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 천지에 쇠말뚝을 박은뒤 제를 지내고 있는 일본인, 1919년 1월 22일 서거 직전 고종황제의 마지막 모습, 겁탈당하는 여인, 산채로 생체실험을 당하고 있는 731부대 희생자의 부릅뜬 눈….
일제 만행 현장을 생생하게 증언하는 사진 1000여점이 발굴됐다. 18일 발매하는 주간조선(1792호)은 100년 전 역사의 현장을 담은 이들 사진을 단독 입수, 지상 공개한다.
이 사진들은 홍사광 한국사회문화연구원 이사장과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이 지난 7년간 17개국을 돌아다니며 모은 것으로, 한말과 일제 때의 희귀 사진들이다.
국내에는 공개되지 않았던 사진들도 많다.
▲ 상담하는 정신대 일본 정부는 전쟁이 확산되고 피해가 속출하자 여성정신대까지 동원령을 공포했다. 일제는 “중학교를 보내주겠다”며 11~14세의 어린 여성을 미혹했다. 일부 학교 교장들은 “정신대에 가지 않으면 졸업장을 주지않겠다”며 위협하기도 했다. 정신대는 근로정신대와 위안부로 나뉘었는데, 군수공장에서 일하는 근로정신대와 위안부 간의 구별이 모호했다. 공장에서 일하던 근로정신대 여성들에게 위안부 생활을 강요한 경우도 많았다. 일제는 공개적으로 정신대를 모집했으며 신문에 광고를 내기도 했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의 정혜경 연구원(강제연행전공)은 “정신대를 지원한 대부분의 여성들은 위안부와 근로정신대를 구별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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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신대 위안소 정신대 위안소는 일본군이 운영했다. 임시 건물은 이동식으로 조립돼, 좌우10칸으로 나뉘어 있었으며 방은 두 사람이 사용할 수 있을 정도의 크기였다. 일제는 한 사람의 여성에게 콘돔을 두 개 이상 지급하지 않았다. 위안부여성들은 사용한 콘돔을 세척해 다시 써야만 했다.(1935) | |
▲ 창씨개명 독려 한국인의 성명에 관한 특명을 발표한 조선총독부는 조선인의 이름을 일본식으로 개명하라고 강요했다. 일제는 창씨개명을 장려하기 위해 각종 수단을 동원했다. 사진은 서울 남대문역에서 창씨개명을 한 노인들에게 무료로 열차여행을 시켜주는 모습. 천막을 치고 창씨개명을 확인하는 일본관리들과 한복을 입은 조선인들의 모습이 보인다. 일제가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각종 불이익을 준 것은 물론이다. 그들은 편지발송, 소송, 학교입학, 식량배급 등 생활전반에 걸쳐 이름을 바꾸지 않은 조선인들에게 불이익을 가했다. | |
▲ 일본식 한국문화 교육 일본어로 한국 부채춤을 설명하고 있다. 일제는 한국문화의 원류가 일본이라며 교육을 통해 일종의 ‘의식화’를 꾀했다. 일제는 아리랑, 도라지타령 등 우리 고유의 가락을 SP음반으로 제작하기도 했다.(1937) | |
▲ 상복 입은 고종황제 흥선대원군 별세 때 상복을 입은 고종의 모습. 대원군은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운현궁에서 은둔생활을 하다 79세로 별세했다. 대원군은 임종 때 장남 재면을 통해 주상을 만나기를 원했으나 고종은 아버지와의 상면을 거절했다. 대원군이 명성황후 시해를 묵인했다고 여긴 고종은 대원군 빈소에 참배하지 않았다.(1898) | |
▲ 한일조약체결 한일조약을 맺고 찍은 기념사진 (1904) | |
▲ 부산 순시에 나선 순종황제 순종황제는 이등박문을 대동하고 경성을 출발, 대구·부산·마산 등을 순시했다. 도로 주변에 서있는 시민들과 일장기의 모습이 보인다. 한국독립운동사 연구소의 이명화 박사는 “순종의 서도 순시를 촬영한 사진은 공개된 바 있지만 남도 순시는 이 사진이 처음인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1909. 1. 7) | |
▲ 제물포 일본인 거류지 일본인들은 이곳에 머물며 신발, 양복 등을 거래했다. 서양문물인 카페, 주점 등은 한국인들에게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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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 월미도 20세기 초반의 인천항 모습. 뒤편에 있는 섬이 월미도다. (1907)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