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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집회
나는 우리가 먼저 교회의 성질이 무엇인가를 알아야만 교회의 집회가 무엇인가를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만일 우리가 교회가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한다면 교회의 집회를 알 수 없다.
우리는 다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이고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임을 알고 있다. 또한 교회 안에 있는 우리 개개인은 "우리가 많은 사람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롬 12:5). 그리스도 외에는 교회에 다른 머리가 없다. 교회 안에는 머리가 된 자가 하나도 없고 모두가 지체이다. 우리 모두는 서로 연합하여 지체가 되었다. 그러므로 교회의 성질은 모든 것이 다 피차적이고 상호적이다. 교회 안에 모든 관계는 머리와 지체와의 관계가 아니라 지체와 지체의 관계이다 교회의 특징은 교회 안에 있는 모든사람이 다 지체이고 머리 된 자가 하나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 안의 모든 것은 다 피차적인 성질이 있으며 상호적인 특징이 있다 만일 교회 안에 어떤 일이 있다면 그것은 반드시 이러한 피처적인 성질을 내적으로 지녀야 하고 이러한 상호적인 특징이 밖으로 나타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사역은 교회와 다르다. 하나님의 정하심에서 사역 안에는 지도자가 있다. 그의 사도들은 바로 이런 사람 중의 하나이다. 사도들 가운데에서 우리는 또한 큰 사역과 작은 사역이 있음을 본다. 그러므로 사역 안에서 우리는 보내심과 파송과 머무름이 있음을 본다. 그리고 권면하는 자가 있고 순종하는 자가 있다. 사역을 실행할 때에 사역하는 사람은 온전히 능동적이고 사역을 받는 사람은 수동적이다. 사역의 성질은 그렇게 피차 상호적인 것이 아니라 능동적이고 수동적인 것이다. 사역자는 능동적이 모든 사람들을 수동적이다. 모든 사역에는 다 이러한 일방적인 성질이 들어 있다. 능동적인 자는 쌍방이 아니라 일방이다. 이것이 바로 사역과 교회의 성질의 다른 점이다. 사역은 일방적인 것이고, 교회는 서로 움직이고 피차 움직이는 것이다
이점을 깨달은 후 우리는 성경 안의 집회에 관해 깨달을 수 있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 성질을 볼 때 그 범위가 어디에 속했는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어떤 지도자가 한 교회를 다스릴 뿐 아니라 또 한 가지 집회, 소위 예배, 즉 한 사람이 강단 위에서 말하고 여러 사람이 앉아서 듣는 말씀 전하는 집회가 있어야만 교회라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만일 소위 예배, 곧 말씀 듣는 집회를 취소해 버린다면 아무 것도 없게 될 것이다. 그들의 교회의 기초는 [예배]위에 세워져 있다! 그들은 말씀을 전하고 듣는 것을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성경 안에는 그런 것이 아니다. 당신이 성경 안에서 본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형제들이 교회를 이룰 때 즉시 [교회]집회를 갖는 것이다.
내가 말한 교회 집회는 말씀을 전하는 집회와 완전히 다르다. 말씀을 전하는 집회란 무엇인가? 그것은 곧 한 사람이 강단 위에서 말하고 많은 사람들이 강단 아래서 듣는 것이다. 한 사람이 강단 위에서 인도하고 많은 사람들이 강단 밑에서 따르는 것이다. 이러한 집회는 피차 상호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교회 집회가 아니다.
교회집회는 반드시 피차적이고 상호적인 것이어야 하기 때문에 이런 집회는 교회집회가 아니라 사역적 집회이다. 사역적 집회만이 한쪽은 능동적이고 다른 한쪽은 수동적이다
성경에는 두 종류의 다른 집회가 있다. 이 두 종류의 다른 집회를 구분하지 않으면 사역이 사역답지 않고 교회는 교회답지 않게 된다.
성경에는 사도의 성격을 띠고 있는 한 종류의 집회가 있고 교회의 성격을 띠고 있는 집회가 있다. 사도의 성격을 띠는 모든 집회에서는 다 사도 자신이 주도하고 다른 사람들은 그 한사람이 말씀 전하는 것을 듣는다.
성경에는 또한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있는 집회가 있다. 이것은 교회의 성격을 띤 집회로서 한 사람이 주도하는 집회가 아니다. 피차 상호적인 집회이다.
성경에 사도의 성격을 띠고 있는 집회는 한 사람의 것이지만 교회의 성격을 띠고 있는 집회는 두 사람의 혹은 세 사람 실행하고 공헌하는 것으로서 전체 모두가 공헌할 권리가 있다. 바꾸어 말한다면 피차적인 것만이 교회의 성격을 띤 집회라 할 수 있고 한 사람이 주도하는 것은 곧 사도의 성격을 띤 집회인 것이다. 이두 종류의 집회는 성경에서 매우 분명히 구분되어 있다.
사도의 성격을 띠고 있는 집회는 믿지 않는 사람에 대한 것과 믿는 사람에 대한 것의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당시 예루살렘에서 [베드로가 열 한 사도와 같이 서서 소리를 높인](행 2:14) 것은 사도의 성격을 띤 집회로서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사도가 말씀을 전한 것이다. 솔로몬의 행각에서 베드로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을 전한 것(행 3:12)도 한 사람이 모든 사람에게 말한 사도의 성격을 띤 집회인 것이다. 후에 사도들이 고넬료의 집에 이르러 말씀을 전한 것(행 10장)도 또한 거기서 다만 복음을 전하고 한 사람이 말하고 모든 사람이 듣는 사도의 성격을 띤 집회였다. 사도행전 13장과 같이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바울이 모든 사람에게 말씀을 전한 것도 교회의 성격을 띤 집회가 아니라 사도의 성격을 띤 집회였다. 사도행전 13장과 같이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바울이 모든 사람에게 말씀을 전한 것도 교회의 성격을 띤 집회가 아니라 사도의 성격을 띤 집회이다 우리가 사도행전을 읽어 보면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이런 [사도의 성격을 띤 집회]가 매우 많다는 것을 알 것이다. 바울이 드로아에서 말씀을 전하는 것에 관하여도 믿는 이들에게 전했지만 역시 사도의 성격을 띤 집회였다. 거기서 바울은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라 믿는 이들에게 말씀을 전했지만 그 성질은 교회 전체적인 것이 아니라 바울의 일방적인 것이다. 바울이 드로아에서 말씀을 전한 것은 바울이 그곳을 지나갔기 때문이다. 지방 교회는 사도가 그 지방을 지나갈 때 기회를 틈타서 사도에게 말씀을 전해 달라고 요청 할 수 있다. 그러나 한 사람이 말씀을 전하고 모든 사람이 와서 듣는 것은 교회의 성격을 띤 집회가 아니라 사도의 성격을 띤 집회이다. 후에 사도 바울이 로마에 갔을 때 많은 사람들이 바울이 거하는 곳에 왔으므로 바울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들에게 강론하여 하나님의 나라 일을 증거 했다.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유하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여"(행 28:23, 30,31). 이것 또한 사도 한 사람이 전하고 모든 사람이 듣는 사도의 성격을 띤 집회이다.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기독교에는 두 종류의 집회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한 사람이 말씀을 전하고 모든 사람은 말씀을 듣는 집회이다. 이런 집회는 곧 사역적집회이다.
성경에 있는 한 종류의 집회는 고린도 전서 14장26절의 집회이다.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이런 종류의 집회는 지방 교회의 집회이다.
교회가 집회할 때에는 한 사람이 주도하여 말씀을 전하고 모든 사람이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혹은 찬송시도 있으며 혹은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 등도 있는 것이다.
이런 집회에서는 당신이 전할 수도 있고 내가 전할 수도 있다. 꼭 누가 전하는 것이 아니고 당신이 일어날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이 일어날 수도 있다. 일정한 것이 없고 "....도 있다". 그러므로 이런 집회의 원칙은 피차 상호적이다. 아마 오늘은 내가 일어나서 전하고 다음에는 다른 사람이 일어나서 전할 것이다. 아마 오늘은 당신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 형제들을 돕고 다름에는 아마 내가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아 형제를 도울 것이다. 이것이 [둘이나 셋이나](27, 29절)의 종류의 집회이다. 이런 종류의 집회는 성질이 피차 상호적인 것이기 교회의 성격을 띤 집회라 부른다.
우리가 성경을 읽어보면 최소한 네 종류의 집회가 있음을 볼 수 있는데 그것들은 다 교회의 성격을 띤 집회이다.
(1)기도집회. "저희가 듣고 일심으로 소리를 높여 가로되... 빌기(기도)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행 4:24, 31). 여기에서 우리는 기도 집회가 있음을 본다. 12장에서 우리는 또한 [교회는 그(베드로)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빌더라](5절)를 볼 수 있다. 기도 집회는 교회가 갖는 한 종류의 집회이다. 성경에서는 이런 집회에서 한 사람이 주도하고 다른 사람들은 그의 안배에 따라 기도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는 이러한 일이 전혀 없고 모든 사람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좇아 당신도 기도하고 나도 기도하는 것이다.
(2)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집회. 당시의 믿는 이들에게는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약 성경이 없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성경은 구약성경뿐이었다. 그들은 유대인이기 때문에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었다](행 15:21). 베뢰아 사람이 성경을 상고한 것은 단체적인 행동이다. 신약 성경에 있어서는 우리가 안디옥에 "무리를 모은 후에 편지를 전하니"(행 15:30, 31)와 골로새의 "이 편지를 너희에게서 읽은 후에 라오디게아인의 교회에서도 읽게 하고 또 라오디게아로서 오는 편지를 너희도 읽으라"(4:16)를 교회가모여서 성경을 읽은 근거로 삼을 수 있다. 물론 우리는 당시 이것이 정식적이지 않았음을 알고 있다. 이런 집회에서 모든 믿는 이들은 주님으로부터 그가 얻은바 가르침과 빛 비춤을 말해 낼 수 있다.
(3)떡을 떼는 집회.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음"(고전11:20).이런 집회에서는 모든 이가 와서 주님을 기념한다. 한사람이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하고···우리가 다 한 떡에 참예하는 것이다"(고전 10:16.17). 이런 집회에서 당신도 기도로 하나님을 찬미할 수 있고 나도 찬송으로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다.
(4)영적인 은사를 사용하는 집회. 이는 곧 고린도 전서14장에서 말한 집회이다. 이런 집회는 특별히 교회 집회임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수차례 [교회에서](128, 34, 35절)라는 말을 한다. 그리고 이런 집회의 성질은 [너희는···하나씩 하나씩 선지자로서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말씀을 전하고 모든 사람이 앉아서 듣는 집회와는 얼마나 다른가! 이런 집회에서 사람을 온전케 하기 위한 영적인 은사를 가지고 있는 모든 사람은 교회 안에서 자유스럽게 성령의 인도를 받아 그의 은사를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지방교회에 없고 또한 지방 교회가 가질 자격이 없는 한 종류의 집회가 있는데 이것은 오늘날 말씀을 전하는 이런 집회와 같은 것이다. 이런 집회는 한 사람이 말하고 모든 사람이 듣는 집회이다. 이런 종류의 집회는 지방 교회의 범위 안에 없다. 우리는 성경 안에 기록된 사실을 기억한다. 성경은 교회 자체가 일방적이고 능동적인 이런 집회를 가진 적이 한 번도 없음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성경안의 모든 교회 집회는 다 [피차]와 [상호]의 성질을 포함하고 있을 뿐이다. 교회는 피차 상호적인 성격의 집회 외의 다른 집회를 가진 적이 없다 그러므로 오늘날 소위 말하는 [예배]나 [말씀 듣는 집회]나 한 사람의 의장에게 모든 사람이 복종하는 집회라고 이름 지을 수 있는 그런 집회는 교회의 성격을 띤 집회가 아니라 사도의 성격을 띤 집회로서 지방 교회가 갖기 합당하지 않으며 가질 수도 없는 집회이다. 만일 우리가 이런 집회를 교회 안으로 끌고 들어온다면 많은 어려움과 해가 있음을 볼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이렇게 [예배]하는 식의 집회가 이미 교회 집회가 되어 버렸고 또한 교회 안에서 가장 중요한 집회가 되어 버렸다. 거의 모든 교회가 이런 집회 위에 세워져 있고 이것이 없으면 교회가 곧 무너질 것 같다. 누가 좋은 교인인가? 일 년 52주일 마다 예배당에 가서 목사의 말씀 듣는 사람이 좋은 교인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성경대로 본다면 이것은 수동적인 것이고 죽어 있는 상태이다. 그는 일 년 52주일마다 예배당에 가서 말씀을 들었지만 아직 [교회]에 온 적이 없는 것이다! 그는 사역적인 집회만 참석했을 뿐 아직 교회 집회를 참석해 보지 못한 것이다. 이는 우리가 그런 집회를 가질 수 없다는 말이 아니라 그런 집회는 사역자가 책임지는 것이라는 말이다. 언제든지 사역자가 있을 때 만 그런 집회를 가질 수 있다. 사역자가 없을 때에는 가질 수 없는 것이다. 지방 교회는 자체적으로 자주 그런 집회를 가질 수 없다. 그러므로 현제 이런 집회를 갖고 있는 모든 지방 교회는 마땅히 이런 집회를 일찌감치 중단시켜야한다. 성경은 우리더러 이런 집회를 보존하라고 하지 않았다. 이런 집회를 자주 갖는 결과는 많은 형제들로 하여금 자라지 않고 게으른 사람이 되게 하여 모든 사람을 말씀을 전하는 것을 듣기만 원하고 다른 사람의 도움만을 받으려 하며 수동적인 사람이 되려고만 하게 된다. 이것은 신약의 원칙이 아니다. 신약의 교회의 원칙은 피차 돕고 서로 온전케 하는 것이다. 만일 형제자매들이 계속 수동적이고 말씀을 듣는 사람이 된다면 교회의 성질을 잃어버리게 된다! 100여 년 이래 교회가 이렇게 약해진 이유는 하나님의 종들이 사역의 성격을 띤 집회를 교회 안으로 끌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들이 수동적으로 [예배]를 보러 가고 앉아서 듣기만 하면 그리스도인 이라고 생각하고 오해하게 되었다. 결국 하나님의 자녀들은 집회에서 그들의 책임을 다하지 않고 완전히 수동적으로 변해 버리고 영적인 일에 대하여 취미가 없으며 살아 있는 능력도 없게 되어 버렸다.
그리고 주일마다 말씀을 전하는 집회를 유지하기 위하여 말씀을 잘 전하는 사람을 유지해야 한다. 이럴 때 교회를 다스리기 위한 사역자가 필요할 뿐 아니라 말씀을 전하는 집회를 유지하기 위한 사역자로 필요하게 된다. 바로 이런 연고로 하나님의 사도가 반드시 목사로서 머물러 있어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지방 안에서 누가 매주일 말씀을 전할 책임을 지겠는가? 만일 한 지방 교회에서 매주일 말씀을 전하는 집회가 필요한 상활에서 그 지방의 형제들 또한 이런 책임을 짊어 질수 없다면 자연적으로 주일 집회를 유지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사도가 안착하게 된다.
우리가 다시 한번 바울의 제 일차 전도 여행의 기록을 읽어 보면 한 지방에서 구원받은 사람들이 교회로 구성된 후에 사도들은 그들에게 주일마다 한번씩 [예배]-한 사람이 말씀전하는 집회-를 가지라고 가르친 일이 없음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런 것을 전 혀 볼 수 없다. 우리는 사도들이 그들에게 집회를 가져야 한다고 명한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가 명한 집회는 사역의 성격을 띤 집회가아니라 교회의 성격을 띤 집회였다. [모이기를 폐...하지 말로 오직 피차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그리하자](히 10:25원문 참조)
그러므로 이 집회의 성질을 혼란케 한 결과는 매우 심각한 것이다. 한 면으로는 형제들이 활발하지 않고 죽은 상태에 떨어지고, 또 한 면으로는 사역 안에서 말씀을 전하는 책임을 지기 위하여 각지 교회에 많은 사역자를 보내야 하기 때문에 사역자가 안주함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복음이 널리 전파되지 못하게 하며, 또 하나님의 복음이 널리 전파되지 못하여 죄인이 구원을 받을 수 없게 된다. 이런 화(禍)의 원인을 찾아보면 그것은 사람들이 교회 안에는 마땅히 말씀을 전하는 집회-[예배]-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누가 하나님의 사역자처럼 말씀을 전할 수 있는가? 그러므로 사역하는 사람이 말씀을 전하는 이런 집회를 유지하기 위하여 안주하게 된다. 결국 복음은 널리 전파되지 못하고 죄인은 구원받지 못하게 된다. 지방 교회는 유익을 얻었는가? 사람들은 영원히 사역안의 한 청중이 될 뿐 교회 안의 한 형제가 되지 못한다!
많은 사람들이 어떤 지방에 가서 예배당을 열고 복음을 전하여 한 무리의 형제를 얻어서 교회를 세운다. 그들은 사역의 성격을 띤 집회와 교회를 성격을 띤 집회의 차이점을 보지 못하므로 사역의 성격을 띤 집회로 교회의 성격을 띤 집회를 대치하였다. 결국 셋집을 구하여 그들로 하여금 그가 있는 곳에 계속 와서 말씀을 듣고 성경공부를 하여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사역적 집회에 참석하게 했다 그러나 그 형제들은 그들 자신의 집회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물론 그들이 이런 집회 안에서 계속하여 수동적인 청중이 되어 설교를 듣고 온전케 되겠지만 그러나 수동적이기 때문에 결구 마땅히 나타내어야 할 교회 성질, 곧 피차 돕고 상호를 온전케 하는 것을 나타낼 수 없다. 성경은 이러한 가르침이 아니다. 우리가 성경의 원칙에 의해 일한다면 사람이 구원받을 때 우리는 그들에게 [내가 있는 이곳의 집회는 교회집회가 아니라 말씀을 전하는 집회요 사역의 성격을 띤 집회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이미 교회가 되었으므로 마땅히 여러분 자신의 집회를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은 누구의 집이나 건물에 세 들어가 기도집회와 성경을 읽는 집회와 떡을 떼는 집회와 은사를 사용하는 집회를 가져야 합니다. 이런 집회들 안에서 여러분은 피차 돕고 온전케 하기를 배워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얻은 바대로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한 사람이 집회를 도맡아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형제들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다른 형제들을 돕는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라고 말해야한다. 그들로 하여금 말씀을 듣고 구원을 받은 후에 즉시 자신의 기도 집회와 성경을 읽은 집회와 떡을 떼는 집회와 은사를 사용하는 집회를 갖게 해야 한다. 이것이 교회집회이다.
이럴 때 우리는 처음부터 믿는 이들로 하여금 매주 좋은 말씀 듣기를 바라지 말아야 함을 알게 할 것이다. 사역적 집회는 잠시적인 것이다(사역자가 한 간증을 지키기 위하여 한 지방에 오래 머무는 것은 예외이다).그들은 지방에 있는 형제들이고, 그들의 피차 상호 성질의 집회만이 교회 집회이다. 그들이 아직 어리고 진리를 분명히 알지 못하고 성경을 가르칠 줄도 모르지만 그들은 그들의 집회 안에 이미 있는 도움으로 만족해야한다. 그들은 자주 좋은 강론을 듣기를 바라지 말아야 한다. 그들은 빛을 보고 진리를 깨달으며 말할 수 있는 구변을 가질 수 있도록 그들에게서 그분의 은사를 나타내도록 성령을 앙망해야한다.
오늘날 믿는 이들은 확실히 너무 많은 말씀을 들었다. 그들의 귀는 가르침을 받아서 무엇이 좋은 말씀인가를 알았지만 그것이 그들의 영적생명에 무슨 도움이 있었는가? 그들은 수동적이고 죽은 상태에 있는 사람이다. 그들은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을 배우지 않고 그들의 본분을 다한 적이 없다. 우리는 지방의 형제들이 스스로 집회를 가질 때 당연히 어리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사역의 성격을 띤 집회는 지방 교회의 영적 상태의 정도를 대표할 수 없고 교회의 성격을 띤 집회만이 지방 교회의 참된 상태를 나타낼 수 있다. 사도가 말씀을 전하고 청중이 수궁하고 있을 때 그 교회의 영적 상태가 매우 뛰어난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이 스스로 집회를 가질 때만이 그들의 참된 상태를 볼 수 있다. 그러나 아무튼 지방에 있는 형제들은 반드시 가르침을 받아서, 서로 돕고 권면하는 것을 잊어버리고 일방적으로 도움을 받는 사람이 되지 않도록 사역의 성격을 띤 집회를 중요시 하지 않고 교회의 성격을 띤 집회를 무시하지 않아야 한다.
사역의 성격을 띤 집회는 사역의 한 방법에 불과하다. 언제든지 사역하는 사람이 떠날 때 일은 중단되지만 지방의 성격을 띤 집회는 여전히 전과 같이 계속되어야 한다. 오늘날 사람들은 교회의 성격을 띤 집회와 사역의 성격을 띤 집회의 차이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사역자가 떠날 때 그렇게 좋은 말씀을 전하고 그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이 없으므로 종종 교회는 집회를 가질 수 없게 된다. 이 두 가지를 반드시 구분해야 한다. 만일 이 두 가지를 구분하지 않는 다면 하나님이 자녀들로 하여금 다른 사람을 돕게 할 수 없다. 오늘날의 실패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없고 교회는 사역 안에 부속된 것으로서 말씀을 전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있으면 족하다고 생각 하는데 있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은 교회 안에 [사역자]의 위치가 없다는 것이다. 모두가 형제이다. 교회 안에 집회는 한 사람만이 기도하고 찬송을 선정하고 떡을 떼는 것이 아니다. 교회 안에서는 모든 사람이 다 제사장이고 사역자는 그들이 제사장이 아니다. 사역자만이 무엇을 할 수 있고 그들은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사역자가 그들의 제사장이 아닐 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다 제사장이다. 그러므로 사역자가 그들을 대신하여 기도하는 것이 아니고 그들을 대신하여 영적인 일을 하는 것도 아니라 그들 스스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지방에 있는 형제들은 집회 가운데서 어떻게 서로 온전케 하는가? 성경을 따라 보면, 사람이 구원받을 때 성령의 옮겨 부음을 얻을 수 있고 성령의 옮겨 부음을 얻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은사를 주신다. 그러나 은사는 다 같은 것이 아니다. 집회 가운에서 사용할 수 있는 은사가 있고 사용 할 수 없는 것도 있다. 선지자의 은사와 가르치는 은사와 지식의 말씀의 은사요 지혜의 말씀의 은사요 방언을 통역함의 은사 등은 다 집회 안에서 사용할 수 있는 것들이다. 하나님은 바로 이런 은사 있는 사람들을 사용하여 지방 교회를 온전케 하신다. 지방 교회는 형제들로 하여금 그들의 은사로부터 얻은 것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게 하여 교회를 온전케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정하신, 지방 교회를 온전케 하는 계속적인 방법은 사역적인 집회가 아니라 교회 집회이다. 그렇지 않으면 한 사람이 계속 말씀을 전하고 모든 사람은 계속 말을 듣게 되어 결국 사역하는 사람 외에 누구도 영적인 일을 상관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을 상관하지 않게 된다. 이럴 때 집회가 있을지라도 그것은 사역의 일방적인 것에 불과 할 뿐 교회의 전체적인 집회가 아니다. 이럴 때 교회가 어찌 자랄 수 있겠는가?
교회가 어떻게 하여 오늘날의 상태에 이르렀는가? 그 이유는 교회가 고린도 전서 14장의 그러한 집회 위에 건축되지 않고 사역적인 집회 위에 건축되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왜 사역의 성격을 띤 집회가 있으나 교회의 성격을 띤 집회가 없는가? 그것은 고린도전서 14장의 집회를 가지려면 성령의 옮겨 부음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성령의 옮겨 부음이 없으면 고린도전서 14장의 집회가 있을지라도 형식에 불과 한 것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이여, 우리는 사람을 인도할 때 먼저 성령의 옮겨 부음을 얻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로 하여금 처음부터 교회의 성격을 띤 집회를 갖게 할지라도 그것은 효력을 발하지 않고 능력이 없는 것이다.
선지자와 교사들은 지방교회 안에서 그들의 은사를 사용하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은 그들로 하여금 교회를 건축하도록 몸을 온전케 하는 이런 은사들을 믿는 이들에게 나눠 주신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안배를 본다. 직분에 있어서는 사역을 사도들이 책임지고, 지방교회는 장로들이 책임지는 것을 본다. 그 사역 안에는 사도들과 선지자들과 교사들(복음 전하는 자들)이 있는데 그중에서 사도는 각지의 사역을 위한 것이고, 선지자와 교사는 한 지방을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지방교회 안에서 우리는 두 노선이 있음을 본다. 다스리는 방면과 직분의 방면에는 장도들과 집사들이 있고, 온전케 하는 면과 은사의 면에는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다. 다스림은 교회를 위한 것이고 은사는 집회를 위한 것이다. 장로는 교회를 위한 것이고 선지와 교사는 집회를 위한 것이다. 만일 장로에게 또한 은사가 있다면 그에게는 교회를 다스리는 직분이 있을 뿐 아니라 말씀을 전파하고 가르치는 책임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장로의 위치로 전파하고 가르치는 책임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장로의 위치로 다스리고 선지자와 교사의 자격으로 온전케 하는 것이다. 사도에게는 지방 교회를 직접 다스리는 책임이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완전히 장로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사도가 또한 선지자와 교사라면 그는 형제의 자격으로 지방 교회의 집회 안에서 그의 은사를 사용하여 다른 사람을 온전케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14장에는 사도의 위치가 없지만 그는 선지자의 자격으로 집회에 올수 있다.
그러나 만일 믿는 이들이 다 성령의 능력이 무엇인가를 안다면 하나님께서는 지방 교회 안에서 사도 외에 따로 그 사역의 일을 이루고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며 성도를 온전케 하기 위하여 반드시 많은 은사들을 일으키실 것이다. 우리가 고린도서를 보면 하나님께서 이러한 은사들을 내리시어 그들로 하여금 지방 교회 안에서 서로 건축되고 사도가 항상 머물기를 의지할 필요 없이 교회의 성격을 띤 집회를 가질 수 있게 하셨음을 알 것이다! 오늘날 교회의 실패는 사람이 사역자를 성령보다 더 주의 하고 사역자가 가진 은사로 성령이 주실 은사를 대치하므로 한 지방에 사역의 성격을 띤 집회만 있고 교회의 성격을 띤 집회가 있을 수 없게 된 데서 기인한다.
교회의 성격을 띤 집회는 무엇이고 사역의 성격을 띤 집회는 무엇인가? 원탁형의 집회는 다 교회의 성격을 띤 집회이고 강단이 있는 집회는 다 사역의 성격을 띤 집회이다. 성경 안에서 하나님은 이 두 종류의 다른 성질의 집회를 계속 유지하기 원하신다. 사도의 집회만으로 충분한 것이 아니라 또한 교회 집회가 있어야 한다. 언제든지 사역자가 우리의 지방을 지나갈 때 우리는 사역자의 집회를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집회는 우연한 것이지 항상 있는 것이 아니다. 지방 교회의 집회가 항상 있는 것이다. 교회집회는 원탁형의집회로서 당신이 나에게 ,내가 당신에게 공급하고 피차 적이고 상호적인 것이다. 오늘날 하나님의 복음이 널리 전파되고 하나님의 교회가 자라게 하기 위하여 한 지방 교회 안에서 첫 번째로 폐지되어야 할 것은 강단의 이런 집회이다. 이렇게 할 때만이 하나님의 사역자가 자유로이 왕래하여 복음이 없는 지방에 가서 사역할 수 있고 지방에 머물러 지키는 일을 할 필요가 없게 된다. 동시에 지방교회는 하나님의 사역자로 하여금 자유로이 왕래하게하고, 그들 자신은 하나님 앞에서 추구하며 일생 동안 수동적으로 말씀을 듣는 사람이 되지 않고 활발하게 영적인 일을 주의할 수 있게 된다. 강단의 집회가 폐지되지 않는 한 지방의 집회는 있을 수 없고 지방 교회 또한 자랄 수 없게 된다. 강단의 집회는 사도가 있을 때만 가질 수 있고 사도가 없을 때에는 가질 수 없다. 사도가 메시지를 전하고 떠난 후 그런 집회는 즉시 끝나야 한다(물론 때때로 선지자와 교사들과 복음 전하는 자들이 가끔 형제들을 불러 모으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이것은 지방에 항상 있는 집회가 아니라, 예외적인 집회이다).
우리가 사도행전을 보면 당시의 상황을 알 수 있다. 사도행전 2장42절: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통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많은 사람들이 사도 베드로의 말씀을 듣고 구원을 받았다. 그들은 구원받은 후 서로 교통하며 떡을 떼며 기도를 했다. 사도가 그들을 위하여 중앙적인 집회를 세운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가 서로 교통하며 떡을 떼고 기도한 것이다. 사도행전 2장 46절:"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이것이 당시의 상황이다. 당시의 믿는 이들은 오늘은 성전에 가서 모이고 내일은 집에 가서 모였고 오늘은 이집으로, 내일은 저 집으로 갔었다 그들은 날마다 사도의 강론을 들은 것이 아니다. 교회 집회는 사도의 집회와 근본적으로 분리된 것이다. 오늘날 만일 우리 동역자들이 지방 교회를 건축하기 원한다면 반드시 교회를 사역 안에서 따로 분리시켜야 한다. 일단 교회가 사역으로부터 구분되어야만 지방 교회의 성격을 띤 집회가 세워 질 수 있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지방 교회에 많은 은사들을 주기 원하신다. 오늘날 교회가 사역에 부속되어 있기 때문에 지방 교회가 얻을 수 있는 많은 은사들과 하나님에게 쓰임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 다 매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