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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천사가 해석한 요한계시록 원문보기 글쓴이: 성모세
선택받은 백성 천손민족의 계보
성경 창세기는 모든 역사의 시작과 기원을 기록한 책으로서, 많은 원형질적 사건들과 개념들이 등장하고 또한 전개되고 있다. 실로 창세기는 신구약 계시의 발원지로서 구약의 열쇠임과 동시에 전성경의 열쇠인 책이다. 그러므로 선택된 백성의 계보가 인류 역사 안에서 누구로부터, 어느 민족에게로, 어떻게 내려 왔는가를 알기 위해서는 시작의 책인 창세기를 자세히 상고해야 한다.
알이랑민족 한국인이 또하나의 선민이라는 사실은 창세기에 기록된 선민의 거룩한 계보가 명확히 증거하고 있다. 창세기 9장과 10장에서 우리는 노아의 복된 아들 셈에서부터 그의 4대손 에벨의 자손으로 이어지는 이른바 ‘천손계보(天孫系譜)’, 즉 선민의 거룩한 가계를 발견하게 된다.
셈
노아는 홍수 후에 식물을 가꾸게 되었다. 그 식물들 중에는 포도나무가 있었는데, 어느 날 노아는 포도원에서 생산된 포도주를 마시고 의식을 잃은 채 옷을 벗어버리고 장막 안에서 나체로 자고 있었다. 아마도 노아는 순수했을 것이다. 포도나무에 대한 언급은 성경에서 여기가 처음이다. 그는 발효되어 만들어진 포도주가 인간 두뇌에 어떻게 작용하는지 경험한 바가 없었다. 그때 세 아들 중 둘째 아들인 함이 들어갔다가 아버지의 하체를 보게 되었다.
“노아가 농업을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가나안의 아비 함이 그 아비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고하매”(창 9:20~22).
함은 아버지의 하체를 대단히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여기서 함이 ‘보았다’고 할 때, ‘보았다’는 단어 ‘라아흐’(האָ)는 단순히 그가 무의식적으로 보았다기보다는 ‘그가 주목했다’, ‘그가 응시했다’는 뜻이다. 아마도 노아의 나체를 본 함은 순간적으로 마음에서 깨끗한 생각을 버리고, 불순한 생각을 갖게 되었던 것 같다. 성경 연구가들은 함이 아버지의 하체에서 성적 즐거움-동성애-을 느끼면서 관능적인 눈으로 바라보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함은 형제들에게 자기가 본 아비의 수치를 말하였다. 함은 벗은 몸으로 누워있는 아버지에 대해 수치감과 애통하는 마음이 조금도 없었고 오히려 아버지를 조소했다. 이와 같은 행동은 자기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이 결여된 것으로서 알몸이 되어 누워있는 노아의 모습보다 더 추한 함의 인간성을 폭로한 것이었다. 또한 함의 행동은 그에게 ‘거역의 영’이 있음을 증명했다.
아버지는 하느님이 가정에 세우신 권위이다. 하느님은 당시 노아를 땅 위에서의 우두머리(Headship)로 삼으셨고 노아의 일가를 그의 권위 아래 두셨다. 그러나 함은 하느님이 자기 위에 세우신 권위가 실패한 광경을 보고 좋아했다. 반항의 정신을 가진 사람의 특징은 권위가 실패하는 것을 즐거워한다. 지도자(Leadership)가 실패할 것을 기대하며 그렇게 되었을 때 애통해 하는 대신 비방하며 기뻐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될 때에 자유롭고 다스림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이 얼마나 비열한 정신인가? 함 안에는 ‘반(反)권위의 영’이 있었다.
그때 작은 아들 셈과 큰 아들 야벳은 아버지의 벌거벗은 몸을 가리기 위해서 행동을 취했는데, 이는 그들이 의로운 심령을 가졌다는 표시이다. 그들은 옷을 취하여 뒷걸음쳐 아버지에게로 가서 벗은 몸을 가리어 드렸고, 얼굴을 돌이키고 그 아비의 하체를 보지 않았다.
“셈과 야벳이 옷을 취하여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아비의 하체에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 아비의 하체를 보지 아니 하였더라”(창 9:23).
셈과 야벳은 아버지의 수치를 보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그들은 아버지에 대해 최대한의 공경의 태도를 보였다. 그들 안에는 의로운 성품과 위임 권위에 복종하는 경건한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이들의 행위는 자녀의 아버지에 대한 마땅한 도리였다. 그리고 셈이 본이 되어 형 야벳을 이끌어서 그와 같은 행동을 인도하였을 것이다. 이것은 술이 깬 후 노아가 그의 세 아들에 대하여 축복과 저주를 할 때 셈에게 가장 큰 경의를 표하였음을 보아서 알 수 있다(이러한 성경해석 방식을 ‘문맥 주석’ 이라고 한다).
노아의 노래
노아는 술에서 깨어 일어난 후 그의 아들들이 자기에게 행한 모든 일을 알게 되었다. 아마도 노아는 자신이 알몸인 채 셈의 것인지 야벳의 것인지도 모를 겉옷이 자신에게 덮여 있는 사실을 발견하고 놀라 어떻게 된 일인지 탐문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의 작은 아들 셈이 자기에게 행한 의롭고 복된 행실을 알게 되었다.
그때에 하느님의 영께서는 노아를 선지자와 재판장으로 만드셨다. 노아는 함에게 저주를, 셈과 야벳에게는 축복을 내렸는데, 그가 말한 축복과 저주는 후손들의 장래에 대한 예언적 계시였다. 창세기 9:25~27에 노아가 내린 축복과 저주가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죄를 범한 함의 아들 가나안의 노예 신분을 향한 반복 후렴으로 3분된 시이다.
그리고 그가 말했다
가나안은 그의 형제들을 위하여
종들의 종이 될 것이다
-25절
그리고 그가 말하기를
셈의 하느님 여호와를 찬송하라
가나안은 그를 위하여 종이 될 것이다
-26절
하느님이 야벳을 창대케 할 것이다
그리고 그가(하느님) 셈의 장막들 안에 거주할 것이다
그리고 가나안은 그를 위해 종이 될 것이다
-27절
노아의 예언적 노래는 범죄 한 함의 아들 가나안이 종이 되리라는 후렴구를 가지 3연 7행시의 구조로 되어 있다. 그리고 전체 예언의 구상은 첫 절은 가나안에게, 둘째 절은 셈과 가나안에게, 셋째 절은 세 형제 모두에게 돌리는 것이다. 즉 25절은 함의 아들 가나안에게, 26절은 셈과 가나안에게, 그리고 27절은 야벳, 셈, 가나안 세 사람 모두에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좀 더 자세히 정리해 보자. 25절은 가나안(함)을 상대한 저주이다. 그가 형제들의 종이 되리라는 것이다. 26절은 셈을 상대한 축복이다. 하느님은 ‘셈의 하느님’이시다는 것이다. 이는 곧 노아의 세 아들들 중 셈이 하느님의 직계 종주손(宗主孫)으로 선택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로 인하여 셈 족속은 하느님의 특별하신 계시를 소유한 자로서, 구원 계시의 수취자(受取者)요, 전달자(傳澾者)가 되었다. 그리고 가나안에 대한 저주가 다시 반복되었다. 가나안이 셈의 종이 되리라는 것이다. 27절은 야벳과 셈 두 사람을 상대한 축복이다. 야벳에 대해선 하느님이 그를 창대케 하리라고 했다. 이는 야벳과 그의 후손이 힘과 부를 가진 민족이 되게 하신다는 뜻이다. 야벳의 복은 지상의 번영이었다. 셈에 대해선 하느님이 ‘셈의 장막에 거하실’ 것이라고 했다. 이는 하느님이 셈과 그의 후손 가운데 특별히 임재하실 것이라는 뜻이다(27절 둘째 행의 주어는 첫째 행의 주어인 하느님이다. 따라서 ‘하느님이 셈의 장막에 거하시며’로 번역되어야 한다). 그리고 여기에 가나안을 향한 저주가 또 다시 반복되었다. 가나안은 야벳의 종이 되리라는 것이다.
이 노아의 노래에서 가장 중요한 계시는 무엇인가? 하느님은 “셈의 장막에 거하시는 셈의 하느님”이시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장차 세상 만민에게 축복의 통로가 될 천손민족(天孫民族)은 셈의 후손 가운데서 탄생할 것이었다. 여호와는 인류 모든 종족의 하느님이시지만 셈의 하느님으로 배정됨으로서 하느님의 백성은 셈에게서 나오고 하느님도 그들의 하느님으로 섬김을 받으시게 되었다. 그러므로 장차 하느님은 셈족에게서 세상 구원 역사를 펴셔야 했다. 곧 세상 회복의 역사는 셈 족속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여호와를 셈족속의 하느님으로 배정함으로 그렇게 된 것이다.
노아는 여호와를 셈의 하느님으로 배정하면서 셈의 하느님으로 그를 찬양하였다. 그러므로 셈 족속에게서 하느님에 대한 찬양이 계속되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찬양과 경배는 어디보다 셈의 장막에 속한 것이다. 우리 겨레는 셈의 후손이다.
창세기 9:25~27에 기록된 노아의 노래에서 한 가지 꼭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27절의 “그가 셈의 장막들 안에 거주할 것이다”에서 동사의 주어인 ‘그’란 야벳이 아니라 하느님이며, 따라서 이 구절은 ‘야벳을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가 아니라 ‘하느님이 셈의 장막에 거하시며’라고 번역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말했다
가나안은 그의 형제들을 위하여
종들의 종이 될 것이다
-25절
그리고 그가 말하기를
셈의 하느님 여호와를 예배하라
가나안은 그를 위하여 종이 될 것이다
-26절
하느님이 야벳을 창대케 할 것이다
그리고 그가(하느님) 셈의 장막들 안에 거주할 것이다
그리고 가나안은 그를 위해 종이 될 것이다
-27절
많은 서양의 주석가들이 그리스와 로마가 이스라엘을 비롯한 아시아의 셈족을 침략하여 영토를 확장시킨 것과 연결을 지으면서 27절 둘째 문장의 주어를 야벳으로 보려고 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둘째 문장을 “야벳을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라고 번역하면서, ‘거한다’는 것이 셈의 영토에 대한 야벳의 정복을 의미한다고 해석 한다. 즉 “하느님이 야벳을 창대케 하사 야벳이 셈의 영토를 점령케 하소서”라는 뜻이 된다는 것이다. 아주 정치적인 해석이다.
하느님의 거처인 셈의 장막
이러한 해석을 주장하는 대표적인 학자가 보스(Vos)이다. 그는 “야벳을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에서 ‘거한다’는 것이 영적인 동거를 의미하지 않고 실제적인 정복을 의도하는 것으로 본다. 그리고 야벳이 셈의 장막을 정복한 후 거기에서 구속과 계시의 하느님을 발견하게 된다고 한다.
이와 같은 해석이 서양 사람들(야벳)의 아시아 사람(셈)에 대한 제국주의적 영토 침략을 합리화하는 근거로 이용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문법적으로나 문맥상으로나 전혀 인정될 수 없는 해석이다. 이 잘못된 해석을 따르게 되면 우리는 본문이 실제로 의도하는 바를 완전히 놓칠 수밖에 없다. 27절 둘째 문장의 주어는 첫째 문장의 목적어인 야벳이 아니라, 첫째 문장의 주어인 ‘하느님’이다. 따라서 “하느님이 셈의 장막에 거하시며”로 번역되어야 한다. 문법적으로나 문맥상으로나 그것이 타당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견해는 옹켈로스 탈굼(Targum of Onkelos), 필로(Philo), 마이모니데스(Maimonides), 라쉬(Rashi), 아벤 에즈라(Aben Ezra), 데오도르트(Theodoret), 바움가르텐Baumgarten), 그리고 델리취(Delitzsch) 등이 지지했다. 최근에는 현대 구약신학을 대표하는 학자인 월터 카이저(Walter C. Kaiser, Jr)가 강하게 지지한다. 그는 27절 둘째 행의 주어가 야벳이 아니라 ‘하느님’으로 간주되어야 할 이유를 다음 네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첫째, 두 개의 절로 구성된 문장 안에서 후절(後節)의 주어가 표현되지 않았을 때는 전절(前節)의 주어가 그 후절에서도 주어로 간주되는 것이 통례이다. 그러므로 전절의 주어인 하느님의 이름 ‘엘로힘’이 둘째 절인 “셈의 장막에 거하소서”의 주어로 인정되어야 한다.
둘째, 전절에서 목적어로 사용된 야벳이 후절에서의 주어로 간주될 경우 그렇게 생각해야 할 뚜렷한 문맥상의 이유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27절에서는 그와 같은 문맥상의 이유가 없다.
셋째, 27절이 속해 있는 9장 이후 계속되는 몇 장(章, Chapter)의 문맥에서 셈이 제일 큰 복을 받은 사람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만약 야벳이 셈의 장막에 거한다고 하여 셈의 영토를 점령하는 것으로 해석하면 9장 이후에 펼쳐지는 셈과 그 후손에게 약속된 복과는 문맥상 조화가 되지 않는다.
넷째, 27절 둘째 문장인 “그리고 그가 셈의 장막들 안에 거하게 하소서”에서 ‘그’를 야벳으로 이해하는 것은 27절의 문맥상 별로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이미 야벳은 창대케 되는 복을 받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노아의 축복과 저주의 말씀에서 25절은 가나안에게 말씀하신 것이고, 26절은 셈과 가나안에게, 그리고 27절은 야벳과 셈과 가나안 세 사람 모두에게 말씀하신 것으로 볼 때, 27절 둘째 절의 주어를 ‘하느님’(엘로힘)으로 번역하여 하느님이 셈에게 특별한 복을 약속하시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월터 카이저, 「구약성경신학」, 생명의 말씀사, 1989, pp.113~114).
매우 타당한 설명이다. 문법적으로나 문맥상으로나 27절 둘째 절의 주어는 하느님이며, 하느님께서 셈에게 특별한 복을 약속하시는 것이다. 그것은 하느님이 셈의 장막에 거하시리라는 것이다. 즉 셈의 백성 가운데 ‘하느님의 특별한 임재’가 있을 것임을 약속하신 것이다. 이러한 약속은 26절에 주어진 셈의 복과도 아주 잘 연결된다. 하느님은 ‘셈의 하느님’이시므로 그는 특별히 셈의 장막에 ‘내주’하시는 것이다. 이는 당연한 것이 아닌가? 축복과 내주는 뗄 수 없는 것이며 언제나 연결된다. 진실로 하느님은 셈의 백성들에게 거하실 예정이었던 것이다. 하느님은 그의 거처를 셈의 장막에 두기로 뜻을 정하셨다.
아래는 베이커 성경 주석 「창세기」에서 발췌한 27절 둘째 절에 대한 해석이다. 27절 둘째 절을 셈에게 약속된 복으로 바르게 설명하고 있다.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주요한 유대인의 문헌들은 다른 문헌들과 더불어 엘로힘을 동사의 주어로 삼고 있는데, 그렇게 한 것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는 것으로 새로 문법적 주어를 만들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구절은 하느님의 ‘두 가지’ 행위를 묘사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함이 보다 자연스럽다. 즉 그(하느님)는 야벳을 ‘창대케 하실’ 것이지만 셈의 장막에 ‘거하실’ 것이라는 말씀이다. 이러한 견해를 가지고 볼 때, 예언은 보다 영적인 의미를 가지게 된다. 셈은 ‘하느님의 거처’였다. 단순히 정치적으로만 해석하면, 이 구절이 지니는 그와 같은 숭고한 개념을 충족시켜 주지 못하게 되고 만다.”(조셉 S. 엑셀, 이기문 역, 「베이커 성경주석 창세기」, 서울: 기독교문사, 1982, p.353)
그렇다! 하느님은 ‘셈의 하느님’이시며, 따라서 여호와 하느님은 ‘셈의 장막’을 당신의 거처로 삼기로 결정하신 것이다. 셈의 장막은 하느님의 거처가 되었다. 노아 언약의 중심은 ‘셈의 장막’과 ‘그 장막에 거하시게 될 하느님’이다. 장차 하느님의 영광은 그가 거하실 ‘셈의 장막’을 통해 회복될 것이었다.
가장 큰 복을 받은 셈
노아의 예언적 노래에서 셈은 가장 큰 복을 받았다. 셈에게는 축복이 두 번 선언되었다(26, 27절). 야벳에게는 축복이 한 번 선언되었다(27절). 함이 받은 축복은 없으며 오직 저주만 세 번 선언되었다(25, 26, 27절). 함은 그의 아들 가나안 안에서 저주를 받았고, 또 함 족속들은 일반적으로 축복을 상실하고 말았다. 왜냐하면 노아가 함의 전 후손을 저주하지는 않았으나 축복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위임 권위에 대항했던 함이 받은 세 번의 저주는 형제들의 종이 되라는 것이었다. 성경에서 첫 번째 종 된 자는 바로 함이었다. 이것은 권위에 순복하지 않는 사람은 계속 권위에 순복해야 하는 종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권위 아래 들어가는 사람만이 위로부터 권위가 주어진다. 반권위의 정신을 가진 자는 승진할 수 없다. 권위에 복종하는 자만이 권위를 얻을 수 있다.
창세기 10장에 보면 노아의 세 아들이 등장하는데, 현대 인류학은 함의 후손이 흑인종, 야벳의 후손이 백인종, 셈의 후손이 황인종의 근간이 되었다고 말한다. 노아의 둘째 아들 함의 족속은 지금의 리비아, 이집트, 에디오피아 등으로 이동해 주로 아프리카인의 조상이 되었고, 첫째 야벳은 그리스, 인도, 러시아 등으로 이주해 유럽인의 조상이 되었으며, 작은 아들 셈은 서아시아 지역에 거주하는 셈계 민족 및 시베리아를 거쳐 북만주 일대에 산재한 우리 한민족의 원류, 그리고 베링 해협을 건너간 남북미 원주민들의 조상이 되었다. 세계의 역사는 노아의 예언이 일치하고 있음을 입증해 준다.
우리는 노아의 예언적 노래에서 셈이 가장 큰 복을 받았음을 발견하게 된다. 노아는 셈에게 가장 큰 경의를 표시하였다. “셈의 하느님 여호와를 예배하라”(26절). “하느님은 셈의 장막에 거하소서”(27절). 셈은 ‘명성’, ‘영광’ 이라는 뜻이다. 셈은 하느님의 명성이요, 하느님의 영광이다. 여호와는 셈의 하느님이시며, 셈은 자신의 장막에 거하시는 복과 구원의 하느님을 열방 모든 백성에게 선포해야 할 책임을 부여받은 것이다. 알이랑 민족 우리 한국인은 셈 계열의 백성들 가운데서도 유대민족과 더불어 특별선택을 받은 천손민족이다.
장자권을 얻은 작은 아들 셈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셈을 노아의 장자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성경 독자들이 그렇게 오해하고 있는 이유는 일반적으로 노아의 세 아들이 셈, 함, 야벳의 순으로 일컬어지기 때문이다(창 5:32, 6:10, 7:13, 9:18, 10:1 ; 대상 1:4). 이러한 배열로 인해 그들의 나이 역시 같은 순서라고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노아에게 셈, 함, 야벳의 순서로 아들들이 태어났을까? 전혀 그렇지 않다. 노아의 아들들은 야벳, 함, 셈의 순서로 출생했다.
창세기 5:32을 보면 “노아가 오백세가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 ‘된 후에’는 한글개역성경에 작은 글자로 인쇄되어 있는데, 원문에는 없는 말을 문맥을 고려하여 번역문에 삽입한 것이다.
창세기 5:32의 히브리어 원문을 직역하면, “노아가 500세가 되었다. 그리고 그는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다”이다. 이 구절이 의도하는 바는 노아가 500세 되던 해에 첫 아들이 태어나고, 그 다음에 차례대로 다른 두 아들이 태어났다는 뜻이다. 그러나 여기서 ‘셈과 함과 야벳’ 이라는 순서가 꼭 나이에 따른 순서여야 할 이유나 증거는 없다.
셈이 야벳보다 더 어리다는 사실은 창세기 11:10을 통하여서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셈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셈은 일백 세 곧 홍수 후 이 년에 아르박삿을 낳았고”라는 기록에 의하면, 셈이 100세가 된 것은 홍수 후 이년이 지나서의 일이었다. 노아가 600세 되던 해 2월 10일에 노아와 그의 가족은 방주로 들어갔고, 그로부터 이레 후 곧 2월 17일에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여 40일을 내렸으며(창 7:9~12), 그들이 방주 밖으로 나온 것은 노아가 601세 되던 해 2월 27일이었으니(창 8:14~19), 노아 홍수는 햇수로 볼 때 2년이나 지속된 장기간의 대사건이었다.
사람들에게 노아 나이 600세와 601세의 두 해는 홍수 해로 기억되었을 것이고, 그 후 두 해(노아 나이 602세와 603세)가 지나, 노아의 나이가 대략 604세가 되던 해에 셈은 나이 100세가 되어 아르박삿을 낳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셈은 노아가 504세가 되던 해에 태어난 셈이 된다. 이상 고찰한 바를 창세기 5:32에 기록된 “노아가 오백 세가 되었다. 그리고 그는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다” 는 말씀과 묶어서 볼 때, 셈은 결코 노아의 맏아들이 될 수 없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노아는 첫 아들을 500세에 낳았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증거로서 창세기 9:24을 제시할 수 있다. 그 곳에 기록되기를 “노아가 술이 깨어 그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라고 하였다. 한글개역성경에는 ‘작은’을 위하여 ‘둘째’ 라는 각주를 덧붙임으로서, 이 아들이 다름 아닌 ‘함’ 임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나 본문에 의하면 직접 저주를 받은 사람은 함이 아니요 그의 아들 가나안이었다. 즉 함에 대한 명시적인 저주가 없음을 고려할 때, 여기서 말하는 그 ‘작은 아들’은 함이 아니라 오히려 셈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이렇게 볼 경우, 이 작은 아들이 ‘행한 일’은 무슨 저주받을(25, 27하반절) 악한 행실이 아니요, 궁극적으로 복을 받아 마땅한(26, 27상반절) 아름다운 행실을 가리키게 된다.
뿐만 아니라 창세기 9:24의 ‘작다’(하카탄)라는 형용사가 반드시 최상급으로서 ‘막내’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지만, 히브리어의 일반적인 어법상 최상급을 표현하는 것으로서 ‘가장 작은(어린)’ 이란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따라서 ‘막내’는 셈이 된다.
끝으로 고찰해야 할 구절은 창세기 10:21이다. 우선 우리 말 성경부터 살펴보자. “셈은 에벨 온 자손의 조상이요 야벳의 형이라. 그에게도 자녀가 출생하였으니” 라고 번역하였다. 바로 이것이 셈이 작은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맏아들로 오인케 하는 가장 큰 문제의 구절이다. 이 구절에 대한 히브리어 본문은 ‘아히 예페트 하가돌’이다. 이 히브리어 구절은 두 가지의 직역이 가능하다: ① 야벳의 큰 형제(brother), ② 큰(자) 야벳의 형제. 다시 말해서 ‘크다’(하가돌)라고 하는 형용사가 ‘야벳’과 ‘형제’ 중 어느 것을 수식하느냐에 따라 이 문구의 해석이 달라진다. ‘야벳’을 수식할 경우 야벳이 형이 되고, ‘형제’를 수식하면 셈이 형이 된다.
[맛소라 사본에는 셈이 “큰 자 야벳의 형제”, 즉 “맏형 야벳의 형제”(΄achi yepet haggadol)로 나타나 있다. 맛소라 학자들이 고안해 낸 액센트 부호의 기능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구두점 역할인데, 맛소라 성경의 액센트는 여기서 ‘크다’(΄achi)가 ‘야벳’(yepet)을 수식하고 있음을 명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맛소라 학자들은 야벳을 셈의 형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70인 역(LXX) 역시 맛소라 학자들의 견해들을 지지해 준다. 이 구절에 대한 70인 역의 번역문(αδελΦω ΙαΦεθ Του μεζονο)에 있어서 명사 ‘야벳’과 형용사 ‘크다’는 동일한 2격(소유격)을 취하고, ‘형제’는 3격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큰 자’는 셈이 아니라 야벳이다.]
그런데 앞에서 상세히 검토했듯이 셈이 ‘가장 작은 아들’이기 때문에 당연히 ‘크다’는 야벳을 수식해야 한다. 따라서 야벳을 셈의 형으로 해석하여 창세기 10:21은 다음과 같이 번역하여야 한다: “셈은 에벨 온 자손의 조상이요 형 야벳의 동생이라….” 그러나 불행하게도 한글개역성경을 비롯하여 거의 대부분의 현대 역본들이 셈을 야벳의 형으로 이해하고 또 그렇게 번역하였다. 이 그릇된 번역이 작은 아들인 셈을 노아의 큰 아들로 오해하도록 막대한 영향을 끼친 것이다. 다만 영어 성경 가운데 NIV, KJV, AB가 야벳을 셈의 “형”으로 올바르게 번역하였다.
* King James Version
“Unto shem also, the father of all the children of Eber, the brother of Japheth the elder, even to him were children born.”
* New International Version
“Sons were also born to shem, whose older brother was Japheth; shem was the ancestor of all the sons of Eber.”
* Amplified Bible
“To Shem also, the younger brother of Japheth and the ancestor of all the children of Eber, children were born.
이상의 모든 고찰을 근거로 가장 안전하게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야벳은 노아 500세 되던 해에, 함은 노아 502세 되던 해에, 그리고 셈은 노아 504세 되던 해에 태어났을 것이라는 추론이다. 노아의 세 아들은 야벳, 함, 셈의 차례로 태어났던 것이다. 따라서 성경이 셈, 함, 야벳의 순서로 기록한 것을 나이 순서로 배열했다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만 셈은 그의 나이에 관계없이 먼저 언급해야 되는데 그것은 그가 택함을 받은 씨이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의 아비 데라도 아들이 셋이 있었다. 창세기 11장 27절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데라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데라는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고 하란은 롯을 낳았으며” 여기에 아브라함이 맨 앞에 나오지만 그는 데라의 작은 아들이었다. 나홀이 제일 위이고 하란이 둘째, 아브람이 막내였다. 그런데도 아브람을 맨 앞에 쓴 것은 아브라함이 데라의 계승자이기 때문이다. 아브람은 언약의 계승자로 선택받았다. 그래서 선택된 계승자로서 맨 앞에 위치한 것이다.
셈도 노아의 작은 아들이었지만 형제들 가운데서 하느님의 직계 종주손으로 선택받은 자였기 때문에 맨 앞에 기록된 것이다. 셈은 가장 작은 자였다. 그러나 그는 가장 큰 자가 되었다. “셈의 하느님을 예배하라!” “하느님은 셈의 장막에 거하소서!”
셈은 작은 아들이었지만 하느님이 ‘셈의 하느님’이 되시고 또한 셈의 장막이 ‘하느님의 거처’가 됨으로서 그는 노아 가문의 진정한 장자가 된 것이다. 이처럼 원래는 장자가 아니었지만 장자권을 획득한 사례는 성경에 많이 나온다.
이삭의 아들 에서가 장자였지만 동생 야곱이 장자권을 얻었고(히 12:16), 야곱의 장자는 르우벤이었지만 열한 번째 아들인 요셉에게 장자의 명분이 돌아갔고(대상 5:1), 요셉의 장자는 므낫세였지만 작은 아들 에브라임에게 장자권이 전수되었던 것이다(창 48:13~20). 왜 하느님은 이와 같은 방식으로 일하실까? 이 모든 것들은 약한 자를 택하사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는 하느님의 자비하신 성품을 계시하려는 것이다(고전 1:27~28).
하느님은 ‘셈의 장막’에 거하시는 ‘셈의 하느님’이시다! 이렇게 셈에게는 ‘셈의 하느님’이라고 했으니 셈은 형제들 가운데서 하느님의 직계손으로 선택을 받았다. 그리하여 거룩한 선민의 가계는 대홍수 후 노아의 작은 아들 셈으로부터 그의 후손에게로 내려오게 되었다. 야벳과 함의 후손은 탈락되었다. 여호와 하느님은 선조 시대부터 셈족과 긴밀한 관계 아래 계시는 것이다.
벨렉과 욕단
셈의 후손 가운데에서 주목해야 할 두 사람이 있다. 그들은 셈의 4대 손 ‘에벨’의 두 아들 ‘벨렉’ 과 ‘욕단’ 이다. 형제인 이 두 사람은 셈으로부터 선민의 거룩한 가계를 함께 계승한 특별한 사람들이다. 앞으로 자세히 살펴볼 것인데, 바로 이 두 사람의 자손으로부터 두 계열의 천손민족 이스라엘과 대한민국이 탄생하게 된다. 창세기 10장은 흔히 민족장(民族章)이라고 하는 것으로 노아의 후손들에 의해 형성된 세계 제(諸)민족의 기원에 대한 기록이다. 여기에는 노아의 세 아들의 계보가 자세히 명시되어 있다. 제일 먼저 큰 아들 야벳의 계보가 기록되었고(2~5절), 그 다음에 가운데 아들 함의 계보(6~20절)가, 끝으로 작은 아들 셈의 계보가 기록되어 있다(21~31절). 야벳, 함, 셈의 순서로 세 아들의 가계를 소개하고 있는데, 이는 나이 순서대로 배열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계보를 자세히 보면, 창세기의 저자는 야벳과 함의 자손들을 소개할 때와 셈의 자손들을 소개할 때의 태도가 서로 다르다. 즉 야벳의 경우와 함의 경우에는 “야벳의 아들은~ ”, “함의 아들은~ ” 하고 곧바로 아들 손자를 소개하였는데, 셈의 경우는 “셈은 에벨 온 자손의 조상이요, 형 야벳의 동생이라. 그에게도 자녀가 출생하였으니”(창 10:21․KJV)라는 특별한 서론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는 아들과 손자를 건너 뛰어 4대 째의 ‘에벨’이 먼저 나오고 있다. 더욱이 그 ‘에벨’은 셈의 맏아들도 아니고 맏아들의 직계손도 아니며, 셋째 아들 아르박삿의 손자였다. 셈은 아르박삿 외에도 네 아들이 있었고 따라서 셈은 이 모든 자손들의 조상임에도 틀림없다. 그런데도 셋째 아들 아르박삿의 손자 ‘에벨’을 먼저 언급하면서 “셈은 에벨 온 자손의 조상”으로만 구별해 놓았다. 무슨 이유 때문인가? “셈은 에벨 온 자손의 조상”(Shem was the ancestor of all the sons of Eber)이라는 21절의 말씀은, 여호와 하느님께서 택정하신 거룩한 선민의 가계, 곧 천손민족(天孫民族) 계보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필수적으로 중요한 계시이다. 하느님은 특별한 목적이 있으셔서 21절을 성경에 기록하셨다. “셈은 에벨 온 자손의 조상” 이라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셈의 후손들 가운데서도 특별히 셈의 셋째 아들 아르박삿의 손자 ‘에벨의 혈통’이 하느님께로부터 선택된 종족이라는 것이다. 셈에게 주신 약속은 ‘에벨의 자손’에서 이루어지도록 그 선택의 범위가 제한된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을 칼빈은 그의 창세기 주석에서 다음과 같이 잘 설명하고 있다. “셈은 에벨 온 자손의 조상이요: 셈의 아들들에 대하여 말하려는 기회에 모세는 간단하게 서론을 시사하고 있다. 그런 서론은 다른 사건들에 대하여는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한 것은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이 계열은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종족이기 때문에 하느님은 다른 민족들 가운데서 특별한 표로서 이 종족을 격리시키기를 원하고 계셨던 것이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것이 모세가 특별히 그를 가리켜서 ‘에벨 자손들의 조상’ 이라고 묘사하고 있는 이유가 되고 있다. 그것은 셈의 복이 무차별하게 그의 모든 자손들에게 내려오는 것이 아니고 다만 한 가족에게만 그것이 상속되어 남게 되었기 때문이다.”(존 칼빈 원저 성경주석, 서울: (주)성서원, 1999, P. 301) 셈을 “에벨 온 자손의 조상”으로만 부각시킨 까닭은 ‘에벨의 자손’이 선택된 종족이며, 셈의 복이 한 가족인 ‘에벨의 후손’에게만 승계되었기 때문이라는 설명에 주목하라. 여기에서 '셈의 복'이란 창세기 9장 26절에 기록된 것으로서 하느님이 '셈의 하느님'이 되신다는 복이다. 즉 천손으로 구별되는 복인 것이다. Joktan, who begat Almodad, Sheleph, Hazarmaveth, Jerah, Hadoram, Uzul, Diklah, Obal, Abimael, Shebah, Ophir, Havilah, and Jobab. 이 계시를 깨닫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 에벨은 24절에 나오며, 24절에 에벨이 나오기 전에 벌써 셈의 후손이 여럿이 나오는데, 다른 사람들은 그냥 이름만 대고 넘어가면서 에벨만은 셈의 후손 꼭대기에다 올려놓은 것은 ‘천손민족’ 즉, 선민이 에벨을 통해서 나오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에벨’이 그렇게 중요한 이유이다. 에벨은 셈의 사대손이지만 “천손민족의 조상”이기 때문에 21절에서 특별히 언급되고 있는 것이다. 아래는 영역 칼빈 주석에서 발췌한 창세기 10장 21절에 대한 해석이다. 21. Unto Shem also, the father of all the children of Eber. Moses, being about to speak of the sons of Shem, makes a brief introduction, which he had not done in reference to the others. Nor was it without reason; for since this was the race chosen by God, he wished to sever it from other nations by some special mark. This also is the reason why he expressly styles him the ‘father of the sons of Eber,’ and the elder brother of Japheth. For the benediction of Shem does not descend to all his grandchildren indiscriminately, but remains in one family. And although the grandchildren themselves of Eber declined from the true worship of God, so that the Lord might justly have disinherited them; yet the benediction was not extinguished, but only buried for a season, until Abraham was called, in honor of whom this singular dignity is ascribed to the race and name of Eber. For the same cause, mention is made of Japheth, in order that the promise may be confirmed, ‘God shall speak gently unto Japheth, that he may dwell in the tents of Shem.’ Shem is not here called the brother of Ham, inasmuch as the latter was cut off from the fraternal order, and was debarred his own right. Fraternity remained only between them and Japheth; because, although they were separated, God had engaged that he would cause them to return from this dissension into union. As it respects the name Eber, they who deny it to be a proper name, but deduce it from the word which signifies to pass over, are more than sufficiently refuted by this passage alone. 그렇다! 셈을 “에벨 온 자손의 조상”으로만 드러낸 것은 에벨의 혈통이 셈의 종통으로서 선택받은 종족으로 구별되었음을 계시하는 것이다. ‘에벨의 자손’이 셈의 많은 자손들 가운데에서 하느님께 선택된 종족이 되었다. 그러므로 이제 셈의 하느님은 ‘에벨 자손의 하느님’ 이시다. 그러면 ‘에벨의 자손’이란 누구인가? 에벨의 자손이라야 ‘벨렉’ 과 ‘욕단’ 두 형제뿐이다. “에벨은 두 아들을 낳고 하나의 이름을 벨렉이라 하였으니 그때에 세상이 나뉘었음이요 벨렉의 아우의 이름은 욕단이며”(창 10:25). 따라서 신적 선택을 받은 종족인 ‘에벨의 온 자손’(All the sons of Eber)이란 곧 ‘벨렉 자손’과 ‘욕단 자손’을 말하는 것이다. “셈은 에벨 온 자손의 조상” 이라고 했으니 셈은 곧 그 두 형제의 자손들의 조상이 된다는 말이요, 하느님은 ‘셈의 하느님’ 이라 했으니 곧 ‘벨렉 자손’의 하느님이시요, ‘욕단 자손’의 하느님이신 것이다. 여기에서 여호와 하느님은 선택된 백성이 하나가 아닌 둘인 근거를 분명히 예비하셨다. 우리는 여기서 두 사람의 자손이 선택된 종족이 된 사실을 보게 된다. 하느님은 분명히 두 종족을 선택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셈은 에벨 온 자손의 조상”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분명히 “온 자손의 조상”이라 했으니, 에벨의 두 아들 ‘벨렉 자손’과 ‘욕단 자손’이 모두 포함된 것이다. 따라서 선택의 계통을 따져보면 셈→아르박삿→셀라→에벨의 하느님으로서, ‘벨렉 자손’과 ‘욕단 자손’의 하느님이신 것이다! 이는 곧 ‘천손계보(天孫系譜)’라 하겠다. 즉 선민은 ‘벨렉계 선민’과 ‘욕단계 선민’, 두 계열의 백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들은 셈족의 현저한 두 가지(Branch)이다. 이제 선민은 셈의 후손 중에서 유대민족 하나뿐이라는 고정관념은 깨라! 그리하여 홍수 후 점차 희미해지던 셈계의 일신신앙은 에벨로부터 벨렉과 욕단 이 두 사람의 자손에게로 계승되었으며, 그들도 세월이 흐름에 따라 점차 일신신앙을 잊어버리고 하느님을 진정하게 경배하는 데서 물러나게 될지라도, 셈에게 내린 복만은 완전히 소멸되지 않고 이 두 사람의 후손에게 어느 한 때를 기다리며 매장되어 있었다. 바로 이것이 모세가 지금 이 특별히 숭고한 언급을 에벨과 그의 종족에게 돌리고 있는 목적이다. 그러니까 ‘에벨’은 창세기 10장 21절에 근거해 볼 때 셈 계열 내에서 두 계열의 천손민족, 곧 벨렉계 천손과 욕단계 천손으로 연결되는 가장 중요한 인물이므로 그의 이름이 셈의 족보에서 먼저 언급된 것이다. 그렇다면 여호와 하느님은 왜 셈의 맏아들도 아니고, 맏아들의 직계손도 아닌 셋째 아들 아르박삿의 손자 ‘에벨의 혈통’을 구별하여, 그의 두 아들인 ‘벨렉 자손’과 ‘욕단 자손’ 두 종족을 셈족의 현저한 가지로 함께 선택하셨을까? 무엇 때문에 하느님은 하나가 아닌 두 종족을 천손민족으로 선택하셨는가? 하느님은 불필요한 말씀을 하시지 않는다. 여기에는 반드시 하느님의 특별하신 뜻이 내재해 있는, 하느님의 특별 섭리가 있기 때문이다.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사 55:9). 그 오묘하신 하느님의 계획은 무엇일까? 향후 전개되는 구원사에 있어서 에벨의 자손인 벨렉계 천손민족과 욕단계 천손민족은 중요한 위치를 점할 것이었다. 전자를 통해서는 구원의 길을 여시고, 후자를 통해서는 구원사를 마무리 하신다! *벨렉계열 선민(천손)→ 먼저 사용하셨음→ 구원사를 여심→ 복음의 첫번째 주자 *욕단계열 선민(천손)→ 나중에 사용하심→ 구원사를 완성→ 복음의 마지막 주자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 창세기 10:21~31은 ‘욕단 계열의 천손민족’을 위주로 기록한 것이고, 창세기 11:10~26까지는 ‘벨렉 계열의 천손민족’을 중심으로 서술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