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가스 따위도 마찬가지다.
이와 같이 후각도, 중도 조화(中道調和)된 것이 아니면 안 된다.
우리의 시각(視覺)은 어떠할까.
우리의 시각의 범위는, 무지개의 일곱 가지 색의 범위밖에 볼 수 없다.
볼 수 없는 세계쪽이 훨씬 더 많다.
공중에 엇갈려 날고 있는 전파. 적외선, 자외선, 등, 전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들은 존재하고 있다.
또한 우리는, 자기 자신의 운동 상태도 볼 수 없다.
이와 같이 육체적, 물질적 세계에서조차,
우리는 완전히 볼 수 없고, 손으로 더듬는 상태이다.
하물며 차원이 다른 의식의 세계등은,
대부분의 인간은 보는 것이 불가능하다.
있는 듯한, 없는 듯한 세계를,
몸으로 느끼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또 우리의 시각이,
적외선이나 자외선, X선 등을 통해서, 보는 능력이 있다면,
아름답게 조화된 자연계의 색채, 경치도,
전혀 다른 세계로 되어 버릴 것이다.
인간의 모습을, 만약 X선의 눈으로 본다면,
모두가 해골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야말로 야단이 날 판이다.
역시 극단의 적외선이나 자외선을 통해서 볼 것이 아니라,
무지개의 아름다운 색채의 세계만으로 좋은 것이다.
우리에게는,
조화된, 가장 좋은 주파수의 세계만 보이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도 신의(神意)라고 할 수 밖에
1초에 50~60사이클 정도의 주파수를 가진 전등도,
1초에 50~60회 정도,
밝아졌다. 어두워졌다 하기를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고속도 사진을 찍어보면,
점멸의 상태를 똑똑하게 확인할 수 있다.
우리 눈의 특징으로서,
켜졌다, 꺼졌다 하고 있어도,
잔영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연속적으로 켜져 있는 것처럼, 착각을 하고 있을 따름이다.
역시 우리의 눈도 절대적인 것은 되지 못한다.
그러나 대자연의, 조화된 색채만이라도 볼 수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라고 하겠다.
이것도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인간에게 주어진 특권인지도 모른다.
아름답게 꽃이 피는 화창한 봄날,
나무숲이 짙푸르고 햇살이 강렬한 한여름의 바다와 산,
황금색으로 결실한 벼이삭이 바다처럼 출렁이는 가을의 들판,
그리고 단풍잎의 아름다움, 은백색의 숲을 이루고 있는 겨울 경치,
이처럼 철따라 변해가는 사계의 아름다움,
대자연의 변해가는 풍경은, 마음속까지 풍요롭게 해준다.
그것들을 자연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눈, 이것 또한 조화이고, 중도이다.
그러나 그것 이외에. “올바르다”라고 하는,
편협되지 않은 중도의 생활을 즐기고,
집착으로부터 벗어나,
자기에게는 엄하고, 타인에게는 관용하는 마음을 가지고,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광명에 차고, 신의 자애의 빛으로 감싸이기 때문에,
마음의 눈이 열려 간다.
그래서 마음의 눈이 열리면,
한층 더 아름다운 대자연의 광경을, 보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육체적으로 부조화한 내장(內臟)도,
자연색 그대로 똑똑히 식별할 수 있도록 된다.
게다가, 차원을 넘어선 세계의 풍경을 시작으로,
저 세상에서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생활도,
보이도록 되는 것이다.
육체로부터 나오는 부드러운,
본래 황금색의 후광이,
자색이라든가 핑크색 또는 붉은색처럼, 보이는 사람들은,
아직도 마음의 조화도가 낮은 단계에 있다고 하겠다.
이러한 광경은, 눈을 감고 있어도, 뜨고 있어도,
보려고 하는 의식이 작용하면, 당장에 보는 것이 가능하다.
내가 설법하고 있는 정도를 실천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차원을 초월한 저 세상을 비롯해서,
우리 곁에 있는 수호령이나 지도령의 모습도,
그대로 보는 것이 가능한 사람이 많다.
지옥령이 빙의하고 있는 자들을, 확실하게 확인하는 것도 가능하다.
입고 있는 옷의 무늬부터 옷감의 짜임새까지, 확실하게 보이는 것이다.
마음의 조화를 잃은 사람들은,
어두운 영위기(靈圍氣)에 뒤덮여,
같은 마음의 지옥령들에게 빙의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지금, 3차원의 입체의 세계에 살고 있지만,
2차원의 평면의 세계에 투영되는 영상쯤은, 간단하게 볼 수 있다.
그것은 3차원에서 2차원을 바라보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고차원의 세계를 뚫어 볼 수 있는 사람들은,
스스로의 마음과 행위가 고차원에 통하고 있기 때문에,
3차원도 2차원도 모두 내려다 볼 수가 있다.
그러나 아무리 고차원의 세계로부터
저차원의 세계를 볼 수 있다 하더라도,
그 사람들이 교만해지거나,
겸허한 마음을 잃어 버리면,
마치 전파를 통과시키지 않는 터널에 들어간 것처럼,
수신기는 전파를 잡지 못하게 되어,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항상 자기에게는 엄하고,
타인에게는 관용, 《‘익을수록 머리를 숙이는 벼이삭.’》과 같은 생활이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중도의 생활 이외에는 없는 것이다.
우리의 체온은 또 어떠할까.
역시 35도에서 37도 정도가 안정된 체온이다.
만약 이 체온이 0도가 된다면 어떻게 될까. 얼고 말 것이다.
반대로 100도나 된다면 어떠할까. 부글부글 끓고 말 것이다.
39도나 40도의 고열이 되면,
우리의 의식은 몽롱하게 되고 만다.
장기도 비정상이 되고 만다.
역시 우리의 체온도, 적온(適溫)이어야 한다.
기후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외기 온도가 40도 50도가 된다면, 어떻게 될까. 현세의 염열지옥이 될 것이다.
반대로 영하 20도의 저온이 계속된다면, 자유로운 행동이 가능할까.
외기온도는, 체온보다 12도~10도 정도 낮은 온도가,
신체에는 가장 조화된 온도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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