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의 말 그리운 사람, 사랑하는 사람 천 번 만 번 부르면 그 사람 온다고 한다. 주술의 힘이다. 소리의 힘이다. 시도 마찬가지다. 시는 영혼을 부르는 소리다. 천지신명과 교통하면서, 새로운 질서를 깨치는 소리다. ‘옴~’이라고 단전에 힘을 모아 입을 오므렸다 닫으면서 ‘옴~, 옴~’ 하면 오장육부 가열차지 이 ‘옴~’을 우주의 소리라고 한다. 이 ‘옴~’을 길게 소리 내면 오장육부 튼튼해지고 오욕칠정 말끔히 가신다고 한다. 눈을 감고 두 손 모아 ‘가즈아~’를 외치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면 그렇게 간절할 수가 없다. 이 세상 막다른 골목에 몰려서 마지막 동아줄을 잡으려는 사람들의 끝없는 기도인 것이다. 세상살이 갈수록 힘들다. 물질적으로는 넘쳐나는데 정신적으로는 빈곤하기만 하다. 무한경쟁 시대다. 일상에 베이고 찔려서 피 흘리는 사람 많다. 그늘에 가리고 묻혀서 얼굴 없는 사람들 많다. 아픔도 슬픔도 나에게서 비롯된다. 위만 바라지 말고 눈 한번 아래로 내리면 이 세상 잔잔해진다. 앞만 보지 말고 옆으로 고개를 돌리면 새 길이 보인다. 아픔도 껴안으면 새로운 아픔이 된다. 슬픔도 친구하면 새로운 슬픔이 된다. 슬픔아, 놀자. 2018 여름 남악리에서 ♧ 슬픔아 놀자 슬픔아 놀자. 불 꺼진 외딴 방에서 슬픔아 손잡고 놀자. 슬픔아 놀자. 별도 달도 들지 않은 연옥에서 슬픔아 얼싸 안고 놀자. 슬픔아 놀자. 이토록 눈물 주고 가슴 쓰리게 하는 슬픔아 동무하며 놀자. 슬픔아 놀자. 파랗게 점멸하는 묵시의 침실에서 슬픔아 신랑각시 되어 놀자. ♧ 예쁜 빛 예쁜 빛이 나를 부를 때가 있다. 길을 가다 보면 저만치 앞서가면서 몸통을 흔들어댄다. 바다에 나가면 조간대 너머 너울을 타면서 손짓한다. 벼랑에 서면 겨드랑이 날개 달아주기도 하고 무지개다리 새로 놓아주기도 한다. 예쁜 빛이 나를 시험할 때가 있다. 아직은 아니라고 예쁘지 않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 그 빛, 한숨처럼 휘돌아간다. ♧ 슬픈 리셋 하늘이 어둡고 답답할 때는 머리를 도리도리 흔들면서 리셋하자. 이 가슴 쓰리고 아플 때는 머리를 도리도리 흔들면서 리셋하자. 저 달이 둥글게 둥글게 차오르도록 리셋하자. 우리 작고 쓸쓸하게 느껴질 때는 머리를 도리도리 흔들면서 리셋하자. 이 세상 새로이 새롭게 피어나도록 리셋하자. 아무래도 나는 나라고 내가 있어서 오늘도 내일도 있는 거라고 머리를 도리도리 흔들면서 아임I'm이라고 리셋하자. ♧ 세상의 아픈 것들이 나만 홀로 아픈 줄 알았는데 나만 기침하는 줄 알았는데 세상의 살아있는 것은 모두 다 아프다고 한다. 나만 홀로 애타는 줄 알았는데 나만 절룩이는 줄 알았는데 세상의 살아가는 것은 모두 다 힘들다고 한다. 세상의 아픈 것들이 눈물도 상처도 약이라고 한다. 세상에 멍든 것들이 추위도 굶주림도 힘이라고 한다. 나만 피 흘리는 줄 알았는데 나만 어둡고 서러운 줄 알았는데 세상의 꿈틀거리는 것들은 모두 다 그러면서 산다고 한다. ♧ 내가 그런다 나무가 우는 것은 내가 아파서 그런다. 내가 쓰리고 뒤틀려서 그런다. 하늘이 어두운 것은 내가 내려앉아서 그런다. 내가 눈 감고 귀 감아서 그런다. 바람만 불어도 소스라치는 것은 내가 노을이 져서 그런다. 내가 가을처럼 물들어서 그런다. 손만 대도 푸른 물이 뚝뚝 듣는 것은 내가 멍울져서 그런다. 내가 파랗게 피어나고 싶어서 그런다. ♧ 벌거숭이 돌담에 숨어도 다리 밑에 숨어도 벌거숭이 우물에 빠져도 올무에 걸려도 벌거숭이 장막을 쳐도 문고리 걸어도 벌거숭이 입 막고 귀 막고 구멍이란 구멍은 다 막아도 나는야 벌거숭이 ♧ 삶의 이유 1 힘들고 아픈 세상 왜 사느냐 물으면 그래도 봄꽃이고 싶어서 버겁고 어두운 세상 왜 사느냐 물으면 그래도 반딧불이고 싶어서 외롭고 서러운 세상 왜 사느냐 물으면 그래도 바우이고 싶어서 바람 불고 눈비 내리는 세상 왜 사느냐 물으면 그래도 빚 갚고 싶어서 버려도 버려지지 않는 세상 왜 사느냐 물으면 그냥 사람, 사람이고 싶어서 ♧ 물렁물렁한 가슴 지나가는 샛바람에도 살을 베이는 가슴이 있다. 문풍지 울어대도 장독대 듣는 빗소리에도 한밤을 꼬박 세우는 가슴이 있다. 문득 부르는 상이한 말투에도 뒤가 급해지는 가슴이 있다. 빗나간 공에 맞아도 물살이 튄다. 오가는 발자국 소리에도 머리가 곤두선다. 이불깃만 스쳐도 설움이 인다. 그림자만 길어져도 노을이 진다. 부엉부엉 부엉이 소름이 돋는다. 닭 울음소리에도 먼 강이 일어선다. 너무 물렁물렁한 가슴이라서 꽃잎 지는 것만 보아도 눈앞이 흐려진다. 강물 흘러가는 것만 보아도 허리가 휜다. * 최기종 시집『슬픔아 놀자』(도서출판b, b판시선 027, 2018)에서 * 사진 : 지난 일요일(12.9) '사려니 숲' 눈길에서 |
출처: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원문보기 글쓴이: 김창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