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산 참성단 옆 한 그루 소사나무
버스는 다시 섬을 출발하여 강화도 마니산으로 길을 떠난다. 강화도에서 가장 높은 산이 마니산(469.4m)이다. 산의 정상에는 단군왕검이 하늘에 제사 지내기 위해 쌓았다는 참성단이 있다. 기단을 둥글게 만들고 그 위에 네모난 제단을 만들어 ‘천원지방’, 즉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우리 고유의 세계관을 담았다고 한다. 지금도 개천절마다 천제를 올리고 있으며, 전국체육대회의 성화가 채화되어 상징성을 이어가고 있다.
산은 마리산· 마루산· 두악산 등으로 불려졌는데, 이 모두 우두머리 산이나 거룩산 산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단군왕검이 제를 지냈다고 하는 것으로도 그 역사성이 깊지만, 고구려, 백제, 신라의 왕들이 제를 올렸다는 기록이 전해지는만큼 이 산이 갖는 제천의식의 역사는 그만큼 깊고 오래다.
더욱이 백두산과 한라산의 중간 지점에 위치해 있다고 하니 우러러 민족의 영산을 두루두루 거느린 요지라 하겠다. 이렇게 중요한 산을 지금에서야 찾아가 뵙는다니 늦은 감이 있다.
여행을 하다보면 우리나라가 얼마나 넓은지 새삼스러울 때가 많을 것이다. 넓이보다는 깊이로 혹은 높이로 어쩌면 구석구석을 세밀히 찾아가는 여행의 다양한 경험 덕분일 것이다. 방방곡곡 이모저모 사람사는 세상을, 때로는 탐사하듯 때로는 바람쐬듯 우리는 저마다의 여행체질로 저를 이끌 것이다.
가끔은 산행이나 여행을 하고 스스로 후기를 적어 올리는 나의 행위가 고단함으로 쌓일 때도 있었다. (특히 아주 바쁜 틈새일 때는..) 지금까지 산행을 하거나 여행을 하거나 스스로에게 부여한 이 책임감을 그냥 간과한 적이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지난 경주 남산 산행을 쓰지 못한 것이 아직도 걸려 있는 걸 보면, 그 누구도 아닌 스스로가 좋아서 쌓은 즐거운 일감에 어느 순간부터 직업정신 같은 것이 생긴 것도 같다. 늦은 밤까지 화면을 들여다보아야 할 때 오는 어떤 정신력이라 할까.
그러나 하루에 일어날 수 있는 여러 개의 시간 중 하나를 쪼개어 나에게 무언가를 심어넣는 이 행위가 얼마나 매력적인지 나는 잘 알고 있다. 제 아무리 하찮아 보여도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면 하찮음은 일순간에 사라지고 자신만의 희열을 발견하지 않던가.
이러구러 해보는 게 좋았다. 어쩌다보니 몇 해를 써왔다. 그 속에서 나는 무언가를 본 것 같기도 하다. 가볍게 스치기보다는 세밀히 들여다볼 때의 진정성 이랄까. 내 좋아서 하는 일에 즐거운 책임을 스스로 부여한 셈이지만, 쓸 때마다 이 세상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문만 벗어나도 일상은 여행이 된다고 말하여 왔지만 나는 방 안에 앉아서도 여행을 이어가고 있었다. 어찌 감사하지 않으랴.
언제나 여행하는 여행생활자가 되고 싶다. 멀리 내다보고 깊이 들여다보는.... 그런 의미에서 여행은 할 때마다 고귀한 행위이고 그것을 즐거이 기록한다면 나 또한 그것에 편승해 갈 수 있을 것 같다.
에고, 이야기가 한참 옆길로 새었다. 다시 마니산으로 돌아가 참성단을 둘러봐야겠다. 그때 나는 참성단이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는 것을 눈으로 보기만 하다가, 바로 그 옆에 꿋꿋이 선 한 그루 소사나무를 만나게 되었다. 바람부는 바다의 산능선에 주로 살아간다는 이 낙엽 소교목은 특별히 오래 살지도 그렇다고 아름드리 크지도 않았지만 오직 홀로 서 있어서 제단의 벗으로서는 그만이었다. 첫눈에 반할 정도로 빼어난 아름다움이 아니라 영험함이 서린 사물의 곁에 홀로 살아야 하는 어떤 고적함이랄까.
은행나무처럼 천년 숨결을 지닌 것도 아닌 소교목 나무를 심은 것은 무얼까? 정확한 뜻이야 모르겠지만 산길 지나다 어렴풋이 생각해 보았다. 이 산에는 유난히 소사나무가 많았던 것이다.
소사나무는 분재하는 사람들에게 특별히 인기있는 나무이다. 큰키나무가 아닌데다 구불구불 몸을 흐느적거려 가까이에 두고 키우기에 적합해서일 것이다. 어른거리는 흰빛이 몸의 무늬를 이루었으니 수피를 관찰하는 즐거움도 있겠다.
멋대로 자란 듯하지만 그 자체로 멋이 든 나무. 힘차게 팔을 뻗는 춤사위 한 판을 보는 듯하다. 나무와 나무 사이에 뒤틀렸어도 저를 드러내느라 한껏 몸을 뒤채는 역동적인 선율 아닌가.
한 그루 녹음으로도 멋지고 여럿이 어우러져 구불거려도 멋스럽다. 이름도 소사소사... 가을바람 스미는 소리다. 참성단의 영험함을 지키는 토종 한국의 미의식일까. 큰 키도 아닌 것이 우람하지도 않은 것이 은근하게 생각 주위에 맴을 돌곤 하였다.
강화도 들판은 역사의 현장
어느 가을이고 황금빛 들녘은 풍요롭지만 강화도에서 만나는 황금빛은 유난히 풍요롭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이렇게 평야가 맘껏 기지개를 켰으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는데 강화도에 와서 가장 놀란 것이 평야라고 해도 손색이 없겠다. 마니산 등산로에서 참성단을 지나 암릉구간을 걸어갈 때 탁 트인 들판의 모습은 그대로 풍요로운 그림이었다.
강화도는 조선시대에 이미 군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조정에서는 특별히 '유수부'라는 행정기관을 따로 두어 관리를 하였는데, 강화도 유수는 정2품(현재의 장관급)이 다스릴 정도였다고 한다. 당시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을 듯하다.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강화도의 이야기는 특히 프랑스와 관련이 깊은 것 같다. 흥선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에 대항해 일으킨 것이 널리 알려진 병인양요이고, 서양의 문화오랑캐인 프랑스를 이름이다. 그 결과는 오늘날까지 문화재에 대한 힘의 원리를 내세울 때 자주 거론되는 외규장각 도서 반환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
외규장각이라는 건물은 조선왕실의 역사를 의궤로 만들어 보관하던 규장각의 부속건물이다. <의궤>는 조선왕실의 행사를 후손들이 정확하게 알게 하기 위하여 글과 그림으로 정밀하게 기록한 우리의 자랑스런 서책으로, 왕실의 행사를 도화서 화원들의 그림을 곁들여 기록한 드문 예로 세계 어떠한 서책에서도 다룬 적 없어 그 독창성을 인정받는 기록문화재이다.
조선왕 중에서 가장 책을 사랑했던 군주로 알려진 정조 임금은 왕립도서관인 규장각을 세웠으며 따로이 부속건물을 지었는데, 그것이 바로 외규장각이고, 외규장각이 있는 곳이 바로 강화도이다. 1866년 병인년에 프랑스 로즈 제독이 이끄는 함대가 강화도로 쳐들어왔고(병인양요), 그들이 퇴각하면서 외규장각에 있던 우리의 도서 중 한 눈에 봐도 진귀하게 보이는 의궤 삼백여점 등을 무차별 약탈해 갔는데, 그들은 나머지 귀중한 서책들을 모두 불태워 버렸다.
우리 문화재란 것들이 그저 존재해도 귀중할 것인데, 그것이 더욱 뜻있게 만들어졌다거나 가치가 남다르다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언제고 한번 다시 강화도의 이곳 저곳을 여행하고 싶어진다. 그땐 아마 병인양요의 현장 등을 다녀보면 좋을 것이다.
황금들판은 사방연속무늬처럼 동서남북을 가리지 않고 펼쳐졌다. 섬이라고 돌멩이 하나 던지면 바다로 퐁당 빠지는 것은 아니라지만, 강화도 들판이 이토록 펼쳐졌다는 건 뜻밖의 선물이었다.
황금빛 출렁이는 강화도의 가을 들판을 때맞춰 와서인지 보면 볼수록 아름답게 드넓었다. 바다 한 조각, 들판 한 조각, 섬도 한 조각... 언제나 이런 풍경은 내 마음을 수직으로 끌어들인다.
서재영 언니는 참성단 즈음에서 분명히 우리 일행을 보았으나 아래참에서 기다리다보면 합류할 거란 생각에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었단다. 그런데 잠시 한눈 파는 사이에 우리를 놓쳤고(길이 엇갈린듯), 한참을 기다리다 다시 올라가 보고서야 이미 가버렸음을 알게 되었단다.
기다리는 줄 몰랐으나, 나도 모르는 곳에서 기다려준 사람이 있다. 한참 후에 알게 되었을 때 고마운 마음과 미안한 마음이 함께 이는 건 왜일까. 고맙고 미안하다. 이 감정이 사라지면 절대 안되는 것 같을 때 있다.
마니산 등산로는 상방리 매표소 - 단군로 - 372나무계단 - 정상 (참성단 469.4) - 바위능선 - 함허동천 매표소 방향이다.
오전 10시부터 걷기 시작하여 전날의 피로를 서서히 풀면서 걸어볼 요량이었는데, 수준을 낮췄던 내 생각을 비웃듯, 끊임없는 돌계단과 나무계단으로 초반전 버티기도 힘들게 했다. 이틀 강행군 할 체력은 아니라는 무력감이 들어 급우울해 졌으나, 오후에 제부도 또한 너무나 가고 싶었기에 분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신력으로 다시 살아나기 시작한 곳이 암릉구간 즈음이었다. 이때부터 나는 유격훈련을 하듯 뛰었다. 피로는 아무렇지 않게 되었다.
모두 펜션에서 아침밥을 먹었으나, 나는 아침을 먹지 않아 이때부터 더욱 빠르게 움직였던 것 같다. 그러니까 배가 고파서 빨리 내려가야 했던 것이다.
암릉 구간이 생각보다 길었다. 숲속을 거닐 때와 체감이 달라지는지, 나는 바위를 건너는 것이 거인의 걸음 옮기는 것 같았다.
탁 트인 곳으로부터 바다가 올라왔다. 허허벌판이라 내 얼굴은 지글지글 익어갔지만 비와 바람에 씻긴 바위가 방처럼 깨끗해, 순간 세상에 존재하는 시간의 제약 같은 것 좀 잊고 방의 주인처럼 행세해 보고 싶었다. 어찌 산행을 하면서 그런 여유 한번 부린 적 없었는지, 나에게 서 있는 부여만 내린 사람처럼...
마니산은 수천번 들었음직한 하나의 상징처럼 뇌리에 박혀 있었지만 이제야 처음 만났다. 이 너럭바위들이 더없이 매력있게 다가왔지만, 주어진 세 시간에 꼭 맞는 사람이고자 노력하였다. 그리고 머릿속에선 마지막 날머리인 함허동천이 어떤 이름인지, 끝없는 호기심이 일었다.
내가 내려오고 나서야 알게 된 자그마한 상식을 조금 일찍 알았더라면, 나는 기필코 그곳 주위의 풍경을 담아왔을 것이다. 그리고 관심을 가졌을 것이다.
사람의 호기심이 멈추어 버리면 두뇌는 시들한 것이 되어버리고, 여행을 하더라도 육체만 움직인 결과가 됨을 다시한번 느꼈다.
조선 전기의 승려 기화가 마니산 정수사를 중수하고 이곳에서 수도했다고 해서 그의 당호인 함허를 따서 함허동천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계곡의 너럭바위에는 기화가 썼다는 '涵虛洞天' 네 글자가 남아 있는데,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에 잠겨 있는 곳'이라는 뜻이다. 마니산 서쪽 기슭에 펼쳐져 있으며, 빼어난 산세를 끼고 곳곳에 거대한 너럭바위들이 흩어져 있다.
이 바위들을 넘나들며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장관을 이루고, 특히 계곡 한 켠에 200m에 달하는 암반이 넓게 펼쳐져 있어 마니산의 절경으로 꼽힌다. 계곡 아래에는 한국 최고의 야영장으로 꼽히는 함허동천 야영장이 자리잡아 여름철이면 캠핑을 즐기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개의 야영장 외에 체력단련장·극기훈련장·팔각정·샤워장 등 각종 부대시설이 갖추어져 있고, 돌담을 두른 주변의 초가에서는 민박도 할 수 있어 사계절 관광지로 이름이 높다. 인근의 볼거리로는 정수사, 마니산 참성단, 세계 4대 개펄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강화 개펄, 강화에서 가장 큰 모래톱을 자랑하는 동막해수욕장 등이 있다.
-두산백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