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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38-40
그때에 38 요한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
39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막지 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나서, 바로 나를 나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40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n aquel tiempo, Juan dijo a Jesús: «Maestro, hemos visto a uno que expulsaba demonios en tu nombre y no viene con nosotros y tratamos de impedírselo porque no venía con nosotros». Pero Jesús dijo: «No se lo impidáis, pues no hay nadie que obre un milagro invocando mi nombre y que luego sea capaz de hablar mal de mí. Pues el que no está contra nosotros, está por nosotros».
«El que no está contra nosotros, está por nosotros»
Rev. D. David CODINA i Pérez
(Puigcerdà, Gerona, España)
Hoy escuchamos una recriminación al apóstol Juan, que ve a gente obrar el bien en el nombre de Cristo sin formar parte del grupo de sus discípulos: «Maestro, hemos visto a uno que expulsaba demonios en tu nombre y tratamos de impedírselo porque no viene con nosotros» (Mc 9,38). Jesús nos da la mirada adecuada que hemos de tener ante estas personas: acogerlas y ensanchar nuestras miras, con humildad respecto a nosotros mismos, compartiendo siempre un mismo nexo de comunión, una misma fe, una misma orientación, es decir, caminar juntos hacia la perfección del amor a Dios y al prójimo.
Esta manera de vivir nuestra vocación de “Iglesia” nos invita a revisar con paz y seriedad la coherencia con que vivimos esta apertura de Jesucristo. Mientras haya “otros” que nos “molesten” porque hacen lo mismo que nosotros, esto es un claro indicio de que todavía el amor de Cristo no nos impregna en toda su profundidad, y nos pedirá la “humildad” de aceptar que no agotamos “toda la sabiduría y el amor de Dios”. En definitiva, aceptar que somos aquellos que Cristo escoge para anunciar a todos cómo la humildad es el camino para acercarnos a Dios.
Jesús obró así desde su Encarnación, cuando nos acerca al máximo la majestad de Dios en la pequeñez de los pobres. Dice san Juan Crisóstomo: «Cristo no se contentó con padecer la cruz y la muerte, sino que quiso también hacerse pobre y peregrino, ir errante y desnudo, quiso ser arrojado en la cárcel y sufrir las debilidades, para lograr de ti la conversión». Si Cristo no dejó pasar oportunidad alguna para que vivamos el amor con los demás, tampoco dejemos pasar la ocasión de aceptar al que es diferente a nosotros en la manera de vivir su vocación a formar parte de la Iglesia, porque «el que no está contra nosotros, está por nosotros» (Mc 9,40).
♣ 관대하고 열린 마음으로 ♣
예수님의 제자단에 속하지 않은 어떤 사람이 예수의 이름을 빌어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본 요한이 그것을 하지 못하게 했다고 예수님께 보고합니다(9,38). 그러자 그분께서는 “막지 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나서, 바로 나를 나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9,39)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제자들이 당신의 제자라는 명예나 특권만을 내세워 외부 사람들에 대해서 폐쇄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은 잘못임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적인 옹졸함에서부터 벗어나 외부 사람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관대함과 열린 삶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학연, 지연, 혈연 등이 집단적 이기주의의 통로가 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누구든 받아들일 수 있는 열린 문이 없는 자기들만의 모임이나 만남이라면, 그것은 복음적 생명이 넘치는 공동체라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복음적인 사람은 끼리끼리만 뭉치고 만나는 옹졸함을 예수님의 마음으로 넘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옹졸하고 폐쇄적인 마음은 질투를 불러옵니다. 자기에게 없는 것을 누가 지니게 되거나 누릴 때 생기는 좋지 않은 감정이 바로 질투입니다. 그러나 다른 이들을 통하여 드러나는 좋은 것을 하느님께서 주신 선으로 보아 함께 기뻐하고 감사드릴 줄 아는 너그러움을 지녀야 할 것입니다. 소유 의식에 뿌리를 둔 질투에서 해방되려면 가난한 사람이 되어야하겠지요.
또한 복음을 사는 우리는 열등의식과 그에 따른 폐쇄적인 삶을 버려야 합니다.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고 비교할 때 열등의식에 빠지기 쉬우며, 열등의식은 삶을 폐쇄적으로 바꿔버립니다. 그러나 사람은 자기 밖의 존재를 통하여 자기를 실현해 나감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신의 경험이나 지식, 법규에 얽매이는 율법적인 사고방식과 편협된 자세도 문제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인간이 만들어놓은 규범이나 자신의 경험과 사고방식, 여러 가지 조건으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를 구속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고, 이런 자유스러움 안에 참 사랑도 꽃필 수 있을 것입니다.
옹졸함과 열등의식, 그리고 폐쇄성은 자신이 마치 무엇이나 된 양 착각하는 교만을 초래합니다. 그러나 교회내의 어떤 직책을 맡았느냐, 누가 더 봉사활동을 많이 하느냐가 아니라 보잘것없는 이에게 물 한잔이라도 주는 숨은 사랑의 실천에 있음을 상기할 일입니다. 그릇된 선민의식, 엘리트의식을 버려야겠지요.
우리 모두 하느님의 사랑스런 피조물이며 그리스도의 지체임을 기억하면서서 어떤 순간에도 인간적인 조건이나 능력, 지위 등을 문제 삼지 말아야 합니다.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자신을 열어주며 자유롭게 살아가도록 버팀목이 되어주어야겠습니다. 그리고 주님께 넓고 관대하고 겸손한 마음을 달라고 기도합시다. 그리하여 열린 마음으로 주님 오실 빈 그릇을 봉헌해 드렸으면 합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큰 형님, 가톨릭교회
오늘 복음을 통해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예수님의 세상을 향한 개방성,
세상 사람들을 향한 관대한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당시 돌아가는 상황을 예수님께 보고합니다.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을 팔아먹고 있습니다.
스승님의 이름으로 치유활동을 하면서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있는데,
그냥 둘 일이 아닌 듯합니다."
예수님의 응답은 너무도 의외의 것이었습니다.
그 응대가 너무도 관대한 것이어서 제자들이 깜짝 놀랄 지경이었습니다.
"그냥 두어라.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1960년대에 있었던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이런 예수님의 세상을 향한 자기개방성을
다시 한 번 재천명했습니다.
교회는 기존의 사고방식을 말끔히 청산하자고 초대했습니다.
교회가 세상 한 가운데로 내려갈 수 있도록,
민중의 고통 속으로 더욱 깊이 침투할 수 있도록 자신을 더욱 낮추고
교회의 문을 활짝 열자고 스스로에게 다짐했습니다.
그 가장 구체적인 표시로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 갈라진 여러 교회 형제들-정교회, 개신교회 등-은
물론이고 타종교 지도자들까지 초대했습니다.
그리고 열린 마음으로 그들의 목소리를 경청하였습니다.
그들과 함께 새로운 하느님 나라 건설에 협력할 것을 다짐했습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2000여년의 교회 역사 안에서 가장 은혜로운 대사건이었습니다.
교회의 물줄기를 완전히 새롭게 잡는 제2의 성령운동이었습니다.
진지한 자기반성을 토대로 한 제2의 교회설립이었습니다.
다시 한 번 복음으로 돌아가고자 했던 쇄신운동이었습니다.
아쉽게도 그 소중하기 그지없는 역사적인 사건, 가장 은혜로운 선물인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사람들 사이에서 잊혀져가고 있습니다.
그때의 그 소중했던 자기성찰, 자기 쇄신을 위한 다짐들이 별로 읽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 소중한 결의문들이 실제 삶 안에서 적극적으로 반영되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나아갈 길, 우리 교회가 살길은 다시 한 번 제2차 바티칸공의회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그 자기개방을 위한 열정, 이웃에 대한 관대한 마음에로 돌아가야 합니다.
부임하시는 곳마다 종교 간의 일치를 위한 소중한 장으로 본당을 잘 활용하시는
신부님 한 분을 알고 있습니다.
일단 새로운 임지에 부임하신 신부님께서 가장 먼저 하시는 일은
본당 구역 내 개신교 교회나 사찰 등 타종교의 지도자를 방문하는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목사님을 본당 특강에 초대하십니다.
초파일이라도 되면 아담한 난이라도 꼭 챙겨서 주지스님에게 축하의 인사를 보냅니다.
신부님의 그런 자기개방성, 타종교와의 일치를 위한 자기낮춤은
즉시 본당구역 내 타종교 지도자들에게 긍정적인 측면의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그들 역시 타종교에 대한 관대한 마음을 지니게 만들고,
모든 종교인들이 지역발전을 위해 합심하게 하는 너무나도 바람직한 결론에 도달한 것입니다.
교회의 큰형 격인 가톨릭교회의 신자로서
이웃 개신교도들에게 보다 큰마음을 보여주면 좋겠습니다.
타종교 신자들에게도 거부감을 지니지 말며 먼저 다가서는 우리,
먼저 손길을 내미는 관대한 마음의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이웃에 대하여
첫째로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할 때 삶에 필요한 은총을 주셨습니다.
누구에게나 무언가를 잘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 무언가를 바로 잘 하게 하는 힘이 곧 은총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이 은총을 받지 못하면 인간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성서에서 사람은 진흙으로 만들어졌음을 강조합니다.
둘째로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더불어 살도록 만드셨습니다.
아담이 혼자 있는 것이 안쓰러워 더불어 살도록 하와를 만들어 주셨다는 성서의 말씀을 상기합시다.
또 사도 바오로께서는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 12장 7절에서
"성령께서 는 각 사람에게 각각 다른 은총의 선물을 주셨는데 그것은 공동 이익을 위한 것"
이라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은총으로 더불어 사는 사람들이 더 잘살도록 도와주라고
하느님께서 처음부터 계획하시고, 만드셨다는 것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셋째로 우리가 받은 은총을 잘 사용하는 일이 곧 선행입니다.
누군가가 무엇을 잘 한다면 그것이 곧 선행입니다.
선행은 그분으로부터 받은 은총의 힘으로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은총을 많이 받았다 한들 그것을 잘 사용하지 않으면 죄를 짓고 맙니다.
그래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라 받은 은총을 선하게도 악하게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넷째로 선행은 하느님을 드러냅니다.
선행은 하느님을 창조주로, 자기 자신을 피조물로 증언하는 일입니다.
누군가 잘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힘으로 한 것이기에 하느님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도구로 뽑은 사람들에게 필요한 은총을 주십니다.
그러기에 뽑힌 이들은 남을 더 잘 도와주어야 합니다.
주님으로부터 뽑혔다는 것은 이미 누군가를 도와 줄 능력이 있다는 뜻입니다.
이유는 하느님께서 그 만큼 은총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는 뽑히지 못한 사람을 더 잘 도와주라는 이유입니다.
더 잘 도와주는 것만 빼면, 다시 말하면 더 받은 은총만 없다면
서로가 다를 바 없는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도와주기는커녕 남이 잘 하는 것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남이 잘 하는 것에서 하느님을 발견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나
자신을 과시하기 위하여 남의 선행을 빼앗아 버린다든지 없애버리려 한다면
힘없는 도구는 없애 버릴 수 있겠지만 그 힘을 주신 하느님께서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린 서로의 삶을 돕는 도구입니다.
우리는 서로의 삶의 거들짝입니다.
그래서 서로 다른 은총을 주셨습니다.
서로가 더 잘 되도록 돕는 일에
우리가 받은 은총을 사용하도록 노력합시다.
부산교구 김옥수 도미니코 신부
요한 사도는 예수님의 제자가 아닌 어떤 사람이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랍니다.
“감히 예수님의 제자 행세를 하면서 마귀를 쫓아내고 있다니!” 하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예수님께 일러바쳤더니 예수님의 대답은 뜻밖이었습니다.
“막지 마라.”
예수님의 대답은 우리에게도 많은 사색을 하게 합니다.
“어떤 사람이 ‘구마’를 함부로 하다가 예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않을까?
그 사람이 예수님을 사기꾼으로 만들지 않을까?
그 사람이 허락도 없이 예수님의 제자들의 자리를 차지했는데 진짜 제자들의 자리는 어디인가?”
이러한 상념은 ‘우리가 모르는 하느님의 영역’이 있다는 것을 반증하기도 합니다.
마르코 복음사가가 이러한 일화를 전하고 있다는 것은,
그 사건이 요한 사도에게 큰 영향을 끼쳤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수난 예고를 듣고, 길을 가면서도 자리다툼을 하였습니다.
요한 사도는, 성령의 바람이 불고 싶은 데로 부는 것을 체험하였습니다(요한 3,8 참조).
하느님의 영은 인간이 생각하는 대로, 인간이 욕심부리는 대로 불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으로 기적을 하는 사람은
당신을 반대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사람은 예수님의 일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가로막고 있지는 않을까?”
하고 성찰하는 시간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요한 사도는 이 사실을 잘 알고 마음에 새겼던
‘예수님의 애제자’였습니다.
주교회의 홍보국장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