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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때로는 답답하고 불안한 현실을 만나고, 그 상황 가운데 내가 혼자라는 사실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가진 꿈은 있지만 그러나 그 꿈을 이루기에는 가야 할 길이 너무나도 멀기만 합니다. 어두운 밤이 찾아왔지만, 둘러봐도 주위에 편안하게 몸을 누일 자리도 없고, 기댈 사람도 없고, 차가운 기운에 몸마저 식어 갑니다. 이런 상황이면 이제 외로움은 변하여 두려움이 됩니다. 바로 루스 땅에서 야곱이 그랬습니다.
야곱은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거역한 사람입니다. 당시 문화와 관습으로는 가계의 역사는 장자를 통하여 이어져 가는 것이 정상이었습니다. 그런데 둘째로 태어난 야곱의 관심은 장자의 명분을 얻고 자신의 가문을 세워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형으로부터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빼앗았고, 늙으신 아버지를 속여서 장자에게 빌어주는 아버지의 축복도 가로채었습니다.
장자의 명분과 함께 아버지의 축복 마저 동생에게 빼앗긴 그의 형 에서는 분노했습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시는 날, 반드시 동생도 죽이리라고 결심을 했는데, 이를 눈치챈 어머니 리브가는 야곱을 자신의 친정 오라비인 라반에게 보내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그의 친정은 하란이었습니다. 아버지 이삭은 야곱에게 마지막으로 ‘전능하신 하나님이 네게 복을 주어 가문을 번성케 하시기를,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복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어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을 차지하게 되기를’ 축복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야곱은 하란을 향하여 길을 떠났습니다. 하란은 그가 살던 브엘세바로부터 800 킬로키터가 넘는 대단히 먼 곳이었습니다. 그 여정에서 야곱은 일생에 잊을 수 없는 극적인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집에 거할 때, 부모님의 사랑과 돌봄 안에 거할 때는 경험하지 못했던 신비한 경험이었습니다.
하란을 향해 길을 가던 중 해가 떨어져 한 곳에서 유숙을 하게 되었습니다. 유숙이라는 말은 나그네가 자신이 걸치고 있는 겉옷으로 몸을 덮고 밤을 지새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곳은 브엘세바로부터 약 100킬로미터 쯤 떨어진 곳으로, 가나안 사람들이 ‘루스’라고 부르는 땅이었습니다. 처음으로 부모를 떠나, 장래를 알 수 없는 불안 가운데 먼길을 가는 야곱인데, 인적도 없는 땅에서 날이 저물어 밤을 맞게 된 것입니다. 그는 주위에 있는 돌 하나를 취하여 베개를 삼고, 겉옷을 몸에 두른 채, 두려움 속에서 잠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꿈속에서 그는 신비한 경험을 하였습니다. 12절에,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13절에,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말씀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본즉’이라는 단어가 세 번이나 사용되고 있습니다. 우리 말 성경에서는 보았다는 뜻으로 평범한 동사처럼 번역하였습니다. 그런데 ‘본즉’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힌네’는 일종의 감탄사입니다. 킹제임스 성경은 behold라는 단어로 번역하였습니다. ‘보라!’라는 의미로 독자들의 주의를 환기시키는 감탄사입니다. 야곱이 꿈속에서 본 이 장면들에 대하여 놀라서 감탄하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이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져서 거기서 유숙하려고 한 돌을 가져다가 베개로 삼고 누워 자는데, 꿈을 꾸었다. 보라,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다. 또 보라,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 또 보라,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꿈속이었지만 야곱이 본 이 광경이 얼마나 놀랍고 황홀한 장면인지 보여주는 단어입니다. 보라!
‘사닥다리’는 히브리어 ‘술람’으로 구약성경에서 여기에서 단 한번 사용된 단어입니다. 그 곳에 사닥다리가 세워져 있는데 그 꼭대기는 하늘에 닿아있었습니다. 이 사닥다리는 이 땅의 세계와 하늘의 세계를 연결해 주는 통로입니다. 우리가 말로는 도저히 묘사할 수 없는 어떤 거리나 차이를 말할 때, ‘하늘과 땅만큼’이라고 말합니다. 하늘과 땅 그 사이는 그야말로 도저히 닿을 수 없는 거리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세계는 저 멀리 하늘에 있어 우리 인간은 그 세계에 닿을 수가 없다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그런데, 루스 땅에 서있는 사닥다리는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아 있었습니다. 하늘과 땅이 이어져 있는 것입니다. 놀라운 장면이었습니다.
그런데 또 놀라운 것은 그 사닥다리를 타고 하나님의 사자인 천사들이 부지런히 오르락 내리락하고 있었습니다. 천사들은 저마다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이 땅에 내려오고, 또 하늘로 올라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또 놀라운 것은,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읽은 성경은 “주님께서 그 위에 서서 말씀하셨다”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공동번역은 “야훼께서 그의 옆에 나타나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셨다”로 번역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저 사닥다리의 꼭대기 위에 서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땅에 누워있는 야곱의 곁에 서서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어느 것이 맞습니까? 하나님은 사닥다리 위에 서서 말씀하셨습니까? 아니면 야곱의 곁에 서서 말씀하셨습니까? 저는 둘 다 맞다고 생각합니다.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늘에 닿은 사닥다리 위에 서 계신 하나님은 또한 이 땅 우리 곁에도 서 계신 분이십니다. 하늘 위에만 머물러 계신 분이 아니라 이 땅에도 내려오시는 하나님. 사닥다리 위에도 서 계시고 동시에 지금 루스 땅에 유숙하고 있는 야곱의 곁에도 계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오늘 내 곁에도 와 계십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으면서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켜 주고, 너를 다시 이 땅으로 데려오겠다.”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루스 땅에서 유숙하는 야곱에게 주신 일방적인 약속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처음으로 부모의 집을 떠나 힘들고 고단한 인생의 여정을 시작하였는데,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의 길을 함께 걸으며 그를 축복하셔서 그의 소중한 꿈을 이루고 마침내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잠에서 깨어난 야곱은 깜짝 놀라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두렵도다 이 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먼저, 야곱은 바로 내가 잠들었던 이 곳에 하나님의 집으로 올라가는 사닥다리가 놓여있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하나님이 계실 것 같지 않은 자리였습니다. 낯선 땅입니다. 광야에서 돌베개를 베고 잠이 든 막막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두려움과 외로움 속에 누워있는 차갑고 불안하기만 한 낯선 이 땅에 하나님께로 오르는 사닥다리가 놓여 있었습니다. 이곳이야말로 하나님의 집으로 올라가는 문이었던 것입니다.
그 때 야곱은 하나님을 처음으로 체험하게 되었고, 거룩한 두려움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그 두려움은 잠들기 전에 그가 느꼈던 두려움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들짐승의 두려움도 아니고 어두움의 공포도 아니었습니다. 어떻게 펼쳐질지 모르는 자신의 장래에 대한 두려움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선 인간이라면 누구나 느끼게 되는 원초적인 두려움이었습니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두려움을 지닌 채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성경에 보면 이 두려움은 처음 사람 아담으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서 선악과를 따먹고 난 후, 하나님이 그를 찾으실 때 아담은, ‘제가 벗은 것이 두려워 동산 나무 그늘에 숨었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것은 죄로 인한 두려움, 죄가 가져다 주는 수치심과 죄책감으로 비롯된 두려움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었습니다. 두려움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단절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소외된 인간이 느끼는 어쩔 수 없는 한계입니다.
이제는 들짐승이나 낯선 사람들을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내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폭력과 나를 억누르는 힘에 대한 두려움, 죽음과 패배에 대한 두려움, 인간의 연약함과 한계가 주는 온갖 두려움 속에 사람은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고,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기대할 수 없게 된 인간의 한계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두려워 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사야를 통해서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는 두려워 하지 말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참으로 내 오른 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실 때,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의 은혜 안에서 살아갈 때 우리는 온갖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화해의 제물이 되어 돌아가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은총을 입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자유롭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에게 직접 우리의 간구를 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우리는 죄와 심판의 두려움으로부터도 해방이 되었고 이제는 주님이 주시는 평강을 누리며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 하나님의 은총을 덧입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확신하는 사람들은 죄와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비롯하여, 온갖 불안과 공포, 근심과 염려로부터 자유하게 된 것입니다.
그 대신, 이제는 새로운 두려움으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이 두려움은 거룩한 두려움입니다. 나를 사랑하사 용서하시고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 앞에서 갖는 두려움은 우리로 하여금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이 됩니다. 엡5:21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피차 서로에게 복종하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들 사람이 사람에게 즐거운 마음으로 복종하며 서로를 섬길 수 있는 힘은 곧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나를 구원하시고 마침내 나를 심판하실 하나님 앞에서 갖은 두려움입니다.
빌2:12에서 바울은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이제는 죄로 인한 두려움에서 벗어나, 나의 죄를 용서하시고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이고, 그 두려움이 마침내 우리의 구원을 완성해 준다는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이제는 우리 곁에 계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그분의 음성을 듣게 되기를 바랍니다. 내게 주신 소중한 꿈과 비전을 이룰 수 있도록 내가 가는 이 길에 언제나 함께 하신다고 하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확신을 갖고, 언제나 하나님 안에서 거룩한 두려움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을 체험하고 그의 거룩한 음성을 듣고 자신의 장래에 함께 하신다고 하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듣고 난 후 야곱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났습니까? 야곱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개로 삼았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곳 이름을 ‘벧엘’이라고 하였습니다. ‘베트’란 말은 ‘집’이란 뜻이고 ‘엘’은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벧엘은 ‘하나님의 집’이라는 의미입니다. 도망 길에 밤을 만나 하룻 밤을 유숙했던 낯설고 두려운 땅 루스가 바로 하나님의 집 ‘벧엘’이었습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고 거룩핫힌 하나님을 체험한 것입니다.
야곱은 서원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언제나 그와 함께 하시며, 그가 누워있는 이 땅을 그에게 주시고 그의 후손을 창성케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 야곱의 간구는 소박하고 절실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켜 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시고, 내가 안전하게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 주신다면 나는 하나님을 나의 주님으로 모실 것이며,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을 성소로 삼겠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겠다’는 것입니다. 야곱의 간구는 우리의 간구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걸어가는 인생길에서 우리를 지켜주시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시고, 마침내 나그네의 삶을 마치고 다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와 평안을 누리며 살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 주신다면 저는 주님을 섬기고 바로 이곳에 세운 돌기둥을 성소로 삼고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린다는 것입니다.
갑자기 십일조를 바치겠다는 이 말의 의도는 무엇입니까?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십일조를 드릴테니 나를 축복해 달라는 식으로 거래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삶’은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형통함과 평안함을 누릴 수 있다고 야곱은 믿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내 삶은 나의 것이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의 것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십일조를 드린다고 하는 것은 내 삶의 열매는 주님의 은혜요 주님의 소유임을 고백한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은 아브라함과 야곱 이래로 이어져 오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고백이고 전통입니다. 십일조를 드리겠다고 하는 이 서원은 내 삶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고백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것이기에 하나님께 내 삶을 바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것은 단순한 물질이 아니라 나의 몸과 영혼입니다. 나를 나 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고백과 감사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인생길을 걸어가는 믿음과 헌심의 상징입니다.
야곱이 하나님을 만난 장소는 어디입니까? 루스입니다. 기름지고 평화롭고 아늑한 땅이 아니라, 도망 길에 돌 베개를 베고 누운 차가운 땅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야곱이 처해 있는 현실은 하나님도 외면하시고, 루스 땅은 곧 하나님께 버림받은 땅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곳에서 야곱은 하나님을 체험하였습니다. 바로 그곳이 오히려 하나님의 집이었고 하나님 나라로 올라가는 하늘 문이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혹시 여러분의 자리가 루스는 아니신지요? 그렇다면 바로 그곳에 사닥다리가 있을 것입니다. 눈을 들어 그 사닥다리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과 위로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을 때, 우리는 거룩한 두려움을 가지고 일생을 주님과 함께 동행하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51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을 읽으며 우리는 야곱의 사다리를 떠올립니다. 야곱이 꿈에서 본 사닥다리는, 땅에 거하는 죄인과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의 연결 통로가 되어 주신,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예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하나님의 세계로 나갈 수 있는 유일하신 통로가 되어 주셨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우리는 죄사함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오늘을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주님을 믿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어가라고 성령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