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이근선과 함께 살맛나는 세상만들기
 
 
 
카페 게시글
자료실 스크랩 명성황후가 설마 이런 모습?
근선사랑 추천 0 조회 284 15.10.12 00:3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명성황후가 설마 이런 모습?

 

115년 전 러 신문, 명성황후의 세밀화 발견

중국식 머리, 의상에 얼굴은 서구형 미인

 

 

 러시아 일간지 노보예브레먀 1895년 10월 21일자별지 8쪽에 실린 명성황후 세밀화.

이 스케치 사진은 가로 5cm, 세로 8cm 크기며, 사진 설명글(캡션)에 '시해된 조선의 공주'라고

적혀 있다. 하지만, 연구단이 공개한 이 그림은 중국식 머리 모양과 의상에 얼굴은 서구형

미인으로 당시 조선시대 여인상(像)과는 거리가 멀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특히 둥글고 짙은

 눈썹에 깊이 들어간 커다란 눈과 짙은 쌍꺼풀, 오똑한 코 등은 현재까지 알려진 명성황후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1895년 10월 8일 일제에 시해당한 명성황후로 추정되는 여성을 그린 세밀화가 발견됐다. 이 그림은 시해(을미사변) 직후 러시아 신문에 실린 것으로 명성황후 사진과 초상화를 둘러싼 진위 논쟁의 불씨를 살릴 것으로 보인다.

 

 

○ 115년 만에 공개된 그림

 

전남대 세계한상문화연구단은 15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발행된 일간지 노보예브레먀 1895년 10월 21일자 별지 8쪽에 실린 명성황후 세밀화를 동아일보에 공개했다. 이 세밀화는 가로 5cm, 세로 8cm 크기로 밑에는 ‘시해당한 조선의 황녀’라는 설명이 적혀 있다. 세밀화 속 명성황후는 중국식 복장과 머리장식을 하고 외모가 다소 서구적이다.

 

 

 

프랑스에서 최근 발견된 명성왕후 실제 초상화. 그녀의 얼굴이 영화배우 수애랑 생김새가 매우 비슷하다.

그림에서 뒷 배경에 보이는 남자 그림자는 명성왕후를 그림자같이 따라다니며 지켜 주었던 홍계훈 장군이다.

그는 원래 미천한 신분이었지만 임오군란 당시 민씨를 업고 피신시킨 공으로 일약 장군으로 벼락 출세했다고 한다.

이 내용은 영화 '불꽃처럼 나비처럼'에서도 묘사되어 있다.

 

 

 

조승우가 영화에서 호위무사 홍계훈 장군 역을 하여 임오군란 당시 명성왕후(수애 역)를 업고

피신시키는 장면이 나온다.

 

 

 

 

세계한상문화연구단은 이 세밀화가 명성황후를 만났던 러시아 공사 부인 등의 증언을 토대로 그린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허성태 세계한상문화연구단 연구교수는 “당시 황실 법도상 외부 화가가 들어갔을 가능성이 없는 만큼 목격자가 전한 인상착의를 기초로 그려진 것 같다”며 “당시 이 그림을 그린 러시아 화가가 한복을 보지 못해 명성황후가 중국식 복장을 한 것으로 묘사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이 사진은 교과서에까지 실릴 정도로 유명했으나 나중에 명성황후가 아니라 궁녀의 모습임이 밝혀졌다.

 

 

명성황후가 다소 서구적 외모로 그려진 것은 당시 러시아 정부의 시각이 반영된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이민원 원광대 역사교육과 초빙교수(전 국사편찬위원회 편집위원)는 “당시 일본은 명성황후 초상화를 뭔가 어색하게 그렸다”며 “러시아는 명성황후와 호의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어 오뚝한 코에 이지적인 눈매와 계란형 얼굴 등 자신들과 친숙한 서구인의 이미지를 그린 것 같다”고 설명했다.

 

 

 

 

이승만의 독립정신(1900년 발간)에 실린 명성왕후의 사진.

그러나 이 사진도 한 때 명성왕후의 실제 사진으로 인정이 되었으나, 이와는 달리 다른 자료에는

일반 궁녀의 사진으로 기술하고 있다.

 

 

 

 

○ 끊이지 않는 사진·초상화 논쟁

 

명성황후의 사진과 초상화에 대한 논쟁은 끊이지 않고 있다. 광복 이후 국사교과서에 실렸던 명성황후 사진의 주인공이 ‘궁녀’라는 논란이 일어 2000년대 초반 교과서에서 삭제됐다. 학계에서는 ‘명성황후 사진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이 정설이다.

 

명성황후가 시해된 이후 프랑스 주간지 륄뤼스트라시옹(1895년 11월 2일자)에 실린 삽화 등 명성황후 추정 초상화와 사진 10장 안팎이 공개됐지만 현재까지 완전한 부정도, 긍정도 못하는 실정이다. 당시 명성황후를 만난 외교관이나 선교사 부인들의 증언이 명성황후의 외모를 추측하게 하고 있다.

 

김영수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노보예브레먀에 실린 세밀화는 구한말 한국에 머물던 영국인 이사벨라 버드 비숍 여사 등의 증언을 토대로 그린 다른 초상화와 유사한 것 같다”고 설명했다.

 

명성황후의 외모에 관한 글은 구한말 외국인들의 저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비숍 여사는 저서 ‘코리아와 그 이웃나라들’에서 “1895년 1월 만난 명성황후는 40세가 넘은 나이였지만 상당한 미모를 자랑했다”며 “까만 머리색과 창백한 피부, 날카롭고 차가운 눈빛을 갖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연희전문학교(연세대 전신) 설립자인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박사의 부인 릴리어스 호턴 언더우드 역시 저서 ‘상투 튼 사람들 사이에서의 15년’에서 “약간 창백하면서도 꽤 가는 용모에 뛰어나면서도 뚫어보는 듯한 눈을 가졌다”고 명성황후를 묘사했다.

 

명성황후를 직접 본 것으로 알려진 이폴리트 프랑댕 당시 주한 프랑스 대리공사는 저서 ‘한국에서’를 통해 “고종을 접견하러 갔다가 우연히 본 명성황후는 60cm 길이의 거대한 비녀를 머리에 꽂고 있었다”며 “매우 화려한 차림새였다”고 묘사했다.

 

 

 

 

명성왕후(민비)

 

 

1851(철종 2)~1895(고종 32).

조선 제26대 고종의 비.

 

 

 

소개

 

명성태황후 민씨(明成太皇后 閔氏, 1851년 음력 9월 25일~1895년 음력 8월 20일(양력 10월 8일))는 조선의 26대 왕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인 고종(高宗)의 황후이다. 시호는 효자원성정화합천홍공성덕명성태황후(孝慈元聖正化合天洪功誠德明成太皇后).

 

아버지는 사도시 첨정으로 사후 영의정, 여성부원군에 추봉된 민치록이고, 어머니는 감고당 한산 이씨이다. 아명은 자영(玆暎), 본관은 여흥이다. 경기도 여주군 출신.(여주 나들목 인근에 생가 공원이 있다.)

 

1851년 음력 9월 25일 경기도 여주 근동면(近東面) 섬락리(蟾樂里)(현재의 여주군 여주읍 능현리)에서 민치록(閔致祿)의 재취부인 한산 이씨의 딸로 태어났다. 1남 3녀의 형제가 있었으나 모두 죽고 그녀만이 남았다. 생가는 민유중의 묘소를 지키기 위해 지은 집으로 아버지 민치록은 문음으로 출사하기에 앞서 민유중의 묘를 지키는 일을 하였다.

 

왕후는 어려서 아버지 민치록으로부터 학문을 배웠는데, 《소학》·《효경》·《여훈》(女訓) 등을 즐겨 읽었고, 특히 역사를 좋아하여 치란과 국가의 전고에 밝았다. 오늘날 그녀의 공부방 자리에는 민비 탄강 구리비(생가 입구 오른쪽)가 세워져 있다. 9세 때인 1858년 아버지 민치록이 죽자 습렴하는 모습을 어른처럼 지켜보아 주위 사람을 놀라게 하였다. 역사소설 《운현궁의 봄》에서는 민치록이 병으로 자리에 누웠을때에 간호를 한 효녀로 묘사되고 있다.

 

아버지가 죽은 뒤 섬락리 사저에서 한양 감고당으로 옮겨 홀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감고당은 인현왕후의 사가로서 민치록의 소유였으며, 영조가 그렇게 이름을 붙였다고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명성왕후 초상화

 

 

 

개요

 

쇄국정책을 펴던 흥선대원군을 하야시키고 개국을 단행했다. 1882년 임오군란 후 청의 세력에 의존했으나, 1894년 청일전쟁에서 청이 패한 후에는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견제하려 했다. 국내정치에서는 민씨척족을 기용하여 세도정권을 행했으며, 일련의 점진적인 개화시책을 통해 급진개화파의 개화정책에 제동을 걸었다.

 

 

성장과정과 집권배경

 

본관은 여흥. 여성부원군(驪城府院君) 치록(致祿)의 외동딸이다. 8세 때 부모를 여의었기 때문에 친척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성장했다. 1866년(고종 3) 3월, 16세 때 부대부인 민씨(府大夫人閔氏)의 추천으로 왕비가 되었다. 고종의 사랑을 그다지 받지 못했고, 1871년 자신이 낳은 첫번째 왕자를 5일 만에 잃는 등 어려운 상황이 계속되었다.

 

 대원군과의 불화는, 대원군이 고종의 총애를 받던 궁인 이씨 소생의 완화군(完和君)을 세자로 책봉하려 한 데서 시작되었는데, 명성황후의 배후에는 민승호 등 여흥민씨 삼방파(三房派) 세력을 비롯해 조대비(趙大妃)를 중심으로 한 풍양조씨(豊壤趙氏) 세력, 대원군에게 무시된 대원군 문중 내부의 세력, 그리고 대원군 정책에 반대하는 유림세력 등 노론을 중심으로 하는 반(反)대원군 세력이 있었다.

 

이들은 대원군이 당쟁을 근절한다는 명분 아래 등용한 남인 중심의 세력과 정치적 갈등을 빚고 있었다. 1873년(고종 10) 반대원군 세력을 규합한 명성황후는 앞서 대원군을 탄핵한 바 있는 최익현을 동부승지로 삼고, 그해 10월 26일 그로 하여금 대원군의 실정(失政)을 들어 탄핵하고 고종의 친정(親政)을 요구하는 소(疏)를 올리게 했다. 이때 조정의 의견이 서로 달랐지만 그녀는 최익현을 감싸고, 그를 호조참판으로 승진시켰다. 최익현은 11월에 다시 상소를 올리고, 대원군은 양주 곧은골[直谷]로 물러나게 되었다.

 

 

집권과 대외정책

 

명성황후는 대원군 실각 후 민씨척족을 앞세워 정권을 장악, 1876년 강화도조약(조일수호조약)을 맺고 일련의 개화정책을 시행했다. 먼저 개화사상가인 박규수(朴珪壽)를 우의정에 등용하고, 대원군 집권 당시 쇄국정책을 담당했던 동래부사 정현덕(鄭顯德)과 부산훈도 안동준(安東晙), 경상도관찰사 김세호(金世鎬)를 차례로 파면·유배했다.

 

개화를 위해서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고, 삼군부(三軍府)를 폐지했으며, 신사유람단과 영선사를 일본과 청에 파견하여 신식무기·공업 등을 학습하도록 하는 정책을 시행했다. 〈조선책략〉의 연미론(聯美論)이 유포되자 1881년 김윤식이 영선사로 청에 갈 때 밀명을 내려 청에 한미수교를 주선해 줄 것을 요청했고, 또한 개화승 이동인(李東仁)을 일본에 보내어 주일청국공사 하여장(何如璋)에게 대미수교의 주선을 요청하기도 했다.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장호원에 있는 민응식(閔應植)의 집에 피신하여 고종과 비밀리에 연락하는 한편, 청에 군대를 요청하여 임오군란 후 집권했던 대원군을 청으로 납치하게 한 뒤 정국을 다시 장악했다. 그녀를 비롯한 민씨척족은 이때부터 친청사대(親淸事大)로 기울었고, 개화파의 급진적인 움직임에 제약을 가하기 시작했다. 1884년(고종 21) 김옥균·박영효 등 급진개화파가 갑신정변을 통해 정권을 장악하자, 다시 청의 도움으로 이들을 제거했다.

 

 

 

      을미사변 당시 명성왕후를 시해한 일본 낭인들(한성신보 사옥 앞에서)

 

 

 1885년 러시아의 남하를 우려한 영국이 거문도사건(巨文島事件)을 일으키자, 묄렌도르프를 통해 영국과 교섭하는 한편 러시아와도 접촉했다. 이에 청과 일본은 러시아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대원군의 환국을 주선하여 민씨척족 세력과 정권다툼을 벌이도록 유도했는데, 1894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그 여세를 몰아 조선 정계에 압력을 가해오자 그녀는 친러시아적인 태도를 보임으로써 일본에 대항했다.

 

더욱이 3국간섭으로 일본의 대륙침략 기세가 꺾이자, 러시아의 힘을 과신하여 친러경향을 더욱 굳혔다. 1895년(고종 32) 10월 8일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는 일본의 조선병합에 가장 큰 장애가 되고 있던 명성황후와 그 척족세력을 제거할 목적으로 김홍집 내각의 일부 세력과 대원군 세력, 그리고 해산하기로 예정된 훈련대와 일본 정치낭인으로 하여금 황궁을 습격하고 명성황후를 학살하게 한 을미사변을 일으켰다.

 

 

 

 을미사변 당시 일본 낭인 토오 가쯔아끼(藤勝顯)가 명성황후를 시해할 사건 당시 사용하였던 칼.

 

 

명성황후는 일본 낭인들에 의해 옥호루(玉壺樓)에서 살해된 뒤 황궁 밖의 송림에서 시체가 불살라지는 불행한 최후를 맞았다. 그녀는 곧이어 세워진 친일정권에 의해 폐비되었으나 곧 복위되었고, 국체가 대한제국으로 바뀐 뒤 명성황후로 추책(追冊)되었다.

 

세간에 알려진 '민비'라는 이름은 고종이 황제에 등극하기 전 호칭으로 성씨인 민씨와 조선시대 왕의 부인인 왕비를 축약해 부르는 용어이며, 시해된 후 고종이 황제가 되자 여기에 맞춰 황후로 격상되었다. 경기도 양주 숙릉(肅陵)에 묻혔고, 1897년 청량리 홍릉(洪陵)으로 이장되었다. 1919년 고종이 죽은 뒤 다시 양주군 미금면 금곡리 홍릉으로 이장되었다.

 

을미사변 당시 일본 낭인인 토오 가쯔아끼(藤勝顯)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 당시 왕비의 침전에 난입한 세사람 중에 하나로, 세사람은 국왕의 제지를 무시하고 왕비

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나카무라 다테오가 곤녕합(坤寧閤)에 숨어 있던 명성황후를 발견하여 넘어 뜨리고 처음 칼을 대었고, 곧 이어 달려온 토오 가쯔아끼가 두 번째로 칼을 대어 절명시켰다.

 

 명성왕후를 절명시킨 장본인인 토오 가쯔아끼는 뒷날 그날의 범행을 참회하고 명성왕후를 시해할 당시 직접 사용한 칼을 일본 쿠시다 신사에 맡겼다고 한다. 

 

 

 

 

 

 

 

 

고종 후손 이홍, 명성황후 멜로 그린 ‘불꽃처럼~’ 출연 화제

 

고종 증손녀 이홍 ‘불꽃처럼 나비처럼’ 상궁으로 출연

 

 

 

 

 

 

 

고종의 증손녀인 배우 이홍이 자신의 증조할머니 명성왕후의 삶을 그린 영화에 출연한다.

 

올 9월 24일 개봉을 앞두고 있는 수애 조승우 주연의 영화 ‘불꽃처럼 나비처럼’(감독/제작)에서 이홍은 대사가 거의 없고 비중이 적은 상궁 역으로 출연한다.

 

영화 관계자는 “오디션에 본인이 직접 참가해 출연기회를 얻은 것으로 안다. 단순히 왕족이라는 점에서 캐스팅된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연기자의 길을 준비한 배우이기에 출연하게 된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이홍은 고종의 증손녀로 ‘비둘기 집’을 부른 가수 이석의 1남2녀 중 장녀다. 이석은 고종의 서자 의화군(의친왕) 이강의 11번째 서자다. 이홍은 가수 조관우와 쿨의 뮤직비디오 등에 출연해왔다. 또 연극 무대에서 잠시 활동을 한 적도 있다.

 

 

 

이홍은 고종의 증손녀로 ‘비둘기 집’을 부른 가수 이석의 1남2녀 중 장녀다.

 

 

한편 ‘불꽃처럼 나비처럼’은 한 여자를 위해 모든 것을 건 호위무사 무명(조승우 분)과 조선의 마지막 국모 명성황후 민자영(수애 분)의 100년 전 가슴 아픈 사랑이 부활시켜 추석 연휴를 1주일 앞두고 관객들의 감성을 자극할 예정이다.

 

‘불꽃처럼 나비처럼’은 아름다운 영상미와 감성적은 음악을 통해 명성황후라는 타이틀 뒤에 숨겨진 민자영이라는 여인의 새로운 매력과 불꽃처럼 뜨겁고 나비처럼 순수했던 무명의 사랑을 감성적으로 그려낸다.

 

특히 조승우는 군입대 전 마지막 작품으로 선택한 ‘불꽃처럼 나비처럼’에서 화려한 액션신을 거침없이 소화해냈으며 수애 역시 그동안 역사 속에서 비쳐졌던 명성황후의 이면에 숨겨진 여인 민자영으로서 매력을 한껏 발산한다.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