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움 속 놓지 않았던 공부, 그리고 포기해야 했던 꿈
그렇게 학교생활에서 시달리고 또 시달리며 하루하루를 견디다 보니,
세월은 어느새 총알처럼 흘러갔다.
어린 마음에 쌓이는 설움은 많았지만, 나는 공부만큼은 놓지 않았다.
6학년이 되자 중학교 입학시험을 준비해야 했다.
학교 수업이 끝난 뒤에도 늦게까지 공부해야 했고, 집에 돌아와서까지 책을 붙들고 있을 형편도 아니었다. 그나마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이 학교에 남아 있는 시간이었고, 나는 그 시간을 놓치지 않았다.
그러나 점심시간이 되면 또 다른 설움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니는 어렵게 마련한 쌀 대신 꽁보리에 고구마를 섞어 만든, 이른바 ‘번또’를 도시락으로 싸 주셨다. 어머니도 먹고살기 힘든 형편이라 도시락을 매일 싸주실 수는 없었다.
몇 번이나 도시락을 싸주시지 못한 날이 있었다.
그럴 때면 나는 점심시간이 다가오는 것이 두려웠다.
친구들이 하나둘 도시락을 꺼내 밥을 먹는 모습을 바라보면서도,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배가 고픈 것보다 더 서러운 것은 내가 가난하다는 사실을 또다시 확인해야 하는 순간이었다.
다행히 학교에서는 가난한 아이들에게 옥수수와 우유를 섞어 만든 빵 한 개씩을 나누어 주었다. 나는 그 빵 하나로 점심을 때웠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은 그저 빵 한 개였지만, 당시 어린 나에게는 그 빵 하나가 하루를 버티게 해주는 소중한 점심이었다.
시험을 볼 때도 가난은 나를 따라다녔다.
당시에는 시험을 보기 위해 별도로 시험 대금을 납부해야 했는데, 그 돈마저 낼 형편이 되지 않는 아이들이 있었다.
나도 그중 한 명이었다.
시험을 치르는 날이면 시험지를 한 장만 받아 학생, 세 명이 함께 문제를 들여다보고, 각자 백지에 답안을 작성해서 제출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하면 참 서러운 일이었다.
공부를 못해서 시험을 못 보는 것이 아니었다.
시험을 볼 돈이 없어서 제대로 시험지를 받아 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공부를 포기하지 않았다.
나는 학급에서 늘 1등에서 5등 안에는 들었다.
가난했지만 공부만큼은 잘하고 싶었다.
어쩌면 공부가 내게는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처럼 느껴졌는지도 모른다.
'공부를 잘하면 나도 중학교에 갈 수 있겠지.'
어린 마음에 품었던 그 작은 희망 하나를 붙잡고 공부했다.
중학교 입학시험이 가까워지자,
김석호 담임 선생님께서 나를 특별히 챙겨 주셨다.
학교 수업이 끝나는 오후 6시가 되면 나는 선생님 댁으로 갔다.
그리고 선생님 사모님께서 차려 주시는 저녁밥을 얻어먹고 밤12시까지 공부했다. 그때 선생님께서 주신 것은 단순히 한 끼의 저녁밥만이 아니었다.
배고픈 어린 제자에게 밥을 먹여 주시고, 늦은 밤까지 공부할 수 있도록 마음을 보태 주셨다.
나는 그 밥을 먹으며 공부했다.
졸음이 몰려와도 참고,
배가 고파도 참고,
지난날 학교에서 겪었던 서러움도 가슴 한쪽에 묻어 두고 책을 펼쳤다.
'나는 꼭 중학교에 가야 한다.'
그 마음 하나로 버텼다.
그리고 마침내 중학교 입학시험을 치렀다.
며칠 뒤 합격 통지를 받았다.
기뻤다.
내가 가난하다는 이유로 겪었던 수많은 설움과 눈물의 시간들이 한순간에 보상받는 것 같았다.
'이제 나도 중학생이 될 수 있구나.'
어린 내 가슴은 얼마나 벅찼을까.
하지만 그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1968년, 강한 태풍이 몰아쳤다.
거센 비바람은 우리 가족의 삶의 터전이었던 논을 덮쳤고, 논은 흙과 모래에 매몰되었다. 농사로 살아가던 우리 집에는 그것이 단순한 자연재해가 아니었다. 가족의 생계가 무너지는 일이었다.
중학교에 입학하려면 입학비와 기성회비를 내야 했다.
그러나 우리 집 형편으로는 그 돈을 마련할 수 없었다.
나는 합격 통지서를 받아 놓고도 학교에 갈 수 없었다.
공부를 못해서 떨어진 것도 아니었다.
시험을 못 봐서 떨어진 것도 아니었다.
합격했지만, 돈이 없어서 갈 수 없었다.
그 사실이 어린 나에게는 너무나 큰 절망이었다.
국민학교 시절, 기성회비를 내지 못해 선생님에게 매를 맞고 집으로 쫓겨났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도 돈이 없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나 중학교에 갈 나이가 되었을 때도 여전히 돈이 없었다.
나는 또다시 가난 앞에 멈춰 서야 했다.
중학교 합격이라는 꿈을 손에 쥐었지만, 그 꿈을 가슴에 품은 채 놓아버려야 했다. 그날의 마음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나는 왜 공부를 잘해도 학교에 갈 수 없을까.'
어린 내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울어도 소용없고,
원망해도 소용없고,
합격 통지서를 붙잡고 있어도 학교에 갈 돈은 생기지 않았다.
결국 나는 중학교를 포기해야 했다.
돌이켜보면 국민학교 6년은 내게 공부를 배우는 시간이면서 동시에 가난이 사람의 마음을 얼마나 아프게 할 수 있는지를 온몸으로 배우는 시간이기도 했다. 도시락이 없어 점심시간이 두려웠고,
시험지를 제대로 받지 못해 서러웠고,
기성회비가 없어 매를 맞았으며,
마침내는 그렇게 열심히 공부해서 얻은 중학교 합격마저 가난 때문에 포기해야 했다.
그러나 나는 그때의 설움속에서도 공부를 놓지 않았다.
어쩌면 그것이 어린 내가 할 수 있었던 가난에 대한,
가장 조용한 저항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가난했지만 포기하지 않았고,
눈물이 나도 책을 펼쳤으며,
배가 고파도 공부했다.
그리고 훗날의 내가 그 어린 나를 돌아본다.
그때 아버지 어머니 눈이있어 표현은 안했지만,
나 혼자 참 많이 울었다고.
말하지 못하고 삼킨 눈물도 많았다.
하지만 그 눈물 속에서도 어린 나는 끝까지 꿈을 놓지 않았다.
비록 가난 때문에 중학교 교문을 넘지는 못했지만,
그날까지 공부했던 열정과 꿈만큼은
그 누구도 내게서 빼앗아 갈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