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홍위의 영월행, 유배(流配)인가?
서기 1441년, 세종 23년 신유 7월 23일 정사에 경복궁 동궁의 자선당에서 한 아기가 태어났다. 당시 세자가 아빠, 그 세자빈 권씨가 엄마요, 할아버지는 세종, 할머니는 소헌왕후 심씨였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아기, 그 이름을 홍위(弘暐)라고 지었다.
이홍위는 여덟 살이 되던 해에 왕세손, 아빠가 임금으로 즉위하던 해에 왕세자로 책봉됐다. 아버지가 임금이 된 지 2년을 다 채우지 못하고 승하하자 열두 살의 나이로 임금이 되었다.
하지만 이홍위의 숙부인 이유(李瑈),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정변을 일으켜 어린 임금을 보필하면서 권한을 행사하던 황보인, 김종서 등 많은 사람을 죽이고 실권을 장악하였다. 이유는 이례적으로 영의정 자리까지 차지하고서 국정을 주도하였고, 어린 임금 이홍위에게 보이지않게, 또 보이게 압력을 가하였다. 임금 이홍위는 결국 국사가 매우 어려워 선위하겠다는 교지를 내렸다. 이유가 눈물을 흘리며 고사하였으나 임금 이홍위는 대보를 받들어 주었다.
이유가 즉위하면서 이홍위를 상왕으로 높혔다. 새 임금 이유가 경복궁으로 입어하고, 상왕은 창덕궁으로 이어하였다.
1456년 세조 원년 병자 6월에 사예 김질이란 자가 좌부승지 성삼문등이 모반을 도모한다고 고변을 하였다. 피바람이 한 바탕 크게 불어 성삼문과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를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죽고, 또 많은 사람들이 중앙 정계에서 쫓겨나거나 스스로 물러났다.
그러자 임금 주변의 고위 관료들이 이홍위를 이 상황을 피거(避去)―피하여 가게 하자고 주장하였다. 임금 이유는 차마 그럴 수 없다고 그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는 그저 의례적인 절차에 지나지 않았다. 몇 번 주장하고 반려하는 과정을 거친 다음 이홍위를 또 다른 숙부인 금성대군(錦城大君) 유(瑜)의 집으로 출거(出居)―나가 거하게 하였다.
당시 관료들의 최상위에 있던 정인지가 백관을 이끌고 글을 올려 말하기를, "천지도외(遷之都外) 도성 밖으로 옮기게 하시어 상왕으로 하여금 넉넉히 노닐며 스스로 가고 싶은 데를 가며 편한대로 한가히 거하게 하시면 전하께서도 그의 처음과 나중을 온전게 하는 은혜를 이루시게 될 것이며 상왕을 대하는 예가 박하지 않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임금 이유는 당연히 또 불허하였다.
그 때 또 이홍위의 장인 송현수 등이 모역을 꾀한다는 고변(告變)이 들어왔다. 또 피바람이 불었다.
그 바람에 휩쓸려 상왕 이홍위는 1457년, 세조 3년 6월 21일 계축에 상왕의 지위를 빼앗기고 노산군(魯山君)이라는 호칭을 갖게 되었고, 영월로 출거(出去)―나가 거하게 하라는 왕명의 대상이 되었다. 이리하여 이홍위는 영월로 떠나 엿새 만에 영월 청령포에 당도하였다.
이렇게 이홍위가 영월로 간 그 사실을 흔히 유배(流配), 영월로 유배되었다고들 말한다. 그런데 그것이 과연 유배인가?
조선시대에는 명나라에서 만든 [대명률(大明律)]이라는 형률서를 형정의 기본으로 채용하였다. [대명률]에 규정된 형벌은 오형(五刑)이라 하여 태형(笞刑), 장형(杖刑), 도형(徒刑), 유형(流刑), 사형(死刑) 다섯 가지가 있다. 그 가운데 유형은 ‘사람이 무거운 죄를 범했을 때 차마 형벌로 죽이지는 못하고 먼 지방으로 떠나보내어 종신토록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게 하는 것을 말한다. 2천리로부터 3천리까지 세 등급으로 나누고, 500리를 한 등급으로 삼아 더하거나 줄인다’고 규정되어 있다. 원칙적으로 종신토록 근거지로부터 멀리 떼어 놓아 정상적인 활동을 할 수 없게 하는 형벌이다.
조선에서는 2천리, 3천리를 그대로 적용하기는 어려우므로 어디로 유배보낼 것인가 궁리하여 규정하였다. 그 가운데 서울과 경기 좌우도와 개성에서 2천리 유형을 받은 자가 가는 정배지 가운데 강원도의 중앙에 있는 각 고을이 포함되어 있기도 하였다가, 나중에 수정된 규정에는 강원도가 빠졌다. 다시 말해서 이홍위가 만약 유배를 받았더라도 강원도 영월로 갈 수 없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홍위는 재판을 받은 적도 없고, 당연히 무슨 판결을 받은 바도 없다. 다시 말해서 이홍위는 죄인이 되어 유배로 영월로 간 것이 아니다. 정치적으로 서울, 궁궐에서 쫓겨나기는 했지만 그것이 곧 법률상 처벌은 아니었다. 만약 이홍위가 유배간 것이라면, 그는 법률상 죄인이 되었다는 뜻이 된다. 유배가 아닌데 그냥 별 생각없이 유배라고 말하는 것은 허용된 범위를 넘어선 왜곡이다.
유배가 아니라면 무어라 부를까? 조선시대 당대에 쓰던 ‘출거’니 ‘피거’니 ‘천지도외’니 하는 용어들도 당대에서부터 명료한 뜻을 가진 것이 아니었던 바 오늘날 쓰기에는 더구나 적절치 않다,
조선후기에는 노산군이 “영월에 손하였다”가 죽었다(遜于寧越而歿), 또는 “영월로 손위(遜位)했다(遜位于寧越)”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손위”는 직역하자면 “자리를 양보하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그런 점에서 “양위(讓位)”나 “선위”와 통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양위나 선위가 스스로 왕위를 넘겨주었다는 뜻이라면 손위는 왕위를 빼앗겼다는 뜻이 더 강하다고 하겠다. “영월로 손위하다”는 표현은 직역하여 받아들이자면 자리를 서울 궁궐에서 영월로 옮겼다는 뜻이 되겠지만, 왕위를 빼앗기고 영월로 쫓겨났다는 뜻을 완곡하게 표현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영월에 손하였다”는 문법적으로 잘 맞지 않으나 영월로 간 것을 무어라 정확히 표현하기 어려워 뭉뚱그리 듯 쓴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노산군이 왕위를 빼앗겼다는 뜻을 담고 있으나 충분히 드러내기 어려울 때 궁여지책으로 쓴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손”이라는 말 역시 오늘날 쓰기는 적절치 않다.
그렇다면 어떤 용어를 쓸 것인가? 꼭 들어맞는 말을 찾는다는 것이 참 어려운 일이다. 우선 유배라는 말이 적절치 않다는 문제를 제기했으니 도의상 대안을 제시한다는 취지로 말하자면, ‘궁벽진 곳에 격리하다’라는 뜻으로 “유폐(幽閉)”라는 용어가 가장 근접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더 깊은 논의가 이루어져 적절한 용어가 자리잡기를 기대한다.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논점이요, 많은 이들에게는 특별한 관심이 가지도 않는 사안이겠으나 영월에 가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 가운데 이런 내용도 있었더라고... 아전인수인지 모르겠으나 영월 방청객들의 반응이 내게는 긍정적이고 호의적으로 보였다고, 그냥 보고 삼아서, 기억을 위한 자료 삼아서 여기 올려 놓는다.
덧 : 아래 첨부한 사진은 오늘날의 청령포인가 의문이 들 정도로 낯선 장면. 청령포의 어느 측면인지 모르겠다. 사진 설명에서는 "유거(幽居)"라는 용어를 썼다. 유폐가 '외진 곳에 가두다'라는 뜻이라면, 유거는 '외진 곳에서 지내다'는 정도로 좀더 부드러운 표현이라고 하겠다.
240427
모든 공감:
58양승수, 장경상 및 외 56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