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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난주 마리아유배
제주에 천주교가 본격적으로 전해진 것은 1899년 두 명의 선교사가 파견되면서 부터이다. 그러나 천주교가 제주에 처음 알려진 것은 1801년 신유박해 때 천주교인 정난주마리아(丁蘭珠 1773-1838)가 제주도 대정현에 유배된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정난주는 백서 사건으로 유명한 황사영의 부인이며 다산 정약용의 장형인 정약현(丁若鉉)의 딸로서 어머니 이씨 부인은 이벽의 손위 누이였다.
정난주는 18세이던 1790년 무렵 16세의 황사영과 혼인하였다, 진사시에 합격한 황사영은 인척 이승훈으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운 뒤 입교하였다. 정난주는 1800년 아들 경한을 낳았다. 이듬해 신유박해가 일어나면서 가족이 수난을 겪게 되는데 탄압을 피해 황사영은 서울을 떠나 충청도 배론에 숨어서 백를 작성한다. 정난주와 가족들은 관에 체포되어 갖은 문초를 받았다. 7개월 후 황사영은 배론에서 체포되어 능지 처참형에 처해졌고, 정난주는 제주목 대정현에 노비로 유배되면서 경한을 추자도에 두고 오게 된다. 대정현에서 관비 생활을 하면서 대정현 동헌 뒷집에 살던 김석구 집안에 거주하게 되었고, 김석구의 어린 아들 김상집을 양아들과 같이 돌보게 되었다. 김상집은 서울 할머니로 모시고 이후 자손들에게도 잘 돌보라고 부탁하였다. 뒷날 정난주가 죽었을 때 추자도의 황경한 후손에게 그녀의 죽음과 무덤위치를 알려주기도 하였다. 김상집의 후손들은 1970년대에 이르기까지 그녀의 묘소를 정성스레 관리하였다. 추자도에 정착한 황경한은 혼인하여 건섭과 태섭 두 아들을 두었으며, 그 뒤 손자 황우중이 태어났다. 1909년 제주본당이 라크루신부가 전교를 위해 추자도를 왕래하던 중 황경한의 손자를 만나 정난주와 경한에 관한 사실들을 확인한 적이 있으며 이때 라크루 신부는 정난주가 유배생활 중에 아들에게 보낸 서한을 보기도 하였다. 정난주와 황경한에 관한 자료는 제주 4.3 사건의 과정에서 거의 사라져 버려 그 자취를 확인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구전에 의하면 정난주는 대정성 내에서 주민들에게 인자한 여인으로 칭송을 받으며 살았고 김상집 집안사람들에게 애정으로 대하며 예의범절도 잘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 어린 피붙이를 추자섬에 홀로 남기고 평생을 애타게 아들을 그리면서도 품위를 잃지 않았던 정난주를 통해 시대와 인간 역사의 의미를 되새긴다. 마리아의 무덤은 김씨 집안사람들이 모슬봉 북쪽에 있는 속칭 한굴밭에 조성하였다. 그로부터 130여 년이 지난 1970년대 초, 교회사가 김구정과 김병준 신부는 수소문 끝에 그 무덤을 찾아낼 수 있었다. 김씨 집안에서 대를 이어가며 무덤을 돌보아 왔기 때문이다. 이 무덤은 1977년에 순교자 묘역으로 단장되었다가 1994년 제주 신자들의 염원을 담은 '대정 성지'로 조성되었다. 이제 제주의 신자들은 마리아를 '백색(白色) 순교자'로 공경해 오고 있다.
정난주마리아 관련 인물
아버지 : 정약현鄭若鉉
1751년 부친 정재원과 의령남씨 사이에서 장자로 출생하였다. 어머니 의령남씨가 사망하고 후실로 해남윤씨 소생의 동생 정약전(丁若銓), 정약종(丁若鍾), 정약용(丁若鏞)의 이복동생 3명이 있고 잠성김씨의 소생 정약황을 막내 동생을 두어 5형제이고 누이는 5명이 있었다.
정약현은 경주이씨와 혼인하였는데 그의 가족은 조선말 천주교 박해의 격랑 속에서 한국천주교 초기 핵심적인 인물들과 혈연관계에 있었다. 이복 여동생이 이승훈(李承薰)과 혼인하였고 그는 우리나라 최초 천주교 세례를 받아 천주교 박해의 핵심인물이 되었다. 또한 처남인 광암 이벽(曠菴 李檗)은 한국 최초로 천주교를 창설하고 신봉한 인물이었다. 정약현은 1773년 맏딸 정명련를 두었는데 명련은 황사영(黃嗣永)과 혼인하였고, 사위 황사영은 천주교도로 신유박해(辛酉迫害)가 일어나자 제천 배론으로 피신하여 백서사건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황사영은 참형을 받았고 딸 명련은 노비가 되었다. 집안의 형제들이 천주교와 연루되었으나 정약현은 천주교를 신봉하지 않았으며 고향 마재에서 집안을 지켰다.<네이버지지식백과>
숙부 : 정약종아우구스티노 1760(영조36) -1801(순조1). 2. 26)
정약용의 셋째 형으로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 1795년 이승훈과 함께 청나라 신부 주문모를 맞아들이고 최초의 조선천주교 회장을 지냈다. 신유박해때 서소문 밖에서 순교하였다.
위로 형 정약현과 정약전이 있고 동생 정약용이 있다. 젊은 시절 이익 문인으로 성리학(性理學)을 공부하였다. 형제 중 가장 늦게 천주교를 접했다. 가톨릭신자가 된후 1765년 이승훈과 함께 청나라 주문모(周文謨)신부를 맞아 들이고 1799년 서울로 옮겨와 문영인의 집에 살면서 최초의 조선천주교 회장을 지냈다.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 형제들이 문초 받게 되자 스스로 체포되어 서소문 밖에서 참수, 순교하였다. 저서로는 한자를 모르는 신자들을 위해 우리말로 쓴 교리서<주요교지主敎要旨>가 있다.
아내 유소사체칠리아, 아들 정철상가롤로, 하상바오로, 딸 정혜엘리사벳<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사촌 : 정하상바오로丁夏祥 1795(정조19)- 1839(헌종5)
아버지 정약종과 형 정철상은 신유박해 때 참형으로 순교하였다. 박해로 재산이 몰수되어 생계를 유지할 수 없게 된 정하상은 어머니유소사와 여동생 정혜와 같이 숙부인 다산 정약용의 고향 마재에서 살았다. 친척들은 천주교 신앙을 버리지 않는 정하상의 가족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샤를 달레의 천주교회사에 의하면 그리스도 신앙을 지키기 위해 상당한 곤욕을 치렀다. 정하상은 1801년 신유박해 때 주문모신부가 순교하여 천주교회를 지도할 사제가 없자 역관의 종으로 위장취업하여 북경에 가서 처누교 사제가 조선에 오기를 청하였다. 하지만 1805년 중국에서도 박해가 발생하여 천주교 북경교구에서도 사제를 선교사로 보낼 수 없었다. 하지만 이에 낙심하지 않고 정하상은 한양에서 여동생, 어머니와 함께 살면서 북경에 갔다.
1824년에는 교우이자 역관인 유진길(劉進吉)의 동행은 정하상의 뜻을 이루는데 도움이 되었다. 유진길의 쓴 서신을 본 교황 레오 12세는 조선을 독립된 전교지로 지정하여 교황청에 직속시키고 파리 외방전교회에게 전교를 맡긴 것이다. 정하상은 1825년 조선의 독립 교구 설치를 교황청에 청원하였고, 이에 응한 교황 그레고리오16세는 파리 외방전교회 산하에 천주교 조선교구를 설치하여 브뤼기에르 주교를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하였다. (1831년 천주교 조선교구 설치) 조선교구장으로 임명받은 브뤼기에를 주교는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와 함께 조선에 입국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1835년 만주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헌종2년(1836년) 1월 모방신부가 조선 천주교인들의 안내로 조선에 입국했다. 모방신부는 정하상을 ‘중신이 되는 인도자’로 존중하여 숙소도 그의 집으로 삼았다. 모방신부는 앙베르주교, 샤스탕 신부와 함께 선교사로 활동하엿다. 헌종4년(1838년)에 9천명으로 신자들의 수가 들어나자 선교사들은 조선인 천주교 신부를 키우고자 하여 헌종2년(1836년)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가 신부 후보로 선발되었다.
기해박해가 일어난 1839년 9월22일 참수되어 수교하였다. 어머니 유소사와 누이 정정혜도 그 해에 순교함으로써 정약종 가족은 모두 그리스도 신앙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택한 순교자 가족이 되었다. 체포되기 직전 <상재상서>를 저술하였는데, 1890년 홍콩 천주교의 약망(若望)주교가 간행하였는데, 이때 정하상의 전기인 정보록 일기도 같이 간행하였다. <네이버위키백과>
묘역은 천진암 성지 언덕을 넘으면 유진길성인과 함께 조성되어 있으며 옆 자락에 증조부 조부모 정약현부부가 묘소가 있다. 그 옆에 광암 이벽의 조부, 부모 묘소도 함께 있다.
남편 : 황사영[ 黃嗣永 ] 1775 (영조 51) ~ 1801 (순조 1)
조선의 천주교도. 자는 덕소(德召). 본관은 창원(昌原). 정약현(丁若鉉)의 사위. 1790년(정조 14) 진사(進士)가 되고 처가(妻家)의 인도로 천주교도가 되었으며, 1794년 우리나라에 들어온 중국인 신부(神父) 주문모(周文謨)에게 사사(師事), 알렉산드르라는 교명(敎名)을 받았다. 1801년(순조 1) 신유박해(辛酉迫害) 때는 제천(堤川) 배론(排論)의 산 중에 피신, 토굴 속에서 주문모 입국 후부터 신유박해에 이르기까지의 교세(敎勢) 및 박해(迫害)의 상황, 외세(外勢)를 빌려 천주교를 우리나라에 널리 펼칠 방책(方策) 등을 명주(絹)에 적어서 동지 황심(黃沁)ㆍ옥천희(玉千禧)로 하여금 가을에 떠나는 동지사(冬至使) 일행을 따라 베이징의 주교(主敎) 구베아(Gouvea)에게 전달시킬 계획을 세웠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황심 등과 함께 피체, 같은 해 11월 3인이 모두 사형되었다. 이 밀서(密書)를 《황사영 백서(黃嗣永帛書)》라 하며, 이 사건 이후 천주교에 대한 당국의 박해가 한층 엄중해졌다.
황사영백서 [黃嗣永帛書] ; 두 자 가량 되는 명주 천에 썼기 때문에 ‘백서(帛書)’라고 하는데, 깨알같이 작은 1만 3311자나 되는 방대한 내용의 한문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 내용은 대략 3부분으로 되어 있다. 먼저 당시의 천주교 교세와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신부의 활동, 신유박해 사실과 이때 죽은 순교자들의 약전을 기록하고, 다음에는 주문모 신부의 자수와 처형 사실, 끝으로 당시 조선 국내의 실정과 이후 포교하는 데 필요한 방안들을 제시하고 있다. 외세를 끌어들이려 했다는 점에서 <황사영 백서>는 민족 감정에서 나오는 공격의 대상이 되어 왔지만, 한편 교회의 평등주의라는 원칙과 당시 조선사회에 미친 혁명적인 영향을 간과해서는 안된다는 입장이 일부 사가(史家)들의 주장이기도 하다. 황사영은 이 백서가 관변 측에 압수됨으로써 1801년 대역죄인(大逆罪人)이 되어 능지처참을 당하였다. 원본은 당시 서울 주교로 있던 뮈텔(한자명 閔德孝)이 1925년 한국 순교복자 79위의 시복(諡福) 때 교황 피우스(11세)에게 바쳤는데, 현재 로마 교황청 민속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교황청에서는 이를 200부 영인(影印)하여 세계 주요 가톨릭국에 배포하였다고 한다.
외삼촌 : 이벽 李檗;•1754 ~ 1785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호는 광암(曠菴), 자는 덕조(德祚) 또는 벽(蘗)이다. 천주교 신자이며 세례명은 세례자 요한이다. 1754년 경기도 광주의 기호학파 남인(南人) 집안에서 부친 이부만(李簿萬:1727~1817)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문인이었으나 조부(祖父) 이달 때부터 무과에 급제하여 무반 집안으로 유명해졌다. 이에 이벽의 형 이격(李格)과 남동생 이석(李晳)은 무과에 합격하여 황해병마절도사와 좌포장의 직책을 맡았다. 이벽은 신체가 건장하고 키가 8척에 이르고 힘은 장사였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이벽은 학문에 뜻을 두었으며 광주 마재에 사는 정약현(丁若鉉)을 자형으로 맞이한 후에는 그의 동생 정약전(丁若銓), 정약용(丁若鏞) 형제와 어울려 학문을 익혔다. 하지만 그는 과거에는 뜻을 두지 않았고 뜻이 맞는 선비들과 어울려 학문을 연마하는 데 만 노력했다.
1774년 충청도 덕산으로 이병휴(李秉休)를 찾아가 스승으로 모셨으며 1776년에는 성호(星湖) 이익(李瀷) 등과 함께 이병휴의 제자 녹암(鹿菴) 권철신(權哲身)을 스승으로 받들고 '녹암계'의 일원이 되었다. 정약전, 정약용 형제와는 1777년~1785년까지 천진암에 모여 토론하면서 학문 연구를 계속하였고, 1779년에는 녹암계 회원들의 강학에 서학서를 제시하고 천주교 교리를 강학의 토론 주제로 정하면서 녹암계의 인물들에게 천주교를 새로운 신앙으로 수용하도록 하는데 역할하였다.. 이벽은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 신자로 알려져 있는데 그가 선교사가 없는 조선에서 독학으로 천주교를 받아들이고 자생적으로 조직을 키워나간 것은 매우 이례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이벽의 고조부인 이경상이 소현세자(昭顯世子)를 수행하여 북경을 다녀온 이후 그의 집안에는 서학과 천주교에 관련된 서적이 있었으며 그것들은 통해 이벽이 서학과 천주교를 자생적으로 익혀온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이벽은 이승훈을 중국 북경으로 보내 세례를 받게 하였으며 1784년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온 이승훈(李承薰)에게 권일신(權日身), 정약용과 함께 세례를 받았다. 이는 조선에서 거행된 최초의 세례식으로서 '한국 천주교회의 창설' 로 간주된다. 이후 권일신(權日身)과 함께 전도부의 간부로 활약하였다. 1785년(정조 9) 이벽의 주도로 모인 신자들의 집회도중에 형조의 금리들에 적발되어 모두 형조로 압송되는 추조적발사건(秋曹摘發事件)이 발발하였다. 일부는 귀양을 가고 이벽은 배교를 강요당하게 되었으며 이에 부친 이부만은 철저하게 동료들과의 접촉을 막기 위해 그를 집에 연금시켰으며, 32세의 나이에 사망하였다. 포천 화현리의 선산에 묻혔다가 현재는 경기도 퇴촌의 천진암에 안장되어 있다. 그의 저서로 알려진《숭례의설(崇禮義說)》은 현존하지 않으며 《만천유고》의 잡고편에 수록된《성교요지》, 《천주 공경가(天主恭敬歌)》는 그의 저작임이 불분명하다. 단지 그의 학문적 동료였던 정약용의 《여유당전서》와 《중용강의보(中庸講義補)》에 이벽의 학문을 높이 평가하는 내용이 일부뿐이다.
이벽의 죽음(1785)
신선 같은 학이 인간에 내려왔나
높고 우뚝한 풍채 절로 드러났네
날개깃 새하얗기 눈과 같아서
닭이며 따오기들 꺼리고 성냈겠지.
울음소리 높은 하늘에 일렁였고
맑고 고와 속세를 벗어났노라
가을 바람 타고 문득 날아가 버리니
괜스리 바둥거리는 사람들 슬프게 한다.
『다산시선』(상)p.62
정난주마리아의 영성
‘갑진년(1784) 4월 보름에 큰 형수의 제사를 지내고 우리 형제와 이벽과 함께 같은 배를 타고 물결을 따라 천천히 내려오면서 배 안에서 천지 조화의 시초, 사람과 신, 삶과 죽음의 이치 등을 듣고 황홀함과 놀람과 의아심을 이기지 못해 마치 『장자』에 나오는 하늘의 강이 멀고 멀어 끝이 없다라는 것과 비슷했다. 서울에 온 후 이벽을 따라 다니다. 『천주실의』 와 『칠극』 등 여러 권의 책을 보고 흔쾌하게 그쪽으로 기울어 버리기 시작했다.’ 「선중씨 정약전 묘지명」. 『다산 산문선』 p210
동양적 사상의 특징으로 인간주의라고 한다면 인성의 고양을 최고의 가치로 설정하는 사회인데 바로 사람과 관련되어 있다. 우리가 인성에 주목한다면 자신을 배타적으로 높여 가는 능력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논어>에 덕유고필유린 (德有孤必有隣) 이란 글귀가 있는데 덕은 외롭지 않다. 반드시 이웃이 있다. 덕성이 곧 인성이다. 인간이란 존재 자체를 관계성의 실체로 보는 것이다. 인성을 고양 시킨다는 것은 기르는 것이다. 자기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아닌 것을 키우는 것 그것을 통하여 자기를 키우는 것이 순서입니다. 예를 들면 나의 자식과 남의 자식을 나의 노인과 남의 노인을 함께 생각하기를 요구한다. <강의>중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하여 만물을 화해시키셨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을 묻는 율법교사의 질문에 네 온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대답하셨다. 신앙인으로 산다는 것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마르8,34) 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다. 십자가는 자신을 억누르는 고통의 상징이지만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통이 회피할 대상이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고통의 현실을 회피하지 않고 기꺼이 자신의 십자가로 받아들이며 이웃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정난주 마리아는 정통유학가문의 딸로서 조선에 천주교를 전래한 가문의 일원으로써 자신의 처한 현실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고 살아간 신앙인으로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신” (필리 2,7)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머물며 단순히 집착을 떨쳐버리는 마음을 수행에 머물지 않는 십자가의 삶을 살아갔다.
대정향교
역사적인 장소를 방문하는 이유
역사는 다시 쓰는 현대사라고 한다. 과거를 재조명하고 그것을 통하여 현재와 미래를 모색하는 것을 기본관점으로 삼는다. 결코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라 우리의 당면과제를 재조명 하는 것이 된다. <오래된 미래>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 교수가 인도 서북부 티베트 고원의 라다크에서 17년 동안 라다크 사람들의 삶을 기록한 것이다. ‘작은 거인’, ‘점보새우’처럼 모순된 표현 속에 대단히 중요한 뜻이 담겨 있다. 미래로 가는 길은 오히려 오래된 과거에서 찾아야 한다. 자연과의 조화, 공동체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삶의 방식에서 오염과 낭비가 없는 비 산업주의적 사회 발전의 길을 생각하게 된다. 과거는 그것이 잘된 것이든 그렇지 못한 것이든 우리의 삶속 깊숙이 들어 와 있다. 그리고 우리의 미래를 향해 함께 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과거의 재조명은 오늘날처럼 속도가 요구 되는 환경에서 너무 한가롭고 迂遠한 일일지도 모르지만 현대의 자본주의가 쌓아가고 있는 모순과 위기구조는 근본담론을 더욱 절실하게 요구한다. 바쁠수록 돌아가라는 금언이 있다. 길을 잘못 든 사람이 걸음을 재촉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강의>중
대정향교(大靜鄕校)는 조선시대인 1420년(세종2)에 지역 백성의 교유과 교화를 위해 설립된 향교이다. 1971년 8월26일 제주도 유형문화재 제4호로 지어죄어 있다. <조선왕조실록> 세종2년 11월15일자 기사에 제주경재소(京在所)에서 “대정∙정의(旌義) 두 고을에 비로소 향교를 두게 되어서, 두 고을 생도가 각각50여인이 되니, 청컨대 그고을 사람으로서 경서(經書)에도 발고 조행(操行)을 잘 닦은 자를 뽑아 교도케 하여 주소서”라며 향교의 훈도(訓導)를 뽑게해 줄 것을 청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처음에는 대정현의 북성(北城) 안에 설립되었으나. 동문 밖과 서성(西城) 안 등으로 여러 차례 옮겼다가1653년(효종4) 제주목사이원진(李元鎭)이 현재의 위치인 단산(簞山) 아래로 다시 옮겨 세웠다.
대선전에는 공자와 4성위(聖位), 송조(宋朝) 4현(四賢)과 우리나라 18형(十八賢)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명륜당의 현판은 순조 때에 대정현감을 지낸 변경붕의 주자의 글씨를 집자(集字)하여 만들었으며, 동재(東齋)에 걸려있는 의문당(疑問堂) 현판은 1846년(헌종12) 대정 훈장 강사공이 당시 제주에 유배되어 있던 김정희(金正喜)에게 부탁하여 받은 글씨로 원본은 제주 추사관에 보존되어 있다. 이처럼 대정향교는 김정희와도 관련이 깊은 곳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가 <세한도 歲寒圖>를 그릴 때 명륜당 위에 있는 소나무를 모델로 하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네이버두산백과>
김정희
추사 김정희(金正喜: 1786-1856) 선생은 추사체(秋史體)를 이룩한 대서예가이고 일격화풍(逸格畫風)을 정착시킨 대화가이다. 또한 고증학의 문호를 개설한 대학자이고 시도(詩道)에 정통한 대시인이며 고금의 각종 문체(文體)를 박섭(博涉 : 널리 섭렵함)하여 간명직절(簡明直截)하고 논리정연한 문장력을 종횡으로 구사한 대문장가이었다.
그리고 불교에 심취하여 선교종지(禪敎宗旨 :선종과 교종의 종지)를 요해(了解 :깨달아 알아냄)한 대선지식(大善知識)이었다. 뿐만 아니라 고증학의 태두 답게 경학(經學)과 사학, 금석학(金石學)은 물론 천문학(天文學), 지리학(地理學), 문자학(文字學), 음운학(音韻學)에 정심(精深)하였고 서화골동(書畫骨董)의 감식에 타의 추종을 불허하였다. (추사(秋史) 일파(一派)의 글씨와 그림 최완수) P.85
20세 전후해서는 대학자요 예술가로 도하에 명성을 떨치게 되고 청나라 학예계까지 그 소문이 전해졌다. 24세되는 순조9년(1809)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동지부사(冬至副使)가 되어 연행(燕行)하는 생부 김노경(金魯敬)의 자제군관(子弟軍官)으로 청도 연경(燕京)에 가게 되었다. 당시 연경 학예계의 태두인 소재(蘇齋) 옹방강(翁方綱 :1733-1818)과 고증학의 대가인 운대(芸臺) 완원(阮元 :1764-1849)을 비롯한 많은 학예계의 대가들을 역방하며 친교를 튼다. 약관 2세 밖에 안 는 추사가 이미 체득한 학예역량과 그 천재성에 감복한 연경 학예계의 대가들은 다투어 사제지의(師弟之義)를 맺기까지 한다.
이에 추사는 학예 일치를 주장하며 서도금석학(書道金石學)을 바탕으로 비학우위론(碑學優位論)을 내세워 첩학(帖學)을 종속시켜 가려는 옹방강 학파의 서학이론(書學理論)에 깊은 감명을 받고 그 이상을 구현해 내려한다. 그래서 이를 성공해 내니 바로 이것이 추사체이다.
서예사상(書藝史上) 후한시대의 팔분예서(八分隸書)가 가장 조형성이 뛰어난 것을 간파한 추사는 서예의 극칙(極則)을 팔분예서에 두고 역대 법첩(法帖)과 비판(碑版)을 두루 섭렵하여 여러 서체가 가지고 있는 필법의 특장(特長 : 특별한 장점)을 이에 가미한 것이다. 그러자 팔분예서가 가지던 시대적 제약이 홀연 타파되어 일체의 서예사적 성과가 동시에 함축되는 쾌거를 보이면서, 상형문자인 한자가 근본적으로 내포하고 있던 회화적 추상성이 극명하게 드러나게 되었다.
따라서 추사체의 특징은 극도로 절제된 추상적 회화미에 있다 하겠다. 이것이 곧 서화불분론(書畫不分論)의 예증이 되어 그림에서도 극단적인 감필(減筆)로 대상의 본질만을 압축 표현하려는 형식을 보인다. 이것이 추사의 일격화풍(逸格畫風)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여기에 티끌만큼의 속기(俗氣)나 군더더기가 용납된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세한도歲寒圖>나 <난맹첩蘭盟帖> 등에서 보인 고고청일(高孤淸逸)한 서 미처 이루어 내지 못한 서화의 이상적 경지에 도달한 추사체에 대한 선망이 열화같이 일어나 옹방강과 완원 문하의 사우들 간에 추사의 서화를 얻는 것이 유행병처럼 번져서 섭지선은 사우들간에 나눠 갖도록 한번에 수십폭을 보내 달라고 간청하는 편지를 보내기 까지 한다. P.86-87
화격이 이를 증명해 준다. 여기서 서화불분의 경계가 드러나니 그림이 곧 글씨이고 글씨가 곧 그림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추사는 그의 중인 제자들 모임에 「서화동심처書畫同心處」란 편액을 써주어 추사체를 이어가는 그들의 지침이 되데 하였다.
추사체가 이루어지는 것은 대체로 추사 30대 후반 경인데 그사이 금석학을 비롯한 잡박한 학문체계를 나름대로 수립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추사는 옹방강 일파의 서론에 입각하여 옹방강의 서체로부터 익혀 문징명(1470-1559), 동기창(1555-1636)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다시 조맹부(1254-1322), 미불(1051-1107), 소식(1036-1101)을 거쳐 해서의 준칙인 구양순(557-641)의 <화도사비化度寺碑>와 <구성궁예천명九成宮醴泉銘> 그리고 우세남(558-638)의 <공자묘당비孔子廟堂碑> 등을 익힘으로써 북비(北碑)와 남첩(南帖)FML 서체를 두루 터득하며 다시 더 거슬러 올라서 한예(漢隷)의 묘리까지 통달하는 서도 수련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리고 드디어 한예에 바탕을 두고 중체의 특장을 겸비하는 추사체를 이루어 내었다. 이는 중국의 옹방강 일파가 목표로 삼으면서 아직 이루어 내지 못한 서예사상 이상적인 경지이었다. 따라서 중국학계에서는 추사체에 대한 비상한 관심과 선망을 보이게 되고 다투어 추사의 글씨를 얻고자 하니 추사와 학연을 맺은 옹파의 제명류(諸名流)로 추사의 서액이나 영련(楹聯)을 간청하지 않은 경우가 없을 정도이었다.
이에 졸박청고(拙朴淸古)한 추사체의 특장은 중국서예계에 전대미문의 충격파를 던져 하소기(1799-1873), 막우지(1810-1871), 풍예기, 황응(黃應), 덕림(德林) 등등 추사보다 연소한 중국의 서예가들이 다투어 이를 추종하는 듯하다. P.95-96
첫댓글 회장님! 대단하십니다. 그런데 글이 너무 길어 읽을 사람이? 저는 읽으렵니다. 애써 올린 글이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