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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오늘의 좋은 시 해설】 맹문재
손톱달
공광규
단풍나무도 벚나무도
화살나무도 산수국도 아직 잎을 내지 않은
제천 주룬산 이른 봄
리솜포레스트 리조트 연못에는
벌써 이틀째 개구리가 운다
오래된 소나무와 전나무가 푸른 계곡에
별장이 들어선
지붕 위로 별똥별이 쏟아지는 산등성이
창밖에 음력 초닷새 손톱달이 떠 있다
예쁜 손톱을 가졌던
먼저 별이 된 사람을 생각하다가 그만둔다
그는 죽어서도 나를 할퀴고 있다
바위와 고개가 많은 이곳 계곡에는
하늘바람쥐와 오색딱따구리도 있고
고라니와 꽃사슴도 있다는데
그가 없는 밤이니
어제도 오늘도 나와 놀아주지 않는다
그가 없는 봄이니
바위 아래 핀 수선화도 부연 바위취 군락도
빈 가지에서 우는 새소리도
모두 소용없게 되었다
(『한국동서문학』, 2021년 여름호)
위의 작품의 화자는 리조트의 창밖으로 떠 있는 “음력 초닷새 손톱달”을 바라보다가 한 사람을 그리워한다. 예쁜 손톱을 가졌던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별이 되어 있다. 화자는 그 사람이 “죽어서도 나를 할퀴고 있다”라고 고백할 정도로 그와 인연이 깊다. 화자는 그 사람을 생각하다가 그만둔다. 그 이유는 그가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화자가 그에 대한 생각을 끊는다고 해서 그리움을 지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사랑이다.
사랑이란 다른 사람을 그리워하고 좋아하는 마음이다. 그러므로 존재하지 않는 인연에 대한 마음은 애틋할 수밖에 없다. 다시 만나지 못하는 운명으로 인한 슬픔에 가슴이 할퀴어지는 것이다. 김소월 시인이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허공중에 헤어진 이름이여!/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초혼」)라고 애타게 부른 것도 그 모습이다. 화자가 “그가 없는 봄이니/바위 아래 핀 수선화도 부연 바위취 군락도/빈 가지에서 우는 새소리도/모두 소용없게 되었다”고 절망하는 것도 그러하다. 음력 초닷새의 손톱달은 가늘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화자의 마음은 점점 부풀어 오른다. 그것이 사랑이다.
오실로스코프
권위상
1.
사내가 왔다가 갔다 낯선 사내가 왔다가 두리번거리다 돌아갔다 같은 생김새의 사내가 또 왔다가 같은 형태를 반복하며 돌아갔다 비스듬한 얼굴과 일자형 뒷머리를 한 아랍형 사내 그가 오지 않으면 모든 역사는 종료된다 슬픈 음악과 슬픔이 가득 찬 행위가 시작되리라 오실로스코프
무단횡단 하는 자를 피하려 밟은 스키드 마크의 펄스
지구의 한쪽을 쓸어담는 태풍의 펄스
2.
사내가 나를 스칠 때 펄스는 순간적으로 널을 뛰었다 무수한 빗금의 파형들 심장은 요동치고 역류하는 피에 가속도가 붙는다 파형은 흐트러지고 비상벨이 울린다 그 사이 그 사내는 돌아가 버렸다
끊어졌다 붙었다 불안하게 펼쳐지던 대낮 갑자기 게릴라 소나기가 퍼붓는다 혀 밑에 온도가 끓어 넘친다 낯선 문자가 쏟아지고 온몸을 떤다
숨을 고르자 비로소 뚜벅뚜벅 걸어오는 첨두치
엎어져 이마를 찧을 듯, 어머니의 굽은 등 같은 펄스가 걸어나온다 해를 본 적이 없는 어머니는 입관해서야 비로소 등을 폈다 우두둑 인고의 파형을 깨뜨리는 펄스
(『시에』, 202년 겨울호)
“오실로스코프”는 전압이나 전류 따위의 시간적 변화가 빠른 현상을 직접 눈으로 관찰하는 장치이다. 일정 기간 전류의 변화를 곡선으로 나타내는 장치로 심전도 검사기를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다.
위의 작품에서는 “오실로스코프”에 나타난 아주 짧은 시간 동안 흐르는 전류인 “펄스”를 “사내”로 비유하고 있다. 예를 들어 심전도 검사를 할 때 “펄스”의 모습을 “사내가 왔다가 갔다 낯선 사내가 왔다가 두리번거리다 돌아갔다 같은 생김새의 사내가 또 왔다가 같은 형태를 반복하며 돌아갔다”라고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비유 자체도 눈길을 끌지만, “그가 오지 않으면 모든 역사는 종료된다”는 화자의 인식이 주목된다. 곧 우리의 심장이 뛰지 않는다는 것은 그가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슬픈 음악과 슬픔이 가득 찬 행위가 시작”될 것이다.
화자는 “펄스”가 오지 않는 것을 “어머니”의 정황을 통해 경험했다. 유한한 존재에게 삶과 죽음이란 한순간의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어진 순간이란 영원한 시간이다.
자전거를 타고 가는 하수오
김은정
오이꽃 호박꽃 등 긁어주는 초록 담장 옆에
서사시를 쓰는 만년필 촉처럼 자기를 노출한
역류성 축원 함유한 칠흑 발복의 개요
어찌 하(何), 머리 수(首), 까마귀 오(烏)
백발의 왕관을 내려놓아라!
금의환향 기마병처럼 하늘을 찌르는 사기
뾰족한 수, 연둣빛 덩굴 첫 가닥 그 야성
굴삭 물레 돌리듯 가락바퀴 자발성 무구하다.
백발의 왕관을 내려놓아라!
양성 주광 그 본성 피리 불듯 입에 물고
지표에 나란히 놓인 두 개의 고리 행성 위
미로로 가는 페가수스 안장 장착한 의자 아래
역행하는 시간의 색채 그 마술의 침출
과연 시공을 거스르는 부라보 흑발심,
티 없는 역모다.
(『푸른사상』, 2021년 여름호)
“하수오(何首烏)”는 마디풀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 덩굴성 식물이다. 뿌리는 옆으로 뻗고, 8~9월에 하얀색 꽃이 피고, 덩이뿌리는 한약재로 쓰인다. 위의 작품에서는 “하수오”를 마치 전진하는 담쟁이처럼 그리면서, 그 모습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오이꽃 호박꽃 등 긁어주는 초록 담장 옆에” 모습을 드러낸 “하수오”를 “역류성 축원 함유한 칠흑 발복의 개요”로 정의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금의환향 기마병처럼 하늘을 찌르는 사기”는 물론 “뾰족한 수, 연둣빛 덩굴 첫 가닥 그 야성”을 가진 존재로 인식하고 있다. 곧 “티 없는 역모”를 시행하는 주체로 바라보는 것이다.
시인의 시 쓰기야말로 “흑발심”을 펼치는 일이다. 기존의 가치와 제도와 관습에 안주하지 않고 맞서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득권이 만들어 놓은 금기 영역을 깨트리려고 하는 “서사시를 쓰는 만년필 촉”의 외침은 힘차게 들린다. “백발의 왕관을 내려놓아라!”.
화학 변화
김정원
내가 밥상머리에서 두 여자에게 두 번 호되게 혼나고 두 가지 버릇을 고쳤다
아주 어릴 적 아침 밥상 앞에 앉아 할아버지보다 먼저 숟가락을 든 나를 보고 어머니가 작심한 듯 꾸짖었다
“애야, 네 행동을 다른 사람들이 보면 욕한다. 버릇없는 놈, 배워먹지 못한 자식이라고. 할아버지가 숟가락을 든 다음에 네가 숟가락을 들어야 하고, 조기에 먼저 손이 가선 안 된다.”
그 후로 나는 어른은 물론 친구보다 먼저 숟가락을 들거나 고기를 먹지 않았다 또한, 그들보다 먼저 숟가락을 놓고 밥상을 떠나지 않았고
혼인하고 부모를 떠나 작은 전세아파트에서 사는 어느 날, 아내가 열심히 저녁밥을 차리는데 수저통에서 내 숟가락만 챙겨 식탁 앞에 앉은 나를 보고 기막힌 듯 비꼬았다
“참 치사하네. 배려심이라곤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가 없어. 막내라서 그래?”
그 뒤로 맏딸인 아내와 아이들의 숟가락 젓가락을 먼저 식탁 위에 가지런히 올려놓고 내 것을 챙기는 나에겐
밥상머리에서 두 여자에게 따끔하게 혼난 이 두 가지 일이 가장 큰 서러움이었고, 아직껏 이보다 더 깊이 마음에 새겨 몸에 배도록 버릇을 고친 훈육도, 인성교육도 받지 못했다
(『사람의깊이』 제25호, 2021년)
“화학 변화”란 어떤 물질이 처음의 성질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물질로 변하는 현상이다. 위의 작품의 화자는 자신의 삶에서 일어났던 두 가지 사례를 소개하고 있는데, 그 우선은 어머니의 훈육이었다. 화자는 할아버지와 함께 식사를 할 때 먼저 숟가락을 들었고, 귀한 음식에도 먼저 손을 대었다. 그러자 어머니는 “버릇없는 놈”이라고 꾸짖었다. 다음으로는 아내의 나무람이었다. 결혼한 뒤 화자는 아내와 식사를 할 때 자신의 숟가락만 챙기었다. 그러자 아내는 “배려심이라곤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가 없”다고 비꼬았다.
화자는 “밥상머리에서 두 여자에게 따끔하게 혼난” 일을 마음에 새기고 자신의 버릇을 고쳤다. 예의와 배려심이 없는 자신의 행동을 올바르게 바꾼 것이다. 웃어른이 수저를 든 뒤 식사하기, 먼저 식사를 마치고 자리를 뜨지 않기, 너무 서둘러 먹거나 지나치게 늦게 먹지 않기 등의 식사 예절은 필요하다. 자존감을 가지고 어른을 공경하고, 가족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봄날의 이천 원
박경자
출근 시간 지나 지하철 2호선에 남자가 나타났다
핸드 캐리를 끌고 미늘 달린 긴 플라스틱 꼬챙이 손에 들고 있다
싱크대 화장실 할 것 없이 막힌 것은 모두 뚫어준다고
단돈 이천 원이면 막힌 속까지 시원하게 뚫는다는데
영등포 지나 한강을 건너는 창밖에는 아직 강물이 풀리지 않고 있다
남자의 눈빛이 흔들린다
이천 원으로 자신의 막힌 속까지 뚫지는 못하는 것일까
다리미 자국이 반질거리는 날 선 바지, 한때 대기업에 근무했을지도 모르는
저 어색한 남자
냄새를 기억하는 꼬챙이가 대학 등록금을 뚫어야 하고
아이들 학원비를 뚫어야 하고 주방 보조를 하는 아내의 시큰거리는 손목을
건져 올려야 하는 것은 아닌지
남자의 손에는 아직 뚫지 못한 이천 원들이 많이 남아 있다
강 위를 반짝이는 저 봄빛 속으로
철교를 지나가는 하늘과 구름과 빌딩 사이로
그 어떤 꼬챙이로도 끌려 나오지 못하는 곳으로
추락할 것 같은 남자를 위하여
내 손에서 봄날의 이천 원이 날개를 단다
(『사람의 문학』 2021년 봄호)
작품의 화자는 지하철에 탔다가 물건을 파는 한 남자를 보게 된다. 그는 “핸드 캐리를 끌고 미늘 달린 긴 플라스틱 꼬챙이 손에 들고” “싱크대 화장실 할 것 없이 막힌 것은 모두 뚫어준다고/단돈 이천 원이면 막힌 속까지 시원하게 뚫”어준다고 홍보한다. 화자는 그의 말에 믿음이 가지 않지만, 자꾸 귀를 기울인다. 그만큼 막힌 상황들이 뚫리기를 바라는 마음이 절실한 것이다.
그 남자는 이천 원으로 자신의 막힌 속을 뚫지 못하고 있다. 지하철 창밖으로 보이는 한강의 강물도 아직 풀리지 않았다. 화자는 눈빛이 흔들리고 있는 그를 바라보며 자식들의 “대학 등록금을 뚫”기를, “아이들 학원비를 뚫”기를 희망한다. 또한 “주방 보조를 하는 아내의 시큰거리는 손목을/건져 올”릴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화자는 “어떤 꼬챙이로도 끌려 나오지 못하는 곳으로/추락할 것 같은 남자를 위하여” 이천 원을 꺼낸다. 그가 새봄에 날개를 달 수 있기를 응원하는 것이다.
채광석
박관서
당신이 가고 나서 비루해졌다
민중문학에서 민중이 슬슬 지워졌고
노동문학을 하던 이들이 교수가 되거나
평론가가 되어 노동문학을 더 지독하게
눈을 깔고 내려 보다가 밀쳐 두었다
사라진 건 없는 데 사라진 민족문학은
한국문학이 되었다 이미 말로 일국을 이룬
통일문학이야 진즉에 사라져
세계문학이 되었다 국경 없는 욕망이 되어
일 년이면 이천여 명이 죽어 나가는
노동의 검은 눈빛 위에 오방색 감탕
신선로가 되었다 뜨겁지 않게 뜨거운
문학의 언어를 말아 삼키다가 간신히
당신을 보았다 새파란 불꽃이었다
(『주변인과 문학』, 2021년 가을호)
1980년대 말 소련 및 동구 사회주의가 무너지고 국내에 문민정부가 출범하면서 한국의 민중문학은 급격히 위축되었다. 1980년대 민중문학의 전위적인 위치에 있던 노동문학은 물론 민족문학, 통일문학 등이 뿌리조차 흔들리게 된 것이다. “민중문학에서 민중이 슬슬 지워졌고”, “사라진 건 없는 데 사라진 민족문학은/한국문학이 되었다”. “말로 일국을 이룬/통일문학”이 “진즉에 사라져/세계문학이” 되기도 했다.
작품의 화자는 그 상황을 “당신이 가고 나서 비루해졌다”고 진단한다. 그리고 1년에 2천여 명이 죽어 나가는 노동자들의 억울한 눈빛을 외면한 채 뜨겁지 않은 언어로 작품들을 쓰고 있는 한국 문단을 직시한다. 당신의 “새파란 불꽃”을 현재의 민중문학에 비추어주는 것이다.
채광석은(1948~1987)은 민중적 민족문학론을 제기하며 1980년대 평론계의 한 축을 이끌었다. 평론집으로 『민족문학의 흐름』, 시집으로 『밧줄을 타며』, 사회문화론집으로 『물길처럼 불길처럼』 등이 있다. 1974년 오둘둘사건으로 2년 6개월 옥고를 치렀고, 1980년 서울의 봄 이후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했다.
사과를 베어 물다
박설희
사각, 밝게 웃으며 한 입 베어 문다
어제 마음의 준비를 하라잖아, 온통 헐은 대장 어디선가 피가 터져 발만 동동 구르는데 급사할 수도 있다고
과육이 으깨지는 소리가 나며 입 주위로 과즙이 번진다
응급실이든 중환자실이든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게 일상이야, 어제도 의사 붙잡고 살려달라고 애원했어
창백한 입술이 촉촉이 젖어들며 혀와 말의 길이 부드럽다
바로 옆 침대가 비어 있어서 어디 갔느냐고 물었더니 갔다고 그래, 집에 갔느냐고 했더니 돌아갔다고, 처음 온 곳으로 갔다고
입 안 가득 베어 문다, 대학병원에서 혈액암으로 이 년째 투병 중인 아이를 둔 엄마가 희망을 베어 물 듯 사각사각 맛나게 사과를
사과는 줄어들고 입 안의 물기는 많아지고 사과향이 점차 주변에 퍼지면서 으깨지는 사과는 말이 되고, 활기가 되고, 희망이 되어 스며들고
어제도 같은 중환자실에서 둘이나 갔지만, 그래도 우리 애는 살아 있어
멍든 것처럼 시퍼런 사과를 마지막으로 베어 물고 으적으적 씹다가 꿀꺽 삼키고 자리를 털며 일어난다, 면회 시간이 다 되었다며
(『생명과문학』, 2021년 여름호)
위의 작품에서 “어제도 같은 중환자실에서 둘이나 갔지만, 그래도 우리 애는 살아 있”다는 엄마의 말은 슬프면서도 희망적이다. 그리하여 혈액암으로 2년째 투병 중인 아이를 둔 엄마가 맛있게 사과를 먹는 모습을 응원한다. 사과의 물기와 향기가 엄마의 몸에 스며들어 아이를 살리는 힘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어제 마음의 준비를 하라잖아, 온통 헐은 대장 어디선가 피가 터져 발만 동동 구르는데 급사할 수도 있다”는 의사의 말을 들은 엄마는 불안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응급실이든 중환자실이든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게 일상이야, 어제도 의사 붙잡고 살려 달라고 애원”한 엄마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된다. 엄마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아이를 살려내려고 한다. 이 절박한 사랑이 있기에 사과꽃이 피는 것이다.
대리모
백무산
아이들 머리통만 한 배 하나 받아든다
어디서 달려왔는지
불룩한 배는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다
열매가 달려온 곳을 떠올려본다
터무니없을 만큼 큰 열매를 매달았을 나무를
간신히 떠올려본다 열매가 달려있던 자리를
바람에 몸을 흔들어보지도 못하는 나무
햇살에 머리를 풀어헤쳐 보지도 못하는 나무
쇠파이프에 묶이고 쇠줄에 감긴 나무
자기 몸을 자기가 가질 수 없는 나무
열매의 무게에 찢어지는 팔을 가진 나무
겨울 언 땅에 발등이 터져 있을 나무
생식기만 있는 나무
나무를 기억하지 못하는 열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오직 접시 위에 놓이기만을 위해 달려온 길
칼을 들다 나는 몇 번이고 손이 저리다
(『울산작가』 31호, 2021)
어느덧 우리 사회는 자본주의 체제가 추구하는 이윤에 경도되어 과일까지 학대하고 있다. 공장식으로 사육되는 가축의 경우 항생제 섞인 사료를 먹고, 운동할 자유도 잠을 자거나 휴식을 취할 자유도 갖지 못하는데, 과일도 마찬가지이다.
작품의 화자는 “아이들 머리통만 한 배 하나 받아”들고 그 배가 달려온 곳을 떠올린다. 터무니없을 만큼 큰 배를 온몸으로 매달았을 나무를 떠올려보는 것이다. 배나무는 이윤 창출을 의도하는 자본주의 체제의 명령에 따라 “바람에 몸을 흔들어보지도 못하”고, “햇살에 머리를 풀어헤쳐 보지도 못하”고, “쇠파이프에 묶이고 쇠줄에 감긴” 상태로 열매를 달고 버티었다. 생식기만 있고, 자기 몸을 갖지 못한 것이다.
화자는 학대받은 배나무가 너무 안타까워 접시 위에 놓인 배에 칼을 대지 못하고 있다. 손이 저리는 것을 느낀다. 이 세계에서 학대받는 대상이 배 같은 과일과 가축뿐이겠는가.
윤이상의 바다
백수인
고국은 그를
독일에서 납치해 와 서대문형무소에 처넣었다
2년 후 세계 이목이 두려워
마지못해 풀어주며 독일로 내쫓았다
독일인으로 살면서도 통영 앞바다 그리워
유년의 파도 소리, 바람 소리를 먹물에 담가
큰 붓으로 눌러 그려 내어 클라리넷과 피아노 속에 넣었다
동피랑 언덕길 가을바람에 흔들리며 피어나던
쑥부쟁이, 구절초 꽃잎도 작은 붓으로 그려
플루트, 오보에, 바이올린, 첼로의 튼실한 줄로 삼았다
그래도 그립고 그리우면
뮌헨 시가지에 인당수 깊은 바닷물 채워 놓고
심청, 심학규, 뺑덕어미를 데려와 놀게 했다
칠월 칠석 통영의 하늘에서
은하수 건너 만나려던 견우와 직녀도
독일의 밤하늘에 그려 넣었다
고국을 그리다가
‘광주’를 부둥켜안고 울고 울다가
머나먼 타국에서 하늘로 가버린 그
이제는
통영 앞바다 반짝이는 물결 속에
살랑이는 바람 소리로 살아 있다
수자폰처럼 큰 귀가 우주의 소리를 모아 듣는
윤이상의 바다
(『푸른사상』 2021년 겨울호)
“윤이상”은 1917년 경남 산청에서 태어나 통영에서 자란 뒤 독일에서 활동하다가 타계한 세계적인 작곡가이다. 그는 1967년 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독일에서 납치”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국제적인 항의와 독일 정부의 도움으로 석방되었다.
위의 작품은 그가 음악 활동을 한 토대를 생각하게 한다. 비록 그가 독일 국적을 취득하고 대학교수로 재직하면서 활발하게 음악 활동을 했지만,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음악으로 승화한 면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다. “통영 앞바다 그리워/유년의 파도 소리, 바람 소리를” “클라리넷과 피아노 속에 넣”은 것이나, 오페라 <심청>에서 “그립고 그리우면/뮌헨 시가지에 인당수 깊은 바닷물 채워 놓고/심청, 심학규, 뺑덕어미를 데려와” 논 것이나, 그리고 관현악곡 <광주여 영원히>에서 “고국을 그리다가/‘광주’를 부둥켜안고 울고 울었”던 것이 그 예이다.
“윤이상”은 1995년 “머나먼 타국에서 하늘로 가버”렸다. 그렇지만 그는 “통영 앞바다 반짝이는 물결 속에/살랑이는 바람 소리로 살아 있다”. 그는 결코 고향을 버리지도 잊지도 않았다. 그의 고향 역시 그를 품고 있다. 그가 자라난 통영의 바다는 “수자폰처럼 큰 귀”로 그가 작곡한 “우주의 소리를 모아 듣는” 것이다.
기와불사
서홍관
절마당에 기와불사에 쓸 기와들이
가을볕을 쬐고 있다.
기와마다
소원성취
사업번창
수능만점
무병장수
그리고 행여 부처님 원력이 다른 집으로 갈까봐
주소까지 상세하다.
그러다 한 기와에 눈길이 머물렀다.
당신이 부처님입니다
(『사람의문학』 2021년 가을호)
“기와불사”는 사찰에서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일을 행하는 것의 한 가지로 법당의 지붕을 올릴 때 기왓장을 보시하는 것이다. 이외에도 사찰을 다시 세우는 중창불사, 범종을 주조하는 범종불사, 가사를 만들어 승려들에게 보시는 가사불사 등이 있다. “기와불사”도 다른 불사와 마찬가지로 보시하는 사람의 성명, 생년월일, 주소를 쓰고 “소원성취”, “사업번창”, “수능만점”, “무병장수” 등의 소원을 적는다.
중생들이 사찰을 찾는 이유는 수행을 통해 부처님의 가르침을 깨닫고 실천하려는 것이기보다는 복을 기원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행여 부처님 원력이 다른 집으로 갈까봐/주소까지 상세하”게 적는 행동은 이해된다. 중생들은 유한할 뿐만 아니라 한계를 가진 존재이기에 복을 비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작품의 화자가 한 기와에서 발견한 “당신이 부처입니다”라는 문구는 눈길을 끈다. 세상의 모든 존재가 평안하고 복을 받기를 바라는 마음이 곧 부처가 바라는 마음 아니겠는가.
우리 집 앞마당에 해바라기를 걸어놓았다
서화성
우리 집 앞마당에 키 작은 해바라기가 자라고 있었다
한 뼘쯤 더 자랐을까, 말수가 적은 아내는
해바라기가 자라는 액자를 가지는 게 소원이라며 중얼거렸다
손바닥만큼 자란 얼굴을 감당하기에 적당했으며
나는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팔월은 아직 멀었는데 거실 창문만큼 자라버린 해바라기.
이보다 살아 있는 액자를 본 적이 없었다
액자가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해바라기가 자라고 있었다
아내는 해바라기가 자기 키만큼 자라면 창문을 다시 만들자고 했다
나는 당신이 소원이라면 그러자고 했고
하룻밤이 지나 창문 틈을 비집고 자라 있었다
아내는 두 번째 소원이라고 말했다
창문이 두 배로 커졌을 때 아내는 이곳을 떠나겠다고 했다
어디로 가는지 물어보지 않았지만 궁금하지도 않았다
이런 일이 몇 년 전에도 여러 차례 있어서였을까,
나는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보름이 지나고 아내는 온종일 창문만 바라보다가 집을 나갔다
비가 내리는 날은 두 배로 자라 있었고
해바라기가 지붕까지 자랐으며 아내는 돌아오지 않았다
(『시와사상 』 2021년 겨울호)
아내가 “해바라기가 자라는 액자를 가지는 게 소원이라며 중얼거렸”을 때 작품의 화자는 가능하다고 말했다. “손바닥만큼 자란 얼굴을 감당하기에 적당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해바라기는 “팔월은 아직 멀었는데 거실 창문만큼 자라”났다. 그야말로 살아 있는 액자가 되어 “액자가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해바라기가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아내는 해바라기가 자신이 원하지 않는 만큼 자라났기 때문에 만족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아내는 “해바라기가 자기 키만큼 자라면 창문을 다시 만들자고 했”다. 그렇지만 해바라기는 “하룻밤이 지나 창문 틈을 비집고 자라”났다. 아내는 또다시 만족할 수 없었다.
해바라기는 사람이 기대하는 만큼 자라나는 존재가 아니다. 그런데도 인간은 자신의 기대치대로 맞추어주길 요구한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아내처럼 “집을 나”가고 만다.
오달만
손택수
집안에 대대로 내려오던 논을 아버지는
물방실이라고 불렀다
논에 물이 들어오면 논이 방실방실 웃는다고
그걸 보는 사람도 흐뭇하게 방실이가 되고 만다고
물방실이를 이야기할 때는
물방개가 그리는 파문 같은 것이 입가를 맴돈다
한번은 아버지의 노름이 들통 나서
갓 젖을 땐 나를 업고 큰댁에서 쫓겨나게 되었는데
저녁나절 모를 흔들고 가는 바람처럼 이쁜 게 있간디
아무리 엄하신 할아버지라고 별 수 있간
그 논흙을 떠와 집벽을 바르고
대나무 뼈에 발라 지붕에 얹기도 했던
아버지는 물방실이 앞에서 딱 한 번 운 적이 있다
속 모르고 방실거리는 물방실이를 판 날이었다
모내기하던 날 발바닥 오목한 데 찰싹 달라붙던
찰진 흙가슴팍을 다시 어디서 만날 수 있을 것인가
국(國)이나 도(道)나 군(郡)이나 면(面)이나 리(里) 같은
행정 단위의 지명들에선 도무지 느낄 수 없는 실감
이제 나의 땅이 아닌 물방실이에 관해 듣다 보면
난민도 아닌 내가 왜 난민인 줄 알겠다
내란과 외침을 경험하지 못한 내가
북간도로 블라디보스톡으로 사할린으로
유랑하던 사람들처럼 떠돌고 있는 줄 알겠다
(『딩아돌하』2021년 겨울호)
“오달만”(odalmann)은 스칸디나비아반도에서 지칭하는 자유인이다. 화가의 작품이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갔다고 하더라도 제작자가 그대로 유지되듯이 “오달만”은 토지를 매각하거나 몰수당해도 소멸하지 않는 권리를 갖고 있다. 토지가 팔렸다고 하더라도 그 땅에 밴 체취, 분위기, 이야기, 추억 등은 팔릴 수 없는 것이다.
작품의 화자는 집안 대대로 내려오던 논을 아버지가 “물방실”로 불렀던 것을 떠올린다. “논에 물이 들어오면 논이 방실방실 웃는다”고 이름 지어 부른 것이었다. 아버지는 “물방실이를 이야기할 때는/물방개가 그리는 파문 같은 것이 입가를 맴”돌 정도로 신났다. 그러했던 아버지가 “물방실이 앞에서 딱 한 번 운 적이 있”는데, 그 논을 판 날이었다. 아버지는 “모내기하던 날 발바닥 오목한 데 찰싹 달라붙던/찰진 흙가슴팍을 다시 어디서 만날 수 있을 것인가” 하며 아쉬워했다. 화자는 아버지의 그 이야기를 떠올리면서 고향을 떠나온 자신이 난민인 것을, “오달만”인 것을 다시금 깨닫는다.
아내가 웃던 날의 맹세
신좌섭
오랜 세월 그늘진 아내 얼굴에 화색이 돈다.
밥을 짓다 농을 하다 깔깔 웃으니
반가운 마음보다 걱정이 앞선다.
늘그막에 바람이 들었나?
무심히 타박하니 또 웃는다.
무의식 잠겼던 기억이 떠오른다.
풍랑에 난파선 떠오르듯,
지난밤 꿈에 아이를 만났다 했지
멀리 떠난 아일 꿈에 봤다고
마냥 웃는 걸 보니 시샘이 난다.
아이는 왜 내 꿈엔 오지 않는 걸까?
영문 모르고 가라앉은 배에
아이를 묻은 부모의 세월은
어떤 걸까? 그들 꿈에도
아이들이 나와 주면 얼마나 좋을까
손잡고 함께 거리를 걷고 깔깔
웃어대고 그렇게 찾아와서
놀아주면 얼마나 좋을까?
배 잠기는 광경을 보며 내 아이가
아니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가슴
쓸어내리던 날을 후회한다.
다시는 그런 생각 하지 않으리라
내 아이가 아니어서라는 말은
평생 입에 올리지 않으리라
얼마나 어리석은 말인가
내 아이가 아니어서라는 말은,
요행처럼 살아주어 다행이란 말은,
막아주지도 지켜주지도 못하면서
요행처럼 살아주어 고맙다는 말은
다시는 떠올리지 않으리라.
(『신생』, 2021년 여름호)
작품의 화자는 아내가 “밥을 짓다 농을 하다 깔깔 웃으니/반가운 마음보다 걱정이 앞선다”. 그 이유는 아내는 오랜 세월 동안 그늘진 얼굴이었는데 근거 없이 화색이 돌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늘그막에 바람이 들었나?”하고 무심히 타박을 해보는데도 아내는 웃음을 그치지 않는다. 화자는 그 순간 “멀리 떠난 아일 꿈에 봤다고” 한 아내의 말을 떠올린다. 화자는 “아이는 왜 내 꿈엔 오지 않는 걸까?”라며 시샘을 내기도 한다.
그러면서 화자는 “영문 모르고 가라앉은 배에/아이를 묻은 부모의 세월은/어떤 걸까?”라고 궁금해한다. 아울러 그들의 꿈에도 아이들이 찾아와 주면 얼마나 좋을까, “손잡고 함께 거리를 걷고 깔깔/웃어대고 그렇게 찾아와서/놀아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희망한다. 아울러 배가 잠기는 장면을 보며 “내 아이가/아니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가슴/쓸어내리던 날을 후회한다”. 자신의 이기심을 반성하며 “다시는 그런 생각하지 않으리라”고 다짐하는 것이다.
“가라앉은 배”는 2014년 4월 16일 침몰한 여객선 세월호이다. 세월호는 4월 18일 완전히 침몰해 안산시 단원고등학교 학생을 포함해 476명의 탑승객 중에서 미수습자 5명을 포함해 304명이 사망했다. 침몰한 배에서 하늘나라로 간 아이들은 얼마나 무서웠을까. 그 아이들 부모의 마음은 지금도 얼마나 아플까.
어떤 해후
안준철
전날 사진기를 두고 와서
담아 가지 못한 작은 이파리 한 장
그 위에 떨어진 물방울 몇 개
너무나도 작아서
차마 눈에서 지울 수 없었던
반짝이지 않아서
더 순한 눈망울 같았던
남고사 가는 길 산책로 난간
하루가 지났는데 거기 그대로 있을까
바람에 날아갔을까 햇볕에 말랐을까
새벽같이 일어나 달려가보니
아, 그 자리에 있었다!
왜 오지 않을까 왜 오지 못할까
나보다도 더 애를 태웠던지
하루 만에 바짝 마른 모습으로
할머니가 된 소녀를
오래오래 바라보다가 돌아왔다
(『사람의 깊이』 제25호, 2021년)
작품의 화자는 사진기를 집에 두고 와서 담지 못한 “작은 이파리 한 장/그 위에 떨어진 물방울 몇 개”를 잊지 못한다. “너무나도 작아서/차마 눈에서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반짝이지 않아서/더 순한 눈망울”이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화자는 하루가 지났는데 “거기 그대로 있을까/바람에 날아갔을까 햇볕에 말랐을까”, 걱정하며 새벽같이 달려가 보았다.
화자의 간절함이 전해졌는지, 그 물방울은 “그 자리에 있었다”. 화자는 그 물방울에 대한 고마운 마음으로 좀 더 가까이 다가가 들여다보았다. “왜 오지 않을까 왜 오지 못할까/나보다도 더 애를 태웠던지/하루 만에 바짝 마른 모습”이 마치 “할머니가 된 소녀” 같았다.
우연히 마주친 작은 물방울조차 무시하지 않고 귀한 인연의 상대로 여기는 화자의 마음은 따스하다. 오래오래 바라보다가 집으로 돌아온 화자의 마음에는 물방울들의 순한 눈망울이 그득하다.
소나무 방정식
오새미
벼랑 끝에 매달린 소나무 한 그루
어쩌다 저 낭떠러지에 터를 잡았을까
모진 바람도
단단한 뿌리를 흔들지 못한다
세파에 부대껴 온몸이 근육질인 남자
등이 솟고 키까지 작아
뙤약볕이 그의 일터
죽기 살기로 암벽을 붙든다
타들어가는 갈증과 씨름하고
아득한 절벽을 마주본다
위기의 벼랑에서
짓눌리는 어깨가 무겁다
한 걸음 한 걸음 바위 속을 파고들 때마다
비상을 꿈꾸는 독수리 날개를 달고
천길 벼랑을 맨발로
뛰어내리고 싶었을 것이다
깎아지른 절벽에서 얻은 방정식은
폭풍과 강수량이 변수
뿌리와 바위는 등식
가느다란 촉수로 움켜쥐는
그 억센 힘
아무도 끌어내릴 수가 없다
바위를 더듬어 좌표를 새기는 두 손
소나무 힘줄은 벼랑에서 나온다
(『푸른사상』 2021년 겨울호)
작품의 화자는 벼랑 끝에 매달린 소나무 한 그루를 자신의 아버지로 비유하고, “모진 바람도/단단한 뿌리를 흔들지 못한다”고 인식하고 있다. 그 근거로 세파에 부대낀 아버지가 뙤약볕이 일터인 곳에서 “죽기 살기로 암벽을 붙든” 것을 들고 있다.
“타들어 가는 갈증과 씨름하고/아득한 절벽을 마주”보고, “위기의 벼랑에서/짓눌리는 어깨가 무”거운 아버지는 마침내 방정식을 얻었다. 방정식은 미지수에 특정한 값을 주었을 때 성립하는 등식이다. 화자는 “가느다란 촉수로 움켜쥐는/그 억센 힘/아무도 끌어내릴 수가 없”는 미지수를 파악해내었다. “폭풍과 강수량”이 변수이고, “뿌리와 바위”가 등식이다. 그리하여 “한 걸음 한 걸음 바위 속을 파고”드는 아버지를 새롭게 바라보다가 마침내 소나무의 힘줄이 벼랑에서 나오는 것을 발견한다.
뻐꾸기는 왜 아프리카로 날아가나
원종태
어떤 도요새 무리는 호주나 뉴질랜드에서 출발해 적도를 건너 우리나라 갯벌에 앉는다 얼마간 지친 몸을 추스리고는 땅이 녹고 봄이 폭발하는 시베리아 알래스카 번식지로 날아간다
독수리는 고비사막 태양의 계곡이 얼어붙을 때 몽골 평원의 상승 기류를 타고 한반도에 겨울을 몰고 온다 왔다가 날개에 봄을 싣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철새들은 주로 남북으로 위도 이동을 하는데 뻐꾸기라는 족속은 동서로 경도 이동을 한다 지구의 자전을 거슬러 먼 곳 아프리카로 간다 뒷산에서 함께 울던 뻐꾸기가 황해를 건너 중국 인도 미얀마 아라비아해를 넘어 아프리카 동부까지 1만 2천 킬로미터를 날아갔다 가을에 떠나 겨울에 도착했다 이곳은 겨울인데 그곳은 사막이다 봄에 떠나 여름에 역순으로 돌아올 것이다
뻐꾸기는 왜 아프리카로 날아가나 수백 만 년 전 우리가 하나의 대륙이었던 때를 기억하기 때문일까 당신이 그곳에 판 우물이 아직도 빛나고 있기 때문일까 고행 길을 떠나는 성자처럼 뻐꾸기는 가고 또 온다 도무지 종잡을 수 없고 알 수 없는 저 길 뻐꾸기 로드를 생각하다가 숲을 흔드는 새들의 대화를 꽃이 피어나는 소리를 섬 위를 지나는 달빛을 바람에 줄을 던져 허공을 날아가는 거미를 어떻게 노래하고 그리고 쓸 수 있겠는가
오늘도 수천 수만 마리의 새떼가 날아가려고 겨드랑이에 웅얼웅얼 꽃을 심는다
(『경남작가』, 2021년 하반기호)
작품의 화자가 제시한 정보에 따르면 “도요새 무리는 호주나 뉴질랜드에서 출발해 적도를 건너 우리나라 갯벌에” 도착해 살다가 “땅이 녹고 봄이 폭발하는 시베리아 알래스카 번식지로 날아간다”. 또한 “독수리는 고비사막 태양의 계곡이 얼어붙을 때 몽골 평원의 상승 기류를 타고 한반도에” 왔다가 봄에 고향으로 돌아간다.
그런데 “철새들은 주로 남북으로 위도 이동을 하는데 뻐꾸기”는 “동서로 경도 이동을 한다”. “황해를 건너 중국 인도 미얀마 아라비아해를 넘어 아프리카 동부까지 1만 2천 킬로미터를 날아”가는 것이다. 가을에 떠나 겨울에 도착하고, 봄에 떠나 여름에 돌아온다
화자는 “뻐꾸기는 왜 아프리카로 날아가”는지 궁금해한다. “수백만 년 전 우리가 하나의 대륙이었던 때를 기억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당신이 그곳에 판 우물이 아직도 빛나고 있기 때문일까” 등을 생각해보는 것이다. 화자는 마침내 뻐꾸기가 가고 오는 길을 도무지 종잡을 수 없다고 토로한다. “숲을 흔드는 새들의 대화”며, “꽃이 피어나는 소리”며, “섬 위를 지나는 달빛”이며, “바람에 줄을 던져 허공을 날아가는 거미” 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화자의 깊은 반성이 자연을 살리고 있다.
옥수동 비둘기
윤중목
옥수동 병순이네 다가구주택 옥상 베란다는 동네 비둘기들의 휴게소가 되어버렸다. 하루는 구구 구구구 비둘기 한 마리가 날아와서는 조쪽 갔다 요쪽 갔다 베란다 위에서 종종걸음을 쳐대길래 어제 병순이가 먹고 남긴 포테토칩 부스러길 뿌려줘 봤거든. 그랬더니 황사먼지 소복이 쌓인 시멘트 바닥에 연방 부리를 콕콕거리며 포테토칩 알갱이만 솜씨 좋게 잘도 발라먹더라구. 그렇게 하길 다음 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또 그다음 날에도... 이제는 숫제 식구 몇까지 데리고서 한 대여섯 마리가 아침이면 쭈우욱 베란다로 모여드는 거야. 김광섭의 성북동 비둘기는 콩알 하나 찍어 먹지 못하고 채석장 포성에 피난하듯 쫓겨 다녔다는데 병순이네 옥수동 비둘기는 그나마 다행일까. 포테토칩 부스러기로 허기진 배를 채우고 푸드덕 지붕마루에 올라앉아 희뿌연 공기에 근시로 변해버린 쌀톨 같은 눈알을 껌벅껌벅하며 떠나온 성북동 파란 하늘을 그리워한다.
(『생명과 문학』 2021년 가을호)
“옥수동 병순이네 다가구주택 옥상 베란다”가 “동네 비둘기들의 휴게소가 되어버”린 상황은, 어느 날 비둘기 한 마리가 날아와 베란다 위에서 종종걸음을 쳐대며 먹이를 찾기에, 그 전날 먹고 남긴 “포테토칩 부스러길 뿌려”준 것이 계기였다. “다음 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또 그다음 날에도” 계속 먹이를 주자 어느덧 비둘기는 식구들까지 데리고 와 “아침이면 쭈우욱 베란다로 모여”들고 있는 것이다.
화자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김광섭 시인이 「성북동 비둘기」에서 담은 비둘기의 처지와 비교해본다. 도시 개발로 말미암아 삶의 터전을 빼앗겨 쫓기는 신세로 전락한 비둘기나, 경제적 형편이 나아진 오늘날의 비둘기나, 처한 환경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고 여긴다.
근래에 비둘기가 사람들이 주는 먹이로 인해 살이 쪄 날지 못하는 ‘닭둘기’가 되는 것이 사회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또한 병원균을 옮기는 ‘쥐둘기’로 불리며 혐오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리하여 2009년 환경부는 비둘기를 유해동물로 지정했다. 더 이상 비둘기는 평화의 상징이 아니다. 그렇지만 비둘기를 굶길 수는 없지 않은가.
엄마의 걱정
이철
엄마는 요즘도 오만 가지가 걱정이다
없는 일도 만들어서 한다
우물 속에 얼굴을 들여놓고 혼잣말을 하다가도
다소곳이 앉아 있는 장독간의 장독들을
각중에 들었다 제자리에 놓곤 한다
무릎이 아파 병원 가는 길
제 길만 가면 될 일을
저 할마시는 와 저서 앉았노
보면 엄마보다 젊고
저 노랭이는 저래가 젖이 나오것나
꼬물이들을 보기는 한 건지
하루에 15분이라도 걷기 운동을 하세요
새벽 논물 보고 쟁일 볕 쫓아 띠댕깁니더
그건 운동이 아니라 노동입니다
엄마의 걱정은 어제까지만 해도 한 개도 없던 걱정이다
자나 깨나 여름에는 물조심 겨울에는 불조심으로 엄마와 살았다
곁에 없으면 없는 대로 밟혀 오는 새벽녘
철아, 꿈에 너그 아부지가 보이더라
는 말씀으로 여즉 엄마와 산다
( 『시현실』 2021년 여름호)
위의 작품의 “엄마는 요즘도 오만 가지가 걱정이”어서 “없는 일도 만들어” 할 정도이다. 가령 “우물 속에 얼굴을 들여놓고 혼잣말을 하다가도/다소곳이 앉아 있는 장독간의 장독들을/각중에 들었다 제자리에 놓곤 한다”. 무릎이 아파 병원 가는 길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갈 길을 가기만 하면 되는데 “저 할마시는 와 저서 앉았노”, “저 노랭이는 저래가 젖이 나오것나” 등으로 걱정하는 것이다. 당신보다 젊은데도, 사람이 아닌 동물인데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병원의 의사는 어머니에게 “하루에 15분이라도 걷기 운동을 하세요”라고 권유한다. 그러자 어머니는 “새벽 논물 보고 쟁일 볕 쫓아 띠댕깁니더”라고 대답한다. 그러자 의사는 “그건 운동이 아니라 노동입니다”라고 말한다. 의사의 이 말은 정답이겠지만, 농사를 짓는 어머니의 삶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농민의 삶은 운동할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바쁘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당신의 몸을 아끼지 않고 걱정거리를 늘린다. 세상에 대한 인정이 넘치는 것이다.
장생포항 나룻배
임윤
먹먹했던 팔십 년 봄
도피한 시류의 시간을 갉아먹으며
출렁거리는 계절에 쓸려 항구도 술렁거렸다
갈매기 날개 서늘한 장생포항
먼바다에서 밀려드는 파도가
제 몸 가누지 못한 나무배를 희롱하는 사이
노래미 안주에 소주 댓 병
환상의 섬*에 뱃고동 울리면
뭍에 오른 포경선원들이 앞다퉈 선술집에 스며들었다
더러 갈매기 날개에 엽서를 부치고
술 취한 누군가는 젓가락장단 노래를 불렀다
건너편 철거를 버틴 용연마을 횟집
노동자 무리가 몰려 흥청이고
조선소 용접 불빛 등지며
불콰한 얼굴들이 나룻배 타고 건너오곤 했다
최루탄 희부연 도심을 떠나
파도치는 대로 청춘의 시간은 중심을 잃어
고래잡이 따라 무작정 떠나고 싶던
항구에 빠진 정유공장 불빛에 마지막 잔을 비우곤 했다
* 장생포 앞바다에 있던 섬(죽도)으로 윤수일이 노래 제목으로 사용했음.
(『울산작가』 32호, 2021년)
작품의 화자가 말하는 “먹먹했던 팔십 년 봄”이란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피살된 뒤 전두환이 이끄는 신군부가 비상계엄을 전국적으로 확대한 상황이었다. 신군부는 집권 시나리오에 따라 예정된 임시국회를 무산시켰고,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설치했다. 이와 같은 조치에 따라 일체의 정치 활동이 정지되었고, 대학에 휴교령이 내려졌으며, 김대중을 비롯한 정치인과 재야인사가 체포되었다. 또한 신군부는 5․18광주민주화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한 뒤 8월 최규하 대통령을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게 했다.
이와 같은 상황이어서 화자가 “도피한 시류의 시간을 갉아먹”는 “항구도 술렁거렸다”. “최루탄 희부연 도심을 떠”난 그의 “청춘의 시간은 중심을 잃어/고래잡이 따라 무작정 떠나고 싶”었고, “항구에 빠진 정유공장 불빛에 마지막 잔을 비우곤 했다”. 정치적 탄압으로 어떤 희망도 보이지 않았기에 선술집에 스며든 노동자들 중에서 “술 취한 누군가”가 “젓가락 장단 노래를 불렀”던 장면은 새삼 먹먹하다.
막장의 세월
정연수
배가 기우는 사이, 배는 막장을 기억했다
막장의 옆구리 어딘가 조금씩 무너지고 있었다
석탄 합리화가 아닌 자본의 합리화
광부들은 문 닫은 갱구 앞에서 잠시 주저앉았을 뿐
원망할 여유는 없었다
살려주세요, 구조대는 오고 있는 거죠?
산 자의 마지막 인사는 핏물 든 꽃처럼 붉다
또 만나자며, 안산으로 부천으로 떠나고
터 잡았다고 폐광촌 동료 부르던 세월
안산의 함태탄광 동지는 함우회 만들고
안산의 강원탄광 동지는 강우회 만들고
안산 아이들 탄 배가 기우는 동안
막장은 바다에서도 가라앉기 시작했다
농촌에서 탄광촌으로, 폐광촌에서 공단으로
끝없는 유랑의 세월
바다에다 자식 묻기까지 끝없는 막장
막장은 막장이었다.
(『사람의 문학』, 2021년 봄호)
위의 작품은 2014년 4월 16일 일어난 세월호 침몰 사고가 폐광 상황과 같은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1989년 석탄합리화정책의 시행이 “석탄 합리화가 아닌 자본의 합리화”였기 때문에 막장은 무너졌다. “광부들은 문 닫은 갱구 앞에서 잠시 주저앉았을 뿐/원망할 여유”조차 없었다. 세월호 희생자들의 “살려주세요, 구조대는 오고 있는 거죠?”라는 외침은 막장에서 쫓겨나는 광부들의 구조 요청이기도 했다.
석탄합리화정책 시행 이후 광산촌은 급속하게 무너졌다. 하루아침에 실업자가 된 광부들은 살기 위해 부랴부랴 광산촌을 떠났다. “또 만나자며, 안산으로 부천으로 떠”났고, 미처 떠나지 못한 광부들은 터를 잡은 광부들이 부르는 대로 따라갔다. “안산의 함태탄광 동지는 함우회 만들고/안산의 강원탄광 동지는 강우회 만들고” 살아간 것이다.
2014년 세월호 침몰 사고로 말미암아 광부들은 또다시 막장이 무너지는 상황에 직면했다. “안산 아이들 탄 배가 기우는 동안/막장은 바다에서도 가라앉기 시작”한 것이다. “폐광촌에서 공단으로/끝없는 유랑의 세월”을 지내온 광부들이 “바다에다 자식 묻”은 일은 큰 충격이다. “막장은 막장”이라는 말이 더없이 슬프고 아프다.
그래도 그리운 공장
정연홍
마산 수출자유지역으로
진주 상평공단으로
울산 석유화학단지로 떠나가고
호송이 따라 출가하고 싶었으나
자동차 하청 공장에 취직
중고차 사고 집사람 만나 살림을 시작했고
사십 넘어 운동판에 뛰어들어 머리띠 둘렀고
구호를 외치다가
빨갱이로 몰려
쫓겨나고
내게 공장은 집사람 만나게 해 준 은인
늦은 나이 대학원까지 가게 해 준 고마운 놈
빨갱이 소리까지 듣게 해 준 원수 같은 놈
공장은 자본주의 세상을 찍어내는 공장
일률적인 모양을 대량으로 생산
기계적인 세상을 만들어 가는 공장
자본의 각진 모양을 거부하면
고문관이라 손가락질하는 공장
감시의 눈초리를 모른 척 눈감아야 했던 공장
동기들이 출근하는 정문
복직을 외쳐야 하는 공장
돌아갈 수 있으리라 꿈꾸는 공장
지긋지긋한 공장
그래도 그리운 공장
인간을 찍어내는 지구라는 공장
신이라는 공장장이 떡 하니 버티고 있는
공장
(『시산맥』, 2021년 겨울호)
노동자로 성실하게 살아온 작품의 화자는 “사십 넘어 운동판에 뛰어들어 머리띠”를 둘렀다. 회사의 모순을 알게 되어 개선하려고 용기를 가지고 나선 것이다. 그렇지만 사용자는 자신의 이익 창출에 방해가 된다고 화자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았다. 결국 화자는 “구호를 외치다가/빨갱이로 몰려/쫓겨”났고, 동료들이 출근하는 정문에 서서 “복직을 외쳐야” 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화자는 자신과 함께한 공장을 생각해본다. “집사람 만나게 해 준 은인”이고, “늦은 나이 대학원까지 가게 해 준 고마운 놈”이다. 그러면서도 “빨갱이 소리까지 듣게 해 준 원수 같은 놈”이다. 또한 “자본주의 세상을 찍어내는” 놈이고, “일률적인 모양을 대량으로 생산”해 기계적인 세상을 만드는 놈이고, 그리고 “자본의 각진 모양을 거부하면/고문관이라 손가락질하”는 놈이다. 의식주를 해결해주고, 자아를 실현시켜 주면서, 노동 생산 과정은 물론 노동 생산물로부터 소외시키는 놈이다.
이렇듯 공장은 화자와 뗄 수 없는 공동운명체이다. 그리하여 지긋지긋한 공장을 그리워하고, 돌아갈 수 있다는 꿈을 버리지 않고 있다. 공장이 삶의 전부인 노동자들에게 노동조합이 필요한 이유이다.
여기 혀가 있어요
한영희
축축한 집에 살아요
햇살이 그리워 머리를 내밀어 보지만 다시 돌아가야 하죠
집을 나와 막춤을 추다 의사에게 끌려간 적도 있어요
갈치조림을 먹은 날은 개수대에서 바다 냄새가 나요
거품 속을 헤엄치는 지느러미를 본 듯도 하네요
침으로 도배를 마친 천장은 사계절 젖어있어요
흐린 눈을 위해 노래를 불러주었어요.
박하사탕을 즐기는 나는 과거를 빨아먹고
꼬리를 자르고 다음 계단을 향해가요
해가 쨍한 날이면 구름 지도를 검색하고
눈만 깜박거릴 때가 많지요
여기 혀가 있어요
통제구역에서 혼자 살아요
가끔은 사상범처럼 붉어져요
쓸데없이 근육이 단단해지는 일은 없어요
(『다층』, 2021년 여름호)
“혀”는 입안의 아래쪽에 붙어 있는 신체기관으로 음식의 맛을 구별하고 씹고 삼키는 구실을 한다. 위의 작품에서 “축축한 집에 살아요”라거나, “햇살이 그리워 머리를 내밀어 보지만 다시 돌아가야 하죠”와 같은 목소리는 혀의 모습을 여실하게 보여준다. “집을 나와 막춤을 추다 의사에게 끌려간 적도 있어요”라거나, “갈치조림을 먹은 날은 개수대에서 바다 냄새가 나요”라는 목소리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여기 혀가 있어요/통제구역에서 혼자 살아요”라는 목소리는 긴장감을 준다. “가끔은 사상범처럼 붉어져요”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사회적으로 통제구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떠올려지는 것이다. 사상 문제로 통제받는 존재가 엄연한 것이 우리 사회의 현주소이다. “여기 혀가 있어요”라는 목소리가 아프게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