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키우기가 많이 힘들어 둘째는 생각도 하지않았다.
그런데 큰아들이 4살 되던 해 큰사고가 일어나
또 한명의 아들을 가지게 되었다.
그때는 안양 비산동에서 살때였다 늦게 회사에서 퇴근하는
아빠를 기다리다 골목길 건너 할머니가게로 가던 아이가
과속으로 달리던 차에 치여 내눈앞에서 하늘로 붕 떠오르는것이 아닌가?
아들은 의식은 있었지만 상태가 심각해보였다.
다행히 다리만 부러져 전치 8주의 진단을 받았다.
하나만 잘키우자 다짐했는데
사고는 어느때 어느곳에서 발생해
내아이를 위협할지 모른다는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형의 사고 덕분에 세상에 나오게된 둘째아들
현준이가 태어난 해는 유난히 더웠던 1994년 이었다.
그해는 너무 더워 비싼 에어컨이 날개 돋힌듯 팔렸다
아들을 유모차에 태워 바람 부는 안양천변을 날마다
찾았다.
그리고 그때마다 둘째를 갖기로 결정한 그날의 합의를
많이 후회했다.
둘째가 백일되던 날부터 나는 송파구에 있는 학원강사로
나가게 되었다.
처음에는 어머님이 둘째를 돌보아 주었지만
나중에는 맡길 곳이 없어 맞벌이가 힘들기만 했다.
5살난 큰아들만 있다면 세상 살기가 편안했을텐데...
그런 생각까지 했었다.
그런데 늘 큰아들의 그림자정도로 생각했던 둘째가
만만치 않은 놈이라는 것은 그아이가 걷고 제법 자기
의견을 말하는 때 부터 나타났다.
4살무렵에는 제법 혼자 집도 보고 전화도 잘받았다.
큰아들을 15일간 청학동 서당에 보낸뒤
청학동으로 온가족이 찾아갔다.
4학년이었던 큰아들은 땅에 엎드려 큰절을 하며 우리를 맞았다
그동안 집에서 늘 싸우기만한 동생에게도 새삼 애끓는 우애를
표시하며 껴앉으려 다가왔다.
그때 둘째가 말했다. 팔짱을 껸 오만한 자세로..
"그래 형아 청학동에서 동생한테 잘해주는 법 잘배워 왔어?"
우리는 다 뒤로 넘어갔다
예의범절과 한자를 배우기 위해 형이 청학동에 갔다고
했더니 그것을 어린 자기 맘에 맞게 해석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3년째 키가 제자리 걸음인 둘째를 수영장에 보냈다.
1년 잘 다니더니 꾀가 났나보다.
어느날 집에 돌아오니 수영장 갔다왔다고 자랑이 대단했다.
왠지 수상해서 가방을 뒤졌다.
아니나 다를까 가방에선 뽀송뽀송한 수건이 나왔다.
매를 터지게 맞고 그다음날은 수영장을 갔겠지 하고 가방을 열어 보았다
가방안엔 물에 푹 담궜다 꺼낸 수건이 나왔다.
전날 물기 없는 수건 때문에 맞았다고 판단한 아이가
대야에 푹 담궜다 꺼낸 수건. 그날도 둘째는 맞고 또 맞았다.
이젠 절대로 말로는 누구한테도 지지않는 아이
자유인이라 무엇이든지 자기 마음대로 해야하는 아이
이아이의 장래희망은 슈바이처 박사같은 의사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꽁짜로 고쳐주고 싶다고 한다
숙제를 하고도 안가져 가고 준비물도 잘 안가져가더니
반성문은 반에서 톱으로 많이썼다.
선생님이 의사가 되려면 하루 4시간도 못자고 공부해야 한다고 하니
그꿈을 바꿀까 심각하게 생각하기도 했다.
얼마전 현준이가 교내 정보사냥대회에 나갔다.
컴퓨터 게임은 좋아 하지만 검색은 한번도 안해봤는데...
걱정이 앞섰지만 좋은 경험이라고 생각하며 안나가려는
애를 억지로 보냈는데...
갔다오더니 너무 어려웠다며 난리다.
"엄마 에디슨이 제일 처음 만든 축음기 이름과 그때 틀었던 노래가
뭔지 알아? 나는 알지롱"
입상은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담임선생님이 전화를 하셨다.
"어머니 3학년 현준이가 4,5,6학년 다 이겼어요
전교 1등이예요"
기뻤다. 그냥 건강하고 튼튼하게 자라주는것만도 대견했는데
이제 아이는 성큼 자라 엄마에게 큰 기쁨을 안겨주었다.
전교생들 앞에서 상장을 받던 날 현준이는 오랫만에
씻고 학교를 갔다 머리에 무스를 잔뜩 바른 모습으로...
그날 오후 상장을 내게 주며 현준이가 말했다.
"엄마때문에 망했잖아, 깻잎머리라고 아이들이 막놀렸단 말이야"
아무리 엄마에게 화를 내도 엄마는 막내가 귀엽고 사랑스럽기만하다.
현준아 멋진 남자로 커라 틀에 박힌 모범생은 되지 말고
지금처럼 틀을 깨는 반항아 이현준이 되어 세상의 모순과 억압을
깨길바래.
첫댓글 엄마 나는 어릴때 생각하나두 안나 6살 까지밖에 기억이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