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장군이 최후의 전투인 노량 해전에서 갑옷을 입지 않고 진두 지휘하다가 적탄을 맞은 것은 이순신 장군이 자신의 최후를 부끄럼 없이 장식하기 위해 장렬하게 자살한 것이라는 설이 설득력 있게 퍼져 있다. 당시의 정치의 역학 관계를 볼 때 충분히 이해가 가는 일로 여겨진다.
이순신 장군은 평소에도 자신의 진퇴에 대해 분명하게 말하곤 하였다. 후에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유형은 이순신 장군이 평소에 갖고 있던 결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이순신 장군이 평소에 마음속을 토로하며 말하기를 ‘예로부터 대장이 자기가 세운 전공에 대해 인정을 받으려는 생각을 조금이라도 갖는다면 대개는 생명을 보전하기 어려운 법이다. 나는 적이 물러나는 그 날에 죽음으로써 유감 되는 일을 없애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이는 이순신 장군이 적이 물러나는 마지막 전투에서 ‘반드시’ 죽겠다는 비장한 내용으로 이순신 장군의 죽음이 결코 통상적인 전사가 아닐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1597년 7월 15일 원균 장군이 지휘하는 조선수군은 칠천량에서 왜수군에게 대패했고 이 전투에서 원균도 전사하였다. 이 패전 소식에 놀란 조정은 백의종군하던 이순신 장군을 삼도수군통제사에 다시 임명했다. 9월 16일, 명량 해협에서 단 13척으로 적선 133척을 상대로 포위를 당하고도 대승을 거두며 조선수군은 다시 남해의 해상권을 회복하게 된다(「임진왜란은 조선이 이긴 전쟁(3)」, 국정브리핑, 2004.08.16
참조).
다음해 7월(1598)에 명나라 수군 제독 진린(陳麟)이 5천명의 수군을 거느리고 와서 조선 수군과 합동으로 순천에 주둔하고 있는 소서행장의 군을 해상에서 포위, 적의 해상 교통을 봉쇄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전황이 바뀐다. 8월 17일에 8월 17일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그의 명에 의하여 왜적은 철수의 길에 오르게 된다. 순천에 있던 소서행장은 이순신 장군이 해상을 봉쇄하고 있기 때문에 용이하게 빠져나갈
수가 없게 되자 진린에게 뇌물을 주어 퇴로를 열어달라고 한다.
진린은 이순신 장군에게 퇴로를 열어주자고 하였으나 이순신 장군은 일거에 거절했다. 이에 왜적들도 일전을 각오하고 소서행장은 곤양과 사천 방면의 적에게 구원을 청하여 구원병들이 노량(鷺梁)으로 모여들었다. 이때 왜군의 배는 500여 척, 조선의 수군과 명군의 배는 300여 척이었다. 이 전투에서 비록 충무공이 전사하였지만 왜선 500여 척 중 450 척이 부셔지고 왜장 도진의홍(島津義弘) 등을 비롯한 일부가 고작 50여 척으로 도망칠 정도로 조선 측의 대승이었다. 그 때가 선조 31년 11월 19일이였다.
〈전사를 선택한 마지막 해전〉
마지막 전투인 노량 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의 죽음이 자살이라는데 비교적 많은 공감을 받고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그때 이충무공이 전사하지 않았다면 어차피 또다시 잡혀가서 억울하고 욕되게 죽음을 당했으리라는 전제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가설이 나오게 되는 당시의 정황을 읽어보자.
여기에는 선조의 성격이 크게 작용한다.
선조는 변덕스럽고 의심이 많았는데 왜란이 일어날 조짐이 보이자 더욱 불안해져 의심나는 사람을 닥치는 대로 미리 죽였다. 특히 정여립 역옥 사건으로 인하여 1,000여명의 죄 없는 사람들을 마구 죽였는데 그 정도가 얼마니 심하였는지 자살한 정여립에게 다시 형벌이 가해지던 날 어떤 사람이 안질 때문에 눈물을 흘리자 정여립을 추모한 까닭이라고 곤장을 쳐죽이기도 했다. 이순신과 친분이 있었던 조대중도 그의 죽음을 슬퍼하여 울었다는 죄목으로 고문을 받고 죽었으며 그의 처와 첩, 아들과 딸, 동생과 조카 등이 모두 죽었다.
더구나 왜란 중에 선조를 비롯한 집권자들은 도망치기에 급급했지만 의병장을 중심으로 한 의병들은 효과적으로 소위 중앙 조정의 통제를 벗어나 자치권을 갖고 전투에 임했다. 이 때의 의병장들로는 조헌, 고경명, 곽재우, 김덕령 등으로 이들에 대한 백성들의 기대감은
컸다.
의병장들이 관의 지휘를 벗어나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왜란이 막바지에 다다르자 조정은 왜란이 끝나면 의병장들에 대한 백성들의 기대가 자신의 권력 기반을 잠식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외적을 막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부의 잠재적인 적도 견제해야 했다. 조정은 의병장들에게 촉각을 곤두세우다가 첫 칼을 빼들어 김덕령 장군을 역모 혐의가 있다고 31살 나이에 죽인다.
이에 대한 이민서(李敏敍)의 『김충장공유사』에서 ‘김덕룡 장군이 죽고부터 여러 장수들이 저마다 스스로 의혹하여 곽재우는 마침내 군사를 해산하고 숨어서 화를 피했고 이순신은 바야흐로 전쟁 중에 갑주를 벗고 스스로 탄환에 맞아 죽었으며 호남과 영동 등지에서는 부자와 형제들이 의병은 되지 말라고 서로 경계했다.’라고 적었다. 조정의 비정한 칼이 영웅호걸들에게 다가오는 것을 느끼자 권율은 아침저녁으로 한양에 장계를 띄워 충성을 맹세했고 대장군 이일은 아예 왕실과 조정의 수호자임을 자처했다.
사실 선조는 이순신 장군을 체포할 때도 이충무공이 반란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생각하고 있었다는 정황이 있다. 선조는 금부도사에게 선전관의 신표와 밀지를 주어 신분을 위장하고 이순신 장군을 잡아오게 하였다. 금부도사는 먼저 선전관의 자격으로 10여 일을 한산도에 머물면서 이순신 장군의 동태를 엿본 다음 이순신 장군을 잡아오는데 선조가 이순신 장군을 체포하도록 명령한 것은 잘 알려진 다음 4가지 죄목이다.
'이순신은 조정을 속였으니 임금을 업수이 여긴 죄를 범했다(欺罔朝廷 無君之罪). 또한 적을 쫓아 치지 않았으니 나라를 저버린 죄를
범했으며(縱賊不討 負國之罪) 심지어는 남의 공로를 빼앗았고 또 남을 모함했다(奪人之功 陷人於罪 無非縱恣 無忌憚之罪). 뿐만 아니라 방자하고 거리낌이 없는 죄까지 있으므로 그를 구할 길이 없다. 이같이 신하로서 임금을 속인자는 반드시 사형에 처하고 용서할 수 없으므로(必誅不赦) 이제 본격적으로 고문을 가하여 실정을 알아내라(今將窮刑得情).'
선조가 우부승지 김홍미에게 이순신의 죄목에 대해 자백을 받은 후 사형에 처하라고 지시까지 한 것을 볼 때 이순신을 견제하려던 의도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정탁을 비롯한 여러 신하들이 전투 중에 군사령관을 사형에 처하는 것은 왜병에게만 도움을 줄 뿐이라는 구명 상소문을 올리자 이순신 장군의 목숨만은 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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