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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님의 인도를 받자!!!
성령님은 우리를 거룩으로 인도하십니다.
본문/롬8:14, 갈5:18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많은 이들이 로마서 8:14절을 중요한 결정을 위해 성령의 인도를 받는 것을 뜻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더글라스 무 라는 학자는
[이 두 구절 중 어느 구절에도, 인도함을 받는 이란 표현이 신자들이 가끔 상투적으로 말하는 어떤 일을 하도록 성령의 특별한 인도를 받았다는 의미를 담고 있지 않다.] 고 주장합니다.
누구의 주장이 옳은지는 정확하게 알 수가 없지만 그렇게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는 것입니다.
롬8:14을 그 전에 있는 4절과 비교해 보십시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이 구절의 “따라 행하는”은 성령의 인도를 전제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의 인도를 따를 때 성공하고 형통하게 인도하시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기억하시고 다음 구절을 또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갈5:16절입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부정적인 표현이긴 하나 역시 같은 의미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말한 성령의 인도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지혜로운 선택과 결정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고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므로 우리를 거룩으로 인도하시는 성령의 인도입니다. 바울은 성령의 세가지 인도 중 이것을 가장 자세하게 설명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도 중요한 것이기 때문 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나눌 주제는 성령의 인도를 말할 때 그 성령께서 우리를 어디로 이끄시는가 입니다.
(1)나는 참으로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가?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실 때 제자들을 부르시면서 “나를 따라 오너라”라고 하셨습니다. 이 명령은 12제자뿐 아니라. 우리에게 하는 명령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예수님을 따라 가야 합니다.
우리는 말로만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 말고 실제로 예수님을 따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직 그런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이고 참 신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 승천하시고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예수님을 따라갈 수가 있습니까? 한때 세계적으로 말씀과 능력으로 강력하게 쓰임 받았던 베니 힌 목사님은 이에 대해 매우 흥미로운 설명을 하였습니다.
[제가 예수님께서 나를 따르라 고 하신 말씀을 읽었을 때 그것이 가능한가 하고 의아해 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자들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 주님과 같이 올라갈 것을 기대하셨습니까? 물론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하나님께 올라가셨을 때 그분은 성령님을 보내셨으며, “너희를 ...인도하시리니”(요16:1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나를 따르는 것을 중지하라 나는 떠난다. 그러나 성령님을 너희에게 보내리라. 너희는 지금부터 그분은 따라야 한다는”것 이었습니다.]
이것은 중요한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성령님을 따르는 것이 곧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내신 첫 번째 보혜사입니다. 그런데 승천하신 후 두 번째 보혜사인 성령님은 보내주셨습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영인 동시에 예수님의 영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을 따르는 것이 곧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은 율법을 페하러 오시지 않고 완전하게 하려고 오셨습니다.(마5:17) 실제로 예수님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율법의 의식법은 온전히 성취하시고(마5:18절) 율법의 계명들의 의미를 온전히 드러내심으로 계명들을 완전하게 하셨습니다.(마5:21-48) 만약 우리가 계명들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면 이렇게 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반드시 지켜야 하기 때문에 완전하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이라서 스스로의 힘으로 계명들을 지킬수가 없습니다. 성령을 통해서만 지킬 수 있습니다.(겔36:27) 그러므로 우리는 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인도를 따라가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이 완전하게 한 계명들을 지킬 수가 있습니다.
롬8:4절을 보십시오.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런데 예수님이 완전하게 한 계명을 지키는 것은 예수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을 따르는 것이 곧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눅9:23절,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그러므로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님을 따라가야 참 제자가 됩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성령의 인도를 따르는 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은 날마다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가는 자들이 예수님의 제자요 참 신자입니다. 여러분 이제 왜 반드시 성령의 인도를 따라가야 하는지 아실 것입니다.
한편 오늘날 하나만 일고 둘을 모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우리는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습니다. 자기의가 아니라. 십자가를 통해 구원을 받습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십자가와 의롭다 함만 강조해야 정통인 줄 아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우리에게 의롭다 함만 주는 것이 아니라. 다음 두 가지를 주기 때문입니다.
갈3:13-14절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이처럼 십자가는 “아브라함의 복”인 의롭다 함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약속한 성령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왜 이 두 가지를 주시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구원이 칭의와 중생 두 가지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둘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습니다. 그런데 십자가가 없으면 칭의가 없고 성령이 없으면 중생이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두 가지를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다음과 같이 말한 이유입니다.
롬8:9절에서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만약 의롭다 함을 받아 천국가는 것이 전부라면 하나님께서 의롭다함만 주시고 성령을 주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을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참 신앙생활이 어떤 것인지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주일성수 하고, 십일조 하고, 성가대 하고, 소그룹 성경공부하고 단이 이런 것들을 열심히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명목상의 신자와 외식자들도 할수 있는 일입니다. 신앙생활은 실제 삶 속에서 성령의 인도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 같은 외식자가 되지 말고 그들보다 나은 의, 즉 예수님이 완전케 한 계명대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 신앙생활입니다.
사도 요한은 거듭난 신자에 대해 요한일서에서
“죄를 짓지 않는다 의를 행한다. 형제를 사랑한다. 세상을 이긴다”리고 했습니다. 이것이 거듭난 자의 특징이고 이렇게 사는 것이 곧 신앙생활입니다. 누구든 이것들이 없으면 진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참 신자가 아닙니다. 그들은 교회 안의 불신자이고,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갈5:20절)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성령을 따라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2)나는 참으로 꼴과 독초를 구분하고 사는가?
저는 성령의 인도를 따르지 않는 자는 참 제자가 아니고 천국을 기업으로 받을수 없다고 봅니다. 그래서 앞에서 그런 의도로 말씀을 전했습니다. 사활적으로 중요한 진리입니다. 이것은 가장 자세하기 설명하고 있는 곳은 롬8장과 갈5장(16-23절)입니다. 그런데 이 진리를 그릇된 해석으로 무효로 만들려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독초이고 양들에게 치명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왜 그들의 견해가 잘못된 것인지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갈5:16절에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이 구절은 성령을 따라 행해야 죄를 짓지 않을수 있다는 뜻입니다. 아무 문제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 뒤 17절은 상당히 이상하고 그 의미가 모호합니다.
보십시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마치 16절의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할하리라.”는 말을 도루묵으로 만들고 있는 것 같은 말씀입니다. 일부 학자들은 이 구절이 성령과 육체의 소욕이 서로 대적하여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하므로 성령님이 원하시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뜻으로 주장합니다. 그래서 말씀대로 사는 것은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다면서, 이 구절을 롬7:14-25절과 연결시켜서 해석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로마서 7장의 바울의 고백이 구원받은 신자의 경험이라고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무 염려하지 말아라. 바울도 그랬다고 성도들을 위로하고 다독이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죄의 잠, 즉 죽음의 잠에 빠지게 하는 자장가입니다. 왜냐하면 17절은 절대로 그런 뜻으로 말한게 아닙니다. 17절이 그런 뜻이 아니라는 증거가 몇가지 있습니다.
1)16절이 그 증거입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바울은 “성령을 따라 행하라”고 하면서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육체의 분명한 일들인 죄를 짓지 않을수 있다는 뜻입니다. 또 로마서 8:14절에서 더 적극적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처럼 죄를 짓지 않을 뿐 아니라. 율법을 지킬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16절로 시작한 17절은 일부 학자들이 주장하는 그런 의미일수가 없습니다.
2)갈5:18절이 그 증거입니다.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이것은 성령이 우리를 인도하시면 율법 아래 있을 때와 달리 순종할수 있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이 구절은 “그러나”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글라스 무 학자는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대부분의 영어 번역본에서 알수 있듯이 이 절을 시작하는 그러나는 역접이다. 육체와 성령 사이의 동등한 전쟁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과는 정반대로 바울은 이제 신자에게는 성령이 승리함을 강조한다.]
또한 토마스 슈라이너도 이렇게 주장합니다.
[하지만 이라는 헬라어는 여기서 반의의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 육체와 성령이 큰 싸움을 벌이지만 성령께 인도받는 자들은 죄에 대해 승리를 거둔다.]
이처럼 18절은 말씀대로 살수가 없다라는 뜻이 아니라.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17절은 일부 학자들이 주장하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3)갈5:19-21절이 그 증거입니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20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바울은 성령이 아니라. 육체의 소욕을 따르므로 육체의 분명한 일들을 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만약 성령을 따라 행해도 죄를 이기지 못한다면, 믿는 자들도 전부 지옥에 가게 된다는 뜻이 됩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17절은 일부 학자들이 주장하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학자들이 주장하는 성경적이지 못한 독소들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4)22-23절이 그 증거입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상식이거니와 육체를 따르는 자는 육체의 분명한 일들을 행하게 되고, 성령의 인도를 따르는 자는 성령의 열매를 맺습니다. 그런데 육체의 분명한 일들과 달리 성령의 열매는 그것을 금지하는 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정죄를 받지 않습니다. 이에 대해 존 웨슬리 목사님은 다음과같이 주장을 합니다.
[그러므로...성령의 인도를 받는(갈5:18절) 그들은 저주나 유죄판결 아래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그것을 파기하는자 이외에 아무도 정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문구(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는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 천국에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성령의 열매는 죄를 이기고 말씀대로 사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가능한 일이고 17절은 이것과 다른 뜻일수가 없습니다.
5)24절이 그 증거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여기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구원받은 모든 참 신자를 의미합니다. 또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는 수동태가 아니라. 능동태입니다. 육체와 정욕과 탐심 즉 육체의 분명한 일들을 버리고 성령의 열매를 맺고 살기로 진지하게 결단했다는 뜻입니다. 참 신자는 이런 사람입니다. 실제로 참 신자는 이렇게 결단한 후 성령으로 따라 행하며 성령의 열매를 맺고 살가압니다. 그런데 17절에 대한 일부 학자들의 견해는 이 구절과 반대됩니다. 그러므로 17절은 절대로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그럼 알쏭달쏭한 17절의 참 의미는 어떤 뜻일까요? 이 구절은 서로 방해한다는 뜻입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의 뜻이 이루어지지 못하게, 성령은 육체의 소욕이 못 이루어지도록 서로를 방해합니다. 그래서 믿는 자에게 성령이 주어졌어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자동적으로 되거나 쉽지 않습니다. 불가능하다는 말이 아니라. 자동적으로 쉽게 되지는 않는다는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단호하게 성령을 따라 행해야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바로 전 16절에서 “성령을 따라 행하라”고 했는데, 왜 우리가 성령을 따라 행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설명한 것입니다. 토마스 슈라이너 학자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17절)의 마지막 부분(이 둘이 서로 대적하믕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은 특별히 해석이 어렵다. 이것은 다음과 같이 여러 다른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
첫째, 성령과 육체는 대조되며, 그 결과 신자는 성령이 촉구하시는 일을 할수 없다. 이 견해는 거절해야 한다. 이것은 5:17절이 로마서 7:14-25절과 유사한 것처럼 잘못 해석하는데, 두 본문은 구분되어야 한다. 후자는 성령에 대해 아무 말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이 견해는 어떻게 5:17절이 16절에 대한 근거로서 역할을 하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전체 논증(갈5:16-18절)은 그리스도이느이 존재가 마치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일에 끊임없이 실패만 한다는 뜻, 그리스도인의 삶에 그토록 부정적 견해를 제기하지 않는다....
여기서 “하려 함이니라”는 목적을 나타낸다고 이해하는 것이 최선의 설명일 것이다. 바울은 육체와 성령이 대립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즉 육체의 욕구도 실현되지 않고 성령이 원하시는 바도 이루어지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성령이 오심으로써 새로운 송말론적 실체가 시작되었다. 이어서 육체와 성령이 대립이 일어났고 이것은 신자가 성령 안에서 행하고 성령께 인도받는 것이 왜 중요한지를 설명한다. 따라서 성령 안에서 행하는 것은 순풍에 돛단 듯 나아가는 것이 아니다. 육체는 성령에 대항하여 전투를 벌이고 성령은 육체에 맞서 싸우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바울은 사람이 성령에 의해 행하며 성령께 인도를 받을 때 육체에 맞서 실제적이고도 중대하며 가시적인 승리를 얻는다고 주장하며 기본적으로 긍정적인 관점을 취한다.]
그러므로 17절을 로마서 7장과 연결 시켜서 아무리 노력해도 죄를 이길 수 없고 죄 가운데 사는 것을 신자의 정상적인 상태로 보는 것은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그것은 불신자를 신자라고 주장하고 비정상을 정상이라고 주장하며, 지옥에 갈 자를 천국에 갈 자라고 속이는 전형적인 미혹이며, 영혼들을 구원의 길이 아니라. 지옥으로 이끄는 악한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혹 이 말을 들을 때 너무 극단적이다 라고 생각하는 분이 있다면 그들은 회개하셔야 합니다. 실은 이것은 모든 신학자들이 동의하는 주장이고 앞에서 말한 것들은 일부분의 신학자들이 주장하는 것 잘못된 것을 소개드린 것입니다.
토마스 술라이너 학자는
[육체의 일을 행하는 것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간단히 넘길 문제가 아니라. 바울은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육체의 일을 실천하는 자들이 종말론적 왕국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 경고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마지막 날에 나머지 악한 자들과 함께 심판에 직면할 것이다.(6:8)..
또한 고전6:9-10과 에베소서5:5절은 모두 종말론적 유업에서 사람을 제외시키는 죄들을 명시하고 있다. 이것은 바울이 선포하는 주요주제임을 알아야 한다.
이 구절이 말하는 것처럼 실제로 갈라디아 사람들은 육체의 일이 지배하도록 허락하는 것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 이전에 구두로 가르침을 받았다 이러한 악이 가져오는 끔찍한 결과가 여기서 매우 엄숙하게 되풀이된다. 율법의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는 죄의 삶으로 이어져서는 안된다.]
라고 주장합니다.
또 권영경 교수는 다음과 같은 주장합니다.
[우리가 육신을 피하고 성령을 따라야 하는 것은 현재의 신분 때문안은 아니라. 여기에는 또 하나의 실질적인 이유가 잇는데, 그것은 우리가 육신대로 살면 죽을 것이라는 엄연한 사실 때문입니다.(롬8:13,6) 현재의 선택이 영원을 좌우한다는 사실은 로마서에서도 지속적으로 강조되는 사항중 하나다.(1:18, 2:6-11, 6:19-23) ... 만일 우리가 육신을 따라 산다면 죽음이라는 종말론적 결과르 ㄹ피할수 없다... 만일 우리가 죄의 종처럼 살아간다면 그 필연적인 결과는 최종적인 죽음이다.(6:16,21,23절) 반면 우리가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이다.(롬8:13절)]
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이에 대해 무지한 자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들은 하나만 압니다. 즉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다는 것은 잘 압니다. 그러나 둘은 모릅니다. 즉 성령의 인도를 따름으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나은 의를 가져야 하고 오직 그런 자들만 천국에 간다는 것에 대해 무지합니다.
성경에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 중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나은 의가 없으면 천국에 가지 못한다는 말씀 그대로 설교를 변목사님이 하니까 율법주의 이단이라고 매도해 버렸던 자가 장로교교수중에 있었습니다. 이 말씀은 더하지도 빼지도 못하는 액면 그대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마5:20)
세계적인 설교자 로이드 존스 목사도 그리고 존 스토트같은 신학자도 변목사님과 똑같은 주장의 글을 그의 책에서 썼습니다. 그런데 변목사님의 설교에만 유독 이단으로 매도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목회자들이 얼마나 무지한 맹인들입니까? 이렇게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 라고 강조하기만 하면 믿으므로 구원받지 웬 말씀을 강조하냐 하면 율법주의 이단으로 매도하는 경향이 한국교회의 모습니다.
성경 이사야9:16절에 백성을 인도하는 자가 그들을 미혹하니 인도를 받는 자들이 멸망을 당하는도다.
마태복음15:14절에서도 그냥 두라 그들은 맹인이 되어 맹인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하시니,
이게 오늘날 한국교회의 현실입니다. 물론 저도 그 축에 속하지만 알려고 노력하고 말씀을 굉장히 사모하고 있습니다. 맹인이 안되기 위해서 말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인도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진리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 그리고 오늘 이시간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를 거룩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러나 사실 첫 번째가 잘되어야 두 번째가 이루어 집니다. 간혹 있긴해도 첫 번째 인도를 정확하게 받지 못해 사람의 계명에 속고 있지만, 하나님을 사랑하고 말씀에 순종하고 진실하게 신앙생활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당연히 그들은 천국에 가고 하늘에서 큰 상을 받을 것입니다. 반대로 성령의 첫 번째 인도를 아무리 정확히 받았어도, 사실 성령의 두 번째 인도를 따라가지 않으면 지옥에 떨어질 가능성이 많습니다. 성령의 두 번째 인도가 우리의 영원한 운명을 좌우합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옳게 분별하고 아는데서 멈추지 말고 반드시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저와 우리들 되어야 합니다.
(3)나는 참으로 바른 목표를 가지고 사는가? 입니다.
성령의 두 번째 인도를 따라가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그래야 육체의 욕심이 아니라.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고 천국에 들어갈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요구를 이루는 것이 우리의 목표가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루어야할 “율법의 요구”는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첫째로, 율법의 요구는 거룩입니다.
레위기11:45절에,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나님은 모세의 율법을 주시면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것이 율법의 첫 번째 요구입니다. 그러므로 거룩이 우리의 묙표가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문자만 알고 정신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거룩을 단지 간음하지 않는 것으로 오해하였습니다. 그 결과 자신이 거룩하다고 착각에 빠져서 당당하게 이렇게 기도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가18:11절에,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그러나 기억은 거룩이 아닙니다. 때문에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23:25절 이하에 있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26 눈 먼 바리새인이여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이처럼 예수님은 그들의 “겉”은 단지 행동이 아니라.“안” 즉 마음과 생각과 상상을 살피셨습니다. 그런데 마음 속에 방탕이 가득했습니다. 그래서 외식자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하나님의 기준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만 이 기준을 들이대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도 똑 같이 기준을 들이대십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 이 기준으로 우리를 심판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경고 하십니다. 마태5:27절 이하에 다음과 같이 경고하십니다.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8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29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30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과 생각으로도 간음하지 말아야 합니다. 바꾸어 말해서, 반드시 마태5장의 팔복의 말씀같이 마음이 청결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거룩은 단지 간음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의 청결입니다. 그런데 거룩이 없이는 누구도 천국에 들어갈수 없습니다.
히브리서12:14절에 또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그런데 개역 성경을 보시면 “거룩함을 따르라”를 “거룩함을 좇으라”로 번역했습니다. 또 “좇으라”는 단어를 “추구하라”는 뜻으로 들립니다. 실제로 “디오코”라는 단어에는 “추구하다”는 뜻이 함께 있습니다. 그래서 “거룩을 추구하라고 했으므로 우리가 거룩하지 못해도 거룩을 추구하는 삶을 살면 궁극적인 구원을 받을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잘못 알고 있었습니다. 히12:14절에 두 가지를 말씀드리자면 먼저 “이것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에 나오는 “이것”이 무엇입니까? 화평함과 거룩함 입니까? 아니면 단지 거룩함입니까? 후자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을 뜻하는 “호스”가 단수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윌리함 레인 이라는 학자는 “화평함”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볼수 없는 거룩함” 이렇게 그 둘을 구분하였습니다. 아더 핑커라는 목사님도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이것이 단수로 되어 잇는데 바로 앞에 있는 거룩함을 따르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 인들은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화평을 따르는일을 하지 못할수도 있습니다. 비록 그 일로 많은 손해를 보고 자신이 아버지의 징계의 매를 맞는 상황을 맞아도 그것이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을 상실하는 것을 참축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거룩함에 있어서는 그와 다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지 못하면...결코 하늘에 이르지 못할 것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화평함과 거룩함이 아니라 거룩함이 없으면 재림하시는 주님을 만날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다음으로, 이 구절을 거룩함을 추구하면 된다는 뜻일까요? 아닙니다. 거룩함을 추구하여야 하지만 재일 중요한 듯은 거룩함을 이루어야 하고 거룩해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본문에 “따르라”는 원문은 적극적인 표현입니다. 열렬히 추구하는 그런 뜻입니다. 성령에 그런 표현의 말씀이 있습니다. 8복의 말씀중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이요”라고 말씀한 그대로입니다. 때문에 이것을 잘 표현한 성경은 표준새번역과 공동번역의 표현입니다. 읽어드리겠습니다.
표준새번역/히브리서12:14“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게 지내고 거룩하게 살기를 힘쓰십시오, 거룩해지지 않고서는 아무도 주님을 뵙지 못할 것입니다.”
공동번역/“모든 사람과 화평하게 지내며 거룩한 사람이 되도록 힘쓰시오. 거룩해지지 않으면 아무도 주님을 뵙지 못할 것입니다.”
유명한 설교가 아더 핑커라는 목사님도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있습니다.
[영원한 복락의 나라에 이르는 길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위에 있는 영원한 복락의 나라로 연결된 고속도로는 성결입니다.(물론 은혜로 말미암아서) 우리가 그 길을 밟지 않으면 결국 무서운 형벌로 영원한 화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맞습니다. 그 증거로 7계명을 대한 해석을 하시면서 마태 5장에서 주님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셨습니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못 들어간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눈을 뽑아버리고 손을 잘라버리라는 말씀을 하였습니다. 이것은 단지 거룩한 추구하는 것만이 아니라. 실제로 거룩해져야 천국에 들어갈수 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도 비슷한 말씀을 하였습니다. 벧전1:13-17절입니다.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14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
15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16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17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그러므로 오직 마음이 청결한 사람만이 천국에 들어갈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거룩을 추구하는 것을 넘어서서 실제로 거룩해져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불신자는 물론이고 신자들도 의롭다함을 받았어도 몸의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육체의 소욕이 성령을 대적하고 율법의 요구를 이루는 것이 어렵고 때로는 불가능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때문에 간혹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항변합니다.
“나는 도저히 마음이 청결한 자가 될수 없어! 어차피 안되거면 차라리 포기할래!”
이것은 지옥으로 끌고가고자 사단이 집어넣어준 생각입니다. 그런 생각을 받아들이면 안됩니다. 또 사단이 즐겨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마음의 청결이 영적인 천재들에게나 가능하고 죄성이 강하고 깊은 죄에 빠져 사람 사람들에게는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다른 사람은 가능하지만 나는 불가능해! 라는 생각들입니다. 이것도 역히 거짓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변화는 자기가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되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고아의 아버지라고 불기우던 죠지 뮬러를 통해서도 보여주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얼마나 물란했던지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제가 추측하기로 여기 계신 분들 중 누구도 과거의 저보다도 더 추악한 죄인은 아닐 것입니다.]
그는 얼마나 죄악속에 빠져있었던지 그의 인생의 20년째 되는 때까지 불경건한 삶의 방식으로 말미암아 엄청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악한 짓을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그는 계속해서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신앙적으로 노력했다고 합니다. 그래도 변화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결코 물러서지 않고 조금씩 조금씩 계속해서 노력하는 가운데 이 악한 경향을을 정복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시간이 아주 길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젊은이들에게 다음과 같이 격려합니다.
그리스도를 믿기로 시작한 젊은이들 중에 절망하지 말고 하나님의 위로와 격려를 얻고 하나님께 나아가 도움을 받기를 바란다면 얼마든지 하나님을 우리를 이 악한 성향에서 이기게 해 주신다고 간증하고 있습니다.
조지 물러는 이러한 악습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어 결국에서는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노력할 때 조금씩 변화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절망감이 와도 절대로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게 능려주시는 그분 안에 날마다 거하면서 도움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돕는 보혜사 성령님을 필사적으로 의지하십시오. 그러면서 죄와 싸우십시오, 그러면 누구나 승리할 수가 있습니다.
두 번째, 율법의 요구는 사랑입니다.
롬8장4절에서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가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마지막 시대에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살아야 합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오늘 우리가 추구하고자 하는 주제는 바로 거룩입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 거룩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사랑입니다. 그 증거로 예수님은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가장 크니이까?” 라는 질문을 받고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습니다. 그것이 마태22:37-40절에 나옵니다.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율법의 요구는 십계명으로 요약할 수가 있습니다. 또 십계명은 대신 계명과 대인계명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사랑하면 1-4계명을 지킬수가 있고, 이웃을 사랑하면 5-10계명을 지킬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참으로 율법의 요구는 사랑입니다.
우리는 예수님뿐 아니라. 바울의 말씀을 통해서 이것을 재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보다 먼저 쓴 갈라디아서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갈5:13-14절에서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14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그후 로마서에서 더 자세하게 우리가 잘아는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로마서13:8-10절입니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9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사랑하면 율법의 계명을 모두 지킬수 있습니다. 그러니 율법이 요구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사랑입니다. 참으로 율법의 요구는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우리의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이제, 둘을 함께 다루어 보겠습니다. 율법의 첫 번째 요구는 거룩입니다. 거룩하지 못하면 주를 볼 수가 없다고 히12:5절에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거룩을 추구하고 실제로 거룩해져야 합니다. 그리고 율법의 두 번째 요구는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룩을 추구할뿐 아니라. 반드시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이 일의 중요성은 바리새인들을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열심히 대단했고 율법의 계명을 철저히 지키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굉장히 비판적이었고 사랑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뱀들과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하셨는데 실제로 냉혈 인간들 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자주 그들을 이렇게 책망하셨습니다.
마태복음9:10-13절에서,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10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11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12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그리고 우리가 잘 아는 마태23장의 말씀입니다.(23절)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이것은 율법의 첫 번째 요구인 거룩만 추구하고 두 번째 요구인 사랑을 등한히 여기면 우리가 이 시대의 바리새인들이 될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끔찍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거룩할 뿐 아니라. 사랑을 추구해야 합니다.
한편, 사도 바울은 주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이 땅에 횡행할 여러 가지 죄의 목록을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딤후3:1-5절에,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2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3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4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그런데 같은 죄가 아닙니다. 어떤 죄는 뿌리가 되는 죄고, 어떤 죄는 열매가 되는 죄가 있습니다. 또 뿌리가 여러 가닥으로 뻗는 것처럼 뿌리가 되는 죄가 세 가지입니다.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쾌락을 사랑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이 중 자기 사랑이 가장 큰 죄의 뿌리이고, 돈 사랑이 중간 뿌리이고 콰락 사랑이 마지막 뿌리입니다. 그리고 그 외의 모든 죄들은 이 뿌리에서 맺히는 열매들입니다.
어떤 분은 그것이 왜 그렇게 분류하는 것입니까? 라고 묻는 분들에게 딤전6:9-10절을 보시면 이해하실수가 있습니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이처럼 잘못된 사랑은 죄를 낳고 올바른 사랑은 의를 낳습니다. 잘못된 사랑, 즉 자기 사랑, 돈 사랑, 쾌락 사랑은 바울이 열거한 것뿐 아니라. 모든 죄의 뿌리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원수 사랑은 모든 의를 낳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이런 말씀들이 있는 것입니다.
요한14:15절에,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요일5:3절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롬13:8-10절에서,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9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갈5:13-14절에서,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14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이제 왜 율법의 두 번째 요구가 사랑인지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이처럼 사랑은 율법의 두 번째 요구일뿐 아니라. 율법의 첫 번째 요구를 이룰수 있는 비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룩을 추구할 뿐만 아니라 필히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3)율법의 요구는 완전입니다.
율법의 첫 번째 요구는 거룩이고, 두 번째 요구는 사랑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요구는 완전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5:17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그 후 뒤에서 21-48절까지 율법의 계명들의 의미를 더 자세하게 설명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부분에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마태5:48절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그러므로 율법의 마지막 요구는 바로 완전입니다. 따라서 완전이 우리의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더구나, 이 명령은 성자들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내린 명령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완전을 추구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완전이 신앙의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칼빈과 장로교는 완전이 이땅에서 불가능하다고 주장합니다. 반대로 웨슬리 목사님과 찰스 피니는 완전이 이땅에서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그 증거가 무엇일까요?
첫째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이에 대해 로이드 존즈는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불가능한 것을 하나도 가그치시지 않았습니다. 산상설교의 어떤 가르침을 그런 식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해석은 거짓됨에 틀림이 없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이 부분은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습니다.
[자녀를 보고 너희 부모만치 되라고 하지 못5하겠는가...첫째 아담에게 속한 사람은 아무리 수양하더라도 공자와 석가만치 될지는 모르나,하나님만큼은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중생한 사람은 될수 있습니다....하나님께서는 그 자녀를 가르칠 때 불가능한 일을 가르치지 않으십니다. ... 어느 아버지가 열 살된 아들더러 쌀 한섬 지고 오라고 하겠는가! 하나님의 명령은 성령받으면 가능하게 하십니다.]
맞습니다. 하나님은 불가능한 일을 명령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온전하라는 명령 자체가 온전히 가능하다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둘째로, 성경은 완전을 명령할 뿐 아니라. 완전한 자들에 대해서도 말씀합니다.
노아를 완전하다고 말했습니다. 창6:9절입니다.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욥을 완전한 자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욥1:1절에,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다니엘에 대하여도 완전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단6:4절에 보시면,
이에 총리들과 고관들이 국사에 대하여 다니엘을 고발할 근거를 찾고자 하였으나 아무 근거, 아무 허물도 찾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가 충성되어 아무 그릇됨도 없고 아무 허물도 없음이었더라.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에 대하여도 완전한 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누가1:5-6절을 보십시오.
○유대 왕 헤롯 때에 아비야 반열에 제사장 한 사람이 있었으니 이름은 사가랴요 그의 아내는 아론의 자손이니 이름은 엘리사벳이라
6 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
이처럼 성경에는 완전한 자들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한다면 완전이 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셋째로 ,성경뿐 아니라 교회사에도 완전한 분들이 있었습니다.
책을 읽어보시면 완전에 도달한 분들의 글을 볼수가 있습니다. 찰스 피니의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기도”라는 책을 보면 다음과 같은 글이 있습니다.
[내가 회심한지 얼마 되지 않았던 젊은 시절에 나는 경건하고 기도를 아주 많이 하는 어떤 나이 많은 할머니를 알고 있었습니다. 당신이 그녀를 만난다면 그녀 앞에서 아무 말도 할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녀에는 깊이 느끼게 해주는 무엇인가가 있었습니다. 어느날 나는 그녀와 만나서 성화에 대한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녀는 “찰스 자네가 하는 행동을 조심하게! 나중에 후회할 일을 하지 말게나”라고 말했습니다.
그녀의 아들 중에 한 명이 그리스도인이 되었는데...그녀는 그를 위해 올랫동안 아주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드디어 눈을 떴을 때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아무에게도 내가 경험한 것을 말하지 않았다. 나는 지난 30년 동안 정죄라고는 한번도 느껴보지 못했어, 지금까지 나는 인식할 만은 죄를 지어본 적이 없단다. 내 영혼은 하나님과 아무 방해도 받지 않는 교제를 누리며 즐거워했다.]
이것이 완전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완전은 이땅에서 가능한 것임을 성경과 간증을 통해서 얼마든지 알 수 가있습니다.
찰스 피니는 “기독교의 완전성”이라는 설교를 통해서 단호하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독교적인 완전성은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완전한 순종에 있다....
기독교적 완전성은 이 세상에서 달성이 가능하다....
기독교의 완전성은 하나의의무이며 이 세상에서 달성이 가능하다.
우리는 너무나 오랫동안 실제 의미를 간과해버린 채 성경을 이해했다. 나는 성경에 기록된 거룩의 약속과 예언들이 완전한 성결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모든 사람들을 단호히 배격한다.]
그러므로 여러분들도 찰스 피니 목사님처럼 완전을 부정하는 학자들과 목회자들의 말을 배격하십시오. 그리고 완전이 가능하다는 것을 믿고 그것을 목표로 삼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끝으로 완전에 관한 말을 하나 소개하면서 완전에 대한 설명을 마치려고 합니다. 토마스 아캠피스는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책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썼습니다.
[우리는 영적 생활에 가장 크고 어려운 장애물은 마음속에 잇는 정욕과 욕시이며 성인들의 완전한 길로 들어서려는 노력이 없다는 점입니다.]
옳은 말입니다. 그러므로 기준을 높이고 단순히 거룩이나 사랑이 아니라. 완전을 여러분의 목표로 삼고 나아갑시다. 완전을 목표로 삼고 사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종말은 결코 같지 않습니다. 어마어마한 차이가 발생합니다. 최고의 신자는 완전을 추구하는 자들속에서 나옵니다. 최고의 목회자도 완전을 추구하는 자들 속에서 나옵니다. 최고의 영적 체험과 성령의 은사들과 복도 완전을 추구하는 자들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완전을 목표로 삼겠다고 굳게 결심합시다. 그리고 남은 인생을 완전을 이루기 위해 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천국에서 큰 자가 되고, 나를 통해 이루기 원하시는 계획을 다 이루어드리고 예수님과 사도들처럼 강력한 하나님의 일군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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