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구약성경 인용)
요한복음 13장 18절『내가 너희 모두를 가리켜 말한 것이 아니니라. 나는 내가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 그러나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 지금부터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일러둠은 일이 일어날 때에 내가 그 인줄 너희가 믿게 하려함이로다.』
발꿈치 드는 자는 표면적으로는 키가 작은 자가 키를 크게 보이려고 발꿈치를 드는 것이다. 그러나 이면적으로는 배반하는 자이고, 대적하는 자를 의미한다.
시편 41편 9절의 말씀으로『내가 신뢰하여 내 떡을 나눠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의 발꿈치를 들었나이다.』에서 인용한 것으로, 다윗의 아들 압살롬을 비롯하여 그를 따르던 이스라엘의 많은 백성들은 다윗의 죽음을 고대하고 있었다. 심지어 그의 친구이자 책략가로 도움을 주던 아히도벨 마저 다윗을 배반하고 그의 목에 칼을 겨누고 있었다. 아히도벨은 다윗을 배신한 것으로는 모자라 다윗의 아들 압살롬을 부추겨서 아버지 다윗의 후궁들을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간음하도록 부추겼다. 그 계략을 받아들인 압살롬은 왕궁 옥상에 장막을 치고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아버지의 후궁들과 동침했다.
아들 압살롬이 그의 백성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키고 자신의 후궁들과 동침하는 광경을 병상에 누워 지켜보던 다윗은 인간의 악함과 변덕스러움에 치를 떨고 있었다. 그는 이 고통의 시간을 지나면서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은 고뇌와 갈등 가운데 있었다. 그리고 다윗은 인간에 대한 철저한 절망을 경험하고 있었다. 그런데 인간에 대한 그의 철저한 절망은 비단 아들 압살롬과 친구 아히도벨의 모습을 통해서만이 아니었다. 바로 다윗 자신 또한 그들과 별반 다를 바 없는 부패한 죄인임을 그는 알고 있었다.
다윗은 성적인 욕정을 채우기 위해서 신하 우리아의 아내를 겁탈했다. 그리고 그 죄를 숨기기 위해서 우리아를 사지로 내몰아 결국 그를 죽이는 살인죄를 범하였다. 다윗은 그의 성욕을 채우기 위해서 충신의 아내마저도 성적 대상으로 삼는 그 자신의 모습 속에서 아들 압살롬을 보았을 것이다. 지은 죄를 덮기 위해서 서슴없이 살인을 저지르는 그 자신의 보면서 친구 아히도벨을 떠올렸을 것이다.
다윗은 사람의 마음과 생각이 모두 악하다는 창세기 말씀을 묵상하면서, 인간에 대한 철저한 절망에 빠져있었다. 다윗은 그를 배신하고 그에게 칼을 겨누고 있는 사람들의 죄악만을 고발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죄악 또한 솔직하게 하나님께 아뢰고 있다. 『내가 주께 범죄 하였사오니.』다윗은 고난 속에서 자신을 포함한 모든 인간의 부패함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그 깊은 절망 가운데 하나님을 찾고 있었다. 그리고 여호와의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나를 고쳐주소서』다윗은 그가 죽을 수밖에 없는 자임을 인식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고 있었다. 다윗은 자신이 생명의 근원에서 끊어진 죄인임을 깊이 자각하며 고쳐주실 것을 간구하고 있었다. 다윗은 주님의 은혜 안에서 그의 마음을『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영원부터 영원까지 송축할지로다 아멘 아멘』이라고 표현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을 붙드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다윗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다. 여호와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라는 자는 다름아닌 가롯유다가 된다. 그가 예수님을 배반하여 대제사장에게 팔았기 때문이다. 가롯유다가 예수님을 판 것이 시편 41편 9절의 말씀을 응하게 하려함이라고 한다. 응하게 한다는 말은 이미 예정 또는 예고되어있다는 말이다. 앞으로 다윗을 상징하는 메시야에게 이와 같은 유사한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말이다.
시편 41편 9절에서 다윗의 아들 압살롬과 친구 아히도벨이 다윗을 대적한 것은 왕의 자리를 찬탈하기 위함이었다. 가롯유다가 예수님을 판 목적은 무엇인가? 돈 때문이 아니다. 돈은 팔고 사는 거래의 수단일 뿐이었다. 그가 예수를 판 목적은 하나님 아들의 자리에 앉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한글 가롯 유다에서 가롯은 이스카리옷이다. 이스카리옷은 sicarii(단도의)란 말에서 유래한 단어로, 그가 세리였다는 말도 있으나, 무력투쟁을 동원해서라도 이스라엘 왕국의 광복을 이루어 신정 다윗 왕국을 재건해야 한다고 생각한 열심 당원의 일원이라고 보는 것이다.
모든 복음서에서 예수는 유다가 배신자란 것을 정확하게 알았고, 만찬 당시 유다 본인에게도 예수님 자신이 그의 배신에 대해 알고 있다는 언질을 넌지시 주었다. 요한복음 13장 21-22절『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이 괴로워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서로 보며 누구에게 대하여 말씀하시는지 의심하더라』
그러나 이미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건지, 유다에게 "네가 할 일을 해야 하지 않겠냐"하고 빵을 떼어준 후 그를 보내주고, 질책하거나 만류하지는 않는다. 다만 이후 유다의 비참한 운명에 대해서도 알았는지, 예수님 자신이 억울하게 죽게 되는 것은 신의 계획대로 일어나는 일일 뿐이지만, 그 죽음의 원인을 제공하게 되는 유다는 화를 입게 될 것이라며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유다 본인에게는 더 나았을 것"이라고 탄식하는 등, 분노나 배신감보다는 안타까운 마음을 드러내기도 한다.
가롯 유다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분명히 목격했다. 예수님이 하신 수많은 표적들, 죽은 자를 일으키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서 엄청난 사람을 먹이시며, 불치병인 문둥병을 고치시고, 물 위를 걸으시며, 귀신을 쫒아내는 하나님 아들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들을 목격한 것이다.
가롯 유다는 그가 평소에 가진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이용하기로 한 것이다. 그가 은 삼십을 받고 대제사장에게 판 것은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이 엄청난 신적 능력을 발휘하여 로마를 무너뜨릴 것으로 예상하고 판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아들의 자리에 앉아있는 것이다. 결국 그는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마음을 가진 것이다.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많은 신도들이 이런 망상에 빠져 있는 것이다. 예수를 자기의 목적을 이루려는 도구로 활용하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기복신앙이다. 세상의 복을 위해 예수님을 등장시킨다. 기복신앙에 빠져 있는 신도들은 가롯 유다와 같은 자들이다. 예수를 팔아서 장사를 하는 것이다. 오늘날 주식회사 예수라는 말이 등장할 정도이다. 세상의 복을 받기 위해 헌금하고 교회 공동체를 위해 일하는 모든 일들이 예수를 이용한 장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또한 율법에서 정한 십일조를 강요하거나, 교회 공동체 건물을 성전이라고 하여 성전 건축 헌금을 내게 하는 등의 일들은 예수님이 이루신 것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다.
예수님은 인자로서 세상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셨다. 모든 구약의 언약을 다 이룬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다 이루었는데도, 교회 공동체가 율법에 따라 무엇인가를 행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이루심을 믿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예수님이 이루신 것을 믿지 않는다면 예수를 대적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 공동체에서 율법에 따라 행하는 것 중의 대표적인 것이 날마다 죄를 회개하여 예수의 피로 용서받으려고 하는 행위이다. 구약의 제사만 없지 마치 구약의 제사처럼 희생양을 죽여 피를 통해 죄 사함을 받으려고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단번에 죄를 대속하기 위해 죽으셨다.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믿는 자에게는 더 이상 희생제사가 필요없게 된 것이다.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연합하여 죽은 것을 믿는 자는 또한 함께 부활한 것을 믿는 자이니, 죄인이 아니라 의인으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