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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보다 든든한 빽이 어디 있나!
2023년 4월10일에 찍은 ‘큰스님의 근황’ 사진이 11일 <다음까페 염화실>에 올라왔다.
파란 하늘에 햇빛이 가득한 옥상에서 무애스님, 재욱스님, 현진스님, 용학스님, 원정스님과 휠체어 산책을 하시는 사진이었다.
제자 스님들이 햇빛 아래서 환하게 티 없이 웃고 계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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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3일 ‘단단한 뼈’라는 뜻의 부산 구서동 ‘단골병원’에서 큰스님을 뵈었다.
큰스님과 회장스님이 이야기를 나눌 때 건당 제자 스님들이 다 같이 문병을 오셨다.
큰스님께서 일일이 손을 잡고 인사하셨다. 그리고 모임이 파할 때쯤 새로 태어나신 듯한 수술 소감을 말씀하셨다.
“공부에 열중해야 해. 내가 아파보니까 화엄경 같은 것이 없어. 열심히 화엄경 연구해서 화엄을 온 세상에 널리 펴도록 그것밖에 할 일이 없어. 그것이 전부 보람이 되고 공덕이 되고, 나하고 인연이 된 보람인 거야. 우리가 부처님 만난 인연을 뭘로 나타낼 것이야, 도대체? 니가 부처님 인연이 되어서 중이 됐는데 그 무엇에다 맥점을 둘 거야? 화엄경 공부해야 돼. 그러면 거기서 답이 다 있어. 원효, 의상스님이 그동안 불교가 들어온 지 300년이 지난 이후에 나타나신 분들이거든.
원효, 의상이 불교가 전해진 뒤 300년 이후에 나타나신 분들인데 그분들이 그 많은 팔만대장경을 다 섭렵하신 후에도 마지막에 화엄경을 가지고 딱 맥점을 잡아서 전국에다가 화엄십찰을 세우고, 원효스님 같은 이는 천성산에 화엄벌, 거기 설화도 많아요.
암자를 맡은 스님이 여럿이 있었는데 누가 공양주를 살다가 강의 시간에 늦어가지고, 막 달려오다가 칡에 걸려 다쳐서 늦게사 왔거든. 왜 그리 늦었냐 하니까, 아유 내가 늦어서 달려오다가 칡에 걸려 넘어져서 그렇다고, 하니까 산신에다가 명령을 했어. ‘천성산에 칡을 없애라’ 그래 버렸어. 그래 천성산에 칡이 없어. 그런 참 신비한 경전, 경전 중에 가장 위대한 경전이 화엄경이야. 그런 위대한 선지식들이 불교가 300년 축적된 이후에 화엄경으로 결론을 내린 거야.”
‘천성산에 칡을 없애라’ 제자 한 사람의 공부를 위해 원효스님이 산신에게 명령내리는 이야기를 하실 때, 이날 병실이 통째로 천성산으로 옮겨지는 듯했다.
“나는 무식해. 오직 그 스님들이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그것만 추정하는 거야. 팔만대장경을 다 섭렵해서 그 높고 낮은 것을 내가 알 수 없잖아. 또 내가 주장한들 누가 듣겠어? 그저 원효스님 의상스님이 그렇게 사셨기 때문에 그걸 가지고 밀어붙이는 거야. 그보다 더 든든한 빽이 세상에 어디 있나? 그래 여러 스님들 오늘 참 잘 왔어. 이 이야기 한마디만 마음에 새겨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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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병실에서 큰스님은 제자 스님들과 함께 단체 사진을 찍으셨다.
“이거 그 어떤 사진보다도 가장 중요한 사진이야.”
얼굴이 안 나오는 사람이 없도록 잘 찍으라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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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병환을 이겨내신 내용을 기록으로 남기라고 하셨다.
2023년 2월 23일 목요일 오전 11시쯤 햇빛이 좋아 화엄전 마당에서 산책을 끝내고 계단을 오르시다가 낙상하셨다. 단골병원에 입원.
2023년 2월 28일 화요일 오후 2시 고관절 수술을 하셨다. (오후 2시는 우리가 유튜브로 늘 화엄경을 공부하는 시간이다. 대방광불화엄경!)
2023년 3월 3일 수술 후 내과 문제로 양산 부산대학교 병원으로 급하게 옮기시고 13일까지 치료를 받으셨다.
2023년 3월 13일 단골병원으로 다시 입원, 며칠 후부터 재활운동을 시작하셨다.
2023년 4월 3일 봄, 용학스님이 두 번째 진행하시는 화엄법회에 참석하러 오신 스님들이 단체로 큰스님의 병실을 방문하였다.
큰스님은 ‘화엄경을 공부해야 한다’는 소감과 함께 ‘그 어떤 사진보다도 가장 중요한 사진이’ 될 단체사진을 찍자고 하셨다.
2023년 4월11일 씩씩하게 재활하고 계시며, 제자 스님들과 더 다정하게 옥상공원을 산책하셨다. 이 사진이 수술 후 첫 공식 사진으로 <다음까페 염화실>에 올려졌다.
이윽고 상강례
법회의 시작
大方廣佛華嚴經 卷第五十
[平等因果中 明果]
如來出現品 第三十七之一
三. 普賢菩薩의 說法
2. 如來의 身業
(2) 如來身業의 十種譬喩
문수경전 연구회 4월달 강의 중에 여래출현품(如來出現品), 교재 255페이지(민족사刊 제3권)가 되겠다.
오늘 강의 들어가기 전에 잠깐 여기 책 소개 좀 해드리고 들어가겠다.
<중국화엄사상 연구>라고 ‘정엄스님 지음’이라고 된 책이다. 스님께서 한 20년 전에 일본 동경대학, 도쿄대학에서 10여 년 정도 대학원에서 중국 화엄경을 전공하시면서 박사 논문으로 제출했던 논문을 몇 해 전에 다시 한글로 번역하셔서 낸 책이다.
작년까지만 해도 일본어 논문으로만 있었는데 번역을 하셔서 조계종에 상당히 많은 양을 기증하시고 도서관에 화엄경 공부하시는 스님들께 회향을 했다.
어른 스님께도 연락이 와서 정엄스님께서 문수선원에서 공부하시는 스님들께 150여 권 정도 회향하셨다.
약간 여담이 되겠지만 스님께서는 해인사 희랑대의 어른스님 시봉이시고, 해인강원도 졸업하시고 동국대도 졸업하시고 보기 드물게도 일본 동경대학 도쿄대학이라면 상당히 세계적으로 유명한 대학인데 거기서 우리 한국스님께서 공부하셨다.
제가 알기로는 일본에서도 화엄학을 이만큼 연구하신 분들이 상당히 드물다고 한다.
스님께서 저의 선배라서 저하고 좀 친분이 있다. 중국 오대산 화엄순례 갈 때라든지 한 번씩 따라다니면서 여러 가지 제가 잘 모르는 내용들을, 화엄경의 상식적인 것, 반드시 알아야 될 교학적인 것을 많이 여쭤본다.
혹시나 스님들께서도 특히 화엄사상 연구 청량국사(淸凉國師) 징관(澄觀) 스님에 대한 궁금증이 있으시면 서울 산본 정각사의 정엄스님께 연락하셔서 서로 탁마하시고 공부하신다면 상당히 서로 도움이 되지 않겠나 생각한다.
스님도 흔쾌히 많은 분들이 연락을 해주시고 ‘같이 공부했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저한테 하셨다.
아무튼 스님께서 이렇게 좋은 책을 회향해 주셔서 감사하다.
감사의 박수 한 번 우리가 보내 드리고 공부하도록 하겠다.
불교 방송 ‘행복한 화엄경’에서 자주 나오시는 그 스님이시다.
조계종에서 특히 한국불교에서 이렇게 화엄경을 종합적으로 이만큼 연구한 것은 무게감으로 볼 때, 이 책이 가장 비중 있고 최초인 것 같다.
아주 귀한 책이라서 일반인들이 보기에는 조금 어려울지 몰라도 화엄경을 전공으로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문수강당에서는 상당히 필요한 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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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에 들어가기 앞서서 시험지 같은 유인물을 한 장씩 나눠드렸다. 오늘 공부할 여래출현품 내용과도 상당히 연관있는 십지품의 내용이다.
부처님의 말씀, 부처님의 몸이 뭐냐? 부처님의 몸은 마음이겠다. 심체 본체 법신이라고 하고 여래법신이라 하기도 한다.
거기에 대해서 십지품의 제일 말미, 39권에 잘 나온 부분이 있다. 십지 회향을 하면서 법운지 보살 이후에 십지를 ‘연못과 같다, 산과 같다, 바다와 같다, 보배 구슬과 같다, 보주와 같다’라고 비유하는 내용들이 나온다. 그 내용과 오늘 공부하는 여래출현품 내용이 상당히 상관관계가 있다.
여러분들이 충분히 알고 계시겠지만, 십지품의 그 부분을 오늘 공부하는 여래신업의 비유와 상관지어서 다시 공부하면 이해를 돕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될 것이다.
그래서 ‘바다의 열 가지 공덕’과 ‘마니주, 여의주의 열 가지 공덕’을 십지품에서 따로 뽑아서 유인물로 전달해 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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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공부할 차례는 아까 말씀드렸듯이 가지고 계신 교재 255페이지(민족사刊 제3권) 여섯 번째 부처님의 몸을 달에 비유해서 표현하는 부분이다.
바. 月輪의 四種奇特法
復次佛子야 譬如月輪이 有四奇特未曾有法하니 何等이 爲四오 一者는 暎蔽一切星宿光明이요 二者는 隨逐
於時하야 示現虧盈이요 三者는 於閻浮提澄淨水中에 影無不現이요 四者는 一切見者가 皆對目前호대 而此月輪은 無有分別하며 無有戲論인달하야 佛子야 如來身月도 亦復如是하사 有四奇特未曾有法하니
何等이 爲四오 所謂暎蔽一切聲聞獨覺學無學衆과 隨其所宜하야 示現壽命의 修短不同호대 而如來身은 無有增減과 一切世界淨心衆生의 菩提器中에 影無不現과 一切衆生이 有瞻對者는 皆謂如來가 唯現我前이라하나니 隨其心樂하야 而爲說法하며 隨其地位하야 令得解脫하며 隨所應化하야 令見佛身호대 而如來身은 無有分別하며 無有戲論하야 所作利益이 皆得究竟이니라 佛子야 是爲如來身第六相이니 諸菩薩摩訶薩이 應如是見이니라
“또 불자여, 비유컨대 달에는 네 가지 기특하며 미증유한 법이 있느니라.
무엇이 넷인가. 하나는 모든 별의 광명을 가림이요, 둘은 때를 따라서 찼다 기울었다 함을 보임이요, 셋은 염부제의 맑은 물속에는 모두 그림자가 나타남이요, 넷은 모든 보는 이가 자기의 눈앞에 있다 하지마는 이 달은 분별도 없고 부질없는 말도 없느니라.
불자여, 여래의 몸의 달도 또한 그와 같아서 네 가지 기특하고 미증유한 법이 있느니라.
무엇이 넷인가. 이른바 모든 성문과 독각의 배우는 이와 배울 것 없는 이들을 다 가려 버리느니라.
그들에게 마땅한 대로 수명을 보이어 장수하고 단명함이 같지 않지마는 여래의 몸은 증감이 없느니라.
모든 세계에 있는 마음이 깨끗한 중생의 보리 그릇에는 모든 그림자가 나타나느니라.
모든 중생으로서 여래를 대하는 이는 모두 오직 자기 앞에만 계신다고 하거든 그들의 좋아함을 따라서 법을 설하며, 그들의 지위를 따라서 해탈을 얻게 하며, 교화받을 만한 이를 따라서 부처님의 몸을 보게 하지마는 여래의 몸은 분별도 없고 부질없는 말도 없되 지으시는 이익은 모두 끝까지 이르느니라.
불자여, 이것이 여래 몸의 여섯째 모양이니 보살마하살들은 마땅히 이와 같이 보아야 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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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륜(月輪)의 사종기특법(四種奇特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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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에는 네 가지의 특별한 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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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차불자(復次佛子)야 : 또 불자여
비여월륜(譬如月輪)이 : 비유하건대
유사기특미증유법(有四奇特未曾有法)하니 : 달에는 네 가지 아주 기특하며 미증유한 법이 있으니
하등(何等)이 : 무엇이
위사(爲四)오 : 네 가지냐.
달빛의 기특한 비유로써 부처님의 원만한 회향, 이것이 항상 등주신(等住身)이라. 평등하다고 하는 것은 상대적인 평가가 아니라 절대적인 평가다. 대(對)가 끊어진 평가이기 때문에 등주신이라. 항상 몸에 부처님의 법신이 평등하게 머무른다. 평등하게 머무는데 과거 현재 미래에 저 달빛이 줄어들거나 불어나는 법이 없다.
이것을 반야심경에서 우리는 ‘부처님의 법신은 불생(不生) 불멸(不滅)이다, 부증(不增) 불감(不減)이다, 불구(不垢) 부정(不淨)이다’ 라고 6(不)로써 부처님의 몸을 표시한다.
오온(五蘊)이 개공(皆空)한 것이 부처님의 몸이고, 불생불멸(不生不滅)이 부처님의 몸이다.
그것을 여기서부터 일자(一者)는 하고 들어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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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자(一者)는 : 첫 번째는
영폐일체성수광명(暎蔽一切星宿光明)이요 : 달이 떠버리면 삼국지에 이야기하듯이 월명성희(月明星希)라 달빛이 밝으면 별빛이 희미해져 버린다. 그렇듯이 부처님의 달빛이 원만한 지혜가 딱 떠버리고 나면, 불승(佛乘) 일승(一乘)이 떠버리고 나면 성문 연각 이승(二乘)은 희미해진다, 이런 뜻으로 지금 써 놓았다.
아무리 아라한이고 재주가 좋고 공부를 한다고 하더라도 부처님의 불광(佛光)이 떠버리고 나면 나머지 깨달음의 세계라든지 하는 것은 육사외도처럼 희미해져 버린다는 뜻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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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二者)는 : 둘째는
수축어시(隨逐於時)하야 : 때를 따라서 달이 일월영측(日月盈昃)이라고 천자문에 하듯이 불어났다가 찌부러졌다가 찼다가 기울어졌다 하는 것을 달은 보이는데
시현휴영(示現虧盈)이요 : 부처님의 몸은 상신(常身) 항상하는 몸이면서도 영측(盈昃)을 보인다. 연장되고 줄어들고 늘어난 것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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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자(三者)는 : 세 번째는
어염부제징정수중(於閻浮提澄淨水中)에 : 염부제의 맑은 물속에는
영무불현(影無不現)이요 : 모두 그 그림자가 나타난다. 염부제의 맑은 물속에 그 그림자가 나타난다고 하는 것을 세종대왕께서 잘 아시다시피 월인천강(月印千江)이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다. 유기견유무(由器見有無)라 그릇으로 말미암아서 그 있고 없는 것이 보여진다.
염부제의 맑은 물속에 그 그림자가 나타난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여래현상품에서도 잘 아시다시피 불신충만어법계(佛身充滿於法界)라, 불신은 충만해서 법계에 가득하다. 상신(常身)이다. 항상하고 있는 법신이다. 항상 법신이다. 항상 설법이요 항상 법신인데 수연부감미부주라.
불신충만어법계(佛身充滿於法界) 수연부감미부주(隨緣赴感靡不周)라 인연을 따라서 모든 강에 다 가기는 가지만 이항처차보리좌(而恒處此菩提座)라 항상 보리수 아래를 떠나지 아니했다. 보리수 아래를 떠나지 아니한다는 것은 본래 없다는 것이다.
그런 것을 지장전에 가서도 표현을 하고 범어사 같은 데는 대웅전에 가서도 표현을 한다.
스님들께서 알고 계시는 대로 수처현청황(隨處現靑黃)이라든지 자연수색변래단(自然隨色辨來端)이라든지 상당히 여러 가지 표현이 있다. 그러나 고륜(孤輪)은 본불낙청천(本不落靑天)이라, 저 하늘의 달은 한 번도 강물에 떨어진 적이 없지만 염부제의 맑은 물속에 다 그 그림자는 나타난다.
이런 것을 우리가 화엄경에서 이야기하자면 승수미산정품(昇須彌山頂品) 해석을 할 때 소초에서 청량국사가 예를 들었다.
맑은 강에 달이 하나 떠올랐는데 한 배는 가만히 정주(停住)해서 멈춰 있고, 배 두 개 중에 한 배는 남쪽으로 가고, 한 배는 북쪽으로 간다.
달을 보면서 멈춰 있는 배에서는 달이 움직이지 않고, 남쪽으로 강을 따라가는 배는 달이 남쪽으로 따라가고, 북쪽으로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배는 달이 또 북쪽으로 올라간다. 그러나 불의중류(不依中流)에 왕남북(往南北)이라, 움직이지 않는 가운데 남북으로 갔다.
이것이 부처님이 동정이 없다. 무동정(無動靜)을 가지고 부처님을 움직인 것도 없고, 고요한 것도 없고, 본래 없는 것이다, 라고 한다.
그런 얘기들을 여기서도 달을 통해서 우리에게 잘 나타낸다.
누구든지 하는 법성게에도 그런 내용이 있다.
흔히 쉬운 말로는 ‘지지발처(至至發處)요 행행본처(行行本處)라, 가고 가고 가더라도 본래 그 자리이고, 다다르고 다다르더라도 본래 출발한 그 자리다’ 라고 한다.
지지발처요 행행본처라.
가고 가도 본처이고 다다르고 다다라도 지지해도 발처다 출발한 그 자리다.
불리문수사리족하(不離文殊師利足下)라 문수사리의 발밑을 떠나지 아니하고 선재동자는 110선지식을 다 친견했다.
이것을 부동이변이라고 한다.
부동이로되 움직이지 않되 다 갔다, 이렇게 이야기한다.
부동은 부처님의 입장이고 두루하다 라고 하는 것은 중생의 업이 다 다르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
여기서 부처님의 몸을 열 가지로 비유하는 와중에 우리가 여섯 번째를 하고 있다.
달, 고륜(孤輪)은 본불낙청천(本不落靑天)이라 하늘에 그대로 있지만 그러나 강물을 따라서 가지 아니한 곳이 없다.
이런 식으로 달에 비유해서 부처님의 몸은 오고 감이 없지만 다 오고 갔다. 무거무래인데 다 갔다. 왜 그러느냐? 중생의 수준에 따라서 향하고 등지고 한다. 이런 것을 이야기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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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四者)는 : 네 번째는
일체견자(一切見者)가 : 모든 보는 이가 일체 견자가
개대목전(皆對目前)호대 : 전부 다 자기 눈앞에 있다.
이차월륜(而此月輪)은 : 하지만 이 달은
무유분별(無有分別)하며 : 분별이 없다.
무유희론(無有戲論)인달하야 : 분별이 없으니까 못된 사람도 따라가고 착한 사람도 따라가고 아이도 따라가고 어른도 따라간다. 그러나 달은 한 번도 따라간 적이 없다.
중생이 자기 수준에 맞춰서 부처님을 바라볼 뿐이다.
저 뒤에 가면 이런 이야기를 하신다. 복이 없는 사람들은 부처님을 보고 싶어도 절대 부처님이 안 보인다.
비소복자(非少福者)는 견(見)자라 복이 없는 쩨쩨한 사람들이 부처님을 볼 것이 아니다, 이런 이야기가 오늘 할 대목 중에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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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佛子)야 :불자여
여래신월(如來身月)도 :여래의 신월도, 부처님의 몸을 달에 비유했다.
여래명호품에 보면 부처님의 몸을 달에 비유한 대목이 나온다.
여래명호(如來名號)는, 어떤 것이 부처님의 이름이냐?
부처님의 이름은 사자후다.
또 부처님의 이름은 뭐냐?
원만월(圓滿月)이다. 원만한 달이다.
또 부처님의 이름은 고타마요 부처님의 이름은 싯다르타요 부처님의 이름은 석가모니요 부처님의 이름은 비로자나다, 이런 대목들을 우리가 여래명호품에서 배운 바가 있다.
여기서 여래신월이라 하는 것은 바로 법신이고 여래신월이 불신이다.
불신은 기신론 같은 데 보면 첫 구절이 이렇게 나온다.
최승업변지(最勝業徧智)시며, 가장 수승한 업으로 두루 아시고, 이것이 부처님의 법신을 나타낸 것이다.
색무애자재(色無礙自在) 하사 부처님의 법신의 색이 무애자재하시며
구세대비자(救世大悲者)라, 자비심이 있기 때문에 그 어디에든지 나투시지 아니하는 곳이 없다. 법신을 그렇게 이야기한다.
금강경에도 우리가 익히 아시다시피 부처님의 몸은 어떠냐?
약이색견아(若以色見我)아 이음성구아(以音聲求我) 시인행사도(人行邪道)라 불능견여래(不能見如來)라.
부처님의 32상 80종호를 ‘범소유상(凡所有相)이 개시허망(皆是虛妄)이니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이면 즉견여래(卽見如來)라’ 라고 하였다.
여래, 부처님의 달이라고 하는 것은 모양 없는 달이다. 무상월(無相月)이다, 이렇게 볼 수가 있다. 불자야 여래신월도
역부여시(亦復如是)하사 : 역부여시하야, 다 맞춰주기는 맞춰주지만 중생의 수준 따라 맞춰주는 것이지 본래 그런 것이 아니다. 부처님의 몸의 달도 또한 그와 같아서
유사기특미증유법(有四奇特未曾有法)하니 : 네 가지의 기특하고 미증유한 법이 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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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등(何等)이 : 무엇이
위사(爲四)오 : 네 가지냐
소위영폐일체성문독각학무학중(所謂暎蔽一切聲聞獨覺學無學衆)과 : 소위 영폐 모든 성문(聲聞)과 독각학과 무학 성중을소위 영폐한다 일체 성문 연각과 아라한들을 모두 영폐 싹 가려 버린다.
화엄경 세주묘엄품에 볼 때 주약신이라고 하는 부분이 있었다. 주약신 이름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주약신이 폐일광당주약신(蔽日光幢主藥神)이다. 폐일광당.
주가신이라면 음식이 맛이 있어야 하니까 유연승미주가신(柔軟勝味主稼神) 이렇게 나오듯이 세주묘엄품에서는 우리 마음의 이치라든지 부처님의 진리를 신중 이름 앞에 넉 자를 가지고 형용격으로 잘 표현해 놓았다.
음식을 표현하려면 음식이 부들부들 해야 된다. 유연승미(柔軟勝味)다. 수승한 맛은 아이나 어른이나 옛날 사람이나 지금 사람이나 서양사람이나 동양사람이나 할 것 없이 입에 다 맞아야 수승한 맛이다.
주가신이 유연승미라 하듯이 주약신은 병들고 아프고 번뇌 무명에 캄캄한 사람들에게 제일 좋은 약이 폐일광당이다.
저는 그 대목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이 책에는 폐목광당으로 나와서 바로 잡아야 될 것이다.
눈 목(目)자가 아니고 태양 일(日)자를 쓴다.
태양이 저렇게 밝아서 한 번 떠버리면 평양 가로등이든지 서울 대구 가로등이든지 일본 가로등이든지 무색하게 가로등이 몇 천만 개가 있더라도 태양 한 번 떠버리면 가로등이 무색해져 버린다. 그런데 폐일광당이다.
태양보다 더 밝은 것이 없는데도 이 약은 얼마나 좋은 약인지 캄캄한 무명을 밝히는 약이니까 태양을 폐일이라, 태양 빛을 가려 버릴 정도다.
본지풍광(本地風光)의 달, 본래면목(本來面目)의 달이 떠버리고 나면, 저 하늘의 태양도 무색해진다, 는 표현이 있다.
달만 떠도 별이 희미해져 버리는데 우리 마음, 이 일심자리에 그런 열반의 약이 떠버리고 나면, 영폐(暎蔽)한다. 가릴 폐(蔽)자, 성문 연각 아라한도 굉장히 높고 대단한데 부처님 몸의 달은 그들을 가린다.
화엄경의 요지는 그것이다.
부처님의 10대 제자들은 그들을 능가할 사람이 일반 중에는 잘 없다. 굉장히 뛰어난 부처님의 제자들이다. 그런데 입법계품이나 유마경에도 보시다시피 그 10대 제자들도 눈먼 사람 같고 귀 먼 사람처럼 되어 버렸다. 사리불부터 시작해서 그 정도이니까 화엄경의 일승별교(一乘別敎)의 안목이라고 하는 것은 굉장히 높은 경지에 있다, 이런 것을 여기서도 조금 짐작할 수가 있다.
성문이라면 부처님의 십대제자들이고, 독각승이나 무학승이나 아라한들이라면 더 이상 깨칠 것 없이 모든 연기를 꿰뚫어 본 분들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일승별교로 가는 데 있어서, 일승(一乘) 오직 마음 하나 가는 데 있어서, 불신(佛身)을 찾아가다 보면 부처님의 입장, 근본(根本) 견성(見性) 심성(心性)의 자리에 있어서는, 그런 이들도 오히려 아직 한참 멀었다, 이런 이야기가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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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기소의(隨其所宜)하야 : 그 마땅한 데를 따라서
시현수명(示現壽命)의 : 여래 수명의
수단부동(修短不同)호대 : 길고 짧고 장수하고 단명한 것은 같지 아니하지만
이여래신(而如來身)은 : 그러나 여래신은
무유증감(無有增減)과 : 무유증감이라. 때로는 부처님이 짧을때도 있고 길 때도 있지만 부처님이 그런 것이 아니라 중생의 수준에 맞춰서 그렇다.
여기서 무유증감이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의 신체 체대(體大)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부처님의 모양을 이야기하자면 대자대비의 항하사 무루성공덕(無漏性功德) 완벽한 성품의 공덕을 간직하고 있다. 그것은 부처님의 상대(相大)를 이야기 하는 것이다.
부증불감이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의 체대를 이야기 하는 것이다. 체대라고 하는 것, 허공이 아무리 보태 봤자 허공이고 빼봤자 허공이다. 허공 같은 데서는 보태고 뺄 것이 없다. 본체는 증감하지 않지만 그러나 없는 와중에서 대자대비가 있다.
그 대자대비가 나타날 때는 어떻게 나타나느냐?
중생의 수준에 따라서 용대(用大) 작용으로 나타날 때는 수준이 낮은 사람의 입장에서는 응신(應身)으로 나타나고, 좀 거친 모양으로 나타난다.
수준이 좀 높은 사람의 입장에서는 보신(報身)으로 나타난다.
수준이 부처님에 가깝게 실제 진리로 들어간 사람의 입장에서는 법신(法身)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법신(法身), 보신(報身), 화신(化身 ; 應身)으로 볼 때 제일 낮은 수준으로 보는 것은 자신의 업식 따라 보는 것을 응신이다. 분별심으로 보는 것은 응신이다.
분별심이 끊어져서 무분별심으로 타고 든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 맡은 농사를 지었으니까 그 맡은 과보를 받게 되는 보신의 입장에서 부처님을 바라본다.
완전히 깨달음에 계합해서 구경열반이 된 입장에서는 법신으로서 법신무적(法身無跡)이라, 무상으로써 부처님을 볼 수 있다. 그때는 본다는 것이 아니고 안다,라고 원효스님께서는 설명했다.
‘말인즉슨 본다고 하는 것이지 안다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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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체세계정심중생(一切世界淨心衆生)의 : 일체 세계 모든 세계에 정심중생, 정심(淨心)이라고 하는 것은 아시겠지만 실제이지(實際理地)다.
청정한 정심중생이라고 하는 것은 견도(見道), 도에 바로 들어가는 그 첫 발짝을 우리가 흔히 정심지라고 하고 환희지라고 한다. 원효스님은 그것을 정심지라고 한다. 그다음 단계를 2지부터 6지까지를 구계지(具戒地)라고 하지 않는가.
이 정심지를 타고 들어간 상태, 이 분별심이 오온이 개공한 상태를 정심중생이라고 한다. 일체 세계의 정심중생의
보리기중(菩提器中)에 : 보리기중에, 일반 중생은 보리의 그릇이 없다. 보리그릇이 안되고
여기서 정심중생쯤 돼야 환희지 오늘 여기에 나오는 내용하고도 똑같다.
이 내용을 십지품에서 좀 알고 있으면 지금 하고 있는 여래출현품의 내용이 굉장히 쉽게 와 닿는 것 같다.
모든 세계의 마음이 깨끗한 중생의 보리 그릇에서는, 입법계품에는 뭐라고 해놓았는가? 비기고(非器故)니라. 그 그릇이 아니다. 용광로 같은 데 뜨거운 데다가 플라스틱 그릇을 갖다 받쳐놔봤자 녹아 버리고 안되니까 정심지가 안된 사람들은 일단 화엄이 안 들어온다 이런 얘기와 똑같은 것 같다.
영무불현(影無不現)과 : 모든 그림자가 다 나타난다.
마음의 바다가 맑고 망념이 도적이라. 청량국사는 그렇게 해석했다. 망념도적(妄念都寂)이라. 망념이 모두 다 꺼져버린 상태를 정심이라고 해 놓았다.
그때는 즉진견불(則眞見佛)이라. 그때 바로 진실로 부처님을, 그때는 진견불이라 부처님을 볼 수 있다. 청량국사는 그 대목에서 그렇게 해석을 하신 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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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체중생(一切衆生)이 : 모든 중생으로서
유첨대자(有瞻對者)는 : 여래를 대한 이는
개위여래(皆謂如來)가 : 모두
유현아전(唯現我前)이라하나니 : 오직 자기 앞에만 부처님께서 계신다고 한다. 유현아전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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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기심락(隨其心樂)하야 : 그 마음에 좋아하는 바를 따라서
이위설법(而爲說法)하며 : 설법을 하고
수기지위(隨其地位)하야 : 그 수준, 그 깨달음의 정도, 말을 따라올 정도의 능력에 따라서, 깨달은 지위에 따라서
영득해탈(令得解脫)하며 : 그들로 하여금 각각 단계별로 해탈하게 한다.
수소응화(隨所應化)하야 : 교화를 받을 만한 이를 따라서
영견불신(令見佛身)호대 : 영(令) 뭐뭐 하게 한다, 부처님의 몸을 보게 하지만
이여래신(而如來身)은 : 이(而) 그러나 여래 몸은
무유분별(無有分別)하며 : 분별도 없으며
무유희론(無有戲論)하야 : 부질없는 말도 없다.
소작이익(所作利益)이 : 부처님의 이익은
개득구경(皆得究竟)이니라 : 오직 완전한 것만 부처님의 불사다. 개득구경이니라. 완전히 퍼펙트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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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佛子)야 : 불자야
시위여래신제육상(是爲如來身第六相)이니 : 이것이 부처님 여래 몸의 제 여섯 번째 모양이다. 제6상이다.
제보살마하살(諸菩薩摩訶薩)이 : 모든 보살마하살이
응여시견(應如是見)이니라 : 마땅히 이와 같이 보아야 하느니라.
얘기인즉슨 하자면 가설과 불가설이 있지 않은가?
가설로 하자면, 말로 하자면, 말을 의지해서 말하자면 우리가 부처님을 얘기할 수도 있고, 부처님 몸을 문수보살이나 보현보살로 비유해서 말할 수도 있다.
말을 떠나서 불가설로 이야기하자면 비로자나부처님이라 하면 비로자나 부처님은 허공 같아서 안 보인다.
안 보이는데 인연 따라서 나타나서 불교를 가설로 하자면, 문수 보현이 부처님의 모습이 된다.
흔히 문수는 눈이라고 하고 보현은 발이라고 한다.
문수보살은 우리가 숨 쉬는 것과 같고 심장이 뛰어서 맥박이 뛰는 것과 같고 피가 도는 것 같다. 문수보살은 안쪽으로 이(理)가 이치가 심장이 벌떡벌떡 뛰고 있고, 숨이 왔다갔다 하고 생명이 살아있는 것과 같다.
그에 비해 보현보살의 입장에서는 거기서 바깥으로 나와 현실적으로 만행무궁이라. 만행이 바라밀행이 실질적으로 손발로 행해지는 것은 겉가죽의 모습은 보현보살로 다 나타난다.
안에서 숨이 벌떡거리고 맥박이 뛰는 거나, 바깥에 얼굴이 붉으락 푸르락 해서 손이 왔다갔다 움직이는 거나, 생명체가 한 덩어리가 되어서 모양 없는 비로자나가 문수 보현을 통해서 바깥으로 구현된다는 것이나, 이것을 화엄에서 청량국사는 삼승의 원흉이다, 라고 하였다.
‘그게 어디 있느냐? 당장 현전일념속 여기에서 찾아야 된다.’ 당장 일념을 놓쳐버리고 나면 현전일념 외에는 다른 것은 없다. 이렇게 이야기를 한다.
그래서 보화는 보화비진요망연(報化非眞了妄緣) 보화는 비진이요 법신만이 오직 법신청정광무변(法身淸淨廣無邊)이다. 법신청정이 지금 여기서 이야기하는 여래성인 것 같다.
일곱 번째 대목에 들어가겠다.
지루한가?
어른스님 안 계시니까 전부 다 표정이 하나도 없이 잡아먹을 듯이 앉아계신다.
‘재밌습니다.’
누가 그러는가? 재미동포.
웃어가면서 하자.
아니면 다음 시간에는 산통 뽑아서 여러분들 중에서 한 분 뽑아서 대신 강의하도록 하겠다. 그것이 제일 합리적이지 않은가?
다음달에는 누구 한 분 뽑아서 하자.
저 혼자 책임질 수 없다.
아니면 좀 웃어주던지 그래 해야 되는데 피드백이 전혀 없고, 리액션이 없다.
제가 요새 일주일마다 한 번씩 운문사에 간다.
일학년 이학년 삼학년 사학년 대학원들하고 같이 일주일에 한 번씩 화엄경을 하면 이렇게 푹 삭아있지 않다. 없는 얘기 안 해도, 앉기만 해도 까르륵 웃고, 꽃이 피는 것이 아니라 사람 꽃이 핀다.
공부는 이렇게 골치 아프게 하는 것이 아니다.
어차피 우리는 이래도 화엄경 모르고 저래도 화엄경 모르고, 어제 저녁에 어른스님하고도 말씀 나눴지만 화엄경은 강의하고 이런 것들이 아니고 저는 혼자서 읽는 것이 제일 좋다.
할 수 없이 오늘 총대를 메고 앉아서 몇마디 떠들어야 되니 까 하는 거지 뭘 알겠는가? 아무것도 없다.
그냥 쭈욱 읽으면 그냥 울림이 있다.
그러니까 큰 종을 치려면 큰 채로 두드려야지 꽹과리 치는 것을 가지고 두드려 봤자 소리도 안 난다.
또 꽹과리 치는데 큰 종을 치는 것을 갖다가 쳐도 꽹과리가 박살난다.
큰 북을 칠 때는 큰 채를 들고 작은 북을 칠 때는 작은 것으로 쳐야 된다.
어른 스님 계실 때는 그렇게 엄숙하게 계셔도 괜찮다.
그런데 우리끼리 할 때는 그렇지 않다.
할배하고 제사 모실 때나 엄숙하게 있어야지 동네 친구들하고, 물론 선배스님들이 많이 계시지만, 우리끼리 놀 때는 재밌게 놀아야 된다.
공부하는 것만 해도 이 시간에 억울해 죽겠는데 우리가 지금 그렇게 심각하게 앉아있으면 얼마나 괴롭겠는가?
자 좀 털고 가자.
일곱 번째 할 차례인데, 지금 우리가 하는 대목은 어느 대목인지 아실 것이다. 부처님의 몸은 이러하다. 그러니까 얘기는 다 끝났다.
첫 번째 대목에서 다 끝났는데 이해가 안 되니까 자비롭게 해서 열 꼭지씩 묶어 놓은 것이다.
사. 梵天王의 現身
復次佛子야 譬如三千大千世界大梵天王이 以少方便으로 於大千世界에 普現其身이어든 一切衆生이 皆見梵王이 現在已前호대 而此梵王은 亦不分身하며 無種種身인달하야 佛子야 諸佛如來도 亦復如是하사 無有分別하며 無有 戱論하며 亦不分身하며 無種種身이요 而隨一切衆生心樂하야 示現其身호대 亦不作念現若干身이니라
佛子야 是爲如來身第七相이니 諸菩薩摩訶薩이 應如是見이니라
“또 불자여, 비유하면 저 삼천대천세계의 대범천왕은 조그만 방편으로써 대천세계에 몸을 두루 나타내거든, 모든 중생들은 각각 범천왕이 자기 앞에 있다고 보지마는 이 범천왕은 몸을 나누지도 않고 갖가지 몸도 없느니라.
불자여, 모든 부처님 여래도 또한 그와 같아서 분별도 없고 부질없는 말[戱論]도 없고 몸을 나누지도 않고 갖가지 몸도 없지마는 일체 중생의 좋아함을 따라서 몸을 나타내 보이면서도 또한 여러 몸을 나타낸다는 생각을 하지 않느니라.
불자여, 이것이 여래의 몸의 일곱째 모양이니 보살마하살들은 마땅히 이와 같이 보아야 하느니라.”
*
범천왕(梵天王)의 현신(現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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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차불자(復次佛子)야 : 또 불자여
비여삼천대천세계대범천왕(譬如三千大千世界大梵天王)이 : 비유컨대 삼천대천세계의 대범천왕이 저 삼천대천 세계의 범천왕이
이소방편(以少方便)으로 : 조그만 방편으로써 일불로
어대천세계(於大千世界)에 : 대천세계에
보현기신(普現其身)이어든 : 몸을 쭈욱 나타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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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체중생(一切衆生)이 : 일체 중생이
개견범왕(皆見梵王)이 : 모두 다 보았다, 범왕이
현재기전(現在已前)호대 :현재 자기 앞에 있는 줄로 모두 다 보는데
이차범왕(而此梵王)은 : 그러나 이 범왕께서는
역불분신(亦不分身)하며 : 몸을 한 번도 쪼갠 적이 없다.
무종종신(無種種身)인달하야 : 갖가지 몸도 없다.
우리가 잘 아시다시피 꿈을 꾸었는데 꿈속에서 빨간 것도 노란 것도 다 보았는데 빨주노초파남보 무지개색깔을 다 보았어도 꿈속에서는 사실 한 색깔도 없었다, 이렇게 이해하면 편하다.
꿈속에서 무거운 것도 들어보고 가벼운 것도 들어보고 똥도 밟고 금도 주웠는데 실제적으로 경중도 없고 곱고 추한 것도 없었다.
중생이 보는 것은 분별심으로 봤지만 범왕이 하는 것은 작은 방편으로 중생에게 맞춰서 했을 뿐이다.
예를 들어 여기는 이런 이야기다.
부처님은 무심하게 보응신이다. 부처님은 아무 의미 없이 그러니까 내가 꿈속에서 부처님 보았다, 부처님이 꿈속에서 오죽하면 ‘내가 니 꿈에 안갔다’ 하지 않는가?
밤에 어제 스님 꿈을 꾸었는데 ‘나는 니 꿈에 안갔다’고 그렇게 이야기하듯이, 부처님을 꾸는 것도 자기가 꾼 것이고, 마구니를 부르는 것도, 악마를 부르는 것도 자기가 부르는 것이고, 전부 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누지 않으면서도 두루하는 것, 이런 것을 부처님의 몸에 비유해서 이야기 한 것이다.
요즘 같으면 너무 편하다. KBS 방송국에서 아나운서가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집집마다 텔레비전을 켜는 집마다 다 갔는데, 어떤 집에는 크게 가고 어떤 집에는 작게 가고, 어떤 집에는 이 휴대폰처럼 쪼맨하게 갔다.
왜 그런가? LG텔레비젼 가진 데에는 그것만치 각자 가진 기기에 따라서 크게도 나타나고 작게도 나타난다.
어떤 중생은 또 재수 없어서 흑백 텔레비전을 가지고 있어서 아무리 칼라로 보고 싶어도 자기가 가진 것이 흑백뿐이라서 흑백밖에 볼 수가 없는데 KBS는 송출할 때 흑백이 아니다.
그림자나 메아리는 크고 작아질 수가 있지만 그러나 본래의 것은 없기 때문에 크고 작아질 수가 없는 것이다.
부처님의 몸이라고 하는 것은 일심이라는 데 딱 기대놓고 일심은 무심이고 무상이고 무념이고 한 모양도 없는데 이런 식으로 자꾸 나오는 것 같다.
결론은 무엇인가?
우리 범행품에서 보다시피 불신(佛身)은 본래 없다, 이 기준을 두고 공부를 하는 것이다. 불신은 본래 없다.
*
불자(佛子)야 : 불자여
제불여래(諸佛如來)도 : 제불여래께서도
역부여시(亦復如是)하사 : 또한 이와 같아서
무유분별(無有分別)하며 : 분별심도 없고
무유희론(無有戱論)하며 : 무유희론이다. 그러니까 화엄경 같은 부처님 말씀은 희론이 없다.
굉장히 우리가 진중하게 받아들여야 된다.
그래서 여러 사람이 모여서 이렇게 공부하는 것도 대단히 아름다운 일이지만 사실은 혼자서 간경하고 글을 읽을 때는 더 울림이 있다.
책을 놓고도 곰곰이 앉아보면 더하다.
역불분신(亦不分身)하며 : 또한 몸을 나누지도 않고
무종종신(無種種身)이요 : 갖가지 몸도 없다. 무종종신이다. 정확하게는 한 몸도 없는 것이다.
보리수 아래를 떠나지 않고 어디에 올라가는가? 수미정상으로 올라가시고 도리천으로 올라가신다. 또 보리수 아래를 떠나지 않으시고 도리천 야마천까지 가신다. 보리수 아래를 떠나지 않으시고 도리천 야마천 도솔천까지 가시고 또 보리수 아래를 떠나지 않고 도리천 야마천 도솔천 타화자재천까지 가신다. 보리수 아래를 떠나지 않으시고 보광명전에서 세 번 설법했다고 한다.
그런데 통현장자께서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세 번? 웃기는 소리 하지 마라, 세 번 그런 것 없다. 본래 그 자리에서 통째로 다 설해서 나누자 하니까 7처 9회가 된 것이지’
다 어디인가? 보리수 아래 그 자리가 그 자리다. 7처 9회는 중생의 수준에 따라서 7처 9회가 있을 뿐이지 부처님의 입장에서는 늘 어디에 계신가? 보리수 아래 그 자리에 있다.
이러면 좀 답이 되었는가?
그런 대목도 이렇게 보면 통현장자의 아주 통괘한 해석이다.
그분들이 그런 해석을 안 해 놓았으면 우리는 식겁하다. 눈이 빠지도록 백내장 수술해가면서도 안 보일 것이다.
역대전등 제대조사가 너무 고맙게 해놓았고 여기 <중국화엄사상 연구> 이 책을 쓰신 정엄스님 같은 분들이 열심히 연구해 놓으면 우리가 힘이 덜어진다. 이 책은 조금 내용이 어려울 것이다. 조금 더 깊이 보고 싶은 분들은 스님의 일본책 몇 권을 제가 가지고 있다. 일본어로 보시려는 분들께는 제가 드리겠다. 일본어본이 이것보다 더 잘 되어 있다. 한국번역이 스님이 좀 힘들어서 못하셨다고 제게 말씀하셨다. 스님도 일본어를 더 잘하시는가 보다. 그다음 대목 가겠다.
*
이수일체중생심락(而隨一切衆生心樂)하야 : 일체중생의 좋아함을 따라서.
부처님이 몸이 없는데 왜 몸을 나타내느냐? 수일체중생심락하야 일체 중생의 마음에 좋아하는 바를 따라서, 이런 것을 화엄경에서 전체 줄거리를 요약해 놓은 곳이 어디인가?
제일 뒤에 보현행원품, 그 중에 제 아홉 번째 항순중생(恒順衆生)이다. ‘중생의 좋아함을 따라서’ 이것이 화엄경의 주제가 아닐까 싶다. 중생의 좋아함을 따라서
시현기신(示現其身)호대 : 몸을 나타내 보인다. 시현기신호대
역부작념현약간신(亦不作念現若干身)이니라 : 역(亦) 또한 부작념, 생각을 짓지 않는다. 약간신은 다소간에 몸을 나타내는 것이다. ‘약간신을 나타낸다’ ‘다소간에 몸을 나타낸다’ 또는 위에서처럼 ‘내가 종종신 여러 몸을 나타낸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 부처님은 무신(無身)이고 무념(無念)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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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佛子)야 : 불자야
시위여래신제칠상(是爲如來身第七相)이니 : 이것이 여래의 부처님의 여래신의 제 7상, 일곱 번째 모양이니
제보살마하살(諸菩薩摩訶薩)이 : 보살마하살들은
응여시견(應如是見)이니라 : 응(應) 마땅히 여시견이라. 이와 같이 볼지니라.
그다음 여덟 번째 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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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부처님 고맙습니다.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_()()()_
고맙습니다 _()()()_
🙏🙏🙏
대방광불화엄경 대방광불화엄경 대방광불화엄경... 고맙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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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_()()()_
고맙습니다_()()()_
나무 대방광불화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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