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 안창호 선생도 두 번째 가라면 서러워 할 연설 실력자이지만 몽양 여운형은 20C 최고 연설가로 다들 꼽는다.
다음은 몽양의 연설 일부분이다.
연설 1) 임시정부의 요인 34살 여운형 일본 제국호텔 연설/1919년 11월
1. 목적 : 임시정부 내부 분열 목적
2. 연설 일부분
“주린 자는 먹을 것을 찾고 목마른 자는 마실 것을 찾는 것이 자기의 생존권을 위한 인간 자연의 원리입니다. 이것을 막을 자가 있겠습니까! 일본인이 생존권이 있는데 우리 한민족만이 홀로 생존권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일본인이 생존권이 있다는 것을 한국인이 긍정하는 바이요, 한국인이 민족적 자각으로 자유와 평등을 요구하는 것은 신이 허락하는 바입니다. 일본 정부에게 이를 방해할 무슨 권리가 있겠습니까.”
3. 결과
몽양 여운형의 사자후는 한국인은 물론 일본인들의 마음도 뒤숭숭. 임시정부 내부 분열이 목적이었던 일본인들은 자신들이 오히려 헷갈려 …, “어떻게 저런 불령선인을 초대해서 저런 명연설로 우리 일본에 먹칠을 할 수 있스므니까!” 항의가 속출하면서 일본 하라 내각이 총사퇴하는 계기가 됨
연설 2) 고향 양평에서의 에피소드(episode)
하루는 고향 양평에서 연설을 하게 되었는데 말 타고 지나던 양평군수가 그것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그대 말을 듣고 보니 느낀 바가 크다. 오늘로 친일 단체(일진회)을 그만두겠다”라고 다짐하게 만들었다는 에피소드가 전함.
* 몽양 여운형/현대철봉법(서상천, 1935)에 사진/경향신문, 김경호 기자
몽양 여운형은 타고난 스포츠맨, 축구, 농구, 육상, 유도, 권투 등 경기단체 회장과 임원으로 조선체육회 11대 회장 겸 조선올림픽위원회 위원장으로 국제올림픽위원회(IOC) 가입 승인에공헌, 조선중앙일보사장(1933)으로 베를린 올림픽(1936) 마라톤 시상식 사진에서 손기정 가슴의 일장기를 말살해 보도 주도
조선축구협회(현 대한축구협회) 회장으로 중국 상해 원정할 때 평양축구단 환송 기념강연회(1935년 2월)
“운동으로 건전한 신체와 정신을 만들고, 경기를 통해 투쟁심을 길러야 한다”고 열변 토함“
앞에는 커다란 트럭이 서있고, 파출소 앞에 서 있던 경찰차 1대가 갑자기 나와 몽양을 차를 가로막자 (정병준, 이화여대, 1995)
몽양의 차는 속도를 줄였고 이 기회에 한지근이 차 뒤 범퍼에 올라타 저격을 함.
여운형암살(呂運亨暗殺)과 임시 통일정부수립의 좌절
1. 개념 : 1947년 7월 19일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이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극우파 21세 한지근(韓智根) 등에 의해 암살당한 사건.
* 암살 가담자 : 한지근, 한현우, 양근환, 염동진
2. 내용
1) 1944년 ‘조선건국동맹’이라는 비밀독립운동 조직
2) 1945년 8월 15일 해방 직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 : 새로운 국가 건설에 앞장섬.
3) 좌우합작운동 : 1946년 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실패로 돌아간 후 김규식(金奎植)과 더불어 좌우합작운동을 벌였지만 큰 성과 를 거두지 못함. - 잠시 정계를 떠남
4) 여운형은 1947년 2차 미소공동위원회를 앞두고 정계에 복귀하여 2차 미소공동위원회의 성공에 힘을 기울임
그러나 2차 미소공동위원회 역시 난항을 거듭
5) 암살 : 여운형은 1947년 7월 19일 혜화동 로터리에서 달리는 차 뒤 범퍼에 올라탄 괴한 한지근의 3발의 총격을 받고 암살.
6) 여운형에 대한 12번 테러 일지/우익진영 테러 1순위
(1) 테러이유 :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대립하면서 사회주의에 지나치게 관대했기 때문
(2) 광복 이전
(1) 1925년 12월 임시정부 시절/임시정부의 본분을 벗어나 개인적인 명예를 추구하고 다닌다는 비판을 받아 괴한의 습격으로 가족들과 함께 구타를 당함.
(3) 1945년 광복 이후
가. 1945년 8월 18일 오후 1시 종로구 계동 자택 : 길 가던 중 괴한들에게 곤봉으로 동생과 함께 구타당함.⇒ 시골로 요양
나. 1948년 9월 7일 저녁 종로구 원서동에서 괴한들에게 밧줄로 묶였으나 행인 도움 구출 됨
다. 1945년 12월 초 황해도 연백군 배천온천(여관) 괴한 침입
라. 1946년 1월 종로구 창신동 : 괴한 5명이 자택에 침입, 때마침 여운형 다른 곳에 있어서 위기 모면
⇒ 미영소 3국 외상회담(1945년 12월 16일 ~ 26일) : 한국 5년간 신탁통치안 논의, 우파 여운형 테러시도
마. 1946년 4월 18일 종로구 반서동 청계천 관수교 위에서 괴한들에 포위되어 격투를 벌이다 행인들의 도움으로 구출 – 좌우합 작노력(여운형,김규식,안재홍), 5차례 방북, 조만식, 김일성만나 좌우,남북합작 노력
* 여운형 말 : "나는 죽어도 이 길을 가겠다.", 자식들에게 "혁명가는 침상에서 죽는 법이 없다. 나는 거리에서 죽을 것이다." 고 말함.
바. 1946년 5월 25일 밤 10시경 서울 종로 괴한 습격 ⇒ 사주에 의한 수류탄 테러 시도 사전에 발각되어 무사.
- 우파인 김구식, 원세훈 등과 좌우 합작 노력
사. 1946년 7월 17일 괴한들에 의해 중구 신당동에서 차에 태워져 야산으로 끌려가 재갈을 물리고 묶은 다음 정치 활동을 그만 둔다는 문서에 서명하면 살려주겠다는 협박을 했으나 타고난 건장함과 운동 실력으로 괴한들을 제압한 후 산에서 벼랑으로 뛰 어 내려 탈출함(미군정 경무부 암살 체포범 3명 체포 했으나 처리 오리무중)⇒ 어운형, 김규식이 허헌, 김원봉과 만나 좌우합작 노력
* 1946년 7월 25일 좌우합작위원회 발족 : 우파 김구식, 원세훈 좌파 성주식, 정노식, 이강국 참여
아. 1946년 10월 7일 종로구 계동 자택에서 괴한 4명이 납치 2일 간 집앞 소나무에 거꾸로 매달아 묶었으나 감시 소홀을 틈타 스스로 결박을 풀고 탈출 함 ⇒ 계기 : 1946년 10월 7일 좌우합작 7원칙발표
자. 1947년 3월 17일 종로구 계동 자택 침실 폭파사건 ⇒ 출타 중이어서 무사
계동 집 아궁이에 설치되었던 폭탄이 폭발 집 반쪽이 날아감.
차. 1047년 5월 12일 저녁 자동차 타고 혜화동을 지나다 자동차 후미에서 권총 총탄이 날아 들었으나 차량의 속도로 총알을 피할 수 있었음 ⇒ 범인 체포되었으나 처리는 오리무중
카. 1947년 7월 19일 오후 13시 15분경/IOC 가입 축하 기념으로 동대문운동장에서 한국과 영국의 친선 축구 경기가 열린 날 당시 조선체육회장 겸 한국올림픽위원장이었던 여운형은 경기 참관 전에 명륜동 지인의 집에 있다가 옷갈아 입으려고 독립신문 주필 고경흠과 함께 리무진을 타고 계동집으로 가던 중 오후 13시 15분경에 혜화동로타리 왼쪽 파출소 앞에서 대형 트럭과 경찰차 1대가 여운형 리무진을 가로막은 후 차 뒤 범퍼에 올라탄 평북출신 극우파 21세 한지근(본명 이필형, 7월 23일 경찰 범인 한지근) 3발 총탄에 심장과 배에 2발 관통, 연건동 서울대병원에 이송 중 2여분만에 사망. 동승한 경호원 박성복이 뒤쫒았으나 동대문서 경찰이 가로 막아 범인 놓침. 여운형(근로인민당) 추모식 시작 : 1965년 죽은지 18년만에 처음.
* 고경흠의 증언 : 여운형 죽기 전에 "조국..." 그리고 "조선..."이었으며 미소를 띤 얼굴로 죽었다.
* 한현우 증언 : 탑골 공원에서 죽이려고 다가 가는데 여운형이 알아보고 "어이, 현우군! 오랜만일세."라고 어깨를 툭툭 쳐주며 인사했기 때문에 도저히 죽일 수 없어서 송진우를 먼저 죽였다. 한현우 ⇒ 고하 송진우(한국민주당) 암살범(1945년 12월 30일)
* 참고
주요 암살자 : 송진우(한국민주당, 1945년 12월 30일), 장덕수(한국민주당, 1947, 12월 7일). 김구(한국독립당, 1949년 6월 26일)
암살 당일 여운형은 경기 참관 후 창경궁에서 미군정 경제 협조처의 존슨과 만나 안재홍의 뒤를 이어 남조선 과도입법의원의 민정장관(국무총리격) 수락을 논의하는 약속을 예정하고 있었다고 하는데 존슨을 만나 저녁후 고향인 양평 묘골에 내려가 있을 생각이었다고 함.
7) 여운형 암살사건 : 여운형이 사후 27년인 1974년이 돼서야 밝혀짐. 공소시효(살인사건 15년) 지난 후
- 암살이유 : 한지근, 한현우, 양근환, 염동진 등은 1945년 12월 30일 발생한 송진우 암살 사건의 주범 한현우(韓賢宇)의 집에서, ‘격몽의숙’ 관련자들과 교유하며 극우적인 사고를 키워 나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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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들은 당시 극우테러리스트로 활동하고 있었던 ‘혁신탐정단’의 양근환(梁謹煥), ‘백의사’의 염동진(廉東鎭)과 접촉하며 테러 대상을 물색
- 여운형이 ‘민족분열에 책임이 있는 야심가’라는 결론을 내리고 그를 제거하기로 결정
- 양근환과 염동진은 한지근(본명 이필형, 21세)과 한현우에게 무기를 제공
- 이들 가담자들의 주장은 사후적이고 일방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그 신빙성 여부에 의문이 제기되었으나이 문제를 조사한 검찰에 따르면, 이들의 주장 암살사건 당시 한지근을 조사했을 때의 기록과 상당히 유사하다고 증언.
8) 결론 : 해방정국에서 테러 행위에 관여한 보수우익단체(백의사 염동진이 한지근에 총을 건내 주고 사주한 사건)가 여운형의 좌우합작 노선에 불만을 품고 보수우파와 상호 연계하여 그를 제거한 사건임
9) 평가
가. 여운형 암살사건 가담자들이 송진우 암살범 한현우의 집을 근거로 활동했음에도 경찰에 의해 적발되지 않음
나. 여운형이 수차례 테러를 당했음에도 그 배후와 진상이 밝혀진 적이 거의 없었음.
다. 암살사건 발생 이후 경찰이 사건 수사에 소극적이었음을 볼 때, 경찰스스로 이 사건을 사실상 방조함.
10)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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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운형 인민장 1947년 8월 3일 11시 35분
서울운동장 장례식장 울려퍼진 봉도가/안기영 작곡
아! 우리의 몽양 선생
위대한 지도자 인민의 벗
땅 위에 떨어진 거룩한 피는
여기 인민의 가슴에 뭉쳐있나니
고이 잠드시라 우리의 몽양 선생
우리는 기어코 원수를 갚으오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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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을 이끌어갈 양심적 지도자/1945년 여론조사
여운형 33%, 이승만 21%, 김구 18%
- 참고문헌 -
1. 여운형 : 시대와 사상을 초월한 융화주의자 , 이정식,서울대학교 출판부, 2008
2. 여운형의 암살과 이승만 ,미군정, 윤해동, 역사문제연구소연구원
3. 몽양 여운형 평전, 정병준, 한울, 1995
4. 몽양기념관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