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분의 중요성
삼상2:32-36
(삼상 2:32) 『이스라엘에게 모든 복을 베푸는 중에 너는 내 처소의 환난을 볼 것이요 네 집에 영영토록 노인이 없을 것이며』
(삼상 2:33) 『내 단에서 내가 끊어 버리지 아니할 너의 사람이 네 눈을 쇠잔케 하고 네 마음을 슬프게 할 것이요 네 집에 생산하는 모든 자가 젊어서 죽으리라』
(삼상 2:34) 『네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한 날에 죽으리니 그 둘의 당할 그 일이 네게 표징이 되리라』
(삼상 2:35) 『내가 나를 위하여 충실한 제사장을 일으키리니 그 사람은 내 마음, 내 뜻대로 행할 것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견고한 집을 세우리니 그가 나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 앞에서 영구히 행하리라』
(삼상 2:36) 『네 집에 남은 사람이 각기 와서 은 한 조각과 떡 한 덩이를 위하여 그에게 엎드려 가로되 청하노니 내게 한 제사장의 직분을 맡겨 나로 떡 조각을 먹게 하소서 하리라 하셨다 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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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기름부은 받은
직분이 등장하게 되면
그 주변에 위기가 발생하게 됩니다.
엘리 제사장 집안이 엉망이 되어도
하나님께서는 숨어있는 인물, 사무엘을
착실하게 키워내고 있었습니다.
사람은 엉망이라도
하나님의 약속은 충실히 진행됩니다.
우리 성도는 이 사실을
중립지역에서 바라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도 망가지는 자리에서
이 하나님의 약속의 충실됨을 바라보는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허리케인과 같이
하나님의 약속이 현실적으로 일하게 되면
그 약속에 휘말려 끌려들어가는
모든 자들에게는
내부 분열이 일어나게 됩니다.
하나는 하나님으로부터 직분받았다는 자부심이요
다른 하나는 그 자부심으로 인하여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죄를 더욱 죄되게 하는 쪽으로
그 직분 속에 들어와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직분자,
진정한 기름부음을 받은 분은
오직 예수님 밖에 없음을
증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등장과 마찬가지로
직분자의 등장이
위기를 드러내지 않으면
그 위기를 다음과 같은 분석이 됩니다.
하나는 주체에 관한 것이요
다른 하나는 시간에 관한 것입니다.
사람은 시간을 초월하지 못하고
시간에 매여삽니다.
과거-현재-미래로 이어지는
시간의 줄 위에서
결코 못 벗어납니다.
이 시간에 준해서
자아가 정립되게 됩니다.
예를 들면,
“나는 지금 조금씩 개선되어 나아간다.
앞으로 수 년이 더 지나면
지금보다 훨씬 더 성숙되고
훌륭한 자아로 달라져 있을 것이다”
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성경을 보면
성경 전체가 엉터리 해석이 되고 맙니다.
예를 들면,
‘엘리 제사장은 문제가 컸다.
그 이유는 자식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해서
제대로 하나님을 섬기지 않게 했다’는 주장을
하게 되면
사무엘의 경우와 같이 되어버립니다.
사무엘의 자식들도
백성들이 보기에
제사장다운 면모를 보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무엘상 2:12에서는
‘엘리 제사장의 아들들은
불량자’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사무엘상 8:3에 보면,
“그 아들들이 그 아비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고
이를 따라서 뇌물을 취하고
판결을 굽게 하니라”라고 해서
사무엘의 아들들도
엘리의 아들들 못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 제사장은
아들들을 제대로 건사하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집안이 거들나지만
사무엘 가정은 그렇지 않습니다.
따라서 아무리 과거의 잘못을 잘 알고
또한 반성에 반성을 거듭해봤자
그와 같은 잘못은
두 번 다시 안한다는 보장은
성립되지 못합니다.
도리어 전에 잘못을 저질은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보지 않았기에
함부로 그 사람을 배도한 사실만
드러날 뿐입니다.
즉 잘못을 저질은 자의 입장에
누구든지 서 있다면
얼마든지 그 사람보다,
아니 그 사람보다 더욱 더
비난 받을 짓을 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보다 자식을 더 사랑하면 안된다’는
여호와의 지적에 대해서
초연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엘리 제사장이 이런 식으로 비난을 받았다면
우리 또한 이런 식으로 비난을 얼마든지
받을 만한 자들입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보다
자식을 덜 사랑할 위인은
없습니다.
자식 앞에서는
하나님도 뒷전입니다.
자식 사랑이 우선입니다.
인간들이 하나님의 지적을 받으면서도
왜 이 모양일까요?
그것은 바로 주체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이든
누가 무엇이 되었든 간에
외부에서 오는 것은
일단 몽땅 자기 주머니에 넣고 봅니다.
자기를 거쳐서 나가야
자신의 존재감을 만끽하게 됩니다.
자신을 거치지 않고 나가면
모독감을 느끼면서 분개합니다.
하나님이 내 자식을
친히 키우는 것을
좋아할 부모는 아무도 없습니다.
자기 손으로
자신이 원하는 스타일대로
자식을 키우겠다는 의지로서
자식을 대합니다.
이러한 강한 주체 앞에
하나님의 직분자,
즉 기름부음 받은 분이 등장하게 되면
여기서 위기가 초래하는 겁니다.
부모에게 있어 자식이란
자신의 과거의 꿈과 희망과 소망들을
가득 담을 수레와 같습니다.
과거로부터 이어져오는
모든 자신의 수고를
다 '자식‘이라는 수레에 담아서
과거로부터 미래를 향하여
힘차게 밀려고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신앙의 영웅들이라고 해서
예외가 없습니다.
다윗의 경우를 봅시다.
골리앗 적군 장수를 죽이고 귀환하니
승리의 소문을 들은 민중들이
다윗왕을 흠모하며 소리칩니다.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고
말입니다.
이 사실이 사울왕에게는 위기였습니다.
과연 사울왕이 곱게
권좌에서 물러나 줄까요?
어림도 없습니다.!
인간이 차지하고 있는 자리란
주체를 발생시키는 자립니다.
만약 그 자리를 포기한다는 것은
곧 그동안 축적된 자아의 본질을
잃어 버린다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내가 원하지 않기에
나를 물러가지 않노라”고 나올 것이
뻔합니다.
하늘에서 직분자가 내려오게 되면
이런 주체자는 멸망당합니다.
본문의 내용이 그러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위기의 일을 통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자의 모습과
오늘날 우리의 모습을 일치시키십니다.
즉 하나님께서 그들을 꾸짖는 내용이
다 오늘날 우리에게 해당될 꾸지람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안다는 것은
이처럼 나의 뜻이 붕괴되는 경로를
겪게 됩니다.
어느 인간이 자신의 뜻대로
만사가 잘 돌아가는데
구태여 하나님의 뜻을 찾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직분자를 우리 곁에
보내시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 자신이
과거로부터 떠미는 자아라는 수레가 따고 있고,
하늘 나라에서 밀어대는
직분자 자아라는 수레가
따로 있게 되는 겁니다.
우리의 수레 안에는
우리의 과거 업적들이
수북히 쌓여져 있습니다.
즉 과거로부터 미래로
점차 나아갑니다.
우리 인간들의 인식으로서
과거-현재-미래의 수순을
밟아 나갈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이렇게 나오게 되면
결코 그 인간은 자아에서 못벗어날 지경임을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그래서 우리 가운데 있었던 직분자,
사무엘이나 사울이나 다윗이나
선지자들 같은 직분자들은
모두 그 자체로서 완벽한가를
물을 사항이 아니라
그 사람들의 수레 안에
장차오실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무얼 미리 담기게 했을까 라는 입장에서
살펴봐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이 일을 해야될 자입니다.
우리 자체가 완벽해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완벽한 죄인’으로 만드시는
하나님의 기름부음이 완벽합니다.
이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증인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