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나무골 성지
주소 경북 칠곡군 지천면 연화동 57 교구 대구대교구
신나무골 신자촌은 좁게는 칠곡군 지천면 연화동 중하리를 중심으로 한 신자촌을 의미하지만 넓게는 도암, 완정, 왜관의 가실, 장자터, 동명의 어골 등을 포함한 인근의 신자촌을 말한다.
이곳 신나무골에 신자들이 처음으로 살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1815년 을해박해 때인 것 같다. 을해박해 때 청송의 노래산, 진보의 머루산, 일원 산증의 우련밭과 곧은정 등지에 살고 있던 신자들은 박해를 만나 200여명이 체포되어 일부는 배교하고 일부는 옥사하였다. 체포된 신자들 중 33명만이 대구감영으로 이송되었는데 이때 이들의 가족과 다른 신자들은 사방으로 흩어지게 되었다. 그 중 몇 가정이 대구와 하루거리로 가까우면서도 외딴 곳인 이곳 신나무골로 이주해 살았던 것 같다.그 후 1862년 경 달성군 다사면 부곡에서 처음 신앙을 받아들인 이이전 안드레아 가정이 부락민들의 박해로 이곳 신나무골로 이사를 왔으며 이무렵 이이전 가정 이외에도 인근의 신자 가정들이 이사를 왔다. 이로 인해 외지에서 온 신자들과 이 지방 신자들이 합하여 큰 신자촌을 이루게 되었다.
대구를 지척에 둠으로써 많은 선교사들이 대구 진출의 전초기지로 삼았던 신나무골은 최양업, 다블뤼, 리델 신부들이 사목활동을 했던 곳이다.1831년 조선교구가 창설된 후 1837년부터는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샤스탕 신부가 신나무골과 언양 등지에 머물면서 한반도 남쪽 지역을 맡아서 순회전교를 하기 시작했다. 1839년 기해박해로 샤스탕 신부가 순교한 후에는 다블뤼 신부가 1849년부터 1861년 6월까지 12년간은 최양업 신부가 신나무골을 방문해 성사를 주곤 했다. 그후 다블뤼 신부와 리델 신부가 이 지역을 맡아 왔으며 병인박해(1862년) 이후 1882년부터는 김보록(Robert)신부가 순회전교를 하기 시작했다.
1866년 병인박해로 인해 신나무골의 신자들은 사방으로 흩어졌지만 박해가 끝나자 사방으로 흩어졌던 신자들과 새로 입교한 신자들이 모여 신자촌을 이루었다.
병인박해 후 이곳 신나무골에 부임한 신부님들이 전주, 부산 등지로 본당을 설립해 나감에 따라 신나무골은 대구본당과 전주본당, 부산본당의 산실이 되었다. 신나무골은 1894년 가실본당( 현 낙산본당)이 설립되면서 가실본당 소속의 공소가 되었으며 1926년 왜관본당이 설립되자 왜관본당의 공소가 되었고 1986년 2월 1일 신동본당이 설립된 이후는 신동본당 소속이 되어 있다.
1933년 왕 레지날도 신부가 신나무골 성지개발을 위해 모금을 시작해서 서상우 요한 신부와 현익현 바르톨로메오 신부때에 이르러 1977년 7월 11일에 제 1 차 성역화 사업을 완수하고 이곳에 영남교회 선교 요람지 기념비를 세웠다. 또한 1984년 한국 천주교회 창립 200주년을 맞이하여 왜관 성 베네딕도 수도회의 주선으로 순교자 이선이 엘리사뱃의 묘소를 이곳으로 이장하고 대구본당의 첫 본당터를 복원하여 김보록 신부의 사제관과 신나무골 학당과 전시관을 복원하고 김보록 신부의 흉상을 건립하였다.
이선이 엘리사벳 묘
1815년 을해년 박해를 피해 숨어든 천주 교인들이 교우촌을 이룬 이래 영남 지방 선교의 요람이 된 신나무골에는 병인박해 당시 큰아들과 함께 작두에 목이 잘려 순교한 이선이(엘리사벳)의 유해가 묻혀있다.
생나무를 깎아 만든 14처와 묘소 한쪽에 잘 보존돼 있는 옛 제대가 풍취를 더해주는 순교자 이선이의 묘소 앞에 서는 순례자들은 여린 아낙이면서도 장정네들 못지않은 굳건한 신앙을 보여 준 그의 생전 모습을 보는 듯한 느낌을 갖는다.
원래 이선이의 유해는 그가 병인박해 때 포졸들에게 쫓기다 체포돼 한티에서 순교한 뒤 대구시 북구 읍내동(안양동) 산21번지에 위지한 선산에 모셔져 있었다. 그러다가 신나무골 성역화 사업의 일환으로 1984년 왜관 성 베네딕도 수도회의 주선으로 이곳 신나무골로 이장된 것이다.
이선이의 남편인 성산 배씨(星山裵氏) 배정모는 원래 성주가 고향이었으나 칠곡으로 옮겨 와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그리 넉넉하지는 못했으나 착실한 신앙 생활을 해 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던 중 1861년 경상도 지방에 박해가 일어났는데 칠곡읍은 특히 칠곡 고을을 중심으로 관아(官衙)가 있었기 때문에 신자들에 대한 감시가 꽤 심했다. 배씨 가족은 박해를 피하기 위해 칠곡읍에서 20여리 떨어진 신나무골로 피난을 했지만 이곳에도 포졸들이 들이닥쳐 신자들은 경황없이 뿔뿔이 흩어졌다.
배정모와 부인 이선이 그리고 세 아이는 한티 쪽으로 총총히 쫓기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2월의 매서운 겨울 바람 속에서 이들은 갖은 고생 끝에 한티의 사기굴이라는 곳에 도착해 잠시 숨을 돌렸으나 결국은 뒤따라 온 포졸들에게 잡히고 만다.
굴 밖으로 끌려 나온 이들을 향해 포졸들이 "성교를 버리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다."고 엄포를 놓자 겁에 질린 배정모는 배교를 하고 풀려난다. 하지만 부인 이선이와 맏아들 배도령은 "죽어도 성교를 믿겠다."고 하며 신앙을 지킨다. 그 대가는 너무도 가혹했다. 포졸들은 그 자리에서 시퍼런 작두날로 이들의 목을 잘라 모자가 한자리에서 순교하게 된다.
남편은 가슴을 후벼파는 뼈저린 아픔 속에 부인과 맏아들의 시체를 그 자리에 묻었다가 얼마 후 선산이 있는 칠곡의 안양동으로 부인의 시체만 이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