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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을 치유하시는 예수님(요21:15-20)-2014.3.23
우리 주 예수님은 인간들로부터 모진 고난과 배신과 아픔과 상처를 당하신 분이요, 상처를 치유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상처 입은 치유자라고 말합니다. 그분께서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기 때문입니다(사53:5). 그분은 이 땅의 어떤 인간도 감당할 수 없는 깊은 상처를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육신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사 가장 악랄한 죄인 취급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요즘 치유목회가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적치유라는 말들을 자주 사용합니다. 그만큼 현대인들이 많은 상처를 받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아주 사소한 일에 상처를 받습니다. 사실 들어보면 별 것도 아닌 것에 상처를 받습니다. 그만큼 심령이 약하다는 것입니다. 건강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미안합니다. 상처는 어떤 사람이 잘 받습니까? 건강하지 못한 사람이 잘 받습니다. 건강하면 왠만한 바이러스에 끄떡도 안합니다. 건강하지 못하기 때문에 미세한 바이러스가 침투하면 이겨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상처는 외적인 상처도 있지만 내적인 상처도 있습니다. 그런데 외적인 상처는 보이기 때문에 발견도 쉽고 치유도 쉽습니다. 하지만 내적 상처는 잘 보이지도 않고 드러나지도 않기 때문에 치유도 어렵습니다. 치유하는 시간도 오래 걸립니다. 그런데 내적 상처는 대부분 모르는 사람보다 아는 사람으로부터 받습니다. 멀리 있는 사람보다 가까이 있는 사람으로부터 받습니다. 주로 가정이나 교회나 가까운 지인들로부터 받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가정에서 부모형제간에 받은 상처 때문에 평생 울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부부간에 주고받은 상처 때문에 평생 원수같이 살아가는 부부들도 많습니다. 혹은 믿음 생활하면서 받은 상처도 적지 않습니다. 전도해보면 어떤 식으로든지 교회 안에서 받은 상처 때문에 믿음을 파선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목사로부터 받은 상처, 믿음의 지체들로 받은 상처 때문에 아파하는 영혼들이 정말 많습니다.
문제는 내적 상처가 잘 드러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잘 드러내지도 못하기 때문에 정말 오래간다는 것입니다. 치유 받을 방법도 쉽지 않고 치유도 어렵습니다. 믿었던 사람으로부터 받은 상처는 분노와 배신감 때문에 더욱 아프고 고통스럽습니다. 그런 상처는 내적인 아픔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생명까지도 위협합니다. 때문에 빨리 발견하여 속히 치유 받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최고의 상처를 입은 예수님과 자기 일생에 최고의 치유함을 받은 베드로의 이야기입니다. 사실 베드로하면 자타가 공인하는 예수님의 수제자입니다. 그런 수제자 베드로와 예수님의 만남이 오늘따라 너무 어색하고 뻘줌한 분위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도 살면서 어색한 만남을 경험해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정말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나 어색한 만남 말입니다. 지금 천하의 배신자 베드로가 주님 앞에 서 있습니다.
(1) 배신자 베드로
우리가 알다시피 베드로는 닭이 울기 전에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베드로가 주님께 최고의 아픈 상처를 입힌 것입니다. 천하의 베드로가 말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베드로는 그럴 수 없습니다. 항상 주님 앞에서 큰 소리치며 살아왔던 베드로가 아닙니까? 무엇보다도 그는 자타가 공인하던 수제자가 아닙니까? 그런 사람이 자기 스승이요, 메시아를 하루 저녁에 세 번이나 부인하다니요. 세상에 다른 사람은 몰라도 베드로는 그럴 수 없습니다. 베드로가 어떤 사람입니까?
마태복음 26장33절을 보면,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다시 35절을 읽어 보십시오. “베드로가 가로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그런데 불과 몇 시간이 지났다고 그런 뻔뻔스런 배신을 하다니요? 아니 주님을 부인하는 정도가 아니라 저주하며 맹세까지 하다니요? 도대체 무슨 양심으로 그런 고백을 했단 말입니까? 그런데 사실은 그 모습이 바로 우리 모습입니다.
베드로는 주님께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힌 사람입니다. 누구보다 베드로로부터 배신당한 주님의 상처는 아팠을 것입니다. 천하에 베드로가 배신하다니요? 정말 치유하기 힘들 정도로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상처는 받은 사람만 아픈 것이 아닙니다. 상처를 입힌 사람도 아픕니다. 평생 불효하며 부모님 가슴에 대못을 박고 살던 자식이 나중에 깨달음을 얻고 불효의 한 때문에 일생을 고통속에 살아가는 것처럼 말입니다.
베드로가 주님께 상처를 입혔지만 자기 자신이 받아야 할 양심의 상처도 그 이상이었을 것입니다. 주님께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입힌 베드로가 얼마나 괴롭고 고통스러웠을까요? 그는 더 이상 주님앞에 나아갈 면목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동료 제자들이나 다른 사람들 앞에서 낯을 들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빈대도 낯짝이 있는 겁니다. 아마도 그는 살 가치도 없는 놈이라고 자책하며 고통스런 날을 보냈 는지 모릅니다. 주님을 부인하고 밖으로 나가 통곡했던 것을 기억해 보십시오(마26:75).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자신이 하염없이 밉고 죽고만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 양심도 없었다면 화인맞은 양심이었겠지요. 사람 같으면 그래야 합니다. 아마도 베드로 자신도 충격적인 상처를 받았을 것입니다. 물론 베드로의 상처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은 상처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 입은 상처이지만 그 상처의 골은 상상 이상으로 깊었을 것입니다. 상처는 반드시 외부로부터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스스로가 주기도 합니다.
베드로의 상처는 자기가 스스로 입은 상처입니다. 마치 방울뱀처럼 말입니다. 방울뱀은 자신이 궁지에 몰리면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자기 몸을 물어뜯고 자해 소동을 벌인다고 합니다. 실제로 해외토픽에 화가 난 아프리카 방울뱀이 자기 몸을 먹이로 착각하여 삼키고 있는 기사가 난 적이 있습니다. 인간도 자기 분을 억제하지 못하고 자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결국 자기 자신에게 엄청난 상처를 입히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기 스스로 낸 상처로 인해 양심의 무서운 심판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상처를 잊어버리기 위해 갈릴리 바다로 몇 사람의 동료들을 선동하여 고기잡으러 갔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는 밀려오는 자괴감을 이겨내지 못하고 괴로웠을 것입니다. 아마 요즘말로 맨붕상태가 아니었을까요? 혹시 우리안에 베드로같은 상처는 없을까요?
(2) 베드로 너마저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베드로의 배신은 주님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었는지도 모릅니다. 아마도 비수를 들이대는 것보다 더 아팠을 것입니다. 그만큼 믿는 제자였기 때문입니다. 어찌보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외치던 유대인들보다 더 아픈 상처였으며, 예수님을 직접 십자가에 처형한 로마 군인들보다 더 큰 상처가 되었을 것입니다. 아니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팔아버린 가룟 유다의 상처보다 더 아팠는지 모릅니다. 사람은 누구나 믿었던 사람에게 받는 상처가 아프고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 상처는 감당하기 힘든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의 입을 통해 회자되는 케이사르의 유명한 어록을 생각해 보십시다.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공화정을 평정하고 스스로 황제가 된 율리우스 케이사르(시저)의 죽음을 보십시오. 세상을 평정하고 천년이라도 갈 것 같은 그의 기세가 권불1년으로 끝나고 맙니다. 시저가 황제에 오른 이듬해 기원전 44년 3월15일 그는 원로원을 향해 가다가 광장입구에서 40여명의 공화파에 둘러싸입니다. 그들은 일제히 단검을 휘둘렀고 그는 칼에 맞아 비틀거립니다. 그 때 누군가 뒤에서 최후의 일격을 가합니다. 바로 친아들처럼 아끼던 심복중에 심복 브루투스였던 것입니다.
죽어가던 시저가 이렇게 외칩니다. “브루투스, 너 마저도”. 얼마나 충격이 컸겠습니까?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이 한마디 말속에 뼈가 들어 있습니다. 배신과 분노를 무엇으로 설명하겠습니까? 이처럼 믿었던 사람으로부터 배신을 당할 때의 상처는 치유받기가 정말 힘든 것입니다. 시저는 그토록 믿었던 브루투스로부터 면종복배를 당한 것입니다. 브루투스는 시저를 암살한 후, ”내가 그를 죽인 것은 그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보다 로마를 더욱 사랑했기 때문이다.“고 말했답니다. 그런 변명이 무슨 설득력이 있겠습니까?
아마도 우리 주님도 그런 말씀을 하시지 않았을까요? “베드로 너 마저도”.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왜 하필이면 너냐고 말입니다. 우리 주님의 배신감은 정말 치유받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주님의 상처는 생각보다 골이 깊었을 것입니다. 솔직히 우리도 이해하기 힘들잖습니까? 혹시 여러분도 찰떡같이 믿었던 사람으로부터 배신을 당해 본 적 있으신가요? 그때 마음이 어떠셨나요? 그 상처가 얼마나 깊었나요? 그 상처가 얼마나 오래가던가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치유하러 오신 것입니다. 병든 영혼을 치유하고, 병든 땅을 치유하며, 병든 세상을 치유하고자 오신 것입니다. 당신이 치유하기 위해 오셨지만 세상은 주님께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혔습니다. 아니 자기 백성들마저도 말입니다. 요한복음1장11절에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라고 말씀합니다. 그만큼 상처가 큰 것입니다. 정말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단순한 치유자가 아닙니다. 상처입은 치유자이십니다. 몸소 당신이 상처를 체휼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치유가 정확하십니다. 건강도 잃어본 사람이 소중함을 압니다. 배가 고파본 사람이 배고픔의 설움을 압니다. 실패해 본 사람이 실패자의 마음을 압니다. 과부가 홀아비의 마음을 압니다. 상처입은 예수님은 인간의 상처를 누구보다 더 잘 아십니다. 그래서 가장 정확한 치유를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상처를 받았지만 상처를 치유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3) 그래도 베드로
비록 그럴지라도 우리 주님의 마음은 베드로에 집중하고 계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갈릴리 바다를 찾아갔을 때 베드로의 주변에는 무려 6명의 제자들이 더 있었습니다(2절). 그러나 어느 누구에게도 말을 붙이지 않으십니다. 오직 미우나 고우나 베드로입니다. 베드로의 무너진 자존심을 회복하기 원하시는 주님의 배려입니다. 주변에 있는 동료들에게도 베드로를 세워주시려는 주님의 의지가 돋보이는 장면입니다. 주님은 베드로를 끝까지 신뢰하고 계셨습니다. 베드로를 끝까지 믿어주십니다. 그래도 역시 베드로였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가장 마음에 걸린 사람이 베드로였을 것입니다. 주님을 부인한 베드로가 믿음과 양심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입고 고통 중에 있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를 찾아가 치유하기 원하신 것입니다. 상처 입은 베드로를 치유하사 회복하기 원하셨던 것입니다. 의외로 베드로의 상처는 깊었습니다. 사실 요한복음은 20장31절에 기록한 목적을 말씀하심으로 마무리되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21장이 별책 부록처럼 추가되어 있습니다. 마치 베드로를 치유하시기 위한 특별한 장처럼 말입니다. 베드로를 사랑하사 회복하시려는 주님의 적극적인 의지라고 생각됩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베드로를 찾아 오셨습니다. 배신자 베드로가 어떻게 주님을 맞이할 수 있었겠습니까? 아예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 버리고 싶었을 것입니다. 차라리 주님이 찾아오지 않으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을는지도 모릅니다. 어지간히 얼굴이 두껍지 아니하면 무슨 낯으로 주님을 뵐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주님이 그런 베드로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베드로의 상처를 치유하러 오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주님의 마음입니다. 주님은 죄인들을 먼저 찾아오셔서 화해하기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내가 먼저 손 내밀고, 내가 먼저 사과하고, 내가 먼저 용서해야 합니다. 주님처럼 말입니다.
상처의 근본적인 치유는 자기안에 있는 상한 감정을 밖으로 끄집어내는 것입니다. 자기감정의 상처를 끄집어 내지 않으면 치유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가끔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자기안에 담아둔 마음을 토해내고 후련함을 느낍니다. 내안에 쌓여있는 못된 감정들을 끄집어냈기 때문입니다. 화병은 한국인의 병입니다. 아프고 상한 것을 자기마음에 담아두고 참다가 생긴 병입니다.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하고 절제하다가 생긴 병이지요. 의외로 화병은 치유가 간단합니다. 그냥 누군가에 감정을 발설하면 됩니다. 분풀이라도 하면서 울면됩니다. 때로는 웃으면 치유가 되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자기안에 뭉쳐있는 나쁜 감정들을 밖으로 뽑아내는 것입니다. 하지만 서서히 빼내야 합니다.
마치 압력밥솥으로 밥을 하면 칙칙거리면서 수증기가 분출되어 나옵니다. 이른바 김이 빠져나온다고 말을 하지요. 김이 빠져나온 후에 뚜껑을 열어야 합니다. 만일에 김이 빠져나오지 않은 상태로 뚜껑을 열면 사고 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안에도 압박되어진 나쁜 감정들이 내안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소화기 전체가 아픔을 당하는 것은 물론이고 온몸이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독소가 찰 때마다 뽑아내야 합니다. 이른바 화를 치유하는 통로가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만일 그러지 아니하고 특정한 일이 생기면 그때는 대형 사고를 칩니다. 이처럼 우리 안에 있는 상처를 치유하려면 출구가 필요합니다. 그때그때마다 출구를 통해서 뽑아내지 아니하면 위험해지거든요. 다시 말해 스트레스를 푸는 요령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내안에 있는 못된 감정의 가스가 빠지는 것입니다. 가스가 차면 폭발할 위험이 있거든요. 서서히 완충작용을 통해서 거를 것은 걸러져야 합니다. 그러면 충격이 완화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취미생활이든지, 스포츠나 오락이나 여행이나 독서 그 어떤 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주님 안에서 풀어야 합니다. 주님 안에서 치유 받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세상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다보면 노폐물이 더 축적됩니다. 어떤 이는 술로 풀어보려고 하지만 절대 술로 풀 수 없습니다. 어떤 이는 자기가 좋아하는 취미라든지 다른 방법으로 풀어 보려고 하지만 그것도 안됩니다. 예수 안에서 풀어야 합니다. 믿는 자는 예배를 통해서 풉니다. 기도를 통해서 풀고, 찬양을 통해서 풀며, 말씀을 통해서 풀어야 합니다. 그래야 깨끗하게 풀립니다. 이른바 뒤끝이 없습니다.
내적 치유는 세상 그 어떤 것으로도 안됩니다. 우리 주님으로만 가능합니다. 우리 주님께 나오면 못 고칠 질병이 없습니다. 우리 주님은 당신의 상처보다 베드로의 상처를 소중히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를 치유하시기 위하여 찾아오신 것입니다. 항상 우리 주님은 그리 하셨습니다. 인간이 죄를 지어도 먼저 심방을 오셨고, 배신자에게도 먼저 찾아오셔서 손을 내미셨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도 먼저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만큼 베드로의 치유가 급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먼저 베드로의 상한 감정을 터치하십니다. 감정의 깊은 골을 치유하시기 위해 베드로의 감정을 먼저 자극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우리 주님은 베드로에게 무려 세 번씩이나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습니다. 정말 비슷한 질문을 세 번이나 반복하시는 주님의 의도가 무엇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세 번 주님을 부인한 베드로에게 회복할 수 있는 세 번의 기회를 주셨다라고 말합니다. 맞는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에게 세 번의 기회를 주신 것은 단순히 세 번 부인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 부인할 때 그때마다 감정의 온도가 달랐습니다. 처음에는 그냥 큰 뜻이 없이 부인했을 것입니다. 공포스러운 분위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러나 두 번째는 달랐습니다. “아닙니다” “아니라구요” “진짜 성질나게 그러시네, 정말 아니라니까요”. 상당히 신경질적인 반응입니다. 한번 감정을 조절하여 말해 보십시오. 마지막 세 번째는 아예 작심하고 부인합니다. 이른바 막가파식 부인입니다. “나는 그런 사람을 도무지 알지 못한다구요”. 아예 저주하고 맹세하며 부인합니다. 이제는 더 이상 안 볼 생각으로 저주하고 맹세한 것입니다. 상할대로 상한 자기감정의 분노를 폭발해 버린 것입니다.
베드로를 찾아오신 주님은 당시 베드로가 느꼈을 감정을 생각나게 하십니다. 그래서 첫 번째 질문을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이 사람들과 주님을 비교해서 물으십니다. 솔직히 주님과 이 사람들이 비교의 대상이나 되겠습니까? 하지만 베드로는 평상시에 주님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사랑한다고 큰 소리를 쳤기 때문입니다. 이런 믿음은 어린아이 같은 믿음입니다. 가끔 성도들 중에도 이런 성향의 믿음을 가진 자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대부분 다른 사람과 비교하기를 좋아합니다. 저 사람보다 내가 더 열심히 주의 일을 하는 것 같고, 주님을 사랑하고, 믿음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어린아이같이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베드로에게 그렇게 물으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항상 다른 사람보다 자기가 믿음이 좋고, 주님을 사랑하는 줄로 생각했거든요.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여 상대적인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교회안에도 베드로처럼 다른 사람과 비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베드로의 비교기질은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서도 계속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자기 죽음을 예견하신 주님에게 사도 요한의 죽음을 물어봅니다(21절). 여전히 그 버릇이 고쳐지지 않은 것입니다. 이처럼 한 사람의 습관이 바뀐다는 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때문에 주님은 어린아이 같은 베드로의 성품을 치유하기 원하신 것입니다. 이른바 상한 감정부터 치유하기 원하셨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존감에 돌이킬 수 없는 깊은 상처를 입었던 것이지요. 낮아질대로 낮아진 자존감을 끌어올려 줄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평상시에 가지고 있었던 비교하는 믿음부터 치유하기 원하신 것입니다. 첫 번째 질문에 대한 주님의 대답은 내양을 먹이라입니다. 여기서 세 번의 양이 나오는데 세 번의 양들의 상태가 다 다릅니다. 첫 번째 양은 젖먹이의 양이요, 두 번째는 청년기의 양이며, 세 번째는 성장이 완전히 멈추어버린 양입니다.
주님의 치유는 베드로의 감정적인 치유로부터 시작하여 자존감을 회복하시는 것입니다. 자존감의 치유는 주님의 사랑을 다시 한번 확인하시는 것입니다. 사랑이 회복되면 자존감이 회복됩니다. 자존감이 회복되면 사명을 감당하게 됩니다. 사명은 사랑이 회복되면 감당하게 됩니다. 사랑이 회복되지 아니하면 어떤 사명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사랑과 사명은 하나입니다. 사랑하는 만큼 사명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사명은 사랑이 없으면 감당할 수 없습니다. 사명을 감당한다고 할지라도 능률이 오르지 않고 자기 의만 드러납니다.
진정한 치유는 관계회복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관계가 회복되지 않은 상태로는 진정한 회복이 안됩니다. 관계회복이 되어야 사명도 회복되고, 내적 치유도 일어나는 것입니다. 때문에 진정한 치유는 가장 먼저 깨어진 관계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인간이 범죄함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깨어졌습니다. 깨어진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는 것은 관계회복입니다. 깨어진 관계가 복원이 되고, 무너진 관계가 세워지며, 멀어진 관계가 가까워지는 것이 회복입니다.
우리 주님은 베드로의 어린아이같이 상처 잘 받는 감정, 즉 무너진 마음을 가장 먼저 치유하시고(15절), 잃어버린 사명을 치유하시며(16절), 순교를 통한 절대적인 헌신을 요구하십니다(18-19절). 주님은 베드로를 완전히 치유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으로부터 완전히 회복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과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는 것은 단 한가지 밖에 없습니다. 그 회복은 우리 힘으로나 의지로는 안됩니다. 오직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중보자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그러지 아니하고는 어떤 회복도 불가능합니다.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회복밖에 없습니다. 우리 주님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분을 통하지 아니하고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때문에 우리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인생의 상처를 치유 받아야 합니다. 영육간의 모든 상처에서 치유 받기 원합니다. 물론 육체의 질병은 후패하여 쇠할 수밖에 없을지라도 영적 질병은 완전히 치유됩니다. 주안에 못 고칠 질병은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영적 질병을 치유 받아야만 하나님나라를 소유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생의 완전한 치유자이십니다. 할렐루야!!!(2014.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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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겁나게 기대되는 주일입니다.~~ 행복한 예종교회가 부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