평현(海平縣)을 5리 앞두고 진사 박홍경(朴弘慶)의 부인을 배알했는데, 바로 홍 순천(洪順川 순천은 지명으로 원임을 나타내는 것) 아내의 아우로 내게는 7촌 숙모(叔母)가 되었다. 해평현(海平縣) 앞 내에서 점심 먹었다. 의성(義城) 현령(縣令) 이경민(李景閔)과 비안(比安) 현감(縣監) 박준(朴埈)이 지대차 오고, 강유(姜維) 부자가 와서 뵈었다. 월파정(月波亭)을 지나 날이 저물어 선산부(善山府)에 당도하니, 부사 심론(沈惀) 영공이 찾아와 보고, 거창(居昌) 현감(縣監) 이호(李滈)가 지대차 나왔다. 선전관 김기선(金起先)이 보러 왔는데, 작년에 영천(榮川)에서 이곳으로 우거(寓居)했다고 한다.
十四日壬戌
陰。朝食後發行。往姜維家見其妻子。過府衙納名於室內別房。與主倅暫話卽發。過竹峙。中火梧里院。軍威倅趙慶琪。知禮倅李琠以支待來。趙金湜申景斗申碩蕃姜弘祿來見。夕抵尙州。歷謁辛進士姑母。鄭慶輔鄭炘鄭沚父子自龍宮來見。南正字碝亦自龍宮來。上年登式年第云。夕雨達夜。宿蓮亭。
흐림. 조반 후에 발행하여 강유(姜維)의 집에 가서 그의 처자를 만나보고, 부아(府衙)를 지나다가 실내 별방(室內別房)에 명함을 들였다. 그리고 주인 원과 잠시 담화를 하다가 바로 출발하였다. 죽치(竹峙)를 지나 오리원(梧里院)에서 점심 먹었는데, 군위(軍威) 원 조경기(趙慶琪)와 지례(知禮) 원 이전(李琠)이 지대차 나왔으며, 조금식(趙金湜)ㆍ신경두(申景斗)ㆍ신석번(申碩蕃)ㆍ강홍록(姜弘祿)이 찾아와 보았다. 저녁에 상주(尙州)에 당도하여 역로(歷路)에 신 진사(辛進士)댁의 고모(姑母)님을 찾아 뵈었다. 정경보(鄭慶輔)ㆍ정흔(鄭炘) 및 정지(鄭沚) 부자가 용궁(龍宮)에서 찾아와 보았고, 정자(正字) 남연(南碝)이 또한 용궁에서 찾아왔는데, 작년에 식년과(式年科)에 급제[登第]했다 하였다. 저녁에 비가 시작하여 밤새도록 왔다. 연정(蓮亭)에서 유숙하였다.
十五日癸亥
雨晩霽。座首徐相德。別監申沆尹 缺 來見。令別監一人取鄕案來。周愼齋題其卷首。鄭愚伏李蒼石續而序之。亂後重修。而自曾王考以下至吾兄弟行。連四代入錄矣。申碩亨來見。食後發行。過恭儉池。抵咸昌縣。主倅上京未還。申諶申謳申碩弼申碩慶申震逸申震望鄭彥寯郭龍伯來見。張宗建金得望自醴泉來見。蔡興宗兄弟來見。
비 오다가 늦게 갰다. 좌수(座首) 서상덕(徐相德)과 별감(別監) 신항(申沆)ㆍ윤□(尹□)이 찾아와 보기에 별감 한 사람을 시켜 향안(鄕案 향반(鄕班)의 명단)을 가져오게 하여 펼쳐 보니, 주신재(周愼齋 세붕(世鵬))가 권두(卷頭)에 서문[弁文]을 쓰고 정우복(鄭愚伏 경세(經世))ㆍ이창석(李蒼石 준(埈))이 잇따라 서문(序文)을 썼으며, 임란(壬亂) 후에 중간(重刊)하였는데, 증조고(曾祖考) 이하로 우리 형제 항렬까지 연 4대(代)가 기록되어 있었다.
신석형(申碩亨)이 찾아와 보았다. 식사 후에 발행하여 공검지(恭儉池)를 지나 함창현(咸昌縣)에 다다르니, 주인 원은 상경(上京)하여 돌아오지 않았고, 신심(申諶)ㆍ신구(申謳)ㆍ신석필(申碩弼)ㆍ신석경(申碩慶)ㆍ신진일(申震逸)ㆍ신진망(申震望)ㆍ정언준(鄭彥寯)ㆍ곽용백(郭龍伯)이 찾아와 보았다. 장종건(張宗建)ㆍ김득망(金得望)이 예천(醴泉)에서 찾아왔으며, 채흥종(蔡興宗) 형제도 와서 보았다.
十六日甲子
陰夕雨。趙竑李蘤朴成美來見。申謹申煥申煜來見。食後發行。過良範先塋。監司分定祭床於榮川。而都色下人獨先來見。祭物未及來。王程不得遲滯。只行省拜而退。令姜弘謹留待行祭。中火佛藏院。金山郡守洪瑞龍。開寧縣監姜遵以支待來。行到大灘上流。川水漲溢。以轎杠艱運卜物。冒雨而渡。日沒後抵聞慶縣。縣監崔茂來見。龍宮倅以支待來。夜宿鄕序堂。
흐리다가 저녁에 비가 왔다. 조횡(趙竑)ㆍ이위(李蘤)ㆍ박성미(朴成美)가 찾아와 보았고, 신근(申謹)ㆍ신환(申煥)ㆍ신욱(申煜)이 와서 보았다. 조반 후에 발행하여 양범(良範)의 선영(先塋)을 지나니, 감사(監司)가 제물상(祭物床)을 영천(榮川)에 배정하였는데, 도색하인(都色下人)만이 먼저 와 보고, 제물은 미처 오지 않았다. 왕정(王程 사신의 행차)을 지체할 수 없어서 성묘(省墓)만 하고 물러오고, 강홍근(姜弘謹)을 시켜서 기다렸다가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불장원(佛藏院)에서 점심 먹었는데, 김산(金山) 군수(郡守) 홍서룡(洪瑞龍)ㆍ개령(開寧) 현감(縣監) 강준(姜遵)이 지대차 나왔다. 대탄(大灘) 상류에 당도하니, 냇물이 불어 가마채로 짐을 간신히 운반하고 비를 맞으며 건넜다. 해진 후에 문경현(聞慶縣)에 당도하니, 현감 최무(崔茂)가 나와 보고, 용궁(龍宮) 원은 지대차 나왔다. 밤에 향서당(鄕序堂)에서 유숙하였다.
○ 고전번역서 > 미수기언 > 기언 별집 제22권 > 구묘문 > 최종정보
복천(復泉) 강공(姜公)의 묘명(墓銘)
허목
복천(復泉) 강자구(姜子久) 선생의 휘(諱)는 학년(鶴年)인데, 그 선대는 본디 진양(晉陽) 사람으로 대사헌 강첨(姜籖)의 아들이요, 부제학 신담(申湛)의 외손이다.
자구는 젊어서 《소학(小學)》, 《심경(心經)》을 읽어 일찍부터 학문하는 방법을 알았으며, 현명한 공자 덕신정(德信正)과 상종하여 《대학》과 《역경》의 건괘(乾卦), 곤괘(坤卦), 문언(文言)의 뜻을 배웠고, 이대순(李大淳) 선생에게서 《중용》을 읽었다. 만력(萬曆) 37년(1609, 광해군1)에 국자감 생원이 되었으나 병이 많아 나아가지 않고, 성인(聖人)의 학문에 침잠(沈潛)하였다. 광해군 말년에 나라가 크게 어지러울 때, 아버지가 졸하고 신 부인(申夫人)이 늙었으므로 회천(懷川)에 숨어 살면서 농사지어 봉양했다. 인조 초기에 유학(儒學)하는 사람을 불러 쓰게 되자, 자구를 특별히 연기 현감(燕岐縣監)에 제수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이듬해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켜 서울에 들어왔을 때에 상이 남쪽으로 순행했는데, 자구가 행재소에 나아갔다. 진천 현감(鎭川縣監)을 제수했으나 두어 달 만에 사직하고 돌아왔다. 또 이듬해 사어(司禦)를 제수하자, 상소하여 임금의 덕에 관한 것을 말하니 상이 지당한 논의라고 말했다.
7년에 흑한(黑漢)이 양서(兩西 황해도와 평안도)를 잇달아 짓밟았는데, 이때 자구가 신녕 현감(新寧縣監)이 되었다가 이미 조정에서 물러났으나, 조정(朝廷)이 화의를 주장한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궐하(闕下)에 이르러 상소하여 놈들과는 화의할 수 없음을 말했다. 그해에 신 부인이 세상을 뜨자 삼년상을 지내고 잇달아 공조와 형조의 좌랑을 제수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듬해에 익위(翊衛)가 되었는데, 때마침 인목태후(仁穆太后)의 상을 당하자 바로 들어가 사직하고 졸곡이 지나자 돌아갔다. 이어 성균관 사업을 제수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그 뒤 수년 동안 두 번이나 지평이 되고, 또 예안 현감(禮安縣監)이 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14년에 다시 지평으로 장령(掌令)에 승진하자, 상소하기를,
“세상에 백이(伯夷)가 있으면 반드시 역포(易暴)라는 기롱이 있게 된다.”
하였는데, 권세 부리는 자가 몹시 불경하니 마땅히 용서할 수 없다고 논하여 중한 법으로 다스리기를 청했는데. 지평 유진(柳袗)이 아뢰기를,
“초야의 소박하고 현실에 어두운 사람을 법으로 논죄함은 옳지 않다.”
했고, 수찬 유영(柳穎)은 상소하기를,
“그 말은 임금을 사랑하여 상에게 보답하려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며, 국조(國朝) 2백 년 이래 한 사람도 말로 인하여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
하자, 유진은 배척하여 몰아내고, 유영은 관작을 삭탈했다. 자구는 거의 면치 못하게 되었는데, 상이 특별히 관용하여 은진(恩津)에 부처(付處 형벌의 한 가지. 어느 곳에 머물게 함)되었다가 1년 만에 석방되었고, 10년 뒤에 졸하니, 나이 63세였다.
자구는 경(經)에 밝고 몸가짐이 결백하였으며, 말이 구차하지 않고 행실이 단정하였으며, 자기의 뜻을 굽혀 남을 따르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궁액을 당하여도 번민하고 원망하지 않았으니, 옛날의 이른바 ‘덕을 높이고 의리를 즐겨서 남들이 알아주어도 만족하여 바라는 것이 없고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만족하여 바라는 것이 없다.’는 사람이다.
한때의 청렴한 선비들이 그를 많이 찾아왔는데, 거문고를 타며 스스로 즐겼고, 남을 사랑하고 이롭게 해 주는 마음을 가져 그 지극한 정성을 다했다. 진천(鎭川)이나 신녕(新寧)에 있은 것이 잘해야 겨우 반년인데, 백성들이 빗돌을 세워 추모하였다. 내가 듣건대 ‘군자의 집은 후함이 쌓여 교훈이 이루어진다.’ 하였다. 조부(祖父) 강운상(姜雲詳)은 선을 행하였으되 숨어 살며 나오지 않았으며, 예의를 좋아하여 몸을 닦거나 남을 가르칠 때 속이지 않는 것으로 근본을 삼았는데, 인조 때 효자로 표창하여 정문하였다. 대헌공(大憲公)은 올바른 도리를 지킴으로써 세상에 드러났는데, 오리(梧里) 이 문충공(李文忠公 이원익(李元翼))이 말하기를,
“광해군이 동궁 시절에 상을 두려워하여 감히 방종하지 않아, 다른 사람이 칭찬하는 말이 들렸으나, 이 사람만 유독 그를 근심하였으니, 이것은 군자의 선견(先見)이다.”하였다. 현명하도다. 자구의 현명함이여. 그 현명함은 내력이 있도다.
한산 이씨에게 장가들었는데, 문정공(文靖公)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후손인 현감 이덕기(李德沂)의 딸이다. 아들 강호(姜鎬)를 낳아, 현종 때에 귀해져 관동 관찰사(關東觀察使)가 되었다가 자구가 죽은 지 22년 만에 특은(特恩)으로 대사헌(大司憲)에 추증했다. 사위 심창징(沈昌徵)은 내가 잘 알고 지내는 홍문관 응교 심대부 신숙(沈大孚信叔 신숙은 자임)의 아들인데, 재주가 뛰어났으나 일찍 죽었다. 서자(庶子) 다섯을 두었는데, 강전(姜銓), 강석(姜錫), 강옥(姜鈺), 강용(姜鏞), 강일(姜鎰)인데, 강옥은 의영고 주부이다. 두 사위는 이명빈(李明彬), 신상현(申尙顯)인데, 이명빈은 박천 군수(博川郡守)이다. 강호가 강세봉(姜世鳳), 강세린(姜世麟), 강세귀(姜世龜)를 낳았는데, 강세귀는 홍주 목사이고, 사위 목임유(睦林儒)는 해주 목사이다. 심창징이 심희도(沈羲圖)를 낳았고, 사위는 권각(權慤)인데, 내외 자손이 3대에 40여 인이나 된다. 분묘는 온양군 서봉(棲鳳) 남향의 언덕에 있다. 다음과 같이 명한다.
곧으면서도 온화하고 / 直而溫
단순하면서도 조리가 있으니 / 簡而理
방정한 표본이로다 / 方正之表
나라에 도가 없을 때에도 화살같이 곧았고 / 邦無道如矢
도가 있을 때에도 화살같이 곧았다 / 邦有道如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