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의 마을버스] ① 낙산에서 창신동을 거쳐 동대문 시장까지
'마을버스 종로03' 노선을 따라서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마을버스 종로03은 흥인지문 주변과 낙산 사이를 오간다. 고지대에 자리한 거주 지역과 도심의 교통 거점들을 적절히 연결하는 마을버스다. 낙산을 내려온 마을버스 종로03은 동대문의 여러 전통시장을 순례하고는 창신동과 숭인동 사이를 휘감으며 낙산으로 다시 올라간다.
낙산 공원 입구의 마을버스 종로03 종점.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낙산 자락에 들어선 이화동 벽화 마을
창신동과 숭인동을 지나 경사진 도로를 따라 올라가면 도로 양쪽으로 아파트 단지가 나타난다. 그 도로는 종로구와 성북구의
경계를 지난다. 그러니 종로구 주민뿐 아니라 성북구에 사는 주민들도 마을버스 종로03을 이용한다.
낙산 공원 입구 종점에서 내린 승객 중 삼선동 쪽으로 가는 이가 있었다. 그쪽은 성북구다.
성곽 바로 아래 삼성동에 사는 그는 “종로03이 성북구의 마을버스보다 편하다”고 말했다.
이어 “이 마을버스 승객 중에는 (성북구)보문동이나 삼선동의 아파트 단지에 사는 이들도 많다”며 “종로 마을버스라 해서 종로구 주민만 타는 것은 아니다”고 덧붙였다.
낙산은 낙타 등을 닮았다고 해서 낙타산(駱駝山)으로 불렸다. 그러니까 낙산(駱山)의 낙은 낙타를 의미한다.
그리 높은 산은 아니지만, 골짜기가 깊고 계곡이 아름다워 예로부터 유명인들의 별장이 많이 있었다.
낙산 능선을 따라 동대문인 흥인지문과 동소문인 혜화문을 연결하는 한양도성이 지난다.
그 도성 자락 안팎으로는 마을들이 있다. 성곽 안쪽으로는 이화동에, 바깥으로는 창신동과 삼선동에 마을이 들어섰다.
높이가 125m 정도라지만 낙산에 오르니 서울 강북 도심 웬만한 곳은 다 조망할 수 있다. 멀리 북한산과 남산이 보이고
도심의 높은 건물군들도 보이지만 눈을 가까이 돌리면 낙산 자락을 따라 빽빽이 들어선 이화동 골목과 집들을 볼 수 있다.
이화동 벽화 마을의 어느 골목.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대학로의 윗동네이기도 한 이화동은 벽화 마을로 유명하다. 벽화를 보러 오거나 마을 주변 카페와 레스토랑을 찾는 이들이 많다. 그런 이화동 벽화 마을은 주민이 사는 주거 지역이기도 하다. 다만 경사진 산자락에 들어선 마을이라 주민들에게 튼튼한 무릎이 필요한 듯하다.
벽화 마을에 사는 한 노인은 “대학로쯤에서 걸어 올라오는 게 거리는 가깝지만, 동대문에서 마을버스를 타는 게 편리하다”고
했다. 낙산 공원 입구의 마을버스 종점에서 그 노인의 집까지의 거리가 만만하지 않아 보였지만 경사진 골목길을 오르는
것보단 나아 보였다.
저층 고밀도 주거 공간 창신동
마을버스 종로03은 창신동과 숭인동을 지난다. 이 지역은 저층 고밀도 주거 공간으로 빽빽한 곳이다. 하지만 마을버스가
마을 곳곳을 훑고 다니지는 않는다. 창신동과 숭인동 사이에 난 도로를 지나갈 뿐이다. 그래서 도로에서 먼 동네에 사는
주민일수록 대중교통 이용에 불편이 크다. 특히 창신동 고지대에 사는 주민들은 마을버스의 사각지대에 사는 듯했다.
창신동 고지대의 어느 골목에서 만난 한 노인은 “경사진 골목을 내려가는 것보다 편리해 마을버스를 탈 때면 낙산 공원까지
올라간다”고 얘기했다.
창신동 고지대에서 저지대까지 이어지는 경사진 골목을 직접 걸어보니 무릎이 비명을 지르는 듯했다.
이화동에서 만난 한 택배기사는 “사람이 걷기 힘든 길은 차량도 운행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종로구 창신동 주택가. 경사진 길과 골목에 저층 고밀도 주거 공간이 들어섰다.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마을버스 종로03이 지나는 창신동과 숭인동은 조선시대에는 한성부의 인창방과 숭신방이었다.
두 지명에서 한 글자씩 교환해 지금의 이름이 됐다.
조선시대의 동대문에서 청량리에 이르는 지역은 한성부 성저십리였고, 도성으로 채소를 공급하는 농경지였다. 동대문과 가까운 창신동과 숭인동은 성저십리와 도성을 연결하는 길목이었다. 자연스럽게 도성을 오가는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 형성됐다.
1905년 ‘광장주식회사’가 설립되며 동대문 일대의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포목 시장이 열렸다.
그 주변으로도 상권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동대문과 가까운 창신동은 시장에서 일하는 이들의 주거 공간이 됐다.
일제 강점기에 동대문 밖 창신동은 경성의 동쪽 변두리였다. 농촌을 떠난 농민과 서울 도심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찾아 들었다. 그렇게 동대문 일대에 인구가 늘어나며 창신동에 서민 주거 공간이 더욱 늘어나게 됐다.
창신동 주택가.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해방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빈터에 판잣집과 불량주택이 난립했었는데 1957년 선심성 공약으로 일시적으로 양성화를 해줬다. 이는 창신동 일대에 불량주택을 양산하는 계기가 됐다. 1970년대에는 동대문을 중심으로 의류 제조업이 활발해지며, 창신동에는 봉제업이 가내 수공업 방식으로 발달하게 된다. 그 노동자들이 선택한 거주지도 창신동이었다.
지금도 창신동에는 봉제업 명맥이 이어지는 한편 미래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기도 하다. 재개발이나 도시재생이 그런 의견 중 하나다. 다만 워낙 밀도 높은 주거 공간들이 모여 있고 이해당사자도 많아 뜻을 하나로 모으기는 힘들어 보인다.
도시 개발은 물론 최고 결정권자의 의지가 많이 작용하기 때문에 선거를 기점으로 또 어떻게 바뀔지 몰라서 결정하기 힘든 구석도 있을 것이다.
랜드마크가 된 창신동 채석장
마을버스를 타고 창신동을 지나다 보면 주택가를 둘러싼 바위산이 보인다. 얼핏 큰 바위처럼 보이지만 90도 가까이 깎여나간 큰 바위다. 창신동의 랜드마크이기도 한 채석장이다.
일제 강점기에 건축한 큰 건물들을 보면 석조건물이 많다. 거기에 쓰인 돌들은 창신동의 채석장에서 캔 화강암일 확률이 높다. 이화동의 낙산은 화강암으로 이뤄진 산이다. 낙산과 바로 인접한 창신동의 돌산도 마찬가지였다.
창신동의 채석장. 일제 시대에 석조 건물 건축에 쓰인 돌을 캔 곳이다. 지금은 경찰 시설이 들어섰다.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그렇게 창신동 돌산을 깨서 건축한 게 지금 화폐박물관으로 쓰이는 조선은행, 서울역이 된 경성역, 서울시청이 된 경성부청,
중앙청으로 쓰이다 철거된 조선총독부 건물 등이다. 이외에도 많은 석조 건물에 창신동 돌산의 채석장에서 캔 화강암이 쓰였다.
채석장은 해방 후 서울시에서 관리하다가 1961년에 ‘동대문 근로자 합숙소’를, 1962년에는 창신 시영아파트를 세웠다.
근로자 합숙소 자리에는 현재 경찰 시설이 들어섰고 시영아파트는 아직 남아 있다.
마을버스 종로03은
마을버스 종로03은 동대문시장, 광장시장, 동묘 벼룩시장 인근을 순례하듯 운행한다. 대부분 도심 지역이라 다른 대중교통과
노선이 겹친다. 그래서 노선 인근 주민이 아닌 승객이 마을버스 종로03을 탈 일은 적을 듯하다. 만약 타게 된다면 낙산 공원에
가는 경우 정도일 것이다.
낙산 공원 입구 마을버스 종로03 종점의 전기차 충전소.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마을버스 종로03은 동대문시장, 광장시장, 동묘 벼룩시장 인근을 순례하듯 운행한다. 대부분 도심 지역이라 다른 대중교통과 노선이 겹친다. 그래서 노선 인근 주민이 아닌 승객이 마을버스 종로03을 탈 일은 적을 듯하다. 만약 타게 된다면 낙산 공원에 가는 경우 정도일 것이다.
마을버스 종로03은 흥인지문 앞 대로에서는 버스중앙차선을 지난다. 마을버스로는 이례적이다. 그만큼 붐비는 도로라 마을버스도 허용한 듯했다. 낙산 공원 입구의 마을버스 종점에는 전기차 충전소가 있다. 종로03 버스 중에는 전기차가 있기 때문이다.
만약 전기버스를 탄다면 소음 없이 경사진 길을 힘차게 오르는 승차감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창신동과 숭인동 자료를 살피다 보니 이 지역은 원래 동대문구에 속했었다. 1975년에 종로구로 편입됐다.
그러고 보니 동대문인 흥인지문이 종로구에 자리하고 있다. 동대문구가 아니었다.
행정구역이 어떻게 변해왔든 동대문과 창신동은 오래도록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마을버스 종로03이 서울 도심 속 유서 깊은 그 동네들을 순례하듯 오간다.
첫댓글 동행에서도 동대문까지
이 구간를 걸었었지요.
도심속의 힐링 공간입니다.
금요일 또한번 걸을 생각입니다
마을버스를 통해서 도시탐구를 해가는
강대호 기자의 글입니다. 우리카페의 회원이기도 하지요
금요일 13:00 낙산구간을 걸을 생각입니다.
제가 학원을 처음 발 담근 곳 입니다요. 낙산 시영아파트인근 3거리. 동숭동시영아파트목욕탕상가 2곳을 운영했었죠. 아련한 옛추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