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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원사[元史] 외이열전(外夷列傳)
차 례
1. 고려(高麗)
2. 탐라(耽羅)
○ 원사(元史)[註001] 외이열전(外夷列傳)[註002]
1. ○ 고려(高麗)[註003]
○ 고려(高麗)[註004]는 본래 기자(箕子)[註005]가 봉(封)해졌던 땅이다. 또 부여(扶餘)의 별종(別種)으로 일찍부터 살았던 땅이기도 하다.[註006] 그 땅은 동쪽으로는 신라(新羅)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백제(百濟)에 이르는데,[註007] 모두 큰 바다에 걸쳐 있다. 서북쪽으로는 요수(遼水)[註008]를 지나 영주(營州)[註009]에 인접하고 말갈(靺鞨)[註010]이 그 북쪽에 있다. 그 나라의 도읍지는 평양성(平壤城)[註011]으로 곧 한(漢)의 낙랑군(樂浪郡)[註012]이다. 말갈(靺鞨)의 백산(白山)에서 시원(始源)하는 강을 압록강(鴨淥江)이라 부르는데 평양(平壤)은 그 동남쪽에 위치하여 이를 믿고 의지하면서 요해지(要害地)로 삼았다. 뒤에 땅을 더욱 넓혀 옛 신라(新羅)· 백제(百濟)· 고구려(高句麗)의 세 나라를 통합하여 한 나라로 만들었다.[註013]
○ 그 임금의 성(姓)은 고씨(高氏)로 처음 나라를 세워 당(唐)나라 건봉(乾封) (A.D.666~667; 高句麗 寶藏王 25~26) 초기(初期)에 이르러 나라가 망하였다.[註014] 수공(垂拱)(A.D.685~688; 新羅 神文王 5~8) 이후 자손들이 다시 그 땅에 봉작(封爵)되어 차츰 자립하였다. [註015] 오대(五代)[註016] 때에 이르러 대신 그 나라의 임금이 되어 수도를 송악(松岳)[註017]으로 옮긴 사람의 성(姓)은 왕씨(王氏)이며 이름은 건(建)이다. [왕(王)]건(建)으로부터 도(燾)[註018](忠肅王)에 이르기까지는 모두 27왕(王)인데, 4백여 년이 지나도록 한번도 [왕실(王室)의] 성(姓)이 바뀐 적이 없었다. 원(元)나라 때에 들어와 태조(太祖)[註019] 11년 거란(契丹)[註020]사람 김산(金山)[註021]과 [원(元)]의 원수(元帥)인 육가六哥[註022]등이 9만여명의 무리를 이끌고 그 나라로 도망쳐 들어갔다가 12년 9월에 강동성(江東城)을 공격하여 빼앗고, 그 땅에 웅거하였다.[註023]
○ [태조(太祖)] 13년(A.D.1218;高麗 高宗 6)에 황제가 합지길(哈只吉)[註024]과 차자(箚刺)[註025]등을 파견하여 군사를 이끌고 그들을 치게 하였다. [고려(高麗)]사람 홍대선(洪大宣)[註026]이 진영으로 나아가 항복하고서 합지길(哈只吉) 등과 함께 그들을 포위하여 공격하였다. 고려(高麗)의 왕(王)(명결,名缺)[註027]은 소를 잡고 술을 만들어 왕사(王師)를 나와 맞이하는 한편, 또 추밀원사(樞密院使)· 이부상서(吏部尙書)· 상장군(上將軍_· 한림학사(翰林學士)· 승지(承旨) 조충(趙冲)[註028]을 보내 육가(六哥)를 함께 쳐서 멸망시켰다. 차자(劄刺)가 조충(趙冲)과 형제가 될 것을 약속하였다.[註029] [조(趙)]충(冲)이 해마다 공부(貢賦)를 바치겠다고 청하자 차자(劄刺)는, “너희나라와는 길이 멀어 왕래가 어려우니 매년 사신 열명 정도를 보내어 입공(入貢)함이 옳을 듯하오.” 라고 하였다. 12월에 차자(劄刺)가 공문(公文)을 보내와 병량(兵糧)을 구하자 쌀 천섬을 보냈다.
○ [태조(太祖)] 14년(A.D.1219;高麗 高宗 7) 정월에 그 나라의 권지합문지후(權知閤門祗侯) 윤공취(尹公就)[註030]와 중서주서(中書注書) 최일(崔逸)[註031]을 보내 화친(和親)을 맺고 첩문(牒文)을 차자(劄刺)의 행영(行營)으로 보내오자, 차자(劄刺)가 사신을 보내 이에 회보(回報)하였다. 이때 고려(高麗)의 왕(王)은 그 나라의 시어사(侍御史) 박시윤(朴時允)을 접반사(接伴使)로 삼아 이들을 맞게 하였다.[註032] 황제가 또 포리대야(蒲里帒也)[註033]를 보내 조서(詔書)를 가지고 가서 그들을 효유(曉諭)하자, 고려(高麗)의 왕은 그들을 맞이하여 잔치를 열었다. 9월에 황태제(皇太弟)[註034]· 국왕(國王) 및 원수(元帥) 합신(合臣)· 부원수(副元帥) 차자(劄刺) 등이 각각 문서를 선차대사(宣差大使) 경도홀사(慶都忽思)[註035]등 열명에게 주어 보내 입공(入貢)할 것을 재촉하자, 얼마후 방물(方物)을 진공(進貢)하였다.
○ [태조(太祖)] 15년(A.D.1220;高麗 高宗 8) 9월에 대두령관(大頭領官) 감고고(堪古苦)[註036]와 착고여(着古歟)[註037] 등이 다시 황태제(皇太弟)· 국왕(國王)의 문서로써 재촉하자, 방물(方物)을 거듭 진공(進貢)하였다. [태조(太祖)]16년 7월에 칙지(勅旨)를 내려 여직(女直)을 정벌한 일을 알려주자, 비로소 표(表)를 올려 진하(陳賀)하였다. 8월에 착고여(着古歟)가 그 나라에 사신으로 갔고, 10월에 희속불과(喜速不瓜)[註038] 등이 연이어 사신으로 갔다. [태조(太祖)]17년 10월에 조칙(詔勅)으로 착고여(着古歟) 등 열두명을 고려(高麗)에 파견하여 고려(高麗)가 정성을 기울이는 실상을 살피게 하였다. [태조(太祖)]18년 8월에 산출태(山朮䚟)[註039] 등 열두명을 선차(宣差)하여 다시 황태제(皇太弟)· 국왕(國王)의 문서로 공헌(貢獻)할 것을 재촉하였다. [태조(太祖)]19년 2월에 착고여(着古歟) 등이 다시 그 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12월에 또 사신으로 갔는데 중도에서 암살당했다.[註040] 이로부터 계속 7년 동안 사절의 왕래가 끊겼다
○ 태종(太宗)[註041] 3년(A.D.1231;高麗 高宗 18) 8월에 살례탑(철례탑,撤禮塔)[註042]에게 명하여 그 나라를 정벌케 하였다. 그 나라 사람 홍복원(洪福源)[註043]이 군대를 맞아 항복하였다. 홍복원(洪福源)이 거느렸던 백성 천 5백호(戶)를 얻으니 근방의 주(州)·군(郡)에서도 또한 군대로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살례탑(撤禮塔)이 복원(福源)과 함께 항복하지 않은 주(州)와 군(郡)을 공격하고 한편으로는 아아독(阿兒禿)[註044]과 복원(福源)을 왕경(王京)에 가게 하여 그 나라의 왕 왕철(王㬚)을 부르자, 철(㬚)은 그의 아우 회안공(懷安公) 왕정(王侹)[註045]을 보내 화친(和親)을 청하였다. 이를 허락하고 경(京) · 부(府)·현(縣)에 달로화적(達魯花赤) 72명을 두어 그들을 감시케 하고서[註046] 군사를 이끌고 돌아왔다. 11월에 원수(元帥) 포도(蒲桃)[註047]· 적거(迪巨) · 당고(唐古)[註048]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그 [나라의] 왕경(王京)에 이르자, [왕(王)]철(㬚)은 사신을 보내 소를 [잡고] 술을 만들어 그들을 맞이하였다. 12월 1일에는 또 사신을 행영(行營)으로 보내어 원수(元帥)들을 위로하였다. 다음날 그 나라 사신과 원수(元帥)가 파견한 4십여명의 무리가 왕성(王城)에 들어가 첩문(牒文)을 교부(交付)하였다. 또 다음날 왕(王)[철(㬚)]은 왕정(王侹) 등을 보내 살례탑(撤禮塔)의 주둔지로 찾아가 군사들을 호궤(犒饋)하였다.[註049]
○ [태종(太宗)] 4년(A.D.1232;高麗 高宗 19) 정월에 황제가 사신을 보내 새서(璽書)로 [왕(王)]철(㬚)을 효유(曉諭)하였다. 3월에 철(㬚)은 중랑장(中郞將) 지의원(池義源)[註050]을 보내어 녹사(錄事) 홍거원(洪巨源)· 김겸(金謙) 등으로 그 나라의 재화(財貨)와 첩문(牒文)을 주어 살례탑(撤禮塔)이 주둔하는 곳으로 보냈다. 4월에 철(㬚)은 그 나라의 장군(將軍) 조숙창(趙叔昌)과 어사(御史) 설신(薛愼) 등을 보내 표(表)를 받들고 입조(入朝)케 하였다. 5월에 다시 조서(詔書)를 내려 그들을 효유(曉諭)하였다. 6월에 철(㬚)이 [원(元)]조정에서 둔 달로화적(達魯花赤) 72명을 모두 죽이고 배반하여 마침내 왕경(王京)과 여러 주(州)· 현(縣)의 백성을 인솔해서 해도(海島)로 도망하였다.[註051] 홍복원(洪福源)은 남은 백성을 모아 남겨둔 곳을 보전하여 대병(大兵)을 기다렸다. 8월에 다시 살례탑(撤禮塔)을 파견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그들을 정벌케 하였더니, 왕경(王京)의 남쪽에 이르러 처인성(處仁城)[註052]을 공격하다 날아온 화살에 맞아 [살례탑(撤禮塔)이] 죽자[註053] 별장(別將) 철가(鐵哥)가 군대를 지휘하여 돌아왔다.[註054] 그들 중에 이미 항복한 사람들은 복원(福源)을 시켜 다스리게 하였다. 10월에 철(㬚)이 그 나라의 장군 김보정(金寶鼎)과 낭중(郎中) 조서장(趙瑞章)을 보내 표(表)를 올려 실정을 말하였다.[註055]
○ [태종(太宗)] 5년(A.D.1233;高麗 高宗 20) 4월, 철(㬚)에게 조서(詔書)를 내려 허물을 뉘우치고 조회(朝會)하라고 효유(曉諭)하는 한편, 그의 다섯가지 죄를 열거하기를, “거란(契丹)의 비적을 평정하고 차자(劄刺)를 살해한 뒤로부터 일찍이 한사람의 사신도 대궐에 보내지 않았으니 이것이 첫번째 죄요, 명을 받는 사신이 훈계(訓戒)의 말을 가지고 가서 효유(曉諭)하였는데도 번번히 활을 쏴 돌아가게 하였으니 두번째 죄요, 너희들이 착고여(着古歟)를 모해(謀害)하고서 만노(萬奴)의 백성이 그를 죽였다고 말하니 세번째 죄요, 너희에게 진군(進軍)할 것을 명(命)하고 거듭 여필(汝弼)에게 입조(入朝)할 것을 명하였으나 너희가 감히 항거하여 해도(海島)로 도망하였으니 네번째 죄요, 너희 나라의 호수(戶數)를 현재의 숫자대로 모아서 보고하지 않고 번번히 감히 거짓으로 보고하니 다섯번째 죄이다.” 하였다. 10월에 철(㬚)이 다시 군사를 보내 [원(元)에] 귀부(歸附)한 서경(西京) 등의 항복한 백성을 공격하여 함락하고 홍복원(洪福源)의 집을 빼앗았다.[註056]
○ [태종(太宗)] 6년(A.D.1234;高麗 高宗 21) 에 복원(福源)의 청에 의하여 항복한 백성을 이끌고 동경(東京)으로 옮겨 살게 허락하고, 금부(金符)를 내려 차게 하였다.[註057] [태종(太宗)] 7년에 당고(唐古)와 홍복원(洪福源)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그들을 정벌하게 하였다. [註058] [태종(太宗)] 9년에 그 나라의 용강(龍岡)· 함종(咸從) 등 십여성(城)을 함락시켰다.[註059]
○ [태종(太宗)] 10년(A.D.1238;高麗 高宗 25) 5월에 그 나라 사람 조현습(趙玄習)과 이원우(李元祐)[註060] 등이 2천명을 거느리고 [군사를] 맞아 항복하므로 동경(東京)에 살게 하고 홍복원(洪福源)의 절제(節制)를 받으라 명하였다. 또 어전은부(御前銀符)[註061]를 내려 현습(玄習) 등에게 차게 하고 아직 항복하지 않은 백성들을 불러들이게 하였다. 또 이군식(李君式)[註062] 등 열두명이 항복하여 오므로 그들도 현습(玄習)과 같이 대우하였다. 12월에 철(㬚)이 그 나라의 장군 김보정(金寶鼎)과 어사(御史) 안언기(安彦琦)[註063] 등을 보내 표(表)를 받들고 입조(入朝)케 하였다.
○ [태종(太宗)] 11년(A.D.1239;高麗 高宗 26) 5월에 조서(詔書)로 철(㬚)에게 입조(入朝)하라 불렀으나 철(㬚)은 어머니의 상중(喪事)를 이유로 거절하였다.[註064] 6월에 그 나라의 예빈경(禮賓卿) 노연(盧演)과 예빈소경(禮賓少卿) 김겸(金謙)[註065]을 진봉사(進奉使)와 부사(副使)에 충원(充員)하여 표(表)를 받들고 입조(入朝)케 하였다. 10월에 칙지(勅旨)를 내려 철(㬚)을 효유(曉諭)하여 명년에 친히 입조(入朝)하도록 불렀다. 12월에 철(㬚)이 그 나라의 신안공(新安公) 왕전(王佺)과 김보정(金寶鼎)· 송언기(宋彦琦) 등 백 4십 8명을 보내 봉표(奉表) 입공(入貢)케 하였다.
○ [태종(太宗)] 12년(A.D.1240;高麗 高宗 27) 3월에 또 그 나라의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 조수(趙修)와 합문지후(閤門祗侯) 김성보(金成寶) 등을 보내 봉표(奉表) 입공(入貢)케 하였다. 5월에 다시 조서(詔書)를 내려 효유(曉諭)하였다. 12월에 철(㬚)이 그 나라의 예빈소경(禮賓少卿) 송언기(宋彦琦)와 시어사(侍御史) 권위(權韙)[註066]를 행리사(行李使)에 충원(充員)하여 입공(入貢)케 하였다. 이해에 창주(昌州)· 삭주(朔州)[註067] 등을 공격하여 빼앗았다.
○ [태종(太宗)] 13년(A.D.1241;高麗 高宗 28) 가을에 철(㬚)이 족자(族子) [왕(王)]준(綧)[註068]을 자기의 아들로 삼아 인질로 보내왔다. 정종(定宗)[註069]과 헌종(憲宗)[註070] 시대에는 세공(歲貢)이 들어오지 않은 까닭으로 정종(定宗) 2년으로부터 헌종(憲宗) 8년까지 모두 네번이나 장수에게 명하여, 그 나라를 정벌하여 함락시킨 성이 모두 14성이다. 헌종(憲宗) 말엽에 철(㬚)이 그 세자 전(倎)[註071]을 보내 입조(入朝)케 하였다.
○
세조(世祖)[註072] 중통(中統) 원년(A.D.1260; 高麗 元宗 1) 3월에 철(㬚)이 죽었다. 전(倎)에게 귀국하여 고려왕(高麗國)의 왕이 되도록 명하고 병력으로 호위하여 그를 보내 주었다. 이어 그 나라 안에 사면(赦免)을 내리니 그 칙서(勅書)에,[註073] “우리 태조(太祖) 황제께서 대업을 처음으로 열어 성왕(聖王)과 성왕(聖王)이 서로 계승하였소. 대(代)마다 큰 공훈이 있어 군웅의 할거를 평정하시고 사해(四海)를 차지하셨으나 일찍이 살륙은 즐기지 않았소. 모든 속국의 열국(列侯)들에게 나라를 봉(封)해 주어[註074] 자손에게 왕위를 전하게 한 것이 만리(萬里) 뿐이 아니니, 지난날 경적(勍敵)이 아니었던 이 누구인가? 이를 본다면 조종(祖宗)의 법은 말하지 않아도 매우 분명하리라. 오늘날 온 천하에서 신복(臣服)치 않는 건 오직 그대 나라와 송(宋) 뿐이다. 송(宋)나라가 믿는 것은 장강(長江)이었으나 장강(長江)의 험(險)함을 잃자 의지할 것은 사천(四川)과 양광(兩廣)이었소. 사천(四川)과 양광(兩廣)도 지탱해내지 못하자 변방의 군사들마저 스스로 그 방어를 풀어, 우리의 군사가 이미 그 나라의 심장부에 진주하였으니 [이제 그들은] 솥안에 든 고기요, 장막에 들어온 제비처럼 망하는 것은 조석에 달려 있소. 그대가 당초 세자(世子)의 몸으로 폐백(幣帛)을 받들고 정성을 다하여[註075] 몸을 단속하고 우리에게 귀부(歸附)하여 슬피 목숨을 청함이 참으로 불쌍하고 가련하였소.
이런 연유에서 [그대를] 그대 나라로 돌려보내 옛 땅을 모두 회복하여 그대 나라를 안정시키고 그대의 왕가(王家)를 보전케 하였음은 하늘 같은 큰 덕을 더욱 넓힘이요, 옛날 얽힌 사소한 일들은 버렸기 때문이오. 이런 까닭에 이미 지난번에 변방의 장수를 타일러 조심시키며 군사를 단속하고 명령을 기다리게 하여 동쪽이 안정되면 장차 군사들을 전당(錢塘)으로 돌리려 하였소. 거의 반년쯤 되어서 그대 나라가 내란이 일어 맹약을 어겼음을 알고 변방의 장수들이 다시 계엄(戒嚴)을 펼 것을 요청하니, 이 무슨 까닭이오?
진실로 내란이라면, 어찌하여 권신(權臣)이 스스로 왕이 되지 않고 세손(世孫)을 세웠으며,[註076] 들려오는 소식이 잘못된 것이라면 세자(世子)는 왜 본국으로 가지 않고 국경에서 머뭇거린단 말이오?[註077] 어쩌면 세자(世子)의 귀국이 기한을 어김으로 하여 좌우의 [신하들이] 자기들끼리 시기하고 의심하여 사사로운 걱정과 지나친 생각에서 그러하였는가?
다시 생각하니 도서(島嶼)의 쇠잔한 백성이 도탄에 헤매인지 오래되었소. 군사를 모두 동원하여 욕심대로 친다는 것은 절대 본심일 수 없고, 또 [통치의] 방법을 잃게 되면 천하가 틈을 엿보다가 모두 적이 되지만 진심을 미루어 남에게 믿게 하면 모반하였던 사람들도 저절로 안정되어지는 것이오. 실없는 말을 무엇때문에 염두에 두겠는가. 변방의 장수들에게 [지난번의 명령을] 거듭 명한 것은 단연코 나의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이니, 나쁜 무리가 정권에 참여함이 없게 할 것이며 떠다니는 말로 맹약을 어지럽힘이 없게 하오. 오직 성의를 기울이는 데 힘써서 일체를 따지지 말고, 마땅히 넓은 은전을 베풀어 원근(遠近)의 덕화를 새롭게 해야 할 것이오. 상서(尙書) 김인준(金仁雋)[註078] 으로부터 차례로 안팎의 파당(派黨)· 관리(官吏)· 군민(軍民)으로서 성지(聖旨)가 도착하는 날 이전에 혹 내란을 주동하였거나, 왕사(王師)를 집단으로 대항하였거나, 항복하고서 다시 반란하였거나, 원수를 갚으려고 제멋대로 사람을 죽였거나, 돌아갈 곳이 없어 군주를 등지고 도망하였거나, 부득이하여 여럿을 따르며 협조하였거나 간에 백성으로서 단지 지나간 범법에 의거하여 죄의 경중을 막론하고 모두 사면하여 형을 제거하도록 하오.
세자(世子)는 빨리 행장을 꾸려 수레를 몰아 귀국하여 정치를 맡게 되거든, 원한과 유감을 풀어 버리고 덕을 펴고 은혜를 베풀도록 하오. 멀리서 생각컨대 지금이 상처입은 백성들을 어루만지고 편안히 하여 줄 알맞은 때이니, 저 바닷물 출렁이는 섬에서 나와 평안한 땅에 살게 해야 할 것이오. 칼을 팔아 송아지를 사들이게 하고, 방패나 창을 버리고 쟁기를 잡게 하여, 그들을 원조하는 일에 수고로움을 꺼리지 말아야 할 것이오. 진실로 경제가 나아지고 국민이 불어날 징조가 있으며, 예의가 회복될 수 있기를 바라오. 되도록 국가를 빨리 바르게 하여 백성의 마음을 안정시키면 나의 군사가 다시는 국경을 넘지 않을 것이오. 나의 명령이 한번 떨어지면 짐(朕)은 식언(食言)하지 않소. 다시 감히 난리를 계속하며 범상(犯上)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는 너희 임금을 거스름이 아니라 곧 나의 법을 어지럽힘이라. 나라에 정당한 법이 있으니 누구라도 그를 벌할 것이오. 아! 세자(世子)는 가시오. 가거든 공경하여 공손한 마음으로 큰 가르침을 받들어 길이 동쪽의 번신(藩臣)이 되어 나의 아름다운 명(命)을 잘 드날리게 하오.” 하였다.
○ [중통 원년(中統 元年)(1260)]4월에 다시 조서(詔書)를 내려 전(倎:원종,元宗)에게 효유(曉諭)하기를,[註079] “짐(朕)이 공경히 하늘의 명에 순종하여 조종(祖宗)의 아름다운 공덕(功德)을 이어 받고서 우러러 생각컨대, 천지(天地)의 덕(德)은 모두 똑같이 인(仁)을 베풀어 멀고 가깝거나 크고 작은 차이가 없소. 그대가 정성을 바친 연유로 왕에 책봉되어 환국하고나서 근래에 그대와 변방 장수의 서신을 받고서야 그대 나라 임금과 신하 사이의 사정을 알고 朕은 매우 민망하게 여기오.” 라고 하였다. 전(倎)이 섬에서 뭍으로 나올 것과, 군마(軍馬)들의 수탈 침해를 면하게 하여 줄 것과, 포로와 도망간 백성
들을 돌려줄 것을 요구하자 모두 들어 주었다. 반사(班師)하도록 명(命)하고 그 나라에 사면령(赦免令)을 내렸다. 6월에 전(倎)이 그 아들 영안공(永安公) 희(僖)[註080]와 판사재사(判司宰事) 한즉(韓卽)[註081]을 보내어 황제의 즉위를 하례하였다. 국왕에 봉한 책명(册命)[註082]과 왕인(王印) 및 호부(虎符)를 하사하였다.[註083] 그 달에 또 조칙(詔勅)을 내려 위로하고 효유(曉諭)하였다.
○ [중통(中統)] 2년(A.D.1261; 高麗 元宗 2) 3월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4월에 전(倎)이 입조(入朝)하였다.[註084] 6월에 전(倎)이 식(禃)이라고 이름을 고치고[註085] 그의 세자 심(愖)[註086]을 보내 표(表)를 받들어 보고하였다. 8월에 식(禃)에게 옥대(玉帶) 하나를 하사하고 시위장군(侍衛將軍) 패리찰(살리찰,孛里察)[註087]과 예부랑중(禮部郎中) 고일민(高逸民)[註088]을 보내 심(愖)을 호위하여 환국하게 하였다. 9월에 식(禃)이 시어사(侍御史) 장일(張鎰)[註089]을 보내 표(表)를 받들고 들어와 사례하였다. 10월에 황제가 아적미실(阿的迷失)과 초천익(焦天翼)을 보내 조서(詔書)를 가지고 [註090] 각장(榷場)을 개장(開場)하는 일로 효유(曉諭)하였다.
○ [중통(中統)] 3년(A.D.1262; 高麗 元宗 3) 정월에 교역시장(交易市場)을 폐지하였다. 제왕(諸王) 탑찰아(塔察兒)가 철강(鐵鋼)을 다루는 기관을 두자고 청하자,[註091] 그 말에 따랐다. 시장도 열 것을 청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식(禃)에게 책력(册曆)을 하사하였다.[註092] 그 뒤로부터는 연례적으로 하였다. 식(禃)이 사신을 들여보내 사례하자 후한 말로 조서(詔書)를 내려 답하였다. 4월에 식(禃)이 그 나라의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 박륜(朴倫)[註093]과 낭장(郎將) 신홍성(辛洪成) 등을 보내 표(表)를 받들고 들어와 조회(朝會)하였다.[註094] 6월에 사신을 보내 조공(朝貢)하였다. 8월에 박륜(朴倫) 등이 환국하였다. 서금(西錦) 3단(段)[註095]과 간금숙릉(間金熟綾) 6단(段)[註096]을 하사하였다. 10월에 조서(詔書)로 식(禃)에게, “백성들의 호적을 엮어 만들어 군사로 출동시키고 양식을 수송하여 군량의 비축을 돕게 하시오.” 라고 하였다.[註097] 그 달에 식(禃)이 사신을 보내 조공(朝貢)하였다.
○ [중통(中統)] 4년(A.D.1263; 高麗 元宗 4) 2월에 식(禃)이 조서(詔書)에 답장하지 않았음을 들어 그 사신들을 힐책하였다.[註098] 식(禃)이 표(表)를 올려 백성들이 조금 안정되기를 기다린 뒤에 명령을 따르겠다고 요청하였다. 황제는 그 표(表)의 내용이 간절하고 진실되므로 이를 허락하였다. 조공하는 물품의 수량도 역시 그들의 능력에 맞게 하라고 명(命)하였다. 3월부터 6월까지 식(禃)이 모두 세번 사신을 보내 조공하자[註099] 식(禃)에게 양(羊) 5백마리를 하사하였다.[註100] 11월에 식(禃)이 역(驛)을 설치하고 백성들의 호적을 만드는 일 등을 면하여 준데 대해 그 나라의 한림학사(翰林學士) 한취(韓就)를 보내 표(表)를 올려 사례하였다.[註101]
○ [중통(中統)] 5년(A.D.1264; 高麗 元宗 5) 정월 초하루 정축(丁丑)에 식(禃)이 사신을 보내 표(表)를 받들어 하례를 올렸다. 돌아가는 사신에게 효유(曉諭)하여 식(禃)이 경사(京師)에 친히 입조(入朝)하도록 하라고 하였다.[註102] 4월에 서북방의 여러 왕들이 많은 백성을 이끌고 충심으로 귀순하여 온 까닭에 그 해에 왕공(王公)과 여러 제후들을 경사에 조회하게 할 작정으로 다시 필도적(必闍赤) 고을독(古乙獨)[註103]을 보내 식(禃)을 입조하도록 불러 부왕(父王)의 자리를 이은 제후가 천자(天子)에게 조현(朝見)하는 예를 닦게 하였다.
5월에 식(禃)이 그 나라의 차국자(借國子) 제주(祭酒)[註104] 장일(張鎰)을 보내 고을독(古乙獨)을 따라 천자(天子)를 뵙게 하고, 6월에 [식(禃)이] 친히 조회(朝會)하였다.[註105] 9월에 황제가 중통(中統) 5년을 지원(至元) 원년(A.D.1264; 高麗 元宗 5)으로 고치고 낭중(郎中) 노득성(路得成)을 보내 사면령(赦免令)을 가지고[註106] 식(禃)의 낭장(郎將) 강윤소(康允紹)에게 주어 그 나라에 반포케 하였다.[註107] 10월에 식(禃)이 입조(入朝)하였다. 12월에 식(禃)을 보내어 환국하게 하였다. 이해 봄에 식(禃)의 사신을 보내 입공(入貢)하면서부터 세조(世祖)가 죽을때까지 31년 동안 그 나라에서 입공(入貢)한 것이 모두 서른 여섯차례였다.
○ 지원(至元) 3년(A.D.1266; 高麗 元宗 7) 2월에 번주(藩州)[註108]를 설치하여 고려(高麗)에서 항복하여 온 백성들을 살게 하였다. 황제는 일본(日本)과 우호를 통하고자 하였는데, 고려(高麗)가 일본(日本)과 이웃나라이니 길을 인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 8월에 국신사(國信使)[註109]로 병부시랑(兵部侍郞) 흑적(黑的)[註110]과 예부시랑(禮部侍郞) 은홍(殷弘)[註111] 및 계의관(計議官) 백덕효선(伯德孝先)[註112]등을 일본(日本) 사신으로 보내면서, 먼저 고려(高麗)에 이르러 그 뜻을 효유(曉諭)하였다. 12월에 식(禃)이 그 나라의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송군비(宋君斐)[註113]와 차예부시랑(借禮部侍郞) 김찬(金贊)[註114] 등을 보내 황제의 사신인 흑적(黑的)과 은홍(殷弘) 등을 인도하여 일본(日本)에 가게 하였으나 일본(日本)까지 도착하지 못하고 돌아왔다.[註115]
○ [지원(至元)] 4년(A.D.1267; 高麗 元宗 8) 정월에 식(禃)이 송군비(宋君斐) 등을 보내 표(表)를 받들고 흑적(黑的) 등을 따라 입조(入朝)케 하였다. 6월에 황제께서 식(禃)이 사실을 속이고 거짓말을 꾸며서 사신이 빈손으로 돌아왔다 하여, 다시 흑적(黑的)과 송군비(宋君斐) 등을 보내 조서(詔書)로 식(禃)을 효유(曉諭)하여 일본(日本)의 일을 맡기면서 반드시 그 요령을 터득할 것을 기약하라 하였다.[註116] 9월에 식(禃)이 그 나라의 기거사인(起居舍人) 반부(潘阜)[註117]와 서장관(書狀官) 이정(李挺)[註118]을 국신사(國信使)의 일행에 충원하여 문서를 가지고 일본(日本)에 가게 하였다.
○ [지원(至元)] 5년(A.D.1268; 高麗 元宗 9) 정월에 식(禃)이 그의 아우 창(淐)[註119]을 보내 입조(入朝)하였다. 황제는 식(禃)이 창(淐)에게 속임을 당한 일을 가지고 그 일들을 낱낱이 들어가며 꾸짖었다. 특별히 북경로총관(北京路總管)[註120] 겸 대정부윤(大定府尹)[註121]인 우야손탈(于也孫脫)과 예부시랑(禮部郎中) 맹갑(孟甲)을 보내 조서(詔書)를 가지고 식(禃)을 효유(曉諭)하니,[註122]
그 대략은, “지난달 군사를 거두어 달라고 청하기에 군사를 이미 철수시켰는데, 3년이면 섬을 버리고 뭍으로 나올 것이란 지난날의 말은 실천되질 않았소. 또 태조(太祖)의 법제(法制)에 모든 소속된 국가들은 볼모를 바치고, 군사를 돕고, 양식을 수송하고, 역(驛)을 설치하고, 호적을 만들고, 장관(長官)을 두어야 된다고 이미 일찍이 분명하게 효유(曉諭)하였는데도 지금까지 지연시키면서 끝내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소. 태종(太宗)의 시대(時代)에는 왕준(王綧) 등이 볼모로 들어왔고, 역(驛)도 대강은 세워졌으나 그 나머지는 받들어 행하지 않고 있소. 이제 앞으로 송(宋)나라에 죄를 물으려 하니 [우리를] 도울 그대 나라의 사졸과 주함(舟艦)은 얼마나 되오? 수송할 군량은 비축이 되어가며 관부를 설치하는 것과 호적의 일에 대한 그대의 뜻은 어떠하오? 이런 연유를 그대에게 묻는 것이오.”하였다. 3월에 우야손탈(于也孫脫) 등이 그 나라에 도착하였다.
○ [지원(至元) 5년(1268)]4월에 식(禃)이 그 나라의 문하시랑(門下侍郞) 이장용(李藏用)[註123]을 보내 표(表)를 받들고 야손탈(也孫脫)[註124]등과 함께 입조(入朝)하였다. 5월에 황제께서 장용(藏用)에게 조칙(詔勅)하기를, “너희 임금에게 가서 말하여라. 군사의 실제 숫자를 속히 아뢰면 앞으로 사람을 보내어 감독하겠다. 이번 출동하는 군사에 대해 너희들은 반드시 앞으로 어느 땅으로 출동할 것인지 의심할 것이다. 혹은 남송(南宋)에, 혹은 일본(日本)에 쓰고자 하니 너희 임금은 마땅히 배 천척을 만들되, 큰 바다에 4천석을 싣고 건널 수 있게 하라.” 하였다. 장용(藏用)이 아뢰기를, “배에 관한 것은 곧 명령에 응함이 마땅하지만, 단지 백성들이 잔약하고 수효도 적어 기일에 미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전에 신의 나라에 군사 4만이 있었으나 30여년 사이에 전쟁과 질병에 죽어 지금은 단지 패자두(牌子頭)[註125] 5십호(戶), 백호(戶), 천호(戶) 하는 따위의 허명(虛名)만 있을 뿐 군졸은 없습니다.” 하자, 황제는, “죽은 사람이 있으면 태어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였다. 장용(藏用)이, “황제의 어지신 덕에 힘입어 군사가 철수된 뒤로 태어나 자란 자가 겨우 열살입니다.” 하자, 황제는 다시, “너희 [나라에서] 온 사람이 말하길, 바다에 관한 일에 있어서는 송나라에는 좋은 바람을 만나면 3일 만에 이를 수 있고 일본에는 아침에 출발하면 저녁에 닿는다고 하였다. 배에 쌀을 싣고 바다에서 고기를 잡아먹으면 어찌 가지 못하겠느냐?”하고, 또 장용(藏用)에게 조서하여 명하기를, “돌아가거든 이 말을 너희 임금에게 말하여라.” 하였다.
○ [지원(至元) 5년(1268)]7월에 도통령(都統領) 탈타아(脫朶兒)[註126]· 무덕장군(武德將軍) 통령(統領) 왕국창(王國昌)[註127]· 무략장군(武略將軍) 부통령(副統領) 유걸(劉傑)[註128] 등에게 명하여 그 나라에 사신으로 가게 하면서 그 나라에서 조회(朝會)하러 온 [註129] 대장군(大將軍) 최동수(崔東秀)와 함께 가게 하였다. 8월에 그 나라에 이르니 식(禃)이 승천부(昇天府)에 나와 영접하였다.[註130] 대체로 군사(軍士)를 점고하고 배를 만드는 일에 대해 효유(曉諭)한 것이다. 9월에 식(禃)이 반부(潘阜) 등이 사신으로 갔다가 공없이 돌아온 것을 표주(表奏)하자, 다시 흑적(黑的) 등을 일본(日本) 사신으로 보내면서 식(禃)에게 중신(重臣)을 보내 이들을 인도하여 호송하라고 명하였다. 12월에 식(禃)이 그 나라의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 신사전(申思佺)[註131]· 예부시랑(禮部侍郞) 진정(陳井)[註132]·기거사인(起居舍人) 반부(潘阜) 등을 보내 국신사(國信使) 흑적(黑的) 등을 따라 일본(日本)에 가게 하고, 차예부시랑(借禮部侍郞) 장일(張鎰)[註133]에게 표문(表文)을 받들고 탈타아(脫朶兒)를 따라 입조(入朝)케 하였다.
○ [지원(至元)] 6년(A.D.1269; 高麗 元宗 10) 정월에 식(禃)이 그 나라의 대장군(大將軍) 강윤소(康允紹)[註134]를 보내 표문(表文)을 받들어 권신(權臣) 김준(金俊) 등을 베었다고 아뢰었다. 3월에 식(禃)이 다시 신사전(申思佺)을 파견하여 흑적(黑的)을 따라 표문(表文)을 받들고 입조(入朝)케 하였다. 6월에 식(禃)이 그 세자(世子) 심(愖)을 들여보내 조회(朝會)하였다. 식(禃)에게 옥대(玉帶) 일좌(一座)와 심(愖)에게 금(金) 5십냥을 하사하고 수행한 관리에게도 은폐(銀幣)를 차등있게 주었다. 7월에 황제는 명위장군(明威將軍) 도통령(都統領) 탈타아(脫朶兒)· 무덕장군(武德將軍) 통령(統領) 왕국창(王國昌)· 무략장군(武略將軍) 부통령(副統領) 유걸(劉傑)을 보내 탐라(耽羅) 등 여러 곳의 도로를 살피게 하면서, 식(禃)에게 관원을 선발하여 인도해 도착하도록 명하였다. 그것은 어떤 사람이 탐라의 바닷길이 남송(南宋)과 일본(日本)에 가기가 매우 쉽다고 말한 까닭에서였다. 8월에 세자 심(愖)이 조정에 이르러 본국의 신하들이 제멋대로 식(禃)을 폐하고 그의 아우인 안경공(安慶公) 창(淐)을 세운 일을 아뢰었다.[註135] 사신 알타사불화(斡朶思不花)[註136]와 이악(李諤)[註137] 등을 파견하여 그 나라에 가서 자세히 조사하도록 명하였다.
○ [지원(至元) 6년(1269)]9월에 그 나라의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김방경(金方慶)[註138]이 표(表)를 받들고 알타사불화(斡朶思不花) 등을 따라 입조(入朝)하였다. 추밀원(樞密院)과 어사대(御史臺)에서 아뢰기를, “세자 심(愖)[註139]의 말로는 ‘조정에서 만일 출정하면 군사 3천명을 능히 준비하고 5개월의 군량을 갖출 수 있으며, 관군이 국경에 들어간다면 신이 당연히 함께 가게 될 것이니 놀라서 동요하는 일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하였습니다.”하자, 황제도 그렇게 생각하여 세자하게 식(禃)을 특진(特進) 상주국(上柱國)[註140]에 제수하는 조명을 내리고, 심(愖)에게 군사 3천을 거느리고 그 나라의 반란에 달려가도록 칙명하였다. [한편] 초불화(抄不花)에게 명하여 그 나라에 가서 정벌하게 하였으나, 병으로 가지 못하자 몽가도(蒙哥都)[註141]를 대신 보내도록 명하였다.
○ [지원(至元) 6년(1269)]10월에 황제는 식(禃)을 폐하고 창(淐)을 세운 것이 임연(林衍)[註142]의 소행이라 하여 중헌대부(中憲大夫) 병부시랑(兵部侍郞)[註143] 흑적(黑的)과 치래로(淄萊路)[註144]의 총관부 판관(總管府 判官) 서세웅(徐世雄)[註145]을 보내, 식(禃)·창(淐)· 연(衍) 등이 12월에 함께 대궐에 나아와 면대하여 정실을 진술하여 그 시비를 판결받도록 명하였다. 또 국왕(國王) 두련가(頭輦哥)[註146] 등을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국경에 주둔했다가, 만일 기일이 지나도 오지 않거든 곧바로 주모자를 끝까지 가리고 군대를 전진시켜 모두 도륙하게 하였다. 조벽(趙璧)을 동경(東京)[註147]의 행중서성(行中書省)에 명하고[註148] 이어 조서로 고려(高麗)의 군과 백성을 효유(曉諭)하였다. 11월에 고려(高麗)의 도통령(都統領) 최탄(崔坦) 등이 임연(林衍)이 난리를 일으킨데 기인하여[註149] 서경(西京)의 5십여성을 이끌고 귀부하였다. 단사관(斷事官) 별동와(別同瓦)[註150]를 파견, 역마를 달려 왕준(王綧)과 홍다구(洪茶丘)가 관장하는 지방의 백성들 중 [군인으로] 이름 지어진 사람을 모두 징발하여 동경(東京)의 추밀원(樞密院)에 소속하게 하니[註151] 3천 3백명이었다. 고려(高麗)의 서경도통(西京道統) 이연령(李延齡)이 군사를 더 달라고 요청하자,[註152] 망가도(忙哥都)를 보내 군사 2천을 거느리고 가게 하였다.
○ 추밀원(樞密院)의 신하들이 고려(高麗)의 정벌에 대한 일을 의논하였다. 지난날 마형(馬亨)[註153]이 말하기를, “고려(高麗)는 본래 기자(箕子)가 봉해졌던 땅으로 한(漢)나라 진(晋)나라에서 모두 군(郡)이나 현(縣)으로 삼았었다. 이제 [그들이] 비록 들어와 조회하지만 그들의 마음은 헤아리기가 어렵다. 군사를 잘 무장하여 길을 빌리되 일본(日本)에 쳐들어 간다고 명분을 내세우고는 기회를 틈타 그 나라를 습격하여 군(郡)· 현(縣)으로 정하여야 합니다.” 하였다. 형(亨)이 다시 말하기를, “오늘날 이미 흔단(釁端)이 있으니 군사를 보내 그들을 치기에는 마땅치 않습니다. 만에 하나 이기지 못하면, 위로는 나라의 위세가 깍이고 아래로는 군사들만 잃게 됩니다. 저들이 간혹 표(表)를 올려 [그들의] 진정을 말하고 있으니 그들의 잘못을 사면하여 주시고, 그들의 공헌(貢獻)을 감하여 그 나라의 백성을 편안하게 어루만져 주신다면 거의 어지신 덕화에 감격하여 흠모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남송(南宋)을 평정하고 나서 저들에게 다른 뜻이 있을 때[註154] 군사를 돌려 그들을 베어도 또한 늦지 않을 것입니다.”하였다.
전(前) 추밀원(樞密院) 경력(經歷) 마희기(馬希驥)[註155]도 역시 말하기를, “오늘날의 고려(高麗)는 곧 옛 신라(新羅)· 백제(百濟)· 고구려(高句麗) 세나라를 병합하여 통일된 나라입니다. 대체로 번진(藩鎭)이란 권력이 양분되면 제압하기 쉽고 제후(諸侯)란 강성하면 신하로 두기 어렵습니다. 저들 주(州)와 성(城)의 군사와 백성의 많고 적음을 조사하여 이간시켜서 양분되게 하고, 그 나라를 나누어 다스리게 하되 권력과 세력이 엇비슷하게 하여 자기네들끼리 서로 견제하게 하고, 서서히 좋은 꾀를 의논하면 쉽게 처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하였다. 흑적(黑的) 등이 그 나라에 이르자 식(禃)이 조서를 받고 복위(復位)하여 차예부시랑(借禮部侍郞) 박휴(朴烋)를 보내 흑적(黑的) 등을 따라 표(表)를 받들고 입조(入朝)하였다.[註156] 12월에 [식(禃)이] 친히 경사(京師)에 와서 조회(朝會)하였다.[註157]
○ [지원(至元)] 7년(A.D.1270; 高麗 元宗 11) 정월에 사신을 보내어, “얼마전에 조서(詔書)를 받들어 신이 이미 복위(復位)하였습니다. 종자(從者) 7백명을 데리고 알현할까 합니다.” 하자, 조서(詔書)로 종자 4백명은 들어오고 나머지는 서경(西京)에 머무르게 하였다. 조서(詔書)로 서경(西京)에 예속한 지방을 동녕부(東寧府)[註158]라 고쳐 자비령(慈悲嶺)을 경계긋고, 망가도(忙哥都)를 안무사(安撫使)로 삼아[註159] 호부(虎符)를 차고 군사를 거느려서 그 나라의 서쪽 국경을 지키게 하였다. 조서(詔書)로 그 나라의 벼슬아치와 군인 백성들에게 임연(林衍)을 토죄(討罪)하려는 연유를 들어 의유(議諭)하니 그 대략은, “짐(朕)이 즉위한 이래로 그대 나라가 오랫동안 전쟁에 시달려옴을 민망히 생각하여, 그대 나라의 군주를 책정(册定)하여 주고 지키고 있던 군대도 철수시켰다. 십년 사이 그대들을 편히 해주고 어루만져 줄 수 있는 것들은 [어느 것 하나 힘을] 다하지 아니한 것이 없었다. 뜻밖에 역신(逆臣) 임연(林衍)이 못된 꾀를 내어 제멋대로 국왕 식(禃)을 폐하여 바꾸고 안경공(安慶公) 창(淐)
을 왕으로 옹립하므로, 조서(詔書)로 대궐에 나오라고 명령하였으나 다시 세월만 끌고 나오지 아니하고 있으니 어찌 그대로 방치한 채 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미 행성(行省)에 [사람을]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동쪽으로 내려가게 하였으나, 이는 임연(林衍) 한사람을 치죄(治罪)하려 한 것이다. 안경공(安慶公) 창(淐)은 본래 마지못하여 한 것이었으니 관대히 용서하여 줄 것이요, 그 나머지 협박에 의하여 협조하였거나 속임수에 의하여 따른 사람들에게는 한사람도 [그 죄를] 묻지 않겠다.” 하였다.
○ [지원(至元) 7년(1270)]2월에 군대를 파견하여 식(禃)을 호송하여 나라에 돌아가게 하고, 조서(詔書)로 고려(高麗)의 관리(官吏)와 군민(軍民)들을 효유(曉諭)하여, “짐(朕)이 생각컨대 신하로 임금을 받드는 데에는 죽어도 두 [마음이] 있어서는 안 된다. 뜻밖에 그대 나라의 권신(權臣)이 나라의 군주를 감히 제멋대로 폐하고, 장차 저들은 이미 많은 군사를 몰아 앞으로 그대의 백성을 위험과 소요의 불안에 이르게 하려고 한다. 그대 백성들의 일을 생각하여 특별히 군사를 파견해서 국왕 식(禃)을 호송, 환국케하여 옛 도읍에 살게 하고, 달로화적(達魯花赤)에게 명하여 함께 가서 진무(鎭撫)하여 그대 나라를 안정시키게 하였다. 생각컨대 동방에 사는 그대 백성들은 자신들을 위해서 그러한 줄 모르고 반드시 의구심을 낼 것이나, 그대 백성은 모두가 두려워함이 없이 옛날처럼 편안히 지내는 것이 마땅하다. 이미 별도로 장수에게 조칙(詔勅)하여 군사를 엄히 단속시켜 [백성을] 침범함이 없게 하였다. 너희가 혹 함부로 움직이면 너희 처자와 너희 몸은 당연히 사로잡히고 재물은 빼앗길 것이니 마땅히 잘 생각하여라.” 하였다.
과거에 칙지(勅旨)로 두련가(頭輦哥) 행성(行省)은 서경(西京)에 주둔하고 망가도(忙哥都)와 조양필(趙良弼)은 안무사(安撫使)에 충원(充員)하여[註160] 식(禃)과 함께 그 나라의 수도로 들어가게 하였다. 얼마후 다시 [두련가(頭輦哥)] 행성(行省)은 그 나라의 수도로 들어가라고 명하고 탈타아(脫朶兒)를 그 나라의
달로화적(達魯花赤)에 충원(充員)하고 안무사(安撫司)를 폐지하였다.
○ [지원(至元) 7년(1270)] 4월에 동경(東京)의 행상서성(行尙書省)[註161] 군대를 서경(西京)에 접근시키고서, 철철도(徹徹都) 등을 보내 식(禃)의 신하 정자여(鄭子璵)[註162] 등과 함께 성(省)의 차자(劄子)를 가지고 고려국(高麗國)의 영공연(令公衍)을 불렀다.[註163] 사신이 돌아와서, “임연(林衍)은 이미 죽고 그의 아들 유무(惟茂)가 영공(令公)의 자리를 이어받았으나[註164] 그 나라의 시랑(侍郞) 홍문계(洪文系)와 상서(尙書) 송종례(宋宗禮)가 유무(惟茂)와 연(衍)의 사위인 최종소(崔宗紹)를 죽이자, 유무(惟茂)의 아우 유인(惟栶)은 자살하였고 연(衍)의 도당인 배중손(裵仲孫) 등은 다시 남은 무리들을 모아, 식(禃)의 서족인 승화후(承化侯)를 추대하여 왕으로 삼고 진도(珍島)로 도망하여 들어갔습니다.”[註165] 하였다.
대군을 왕경(王京)의 서쪽 성문에 주둔시키고, 사람을 보내 임연(林衍)의 처와 아들들을 체포하였다. 행성(行省)은 식(禃)에게 강화도(江華島)에 살고 있는 백성들을 왕경(王京)으로 옮기고 이서 조서(詔書)를 내려 그들을 무수(撫綏)하자는 의견을 말하였으나, 식(禃)이 따르지 않다가 옛 서울에 들어와 살게 되자 비로소 행성(行省)의 의견을 따랐다.
○ [至元 7년(1270)]6월에 식(禃)이 사람을 보내 소식을 전하여, “조정에서 도망친 군대와 승화후(承化侯)가 삼별초(三別抄)의 군대로 반란을 일으켰다.”[註166] 하였다. 세자 심(愖)이 다시 말하기를, “반란을 일으킨 군대가 강화도(江華島)를 차지하고 있으니, 군대를 이끌고 바다와 육지로 진격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하였다. 식(禃)이 다시 소식을 전하여, “반란군이 모두 숨어버렸다.” 하였다. 세자 심(愖)이 말하기를, “반란군이 창고를 노략질하고 호적을 불사르고서, 섬 속으로 도망하여 들어간 것입니다.”하였다. 행성(行省)이 사람을 시켜 강화도(江華島)를 염탐케 하였더니 백성들이 텅텅비었고, 섬의 동남쪽 약 4십여리 정도 거리에 반란군이 배를 타고 바람을 기다리고 있어 달아나고자 하는 것 같았다. 이에 바로 내안(乃顔)[註167]에게 명령하여 군사를 이끌고 그들을 추격케 하였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