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빙화동주
홍부용은 잠시 깊은 생각에 잠기고 나서 절대로 싸움이 벌어져서는 안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결단을 내린 홍부용은 돌연 번개처럼 청색혈마 곁으로 날아갔다. 청색혈마는 막 발장하려는 찰나 홍부용이 질풍처럼 날아온 것을 보고 무의식중에 두어 걸음 물러섰다. 그리고 의아한 듯이 물었다. “홍 낭자, 이게 무슨 짓이오?” 만화신검 홍부용은 눈물을 글썽거리며 애원조로 말하였다. “선배님, 제발 이곳을 떠나주세요. 비 공자는 지금 매우 엄중한 부상을 입었어요.” 이렇게 애원하는 홍부용의 위아래를 유심히 훑어본 청색혈마의 입언저리에 보일 듯 말듯 한 가닥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홍부용에 대해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의 태도로 보아 비류신을 극진히 사모하고 있다는 사실을 대뜸 알아차릴 수 있었다. 청색혈마는 홍부용이 비류신을 사모하는 것이 비류신을 위해 매우 다행한 현상이라고 생각하였다. 흔히 인간이란 감정이 풍부하기 때문에 어떤 사람에게 일단 마음이 쏠리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편견에 치우치기 쉬운 법이다. 그러나 청색혈마만은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나이를 먹으면서 산전수전을 다 겪었을 뿐 아니라 모진 풍파에 시달려 온 경험이 있는 터라 아무리 감정이 격렬할 경우에도 결코 쉽사리 흥분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냉정한 이성을 잃지 않고 담담히 물었다. “지금 홍 남자는 스스로의 안전을 위해서 이토록 간절하게 사정을 하는 거요?” 청색혈마의 입에서 이 말이 떨어지자 백화선녀는 노발대발하였다. 무림에서 쟁쟁한 지위를 누리고 있는 그녀로써는 자존심을 손상시키는 그런 말을 듣고 가만있을 수 없었다. 백화선녀는 제자 홍부용이 사문의 체면도 돌보지 않고 망신을 시킨다는 생각이 들어 앙칼지게 꾸짖었다. “이 바보 같은 계집애야! 이십여 년 간 피눈물이 나는 노력 끝에 이만큼 이끌어 놨더니 그 노력의 대가가 고작 이것뿐이냐?” 홍부용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정도로 겁이 나서 황망히 고개를 돌리고 머뭇거렸다. “스승님, 저는… …” 백화선녀는 서슬이 시퍼런 기세로 호통을 쳤다.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뭘 꾸물대는 것이냐? 너는 지금 나로 하여금 지금 이 시각부터 강호에서 영원히 낯을 들고 다니지 못하게 만들 작정이냐? 끝까지 그런 엉뚱한 고집을 부린다면 당장 요절을 내어 병신을 만들어버리고 말 테다!” 그녀는 곧 쌍장을 휘두르더니 강맹하기 짝이 없는 장풍을 발출하여 홍부용에게 후려쳐 갔다. 만화신검 홍부용은 소스라치게 놀랐으나 자신에게 있을 징벌이라면 아무리 무서운 것이라도 달게 받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감히 피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꼿꼿이 선 채로 죽음을 기다렸다. 이때 청색혈마는 사제지간의 정을 묵살한 채 매정하게 독수를 뻗치는 백화선녀의 악랄함에 의분이 치밀어 올라 앙칼지게 외쳤다. “감히 나에게 덤비지도 못하는 주제에 애꿎은 제자에게 화풀이를 하려 들다니… …” 이때였다. 청색혈마는 그런 결과를 벌써부터 예측하고 있었던 양 추호도 당황하지 않은 채 가볍게 상대방의 독수를 피해낸 다음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빙화동주가 실전(失傳)된 지 이미 백 년이 넘은 격산타우(隔山打牛) 초식을 펼치리라고는 미처 상상도 못했군요. 좋소! 그 정도 실력이라면 내가 빙선일월장을 사용하지 않겠다는 전제 아래 백 초 정도를 겨뤄야 승부를 가릴 수 있을 것 같군요.” 백화선녀는 자기로서 가장 자신만만한 격산타우 초식마저 가볍게 피해 버리는 상대방의 고명한 무공에 대하여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 그녀는 도저히 상대방을 경시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내심 무척 초조했으나 애써 불안을 감추며 앙칼지게 외쳤다. “큰 소리만 치지 말고 우선 일 장을 받아보시오!” 말소리가 채 떨어지기도 전에 그녀는 독문절기인 매살장으로서 창궁혈영(蒼弓血影) 초식을 펼쳐 급공을 가하였다. 이에 맞서 청색혈마는 번개처럼 허공으로 치솟아 오르더니 자뢰청상(刺雷靑霜) 초식으로 반격을 시도했다. 백화선녀는 수십 년 동안 절묘한 공력을 연마해 왔지만 빙선일월장과 맞상대할 자신은 없었다. 그녀는 청색혈마의 반격이 너무도 강맹하여 감히 정면으로 맞닥뜨리지 못하고 장세를 거둬들임과 동시 신속히 옆으로 피했다. 백화선녀가 옆으로 피하는 순간 청색혈마의 장풍은 그림자처럼 따라 왔다. 그리하여 백화선녀는 다급한 김에 연속 삼장을 후려침과 동시에 발길질을 두 차례나 하였다. 그야말로 피에 굶주린 늑대와 호랑이의 싸움을 방불케 할 정도의 혈전이었다. 쌍방 간에 일장을 방출할 때마다 살기가 등등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등골이 오싹하게 하였다. 서로 허공을 날기도 하고 땅을 기는 듯도 하여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수십 초나 계속하였건만 좀처럼 승부는 판가름이 나지 않았다. 승부는 그만 두고 우열을 가리기조차 힘들었다. 치열한 격투를 관전하던 만화신검 홍부용은 가슴이 조마조마하고 간담이 콩알 만해졌다. 그녀는 인사불성이 되어 쓰러져 있는 비류신을 힐끗 쳐다보다가 불현듯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이렇게 치열한 격투를 벌이고 있는 터에 나는 싸움 구경이나 하고 있을 게 아니라 비류신을 데리고 조용한 곳에 가서 그의 상처를 치료함이 어떨까?’ 그녀는 곧 결단을 내리고 신속하게 몸을 날려 비류신 곁으로 가서 그를 끌어안고 어디론지 사라져 버렸다. 청색혈마는 홍부용이 비류신을 데리고 사라져 버린 것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그저 일각이라도 빨리 백화선녀를 격퇴시키려는 일념으로 강맹한 공격을 연달아 퍼부을 따름이었다. 청색혈마가 우주말일(宇宙末日)이라는 괴초를 시전 하여 맹공을 가하자 꽃구름 같은 장영이 허공에 가득 퍼졌고, 장세를 따라 격출되는 장풍은 창졸간에 상대방의 신형을 완전히 휘감아 버렸다. 백화선녀는 소스라치게 놀라서 외마다 비명을 질렀고 그와 때를 같이 하여 그녀의 이마에는 구슬 같은 땀방울이 맺혔다. 그녀는 분노를 참지 못하여 앙칼지게 쏘아붙였다. “좋아! 청색혈마, 당신의 이 흉맹한 일장을 나는 단단히 기억해둘 테요!” 백화선녀는 어금니를 악문 채 최후의 발악을 하였으나 상대방의 장력이 너무도 위맹하여 가슴이 크게 울렁거리는 듯한 충격을 받음과 동시 온몸이 조여들고 맥이 빠져버렸다. 청색혈마 역시 전신의 맥이 빠졌다. 그녀는 비록 백화선녀에게 상처를 입히기는 했지만 상대방의 매살장에 맞은 터라 맥을 추지 못하였다. 청색혈마는 크게 격노하여 앙칼지게 외쳤다. “내 앞에서 불복하는 자,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이때 백화선녀는 홍부용이 없어졌음을 발견하고 노발대발하여 두리번거리면서 고함을 질렀다. “용아! 용아… …” 청색혈마 역시 내심 짚이는 데가 있어서 주위를 둘러보다 말고 비류신의 자취가 보이지 않자 안색이 돌변하였다. 그녀는 머리끝까지 치미는 분노를 억제하지 못하여 서릿발처럼 싸늘한 어조로 외쳤다. “흥! 이제 보니 너희들 사제는 비열하게 동쪽에서 풍악을 울리고 서쪽에서 노략질하는 그 따위 수작을 부렸구나.” “청색혈마, 말조심해라!” 청색혈마는 살기등등한 시선으로 상대방을 노려보았다. “뭐라고? 그래 말조심할 테니 어서 비류신을 내놓아라. 만약 순순히 응하지 않을 경우 나도 너를 잡아 놓겠다.” 일순 백화선녀는 크게 당황하였다. 상대방의 절묘한 무공에 의하여 크게 부상을 당한 터에 청색혈마가 이처럼 살기등등한 기세로 나오니 어떻게 변명해야 좋을지 갈피를 잡지 못하였다. 그녀는 급히 운기해 보았으나 가슴이 금방 터져버릴 듯 통증이 심할 뿐 진기는 전혀 끌어올릴 수 없었다. 이미 적과 대항할 능력을 상실했음을 알고 그녀는 어조를 누그려 뜨려 침착하게 말했다. “나는 이미 반백이 넘은 사람으로서 당신이 생각한 것처럼 그렇게 비열한 행동은 하지 않소.” 청색혈마는 비류신을 자기 생명 이상으로 끔찍이 여기는 터이지만 백화선녀의 말과 표정이 너무도 진지하여 거짓으로 여기지 않았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여러 말 해봐야 아무 소용없다. 우선 사아를 찾는 게 가장 시급하다. 홍부용은 사아를 깊이 사모한 것 같아 결코 그를 해치지 않을 것이다. 또한 백화선녀는 빙화동의 동주 신분인즉 사아가 부상을 당한 문제는 빙화동으로 찾아가서 따지도록 하면 될 것이다.’ 청색혈마는 이런 생각을 하고 냉소를 머금은 채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좋아요. 그 문제에 대해 잠시 불문에 붙이겠소. 다음에 또 만나서 따지도록 할 테요.” 청색혈마는 즉시 신속하게 몸을 날려 질풍처럼 사라져 버렸다. 백화선녀는 그녀가 사라져버린 방향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멍청히 서 있었다. “후유… …” 그녀는 땅이 꺼질 듯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무림칠절 중 일원으로서 강호 천지에 쟁쟁한 명성을 떨친 그녀일진대 오늘 뜻밖에도 강적을 만나 톡톡히 망신을 당했으니 분하고 안타까운 심정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그녀는 오랫동안 탄식하다가 마침내 무거운 발길을 옮겨 어디론지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한편 비류신을 등에 업고 두 여협들의 격전장에서 벗어난 만화신검 홍부용은 비류신과 함께 있을 수만 있다면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으리라는 일념으로 인적을 찾아볼 수 없는 허허벌판을 질풍처럼 내달았다. 홍부용은 갑자기 등 뒤에서 인기척이 들려옴을 의식하고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백화선녀가 금방이라도 뒷덜미를 덥석 움켜쥘 것만 같은 착각에 사로잡혀 있던 그녀는 신경이 무척 날카로워졌다. 알고 본 즉 그 인기척은 등에 업힌 비류신의 숨소리였다. 홍부용은 후다닥 고개를 돌려보더니 비류신이 눈을 뜬 것을 발견하고 무척 기뻐하였다. “비 오빠! 이제 좀 괜찮으세요?” 일순 비류신은 다시 눈을 감아버렸다. 그의 안색은 매우 극렬한 고통을 참지 못하여 처절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홍부용은 비류신을 조심스럽게 풀밭 위에 내려놓은 다음 눈물을 주르륵 흘리며 흐느껴 울었다. “비 오빠, 우리는 지금까지 함께 생활해 보지 못했어요. 이 몸은 죽어서라도 영원히 당신 곁에 있겠어요.” 이때 누군가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생시에는 잠자리 한 번 같이 해보지 못했지만 죽어서나 실컷 한을 풀어보겠단 말인가? 으하하핫… …” 만화신검 홍부용은 노발대발하여 얼굴을 붉힌 채 앙칼지게 외쳤다. “어떤 생쥐 같은 녀석이 감히 사람을 희롱하느냐?” 그녀는 다짜고짜로 해시진루(海市辰樓) 초식을 펼쳐 우렁찬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향해 날카로운 기세로 일장을 내뻗쳤다. 이때 호쾌한 음성이 다시 들려 왔다. “홍 낭자, 그 기세가 매우 무섭습니다. 그려… …” 곧 이어서 도장맹의 소 장주 선우철이 유들유들하게 웃으며 홍부용 앞에 나타났다. 일순 홍부용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녀는 선우철이 음험하고 교활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면서도 항상 겸손하고 의젓한 태도를 취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그녀는 선우철을 발견한 즉시 앙칼지게 쏘아붙였다. “내 앞에서 여러 소리할 필요 없으니 어서 물러 가욧!” 선우철은 히죽 웃으며 계속 앞으로 다가오더니 비류신을 발견하자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언성을 높였다. “아니, 이게 누구야? 비형이 웬일일까? 홍 낭자!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이오?” 만화신검 홍부용은 선우철에 대한 인상이 좋지 않은 터라 끝내 냉담하게 상대했다. “고양이 쥐 생각하듯 그처럼 생각하는 척 말아요. 나는 당신의 속셈을 다 안단 말이에요.” 선우철은 표면상으로 아무렇지도 않은 듯하였으나 속으로 부드득 이를 갈 정도였다. ‘망할 계집애, 두고 봐라. 언젠가는 나에게 애걸복걸할 때가 있을 테니… …’ 그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겉으로 점잖은 척 정색을 하고 공손한 투로 말했다. “홍 낭자는 왜 그런 말씀을 하시오! 나는 비형과 절친한 친구이거늘 그가 부상을 입어 허덕이는 모습을 목격하고 어찌 그냥 돌아설 수 있겠소.” 그는 곧 오른손을 내밀어 비류신의 맥혈을 짚으려 들었다. 이때 홍부용은 깜짝 놀라며 앙칼지게 외쳤다. “꼼짝 말아요!” 그녀는 곧 손가락을 구부려 가지고 상대방의 손가락을 튕기며 급습을 가했다. 선우철은 그녀의 날카로운 기세에 겁을 집어먹고 재빨리 손을 거둬들이고 천연덕스럽게 말하였다. “홍 낭자는 지금 무엇인지 잘못 생각하고 있소.” “무엇을 잘못 생각한단 말이에요?” “나는 비형과 절친한 벗으로서 의당 최선을 다하여 그를 치료해야 할 처지요. 그런데 낭자는 내가 치료하려는 데도 고의로 방해를 하려드니… …” 홍부용은 그의 말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 소리 내어 크게 웃었다. “호호호호… …” 선우철은 그녀가 왜 웃는지 모른 채 건성으로 자기도 따라 웃었다. 일찍이 선우철은 홍부용과 만난 직후부터 잠시도 그녀를 잊어본 적 없었다.그에 반해 홍부용은 선우철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리하여 선우철은 어떻게 해서든지 그녀로 하여금 호감을 갖게 하려고 무던히 애를 썼으나, 좀체 뜻을 이루지 못하자 마침내 홍부용을 무척 저주하게 되었다. 홍부용은 갑자기 냉담하게 말했다. “그따위 허울 좋은 감언이설은 하지 말아요. 누가 당신의 알량한 속셈을 모를 줄 알아요? 비 공자의 상처를 치료해 주겠다는 명분으로 엉뚱한 수작을 부리려는 속셈을 내가 모를 줄 알고, 흥!” 선우철은 그녀에게 조롱을 당하는 것 같아 분노를 참지 못하여 버럭 언성을 높였다. “홍 낭자, 사람을 그렇게 무시하는 게 아니오! 나는 비록 의술이 고명하지는 못하지만 가부로부터 배운 의술을 발휘하여 비형의 원기를 회복시킬 수 있단 말이오.” “흥! 미안하게 됐군요. 청풍검 선우철 대협께서 의술의 성수(聖手)임을 미처 몰라 뵙고 큰 실례를 범하고 말았으니 아무쪼록 널리 양해하세요. 그럼 지금 비 공자는 무엇으로 인하여 이런 상처를 입었는지 한 번 알아맞혀 보실까요?” 선우철은 대뜸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이건… …” “병세도 알지 못한 터에 감히 병을 고치겠다고 덤비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마치 얻어맞아서 퉁퉁 부은 것을 보고 살이 쪘다고 우기는 것이나 마찬가지의 엉터리 수작이니, 의사인 척하지 하지 말아요.” 이쯤 되면 선우철은 쥐구멍이라도 찾아들어갈 정도로 심한 모욕을 당한고만 셈이다. 그러나 그는 본래 총명하기 짝이 없는 위인인지라 이처럼 궁지에 몰린 순간에도 한 가지 묘책을 떠올렸다. “하하핫… 홍 낭자, 그런 게 아니오.” “뭐가 그렇지 않단 말이요?” 홍부용이 이렇게 캐묻자 선우철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태도를 볼 때 이미 자기 속임수에 넘어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자고로 의가지도(醫家之道)에 첫째 진맥을 하여 환자의 병세를 살피고, 둘째 환자의 증상을 물어본 다음, 셋째 미심쩍은 문제는 환자에게 직접 물어보고 나서야 비로소 마지막 단계로 치료하는 법이오. 한데 나는 아직 진료도 해보기 전에 어떻게 그런 것을 알아낼 수 있겠소?” “그런 뚱딴지같은 소리는 귀에 들어오지 않아요. 흥! 누가 속을 줄 알고?” 그녀는 더 이상 말을 하기 싫다는 듯 재빨리 비류신을 들쳐 업고 서쪽 방면으로 질풍처럼 내달았다. 이때, 카랑한 사내의 음성이 울려 퍼져 홍부용을 깜짝 놀라게 하였다. “돌아가지 못할까!” 말소리가 채 멎기도 전에 그녀 앞에 여섯 명이나 되는 건장한 사나이들이 나타나서 길을 가로막았다. 홍부용은 부아가 치밀어 올라 고개를 홱 돌리고 앙칼지게 쏘아붙였다. “선우철, 이게 무슨 짓이오?” 선우철은 천연덕스럽게 폭소를 터트렸다. “하하핫… 홍 낭자, 공연한 오해는 하지 마시오. 나는 결코 홍 낭자의 길을 막지 않았습니다.” “뭐라고요? 그럼 이 자들은 왜 내 길을 가로막는 거지요?” 일순 선우철의 뇌뢰에 여러 가지 생각이 번개처럼 떠올랐다. 그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기어이 홍부용을 차지해야겠다는 결심을 하였다. 지금까지 그녀를 차지하려고 갖은 수작을 다 부렸으나 번번이 실패로 돌아가자 급기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 욕심을 채워놓고 봐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기 위해서 우선 비류신을 죽여야 했다. 그가 다시 살아난다면 홍부용은 비류신에게만 온갖 정성을 다 바칠 뿐 자기는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리하여 이처럼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비류신을 죽이는 게 상책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돌연 청색혈마의 경고가 상기되어 몸서리를 쳤다. “만일 비류신이 불행하게 된다면 너는 뼈도 추리지 못하게 될 테니 두고 봐라!” 만일 청색혈마가 복수를 하려고 덤빌 경우, 아버지 선우휘가 보살펴 줄 가능성도 있지만 그녀의 매서운 빙선일월장은 상상만 해도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러나 선우철은 지금 여기서 적당한 수단을 부려 비류신을 해치워 버린다면 청색혈마를 속일 수 있다는 계산을 하였다. 그는 이렇게 결정한 다음 여전히 여유를 잃지 않고 낭랑만 어조로 대꾸하였다. “그 자들이 홍 남자의 길을 막는데, 난들 달리 뾰족한 수 없지 않소?” “뭐라고? 저 자들이 마음대로 나를 어떻게 할 수 있으리라 믿는 거요?” 그녀는 말을 끝내기도 전, 장검을 뽑아들고 여섯 사나이를 향해 맹렬한 기세로 장검을 휘둘러댔다. 눈부신 검광이 사방으로 퍼져나가더니 처절한 비명이 들려왔고, 그와 때를 같이하여 우악스런 사나이 한 명이 피를 뿌리며 풀썩 쓰러졌다. 만화신검 홍부용의 절묘한 검법에 선우철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부상당한 환자를 등에 업은 채 그렇듯 날카로운 기세로 단숨에 적을 격상시킨다는 사실은 그야말로 절세라고 아니할 수 없었다. 그는 지금 자기 수하가 죽은 사실에 대하여 추호도 마음에 두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검법에 경악을 금치 못할 따름이었다. 그는 돌연 유들유들하게 웃으며 약간 허리를 굽혀 보였다. “홍 낭자, 정말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만화신검 홍부용은 흠칫 놀랐다. 그녀가 방금 일 검을 휘둘러 한 사람을 죽인 것은 요행에 불과했다. 그들은 모두 무공이 출중한 인물들인지라 일 대 일로 상대한다면 모르되 합공해 올 경우 도저히 물리칠 자신이 없었다. 비류신만 아니라면 문제는 다르겠지만, 한 사람을 등에 업은 체 어떻게 실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겠는가? 목하 상황은 이토록 불리하지만 그녀는 비류신을 등에 업은 채 죽을 수 있다면 오히려 행복으로 여기겠다는 각오가 있는 터라 분연히 외쳤다. “죽고 싶은 자가 있으면 얼마든지 덤벼라!” 그녀는 곧 거화소천(擧火燒天) 초식을 펼쳐 종횡으로 장검을 휘둘러 여러 사나이들을 일단 격퇴시킨 다음 곧장 선우철을 향해 찔러갔다. “으하하핫… 매화검은 과연 소문대로 훌륭하구려. 그럼 이 몸도 사양치 않고 한 수 가르침을 받겠소이다.” 선우철이 양쪽 옷소매를 떨치자 다섯 줄기 은백색 한광(寒光)이 발출되더니 창졸간에 홍부용의 신형을 휘감아 갔다. 홍부용은 비류신을 들쳐 업고 있는 터라 민첩하게 움직일 수 없어 고전을 면치 못하던 중 뜻밖의 암습을 받자, 황망히 몸을 도사리며 소지남산(笑指南山) 초식을 펼쳐 상대방 목덜미를 향해 반격을 가했다. 쨍! 청아한 금속성이 울려 퍼지는 찰나 일진의 은광이 번쩍이더니 홍부용은 오른팔이 시큰하면서 하마터면 장검을 떨어뜨릴 뻔하였다. 그녀는 눈에서 불꽃이 일어날 정도로 분노가 극도에 달하여 앙칼지게 외쳤다. “선우철! 좋다! 네가 죽든 내가 죽든 결판을 내고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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