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첫아이
하늘이 내린 보배
신근식
개인의 행복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저출산 시대에 살고 있다. 먼 우주에서 지구를 찾아온 귀한 ‘손님’인 첫아이가 부모의 입장에서 보면 혹 짐이 될 수도 있는 게 오늘날의 현실이다. 육아 경험이 없는 초보 엄마는 아이 몸에 조금만 열이 나도 온몸에 식은땀이 흐르고, 다짜고짜 울어대는 아이에게 엉겁결에 젖을 물리고 나서야 놀란 가슴을 쓸어내린다. 특히나 직장에 다니는 여성이라면 출산휴가가 끝난 후 당장 누군가에게 갓난아기의 양육을 맡겨야 한다. 그것이 가까이 잘 아는 사람, 전문적인 유아 시설이든 돈이나 마음으로 치러야할 비용이 결코 만만치 않다. 때로는 너무 힘들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마음까지 드는 것이다. 그러나 어느 결에 아이는 자라난다. 말썽도 부리고, 반항도 하며 여성의 삶으로만 보면 발전을 더디게 하는 짐일 수도 있는 그 아이는 엄마라는 존재에게는세상을 살아가는 가장 큰 힘이자 의미일 것이다.
하루하루 성장하는 아이를 보고 있자면 참 경이롭다. 아이는 즐거울 때 더 잘 웃고, 슬프거나 불안할 때 더 크게 운다. 짜증을 부리기도 하고, 무언가를 요구하기도 한다. 눈앞에 엄마가 보이지 않으면 내내 엄마를 찾기도 하고, 맛있는 것과 맛없는 것을 구분한다. 새로운 곳에 가면 그곳을 뚫어지게 관찰하며 익히기도 한다. 아이는 그렇게 스스로 세상을 열어 가고 있다. 아이의 세상이 얼마나 넓어지고 다채로워질지 누구도 상상할 수 없다. 다만 부모로서 지금도 우리 아이가 언제든 쉬어갈 수 있는 공간이 되어주고 싶다.
일기를 1985년 1월 1일부터 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메모 형식으로 쓰다가 그것이 일기로 기록되어 현재까지 40년간 기록해 왔다. 그동안 장롱 속에 깊숙이 잠자고 있는 빛바랜 일기장과 앨범, 아내의 육아일기, 아이들이 쓴 편지 등을 꺼내어 기억 되돌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사를 몇 번 하였다. 보관된 짐들이 줄어들면서 자료들이 많이 없어졌다. 겨우 몇 개 건졌지만, 아버지로서 역할 한 것이 너무 미미하여 실망스럽고 부끄러운 일이다. 솔직히 쓰기가 두려워진다. 그 시절에 우리는 부모로서 초보자이다. 이 글을 쓰는 것은 아이와 부모 사이 지나간 기억들에 대한 진정한 화해가 되기를 바랄뿐이다.
1985년 4월, 오늘따라 아이를 갖고 싶었다. 결혼한지 다섯 달이 지났는데도 아이 소식이 없었다. 어른이 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구나? 라고 생각 하였다. 하늘에까지 마음이 통했는지 며칠 뒤 드디어 아내와 같이 산부인과 진료를 받았다. '임신 2개월' 이라고 하는 순간 기분이 이상야릇한 감정에 사로잡히었다. 드디어 이제 나도 어른이 되며, 완연한 부부가 되어 지는가 보다. 이제 더욱더 생활을 열심히 하리라고 다짐 하였다.
출산일 앞두고 새벽에 아내가 진통이 온다며 병원에 가자고 하였다. 그래서 빠르게 준비해서 병원으로 향했고, 병원에 가보니 조금 더 기다리라고 하였다. 다음 날 오후 3시 병원에 갔는데 또 퇴짜 맞았다. 같은 날 출산할 것 같다고 병실에서 대기 하고 있다가 1985년 12월 17일 새벽 4시 15분에 드디어 .'첫아기' 가 탄생하였다. 신생아실에 누워있는 아기를 봤을 때 뭔가 모르게 올라오는 감정에 울컥하였다. 딸을 낳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생각과 마찬가지로 엄마 닮은 예쁜 딸이었다. 큰딸은 살림 밑천이라 했든가? 아내는 자연분만을 해서 회복이 되어 다행이 둘다 무사하여 너무나 고마웠다. 출산 전에 나를 닮아서 눈이 작을까 싶어서 잉어를 얼마나 많이 고아 먹였는가?. 다행이 엄마를 닮아 눈이 상당히 크다. 이름도 하늘이 내린 보배라고 하여 '호진(昊珍)' 이라고 지었다.
30대에 한창 사회활동 많이 할 때라 모임이 잦았다. 그 시절 모임에서 가족동반 행사가 많았다. 나름 아이들 추억 심어주기 위해서 여가 활동을 많이 하였다. 한번은 대학클럽에서 가족 동반 체육대회 때 많은 사람들이 있는 가운데 앞에 나와서 노래 부를 사람이 없었다. 그때 용기 있게 나가서 "걸어서 하늘까지“ 노래를 멋지게 불러 많은 칭찬 받아 나를 기쁘게 했다. 첫아이로 귀엽고, 똑똑하여 유별나게 많이 데리고 다녔다. 같이 있을 때도 책과 그림그리기 노트는 손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어릴 때 영향을 받아 현재 책 쓰고 디자인 일을 잘하고 있다.
첫아이에게는 이 시간이 어떻게 기억될지 모르겠지만, "엄마의 육아일기" 중에 "우리 딸이 우리 가정에 태어나 줘서 행복하고 고마워. 앞으로도 변함없는 마음으로 아빠와 엄마는 우리 딸 최고로 사랑해. 더 건강하고, 내 품 안에서 무럭무럭 자라나길 기도한다." 언젠가는 ‘아~ 내가 이렇게 축복받고 사랑 안에서 자랐구나!’를 알게 되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어린 시절에 대해 "기억할 만한 것도, 그리워할 만한 것도 없다." 면, 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가?
아이가 자라나면서 내 삶의 시작과 끝이라 할 수 있는 가족을 너무 등한시하였다. 주중에는 밤늦도록 술을 마시느라 아이들 얼굴 한번 제대로 보지 못했고, 주말이면 새벽같이 등산 가방을 메고 집을 나서다 보니 아이들과 같이 좋아하는 영화 한 편 같이 본 적이 없다. 아이들과 대화하는 시간도 줄어 들었다. 큰딸은 유별나게 밥을 잘 먹지 않아서 키가 크지 않았다. 아이와 엄마가 옥시각신 날카로운 신경전을 벌이기도 하였고, 무엇을 어떻게, 얼마큼 먹여야 살이 되고, 키로 갈까 하며 고민도 하면서 아이는 자라고, 부모도 동시에 성숙된다.
나이 들수록 부모의 일대기가 궁금해진다. 부모들이 당신들의 삶을 잘 기록해 두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하면 안타깝다. 우리 부모는 살기 바빠서 잘 먹이는 것밖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어릴 때 이렇다 할 추억이나 사진 한 장 없었다. 1989년에 둘째 딸이 태어나고, 4년 뒤 셋째 아들이 태어났다. 셋째는 태어날 때 인구억제 정책으로 의료보험도 되지 않았다. 자가용이 없을 때 엄마 옆에 큰딸, 작은딸이 손을 잡고 등에는 아들이 업혀서 다니는 모습이 사뭇 그것이 행복해 보였다. 특히 아이 웃음에는 세상살이의 삭막함, 고단함을 잠시 잊게 하는 마법의 힘이 있었다.
이제 아이들이 성장해서 첫째 딸은 L기업 디자인실에 근무하고, 외손자가 다섯 살이다. 둘째 딸은 결혼하여 올해 외손자를 낳아 육아에 전념하고 있다. 셋째 아들은 서울시 공무원을 하면서 지금 한창 열애 중이다. 요즈음 시대에 사는 아이들은 모르는 모든 일들은 인터넷으로 통해 해결하기 때문에 어른의 도움이 소원해졌다. 부모는 자식이 자기를 필요 없다고 느낄 때가 가장 보람 있다고 한다. 부모가 자식에게 남겨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부모 자신이 건강하면서 안정적인 삶을 사는 것이다. 올해 결혼 40주년을 맞는다. 그리고 첫아이도 이제 마흔, 부모의 나이로 접어든다. 아이와 부모가 같이 성장하면서, 아이들에게 내 삶의 이야기를 남겨주고 싶다.
(20240611)
첫댓글 수고 하셨습니다.
한비수필학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