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서 글과 인연을 만나다. 46
[추억의 세배]
2020년의 구정, 그러고 보니 참 많이 살았다는 생각이 들면서 더불어 오래 살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것은 왜일까? 생의 욕심 때문일까? 아니면 평균 수명이 늘었기 때문일까? 내 어릴 적을 생각하면 지금의 내 나이 정도 어른들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오늘 날의 노인들의 모습,
60대는 늙었다고 하지 못하는 시대가 되어 버린 것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에 치아의 관리와 대체 치아에 관한 발전이 식습관의 변화를 가져오고, 그것이 수명을 늘리는데 상당한 이유를 제공하고 있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50대 중반에 손자에게 세뱃돈을 주면서 ‘내가 벌써 세배 돈을 주다니’하며 스스로 놀랐었는데, 이제는 손자와 며느리에게 세배 돈을 주는 것이 자연스러워 졌다. 그만큼 몸과 마음이 나이에 걸맞게 젖어들었다는 것일게다.
어릴 적, 연천군 군남면 진상리에 살던 시절, 명절이면 마을 전체를 돌아야 했다. 지금은 가족 들이나 아주 가까운 분들이 아니면 세배라는 풍습 보다 신년 회 같은 모임으로 대체하고 또한 식사도 식당 같은 곳을 이용하고 있으니 세배라는 말조차도 어쩌면 사라질 언어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하여튼 마을을 다 돌며 세배를 하면 어른들은 먹는 것 보다는 세배 돈을 주셨다. 십 원짜리 지전(그 시절의 십 원 지전은 붉은 색이었다는 기억이다.) 그리고 그 돈은 우리에게 큰 용돈 구실을 했는데, 그 중에 한 어른의 집의 할아버지는 우리가 세배를 하면 오십 원을 주셨다. 오십 원, 그 돈이면 전곡 읍에 나가서 자장면 한 그릇을 먹고(삼십 원) 만화방에서 실컷 만화를 볼 수 있을 정도의 돈이다.
그러니 명절에 마을 아이들에게 가장 선호하는 댁이 바로 이 어른의 댁이었는데, 그것도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그러니까 아마 4-5년 정도를 그렇게 했는데, 바로 초등학교 입학 한 후 졸업하는 해까지였던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그 다음에 세배를 가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중학생이 된 후에는 의무적인 세배로 갔던 것인데,
졸업학년에 돌아온 명절, 역시 오십 원의 유혹은 걸음을 서두르게 했고, 몇 친구와 함께 가서 세배를 드렸는데, 어른께서 물으신다. “너희가 몇 학년이냐?” 우리는 대답했다. “올해 중학생이 됩니다.” 그러자 어른께서 “그럼 이제 너희도 대장부가 되었구나.” 하시면서 술상을 차려오게 하시더니 한 잔씩 따라주시며 “이제 너희도 술을 배워야 할 나이다.” 하시는 것 아닌가. 세배 돈은 주지 않으셨다.
당시의 어른들은 아이들이 술을 배우는 것은 어른 앞에서 배워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다. 하긴 나는 어릴 적부터 제사 후에 마시는 음복이라는 이름의 술을 마셨고, 특히 우리 집은 세 개면에 유일하게 있는 잡화가게(쌀, 술, 연탄, 그리고 신문배달까지)를 했기에 술은 자주 대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열 말들이 항아리에 막걸리를 받아 놓으면 그 위에 거품이 오르는데, 어머니는 그 거품을 거두어 솥에 넣고 당원이나 사카린을 섞어 끓여 주시는 것을 마셨으니, 어쩌면 내가 지금도 술을 즐기는 것은 어머니의 가르침(?)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오늘도 나는 깨끗한 편지 봉투를 꺼내어 책상위에 놓는다. 두 며느리에게 줄 세배 돈, 그리고 손자에게 줄 세배 돈, 얼마씩을 넣을까 생각한다. 물론 두 며느리에게 주는 세배 돈은 매년 동일한 금액이다. 하지만 손자는 올 해 중 3학년이 되는데, 작년 보다 조금 올려 주어야 하지 않을까?
잘 생각하고 결정할 일이다. 잘못 계산하면 내 한 달 용돈이 세배 돈으로 내 곁을 떠날 수 있을 것 같아서, 하긴 그 만큼 아들들의 주머니가 헐렁해 지는 것이니, 굳이 따질 일은 아니지만 말이다.
첫댓글 설날이 되면 세배돈 생각부터 먼저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릴적에는 누구나 할것없이 그랬을 겁니다.
외항선을 타시던 삼촌은 용돈을 두둑히 챙겨 주셨는데
워낙 술을 좋아하셔서 주고도 또 주는 일도 있었지요.
그런 날이면 대박 터져 며칠 동안이나 즐거워서 난리가 난 거지요.
어머니께는 모른척하고 다 써 버렸던 기억들이며 ..
세월이 이렇게 지나도 삼촌 모습이 떠 오릅니다.
40대 초에 불의의 사고로 돌아가시고
얼마나 슬펐든지
교실에서도 울고 있었을 정도였으니간요.
설날 세배도 하지만 논에다 물을 대고 썰매를 탄다고 정신이 없었지요.
눈이 내려 녹으면서 얼면 백사장도 아주 양호한 썰매장이 되었던 기억이 납니다.
썰매, 자급자족했지요. 철사로 날을 삼아 타던 것, 외발 썰매,
그리고 요소비료 포대를 이용해서 눈썰매를 타기도 했고요.
명절 잘 지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