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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교실 스크랩 양진여·상기 부자의병장 행적,조경환 의병장 자료파일
문대식 추천 0 조회 55 17.02.15 09:5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양진여·상기 부자의병장 행적

 

 

양진여(梁振汝)

1862.5.11.~1910.5.30

이명 : 진여(鎭汝·辰如)

 

양진여는 전라남도 광산(광주) 출신이다.

1907년 정미7조약이 체결되고 이때 교환한 비밀각서에 의해 구한국군이 강제 해산되자 해산군인인 아들 양상기(梁相基)와 더불어 봉기하였다. 1908년 7월 20일경(음력) 광주에서 격문을 살포하고 의병을 모집하여 의병장으로 추대되었으며 박성일(朴聖一)·김익오(金益五)로부터 군자금과 군량을 징발하여 군수를 조달하였다. 대체로 광주·창평·나주·장성 등지에서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1908년 11월 중순 광주군 대치산(大峙山)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혈전을 전개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11월 24일 일대의 의진과 연합하여 부하 3백여 명을 인솔하고 추월산(秋月山)에서 전투하였으나 크게 패하였다.

이어서 1909년 의병 백여 명을 인솔하고 강판열(姜判烈) 의진과 전해산(全海山) 의진의 2백70명과 함께 장성·담양을 습격하고 이어 일본의 본거지인 광주를 공격하고자 계획하였으나 이미 광주에서 이에 대비하여 대 병력을 배치한 후였으므로 계획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의병투쟁으로 다친 몸을 치료하던 중, 1909년 8월 26일 새벽 전남 장성군 갑향면 행정에서 체포되었다.

1910년 3월 5일 대구공소원 형사부에서 소위 내란죄로 교수형의 선고를 받고 5월 30일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바로잡아야 할 내용

1. 일제의 비밀 기록인 이른바 『폭도에 관한 편책』을 번역 정리한 ‘『한국독립운동사』’ 자료에 나타난 양진여의 의병투쟁 내용은 방대한데, 그 내용 중, 일부만 반영되어 있다.

2. 그는 전해산 의진을 비롯한 여러 의진과 합동 작전을 폈던 의병장으로 전해산·심남일·안계홍·조경환에 필적할 만한 업적이 있는 의병장이었다.

3. 그가 체포된 일시와 장소는 본문처럼 바로잡았다.

 

 

 주요 행적 찾기

 

 

♣ (1908년) 10월 26일 수괴 양진여(梁鎭汝)가 이끄는 폭도 수색을 위해 중소로(中小路) 군조 이하 7명, 순사대 순사 4명이 광주군 신촌에 출장 중 동 마을 동쪽 산위에서 약 20여 명의 적을 공격하여 이를 격퇴하였는데, 5명을 죽이고 화승총 4정을 노획했다.

 

♣ (1908년) 11월 5일 조(趙)·박(朴) 양 경시가 이끄는 제2특설순사대로 하여금 전북 경계에 도량(跳梁)하는 수괴 양진여(梁鎭汝) 일당의 수색을 위해 1주일간 광주·장성·영광·나주 지구를 수색케 하였다.

 

♣ (1908년) 11월 14일 오전 11시 우편체송인 복강현(福岡縣) 사람 강등희차(江藤喜次)가 담양군 오치면에서 양진여의 부하 5명에게 습격을 당해 살해되었다. 경찰관과 헌병이 급히 출동하였으나 소재를 알 수 없었다.

 

♣ (1908년) 11월 25일 산전(山田) 소위 이하 20명의 토벌대가 우전(宇田) 부대와 대치(大峙)에서 교전한 적을 추적, 약수정에서 적정을 파악한 뒤 다시 진군하여 무명고지에서 적장 양진여가 이끄는 약 100명의 적을 발견하고 우회하여 추월산 산정에 둔집하는 것을 기다렸다가 불의에 습격, 15명을 죽이고 1명을 포로하고 포 1문, 화승총 7정을 노획했다.

 

 

♣ 전남에 있어서의 폭도 피해 및 그 상황

목포 일본인 상업회의소

 

93. (1909년) 2월 27일, 수괴 양진여가 인솔하는 약 40명의 폭도는 담양군 석상면 목동에 이르러 2박 하고, 29일에는 동군 고진면 모갈리에서 숙박하고 그곳 부근을 배회하고 있었다.

 

 

♣ 광비수(光秘收) 제156호

융희 3년 3월 1일

광주경찰서장 경시 촌상칙정(村上則貞)

내부 경무국장 송정무(松井茂) 앞

 

의병 출몰에 관한 건

 

순사 산목호태랑(山木好太郞:광주경찰서 근무 형사)으로부터 다음의 보고가 있었다.

 

一. 수괴 불명의 적도 5명이 2월 20일 이른 아침, 광주군 고내묘면 동수성리 거주 배경안(裵敬安) 집에 들어가서 주인의 재부(在否)를 물었으나 당시 동인은 부재하였으므로 적도는 그 장남 아무개를 포박하고 어디엔가 끌고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아 행방이 불명하다고 한다.

一. 이달 8일(기 보고한 9일이라고 한 것은 오보이다) 수괴 양상기(梁相基)의 부하에게 붙잡혀 간 담양군 우치면 신기리 거주 안판구(安判九)(2월 10일부 기 보고)는 2월 20일 귀가하였다. 따라서 본인에게 당시의 상황을 취조한 바는 (다음과 같다.)

一. 피랍 중의 안판구는 양친이 염려할 것을 생각하여 특히 폭도의 허가를 얻어 2월 10일 정오경 귀가하여 재택 중, 이튿날 11일 사입장(仕込杖)을 휴대한 폭도가 찾아와서 재차 붙잡아 간 이후, 창평군·동복군·화순군 일부를 배회 중, 2월 20일 밤 담양군 삼지촌 거주 재산가 김익지(金益枝)를 체포, 금전을 강청 중인 그 틈을 타서 도주하여 귀택하였다고 한다.

一. 수괴 양상기는 2월 9일 창평군 지곡에 이르러 김 아무개에게 50냥 및 촌민에게 금전 1백 냥의 제공을 강청(촌민 등은 제공의 전약이 있었던 것 같았다) 하였으나 조금(調金)이 되지 않았다. 따라서 김 아무개로부터 10여 냥, 촌민으로부터 80냥을 수수하고 그날 밤 촌민에게 술과 밥의 향응을 받았다고 한다.

一. 양 수괴는 2월 18일 밤, 창평군 월곡에 숙박 중, 부하 2명을 데리고 왔다. 수괴 양진여와 합하여 19일 숙박지에서 총을 수리하고, 수괴 이원오(李元五:부하 12명이 있다), 동 김재광(金在光:부하 9명이 있다) 등과 합동의 목적으로 담양군 우치면을 경유, 2월 20일 광주군 우치면 수곡에서 회동하였다. 양진여는 이에 총수괴가 되어 그 주막에서 술을 마시던 중, 산골짜기 방면으로부터 (의병들이) 다수가 모여들어 총인원수가 약 70명에 도달한 것 같다.

一. 수괴 양진여는 보통 한복 검정색 두루마기를 입고 단총(탄환 6발이 있다)에 사입장을 휴대하고 있었다고 한다.

一. 양상기는 흑색의 복장을 하고 서양칼(일본 순사가 패용하는 것)을 차고 있었다고 한다.

一. 김재선(金在先:전 진평대 병사)은 31세가량으로 총을 휴대하고 있고, 광주군 서양촌의 출신이라고 한다.

一. 이원오(주소·거처 불명)는 35세가량으로 전 진평대의 총을 휴대하고 있었다고 한다.

一. 그 적도의 집단은 전 진평대 총 5정, 양식 엽총 1정, 천보총 1정, 한총 36정, 칼 3자루, 나팔 1개를 휴대하고 그들의 행진 동작 중에는 필히 3명의 척후를 내고, 또 숙박 시에는 보초를 세우는 등 용이주도한 것 같으나 심히 불규율한 것 같다고 한다.

一. 수괴 양진여의 집단은 광주군 대치면과 담양군 우치면 부근 일대를 배회하고 있었다고 한다.

一. 안판구는 전 진평대의 조장이었으므로 적도 등은 총의 수리를 하게 하기 위하여 납치한 것이나 이 같은 경험이 없으므로 풀려난 것이라고 하나 그 사실 여부는 불명이다.

一. 2월 23일 밤, 광주군 대치면 동촌에 다수의 폭도가 들어갔다는 소문이 있으나 그 사실 여부는 불명이다.

一. 4월 25일 밤, 수괴 양진여의 부하라고 자칭하는 약 20명의 적도가 담양군 우산면 와우리에 와서 갓 6,70개(가격 6,70원)를 약탈하여 갔다고 한다.

 

이상 폭도의 출몰은 수괴 양진여 등의 일단인 것 같다. 지금 엄중히 수색 중이다.

 

 

♣ 전남경비발(全南警秘發) 제411호

융희 3년 3월 11일

전라남도 경찰부장 경시 촌상칙정(村上則貞)

내부 경무국장 송정무(松井茂) 앞

 

폭도 내습의 건

 

一. 3월 9일 오전 1시, 광주 북문 외 서양면 경양촌에 폭도가 내습하여 수 발의 총성을 내었으므로 즉시 경찰서원의 비상소집을 행하고, 소관은 임(林) 경부 이하 경찰서원 13명을 인솔하고 현장으로 급행하였다.

이때 광주헌병분견소 및 수비대에서도 하사 이하 수 명이 급행하여 추격으로 향하였다.

一. 마을 사람들에 대하여 취조한 바, 수괴 김동수(金東洙)는 부하 약 50명(한총 32정, 서양 엽총 1정, 기총 2정, 단총 2정, 칼 6자루)을 인솔하고 있는데, 그 반수를 후방 고지에 배치하고, 반수는 마을 안에 침입하여 주막업을 하던 백윤덕(白允德)의 집에 이르러,

“너의 아우는 헌병보조원이 되어 있으므로(실제로는 헌병보조원이 아니다) 연발총을 휴대하고 있을 것이다. 그것을 제공하라.”

라고, 협박하기 위하여 수 발을 발사하고, 또 그 집 온돌을 향하여 발사했다.

이에 백윤덕은 총기는 마을 안에 가져오지 않고, 또 백의 아우가 부재한 상황을 변명하였던 바, 구타 후에 다시 수 발의 사격을 하고, 일동은 북서쪽 오치면 방면으로 도주하였는데, 금품 등의 피해는 없었다고 한다.

一. 이에 있어 경찰수색대는 둘로 나누어 그 반수를 임(林) 경부에게 주고, 삼각산 기슭으로부터 용산시장 방면을 수색 추적시켜 소관은 스스로 반수를 인솔하고 황계면으로부터 석제면 등을 수색한 바, 적은 석제면으로부터 삼소지면을 통과한 형적이 있으나 그 후의 행방은 불명이다.

一. 다시 임(林) 경부 부대와 연결을 취하면서 항상 적도의 소굴인 각 부락을 수색 중, 수괴 양진여의 부하인 이재호(李在浩)라는 자가 천곡면 구암에서 동장을 협박하고 금전 5백문을 제공시키게 하고 있는 현장을 발견하고 이를 체포하려 하였던 바, 그 적은 도주를 기도, 장성군 남일면 동대리 산중까지 추적하였으나 체포의 가망이 없어 부득이 사격하여 그를 죽였다.

一. 또 적도의 일부 25명은 10일 오전 5시경 삼소지면으로부터 장성군내를 통과한 형적이 있으나 산중에서 그 종적이 불명되었다.

一. 각 변장대는 다시 장성군내의 일부로부터 광주군 대치면(항상 적의 집합지) 방면으로 이르는 각 부락을 남김없이 수색한 바, 이달 5일 양진여가 인솔하는 40명의 적도는 장성군 내동면으로부터 광주군 대치면에 이르러 숙박하고 간 형적이 있으나 그 후의 형적은 불명이다.

一. 대치면에서 수색 중, 괴이한 한인 1명을 발견, 이를 인치하였다.

一. 이상과 같이 수색대는 적의 소굴인 광주군의 서북부와 장성군의 동남 일부를 거의 20여 시간에 걸쳐 남김없이 수색하였으나 끝내 적도의 집단과 조우하지 않고 10일 오전 0시 30분 일동은 귀서하였다.

一. 요컨대, 이번에 내습한 적도는 양(梁)의 일부로 주간은 하처에 잠복하고, 야간에 교묘히 출몰하는데, 그 출몰 구역은 주로 광주군의 일부이므로 수비대와 협력하여 장차 주요 지점에 정지 척후, 또는 잠복 척후를 내어 이의 박멸을 계획하고자 한다.

 

추이 : 헌병대의 일행은 9일 오전 2시경 삼각산 부근에서 양(梁)이 인솔하는 약 50명을 발견, 이를 공격하여 궤란시켰으나 적의 손해는 불명이라고 한다.

 

 

♣ 전남에 있어서의 폭도 피해 및 그 정황

목포 일본인 상업회의소

 

3월 5일, 양진여 부자의 폭도 약 50명이 장성군 수월면 행정리에 와서 석식을 계약한 후 갔다.

6일 밤, 광주군 석저면 충효리에 수괴 양진여가 인솔하는 약 70명의 폭도가 내습하여 다음날 석식을 계약하고 남방을 향하여 갔다.

6일 오후 9시 30분, 수괴 양진여 부자가 인솔하는 약 80명의 폭도가 창평군 내북면 유곡리에 왔다는 정보에 접하였으므로 헌병과 순사 등이 토벌하기 위해 출발하였다.

 

 

♣ 호외

융희 3년 8월 26일

통감(좌죽佐竹), 총무장관, 탁지부차관, 헌병대장, 외파무관, 내부대신·차관

경무국장

 

전라남도 경찰부장으로부터 다음의 전보가 있었다.

 

약 100명의 비도수괴 였던 양진여가 장성군 갑향면에 잠복 중임을 탐지하고 수비대의 원조를 얻어서 오늘 새벽 체포하였다.

 

 

♣ 광경비수(光警秘收) 제723호

융희 3년 8월 28일

광주경찰서장 경부 목뢰이좌위문(牧瀨伊左衛門)

내부 경무국장 송정무(松井茂) 앞

 

적괴 양진여 체포의 건

 

8월 26일자 순사 입간삼남(笠間參男) 보고

전라남도 경찰부장으로부터 다음의 전보가 있다.

 

一. 적괴 양진여·양상기 부자가 장성군 갑향면 향정에 잠복하고 있다는 정보에 의하여 명령을 받고, 본직, 덕전(德田) 순사, 유영달(劉永達)·백찬덕(白贊德) 순사, 번역관보(飜譯官補) 문명로(文明魯) 5명이 한 부대가 되어 광주수비대 미촌(梶村) 중위 이하 37명(그 중, 6명은 한국인 복장을 하고 있었다)과 연합하여 지난 8월 25일 오후 9시 반, 목적지 향정으로 향하였다.

다음날 새벽 4시 반에 목적지에 도착한 직시 수비병은 그 마을을 포위하고, 경찰대와 변장한 병사 6명은 수색대가 되어 그 마을 수색에 종사하였다. 수색대는 그 마을의 서북쪽 모퉁이 대밭이 있는 곳에 이르렀다. 어찌 알았으랴! 대밭의 주변은 모두 울타리와 같이 동여매여서 외부로부터의 습격을 방비하기 위해 준비한 것과 같이 되어 있고, 그 중간에 보통 한인들이 제작하여 사용하는 문이 있었는데, 엄중히 폐쇄되어 있었다. 본직 등은 의심스러운 마음을 갖고서 그 안을 살펴보았지만 인가(人家)가 있는 것으로 생각되지 않았는데, 여하튼 내부를 수색할 필요가 있다고 인정, 즉시 그 문을 열고 침입한 바, 또 문이 있어 이를 열고 안으로 들어가니, 과연 인가가 있었다.

본직 등은 더욱 의심스러워 그 인가에 대하여 수사하려고 할 때, 50여 세의 남자가 비를 들고 마당을 쓸고 있었다. 덕전 순사는 그에게 가까워 성명을 물은 바, ‘박여진’이라고 답하고, 태연자약하게 청소를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백찬덕과 번역관보 문명로는 적괴 양진여의 얼굴을 알고 있으므로,

“저 사람은 양진여이다!”

라고, 소리치자, 그는 낭패하여 뒤쪽 대밭 속으로 도주하려는 것을 덕전 순사는 제일 먼저 추적하여 덤불 입구에서 붙잡자, 그는 저항하였다. 본직과 미촌 중위 기타 일동이 달려와서 그를 체포하였다. 때는 그날 오전 5시였다.

그는 수일 전부터 이 마을에 도착하여 이성일(李成一)이란 자의 집을 빌려서 ‘박여진(朴汝鎭)’이라 하고, 잠복하고 있었음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양상기는 드디어 보이지 않았다. 풍설에 의하면, 강원도 지방에 갔다고 하고, 또는 보성군에 갔다고 하여 소재 판명이 되지 않았다. 이 마을에 잠복한 모양이 아니므로 연합대는 그날 오후 5시 반에 경찰서로 돌아왔다.

一. 적괴 양진여를 체포한 당시, 그는 아내를 불러서 유언적으로 말하기를,

“나는 의병을 일으킬 때부터 죽음을 결심하고 국가를 위하여 힘을 다하고자 함이었으나, 오늘에 이르렀으니 죽어도 결코 유감이 없소. 내가 죽은 후 큰아들 상기는 또 의병으로서 전투 중에 있으므로 작은아들로서 가독(家督)을 상속시켜 가정을 정리하시오!”

라고, 말하였다.

 

 

♣ 광경비수(光警秘收) 제723호의 4

융희 3년 9월 2일

광주경찰서장 경부 목뢰이좌위문(牧瀨伊左衛門)

내부 경무국장 송정무(松井茂) 앞

 

융희 2년 5월 경비훈(警秘訓) 제79호에 기초하여 지난달 26일 생포한 비도수괴 양진여(梁振汝:지금까지 梁鎭汝로 보고하였던 바, 이번 생포로 그것이 잘못임을 알았다)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보고한다.

 

1. 성명·연령·신분·직업·전 관직의 구별

양진여, 50세, 평민, 전 주막업으로 관직에 있었던 적이 없다.

 

2. 비도를 소집하고, 혹은 옹립되어 수괴가 된 동기, 즉 원인·수단·목적

융희 2년 7월에 광주군 서양면 이동리인 출생지에서 주막업을 경영하고 있었던 자로서 그 영업 중, 거처·성명을 알 수 없는 여러 사람들로부터,

“한국은 일본의 보호국이 되어 대소의 관리에 일본인을 임용하여 장차 한국의 멸망을 가져오게 하고 있다.”

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신문기사 또는 연설 등에 의하여 감동한 것 등의 여부를 묻건대,

“연설을 들은 적이 없다. 손님들의 말을 들은 바에 의하면, 매일의 신문에 의하여 우리나라의 멸망을 우려하는 기사를 보고 이를 알고 지금에 있어서 구하지 않으면 드디어 도리가 없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그 신문이 어떤 신문이었던가는 이를 듣지 않았다고 한다.

양진여는 어린 시절, 능주의 유학자에게서 학문한 적이 있었다. 성장함에 기꺼이 공자의 도를 배우고 있었다고 한다. 고로 한국인의 보통 이상의 학식이 있는 것 같다.

비도의 수괴가 된 동기는 앞의 내용처럼 사람들의 말하는 바에 감동하여 의병을 일으켜서 현정부를 전복하기 위하여 대신들을 척결하고, 이어 대소의 일인 관리를 살육하며, 또, 각지에 침입하고 있는 일본인을 쫓아내기 위하여 융희 2년 음력 6월 17일경 스스로 의병을 모집하는 격문 5장을 만들어서 광주군의 각처에 붙였다고 한다. 그리고 겸하여 음력 6월 22일 저녁 광주군 삼각산 죽청봉(竹靑峰)에 이르러 보니, 모인 자가 30여 명이었다고 한다. 따라서 다음의 내용으로 연설을 하였다고 한다.

“우리나라가 일본의 보호를 받게 되어 대소의 관리에 일본인을 임용하는 것은 이제 우리나라의 멸망을 가져오게 하는 것으로, 그 원인은 현정부의 대신들이 현재의 달콤한 자리에 빠져서 나라의 존망에 대해서는 개의치 아니 하는 것으로 의병을 일으켜서 빨리 현 대신들을 척결하고, 이어 일본인을 쫓아내어 독립국으로 복원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이에 동지들을 모집한 것이라고 한다.

모임에 참여한 일동은 그 뜻에 동의하고, 수괴로 양(梁)을 추대하고, 그 뜻을 이루기를 바란다고 하여, 이를 쾌히 수락하였다. 그날 이후 적어도 3백 명에 도달하기까지 모집하기로 하고, 점차 행동에 착수함과 함께 모집에 노력하는 협의를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 때 참여한 자들 중, 휴대한 화승총 25정이 있었으므로 이를 무기로 하여 행동을 시작하여 광주 기타의 각 군에 횡행하여 오직 병력의 충실에 온 힘을 쏟은 바 있었으나, 관헌들의 장애를 받아 뜻과 같지는 않았지만, 더욱 부하를 정려(精勵)하여 병들의 사기 진작에 힘쓰고 있었던 바, 그 해 10월에 이르러 불행히도 왼손에 종기가 발생하여 행동할 수가 없어서 부하 박 아무개에게 (의병장을) 계승시키고, 필히 당초의 목적을 관철하기로 하고 물러나서 잠복하기에 이르렀다고 진술하였다.

병력 3백 명에 도달한 다음에는 이로써 목적을 이루려고 할 계획이었느냐고 물으니, 부하의 충실을 기다려서 각지에서 활약 중인 수괴에게 뜻을 전달, 통하여 대거 경성에 이르러 거사할 예정이었다고 답하였다.

 

이상은 진술의 개요이나 양(梁)의 아들 양상기란 자는 광주경찰서에서 순사로 봉직하고 있었던 융희 2년 4월 22일, 부정행위(총기를 빼돌림-필자 주)로 면직이 된 후에는 아버지와 같이 폭도의 모집을 담당해 오다가 양(梁)이 물러난 후 이어 수괴가 된 것은 수사상의 사실로서 양(梁)의 진술이 진실이 아님은 의심을 필요치 아니하는 바이다.

 

3. 생포 또는 귀순에 관하여 느낌 또는 의견

(의병장에서) 물러나 잠복하면서 박(朴:양진여 의진을 인수한 의병장-필자 주)의 행동 여하에 관하여 주목하고 있었는데, 아직 목적의 일부도 관철할 기회를 갖지 못한 채 감옥에 갇힌 몸이 되어 죽음을 각오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은 깊은 유감으로 생각하는 바이다.

지금의 상황으로서는 도저히 그 목적을 이룰 가망이 없다고 생각한다. 죽음은 원래 기약한 것이나 계획이 이루어지지 않고는 눈을 감을 수가 없다고 한다.

 

4. 인솔 또는 지휘한 의병의 인원과 그 성쇠

(의병장에서) 물러날 당시 부하의 수는 35명이었는데, 지금은 그 인원을 알 수 없다고 답하였다. 수사상으로부터 본 바에 의하면, 점차 감소하여 침체되고 쇠퇴한 것 같다.

 

5. 주된 근거지 혹은 주로 출몰한 지역

광주군을 주된 근거지로 하여 담양·창평·장성의 각지에 출몰하였다.

 

추가로 피고의 행위는 형법대전 제195조에 해당하는 것으로 9월 1일, 광주지방재판소에 송치하였다.

 

 

♣ 판결

 

전라남도 장성군 갑향면 향정리 주막업

피고 양진여(梁振汝) 51세

 

위 내란 및 강도 피고 사건으로 명치 42년 12월 13일 광주지방재판소에서 피고를 교수형에 처한 판결에 대하여 피고로부터 공소를 신립하였기 본원은 검사 삼촌일루(杉村逸樓)의 간여로 다음과 같이 판결한다.

 

주문

원 판결을 취소한다.

피고를 교수형에 처한다.

 

이유

피고는 융희 2년 7월 20일 경 정사를 변경할 목적으로 내란을 일으킬 것을 기도하고 전라남도 광주 군내에서 격문을 뿌리고 동지 약 30명을 모집하여 수괴가 되고 총 25정을 휴대하고, 동일부터 동 3년 3월 경 까지의 사이에 동일한 의사를 계속하여 위 부하와 함께 군량 군자금 등은 박성일(朴聖日)·김일지(金壹之), 기타의 인민으로부터 징발하면서 동도 광주·담양·장성 등의 각 군내를 횡행하고 동 2년 11월 중 광주군 대치면(大峙面)에서 수비대와 수회 교전하여 내란을 일으킨 것이다.

위 사실은 경부, 아울러 검사의 피고에 대한 각 신문조서, 윤평원(尹平元)의 청취서 등본, 안판구(安判九)·박성일(朴聖日)에 대한 검사의 각 신문조서, 안판구·김익지(金益之)·김처중(金處中)의 3명에 대한 동 신문조서, 순사 산본호태랑(山本好太郞)의 보고서(융희 3년 3월 8일부) 보병 제14연대 제2대대의 통보서(명치 41년 11월 26일자)의 등본, 동대의 통보서(동월 28일자)의 사본에 첨부된 전투 상보서·포로 심문 보고서·원심 심문조서, 아울러 피고의 당 법정에서의 공술에 의하여 그 증빙이 충분하다.

법률에 비춰보니, 위 피고의 소위는 형법대전 제195조에 해당한 범죄가 되므로 동조에 의하여 피고를 교수형에 처한다.

그런데 원 판결은 전시 사실을 폭동이라 인증하고 그 법조를 적용한 것은 부당할 뿐 아니라 위 박성일·김익지로부터 군자금을 징발한 것은 내란죄의 소위 중에 포함하여야 되는 데 각기 독립된 강도죄라고 인정하고 그 법조를 적용하여 처단한 것은 부당한 처사여서 결국 피고의 공소는 이유가 있다는 데에 귀착하므로 민·형소송규칙 제33조에 의하여 주문과 같이 판결한다.

 

 

♣ 판결 명치 43년 형상(刑上) 제46호

 

전라남도 장성군 갑향면(甲鄕面) 향정리(杏亭里)

피고(주막업) 양진여(梁振汝) 51세

 

위 자에 대한 내란 및 강도 피고 사건으로 대구공소원에서 피고를 교수형에 처한 제2심 판결에 대하여 피고로부터 상고를 신립하였기 본원은 검사 선정차랑의 의견을 참고하고 다음과 같이 판결한다.

 

주문

본건 상고는 이를 기각한다.

 

이유

본건 상고의 유지는 상고인은 군중을 집결시키고 폭동을 하였으나 감히 타인을 살상한 사실이 없고, 또 타인의 금품을 탈취한 사실도 없었는데 교수형에 처한다는 선고를 한 것은 위법이니 형법대전 제677조를 적용할 만하다고 사료한다는 것인데, 여기 대해서 심사한 즉, 원심은 적법한 증거에 의하여 상고인은 정사를 변경할 목적으로 내란을 일으키려고 기도하고 동지 약 30명을 모집하여 그 수괴가 되어 총기를 휴대하고 한국 융희 2년 7월 20일 경 부터 동 3년 3월 경 까지의 기간에 박성일(朴聖日)·김익지(金益之), 기타 인민에게 양식 군자금 등을 징발하여 전라남도의 각지를 횡행하고, 동 3년 11월에는 광주군 대치면(大峙面) 등지에서 수비대와 수회에 걸쳐서 교전하여 내란을 일으킨 사실을 인정하여 형법대전 제195조를 적용하여 처단한 것이므로, 본 상고 논지는 원원의 직권에 속한 사실의 인정을 부당하다 하고 자기의 주장한 사실에 입각하여 법률의 적용을 논난한 데에 불과하므로 그 이유가 되지 못함은 물론이다. 그리하여 본원은 민·형소송규칙 제43조·제33조에 좇아 주문과 같이 판결한다.

 

 

양상기(梁相基)

1883.10.10.~1910.8.1

 

전라남도 광주군 서양면 이동(泥洞) 출신이다.

의병장 양진여의 아들로서 부자가 함께 토왜 의병전쟁에 투신하여 1909년의 소위 ‘남한대토벌작전’에 희생되어 교수형 선고를 받고 순국하였다.

양상기는 경성의 시위대 병사 출신으로 1907년 8월의 군대 해산으로 광주경찰서에 근무하게 되었으나 부친 양진여(梁振汝)가 의병장으로 투쟁하고 있었으므로 파면되었다.

일본 경찰조서에 따르면,

“양상기는 1908년 4월까지 광주경찰서에서 순사로 봉직한 자이나 평소 결근을 임의로 하여 직무에 불성실한데다가 실부가 폭도수괴 였으므로 4월 23일 순사를 파면하였다.”

라고 파면 이유를 밝히고 있다.

그런데, 양상기는 평소 실부 및 의병장 권택(權澤) 등과 기맥을 통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군 경험과 경찰관을 거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파면 즉시 80명의 의병을 조직하여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양상기의 의병투쟁은 이듬해까지 계속되어 호남에서는 가장 강력한 부대의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

일본 경찰 조서에 나타난 활동 상황은 아래와 같다.

909년 2월 9일 30명의 병력으로 담양군 우산면 신기리 거주 안판구(安判九)로부터 군자금을 제공받았으며, 같은 날 다른 일부는 창평군 지곡리 거주 김 아무개를 비롯한 동민으로부터 군자금을 거출하였다. 2월 26일, 동복군 외남면 동천동에서 다시 군자금을 거출 하였으며, 같은 달 담양군 서기 한응길을 체포하고 군자금을 제공하게 하였다.

이 밖에도 양상기를 강도범으로 몰아세우기 위한 일본경찰의 취조서는 1909년 4월 패전하기까지 금품 갈취의 행적으로 왜곡하고 있으나 일경에서의 그의 언행은 의병장으로서 부끄러움 없는 확고한 신념을 피력하고 있다. 즉 그는,

“일제는 한국을 보호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일본인을 한국의 관리 또는 거류민으로 속속 들여보내어 끝내는 한국을 식민지화하려고 하고 있으며 한국의 내정에 간섭하여 한국을 탈취하려 하고 있다. 따라서 일본인은 한 사람도 남김없이 한국에서 추방하려는 것이 나의 목적이었다.”

라고, 의병 동기를 밝히고 귀순할 의사가 없느냐는 물음에,

“귀순할 뜻은 추호도 없으며 죽음이 있을 뿐이다. 만일 살아날 수 있다면 다시 의병을 일으켜 일제 침략자와 싸우겠다.”

이처럼 의병장으로서 끝까지 투쟁 의지를 밝힌 양상기는 광주․동복․담양․장성․창평 등지에서 수없이 일본군을 공격하다가 마침내 1909년 4월 담양군 정면 덕곡리에서 패전하고 체포되었던 것이다.

1910년 대구감옥에서 소위 내란·폭동 등의 죄목으로 교수형을 받고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77년에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바로잡아야 할 내용

1. ‘『한국독립운동사』’에 나타난 그의 행적은 심남일·안규홍·조경환 의병장의 업적에 부족한 점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훈록의 내용은 빈약하다.

2. 서훈이 그의 의진에서 활약한 부장(副將·部將)보다 낮거나 동급인 것은 부친이 ‘독립장’을 받았기에 그보다 한 단계 낮은 ‘애국장’으로 추서한 것 같다.

 

 주요 행적 찾기

 

 

♣ 광비발(光秘發) 제116호

융희 3년 2월 10일

광주경찰서장 경시 촌상칙정(村上則貞)

내부 경무국장 송정무(松井茂) 앞

 

폭도에 관한 건

 

오늘 순사 산목호태랑(山木好太郞)으로부터 다음의 보고가 있었다.

 

1. 수괴 양상기가 인솔하는 약 30명의 의폭가 2월 9일 오전 1시경, 담양군 우치면 신기촌에 사는 안판구(安判九: 전 진위대 정교 조장) 집에 침입하여 그 사람을 납치하여 갔다는 것을 탐지하고 취조한 바, 그것이 사실로서 그 가족과 마을 사람 등은 계속 수색하였으나 행방불명이었다고 한다.

2. 수괴 양(梁)은 흑색의 옷차림에 서양 칼을 휴대하고 있었다. 그리고 폭도는 단발 양총 2정, 천보총 4정, 화승총 20정, 서양 칼 3정을 휴대하였고, 그들은 지난 겨울 이래로 광주군내 삼각산 부근 일대의 지방을 배회하고 있었다고 한다.

 

 

♣ 전남에 있어서의 폭도 피해 및 그 정황

목포 일본인 상업회의소

 

101. 2월 28일, 양상기가 인솔하는 적도 약 73명이 옥과군 군내면 목동에 집합한다는 보고에 접하고, 광주로부터 토벌을 위해 출발하였다.

 

 

♣ (1909년) 3월 14일 오후 8시 옥과분견소 상등병 2명, 보조원 4명이 동복군 외북면 서유촌에서 수괴 양상기가 이끄는 적도 15명과 충돌, 10명을 죽이고 화승총 6정, 권총 1정, 칼 1자루, 기타 잡품을 노획했다.

 

 

♣ 광경비수(光警秘收) 제223호

융희 3년 3월 17일

광주경찰서장 경시 촌상칙정(村上則貞)

내부 경무국장 송정무(松井茂) 앞

 

3월 16일부 동복주재소 순사 소천장차랑(小川莊次郞)의 보고에 의하면, 소천 순사와 한인 순사 2명은 그곳의 분둔 수비대 병사와 공동으로 적도의 소재를 탐색 중, 3월 14일 수괴 양상기는 부하 80명을 인솔하고 12일 밤 창평군 외남면 이치로 향한 것을 탐지하고, 그곳에 급행하여 그 부근 일대를 엄중하게 수색한 바, 그들이 통과한 것은 사실이나 그 후의 행방은 불명이라 한다.

 

 

♣ 광경비수(光警秘收) 제242호

융희 3년 3월 23일

광주경찰서장 경시 촌상칙정(村上則貞)

내부 경무국장 송정무(松井茂) 앞

 

폭도 출몰과 군 주사 납치의 건

이달 20일 오후 4시경, 담양군 주사 한응길(韓應吉)은 광주에 출장 도중, 담양군 예교 부근에서 폭도 28명과 만나 창평군내로 납치당했다는 정보에 의하여 담양주재소 순사 2명은 그곳 수비대 및 헌병대와 협력, 직시 이를 추적하고, 또 광주수비대로부터 하사 이하 6명이 당 경찰서 순사 3명과 공히 수색을 위하여 급행하였다. 한(韓) 주사는 21일 오후 6시 반경, 무사히 담양으로 돌아왔다. 그날 우연히 동양척식회사 이사 임시장(林市藏) 씨 일행이 광주로부터 담양을 향하는 길에 본직도 시찰 겸 순시를 겸해 순사 5명을 인솔하고 그 일행과 같이 담양에 이르렀으므로 군 주사에 대하여 사실을 취조한 바,

 

一. 그 적도는 수괴 양상기가 인솔하는 약 40명으로 그 중, 25명은 한국총을 휴대하였다고 한다.

一. 적도는 한(韓) 주사를 납치, 창평군 및 담양군 내의 산중을 밤낮으로 끌고 다니면서 창평군 장남면의 산중에서 한 주사를 협박하는 도중, 우연히 본직 등 일행이 경계 행진을 취하고 왔음을 인정하고, 추격대라 생각하고 한 주사를 방치하고 낭패하여 각자 후방 산중으로 도주하였으므로 한 주사는 무사 귀환할 수 있었다고 한다.

 

 

♣ 전남에 있어서의 폭도 피해 및 그 정황

목포 일본인 상업회의소

 

14. 3월 5일 양진여 부자의 폭도 약 50명이 장성군 수월면 향정리에 와서 5일 저녁밥을 계약한 후 갔다.

57. 3월 12일, 수괴 양상기는 부하 80명을 인솔하고 창평군 외남면 이치를 통과하여 남방으로 갔다.

 

 

♣ 광경비수(光警秘收) 331호

융희 3년 4월 16일

전라남도 경찰부장 경시 촌상칙정(村上則貞)

내부 경무국장 송정무(松井茂) 앞

 

폭도의 행위에 대하여

 

4월 26일 오후 7시경, 적괴 양상기는 부하 약 30명을 인솔하고 광주군 대치면 문내리에 내습하여 각처에 보초를 배치한 후 마을 사람들을 향하여,

“너희들은 헌병의 출장을 청하고, 가옥을 제공하였음을 들었으므로 이를 불태움은 물론, 면장·동장을 총살할 것이다.”

하고, 마을의 이(李) 씨의 소유 가옥인 쌍계리의 실내에 석유를 끼얹고 연료를 충분히 쌓고는 이에 방화하고, 수십 발의 사격을 하여 마을 사람들을 위협하고는 오후 9시경 갔다고 한다.

이 가옥은 이번 출장소에 충당하고자 지난번에 광주헌병분견소와 소유자간에 차입의 예약을 한 것으로 적도는 이를 문지(聞知)하고 헌병의 출장을 방해하기 위하여 이런 참혹한 피해를 가한 것 같다.

이러한 정보에 의하여 광주헌병분견소에서는 토벌을 위하여 출장하였으나 이미 어디론가 가서 그 그림자를 볼 수 없었다.

 

 

♣ 전남경비발(全南警秘發) 785호

융희 3년 5월 2일

전라남도 경찰부장 경시 촌상칙정(村上則貞)

내부 경무국장 송정무(松井茂) 앞

 

폭도 출몰의 건

 

폭도 37명이 재무서장 일행을 저격하고 도주하였다. 경상 1명이 있다. 추적하였으나 그 종적을 잃었다.

 

1. 5월 2일 오전 9시부터 세금 체납자 독촉을 위하여 광주재무서장 이용규 이하 주사, 소사, 등 4명 외에 금융조합원, 은행원 등은 순사 2명의 호위에 의하여 광주군 석저면에 이르는 도중, 오전 10시 50분, 석저면 이치에 이르자 수괴 불명의 폭도 수십 명이 잠복해 있다가 일행이 고개로 오르는 것을 기다렸다가 이들을 저격하였다. 이에 사령 1명이 경상을 입었고, 호위 순사는 즉시 응전하였으나, 불리한 경우에 있는 바, 급보를 수비대·헌병대에 통보하고, 경부 임화일(林和一) 이하 순사 9명을 급행하게 하였다.

 

2. 광주수비대로부터 장곡천(長谷川) 중위 이하 10명, 헌병분견소로부터 석교(石橋) 오장 이하 10명이 추격을 위하여 급행한 바, 폭도는 이미 도주한 뒤여서 경찰관 한 부대는 수비대·헌병대와 협력하여 폭도의 도주로를 추적하였다.

재무관 일행은 이미 광주 부근에 철수하였으나 호위 순사 2명은 조난지 부근의 후방 경계에 임하여 응원 부대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3. 이에 다시 부서를 정하고 폭도의 도주 방면을 빈틈없이 수색하여 광주군내로부터 창평군·동복군 경계 지역까지 추적하였으나, 산중에서 마침내 그 종적을 잃었다.

 

4. 적도의 수괴는 양상기이다. 토박이들의 말에 의하면, 적의 수는 37명이고, 갈색 혹은 흑색의 복장을 하고 대부분은 화승총을 휴대하였다고 한다.

 

 

♣ 광경비수(光警秘收) 396호

융희 3년 5월 10일

전라남도 경찰부장 경시 촌상칙정(村上則貞)

내부 경무국장 송정무(松井茂) 앞

 

폭도에 관한 건

 

5월 9일부 창평주재소 순사 간부겸길(肝付兼吉)의 보고에 의하면,

一. 수괴 양상기는 부하 약 40명(그 중 한총 15,6정, 칼 10자루를 휴대) 가량이라고 한다. 이달 8일 오후 10시경, 창평군 가면 상산리 거주 양성거(梁成居)의 집에 들어왔으나, 물품 하나도 얻지 못하고 다시 이장 문창영(文昌永)의 집에 침입하여 엽전 10냥을 약탈하여 도주하였다고 한다.

一. 또 이달 9일 오전 1시경 동군 덕면 성신리장 박근수(朴根秀) 집에 적도 5명이 들어와서 엽전 5냥과 삼베 1필을 약탈하고, 또 그날 오전 4시경 동면 문치리장 김기현(金基鉉) 집에 6명의 적도(그 중 2명은 총기 휴대)가 침입, 동인을 구타하고 세금 30냥을 약탈하고 또 동리에 사는 일진회원 박인규(朴仁圭) 집에서 두루마기 1벌을 약탈 도주하였다고 한다. 이 적도의 수괴는 불명이나 양상기의 한 부류로 사료하고 엄밀 수색 중이다.

 

 

♣ 광경비수(光警秘收) 404호

융희 3년 5월 11일

전라남도 경찰부장 경시 촌상칙정(村上則貞)

내부 경무국장 송정무(松井茂) 앞

 

폭도 출몰의 건

 

5월 6일부 담양주재소 순사 소전방조(小田芳助)의 보고에 의하면,

수괴 양상기의 부하 약 80명은 이달 6일 오전 10시, 담양군 산면 월평리에 침입하였다는 정보를 득하고 소전(小田) 순사는 한인 순사 2명과 그곳 분견소 헌병 7명(그 중 5명은 보조원)과 협력하여 수색을 위하여 그날 오후 4시에 출발하여 해당 지역으로 급행하였다.

적은 산면 월평리에 침입하여 아침밥을 먹은 후 휴식하고, 중식을 완료한 즉시 그 마을에 살던 이상기(李相基)(21세)를 납치, 오늘밤은 동군 광면 광덕리에서 숙박한다고 말하고 갔다고 한다. 따라서 일행은 그 방면에 급행, 수색하였으나 실마리를 얻지 못하였다. 혹은 장성군 약수정 방면으로 도주한 것같이 사료되나 추급의 가망이 없음으로써 이를 중지하고 그날 밤 11시 각자 귀환하였다.

또 수괴 양상기의 부하로 사료되는 적도 2명(각자 화승총 휴대, 흑색 순사용 옷을 입고 수식양手拭樣 것으로 두건頭巾을 하고 있었다)이 5월 8일 오전 4시경 담양군 서면 봉산리(담양 북방 약 반 리)에 침입한다는 보고에 접하고 소전 순사는 한인 순사 2명, 동지 헌병 하사 1명, 헌병 5명(그 중 보조원 4명)과 통역 1명과 그날 오전 8시 수색을 위하여 출장하였다.

적은 이미 봉산리 거주 한순택(韓順澤)의 장남 한동석(韓東石)(17세)을 납치 도주한 후였다. 따라서 부근을 수색 중, 산면 면장의 말에 의하면, 약 100명의 적도(수괴 불명)가 월평리 부근에 집합하고 있다고 한다. 일행은 급속 그 방면의 비밀 조사를 마쳤으나 득한 바 없고, 또 일설에 동군 천면 두지동에 약간의 적도가 있는 것을 탐지하고 수색하였으나 조금도 얻은 바가 없이 그날 오후 5시에 귀환하였다.

 

 

♣ 광경비수(光警秘收) 404호

융희 3년 5월 11일

전라남도 경찰부장 경시 촌상칙정(村上則貞)

내부 경무국장 송정무(松井茂) 앞

 

적도 조사의 건

 

5월 15일부 창평주재소 순사 보고 요지

 

수괴 양상기 이하 약 30명(수괴는 군도를 휴대하고 모두 황색의 옷을 입었다. 화승총 약 22정, 군도 2자루, 단 한국제)은 5월 14일 오후 8시경, 창평군 가면 상산리 거주 양성거(梁成居)(39세)(부호)의 집에 침입하여 그 사람의 아내를 납치하고, 물품을 강탈해 갔다고 하였다. 이에 주재소 순사 3명(그 중 한인 2명)은 그곳 분견대 헌병 6명(그 중 보조원 4명)과 협력하여 그날 오후 10시 30분, 조사를 위하여 현장에 급행하였다.

적은 양성거의 집에 침입하였으나 당시 그는 부재중이었으므로 그의 아내 김소사(金召史)(43세)를 납치하여 동군 북면 절산리에 이르러 금품을 강청하였으나 얻지 못하고, 겨우 갓 1개, 조기 24마리를 절취하여 달아났다고 한다. 따라서 그 부근의 조사를 완료하였으나 단서를 얻지 못하고 이튿날 15일 오후 3시 귀환하였다고 한다.

 

 

♣ 광경비수(光警秘收) 404호

융희 3년 5월 11일

전라남도 경찰부장 경시 촌상칙정(村上則貞)

내부 경무국장 송정무(松井茂) 앞

 

적도 토벌의 건

 

5월 18일부 전보 속보(續報)

 

수괴 양상기 이하 약 40명이 5월 16일 밤, 담양군 정면 덕곡리에 침입하여 지금도 머무르고 있는 바, 마을 주민 김수만(金守萬)의 통보에 의하여 담양주재소 순사 설전광태랑(說田光太郞)은 한인 순사 3명과 그곳 분둔(分屯) 수비대 군조 이하 6명, 헌병 상등병 2명, 보조원 4명과 협력하여 토벌을 위하여 17일 오전 9시 20분, 그곳으로 급행하였다.

일행은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 각 부서를 정하고 순사와 헌병은 적이 집합하고 있는 덕곡리의 후방을 우회하여, 수비병은 직진하였다. 그리고 일행은 예정과 같이 행동하여 17일 정오경 각 부대가 보조를 맞춰 목적지에 접근하였다.

적은 거의 포위되었고, 그들 일부는 마침 부근의 대밭으로 퇴각하고 있을 때였으므로 각 부대는 즉시 이를 공격하였던 바, 적은 완강히 저항하며 쉽게 물러날 기색이 없었다. 따라서 순사는 수비병 2명과 협력하여 적이 근거지로 삼아 지키려는 대밭에 돌진하여 이를 궤란시키고 2명을 죽였다.

이 전투는 5월 17일 정오에 시작하여 오후에 끝을 내었는데, 적의 전사자는 23명이었다. 화승총 17정, 칼집 1개, 탄약 약간, 잡품 다수를 노획하였다.

적은 양상기가 인솔하는 약 35명으로 양총 3정, 화승총 32정을 휴대하고 그 다수는 다갈색의 한복을 입고, 또 양상기는 엽총을 휴대, 도주한 것 같다.

각 부대의 소모탄은 725발로 그 중 경찰의 분은 기총탄 70발, 구라총탄 55발이다.

전투 종료 후 계속 부근을 수사하여 일몰 후 그곳을 철수하여 이튿날 18일 오후 2시 30분 각자 귀환하였다.

♣ (1909년) 5월 17일 오전 9시 수괴 양상기(梁相基)가 이끄는 약 40명의 비도가 담양군 덕곡리에 내습했다. 동지 주재소 설세(說田) 순사 이하 3명이 수비병 6명과 함께 급히 출동, 정오 무렵 3면을 포위 공격하여 23명을 죽이고 이를 격퇴했는데, 화승총 17정, 칼 1자루를 노획했다.

 

 

♣ 광경비수(光警秘收) 470호

융희 3년 5월 31일

전라남도 경찰부장 경시 촌상칙정(村上則貞)

내부 경무국장 송정무(松井茂) 앞

 

적도 양민 살해 기타의 건

 

一. 수괴 양상기가 인솔하는 적도 약 50명(각자 한국총을, 그 중 2명은 일본총을 휴대)이 5월 27일 밤 12시경, 창평군 가면 상산리에 와서 까닭 없이 마을 사람들을 구타하고 그대로 갔다는 정보를 얻고 조사 중인 바, 28일부 창평주재소로부터 보고가 있었다.

一. 수괴 불명의 적도 약 30명이 5월 24일 오후 8시경 곡성군 곡면 조사리 거주 주막업 배덕명(裵德明)(60세) 집에 침입하여 동인을 그 마을 밖으로 끌고 가서 참수 즉사시키고 구례 가도로 갔다고 한다. 적은 다갈색 군모를 쓴 자도 있고, 모두 화승총을 휴대하고 있었다고 한다. 동군 상계리수비대는 즉시 출동, 엄밀히 수색 중인 바, 26일부 곡성주재소 순사로부터 보고가 잇었다.

一. 수괴(양상기인 듯) 불명 흑색 한복을 입은 적 약 50명(그 중 40명가량이 한총 휴대하고 다른 사람은 장검을 휴대하였다)이 5월 29일 밤 오전 1시경 창평군 내북면 연동리 거주 정(鄭) 참봉 집에 침입, 엽전 10냥을 탈취, 1시간여 휴식하고 갔다는 보고에 접한 것을 창평주재소 순사로부터 보고가 있었다.

 

 

♣ 광경비수(光警秘收) 487호

융희 3년 6월 7일

전라남도 경찰부장 경시 촌상칙정(村上則貞)

내부 경무국장 송정무(松井茂) 앞

 

피납거자(被拉去者) 귀환의 건

 

수괴 양상기 등에게 납거된 이병성(李炳星)(6월 2일)과 김형배(金亨培)(6월 3일)는 광주군 오치면 삼각산 기슭에 연이어 나가서 이병성은 구타를 당하고 출금을 강요당한 후 각자 풀려나 집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수괴는 양상기로 부하 약 20명(그 중 15명은 총을, 2명은 군도를 휴대)이었다고 한다.

이에 앞서 6월 3일, 수색을 위하여 출장한 창평 주재 헌병·경찰은 창평군 가면 예교에서 담양 분둔 수비대 보병 3명이 적도 1명(호남창의소의 인장 1개와 일본제 호루라기 1개 휴대)을 체포하였는데, 서로 만나서 상황을 교환한 후 창평군 고현내면 부근의 수색을 하였으나 얻은 바 없이 4일 오전 3시에 귀환하였다.

 

 

♣ 전보

7월 5일발

광주경찰서장

경무국장 앞

 

도통장(都統將) 안판구(安判九)

 

양상기 외 1명이 담양군내에 잠복하였음을 탐지하고 서원(署員)을 파견하여 체포하였다.

 

 

♣ 광경비수(光警秘收) 제578호

융희 3년 7월 6일

전라남도 경찰부장 경시 촌상칙정(村上則貞)

내부 경무국장 송정무(松井茂) 앞

 

적도 체포의 건

7월 5일 전보 속보(續報)

 

수괴 양상기의 부하로 도통장(일찍이 도포장이라고 한 것은 잘못) 안판구(安判九:전 진위대 정교 조장 30세)는 군대해산 후 담양군 우치면 신기리에 이주하여 양(梁) 수괴의 부하로서 항상 창평·동복·화순 등 각 군에 출몰한 사실이 있다. 수색 중 그 자택에 잠복하고 있음을 탐지하고는 7월 5일 오후 8시 순사대는 교습 중의 한인 순사 13명을 인솔하고 출장 수색의 결과 그를 체포하고 현재 취조 중이다.

 

 

♣ (1909년) 9월 21일 광주경찰서 신(申) 경부 이하 3명이 양상기의 후군장 이문거(李文擧)를 체포했다.

♣ 고비수(高秘收) 제5891호의 1

융희 3년 10월 20일

통감(좌죽 佐竹), 내부대신·차관, 총무장관, 헌병대장, 주차헌병관, 외파무관

경무국장

전라남도 광주경찰서장으로부터 다음의 전보가 있었다.

 

비도수괴 양상기의 후군장(後軍將)이라고 인정되는 안영숙(安永淑)(28세)이 담양군 우이면에 잠복함을 탐지하고 금일 오전 6시에 광주경찰서의 손에 체포되었다.

 

 

♣ 광경비발(光警秘發) 제907호

융희 3년 10월 20일

광주경찰서장 경부 목뢰이좌위문(牧瀨伊左衛門)

내부 경무국장 송정무(松井茂) 앞

 

폭도 체포의 건

 

수괴 양상기의 후군장이었던 담양군 우치면 양지리 거주 안영숙(安永淑)(28세)이 지난 19일 밤, 동면내에 잠복하였음을 탐지하였다. 따라서 즉시 경부 신태현(申台鉉) 이하 일인 순사 1명, 한인 순사 2명으로 하여금 이를 체포하게 하였다.

처음 적은 양지리에 잠복하였다고 하는 것이었는데, 일행이 그 마을을 수색했지만 발견하지 못했는데, 열심히 조사한 결과, 그는 장소를 옮겨서 동면 월전리 정준화(鄭俊化)의 집에 잠복한 것을 탐지하고, 다시 그 집을 포위하여 드디어 그를 체포하기에 이르렀다.

 

 

♣ 광경비발(光警秘發) 제907호의 1

융희 3년 10월 29일

광주경찰서장 경부 목뢰이좌위문(牧瀨伊左衛門)

내부 경무국장 송정무(松井茂) 앞

 

폭도 송치에 관한 건

광경비발 제907호의 속보(續報)

 

이달 19일 체포한 폭도 안영숙(安永淑)을 취조한 바, 피고는 본명을 안암우(安岩于)라고 칭하고, 올해 음력 정월 보름날, 양상기가 부하를 인솔하고 안영숙이 사는 마을을 통과하는 것을 보고, 그를 장하다고 하고, 스스로 그 부하로 들어가서 얼마 후 포군의 십장(什長)이 되었다. 그는 양상기의 팔과 다리가 되어 창평·담양과 그 인근 지역에서 활동하였는데, 그 동안의 노력을 보면, 담양군 양정리 거주 정상화(鄭相華) 외 5개소에서 강도 행위가 있음을 신립하고, 증거도 완비하였음에 대하여 형법대전 제593조 제1항에 해당하는 피고 사건으로 오늘 광주지방재판소 검사국에 송치하였다.

 

 

♣ 광경비수(光警秘收) 제974호

융희 3년 11월 5일

광주경찰서장 경부 목뢰이좌위문(牧瀨伊左衛門)

내부 경무국장 송정무(松井茂) 앞

 

폭도 체포의 건

 

폭도수괴 양상기의 도선봉장(都先鋒將) 조사윤(曺士允:일명 성신聖信 또는 참봉參奉)(32세)와 양상기의 부하 차식록(車植綠)(20세)이 양민을 가장하고 창평군 동산면에 잠복하였음을 탐지하였다. 따라서 11월 4일 일·한 순사 4명을 출장시켜서 조사윤은 창평군 북면 동산촌에 거주하는 형 조덕삼(曺德三)의 집에서, 차식록은 동군 서면 주진리 주막 김재권(金在權)의 방에서 각각 체포하였다. 취조하건대,

 

조사윤은 창평군 북면 동산촌의 자이고,

차식록은 담양군 우치면 신평리의 자이다.

 

그리고 조사윤은 원래 일진회원이었는데, 융희 원년 적괴 고 김태원의 부하에 투신하여 행동 중, 태원이가 죽자, 양상기의 부하에 참여하여 도선봉장이 되어 전적으로 그 적단의 중추적 인물이었으나, 올해 5월경 일시 적단을 해산하고 차식록과 같이 미꾸라지를 잡아서 이를 팔아 왔으며, 양민을 가장하고 체포를 피하고 있었다고 한다.

 

 

♣ (1909년) 11월 8일 적괴 양상기(梁相基)의 중군장 유병기(劉秉淇)가 구례군에서 광주경찰서원에게 체포되었다.

 

 

♣ 고비수(高秘收) 제1704호

융희 3년 12월 27일

전라북도 관찰사 이두황(李斗黃)

내부대신 박제순(朴齊純) 앞

 

폭도 체포의 건

 

관하 남원경찰서장의 보고에 의한 폭도 체포의 상황은 다음과 같다.

 

전라남도 각 군에서 맹악(猛惡)을 부리며 양민을 괴롭히던 폭도수괴 양상기(27세)는 이달 20일(실제는 18일-필자 주) 남원경찰서 일·한 순사 2명과 남원군 통한방(通漢坊) 즉, 장수군으로 통하는 도로에서 부딪치자, 그 거동이 심히 의심스러워 정지시키고자 하였던 바, 그는 그 소리를 듣자 도주하였으므로 추적하였으나 미치지 못하였다. 따라서 직시 휴대한 총으로 후방으로부터 2발을 발포하여 위협을 한 결과, 이에 공포를 느껴 주저하고 있을 때, 마침 본군 갈치면 월천리 이장 김익성(金益成) 나와 협력하여 통한 방도리 밭에서 어려움 없이 체포하였다.

그를 취조한 결과, 폭도수괴 라고 명료하게 말하였다. 그런데, 오늘 광주경찰서로부터의 전화에 의하면, 그는 그곳 경찰서 관내에서 심히 유명하고 세력 있는 부하 1백 2,30명을 이끄는 폭도수괴 로 맹악을 떨치며 양민을 괴롭히고 있었던 자이므로 인도(引渡)할 것을 의뢰하여 올 정도의 자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의뢰에 응할 사정이 없으므로 그런 바를 회답하여 두었다.

 

 

♣ 한헌경(韓憲警) 을(乙) 제3호

명치 43년 1월 4일

한국주차헌병대장 신원승조(榊原昇造)

내부 경무국장 송정무(松井茂) 앞

 

통보

 

전북 남원군내에서 적괴 양상기를 체포하였다.

 

12월 18일, 영산포헌병분대의 변장수색대 상등병 2명, 보조원 1명, 밀정 1명은 적괴 전해산(全海山)을 체포하고 인치 도중, 남원의 동방 약 1리 지점(촌명 불명)에 이르렀을 때, 그 부근에 적괴 양상기가 참복하고 있음을 탐지하고 상등병 1명, 보조원 1명과 밀정은 그를 체포하려 하였으나, 양(梁)은 일찍이 이를 알고 도주하였다. 따라서 추적 중에 밀정은 양 수괴가 도주하였음을 인정하고 마을 사람들에게 조력을 구하여 겨우 이를 체포하였으나, 호송 인원 부족으로 양상기의 유치방(留置方)을 남원경찰서에 촉탁(囑託)하여 두고 전해산은 인치하였다.

 

 

♣ 판결

 

전라남도 광주군 서양면(瑞陽面) 이동(泥洞)

피고 양상기(梁相基) 28세

 

전라남도 구례군 마산면(馬山面) 청천리(淸川里)

피고 유병기(劉秉琪) 28세

 

위 피고 양상기에 대한 내란 강도 방화 및 살인 사건과 피고 유병기에 대한 폭동 강도 사건에 관하여 명치 43년 3월 29일 광주지방재판소에서 각 교수형에 처한다고 선고한 판결에 대하여 피고 양 명으로부터 공소를 신립하였기에 본원은 검사 삼촌일루(杉村逸樓)의 입회로 합병 심리를 수행하고 다음과 같이 판결한다.

 

주문

본건 공소는 이를 기각한다.

 

이유

제1. 피고 양상기는 융희 2년 5월(음력 4월) 경에 총 약 30정을 휴대한 도당 약 40명을 인솔하고 친히 수괴가 되어 동 3년 6월까지 동일한 의사로 전라남도 각 광주·동복(同福)·담양·장성·창평 등 군내에 횡행하여 폭동의 행위를 하였고,

제2. 피고 양상기는 동 3년 3월 20일에 총 약 25정을 휴대한 도당 약 40명과 함께 동도 담양군 애교(艾橋) 부근 길 위에서 동군 군주사 한응길(韓應吉)은 붙들어 동인을 동도 창평군 서면 주진암(舟津岩) 길 위에서 연행하여 동일 동인을 구타하여 혹은 발포 위협하여 동인의 휴대한 시계 외에 3점을 겁취하였고,

제3. 피고 양상기는 동년 4월 26일 오후 7시 경에 도당 약 30명과 함께 동도 광주군 대치면(大峙面) 본촌(本村)에 도달하여 그 마을 이씨의 공유 재산인 가옥 쌍계당(雙溪堂)을 동인이 일본 헌병에게 빌려주는 것은 잘못이라 하고 석유를 뿌린 연료를 그 가옥에 가득히 쌓고 불을 질러 그 가용을 소각하였고,

제4. 피고 유병기는 융희 2년 8월(음력 7일) 경에 김태원(金泰元)이란 자가 수괴가 되어 폭동을 일으키는 정을 알면서 그 부하로 투입하여 참모라는 명목으로 도당 약 6백 명을 모아 총 약 4백 정을 수집하고 이 일단의 도당과 함께 동 2년 6월(음력 5월)경까지 동일한 의사를 계속하여 전라남도 영광·함평·장성·나주·광주·창평·담양·동복 등 각 군내에 횡행하여 위 수괴 김태원(金泰元)의 폭동 행위를 방조하였고,

제5. 피고 유병기는 동 2년 10월(음력 9월) 경에 전기 양상기가 다중을 모아 친히 수괴로 되어 폭동을 일으키는 정을 알고 그 부하로 투입하여 참모장이라는 명목의 임무를 맡고 총을 휴대한 도당 약 70명과 함께 동년 3월(음력 2월 경)까지 동일한 의사를 계속하여 동도 장성·담양·광주·창평 등 각 군내에 횡행하여 위 수괴 양상기의 폭동 행위를 방조하였고,

제6. 피고 양명은 동 3년 3월 2일 밤(음력 2월 11일)에 재물을 겁취할 목적으로 총 약 30정을 휴대한 도당 약 40명과 함께 동도 담양군 동면 남산리(南山里)로 난입하여 동리에 거주하는 정준필(鄭準弼) 및 국사윤(鞠士允)을 붙들고 동군 두면(豆面) 연동(蓮洞)으로 연행하여 동소에서 위 양인에 대하여 돈 1만 냥을 지출치 않으면 죽인다고 위협하여 약 3~4일 후에 동소에서 그 마을의 이장 남준여(南俊汝)의 손을 거쳐서 위 양인에게 각각 돈 2백 냥씩 겁취하였고,

제7. 피고 양명은 동년 3월 5일(음 2월 14일)밤에 재물을 겁취할 목적으로 총을 휴대한 도당 약 50여 명과 함께 동도 담양군 목면(本面) 강정리(江亭里)로 난입하여 그 마을 부자 수명을 붙들어 발포 위협한 뒤 한충여(韓沖汝)에게 쇠 돈 3냥 외에 1점과, 김도일(金道日)에게서 돈 40냥 외에 2점과, 서권일(徐權日)에게서 돈 40냥 외에 1점과, 한내진(韓乃珍)에게서 돈 17냥 외에 1점과, 김자삼(金自三)에게서 돈 22냥 외에 1점을 겁취하였고,

제8. 피고 양상기는 동년 4월 11일(음력 윤 2월 21일)에 재물을 겁취할 목적으로 총 약 25정을 휴대한 도당 약 30명과 함께 동도 담양군 목면(木面) 남산리(南山里)로 난입하여 그 마을의 이장 김석필(金石必)에 대하여 군수금을 차출하라고 협박하여 동인에게 돈 1백 50냥을 겁취하였고,

제9. 피고 양상기는 동도 창평군 동서면(東西面) 동산동(東山洞) 거주 정건섭(丁建燮)이가 피고 등 폭도의 행동을 일반 관헌에게 밀고하였다는 사실을 듣고 동인을 살해할 것을 발의하고 동년 6월 17일에, 외에 6명과 함께 총을 휴대하고 동도 동군 동면 성미점(城美店) 김흥옥(金興玉) 집에 진입하여 그 집에 있는 정건섭을 붙들고 동인에게 대하여 너는 우리들의 행동을 일본 관헌에게 밀고함은 옳지 못하다고 질책하며 동인을 동도 장성군 갑향면(甲鄕面) 본정(本亭)으로 연행하여 동일 동소에서 피고가 동인을 총으로 발사하여 죽음에 이르게 하였다.

위의 사실은 광주경찰서에서 한 피고 유병기의 신문조서와 조사윤(曺士允)의 신문조서와 정준필(鄭準弼)·국사윤(鞠士允)·한중여(韓沖汝)의 각 청취서, 담양순사주재소 순사 소전방조(小田芳助)의 수사보고서, 남원경찰서에서 한 피고 양상기의 신문조서, 순창순사주재소 순사 횡산의(橫山義)가 작성한 폭도 양상기의 범죄 조사에 관한 건, 광주분견소장 세소진(稅所進)의 통보 등본, 경시(警視) 촌상칙정(村上則貞)이 작성한 폭도출몰 군주사착거건(郡主事捉去件) 등본, 원심 검사정에서 한 피고 양명 및 조사윤의 신문조서, 증인 남준여(南俊汝)의 신문조서, 원심 공판정에서 한 피고 양명 및 조사윤의 심문조서, 피고 양명의 본 공정 공술에 의하여 증빙이 충분하다.

이를 법률에 비춰보니, 피고 양상기의 제1의 소위는 형법대전 제677조 전단에, 제2의 소위는 동법 제593조 1항 기득재율에, 제3의 소위는 동법 제666조에, 제8의 소위는 동법 제593조 3항 기득재율에, 제9의 소위는 동법 제473조 전단 발의(發意) 및 하수자 율에 해당하고, 피고 유병기의 제4·제5의 소위는 각 동법 제677조 전단에 해당하나 종범이 되므로 동법 제135조에 의하여 각 본율에서 1등을 감하고, 피고 양명의 제6·제7의 소위는 각 동법 제593조 3항 기득재율에 해당한 바, 각각 수죄가 병발하였으므로 동법 제129조에 의하여 피고 양상기는 제9의 죄에, 피고 유병기는 제6의 죄에 좇아 피고 양명을 각 교수형에 처함이 상당하다.

그런 즉 원 재판소에서 전기 사실을 인정하여 전시(前示) 법조를 적용함은 상당하고 피고 양 명의 공소는 그 이유가 되지 않으므로 민·형소송규칙 제33조에 준하여 주문과 같이 판결한다.

♣ 판결 명치 43년 형상(刑上) 제88호·89호

 

전라남도 광주군 서양면(瑞陽面) 니동(泥洞)

피고 양상기(梁相基) 28세

 

전라남도 구례군 마산면(馬山面) 청천리(淸川里)

피고 유병기(劉秉基) 28세

 

위 양상기에 대한 내란 강도 방화 살인 사건과 유병기에 대한 폭동 강도 사건으로 명치 43년 5월 17일 대구공소원에서 언도한 판결에 대하여 각 피고로부터 상고를 신립하였기 본원은 검사 선정차랑(膳鉦次郞)의 의견을 참작하고 다음과 같이 판결한다.

 

주문

각 피고의 상고는 이를 기각한다.

 

이유

각 피고의 상고 취소 요령은 피고 등은 한국의 시운이 날로 기울어져감을 좌시할 수 없어서 이를 회복코자 하는 기대를 가지고 동지를 규합하여 의병을 일으켜 종종 수비병, 또는 헌병과 교전하였으므로 그간 원 판결이 인정한 것과 같이 피해 사실을 발생케 한 일이 있다손 치더라도 이는 전쟁으로부터 발생한 당연한 귀결로서 피고 등은 당초부터 원 판결과 같은 범행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고 또 하나의 범행도 없으며, 필경 피고 등의 행위는 충군애국을 위한 데에 불과하며 그리하여 포로가 된 오늘에 있어서는 적이라고 해서 피고 등을 살륙하는 것은 실로 납득할 수 없는 것이며 법률의 제재를 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원심은 피고 등의 행위를 굳이 범죄라고 인정하여 법률로 교수형을 선고하였음은 불복이라고 함에 불과하지만 그리하여 원 판결을 사열한 즉 원심은 증거에 의하여 피고 양상기(梁相基)에게는 폭동 강도 방화 모살의 각 소위, 피고 유병기(劉秉基)에게는 폭동 방조 강도의 각 소위가 있다고 인정하고 여기에 상당한 법조를 적용하여 피고 등을 처벌하려는 것인데, 피고 등의 소론과 같이 사실은 조금도 원심이 인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설혹 소론과 같은 초지(初志)라 할지라도 원래 범인의 희망, 또는 행위를 하게 된 동기 여하는 범죄 성립에 영향이 없는 것이므로 피고 등의 행위에 대하여 원 판결이 인정함과 같은 범죄로 된 이상에는 그 처벌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요컨데 각 피고의 논지는 함께 원 판결의 인정치 아니한 사실을 주장하여 이를 공격한 자인 즉 어느 것이나 모두 상고 적법의 이유가 없다.

위의 이유에 의하여 한국 민·형소송규칙 제42조·제33조에 의하여 주문과 같이 판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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