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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에 읽어보는 고려사
1. 고려의 성립과 후삼국의 통일
약 1000 여년의 긴 역사를 지닌 신라가 지배층의 내분과 신분제(골품제도)의 모순 등 여러가지 악재로 인해 점점 쇠퇴해 가고 있을 때, 지방의 호족 세력가운데 막강한 사병들을 보유한 세력들이 점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역사드라마 왕건을 통해 접한 바 있는 궁예 나 양길, 기훤, 그리고 (후)백제를 세우는 견훤 (진훤 이라고도 읽음) 등이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이 가운데, 궁예와 견훤은 차츰 부각되어 궁예는 양길과 기훤등 경쟁 세력을 몰아내고 지금의 철원으로 도읍한 후 고구려의 뒤를 계승한다는 차원에서 후고구려 , 또는 고려라 일컬었습니다. (후일, 마진 으로국호를 바꾸었다가 태봉으로 다시 고침) 또한 견훤은 옛 백제의 땅을 중심으로 차츰 영역을 확대하여 세력을 키워 신라의 존재를 위협하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북으로는 궁예의 후고구려, 서쪽으로는 견훤의 후백제, 그리고 동남쪽으로 신라가 정립하여 서로 치열하게 대립하는 국면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한국사에 있어서 가장 큰 혼란기였다는 후삼국시대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한편, 송악(지금의 개성)의 호족 출신으로 왕융(왕건이 고려 건국후 세조로 추존함)과 그 아들 왕건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궁예에 귀부하여, 특히 그 아들인 왕건은 궁예의 각별한 신임을 얻게 되면서 장수로서 많은 활약을 펼칩니다. 특히, 왕건이 수군을 이끌고 지금의 전라도 나주일대를 공격하여 점령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 입니다.
이렇게 해서 치열하게 대립해 가던 후삼국은 한때 북부 정권의 집권자가 바뀌는 등 점점 과열조짐을 보이게 됩니다. 곧, 궁예가 왕권의 전제화를 위해 공포정치를 꾀하다가 호족들의 반발을 사 끝내 왕위에서 내몰려 비참한 죽음을 당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궁예를 일부 호족들의 추대를 받아 무력정변으로 몰아내고 918년에 고려를 건국한 인물이 바로 태조 왕건 이었습니다.
태조는 궁예와는 달리 넓은 도량과 탁월한 정치력으로 선정을 배풀면서 궁예이후 흉흉했던 인심을 수습하였습니다. 또한 도읍을 자신의 근거지인 송악으로 옮김으로서 고려 475년의 역사의 기틀을 다졌던 것입니다. 하지만, 일부 친궁예 세력과 왕건에 반감을 품는 일부 호족들을 아우르는 데에도 그만큼 진력을 쏟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혼인정책과 사성정책등을 통한 회유책과 무력에 의한 강제 진압등 강경책을 적절히 구사하면서 호족들을 아우르고자 했습니다.
아울러 태조는 신라와 연대하고, 그 연대를 통해 견훤의 백제를 견제하는 이른바 친신라 반백제정책을 추진 하였는 바, 이것이 백제를 자극하여 고려와 백제의 정면 충돌을 부추겼던 것입니다. 고려와 백제의 대결에서 처음에 우위를 보인 것은 견훤이 이끌던 백제였습니다. 견훤의 백제는 초기의 여러 싸움에서 우위를 보위며 승승장구하더니, 급기야는 신라까지 쳐들어가 경애왕을 자결하게 하고, 경순왕을 옹립하지만, 끝내 신라를 합병하지 못하는 오판을 범했습니다. 고려와 백제 양자간의 대결이나 다를 바 없었던 후삼국에서 신라를 흡수하게 되면 그만큼 절대적으로 세가 유리하게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견훤의 이 오판 하나는 후백제의 입장에서 보면 결정적인 치명타로서, 신라로 하여금 백제에 대한 반감을 노골적으로 높이고 오히려 왕건의 포용력으로 고려에 흡수되게 하여, 고려의 후삼국 통일에 결정적으로 유리한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하지만, 태조의 고려군도 견훤에 의해 고전하기도 하였습니다. 한 때 태조가 적에게 쫓기는 위기에 몰리기까지 하였으나, 신숭겸과 김락의 분투에 의해 간신히 빠져 나오기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공산 전투). 그러나, 앞에서 이야기 한 바와 같이, 견훤의 신라를 합병하지 못한 것은 곧 고려에게 결정적인 힘을 주어
지금의 안동지방인 고창에서 권행(원래 김씨였으나, 태조가 이 싸움의 공로로 안동을 식읍으로 주고 권씨 성을 하사하여 안동 권씨의 시조가 됨),김선평(안동 김씨의 시조),장길(안동 장씨의 시조)등 세 호족의 도움과 유금필의 분전으로 후백제를 크게 물리칩니다. 이후 후백제는 국력이 약화되어 내분에 휩싸인 끝에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견훤의 첫째 아들인 신검과 그 두 아우 양검, 용검은 이복 아우 금강을 죽이고, 다시 그 아비 견훤을 내쫓다시피 하였고, 견훤은 고려로 도망하여 스스로 자신이 세운 백제를 무너뜨리는 씁쓸한 광경을 연출합니다.
한편, 신라도 태조의 신라 방문을 계기로 급속도로 고려에게 복속화 되어 마침내 935년 경순왕이 스스로 나라를 들어 태조에게 항복하니, 박혁거세가 나라를 세운 이후 약 995년간 유지되어 왔던 신라 왕조는 종말을 고했습니다. 이때 항복을 반대하던 마의태자의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합니다.
이로서 태조 왕건은 918년 건국한 이후 약 18년 남짓만에 후삼국을 통일하는 대업을 이루게 됩니다..
2. 고려의 시대 구분
고려왕조는 과거 삼국시대에 비해 사회, 문화, 경제적으로 진보적인 발전을 이루었으나, 아직 획기적 발전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중세시대로 보고 있습니다. 또,후에 성립되는 조선왕조는 고려왕조에 비해 많은 발전은 있었지만 근대적 요소에까지 이르지 못해서 근대와 중세의 혼합어인 근세시대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조선시대도 중세로 규정 짓는 견해도 있습니다.
고려시대는 크게 셋또는 넷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그 하나는 태조 왕건과 호족에 의해 성립되었지만, 광종과 성종대를 거치면서 문벌귀족으로 새로이 형성되는데 이를 문벌귀족사회라고 부르며 보통 전기에서 중기까지로 규정 짓습니다.대개 무신정변이 일어나기 전까지인 인종때 까지를 문벌귀족사회로 보고 있습니다.
다음은 후기로서 무신집권기와 원간섭기가 이에 해당되고
또,말기까지 본다면 공민왕 집권기 부터 그 이후 조선왕조가 성립되는 시기까지 보시면 될 것입니다..
2. 새로운 정치 질서로의 개편과 태조의 국가 안정화 작업
궁예의 전제 왕권의 강화에 불만을 품은 일부 호족들과 함께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세운 왕건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했던 것은 후삼국을 통일하는 것과 함께 잦은 전쟁과 호족들의 횡포로 인해 혼란에 빠진 국가를 어떻게 안정화 시키느냐가 큰 관건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도 우선시 된 것은 바로 신라 말기에 전국 각처에서 그 지방을 세력 기반으로 하여 일어난 지방 세력가, 이른바 호족들과의 관계를 어떻게 하느냐가 정변을 통해 집권한 태조에게 있어서 더 큰 과제였던 것입니다.
1) 대호족정책
태조는 호족들의 도움을 받아 궁예를 몰아내고 즉위하였으나, 즉위초 일부 친 궁예 세력과 반 태조 세력으로 결집한 호족들의 강한 반발을 받아 한때 큰 위기에 몰린 적이 있었는데, 즉위초의 환선길의 역모, 이흔암 역모 고변사건, 충주 호족 진선과 임춘길의 모반, 그리고 명주 호족 김순식의 저항이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들의 저항을 가까스로 제압한 태조에게 있어서 이들 호족은 협력없이 새로운 국가를 이끌어 나가기 어려웠다고 보여 졌습니다. 그리하여 태조는 이들에 대하여 적절히 회유하고, 때에 따라서는 강경책을 보이는 등 적절하게 대응해 나갔습니다.
태조의 이러한 정책들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면, 우선 회유책으로 혼인정책(婚姻政策)을 들 수 있겠습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태조는 무려 29명의 부인을 통해 25남 9녀 라는 어마어마한 자녀를 두었는데, 이는 지방 유력 호족들을 포섭하기 위한 태조의 고육지책이라 할 수 있었습니다.
그 출신을 대략 살펴 보면, 우선 첫째 부인인 신혜왕후 유씨는 정주의 유력한 호족인 유천궁의 딸이었고, 둘째 부인이자 2대 혜종의 생모인 장화왕후 오씨는 나주의 유력한 호족인 오다린군의 딸이었으며, 셋째 부인은 훗날 3대 정종과 4대 광종의 생모로서 신명순성왕후인 유씨로 충주의 유력한 호족 유긍달의 딸이었습니다. 훗날 태조 사후 왕위 계승 분쟁으로 고려 초기의 정국이 시끄러웠던 것은 혜종의 지지세력인 나주 호족과 정종 및 광종의 지지 세력이었던 충주 호족간의 갈등도 그 원인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들 부인 외에도 태조는 많은 유력 호족의 딸을 부인으로 맞아들였습니다.
또한, 태조는 잦은 혼인으로 왕실권력의 분산을 막기 위해 이복남매간의 결혼과 같은 근친혼을 장려하기도 하였는데, 왕실 세력을 더욱 공고히 하려는 태조의 의도로 풀이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사성정책(賜姓政策)을 꼽을 수 있습니다. 태조는 귀부해 오는 호족들에 대해서는 특별히 왕씨(王氏) 성과 함께 관직과 일정한 식읍을 하사하였는데, 초기의 학자이자 호족이었던 박유가 사성을 받아 왕유로 개명한 것이라든지, 명주(지금의 강릉) 장군 김순식이 태조에게 스스로 귀부하면서 왕씨 성을 하사 받고 왕순식으로 개명한 것이라든지, 조금 후대인물이었던 청주의 유력 호족 이가도가 왕씨 성을 하사 받아 왕가도라 하였던 것은 모두 이와 같은 대표적인 예라 하겠습니다.
특히, 왕순식의 경우는 본래 신라 태종 무열왕의 후예인 김주원의 후손인데, 김주원이 왕위를 잇지 못하고 내물왕계 출신 김경신이 원성왕으로 즉위하자, 명주로 물러나면서 명주군왕에 봉해지고, 명주일대를 식읍으로 받아, 그곳을 기반으로 하여 큰 세력을 형성, 중앙을 위협하여 한때 태조를 근심시켰을 정도(고려사 및 고려사절요의 기록)의 강력한 저항세력이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태조의 대호족정책은 비단 회유책에만 국한된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태조는 사심관제도와 기인제도를 통해 이 당시 중앙 행정력이 지방에 까지 미치지 못했던 한계를 이 두 제도로 극복하고자 하는 동시에, 호족 세력을 무마하고 통제하려는 의도도 있었습니다. 사심관제도는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이 935년 항복해 오자, 신라의 옛 서울인 경주의 사심관으로 삼아 부호장 이하의 관직등에 대한 사무를 보게 하였다는 것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후 다른 공신이나 호족들도 그 지방의 사심으로 삼게 되면서 널리 시행되었습니다.
또, 기인제도는 지방의 향리 자제를 서울에 볼모로 삼고, 또한 출신지의 일에 대한 고문에 응하도록 하는 제도로서 이것도 호족에 대한 견제의 일환으로 풀이 될 수 있습니다. 이밖에도 태조는 즉위 초에 있었던 진선의 반란등과 같은 무력 저항에는 때에 따라 무력으로 맞서는 강경책을 구사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태조의 노력의 결과, 고려 초에는 왕권과 호족 사이의 미묘한 권력관계는 호족연합정권이라는 새로운 지배체제를 낳았으나, 호족 세력이 때에 따라서 왕권을 능가할 만큼 그 저항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적어도 광종의 왕권강화를 위한 대숙청작업이 이루어 지기전까지 고려의 왕들은 여간 조바심을 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태조가 이것을 우려하여 재위기간 중에 정계 1권과 계백요서 8편을 저술한 것이나, 후대 왕들에 대한 당부를 담은 훈요 10조가 서술된 것도 이러한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고 보여집니다.
2) 태조의 국가 안정화를 위한 여러 작업
태조는 고구려의 뒤를 계승한다는 차원에서 국호를 고려라 했기 때문에 옛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을 매우 중시하였습니다. 때문에 태조는 즉위 초부터 이곳에 대하여 줄곧 우대정책을 펴왔는데, 평양의 이름을 서경으로 하여, 수도인 개경 못지 않은 중요지로 삼았다든지, 왕이 직접 서경에 자주 찾았다든지, 말년에 남긴 훈요 십조에 서경을 중시하여 왕이 수십일간 머무르도록 당부한다든지 하는 것은 바로 이런 태조의 서경에 대한 많은 관심을 보여주는 일례라 하겠습니다. 태조는 이러한 서경 경영을 통해 고구려의 계승의식을 통한 북진정책을 꾀하는 한편, 고려왕실의 독자적 세력기반 육성과 함께 때에 따라 호족까지 견제하려는 방책으로 삼았던 것으로 보여지고 있습니다.
태조는 창업군주이자, 탁월한 정치력을 소유한 지도자답게 민심 수습에도 많은 힘을 기울였습니다. 자주 순행하여 백성들의 고충을 살핀다든지, 혹은 세금 감면이나, 부역의 경감등을 통해 백성들에게 많은 혜택을 부여함으로서 백성들을 국가의 일원으로 끌어들여 국가를 안정적으로 이끌어 나가려고 하였습니다.
또한, 태조는 민족융합정책의 일환으로서 926년 발해가 거란의 침입을 받아 멸망하여 그 유민들이 이주해 내려오자, 따뜻하게 우대하여 (발해국의 왕세자였던 대광현에게 왕씨성을 내리고 이름을 내려줌) 한 민족으로서의 동질감을 불어 넣었으며, 고구려 계승의식차원에서 북진정책을 추진하여 서경을 중시한 것은 이미 전술한 바와 같지만,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에 대해서는 적대정책을 펴서 한때 거란의 사신을 유배보내고, 선물로 보내온 낙타 50필을 굶겨 죽였을 뿐만 아니라 훈요 십조에 후대왕들에게 거란에 대해서는 야만에 가까운 나라이므로, 가까이 할 필요가 없다면서 주의를 당부할 정도로 극도의 혐오감을 나타냈습니다.
태조의 북진정책은 단순히 고구려의 고토회복만을 강조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변경지대에 대한 국토 개발, 혹은 고려적 농업사회의 확대와 그에 따른 이민정책등 여러 목적이 내재되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북진정책의 결과 태조 말엽에는 고려의 국경이 청천강까지 확대 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태조의 여러 가지 노력의 결과, 고려왕조는 국초의 혼돈되었던 상황을 수습하여 안정된 기반을 바탕으로 하여 차츰 발전될 조짐을 보이고 있었습니다만, 주의를 기울여 신중하게 추진한 호족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것이 아니어서 그 당시의 태조는 호족연합정권의 대표자로서의 지위에 불과했을 정도였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는 다음에 왕위를 계승하는 후계자에게 해결되어야 할 중대할 과제로 넘겨졌고, 후일 즉위하는 혜종이나 정종은 이것을 해결하려 하다가 오히려 호족들간의 갈등을 촉발, 왕위를 둘러싼 내분으로 이어지게 되어 끝내 해결짓지 못하고, 그 다음 왕인 광종의 왕권강화를 위한 대숙청작업이 있고 나서야 해결을 짓게 됩니다.
3. 고려 초기의 정정 불안과 잇단 시련
후삼국을 통일하고 국가의 안정을 마련한 태조가 재위 26년만인 943년에 세상을 떠나고, 이미 정윤으로 책봉되어 있었던 왕자 무가 왕위에 오르니, 이가 곧 2대 혜종입니다.
이미 아시는 바와 같이, 태조는 호족들을 어우르고자 많은 회유 정책을 추진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혼인정책이었고, 이렇게 추진된 혼인정책을 통하여 총 29명의 부인을 맞이하여 무려 25남 9녀라는 어마어마한 수의 자녀를 두는데, 이것으로도 태조는 호족들을 완전히 억누르지 못했고 단지 호족 연합 정권이라는 과도기적 체제를 이끄는 데 만족해야 했습니다. 따라서, 태조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중앙과 호족간의 긴장은 계속되어 급기야는 혜종, 정종 연간에 있었던 권력 투쟁과 그로 인한 정정 불안을 초래하게 됩니다.
1) 혜종조의 정치적 혼란
혜종은 태조의 둘째부인인 장화왕후 오씨의 소생으로, 나주 호족 오다린군의 외손입니다. 하지만, 혜종의 생모 오씨가 미천한 탓에 태조가 심사숙고해서 후사를 결정짓지 않으면 안되었을 정도였고, 게다가 셋째부인인 신명순성왕후 유씨가 태자 태를 순산하게 되면서 태조는 기타 다른 호족들의 눈치를 보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이에, 태조는 태자 무로서 정윤을 삼으려 했지만, 앞 서 서술한 바와 같이 그 생모 오씨가 미천하고, 다른 호족들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은근히 측근인 박술희에게 부탁하여 그 후견인으로 삼도록 하였고, 이후 박술희는 태자를 충실히 보좌하여 혜종이 어렵사리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고 합니다. 박술희는 벽성(지금의 충남 옥천)의 호족 출신으로 태조 밑에서 많은 공을 세워 공신에 있었던 인물이며 강직하고 사심없는 인물이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렇듯, 태조 사후 팽팽한 긴장속에서 혜종이 왕위를 계승했지만, 그에 못지 않은 반대 세력 또한 만만치 않았는데, 바로 경기도 광주의 대호족 출신인 왕규세력으로, 그는 태조에게 제 15 비와 16 비를 바친 바 있었고, 더구나 혜종에게도 왕비를 들이도록 하여 이중으로 외척관계를 형성, 조정에 큰 세력을 마련한 실력자 였습니다. 이후 그는 혜종을 몰아내고 자신의 외손 광주원군을 왕위에 세우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하게 되고, 급기야는 혜종을 암살하고자 자객까지 파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혜종은 이러한 왕규의 음모를 알았지만 그를 응징하거나, 문책하지 못했는데, 이것은 왕규의 위상이 왕권을 능가했을 정도로 막강했기 때문입니다.
혜종을 반대한 세력들은 비단 왕규 만이 아니었습니다. 태조의 셋째 부인인 신명 순성왕후 의 친정인 충주 유씨 세력도 혜종을 반대하였고, 따라서 왕규와 마찬가지로 혜종을 폐위시키려 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혜종을 보호하려는 친왕 세력과 그를 제거하려는 반왕 세력들간의 치열한 긴장과 권력투쟁은 불가피한 것이었고, 왕규를 비롯한 여러 반대 세력은 기회를 보아 왕을 제거하려 하였으므로, 혜종은 신변에 위협을 느껴 침소를 여러 곳으로 옮겨 다닐 정도였습니다.
또한, 신명 순성왕후 소생의 두 왕자 요와 소(요는 정종, 소는 광종으로 즉위)의 존립또한 혜종을 위협하는 존재였습니다. 또한 요의 장인인 박영규는 본래 후백제 견훤의 사위였지만, 태조의 후삼국 통일 과정에서 귀부하여 태조로부터 각별한 신임을 얻었던 인물이었고, 더구나 태조의 사촌 동생으로서 서경에 진주하고 있었던 왕식렴과도 연결되어 있었기에 혜종의 불안은 이만 저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혜종대의 이런 불안한 정국은 결국 반대세력의 숱한 음모에 불안한 생활을 하며 숨죽이고 있었던 혜종이 결국 몸저 눕게 되면서 고비를 맞습니다.
곧, 혜종을 보필하던 박술희는 왕규에 의해 제거되었고, 그 왕규 또한 혜종의 이복동생이자, 또다른 경쟁자였던 왕자 요의 요청으로 서경에 있었던 왕식렴군이 내려 오면서, 제거 되었습니다. 하지만, 과연 왕규가 역심을 품고 모반을 일으켰는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최근들어 재평가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습니다.
한편, 잦은 정변과 권력 투쟁으로 인해 몸저 누웠던 혜종은 재위 2년만인 945년 9월에 마침내 34세의 한창 나이로 세상을 뜨게 되는데, 그 이복동생 요가 왕위에 오릅니다. 이 요가 3대 임금 정종입니다. 정종의 즉위는 왕실과 호족출신 외척간의 권력투쟁에서 왕요가 승리함으로서 일단 혜종 2년의 혼란기가 수습된 것처럼 보여졌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정치적인 긴장은 계속되었습니다.
2) 정종의 시련과 왕권 강화 노력
정종은 태조와 신명순성왕후 유씨 사이의 3남으로 태어났으며, 훗날 4대 임금 광종으로 즉위하는 왕자 소는 그의 동복 동생입니다.
형식적으로 군신의 추대를 받아 즉위하는 형식을 취하여 왕위에 오르기는 하였지만, 앞에서 보았듯이 왕식렴을 비롯한 서경 세력과 몇 몇의 지지 세력에 의해 군사력이라는 비상 수단 속에서 즉위하였으므로, 정치적 긴장이 풀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또한 그의 즉위는 당시 수도였던 개경을 기반으로 둔 일부 호족세력과 백성들의 커다란 반발도 초래 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정종은 강력한 조처를 취하게 되는데, 훗날 성종때 최승로의 시무 28조의 5대조 치적평에
일찍이 혜, 정, 광 3종이 서로 계승한 처음을 보건대, 국가의 모든 일이 채 갖추어지지 않았을 때에 서경과 개경, 양 서울의 문무관이 반이나 살상되었으며.....
라 한 것에서도 이런 긴장된 정치적 분위기를 엿볼 수 있습니다.
정종은 이러한 반발을 의식하여, 개경에서 수도를 지금의 평양인 서경으로 천도하고자 하였습니다. 이것은 정종에 대한 개경 출신 호족들의 반발과(특히, 대숙청 작업으로 인하여 그 반발은 더욱 컸음), 정종을 후원해 준 왕식렴을 비롯한 서경세력과의 정치적 관계를 고려하여 나온 것으로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실타래처럼 얽혀 있는 정치 현실을 천도를 통해 타개하려 했던 것입니다. 이를 위해 풍수지리설을 신봉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서경천도를 위해 그는 많은 인력을 강제로 동원하여 백성들로부터 원성을 사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왕권 강화와 거란군의 내침을 대비하기 위해 서경에 광군사 30만을 조직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밖에도 즉위과정에서의 과오를 뉘우치고자 불교 진흥책을 적극 추진하여 이를 크게 장려하기도 하였습니다.
서경천도는 재위 4년만에 정종이 세상을 떠나 실현되지 못했습니다만, 정종의 이러한 여러 노력으로 혜종대에 크게 실추된 왕권이 어느 정도 강화된 것은 사실입니다. 이는 정종의 반대파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과 함께, 왕규와 같은 야심만만한 호족세력의 왕권에 대한 도전이 없었다는 점, 그리고 정종이 개경세력의 강력한 반대를 무릅쓰고 소신을 갖고 서경천도를 단행하였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정종의 이와 같은 노력들은 훗날 광종의 대대적인 개혁 작업의 밑바탕이 되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정종의 이런 노력들이 바로 왕권의 안정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습니다. 광종의 대대적인 왕권 강화를 위한 개혁작업이 구체화되기 전까지도 팽팽한 긴장 국면이 이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4. 고려 초기의 왕권 강화와 국가 체제 완성 (광종~성종)
태조사후 혜종이 즉위하면서 왕권이 크게 약화되어 호족들의 세력이 대두되면서 태조의 노력으로 유지해 왔던 호족연합정권의 과도체제가 사실상 붕괴되고 이에 따라 그동안 잠재해 있었던 왕실과 호족간의 대립은 곧 정면충돌로 이어졌습니다. 이러한 정치적 혼란과 불안이 더해진 가운데 혜종이 불과 2년 만에 세상을 떠나고 그 이복동생인 요가 3대왕인 정종으로 왕위에 올라 왕실과 호족간의 충돌에서 빚어진 큰 혼란을 수습하고 실추된 왕권을 회복하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이 또한 정종의 조급한 정책 추진(후원자인 서경세력에 대한 보답으로 추진했던 서경천도)과 왕권 강화 정책 추진으로 인한 호족 세력들의 반발로 인해 성공하지 못하였으나 혜종이후 실추된 왕권이 어느 정도 회복되어 광종, 경종, 성종으로 이어지는 고려 초기의 왕권 강화작업과 국가체제를 완비하는 데 보탬이 되었던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이러한 고려 초기 태조이후의 정치적 혼란과 갈등은 4번째 임금인 광종 대에 이르러 왕권의 강화작업과 대대적인 숙청에 맞물려 차츰 안정되고, 더 나아가 국가 체제의 정비와 완성으로 마무리되면서 문벌사회라는 하나의 새로운 사회를 완성하게 되었습니다.
1) 광종시대의 의의
훗날 조선의 이야기이지만, 태종의 왕권 강화 작업이 세종조의 융성기로 이어졌듯이, 고려 4대 임금인 광종의 왕권강화 작업과 개혁은 훗날 5대 경종과 6대 성종조의 국가 체제의 정비와 완성으로 마무리 되었습니다.
고려 시대 전기의 역대 임금 가운데 비교적 긴 26년을 재위한 광종을 두고 훗날 성종조의 정치가요 학자인 최승로는 시무 28조에서 즉위한 해에서 8년에 이르기까지는 정사가 맑고 밝았으며, 상벌이 남발되지 않았다는 말로서 그의 재위 초기가 상당히 훌륭했음을 극찬 하였습니다. 그러나 말년에 이르러 불교를 혹신함과 아울러 무고한 사람을 많이 죽여 처음과 같이 하지 않았던 들 어찌 재위 26년에 수가 51에 불과 하였겠느냐면서 강하게 비판한 바 있습니다.
이것은 광종의 치세가 처음에 비해 많이 흐트러졌다는 비판으로서 당시 광종의 왕권강화를 위한 일련의 조치들과 대대적인 숙청에 대해 이 무렵의 신하들이 대체로 부정적인 시각으로서 견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광종의 이러한 일련의 개혁 작업들은 앞으로 고려 사회가 어떤 방향으로 전개되어 나가는 지에 대해 나름대로의 길을 제시한 것으로서 그 의미는 사뭇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광종의 이러한 노력들이 없었다면 성종조의 유교 정치와 국가 체제 완성 작업은 훨씬 험난한 길을 걷거나 혹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리라 여겨집니다.
2) 광종과 왕권의 강화를 위한 일련의 움직임들
광종은 태조의 4남으로 신명순성황후 유씨의 3남이자 3대왕 정종의 동복동생으로서 이름은 소였습니다. 25세의 젊은 나이로 선왕인 정종의 선위를 받아 즉위한 그는 이미 왕자 시절부터 혜종, 정종 등 역대 선왕들이 호족들의 세력에 짓눌려 제대로 정사를 돌보지 못했음을 간과하여 당시의 정세의 흐름에 맞추고자 처음 재위 7년간은 비교적 온건한 방법으로서 호족들의 세력을 무마해 가면서 차츰 왕권의 안정을 도모하고자 하였습니다.
이를테면, 당 태종의 선정의 교훈이 되는 정관정요를 탐독하여 국정의 본보기를 삼고자 노력한다든지, 전술한 대로 국초의 공로자를 선정하여 후히 포상하는 등 그때까지만 해도 강력한 힘을 지녔던 호족들의 회유에도 힘을 기울여 그들의 세력을 부드러운 방법으로 제어하고자 한다든지 하는 것 등은 바로 광종 재위 초기의 주요 내용이었습니다. 때문에, 왕실과 호족간의 긴장관계가 광종 초까지 풀어지지 않았다는 지난번의 이야기는 바로 이러한 정세의 흐름 때문이라 할 수 있죠.
나름대로의 왕권 안정 작업이 실효를 거두고 있다고 판단한 광종은 독자적인 연호사용과 함께 왕의 권위와 위상을 드높이려는 작업에 착수하게 됩니다. 곧, 대내에 태조의 천수 이래로 사용되지 않았던 연호를 광덕이라고 선포하는 동시에 이당시 중국의 5대 10국이라는 혼란기 속에서 나름대로 왕조를 잘 유지하고 있었던 후주와 외교관계를 맺어, 새 국왕으로서의 지위를 확보하는 등 정치적 위상 확립에 많은 힘을 기울였습니다.
이러한 노력으로 점점 왕권의 토대가 자리 잡혀 가게 되자 광종은 다시 그 7년부터 11년에 이르는 5년 동안 본격적으로 호족세력을 억압하기 위한 제도적인 장치를 시행하기 시작합니다. 그 첫 번째로 나온 것이 바로 광종 7년인 956년에 시행된 노비안검법이었습니다. 이것은 전국의 노비들을 조사하여 본래 양인이었던 자들을 해방시켜 원래의 지위로 되돌리는 제도였습니다. 이 제도는 이미 태조 때에도 시행된 적이 있었지만 호족, 공신들의 연합체 정권의 성격을 띤 태조로서도 손쉽게 시행하지 못했었던 것들이어서 광종의 과감한 결단에 공신들은 원망했으나 감히 말하는 사람이 없었을 정도로 왕권은 차츰 강화되어 갔습니다.
3) 광종의 개혁을 뒷받침한 사람들
모든 역사를 살펴보더라도 어느 나라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개혁을 추진함에 있어서는, 그 개혁을 위해 뒷받침하는 사람들이 항상 전제되어 있어야 합니다. 개혁은 주체자 혼자서만 단행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 개혁을 뒷받침하는 사람들은 참신성이 있어야 하고, 주체자를 위해 많은 힘이 되어 주어야 할 능력이 갖추어 져야 합니다.
또한, 개혁을 단행하는 데에 있어서 우선시 되어야 할 것은 그 시대의 요구사항과 그 시대의 사람들 모두가 공감이 가는 개혁이 되어야 합니다. 가까이는 우리 현대사에서 멀게는 고대 내지는 중세에 있어 개혁이 실패로 돌아가게 된 것은 바로 이러한 것을 묵과하고 성급하게 개혁을 이끌어 나가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혁의 표적이 되는 기득권층의 반발을 받아 실패로 돌아가고 그 개혁 주체자 자신도 비참하게 몰락한 것을 우리는 역사에서 얼마든지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것을 감안해 놓고 생각한다면 고려 광종의 개혁이 실패했다고 단정할 수 있을까요? 물론 아니죠. 후일 최승로가 성종에게 올린 시무 28조의 광종에 대한 비판은 유교 정치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잘못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비판의 대상이 되었던 것입니다. 광종의 왕권강화를 위한 개혁정치가 고려 전기 국가 안정화의 밑거름이 되었다는 것은 이미 전의 여러 회에서도 누누히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만, 광종의 개혁과정에서 많은 호족들이 희생된 것만큼은 부인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광종의 개혁정치는 분명히 왕권의 강화를 위한 일련의 작업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광종의 개혁정치에는 광종이라는 주체자 이외에 그 정치를 지지했던 세력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 귀족세력들을 억누르고 왕권을 강화하기까지에는 어떠한 사람들이 이 개혁 작업을 뒷받침해 주었을까요?
광종의 개혁을 뒷받침했던 사람들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선 하나는 중국에서 고려로 귀화해 온 지식인층들이며, 또 하나는 참신성을 지닌 신진 관료층. 또 하나는 국초 이래 숭상되어 왔던 불교측 인사들로 꼽을 수 있습니다. 우선 광종 시대 중국은 5대 10국이라는 분열기를 맞고 있었고 이 혼란기를 틈타 많은 지식인층이 고려로 귀화해 오게 됩니다. 특히, 광종조에는 후주와의 교류가 빈번해 지면서 이에 따른 후주출신의 지식인 계층들이 대거 고려로 들어오게 되는데, 이때 광종에게 과거제라는 획기적인 인재 등용책을 건의했던 쌍기라는 인물은 바로 이러한 지식인 계층 가운데 하나로서 그는 과거제 시행 건의 외에도 광종의 개혁정치과정에 있어서 후주의 그것과 연관지어서 많은 조언을 함으로서 광종의 왕권강화를 위한 개혁정치에 큰 힘을 불어 넣었던 대표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이러한 후주 출신의 지식인들이 광종의 개혁을 위해 대거 등용되자 후일 여러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게 되는데 최승로의 비판 또한 여기에 예외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광종의 개혁정치를 뒷받침했던 사람들로서 또한 광종대의 과거 급제자들을 꼽을 수 있습니다. 이들은 다른 호족들과는 달리 유교경전에 기반을 둔 학문적 소양과 문학적 재능을 갖춘 관료들을 뽑는 과거라는 제도를 통해 관계로 진출한 인물들로서 광종의 재위기간에 확장시킨 문한기구와 근시기구에 참여하여 광종의 개혁 작업을 뒷받침해 주었으며, 광종 자신도 재위 초에 정관정요를 탐독했을 정도로 유학에 깊은 관심을 보이기도 합니다. (김용선, -광종- [한국사 시민강좌] 13. 변혁기의 제왕들, -일조각, 1993-) 그렇지만, 일부 유학자들은 이러한 광종의 전제주의적 개혁정치에 비판을 가하게 되는데, 최승로가 이에 해당되는 대표적인 인물이라 하겠습니다.
개혁 작업에 참여했던 마지막 계층으로는 불교계가 있습니다. 이것은 당대의 명승인 균여대사와 광종과의 협조적 관계에서 잘 알 수 있는데 균여대사는 광종의 전제정치의 이데올로기를 사상적으로 뒷받침해 주었던 것이며(박용운, [고려시대사] (상) -일지사, 1987-), 귀법사의 창건도 이러한 이데올로기를 확산하려는 그의 의도였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광종이 불교를 깊이 믿게 된 사실에 대해 무고한 사람을 많이 죽여 그 죄업을 씻어 보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만, 이것은 그런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불교를 깊이 심취하여 더 적극적으로 개혁 작업에 나서겠다는 정치적인 의도와도 연관되어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처럼 광종 재위 26년의 개혁정치기간동안 그를 뒷받침했던 인물들은 상당히 있었고 대부분 참신성을 지닌 인물들이었습니다. 이러한 인물들이 있었기에 광종의 개혁정치도 비록 비판을 받기는 하지만, 어느 정도 실효를 거두었고 이러한 개혁정치가 이미 누차에 걸쳐 말씀드린 바와 같이 고려 전기 국가 체제를 완성하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는 데에 그 의의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역사에서 이런 사실을 알고 참신한 인물들로서 모든 사람들에게 공감이 될 수 있는 개혁이 전개되었다면, 우리 역사의 흐름은 분명 달라졌으리라 생각해 봅니다.
4) 경종의 정국 안정 노력과 전시과 체제의 등장
광종이 재위 26년, 5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그의 왕자 주가 왕위를 이어 5대 임금으로 즉위하였는데, 이가 경종(景宗)입니다.
광종의 재위 후반부에 있었던 대숙청으로 인해 구신으로 살아 남은 자가 불과 40인이었을 정도(최승로의 시무 28조)로 광종의 대숙청은 그만큼 어마어마했고, 그렇게 해서 많은 호족들이 대거 죽음을 당해야 했습니다.
이런 가운데 광종이 죽고 경종이 즉위하자, 숙청은 어느 정도 진정되었습니다. 곧, 경종은 즉위하자마자 숙청을 중지하고 죄인들을 대거 방면하는 등 호족들과의 관계 개선을 꾀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로 인해 다시 구 호족세력들이 대거 등장하게 되자 이번에 된서리를 맞은 것은 다름 아닌 바로 광종대 정계에 진출한 신진 세력들이었습니다.
경종은 전대에 참소를 입은 사람들의 자손에게 복수하는 것을 허락하여 또다시 피바람이 몰아쳤습니다. 이때 경종이 생각을 갖고 보복의 악순환을 끊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들지만, 이것도 잠시 뿐이어서 보복을 다시금 금지시키고, 재등장한 구 호족계열도 광종이후로 그만큼 위축되어 있었으므로 정국의 안정을 도모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정치 보복의 악순환에 이어 차츰 정국이 안정되어가자 나타난 것이 바로 경종 1년 11월에 마련된 전시과라는 그 당시에 있어서는 획기적인 제도의 등장이었습니다.
후일 다시 말씀드리겠지만, 이 전시과라는 제도는 4색 공복과 인품의 요소까지 참작하여 지급되는 것으로서 여기에서도 다시 몇 단계로 구분하여 전지와 시지를 지급하는 제도이며 이것은 그 당시 지배계층을 모두 포괄하고 있었고 문무 양반의 분립 및 관직 서열에 의한 체계화 등의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하였습니다.(박용운, 앞의 책, 1987)
고려의 여진 정벌과 동북 9성의 축조
1. 북방 정세의 변화와 고려의 대응
고려가 숙종-예종 시대로 이어져 오면서 내외적으로 안정이 계속되는 가운데 그 무렵, 고려 북방의 이민족들인 거란(요)과 여진에 심상치 않은 기운이 감돌기 시작하였습니다. 곧, 여진의 추장으로서 후일 금나라를 세워 태조가 되는 추장 아골타에 의해 그때까지만 해도 뿔뿔이 흩어졌던 여러 부족들을 하나로 통합하여 막강한 세력을 형성하기 시작하였고, 고려와 세 차례의 전쟁을 치루면서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던 거란은 이 시기에 이르러 쇠퇴의 길에 접어들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주변 정세의 영향을 받아 그때까지 안정을 누리고 있었던 고려로서는 새심 북방의 문제에 대해 불안감을 지울 수 없게 되었습니다.
숙종시대부터 급속도로 성장해 온 여진들의 세력을 누르기 위해 고려 조정에서는 적절한 회유책을 통해 그들을 무마하고자 노력하였지만, 이미 팽창할 대로 팽창한 여진의 세력을 억누르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이러한 노력이 역부족이었음을 깨달았던 고려에서는 전쟁의 불가피성을 판단하고 이에 숙종의 명을 받아 당시 문하시랑평장사라는 벼슬을 지내고 있던 임간이라는 사람을 동북면의 병마사로 임명하여 여진의 군대를 물리치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기마중심의 부대를 보병중심의 부대가 이긴다는 것은 그 자체가 힘든 것으로, 임간은 이러한 여진의 부대의 특성을 살피지 못하고 얕보고 덤벼들었다가 오히려 크게 패하고 말았습니다. 이에 고려 조정에서는 패배한 책임을 물어 임간을 해임하고 다시 윤관을 행여병마도통이라는 벼슬에 임명하여 다시 여진과 싸우도록 하였습니다. 훗날 여진정벌의 영웅으로 동북 9성의 축조까지 담당했던 윤관이 비로소 이 여진과의 전쟁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윤관 역시 여진과 싸워 많은 병사를 잃고 그들과 화의를 맺는 선에서 전쟁의 분위기를 가까스로 잠재우는 데 그쳤습니다.
이렇듯, 북방의 불안감이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고려 조정에서는 기마병제 우위의 여진에 맞서기 위해 획기적인 군제의 개편을 도모하게 되는데, 별무반이라는 군대가 조직된 것은 바로 이와 같은 배경에서였습니다. 윤관의 건의에 따라 설치된 별무반은 기병 중심의 신기군과 보병 중심의 신보군, 그리고 승병(승려 군인)들로 중심이 된 항마군을 갖추고 있었는데, 이미 여진과의 싸움에서 패배를 경험한 바 있던 윤관으로서는 기마병 중심의 여진에 맞서 싸우기 위해서는 보병 중심의 군대 편제는 역부족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기마병과 승군을 보완한 획기적인 군제의 개편을 숙종에게 건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창설된 별무반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나이 스물 이상의 남자라면 누구나 가담해야 했으며, 가담하는 자들 가운데 말을 가진 자나 말을 다룰 수 있는 자는 모두 신기군으로, 말이 없는 나머지는 모두 신보군인 보병에 편제 되었습니다. 또한 승려들은 따라 항마군을 조직하여 군사훈련에 참여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렇게 성립된 별무반은 모든 백성들이 전면전을 치루기 위해 조직된 국가 총력군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별무반의 창설을 계기로 고려는 더 한층 강도 높은 여진 정벌을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추진하는 과정에서 숙종은 급작스레 세상을 떠났고, 그 아들 예종이 즉위하면서 이제 여진정벌이라는 대업은 예종에 의해 대물림되어 본격적으로 추진되었습니다.
2. 윤관의 여진정벌과 동북 9성의 축조
숙종때 조직, 정비된 군대를 바탕으로 하여 1107년이던 예종 2년에 고려는 본격적인 여진정벌을 단행하게 되었는데, 총사령관인 원수에 일찍이 여진과의 전쟁 경험이 있었던 윤관이, 부원수에 오연총이 각각 임명되어 약 17만 대군을 이끌고 북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이때 예종은 장병들의 사기를 북돋아 주고자 친히 서경에 까지 행차하였습니다.
예종의 전송을 받으며 동북 국경으로 진격한 윤관과 오연총은 정주와 장주 두 고을에 군대를 파견하여 본격적으로 여진 군대를 몰아내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정주와 장주의 싸움에서 이긴 것을 시작으로 윤관의 군대는 1107년 10월부터 그 이듬해인 1108년 (예종 3) 3월 까지 약 5개월에 걸쳐 여진 정벌 작전을 추진하였고, 고려 군대의 토벌에 당황한 여진족 또한 생존을 위해 결사적인 저항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여진 정벌 작전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고려군은 여진족의 결사적인 저항에 밀려 부사령관이던 오연총이 중상을 입었고 윤관 또한 여진족의 포위에 휩싸이는 등 한때 큰 위기에 몰린 적도 있었지만, 척준경의 맹활약에 힘입어 함경도 일대에서 기승을 부리던 여진의 세력을 북으로 몰아내는데 성공하여, 지금의 함흥평야 일대의 영역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였는데, 이때 장악된 적지의 촌락만이 무려 100여개가 넘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차지한 영역에 윤관은 곧 방어기지인 9개의 성을 축조하게 되는데, 작전이 거의 끝날 무렵이던 1108년 1월에는 북방 동계에 6개의 성을 완성하여 공험령에 비를 세우고 국경으로 정하게 되었습니다. 조선 초기에 편찬된 고려사에는 이 6성을 함주, 영주, 웅주, 길주, 복주, 공험진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때 윤관이 점령한 지역은 그 면적이 3백리로서 동쪽으로는 큰 바다에 접해 있고 서북방으로는 개마산을 끼고 있었으며, 남쪽으로는 장주와 정주 두 고을에 접해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해 3월에 이 6성에 의주(평안도 의주와 지명이 같음), 통태진, 평윤진 세 성을 더해 9성을 완성했는데, 이것이 윤관의 동북 9성입니다.
3. 동북 9성의 위치는 구체적으로 어디였는가 ?
조선초기에 편찬된 고려사에는 윤관이 축조한 동북 9성의 위치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곧 함주, 영주, 웅주, 길주, 복주, 공험진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 윤관이 초기에 쌓았던 6개의 성이고, 의주(또는 숭녕진), 통태진, 평윤진(또는 진양진)에 성을 쌓아 3성을 더해 9성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위치와 지역명칭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많은 논란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기록에 따라서는 9성 가운데 숭녕진과 진양진, 혹은 의주나 평윤진으로 보는 견해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특히 여기서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은 9성 가운데 하나인 공험진의 위치인데요. 이 공험진의 위치야말로 동북 9성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할 수 있는 단서가 된다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최근까지 제기되고 있는 동북 9성의 위치 문제는 바로 공험진의 지형 문제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공험진의 위치를 둘러싸고 제기되고 있는 대표적인 학설을 몇 가지 들어보면 대략 다음과 같이 나누어집니다.
첫째, 세종실록 지리지나 신증동국여지승람과 같은 조선시대의 관찬 지리서나 지도류에는 9성 가운데 공험진의 위치가 두만강 북쪽 7백리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을 근거로 삼아 두만강 북쪽 700 리에 있다는 이른바 두만강 북 7백리설이 있습니다.
둘째, 윤관이 진출한 북쪽 지역의 한계는 길주 이남으로 한정되었다는 17세기의 실학자인 한백겸의 주장에 따르는 길주 이남설이 있습니다.
셋째, 이케우치를 비롯한 여러 명의 일본학자들의 주장에 따라 현재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함흥평야설이 있습니다. 이들은 대체로 고려사의 기록을 근거로 하여 세종실록 지리지나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은 잘못되었다고 하면서 함흥 평야설을 강력히 주장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고려사의 기록에서 언급된 것은 의주, 통태진, 평윤진을 제외한 6개의 성에 대한 기록이기 때문에 이 함흥 평야설에 많은 문제가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이 세 가지의 대표적인 학설 말고도 공험진을 오늘날 경원의 아오지보라고 보는 두만강북설 도 있습니다.
이러한 여러 가지 학설이 제기되면서까지 9성의 구체적인 위치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이들에 대한 구체적이고 정확하게 밝혀지고 있지 않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위치 여부가 분명하고 불분명한 것을 떠나 이 곳 지역이 여진족들에게 있어 중요한 생활터전이었음에 대해서는 부인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4. 동북 9성의 반환
오늘날 축성 위치에 대해 논란거리가 되고 있는 동북 9성은 고려의 축성 이후 이를 둘러싸고 많은 문제가 촉발되었습니다. 비록 고려가 9성을 설치하고 여진정벌에 성공하기는 하였으나, 여진의 끊임없는 반격이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한편으로는 군사적인 위협을, 다른 한편으로는 외교 경로를 통해 9성의 반환을 조건으로 화의를 제의해 오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여진의 강, 온 양면의 9성 반환 요구로 인해 고려 조정의 내부에서 조차 반대의견이 들끓기 시작하였고, 급기야 숙종과 예종으로부터 많은 신임을 얻었던 중신 김인존이라는 인물에 의해 반환론이 정식으로 제기되었습니다. 처음부터 여진정벌에 반대하고 있었던 김인존은 9성으로 인해 여진과 고려 모두 많은 피를 쏟아야 했다고 전제하면서, 고려의 9성 차지는 여진과는 물론, 거란과도 분쟁을 일으킬 소지가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김인존의 이와 같은 주장으로 모든 조정 백관들이 이에 적극적으로 동조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해 박승중, 한상이라는 인물들은 이에 맞서 반환론을 공격하며 9성을 죽음으로서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였지만, 이미 대세는 기울어져 있었습니다. 게다가 여진을 정벌했던 윤관조차도 여진 측의 강화 제의를 받아들여 그들의 교섭단을 위해 길을 열어두고 있었는데, 이것은 부사령관이던 오연총이 이 무렵 영주성에서 대패하여 고려군의 사기가 한 풀 꺾여 있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곧, 여진 정벌 작전을 추진하던 군대 내부에서 조차 여진과의 강화를 묵인하는 분위기가 팽배해져 있었다는 것으로 미루어 9성의 반환으로 전쟁을 종결해야 한다는 생각은 조정 관원이나 군대 지휘관이나 양측 모두 에게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윤관에 의해 축조된지 1년여 남짓만인 1109년 7월, 마침내 예종은 신하들에게 9성의 반환에 대해 찬반 여부를 물은 끝에 대다수 관료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9성 반환을 결정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여진이 다시 고려에 침입하지 않고, 매년 고려에 조공을 바친다는 전제하에 이루어지게 된 것이죠. 여진과 고려와 강화조약이 맺어지게 됨으로서 9성의 반환은 기정사실화되었으며 고려군이 9성에서 철수함으로서 사실상 종전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고려의 여진정벌과 동북 9성의 축조는 채 1년여 남짓만에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윤관과 오연총 등은 작전 과정에서 있었던 패전의 책임을 물어 죄를 치루어야 했고, 여진정벌의 주역으로 떠올랐던 이들은 역사의 전면에서 쓸쓸하게 퇴장하고 말았습니다.
9성 반환 이후, 고려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충격적인 결과를 맞게 되는데, 바로 금으로 국호를 정하여 나라를 세운 여진이 고려에 군신관계를 맺을 것을 요구해 왔기 때문 입니다. 과거 부모의 나라로서 그들의 섬김의 대상이 되어 왔던 고려로서는 뒤통수를 맞게 된 것이죠. 하지만, 결국 그들의 요구와 압력에 못 이겨 군신관계는 성사되었고 예종과 많은 신하들은 9성의 반환을 후회하였으나, 이미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5. 여진정벌과 동북 9성 축조의 의의
여진정벌과 동북 9성의 축조는 태조 이래로 추진해 왔던 북진정책 및 고구려의 고토 회복이 결실로 이어지는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고려의 강력한 대외적 이미지가 부각되는 것이기도 하였습니다. 9성 반환 이후 고려가 여진과 군신의 관계를 맺고 신하의 나라로 전락하게 되는 것을 보면 고려의 위상이 여진 정벌때 까지 얼마나 컸었는가를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고려 500년, 의문과 진실> 이라는 책을 쓴 신진 학자 김창현 등은 여진정벌과 동북 9성의 축조를 우리 역사의 진정한 제일대사건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묘청과 김부식의 문제를 언급하면서, 바로 9성 축성과 여진정벌 문제를 언급하였는데요. 신채호가 주창한 묘청의 난이 조선역사 일천년이래 일대 사건이라는 관념을 정면으로 뒤집습니다. 그러면서도 현실에 눈이 멀고 오직 현실에만 안주하여 9성의 반환을 요구한 관료들에 대해 단호한 어조로 비판하고 있습니다.
사실 윤관의 여진정벌과 동북 9성의 축조는 고려가 거란, 여진 등 주변 북방 국가와의 관계에서 좀 더 유리한 위치에 놓여 있을 수도 있었습니다. 적어도 고려의 우위를 바탕으로 대외관계를 주도해 나갈 수 있었을테니 말입니다. 그랬다면, 훗날 묘청의 금나라 정벌론은 아예 처음부터 생겨나지도 않았을테니까요. 하지만, 현실만을 생각하고 나라의 장래를 생각하지 못한 관료들의 안일함은 분명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역사에 만약이라는 단어를 붙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지만, 만일 우리가 이때 여진정벌을 완수하여 동북 9성을 끝까지 지켰더라면 분명 우리의 역사는 180도 이상 바뀌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적어도 현실에 안주하려 했던 어리석은 위정자들이 그들이 얕보았던 이민족에게 굴복되어 후회하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역사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현실에만 눈이 멀었던 위정자들로 인해 우리 민족은 또 다른 고통을 겪어야만 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