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릎 꿇지 않았던 시간]/교보문고
파라과이 농업이민사 43년의 기록
돌덩이보다 단단한 ‘쇠덩이’가 되어
저자: 김성진화(김인순, 1947년)
●제1장: 도망치듯 떠나온 길, 환상과 현실의 경계
세상사 핑계 없고 사연 없는 일이 어디 있겠느냐마는, 돌이켜보면 나 역시 간절히 '탈출구'를 찾고 있었던 게 분명합니다. 여자라는 이유로 받아내야 했던 멸시의 날카로움, 아들만 바라보던 시어머니와 갈등을 피하기만 하던 '회피형' 남편, 그리고 언제나 내 편이 아닌 엄마 편이었던 철저한 '남의 편'에게 지칠 대로 지쳐 있었습니다.
1982년 10월, 세 딸을 데리고 선택한 파라과이 이민은 내게 그 모든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이었습니다. 지구 반 바퀴를 돌아 경유지인 칠레에 도착했을 때, 그 정연한 풍경에 매료되어 "여기서 그냥 살면 안 될까요?"라고 묻던 나의 철없던 기대는 파라과이 도착과 동시에 산산조각 났습니다.
엄청나게 더운 바람과 모래 냄새를 섞은 찌든 냄새, 1960년대 한국보다 못한 공항 밖 풍경. 마중 나온 현지인이 내뱉은 "저분들이 농업 이민자야? 제일 먼저 도망가겠는데"라는 비아냥은 비수가 되어 꽂혔습니다. 하지만 나는 아이들을 위해 못 들은 척 입술을 깨물어야 했습니다.
●제2장: 450만 평 밀림 속, 어미라는 이름의 사투
결국 우리 가족은 1,500헥타르(약 450만 평)에 달하는 거대한 밀림 속에 단 두 가구만 남겨지는 고립을 선택했습니다. 살기 위해 담력을 키워야 했습니다. 집 앞 풀밭을 정리하자 쏟아져 나온 100마리가 넘는 뱀 떼를 보며 토악질을 참아냈습니다.
어미로서 가장 참담했던 것은 자연의 무자비함이 자식들을 덮칠 때였습니다. 딸들의 몸속에 알을 낳은 파리의 애벌레, 즉 구더기를 핀셋으로 하나하나 뽑아내며 나는 가슴을 치며 통곡했습니다. "애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 이런 고생을 할까."
서른아홉에 얻은 늦둥이 아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아들의 머리 숨구멍 한가운데에 파리가 알을 낳아 병원으로 달려가던 밤, 수술대 위에서 "엄마"라고 울부짖던 아이의 목소리는 평생 내 가슴에 낙인처럼 남았습니다.
야구공만 한 우박이 슬레이트 지붕을 뚫고 쏟아지던 날, 온몸으로 아들을 감싸 안고 한 시간을 견디며 깨달았습니다. 나는 이제 돌덩이보다 단단해져야만 한다고.
●제3장: 무법천지의 습격과 무너진 이방인의 꿈
인생에 정답은 없다는 마음으로 겨우 터전을 일궈갈 즈음, '무토지 농민'들의 무단 점거라는 재앙이 닥쳤습니다. '빈자의 아버지'라 추앙받는 성직자가 배후에서 조종하는 그들은 약한 이방인의 땅만을 골라 유린하는 '약강강약'의 집단이었습니다.
어느 날 새벽, 농기구로 무장한 100세대의 무리가 함성을 지르며 우리 농장을 덮쳤습니다. 자식처럼 키운 소들은 그들의 식사가 되었고, 평생의 피땀인 트랙터와 농기계는 약탈당했습니다. 대사관에 호소해도 돌아오는 건 미온적인 태도뿐이었습니다. 자국민을 보호하지 못하는 조국의 무관심 속에 나의 젊음이 깃든 '산페드로 농장'은 영혼 없는 껍데기가 되었습니다.
비참함과 쓰라림에 몸부림치며, 나는 빈손으로 길바닥에 나앉아야 했습니다. 하소연할 곳도, 기댈 곳도 없는 이방인의 고독은 밀림의 어둠보다 더 깊고 차가웠습니다.
●제4장: 저승사자와의 조우, 그리고 기적 같은 만남
절망의 끝에서 나는 신비로운 체험을 했습니다. 정신은 깨어있으나 몸은 움직이지 않던 새벽, 검은 옷에 챙이 넓은 모자를 쓴 사자가 내 침대맡에 앉았습니다. 그는 "아직 데려갈 사람이 아닌데 왜 데려왔느냐"며 같이 온 존재를 꾸짖고는 사라졌습니다. 저승사자였습니다. 그 일 이후, 나는 거짓말처럼 다시 '살아야 한다'는 의지를 되찾았습니다.
그로부터 수십 년이 흘러 내 나이 일흔을 넘겼을 때, 내가 운영하는 작은 가게에 파라과이 현직 대통령이 찾아왔습니다. 그는 놀랍게도 과거 우리 농장을 무단 점거하도록 지휘했던 바로 그 성직자였습니다.
나는 서툰 스페인어로, 그러나 단호하고 또박또박 43년 전부터 일어났던 억울함을 그에게 쏟아냈습니다.
"왜 힘없는 외국인의 땅을 무자비하게 빼앗았느냐"고 묻는 나의 눈빛 앞에 대통령은 묵묵부답이었습니다. 빼앗긴 땅을 되찾을 순 없었지만, 내 삶을 산산조각 냈던 당사자 앞에서 당당히 내 한을 뱉어낸 그 순간,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제5장: 쇠덩이가 되어 서 있는 삶의 승전보
대통령은 아나운서였던 내 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네 엄마는 사막에 버려놓아도 살아남을 사람이다. 내 앞에서 얼마나 당당했는지 아니?"
지나온 세월을 갈무리하며 이제 나 자신에게 "참 수고했다"고 말해줍니다. 보통 사람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유별난 삶이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바보처럼 살았을지언정 남을 아프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 고통의 세월을 견디며 제 길을 잘 걷고 있는 아이들이 이제 나의 위안이 됩니다.
무법천지의 파라과이에서 가라앉지 않으려 발버둥 치다 보니, 나는 어느덧 돌덩이보다 더 단단한 '쇠덩이'가 되어 이 자리에 서 있습니다. 나의 젊음을 통째로 바쳤던 '산페드로 농장'에 이제 마지막 안녕을 고합니다.
"Adios Granja Sanpedro!!!"
지나온 세월은 지나온 대로, 그런 의미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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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의 감정은 정독하시면 더 깊이 느낄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김성진화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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