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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론강단-470 영생토록 있는 양식(요한복음6장26-27절)
성경말씀은 요한복음 6장 26절에서 27절까지 봉독합니다.
[요한복음 6장]
26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27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요한복음 6장은 장이 꽤 길게 이어지는 장인데, 사람들이 예수님을 처음에 따르게 되는 것은 병자들이 고침을 받고, 혹은 귀신들이 쫓겨나고, 또 오병이어 같은 이적을 보고 사람들이 따라다니고 그런 모습을 보면서 진정으로 예수님을 쫓는 자세가 아닌 것을 지적을 하는데,
내용을 구약시대 신앙과 신약시대 예수님을 말씀을 보면 다른게 구약시대에는 육체적이고, 물질적이고 현세적인 그런 내용으로 교훈이 많습니다.
그러니까 음식 먹고 마시는 문제 이런 것은 구약성경에서 이미 다 끝났어야 돼요.
예수님이 오셔서는 뭘 먹으면 된다 안된다 그런 말은 없어요.
그런 것은 너무 낮은 차원이고, 영적인 양식 영적인 음료 이런 교훈을 하시는데, 너무 수준이 높기 때문에 구약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차원이 높은 얘기를 하고 있기 때문에 심지어 열두 제자까지도 처음에 이해가 안 되고 소화가 안 되어서 애를 먹어요.
그래서 보시는 대로 요한복음 4장에 수가성 여인과 대화할 때 예수님께서 음식드시는 것도 잊어버리고 전도하실 때에 제자들이 뭘 좀 드시라고 하니까,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양식이 있다’ 하시면서 그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 내 양식이다’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그리고 지금 요한복음 6장에서는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서 일하라.’ 양식 문제를 이야기 하는데, 그 양식은 바로 예수님의 살이요 예수님의 피를 이야기 하실텐데, 그래서 상당히 구약시대에 구체적으로 어떤 고기는 먹고 어떤 고기는 못먹고 이런 차원보다 훨씬 넘어서는 이야기를 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것이 예수님께서 갑자기 와서 하신 말씀같지만 사실은 우리가 이사야서에서 벌써 그렇게 이사야서 안에서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오라’ 하면서, 하나님 말씀을 잘 들으면 거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배부름을 얻게 된다 하고, 양식 문제를 진짜 양식 아닌 것을 위해서 헛된 양식 아닌 것을 위해서 은을 너무 많이 달아주고 있고 실제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해서 너무 수고를 많이 한다. 그런 이야기를 이사야가 55장에서 했단 말이죠.
그래서 구약성경에서 최고조로 고양되고 높여진, 그런 차원 높은 예언들이 예수님 안에서 어떻게 선포되는가 하는 그런 관점에서 봐야 신약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구약성경에서 최고조로 높여서 고차원적인 어떤 은혜의 세계를 이야기 하는데, 예수님 안에서 그것이 들려야 돼요.
그 중에서 가장 고차원적인 얘기가 요한복음이죠.
요한복음보다 더 높은 수준은 신구약을 통틀어서 나오지 않습니다.
이게 제일 높은 수준의 말씀이기 때문에 들을 때 조금 새겨서 잘 들어야 돼요.
6장 1절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6장]
1 그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 바다 곧 디베랴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매
디베랴 바다 건너편이 바로 베드로의 고향 쪽입니다.
베드로의 고향 벳새다에서 건너다 보면 디베랴라는 도시가 있는데, 그것은 티베리우스 황제를 기념하기 위해서 만든 도시죠.
2 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인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봄이러라
그래서 많은 사람이 따르게 됩니다.
3 예수께서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 함께 거기 앉으시니
‘산’이라 해서 우리나라처럼 험산 이런 산이 아니고, 대개 호숫가에 약간 비탈진 경사면으로 올라가는데, 거의 언덕 수준입니다.
산기슭 언덕 정도예요. 지리산처럼 높은 산이 아니예요.
이런 것도 여기에서 읽기만 해서는 잘 이해가 안 돼요.
이스라엘에 가서 보면 지형들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상당히 차이가 나게 됩니다.
4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5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벌써 1-2년 정도 시간이 지난 가운데 신문도 방송도 없었지만, 입에서 입으로 전달된 소식이 굉장히 광범위하게 전달되어서 사람들이 이왕에 유월절 명절 지키기 위해서 먼곳에서부터 사람들이 모여 오는데, 오는 김에 유월절 명절도 지킬겸 그 예수라는 분도 한번 봤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들이 전부 일반화 되어가지고 막 예루살렘에 와서 하여튼 유월절 명절 지키는 것은 명분이지만, 온 김에 제일 보고 싶어 하는 것이 예수님 보고 싶어 하는 그런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5천명씩이나 이렇게 큰 무리가 예루살렘에서 큰 무리라고 하면 이해가 되는데, 예루살렘이 아니고 지방인데..
갈릴리 저 변방인데 거기까지 벌써 예수님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5천명이 넘게..
여자가 어린 아이 외에 5천명이라니까 만명 내외가 큰 무리가 예수님을 찾습니다.
..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하시니
이렇게 예수님이 말씀하셨는데, 요한은 눈치가 빨라가지고,
6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빌립을 시험코자 하심이라
요한이 이렇게 눈치가 빨라요.
예수님께서 무슨 말 하면 벌써 무슨 뜻으로 무슨 의도로 하는 것인지 다 캐치하고 그 정도로 센스가 있는 사람이예요.
그러니까 아주 비서로서는 백점짜리 비서죠.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일 가까이에 베드로 요한 야고보 이 삼총사가 늘 예수님 가까이에 있지만, 그 중에서 제일 예수님 명령이나 뜻을 받들어서 가까이에서 섬기는 사람이 요한인데, 눈치가 빠르니까.. 센스가 있으니까..
7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이것 때문에 예수님께서 일부러 이렇게 하시는 거거든요.
가끔 말씀드렸왔습니다만 아무리 봐도 빌립은 베드로와 같은 고향 사람인데,
정말 어렵게 어렵게 가난하게 가난하게 이렇게 살아온 것 같아요.
빌립이 예수님 묻자마자 답이 아주 전자계산기처럼 바로 튀어나오는데, 각 사람에게 일단 조금씩 주는데 2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어차피 지금 돈 한푼도 없기는 마찬가지인데, 만약에 빌립이 여유가 있는 집에서 태어났다면, ‘주여 배부르게 먹을려면 그래도 5백 데나리온은 있어야 족하겠나이다.’ 이렇게 말했을 텐데, 어려서부터 워낙 빵을 많이 받아본 적이 없는 거야.
그러니까 각 사람에게 조금씩 받게 하고 돈은 2백만원 밖에 없고 결론은 부족하게 이렇게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런데 어쩌면 빌립이 나와 비슷하다고 생각해요.
저도 계산이 빠른데 맨날 부족한 거야. 맨날 ‘나는 안 될 것이다’ 해서..
제가 왜 쭈그러진 모습으로 이렇게 별 볼일 없는 사람처럼 이렇게 살아가느냐?
통이 작아가지고.. 겁이 많아 가지고..
빚지는 것을 겁내어가지고 뭘 잘 못해요.
우리가 어려서부터 자란 동네에 우리 집은 빚을 잘 안 지는데, 빚을 질 때에는 우리 어머니가 우리 아버지보다 통이 커요.
우리 어머니는 빚을 질 때 지더라도 뭔가를 해서 이루어야 된다 해가지고 논을 사거나 밭을 살 때 항상 우리 어머니가 아버지를 자꾸 충동해가지고 사는 거예요.
우리 아버지는 저처럼 굉장히 소심하고 대범하게 뭘 하지를 못해요.
반면에 우리 동네에 보면 계속 빚을 져가지고 나중에 망해버리는 사람을 많이 봤어요.
뭘로 가지고 빚지느냐?
좋은 일을 해서 빚지는게 아니라 먹어서 빚지는 거예요. 먹어치우는 거예요.
항상 빚을 지는데 맨날 고기굽는 냄새가 나고..
그런 집은 하나도 늘지도 않더라고..
여러분 먹는게 내가 한번은 우리 집에서 먹는 것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여러분은 아침에 뭘 먹고 왔는지 몰라도 진짜 얼마 안 드는 거예요. 그게..
그냥 김치하고 밥하고 이렇게 먹으면 한끼에 한 사람당 천원이나 2천원밖에 안 돼요.
나가서 점심 싼것 5천원짜리 먹었다고 해도 비싼거예요. 상당히..
그래서 그렇게 우리는 우리 집이 식구가 열명이 넘었으니까 입으로 아껴먹어서 살림을 조금씩 늘려가지고 우리 동네에서 논밭이 제일 많은 그런 집이 되었는데,
항상 용돈이라고는 받아본 적이 없는 거예요.
1년에 용돈 2백원 받는데, 봄소풍때 백원, 가을소풍때 백원.. 2백원을 받는 거야.
제가 생각할 때 얼마나 비참하게 살았는지..
굶지는 않았지만 우리 아버지 어머니는 용돈을 준다는 개념이 없었어요.
한번은 장학금이 나왔는데, 장학금 안 받았다고 그러고..
학교에서는 장학금 받고 집에서는 학비 받아가지고.. 그런 적도 있었어요. 회개를 해야지..
워낙 용돈을 안 주니까..
친구들에게 내가 왜 그렇게 맥을 못 추느냐 하면, 친구들은 다 무엇을 사서 남에게 주는데 나는 남에게 줄 여유가 없어..
맨날 얻어먹기만 하니까 얼마나 비굴하겠어요?
그래서 빌립을 보면 꼭 제가 어릴 때 생각이 난다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빌립을 보고 ‘너는 왜 맨날 사고방식이 그렇게 째째하고 부정적이고 그러냐?’ 이렇게 윽박지르고 무슨 창피를 주는게 아니라, 그렇게 물으신 다음에 한번도 빌립의 자존심 상하게 말하지 않고, 일을 어떻게 해 나가느냐
8절에,
8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9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
10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앉으면 책임 져야죠. 그렇죠?
.. 앉게 하라 하신대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효가 오천쯤 되더라
11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은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저희의 원대로 주시다
줄을 그으세요. 원대로 주시다.
12 저희가 배부른 후에,
그러니까 원대로 주시고 배부르게 먹었는데,
..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13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 두 바구니에 찼더라
14 그 사람들이 예수의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그 선지자’ 하는 것은 신명기 18장 18절에 모세가 ‘나와 같은 선지자를 하나 세울거다.’ 그렇게 예언한게 있어요.
‘그 선지자’ 그렇게 말하는 겁니다.
15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보통 여러분 설교를 많이 들었을텐데, 이 부분을 뭐라고 들었느냐 하면 ‘오병이어 보리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를 주님 손에 들려야 축복이 쏟아진다.’ 다 그렇게 했을 거야. 그렇죠?
여기는 그렇게 안 들은 모양이네..
우리는 다 그렇게 들었어요.
그런데 이 사건은 ‘바쳐야 복을 받는다.’ 그런 것을 할려고 쓴 기록이 아닙니다.
적어도 예수님께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그 말씀을 증빙하는 사건이예요.
예수님을 진심으로 따라 가면 최소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리고 한번도 예수님께서 우리를 백만장자 억만장자 되게 해 주겠다 그런 약속은 한번도 한 적이 없었어요.
특히 신약에서는 한번도 그런 적이 없고 오히려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요즈음 번영신학이나 축복신학이나 이런 것은 어디에서든지 신약에서는 그 근거를 찾지 못합니다.
확실한 것은 예수님을 따라가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이런 것은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보여주신 거예요.
또 요한이 볼 때 이런 이적 특별히 일곱개 이적을 보여주신 것은 예수님께서 양을 초월하실 수 있는 분이다.
지난번에 갈릴리 가나에서 물로 즉석에서 포도주를 만들었던 것은 사물의 질을 초월한 사건이었고, 왕의 신하의 종을 고친 사건은 공간을 초월하는 그런 사건이었고, 여기 오병이어 사건은 양을 초월하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바로 이런 모든 것을 초월하시는 분이시다.’ 하는 것을 보여줄려고 하는 것이지, 이것을 바쳐야 하나님께서 복을 부어 준다. 그런 얘기가 아닙니다.
이 말씀을 하신 본래 목적은 그렇지 않아요.
그래서 성경을 보실 때 본래 기록된 원목적대로 이해하는게 아주 중요한 것이죠.
16절입니다.
16 저물매 제자들이 바다에 내려가서
17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가버나움으로 가는데 이미 어두웠고 예수는 아직 저희에게 오시지 아니하셨더니
어떻게 지리 개념을 생각하면 좋으냐 하면, 호수를 두고 서쪽에 디베랴가 있고, 건너편 동쪽에 벳새다가 있고, 그 위쪽에 북쪽 호숫가에 가버나움이 있다 이렇게 생각하면 쉽겠어요.
호수를 그려가지고 오른편에 이스라엘 호수 서쪽편으로 디베랴가 있고, 동쪽편으로 동북쪽 구석쪽에 벳새다가 있고, 그리고 북쪽 호숫가에 가버나움이 있다 이렇게 보시면 거의 틀림없을 거예요.
17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가버나움으로 가는데 이미 어두웠고 예수는 아직 저희에게 오시지 아니하셨더니
예수님께서 혼자 산에서 기도하시면서 너희가 먼저 건너가라 그렇게 하신 거예요.
18 큰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나더라
19 제자들이 노를 저어 십여 리쯤 가다가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심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20 가라사대 내니 두려워 말라 하신대
21 이에 기뻐서 배로 영접하니 배는 곧 저희의 가려던 땅에 이르렀더라
이것도 ‘우리 인생의 배가 이 세상 고해를 건너가다가 풍랑을 만났을 때 예수님이 함께 타면 잔잔해진다.’ 다 그렇게 배웠죠?
영해라고 그렇게 배웠는데 그런 면도 있죠.
요한은 적어도 이것이 물위로 걸어간다는 것은 예수님이 자연 법칙을 초월하는 분이다.
그래서 무슨 이적을 얼마나 행했느냐 이게 중요한게 아니라,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이적을 행하는 분 예수님의 정체가 누구시냐?
예수님의 신성을 증거할려고 하는 그런 쪽에다가 요한의 신학이 걸려있기 때문에, 요한 신학 전체를 저자가 우리에게 인식시킬려고 하는 의도를 보지 않고 맨날 그저 영해한답시고 이상하게 해석하는 것을 많이 듣는데, 그런 면이 없다는게 아니라 그런 면이 있을 수 있지만, 본래 목적이라는 것은 예수님은 초월하는 분이다.
그러니까 벌써 몇 가지 초월했느냐?
사물은 질을 초월하고 양을 초월하는 베데스다 못가에서 시간을 초월하고 왕의 신하의 종을 고친 것은 공간을 초월하고, 여기는 자연법칙을 초월하는, 끝없이 사람이 할 수 없는 세상을 초월해가는 그런 모습을 보여준다는 겁니다.
22 이튿날 바다 건너편에 섰는 무리가 배 한 척밖에 다른 배가 거기 없는 것과 또 어제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그 배에 오르지 아니하시고 제자들만 가는 것을 보았더니
23 (그러나 디베랴에서 배들이 주의 축사하신 후 여럿이 떡 먹던 그곳에 가까이 왔더라)
24 무리가 거기 예수도 없으시고 제자들도 없음을 보고 곧 배들을 타고 예수를 찾으러 가버나움으로 가서
25 바다 건너편에서 만나 랍비여 어느 때에 여기 오셨나이까 하니
예수님은 분명히 배를 타는 것을 안 봤거든요.
제자들만 건너갔고 예수님만 산에 올라가는 것을 봤기 때문에 거기 사람들이 모여 있었어요.
예수님은 안 갔으니까 제자들은 가든지 말든지 예수님만 있으면 최고다 해가지고 있었는데, 이튿날 자고 나서 보니까 예수님 제자들도 없고 예수님도 없고 아무도 없는 거야.
그래가지고 어디갔나 어디갔나 해가지고 사람들이 가버나움까지 가서 보니까 예수님이 와 있거든요.
예수님이 어떻게 온 거죠?
아까 봤잖아요. 물위로 걸어갔다니까..
물위로 걸어갔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으니까 어떻게 여기 왔습니까?
.. 랍비여 어느 때에 여기 오셨나이까 하니
26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을려고 나를 따라왔다는 거죠.
그래서,
27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오늘 드리는 제목이 ‘영생토록 있는 양식’이죠. 영생토록 있는 양식..
여러분 지난번에 수가성 우물가에 있는 여자에게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라고 했죠?
한번 마시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 여기는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
상당히 영적인 얘기예요.
이 전체가 예수님 자신을 이야기 하는 거죠.
그래서,
..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인 쳤다는 것은 확인했다, 사인을 했다는 것이죠.
세메이온 사인을 했다..
28 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2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그런데 믿는다는 말이 ‘믿습니다. 믿습니다.’ 하는게 믿는게 아니고, 믿고 그 말씀을 따라 행하는게 믿는 거예요.
믿는다 하면서도 예수님 시키는 대로 안 하고 예수님께서 모범을 보이는 대로 안 하고 그러면서 믿는다는 것은 거짓믿음이예요. 행함이 없는 믿음이죠.
믿는다는 것은 행함이 따르는 믿음, 또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 이게 진짜 믿음이죠.
30 저희가 묻되 그러면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31 기록된 바 하늘에서 저희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그러니까 광야에서 만나를 먹은 것과 광야에서 보리떡과 물고기를 먹은 것 하고 생각이 두갈래가 있는데,
3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 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
자꾸 모세 모세 하는데, 만나를 먹을 때 모세때 줬다 하지만 모세가 무슨 힘으로 가지고 그 만나를 가져오겠어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모세를 바라 보지 말고 모세 시대에 누가 주셨느냐?
우리 아버지가 준 거야. 모세가 준게 아니고..
자꾸 모세를 쳐다보지 말라는 거야.
우리가 자칫하면 모세, 아니면 굉장한 어떤 목사 이런 것을 자꾸 쳐다본다니까.. 잘못 믿는 거예요.
초신자때에는 그럴 수 있는데, 성장해가면 그 때는 모세가 아니고 노목사가 아니고 하나님을 바라봐야지.. 자꾸 모세를 보고..
그래서 예수님께서 ‘모세가 준게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께서 하늘에서 내린 참 떡을 너희에게 주신다..’
그런데 참 떡은 만나가 아니야.
우리가 볼 때 예수님께서 이 광야에서 보리떡 물고기 이것을 가지고 주신 것보다 하늘에서 직접 내려왔으니까 그게 더 신령한게 아닌가? 이런 인식이 있거든요. 그 사람들이..
그래서 예수님께서 보리떡도 아니고 만나도 아니고, 내가 진짜 양식을 주겠다 하면서,
33절에,
33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여러분 이리 보세요.
여러분 왜 오늘 아침에 밥을 먹은 거죠?
왜 먹었죠? 안 죽을려고 먹었지.. 안 먹으면 죽죠.
여기는 안 먹어도 안 죽는 모양이야..
한끼 안 먹어도 죽는 것은 아니지만 계속 안 먹으면 죽는 거지..
결국은 우리가 살기 위해서 먹는 것이고, 사는 것은 일하기 위해서 사는 거예요. 그렇죠?
아침부터 안 통하는 거야.
먹는 것은 살기 위해서 먹는 것이고, 사는 것은 일 하기 위해서 사는 것 맞죠?
일은 뭐죠?
안 물으면 아는데 물으면 갑자기 모르는 거야.
일은 질량 곱하기 거리다 이런 소리 하지 말고..
일은 사랑하는 거예요.
여러분 사랑하는게 일입니다.
그것을 잊지 말아야 돼요.
결론적으로 하면 모든 삶의 목적은 사랑하는 거예요. 그렇죠?
전부 다 사랑하기도 싫고, 다 미움이 충만해가지고..
여러분 사랑하기 위해서 우리가 사는 거예요.
천국도 우리가 사랑하기 위해서 가는 거죠.
인생도 곧 사랑하는 것이니까..
그래서 일 한다는 것은, 일은 그리스도 안에서 일이라는 것은 사랑하는 겁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이웃을 사랑하고 생명있는 모든 것을 사랑하고..
그래서 농사짓는 것도 사랑하기 위해서 농사짓는 것이고, 사업하는 것도 사랑하기 위해서..
그래야 그게 일이지..
만약에 이것이 사랑하기 위해서 일하는 것 아니면 전부 다 잘못된 거예요.
오늘 우리가 6장을 공부하면서 이것 하나만 확실히 합시다.
우리가 먹는 것은 살기 위해서, 사는 것은 일하기 위해서, 일은 사랑하는 것 그렇죠?
이런 것은 개념을 확실하게 해야 돼요.
그래서 인생관 세계관 가치관이 달라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밥먹고 사랑하지 않았다. 그러면 잘못된 거예요.
지금도 우리가 일이란 것을 교회에서도 여러분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또 형제 자매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렇게 해야 일이지, 그게 안 되면 죄만 짓는 거예요.
일 때문에 하나님 사랑하지 못하고, 일 때문에 사람을 잡아놓고 죄를 짓는 거야.
그래서 제가 목표지향적이 아니고 관계지향적이다.
목표나 목적이 우상이 되면 안 되고, 관계지향적이야 돼요. 관계는 사랑이죠.
그래서,
33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34 저희가 가로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3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예수님을 정말 바르게 믿고 예수님을 순종하고 하면 목마르지도 않고 주리지 않는다는 거예요.
제가 예수님 은혜로 꽤 여러 나라를 다녀봤는데 예수님을 바르게 믿는다 하는 그런 나라는 결코 가난하지 않습니다. 결코 구차하지 않아요.
부귀 영화를 추구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여러분 예수님을 바르게 믿는 것은 부귀 영화 추구하는게 아닙니다. 원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믿는 나라는 비교적 잘 살아요.
그리고 예수를 믿지 않는 나라,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그 기도하지 않는 나라는 다 배가 고파요.
배가 고프거나 아니면 문화적으로 뒤졌거나 정치적으로 뒤졌거나.. 범사에..
그래서 예수님을 우리가 진심으로 따라간다면 결코 굶거나 주리거나 목마르거나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실제로..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영적으로 그저 확 목이 말라가지고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예수님을 따라가게 되면 예수님 안에서 그렇게 철학자들이 찾고 찾은 진리도 다 있는 것이고, 영원한 생명도 거기 다 있는 것이고, 우리 소망도 거기 다 있는 것이고, 사랑도 사람이 다 목이 마르는게 사랑에 목이 마른 거예요.
여러분 수가성 여인 봐요.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이런 것 같습니다.
우리가 부모님 사랑을 받아도 그것으로 안 돼요.
얼마 있으면 부모님 떠날 것 아닙니까?
부모님 사랑을 받아도 배우자 사랑은 다른 문제고, 부모님 사랑을 받고 배우자 사랑을 받아도 친구가 있어야 돼요.
삭개오 보세요.
삭개오는 부모님 사랑 받았고 배우자 사랑 받았는데 친구가 없으니까 이게 또 사람이 지붕위에 외로운 참새처럼..
그 사랑 받으면 다냐?
하나님 사랑까지 받아야 돼요.
그래서 이게 다 목이 마른데, 아마도 수가성 여인은 남자 사랑을 받으면 흡족할 줄 알았던가봐..
그래서 남자를 다섯번 바꾸고 지금 여섯번째인데 자기것도 아니야. 그렇죠?
그래도 목이 마른 거죠.
그러니까 여러 가지로 사람이 목이 마른데,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나면 부모님 형제 자매 친구 배우자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까지 이렇게 예수님을 만나게 되면 목마른게 다 해결된다는 겁니다.
문제는 그러나 36절,
36 그러나 내가 너희더러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
이게 문제야.
37절,
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
37절은 특별히 줄을 긋고 동그라미를 하세요.
나중에 ‘선택과 예정론’을 공부할 때 매우 중요한 단초가 되기 때문에 요한복음 6장에서만 세번 얘기합니다. 이런 얘기를..
자 이리 보세요.
여기 오신 분 중에 어떤 분은 아무도 전도도 안 했는데, 그냥 자기가 교회에 오고 싶어서 왔다 이런 분도 있어요. 가끔..
내가 참 대단하다고..
물론 간접 전도는 받았겠죠.
어떻든 누가 가자고 하지 않았는데 오고 싶어서 왔다는 거야.
어떤 분은 제가 부끄러운 얘긴데, 지방이지만 원지라는 곳에 강건너면 단성이란 곳이 있는데, 그 원지라는 곳이 희한하게 맨날 방이 모자라요.
제가 20여년전에 벌써 거기 있을 때부터 집지을려고 모래 실어놓으면 방 얻으러 와요.
거기는 다 방을 자기들 사는 방 외에 여유있는 방을 몇개 두고 셋방을 주고 단칸방을 주고 이러니까..
한 대문간 열고 들어가면 여섯가정이 사는 집도 있는 거야.
그 동네가 얼마나 방이 귀한지..
거기 믿는 집이 있어서 대문간 열고 가서 심방 가서 예배드리는데, 예배드리고 나면 다과 나누면서 또 우리 자매들이 수다를 떨고 까르르 웃어재키고 이렇게 하니까, 그 집에 세들어 있는 사람이 왜 나에게 교회에 나오라고 하지 않는가 하고 목이 말랐어.
그래가지고 상당히 몇번을 심방을 왔다 가면서도 자기에게 한번도 교회 나오라고 안 하더라는 거야.
그리고 그 집에 같이 사는 사람도 자기에게 교회 가자는 말을 안 하더라는 거예요.
우체국장 부인인데, 나중에 행여나 싶어 가지고 우리 여기 가족들 예배하는데, 한번 와 보시라고 하니까 얼른 왔대. 언제 또 오라하겠나 싶어 가지고..
그렇게 목이 마른 사람이 있다니까요..
그런데 성경은 예수님 말씀에 분명히 자기가 오고 싶어서 왔다고 하는데, 예수님 말씀을 들어보면 ‘내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또 44절 보세요.
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이리 보세요.
그러면 이 때에 우리가 볼 때에 ‘믿으면 구원 받는다.’ 물론 믿으면 구원 받죠.
누가 믿느냐? 아버지께서 이끌어야 믿는 거예요.
나는 전도사님이 찾아와가지고 나를 전도해서 교회에 나가게 되었는데, 분명히 내가 볼 때는 시골교회 최창학 전도사님이라는 분이 나서 찾아와서 거기에 내가 전도 되어가지고 교회에 나갔거든요.
성경을 보니까 ‘최창학 전도사님이 이끌지 아니하면 노우호가 구원받지 못하리라’ 이렇게 되어 있는게 아니고,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한다.’
또 44절에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다.’
그러니까 우리가 구원되고 예수 믿게 된 것이 주권이 우리에게 있는 것 같은데, 확실히 내가 맑은 정신을 가지고 내가 예수님을 선택하고 여러 종교 중에 불교를 믿다가 유교도 하다가 샤머니즘도 하다가 그것을 때려치우고 내가 기독교를 선택해서 온 것 같은데, 성경은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였다.’ 그러는 거예요.
그리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다고 말씀하고 있어요.
사람에게 이끌려 온 사람은 왔다가 갑니다.
‘나 여기 안 맞다’ 하면서 가요.
그냥 억지로 사람을 끌고 와도 되는게 아니야.
아버지께서 이끌지 않는 사람은 왔다가 가요. ‘안 맞다’ 하면서 가요.
38절입니다.
38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게 주신 자가 있으면 안 주신 자도 있는 거죠?
요한복음이 좀 어렵죠?
..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선택하셨다면 어떤 사람은 유기된 자도 있는 거죠?
선택하였다는 것은 선택받지 않은 사람도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40절에,
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그러니까 마지막날에 아무나 다시 살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아버지가 예수님을 믿게 해준 사람들만 예수님이 살리는 거예요.
그래서 앞으로 보세요.
정리하면 우리 구원이 창세전, 나중에 에베소서 공부할 때 볼텐데, 창세전에 예정되고 선택되어가지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끌어야 예수 믿게 돼요. 그렇죠?
예수님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죠? 맞아요?
그러니까 아버지 하나님에게 달렸고, 예수님께 달렸어요. 맞습니까?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아무도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부 성자 성령님께 달린 거예요.
분명히 우리가 느끼기로는 내가 여러 종교중에 기독교를 선택한 것 같은데, 성경은 그것은 내가 너희를 선택했기 때문에 너희가 나를 선택할 수 있다..
또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끌어야 예수님을 믿게 되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서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고,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아무도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구원이라는게 내가 예수님을 선택한 것 같은데,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고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것이 누구를 통해서 어떤 경로를 통해서 이루어지는가 하는 것은 사람마다 달라요.
하나님께 나와서 예수 믿게 되는 그 경로는 사람마다 다 다른 거예요.
수가성 우물가에 여인은 ‘내가 주는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한다.’ 이렇게 해서 부름을 받았고,
베드로 같은 경우는 물고기 잡는 사람이니까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이렇게 해서 불렀다는 거예요.
제같은 경우는 ‘집마다 지은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이런 말씀을 가지고 예수님을 따라 나온 거죠.
사람마다 다 다르고 어떤 사람은 예배당 앞으로 지나가다가 찬송가 소리에 감동 받아가지고 그래가지고 교회에 나왔어요.
우리가 처음에 제가 갓 믿었을 때에 시골 작은 교회에서 믿었는데, 그 때는 성탄절 이브 이른바 24일 저녁에 집에 안 가고 다 철야하고 참 열정도 대단했죠.
철야 다 하고 선물 가지고 놀고 하다가 새벽 4시나 되면 어디까지 가느냐?
자전거에다가 초등학교 5-6학년 학생들 뒤에 태어가지고 10리까지 가는 거예요.
10리가 넘는데까지 성탄절 새벽송을 가는 거야.
요즈음은 덜한데 그 때는 성탄절 되면 안믿는 세상이 더 미치죠. 옛날에는..
그 때 통금도 없잖아요.
일반날에는 통행금지가 있었는데, 성탄절 하루밤에는 통행금지가 없었어요.
그래서 통행금지가 없으니까 다 술먹고 세상이 다 미치니까 제일 신경 많이 쓰이는게 경찰관들이죠.
자기 관내에 무슨 사고 터지는가 싶어서..
그런데 한 4시 되면 다 곤드레만드레 되어가지고 세상이 조용해지는데, 우리가 새벽송을 갔는데 지서장이 지금 막 피곤하다가 ‘아이고 젠장 이제 술먹고 다 조용하게 들어갔겠지..’
‘나도 들어가서 자자’ 하고 잘려고 하는데,
‘저들 밖에 한밤 중에..’ 이렇게 우리가 노래를 시골에서 화음이나 제대로 하겠나..
초등학생과 어른이 한 10명 가서 지서 앞에서 노래 불렀다는 거죠.
잠옷을 갈아입고 이불 속으로 들어가는데, 그 노래가 어설프게 부르는데, 어설프게 부를수록 감동이 됩니다.
잘 하지도 못하면서 그 먼데 와서 자기는 세상에 무슨 술먹고 싸움이나 하고 이런 사람들 때문에 염려하는데, 어떤 천사들이 와가지고 천사 비슷한 거죠.
노래 부르니까 너무 감동이 되어가지고 지서장이 이불밑에 들어갔다가 다시 나왔어 옷 갈아입고 나온 거야.
옷 갈아입고 나오니까 노래 다 끝나버렸어.
얼마나 감동이 되었던지 ‘대단히 죄송한데 아까 부른 노래 한번만 더 불러줄 수 없겠느냐’
얼마든지.. 열번이든지 불러주지. 더 불러달라는데..
한번 더 불렀어요.
그래서 커피도 끓이고 사과랑 과자 해가지고 지서 직원들에게 주었는데, 그 날 밤에 우리 새벽송에 감동 받은 지서장이 예수를 믿었어요.
못 타는 자전거 타는법 배웠어요. 지서장이..
교회에 올려고 10리나 더 먼 자갈길을 자전거를 타고 오는 거야. 매주..
그 날 새벽송에 감동을 받아가지고 ..
그러니까 그 사람은 그렇게 하나님이 부르신 거야.
그런데 만약에 그 때 이 양반이 예수 안 믿었으면 예수 못 믿고 죽을뻔 했어요.
그 때 간염을 앓아가지고 예수 믿고 너무 은혜충만한 가운데 B형 간염이 간암으로 되어서 얼마 믿다가 믿음 좋아진 정도 되었을 때 돌아가셨어.
우리 금서 이쪽에는 모르는 사람이 없었어요.
문인협회 회원이고 글도 쓰고 시도 쓰고 이런 분인데, 그 때 성탄절 새벽에 찬송 노래를 듣고 감동을 받아서 이렇게 믿은 사람도 있는 거예요.
이렇게 믿었건 저렇게 믿었건 간에 성경은 말하기를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예수 믿을 수 없다는 거예요.
41절에,
41 자기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라 하시므로 유대인들이 예수께 대하여 수군거려
42 가로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제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로서 내려왔다 하느냐
4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서로 수군거리지 말라
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계속해서 말씀하시죠?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다.
45 선지자의 글에 저희가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46 이는 아버지를 본 자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 자만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아무도 아버지를 본 자가 없습니다. 예수님만 본거죠.
47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48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49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광야에서 40년간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다고..
그러나,
50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예수님 자신의 살을 말하는 거죠.
51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여러분 요한의 증언을 따라서 보면 태초에 로고스가 있었어요. 그렇죠?
이 로고스가 하나님과 함께 계셨는데, 이 로고스는 바로 하나님이라.
이 하나님이신 로고스가 육체가 되어서 우리 가운데 왔다는 거죠. 맞아요?
원 자재가 뭐죠?
로고스 말씀이죠.
그래서 ‘예수님의 몸을 먹는다, 예수님의 살을 먹는다.’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거야.
그래서 예수님의 살을 먹는다고 할 때 그냥 캐톨릭처럼 그것을 먹으면 예수님 살로 변한다 화체설 그런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몸은 원래가 하나님의 말씀이예요.
52 이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가로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그러니까 이해가 안 된다 그 말이죠?
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여기 신령한 양식이 나오는 거죠.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57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58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예수님이 자기 살, 이 살이 바로 말씀이죠. 로고스가 육체가 되었으니까..
59 이 말씀은 예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하셨느니라
60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
61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가라사대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62 그러면 너희가 인자의 이전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볼 것 같으면 어찌 하려느냐
그래서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는 것을 보게 되면, ‘아 정말 위에서 오셨던 분이구나’ 하면서 요한의 신학이 태초에 로고스가 계셨고, 로고스가 하나님과 함께 계셨는데, 이 로고스가 바로 하나님이시다.
이 하나님이신 로고스가 육체가 되어서 오셨는데, 그 육체 살을 먹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로고스를 먹는 것이다. 하는 것이 요한의 신학이거든요.
그래서 이게 이사야서 55장에 있는 말씀이 이렇게 이루어졌다는 것을 예언하는 거죠.
63절,
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예수님의 말씀이 바로 영이요 생명이요 그게 참된 양식이요 그게 바로 로고스라는 거죠.
64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하시니 이는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를 팔 자가 누군지 처음부터 아심이러라
65 또 가라사대 이러하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그러니까 여기에 이렇게 오신 것도, 제가 우연을 잘 안 믿는다고 늘 얘기하죠.
우연을 믿지 않습니다.
오게 하여 준 것도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끌어서 한 것이고, 또 예수님으로 말미암아서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께 갈 것이고, 성령으로 하지 않고는 아무도 예수님을 주시라 할 수 없다는 거예요.
66절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니까,
66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여러분 제자 중에 많이 물렀갔어요.
..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다 가버리고 열두 명만 남았으니까
67 예수께서 열 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너희도 갈래? 너희도 갈 참이냐?’ 했더니,
68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항상 엉뚱한 소리를 하는데, 이날에는 맞는 말을 하는 거죠.
어지간히 가끔 한마디 맞힌다니까.. 이래가지고 체면 유지하고 그런 거죠.
그런데 나중에 예수님께서 ‘그런 것을 네게 알게 한 것도 혈육이 아니고,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성령이 네게 알게 해 준 거야.’
그래서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보고 ‘너 머리 좋다’한 게 아니라, ‘너 복 있는 사람이다.’
여러분 우리가 여기 저나 여러분 중에 머리 좋은 사람 있는지 모르겠는데, 내가 볼 때 머리가 좋은 게 아니고 복 있는 사람이 되어야 돼요.
저는 진짜 사람을 잘 안 믿거든요. 제가요.
보기보다 제가 믿음이 없는 사람이예요. 원래..
그런데 목수들은 다 재어보고 따져보고 헤프게 잘 안 믿는데, 나는 기적 중에 기적이 내가 예수 믿은 거예요.
여러분은 어떻게 믿는지 모르겠는데, 저는 진짜 기적이야.
아주 교만했거든요.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서 깨어지고 무너지고 그리고 믿은 거예요.
69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
70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 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71 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 저는 열 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
여기는 그런 사람 없겠죠?
가룟유다는 자살 했으니까..
그래서 요한복음 6장에는 참된 양식,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은 예수님의 살을 말씀하신 것이고, 그 살은 바로 로고스가 육체가 된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 말씀을 부분적으로가 아니고, 특히 신구약 66권 다 말씀이지만, 특히 복음서에 있는 예수님 말씀이 예수님의 피와 살이라는 그런 마음으로 가지고 잘 새겨들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은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 주님의 살과 피를 함께 묵상했습니다.
우리가 주의 살과 피를 마셨다면 우리도 주님처럼 살게 도와 주옵시고, 주님의 은혜와 진리와 능력이 우리와 함께 하사, 주님께서 육체를 가지고 이 땅에 계실 동안에 이루었던 일들을 우리도 이루어 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