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신시도 체류지(새만금방조제 준공조형물) (순례지/성지)
이곳은 한국 천주교 두 번째 신부이며 땀의 증거자(현재, 가경자)인 최양업(토마스)이 1844년 중국에서 부제품을 받고 1847년 프랑스 함대에 승선하여 귀국 로를 탐색하는 과정에서 고군 산 부근(현재의 신시도 배수갑문 안쪽)에서 배가 좌초되어, 마카오 신학교 유학과 부제품 수품 후, 처음으로 조국 땅을 밟았던 곳이다.
프랑스 정부는 1839년 기해박해 때 조선 왕실에서 세 명의 선교사를 참수한 것에 대한 항의 서한을 보낸 바 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답신을 받기위해 자국의 함대를 파견 하였다. 이때 최양업은 프랑스 함대에 한국어 통역관으로서 파리외방 전교회 선교사 메스트로 신부와 함께 그 배를 탓던 것이다.
최양업은 1847년 8월12일부터 9월12일 까지 한 달 동안 이곳 신시 도에 체류하며 프랑스 해군과 조선 관리들 사이의 통역으로 활동 했으며 현지인과 비밀리에 접촉하여 부안 대 공소 신자를 만나기도 했으나, 관원의 감시로 더는 만나지 못하고 중국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전주교구는 최양업 신부를 이곳 군산으로 보내신 주님의 뜻을 새기고 군산지역 신앙문화유산을 기념하고자, 2013년 11월 30 일 신시도 난파 체류지에 작은 표석을 설치하였다 . 새만금 신시도 현장에 자리한 표석은 조국의 복음화를 위해 귀국을 꿈꿨던 최양업 신부의 흔적을 아련히 상기시킨다.
최양업(토마스)신부 신시도 체류지
이곳은 한국 천주교 두 번째 신부이며 땀의 증거자(현재, 가경자)인 최양업(토마스)이
1844년 중국에서 부제품을 받고 1847년 프랑스 함대에 승선하여 귀국 로를 탐색하는 과정에서 고군 산 부근(현재의 신시도 배수갑문 안쪽)에서 배가 좌초되어, 마카오 신학교 유학과 부제품 수품 후, 처음으로 조국 땅을 밟았던 곳이다.
프랑스 정부는 1839년 기해박해 때 조선 왕실에서 세 명의 선교사를 참수한 것에 대한 항의 서한을 보낸 바 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답신을 받기위해 자국의 함대를 파견 하였다. 이때 최양업은 프랑스 함대에 한국어 통역관으로서 파리외방 전교회 선교사 메스트로 신부와 함께 그 배를 탓던 것이다.
최양업은 1847년 8월12일부터 9월12일 까지 한 달 동안 이곳 신시 도에 체류하며 프랑스 해군과 조선 관리들 사이의 통역으로 활동 했으며 현지인과 비밀리에 접촉하여 부안 대 공소 신자를 만나기도 했으나, 관원의 감시로 더는 만나지 못하고 중국으로 돌아가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