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호주의 펑크스 인 더 짐(Punks in the Gym. 10급 8b)을 등반 중인 볼프강 귈리히.
-
독일의 전설적인 클라이머, 볼프강 귈리히(Wolfgang Gu˙˙llich)는 1991년 세계 등반 사상 프리 클라이밍의 난이도 5.14d급을 최초로 돌파해 세계 산악계에 센세이션을 일으킨 주인공이다.
서양의 클라이머들 중에는 출신 가정이 빈곤해 산악 가이드가 되려고 암벽등반기술을 익히는 경우가 허다하지만, 그는 예외적으로 독일 중산층 가정의 화공학 박사인 부친과 지방의회 의원인 모친 사이에서 1960년 10월 24일 출생했다. 14세부터 암벽 등반을 시작한 그는 클라이밍을 ‘절벽의 모험,’ 또는 ‘자아 발견의 여행’이라고 규정했다.
그는 “내가 위태로운 절벽등반을 계속하는 이유는 재미있기 때문이다. 절벽 등반에서는 인간의 육체와 정신이 완전한 조화를 이루며, 클라이머의 두뇌(정신력)가 가장 중요한 근육의 역할을 담당할 때도 있다”고 말했다.
인간의 지식과 기술은 공유를 통해서 발전하게 마련이다. 그는 자신보다 등반 기량이 더 뛰어난 클라이머들을 자일 파트너로 삼았고, 후에 파트너를 더 유능한 클라이머로 갈아치우기를 거듭하며, 고도의 암벽 등반 기술을 함양했다. 그는 17세 때부터 프리 클라이밍(Free Climbing : 자유 등반)을 시작해 9급(IX) 루트를 돌파하고, 18세에 독일에서 최고 수준의 암벽 클라이머로 부상했다. 그는 강력한 완력을 유지하기 위해, 매일 아침 200회의 팔굽혀펴기 운동을 하고, 낮에는 등반을 한 다음 저녁에 팔굽혀펴기를 다시 200회 실행했다.
요세미티의 세퍼릿 리얼리티 프리 솔로 등반
그는 평생 영국, 이탈리아, 프랑스,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등 전 세계에 산재한 고난도 암벽 루트 200여 개를 등반했는데, 그중에 55개는 초등루트이고, 60여 개는 레드 포인트(루트의 사전 정찰 없이 프리 클라이밍으로 등반함)로 올랐다. 또한 5개를 프리 솔로(Free Solo, 자일의 확보 없이 프리 클라이밍함)로, 3개를 온사이트(On Sight, 사전에 루트를 정찰하지 않고 추락 없이 단번에 등반함)로 등정했다.
그는 20대 중반에 여러 개의 10급 루트를 등정한 후, 몇 차례에 걸쳐 세계 산악계를 경악시켰다. 먼저 그는 1986년 친구 차크가 지켜보는 가운데 미국 요세미티의 ‘세퍼릿 리얼리티(Separate Reality 5.11d)’를 프리 솔로로 등반했다. 요세미티의 캐스케이드폭포(Cascade Falls) 부근에 위치해 있는 세퍼릿 리얼리티 루트는 지상에서 200m 높이의 최고 난이도 8급(VIII+)의 직벽 등을 오른 후, 수평으로 7m의 길이로 공중으로 튀어나온 화강암 바위 루프(Roof : 지붕) 밑을 기어서 오버행 위로 오르는 난코스 루트이다. 미국의 클라이머 론 커크(Ron Kauk)가 1977년 이 루트를 프리 클라이밍으로 초등했을 당시, 유럽에서는 등반기술이 뒤처진 상태라 이와 같은 루트는 에트리에(Etriers : 줄사다리)를 이용해 인공보조 등반기술로 등반했다.
볼프강은 자일의 도움 없이 절벽과 길이 7m의 바위 지붕 밑을 기어서 루프 위로 오르는 일, 즉 프리 솔로 등반이 프리 클라이밍의 정수라 생각했다. 그는 이 등반의 사전준비로 여러 차례 로프의 확보를 받으며, 이 루트를 에트리에로 인공등반, 또는 프렌드(크랙에 너트 대신 삽입하는 등반 장비)를 이용하며 프리로 등정하며 암벽의 특징을 모두 살펴 암기한 후, 최종적으로 자일 없이 이 모험을 감행하려 했다.
볼프강은 초조한 모습으로 양손에 초크 가루를 묻히고, 자일 없이 수직 벽을 올랐다. 그는 정신을 집중하고 수평 루프 밑의 크랙에 손을 넣고, 근육을 뒤틀며 정확하고 참을성 있게 전진을 계속했다. 인간 누구에게나 과거는 현재의 추억으로, 또한 미래는 현재의 꿈으로 존재하고 있지만, 그는 정신집중이 기적을 낳는다는 신념에 의지했다.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적 구분이 그에게서 깡그리 사라졌고 그의 영혼과 우주 사이에는 경계선이 허물어져, 동양 사상가 장자의 주장처럼 물아일체(物我一體)의 정신적 경지에 도달했다.
그는 한 번 실수로 추락하면, 곧 죽음으로 연결된다는 사실을 결코 망각할 수 없었다. 그는 크랙(Crack, 암벽이 갈라진 틈)에 힘차게 손을 집어넣고 발로 홀드(Hold, 발판)를 찾아 벽을 더듬고 나서, 손을 뒤틀어 자신의 몸을 확보할 때 자신의 근육의 모든 움직임을 감지했다. 그의 육체가 정신으로 변화했고, 반대로 그의 정신이 또한 육신으로 변했다. 그는 ‘정신력이 일의 승패를 좌우하는 경우에, 인간의 두뇌(정신력)는 신체적 완력 이상의 힘을 발휘한다’고 믿었고, 그 사실을 이 등반에서 경험했다.
- ▲ 미국의 요세미티 세퍼릿 리얼리티(5.11d) 프리 솔로 등반.
-
그는 지붕의 끝에 도달해 발을 공중으로 들어 올려 바위 위에 어렵사리 걸치고, 몸을 지붕 위로 끌어올렸다. 그는 이제 다시 수평의 세계에 도달했다. 그는 “내가 등반 중에 확보물을 포기하고, 무엇을 성취할 수 있었는가?”하고 자문했다. 그는 모든 의존(依存)에서 진정으로 해방되고, 자신의 순수한 체력을 평가받을 수 있었다. 당시 사람들은 그의 이 묘기를 자살행위로 맹비난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한계 능력에 도전하며, 이 죽음의 문턱에서 프리 솔로를 감행한 이유는 자살충동 때문이 아니라 ‘죽음에 관한 사색을 통해서 삶의 진가(眞價)를 제대로 인식할 수 있다’는 신념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죽음과 의식적으로 맞대면하면, 이 지상에서의 매일 매일이 마치 마지막 날이라도 되는 듯이 새로운 삶을 살며 모든 구속에서 해방되는 자유를 만끽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볼프강은 다음해인 1987년 독일 프랑켄유라(Frankenjura)의 크로텐저 투름(Krottenser Turm) 암벽에 난이도 11급(XI-, 프랑스 암벽 난이도 8c)의 ‘월스트리트(Wall Street)’를 레드 포인트로 개척해 세계의 산악계를 다시 경악시켰다.
1991년 그의 친구 밀란 쥐코라(Milan Sykora)가 독일 프랑켄유라의 발트코프 바위에서 암벽 등반 중에 크랙 루트 하나를 발견했다. 수직 벽에 위치한 크랙 하반부는 등반이 가능해 보였으나, 그 위쪽에 있는 경사도 135도 높이 12m의 오버행은 선박의 뱃머리처럼 공중으로 돌출해 있어서, 프리 클라이밍으로 돌파하는 게 불가능해 보였다.
볼프강은 그 이야기를 전해 듣고 이 루트를 자세히 정찰했는데, 이 루트의 완등은 하나의 판타지(Fantasy)라고 판단되었다. 그는 희망과 체념, 좌절과 낙관 사이를 끝없이 오갔다. 인간이 정신력으로 등반의 성패를 저울질할 때, 인간의 두뇌(정신력)는 근육 이상의 힘을 발휘한다. 그는 불타는 등반 열정과 강인한 집념을 지니고, 2개월 반 동안에 11일간 울퉁불퉁한 바위의 경사도 135도의 오버행에 매달려 암벽의 특성을 살피며 해결책을 모색했다.
그는 9월 14일 몇몇 클라이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오버행 등반을 시작했다, 그는 암벽 상의 납작하고 깊이가 얕은 핑거 포켓들(Finger-pockets : 오목하게 파인 바위 상의 함몰부)에 손가락을 걸고 전진하다가, 손가락 끝으로 바위 주름을 꼬집듯이 부여잡고, 양발을 벌려 발끝으로 측면의 홀드들을 밀면서 몸을 확보하고, 다시 조금씩 전진을 계속했다. 그는 70초 동안 신기(神技)에 가까운 곡예 동작으로 오버행과 사투를 벌였다. 그는 드디어 이 난이도 11급의 루트를 프리 클라이밍으로 돌파하고 ‘악티온 디렉테(Action Directe(XI-, 9a, 5.14d)’라고 명명했다.
동생과 함께 부모의 적극적인 뒷받침 받으며 클라이밍
볼프강이 클라이밍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3세가 되던 해에 그들의 부모와 동생 프리츠(당시 8세)와 함께 산악지역을 하이킹하던 중 팔츠(Phalz)의 암장에서 클라이머들이 등반하는 광경을 목격했을 때였다. 두 소년들이 암벽등반에 비상한 관심을 보이자, 그들의 모친은 남편에게 아이들에게 암벽등반을 가르치라고 자일(Seil : 로프)을 생일선물로 사 주었다. 그의 부친은 아들에게 등반과 영어 공부에 관심을 가지도록, 영국의 등산잡지 <마운틴(Mountain)>지를 선물했다. 마운틴지에는 암벽등반의 멋진 사진들과 등정기가 수록되어 있었는데, 볼프강은 영독 사전을 뒤적이며 그 잡지를 전부 탐독해 영어 실력마저 일취월장했다.
그러나 한 위대한 클라이머가 등장하기까지의 기나긴 여정은 험난했다. 볼프강은 14세가 되던 1974년 봄 노련한 팔츠의 클라이머 빈프리트의 등반지도를 받으며 부친과 함께 샤펠스와 브루흐바일러 암장에서 암벽등반을 시작했다. 볼프강은 물고기가 물속에서 자연스럽게 헤엄치듯이 초보자답지 않게 5급(Vs) 루트를 훌륭하게 등반했다. 볼프강은 동생 프리츠와 빈프리트를 역할 모델(Role Model)로 삼고, 나폴레옹펜젠암장에서 암벽등반에 매진했다.
볼프강은 친구 크리스토프와 1975년 아셀슈타인 서벽에서 5급(V)을 교대로 선등하며 등정했다. 그는 1976년 5월 15일 크리스토프와 쉬테른펠스의 북벽에서 당시 노련한 클라이들만 돌파할 수 있는 6급(VI/A1) 루트를 돌파했다. 볼프강과 크리스토프는 그해 7월 25일 난이도 6급의 ‘그로세 위트반트(VI-/A1)’를 등정했다. 볼프강은 이탈리아 클라이머 라인홀트 메스너의 저서 <제7급>과 <아이거 북벽 노스 버트레스 개척기>를 탐독하며 정신무장을 강화했다. 메스너는 세계 등반 사상 최초로 암벽등반의 난이도 제7급을 돌파한 훌륭한 클라이머였다.
1976년 볼프강과 크리스토프는 호이펠 암장의 디레티시마(직등루트)를 피톤, 슬링, 에트리에를 이용하며 등정했는데, 이것이 볼프강이 행한 마지막 인공보조등반이었다.
1976년 독일 팔츠에서는 미국 암벽의 영향을 받아 자유등반을 선호하는 그룹이 탄생했다. 인공보조 등반은 1930년대 독일에서 최초로 발달했지만, 자유등반은 미국에서 발달했다. 독일의 자유등반 클럽 회원들로는 당시 유명한 클라이머 리카르트 뮈헤, 라인하르트 칼, 토마스 뇌틀러 등이 있었는데, 그들은 7급 루트를 프리 클라이밍으로 돌파하는 노련한 클라이머들이었다.
- ▲ 독일 프랑켄유라의 킬러(10급).
-
리카르트 뮈헤와 라인하르트 칼은 나중에 미국의 요세미티로 건너가 당시의 선진 암벽 등반 기술, 즉 프리클라이밍을 연마하고 귀국해 이 기술을 널리 보급했다. 독일인으로 최초로 에베레스트 등정자가 된 라인하르트 칼은 1982년 초오유에서 눈사태로 사망했다. 뇌틀러는 팔츠의 최초의 7급 루트인 ‘다스 리네알(Das Lineal)’을 프리로 단독 초등하며 각광을 받았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팔츠의 사암에서 때때로 단독 등반으로 프리 클라이밍 기술을 익힌 볼프강은 1977년 친구 크리스토프와 프리 클라이밍 그룹에 가입했고, 두 사람은 암탑의 7급 루트인 ‘바벤칸테’를 자유 등반했다. 그들은 드디어 난코스 7급의 루트를 등정한 것이다. 그해 5월 볼프강은 친구 크리스토프, 그리고 슝크와 함께 뇌틀러의 초등 루트, ‘다스 리네알’을 자유 등반하는 데 성공해 많은 찬사를 받았다.
볼프강은 자신보다 7년 연상인 토마스 뇌틀러와 교우관계를 맺고, 그와 2년간 자일 파트너가 되어 등반 기술을 향상시켰다. 뇌틀러는 절벽등반에서 자일을 사용하지 않고 맨발로 감행하는 등반을 즐겼고, 팔츠의 고난도 루트를 모두 자유 등반해, 당시 리카르트 뮈헤와 함께 팔츠에서 가장 훌륭한 클라이머로 평가 받고 있었다. 볼프강은 뇌틀러의 발자취를 따라 고난도 루트를 등정하며 많은 용기를 함양했다.
당시 볼프강의 동생 프리츠는 12세의 나이로 난이도 6급의 암벽 루트를 등반할 수 있는 실력을 쌓았다. 두 형제는 노넨펠스암장에서 등반 중에 유명 클라이머 라인하르트 칼과 조우했다. 칼은 볼프강의 등반 솜씨를 살펴보고 그 자리에서 그에게 난코스 ‘유빌레움스리스’를 자유등반해 보라고 권유했고, 볼프강은 그 권유를 기꺼이 받아들여 이 루트를 자유등반으로 초등했다.
그해 8월 초에 볼프강은 친구 크리스토프, 슝크 두 사람과 이전에 동독의 영토, 엘프잔트슈타인산군으로 등반여행을 떠났다. 그곳에는 클라이머들의 마음을 매혹시키는 거대한 사암 암탑들과 거벽들이 즐비했다. 그들은 8급(VIIIc) 루트를 등반 중에 선등하던 볼프강이 탈진해 장거리 추락을 경험하며 위기를 겪었다.
볼프강은 토마스 뇌틀러, 크리스토프와 팔츠의 7급 루트 ‘젤렉타’를 초등했다. 볼프강의 등반기술이 향상됨에 따라 그의 죽마고우 크리스토프와 거리감이 생겼고, 친구는 등반을 포기하고 다른 취미활동에 매진했다. 볼프강은 등반기술을 연마하기 위해 노련한 토마스 뇌틀러를 따라다니며 호니크펠스암장의 여러 개의 7급 루트를 등반했는데, 그중에는 유명한 루트 ‘베렌프루너 베크’ 2등, ‘렝겐자헤’ 등정, ‘플루크 데스 알바트로스’ 3등의 위업이 포함되어 있었다. 볼프강은 유명 클라이머, 리카르트 뮈헤의 발자취를 따라 그의 초등루트들을 재등했다.
볼프강은 그의 17번째 생일날인 10월 24일, 뇌틀러와 아셀슈타인 암장의 높이 35m의 필라(Pillar)를 초등했는데, 이 암탑은 ‘자살하기 적합한 장소’라는 별칭의 난코스였다.
9급의 ‘슈퍼크랙’을 아홉 번째 시도 끝에 2등
볼프강은 17세가 되던 1977년 팔츠의 가장 뛰어난 클라이머 중의 한 사람으로 평가받았지만, 아직도 선배 뇌틀러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난코스의 선등은 언제나 뇌틀러 몫이었기 때문이다. 볼프강은 뇌틀러에게서 고도의 등반기술을 전수하며, 뇌틀러와 뮈헤의 초등 난코스 초등루트를 재등하기를 계속했다.
1978년 볼프강은 앙드레아스 쿠빈과 동독의 영토, 엘프잔트슈타인산군을 다시 방문해 난이도 9급(IXs) 루트들을 포함한 여러 루트를 등반했다. 볼프강이 그곳에서 등반활동을 펼치는 사이, 그의 동생 프리츠가 팔츠의 나폴레옹펠스에서 단독등반 중에 추락사했다. 당연히 그의 부모는 산에서 두 아들을 잃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볼프강에게 등반을 포기하도록 권유했다.
그러나 볼프강은 ‘암벽등반은 자신의 영혼을 해방시켜 주는 가치 있는 스포츠’로 간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포기한다는 것은 자신의 생명을 버리는 일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해 부모의 소원을 외면했다. 그의 부모는 아들이 세계적인 클라이머가 된 사실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지만, 작은아들에 이어 큰아들에게 비극이 되풀이될까봐 끊임없는 공포 속에서 노심초사했다.
- 독일의 유명 클라이머 볼프강 귈리히의 프리 솔로 등반
- ▲ 악티온 디렉테(5.14d, 11급, 프랑스 난이도 8C).
-
1977년 프랑켄유라 지방의 유명한 클라이머 쿠르트 알버트(독일에서 미국의 암벽 등반 방식, 레드포인트를 최초로 시도했음)가 ‘오스테르베크’와 ‘엑소리치스트’ 루트에서 난이도 8급(VIII)을 이미 돌파했고, 3개월 전 팔츠의 유명 클라이머 리카르트 뮈헤도 트리펠스 암장의 8급 루트, ‘체엔탄츠(VIII)’를 등정했다.
1978년 6월 30일 볼프강과 뇌틀러도 쥐트팔츠의 난코스 ‘주페를라티베(VIII)’를 등정해 8급 돌파한 클라이머 그룹에 합류했다. 이제 볼프강은 독일의 일류 암벽 등반가들, 즉 뇌틀러, 뮈헤, 쿠르트 알버트, 라인하르트 칼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클라이머가 되었다. 볼프강은 9급 루트, ‘포이어반트(IXb)’도 등정했다.
그는 뇌틀러와 엘프잔트슈타인산군에서 여러 루트를 등반하던 중에, 독일 프랑켄유라의 일류 클라이머 쿠르트 알버트를 만나 그와 교우를 맺었다. 또한 그는 20년 이상의 연상자인 한스 디에펜바하와도 친교를 맺었는데, 한스는 뛰어난 지식인으로 3년 후 독일의 최초의 등산잡지 <보울더>의 발행자가 되었다. 볼프강은 5년간 그와 자일파트너가 되었는데, 한스는 프리 클라이밍만 고집하는 클라이머였다.
1979년 10대의 볼프강은 8급 루트 ‘차우베르플뢰테(VIII+)’와 ‘우토피아(VIII)’를 초등했다. 그는 라인하르트 칼과 엘프잔트슈타인을 또 다시 방문해 여러 루트를 함께 등반하며, 등반기술을 더욱 연마했다.
1979년 여름 볼프강은 한스 디에펜바하, 피알라 두 사람과 미국 뉴욕 근교에 위치한 샤왕겅크스(Shawangunks)암장에 도착했다. 그는 3일간의 각고 끝에 최고 난코스 구간인 4m의 오버행(Overhang)인 핑거크랙(Finger Crack)이 포함된 전체 높이 20m의 난이도 9급의 ‘슈퍼크랙(Supercrack IX, 5,12c)’을 아홉 번째 시도 끝에 2등 했다.
당시 이 루트 등반은 미국의 모든 클라이머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이 루트에 관한 이야기 중에서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신화(神話, Myth)인지 알아내는 방법은, 오직 이 루트를 등반하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이 루트가 위치한 뉴팔츠(New Paltz)의 눅눅한 기온은 그늘 속에서도 영상 35℃여서 그들은 호흡하기 힘들 정도였다.
그는 이 크랙을 오르는 데 요요(yo-yo, 상하 운동, 천연 바위 홀드, 크랙만 사용하며 탈진 시까지 등반하고, 휴식을 취한 다음 등반을 재개함) 등반법을 구사했다. 크랙에 크래밍(cramming : 채워 넣기)과 재밍(jamming : 끼워 넣기)을 연거푸 실행하며 체력이 바닥날 때까지 등반한 후, 고정 자일을 설치하고 하강했다.
그리고 휴식을 취하며 체력을 보강한 후 다시 미등 구간의 등반에 재도전했다. 첫째 날 슈퍼크랙의 하단 6m를 돌파하고, 둘째 날 크랙 중간 부분의 6m를 돌파한 뒤 기진맥진한 상태가 되었다. 그는 이 크랙의 직접 등반 체험을 통해 이 루트가 세계에서 가장 등반이 어려운 루트 중의 하나라는 주장에 동의하게 되었다.
셋째 날은 무더운 날씨여서 모닝커피를 마셨더니 당장 체온이 상승해 손등의 땀구멍으로 땀방울들이 솟아올라 등반으로 지친 손들이 끈적끈적해졌다. 그는 슈퍼크랙에서의 마지막 날 최고 난코스 4m 높이의 오버행을 돌파하는 날이라 더 이상 피부에 상처를 입히지 않도록 조심하고, 근육의 혹사를 피해야 했다. 그는 등산화 끈을 졸라매고 손등에 테이프를 붙이고, 손등의 상처에 약간의 벤조인 액을 뿌려 통증을 마비시킨 후, 크랙의 바위 홀드들(손잡이와 발판들)만 이용하여, 등반을 재개했다.
그가 적당한 홀드를 물색하느라고 오랫동안 크랙에 끼워 놓은 손가락에서 경련이 일어났다. 단단한 팔뚝들이 경련을 일으키자, 그는 재빨리 확보용 볼트까지 진출해 로프를 통과시켰다.
그는 정상에서 2m 아래 지점까지 진출하고 자일 하강했다. 그의 근육이 마구 쑤셔댔다. 30분의 휴식 후 그는 크랙에 다시 붙었다. 의지력, 집중력, 인내심이 더욱 필요했다. 그는 크랙의 마지막 구간에서 알맞은 홀드를 찾아내느라 기진맥진했다. 그는 마지막 홀드를 움켜잡고 몸부림치며 정상에 도달했다. 그는 정상에서 탈진해 한참의 시간이 경과한 후에야 비로소 등정의 기쁨을 만끽할 수 있었다. 그는 나중에 이 루트의 초등자 미국 클라이머 스티브 운시(Steve Wunsch)를 만났는데, 그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볼프강의 등반 솜씨를 칭찬했다.
9급의 ‘슐라임스푸르’ 초등 후 독일 최고 클라이머로 등극
독일 클라이머 세 사람은 프리 클라이밍의 메카 요세미티로 가서 전설적인 베이스 캠프인 서니 사이드 워크인 캠프(Sunny Side Walk-in Camp), 즉 캠프 IV(요세미티계곡의 베이스캠프)에서 야영했다. 볼프강은 먼저 캐스케이드 폴스(Cascade Falls)의 ‘크림슨 크린지(Crimson Cringe, 5.12a)’와 워싱턴 칼럼의 높이 400m인 ‘아스트로만(5.11+)’을 등정하고 귀국했다.
볼프강은 독일의 빌더 카이저로 여행하고 높이 40m 의 7급 루트 ‘품프리세(VII)’를 초등했다. 볼프강은 디에펜바하, 나탄, 슈티에글러와 엘프잔트슈타인산군으로 다시 향했다. 볼프강은 동료 나탄과 3개의 9급(IXc) 루트, 즉 ‘1,000-마르크-반트’, ‘팀보르크’, ‘디렉테 주페를라티브’를 등정했다. 볼프강은 슈티에글러와 난코스, ‘베르너스 프로이엑트’의 크랙에 너트(nuts)를 박거나 홀드에 초크를 바르며 초등했는데, 당시 독일의 작손 지방에서는 등반할 때 너트와 초크의 사용을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루트의 초등을 인정받지 못했다.
- ▲ 영국의 에지 레인(E5, 6c) 프리 솔로 등반.
-
1979년 볼프강은 리카르트 뮈헤와 혹한과 폭설 속에서 쿠르트 알버트의 초등루트, 8급의 ‘엑소르치스트(VIII-)’를 등정했다. 1980년 볼프강은 프랑켄유라의 유명 클라이머, 쿠르트 알버트와 함께 괴스바인슈타이너 벤데 암장에서 등반했다.
볼프강은 미국 요세미티를 다시 찾아 너트(Nuts) 대신 프렌드(Friends)를 사용하며 ‘세퍼릿 리얼리티(5.11d)’를 자유 등반했다. 그는 론 커크(Ron Kauk)의 초등루트인 ‘테일스 오브 파워(5.12b)’와 ‘면도날(Razor's Edge)’도 등정했다. 그는 레이 자딘의 초등루트인 전설적인 ‘피닉스(5.13b)’를 등정하려고 그 루트에 5일간 매달려 전력을 기울였지만, 손등의 여러 군데가 찢겨져 상처투성이가 되었고, 모든 근육이 지쳐버린 나머지 실패했다. 그러나 그는 5.12 루트 20개를 등정하고 귀국했다.
그는 15개월간 군 복부를 마치고 1981년 괴스바인슈타이너 베데의 세 번째 9급(IX) 루트 ‘슐라임스푸르’를 초등한 후, 쿠르트 알버트와 함께 독일의 최고 클라이머로 인정받았다. 미국 클라이머 존 바차(John Bachar)가 독일의 크레텐제르에 위치한, 당시 유럽에서 최고 난이도 10급의 ‘체이싱 더 트란(X-/5.13b, 지금은 IX로 강등되었음)’을 개척했는데, 볼프강이 이 루트를 레드 포인트로 2등하는 위업을 달성했다. 볼프강은 존 바차가 개척한 루트 옆에 새로운 루트를 개척하고 ‘히치-하이크 더 프레인’이라고 명명했다.
1981년 여름 볼프강과 쿠르트(Kurt)는 베터슈타인산군에 9피치의 8급 루트 ‘로허 폼 호커(VIII)’를 개척했다. 볼프강은 팔츠의 노넨펠스에 9급의 자유 등반 루트 ‘임 베스텐 노이에스(IX-, 오늘날 난이도가 VIII로 강등)’를 개척했다.
1982년, 그는 프랑켄유라에서 더 활발한 등반활동을 하기 위해 모젤슈트라세로 이사했다. 볼프강은 2개의 9급 루트 ‘헤이세 핑거’와 ‘볼켄슈테이너 위베앙’을 개척하고, 그해 여름 미국 조슈아트리(Joshua Tree)에서 ‘이쿼녹스(5,13a, 오늘날은 5.12c로 난이도 강등)’를 2등했다.
이어 볼프강은 요세미티에서 2개의 5.13a 루트 ‘카즈믹 데브리스’와 레이 자딘의 전설적인 초등 루트 ‘피닉스(Phoenix 5.13b, X/IX+)’를 드디어 등정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미국의 타호호(Lake Tahoe)의 슈거로프(원뿔꼴의 산)에서 12m 오버행 루프 크랙(Roof Crack)인 ‘그랜드 이류전(5.13b/IX+/X-)’을 7일 만에 2등했다. 그리고 귀국해 에를랑겐대학교의 체육 교육학과에 등록했다.
1983년 5월 볼프강은 영국 친구 론 포셋과 쿠르트 알버트가 초등한 ‘마그넷(IX/IX+)’을 2등했다. 볼프강은 영국 친구 론 포셋을 방문하기 위해, 영국으로 건너가 론의 초등 루트 ‘더 프라우’ 및 3개의 다른 난코스를 등정했다. 이 때 볼프강은 의지력이 강한 노련한 영국 클라이머 제리 모파트와 사귀었다. 모파트가 독일의 프랑켄유라를 방문해 볼프강과 여러 루트를 함께 등반했다.
모파트는 프랑켄유라의 ‘자우탄츠’, ‘체이싱 더 트란’ 같은 루트를 온사이트(on-sight)와 톱로프(top-rope, 루트 상부에 고정 로프를 설치하고 확보를 받음) 등반 방식으로 등정했다. 또한 그는 프랑켄유라의 2개의 10급 유명 루트(X-) ‘더 파스’와 ‘에켈’을 요요(yo-yo) 스타일로 등정했다. 볼프강은 모파트의 확보를 받으며 10급 루트 ‘미스터 마그네지아(Mr Magnesia)’를 등정했다. 그러나 지금은 이 루트의 난이도가 에켈 루트와 같이 9급(IX+)으로 하강되었다.
파키스탄과 파타고니아의 암탑으로 등반영역 넓혀
볼프강은 등반의 독창성, 카라코룸의 6,000m급 화강암 암탑이나 파타고니아의 파이네 암탑과 같은 암벽 등반 영역의 확대와 개척정신으로 유명해졌다. 볼프강은 스테판 글로바츠와 3번 시도 끝에 당시 최고 난코스 ‘쥘베스터’를 초등했다.
1984년 볼프강은 프랑스의 뷔욱스(Buoux)에서 ‘르브 둔 빠삐용(Reve d'un Papillon, IX+/8a)’을 완등했고, 제리 모파트와 ‘엘릭시르 드 비올랑스(Elixir de Violence, IX+/8a)’를 초등했으며, 베르동(Verdon)에서 ‘빠삐 옹 시그(Papi on Sight, IX+/7c+)’를 2등했다. 그해 볼프강은 독일의 9급 루트, ‘폴아우트(IX+)’와 ‘이라테크노크라티에(IX+/X-)를 초등했다. 그는 프랑스의 베르동에서 친구 리카르트 뮈헤를 만나 둘이 함께 난이도 7c+(프랑스 암벽 난이도) 루트를 초등했다. 그는 모파트의 초등 루트 ‘더 파스’를 등정했다.
볼프강은 그 해 10월 미국의 샤왕겅크스암장의 ‘반달스’ 루트를 2등했는데, 이 루트는 미국의 유명한 여성 클라이머 린 힐이 초등한 유명 루트였다.
볼프강은 1984년 남부 프랑켄유라에서 이틀간 맹렬히 시도한 끝에, 10월 24일 난이도 10급의 ‘카날(X/8b)’을 등정하고, 호주로 건너가 고난도 루트 ‘인디아’, ‘마사다’, ‘에티오피아’, ‘예스터데이 디렉트(IX+/X-, 5.13a)’를 온사이트(on-sight)로 등반했다.
그는 1985년 4월 9일 당시 세계에서 가장 난이도가 높은 루트로 평가되었던 ‘펑크스 인 더 짐(Punks in the Gym, X+/8b+)’을 초등하고 귀국한 후 프랑켄유라의 10급 루트 ‘카움 차이트 춤 아트만(X-)’를 초등했다.
- ▲ 미국의 요세미티, 피닉스(5.13a) 등반.
-
1985년 6월 12일 쿠르트 알버트, 제프 그슈벤터와 더불어 독일 스포츠 클리이밍을 발전시킨 공로로 질버 라우렐 상을 수상한 볼프강 귈리히는 1986년 봄 ‘게토블라스터(X/X+)’를 포함한 10급 루트 3개를 초등했다. 당시 독일에서 유명한 10급 등반 루트로는 모파트가 초등한 ‘더 파스(X-)’, 볼프강이 초등한 ‘카날(X)’과 ‘카움 차이드 춤 아트만(X-)’, 그슈엔트너가 초등한 ‘촘비(X-)’였다.
1986년 독일에서 10급 루트 8개를 초등하고 타인들이 초등한 10급 루트 여러 개를 등정한 볼프강은 베츠와 영국으로 건너가 모파트가 초등한 ‘레벌레이션스(E7/6c)’와 다른 루트 ‘바디 머신(E7 6c)’을 레드 포인트로 함께 등정했다. 그는 또한 마틴 아트킨슨이 초등한 북부 웨일스의 ‘드림 토핑(E7 6c)’을 등정했다.
볼프강은 베츠의 확보를 받으며 포셋의 초등루트 ‘마스터스 에지(Master's Edge)’를 등반하려 했다. 높이 15m의 사암(砂岩) 아레트(빙하의 침식으로 형성된 날카로운 암릉)에는 지상에서 6m 지점에 3개의 구멍이 뚫려 있어 그곳에 촉스톤(chockstone)을 박아 확보지점으로 이용했는데, 이 지점 위쪽을 등반하던 중에 촉스톤이 빠지며 9m를 추락해 척추가 골절되고 작은 뼛조각이 그의 폐를 뚫었다.
그는 한 달 뒤 치료를 마치고 10급 루트 ‘카마줄트라 218(Kamasutra 218)’을 등정하고, 중국과 남미를 방문해 중국의 거대한 루프(Big Roof)와 남미의 리오에서 ‘서던 캄포트(IX-)’를 등정했다. 볼프강은 영국에서 ‘위드 킬러(E6/6c, IX)’와 ‘에지 레인(E5/5c),’ 그리고 독일의 프랑켄유라에서 ‘자우탄츠(IX)’를 프리 솔로(Free Solo)로 등정했다.
볼프강은 프리 클라이밍 중에 여러 번 추락을 경험했다. 엘프잔트슈타인산군에서 등반 중에 핸드홀드가 부서지며 20m를 추락했는데, 추락을 저지하려고 손으로 바위를 긁다가 손가락의 가죽이 벗겨져 나갔다. 그는 뢰텔펠스암장에서 ‘벨첸바흐-게데히트니스벡’을 촉스톤만 사용하며 등반하던 중에 촉스톤이 떨어지자, 구멍에 두 개의 너트들을 촉스톤 대용으로 박았다. 그런데 그 너트가 빠지며 20m를 추락하는 사고를 당하기도 했다.
그는 1987년 독일의 프랑켄유라에 위치한 크로텐저 투름에 ‘월스트리트’를 레드 포인트로 개척했다. 볼프강은 미국에서 여러 개의 5.13s 루트들을 등정한 후, 조슈아트리암장에 ‘문빔 크랙(Moonbeam Crack 5.13b)’도 개척했다.
1988년 그는 독일 카라코룸 트랑고 등반대에 참가했다. 아르놀트 대원이 크레바스에 추락해 척추 골절상을 입었으나, 쿠르트, 볼프강, 뮌헨바흐는 네임리스타워(Nameless Tower)의 유고 루트(VIII+)의 26피치를 레드 포인트로 등정했다.
그는 1989년 고소등반에 프리클라이밍을 접목시키려고 카라코룸을 다시 방문했다. 쿠르트 알버트, 크리스토프 슈티에글러, 밀란 쥐코라가 3인이 동행했다. 그들은 영하 40℃의 혹한과 폭설에 시달리며 네임리스타워에 신 루트를 개척하려 했으나, 볼프강은 등반 도중 추락해 인대파열 부상을 입고, 두 대원들은 악천후에 시달리다 귀국해 그와 친구 쿠르트 두 명만 파키스탄에 남게 되었다. 그의 친구 쿠르트가 6,000m 지점의 9급(IX-) 크랙을 돌파하고, 남은 루트를 모두 선등했다.
부상자 볼프강은 진통제를 한 줌씩 삼키며 이를 악물고 등반을 계속했다. 그들은 크랙에 도달하기 위해 한 번 펜듈럼했고 홀드가 없는 두 군데의 슬랩(Slabs)을 인공등반(A2)하고 나머지 구간은 레드 포인트로 신 루트를 개척했다. 그들은 이 루트를 ‘꺼지지 않는 불꽃’(Eternal Flame IX급)이라고 명명했다.
1991년 볼프강은 친구(쿠르트, 아르놀트, 베츠, 디티히) 4명과 함께 악천후 속에서 남미의 파타고니아 파이네 중앙봉 동벽에 36피치 루트를 개척하고 ‘라이더스 온 더 스톰(Riders on the Storm : 폭풍을 탄 사람들 IX, A3급)’이라고 명명했다. 홀드가 없는 절벽에서 트래버스하기 위해 펜듈럼(Pendulum : 자일 끝에 매달려 시계추처럼 이동함)하는 등 부분적으로 인공등반(A3)이 포함된 레드 포인트 등반이었다.
31세 꽃다운 나이에 아우토반에서 자동차 사고로 요절
볼프강에게 최후의 비극은 산의 암벽에서 발생하지 않고, 독일의 고속도로에서 일어났다. 1992년 8월 31일 그는 뮌헨의 한 라디오 방송국에서 등반에 관한 인터뷰를 마치고 귀가하던 중, 아우토반(Autobahn : 독일의 자동차 전용 고속도로)에서 졸음운전으로 추정되는 교통사고로, 31세라는 꽃다운 나이에 결혼한 지 1년 되는 사랑하던 아내를 남겨두고 이 세상을 하직했다. 그의 요절은 독일에서 최대 난코스를 연거푸 돌파하던, 가장 귀중한 클라이머의 영원한 상실일 뿐만 아니라, 독일에서 등반의 새로운 특성이 두각을 나타내던 시대의 갑작스런 종말을 의미했다.
- 독일의 유명 클라이머 볼프강 귈리히의 프리 솔로 등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