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8년 프랑스 보르도에서 열린 최초의 여성 자전거 대회자전거가 처음 등장했을 때 자전거는 남성들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자전거 타는 여성의 수난
1880년대까지만 해도 여성들은 거리에서 마음대로 자전거를 탈 수가 없었다. 여성들이 자전거를 타면 사람들은 여성답지 못하다고 욕을 하고 돌을 던지기도 했다. 심지어는 자전거를 타는 여성들이 거리에서 폭행을 당하는 일까지 일어났다.
자전거가 한창 보급되기 시작한 1890년대까지도 런던의 부랑아들뿐 아니라 경찰까지도 자전거를 탄 여성들을 조롱했다. 당시 영국에서는 자전거를 타고 질주하는 사람들을 '폭주족'이라고 불렀는데 헐렁한 여성용 바지인 '블루머(Bloomers)'를 입고 자전거를 타는 여성들도 '폭주족'이라고 불렀다.
여성들이 자전거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페달이 달린 자전거가 등장한 1860년대 말부터였다. 이때 이미 여자 자전거 대회가 열렸는데 여자 경기는 아주 인기가 높았다. 이런 사실만 보더라도 자전거가 남성들만의 전유물이 아니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여성들이 자전거를 타기에는 여전히 제약이 많았다. 당시에는 앞바퀴가 크고 뒷바퀴는 작은 하이 휠 자전거가 유행이었는데 하이 휠은 타기가 힘들었다. 자전거를 타다 다치는 일도 많아서 여성들이 타기에는 아주 위험했다. 이 자전거는 건강한 남성들이나 탈 수 있었다. 대신 여성들은 세 바퀴 자전거인 트라이시클을 타거나 남성과 나란히 탈 수 있는 2인용 자전거를 주로 탔다. 여성들의 거추장스런 복장도 자전거를 타는 데 방해가 됐다. 무엇보다도 자전거 타는 여성을 나쁘게 생각하는 사회적인 인식이 자전거 타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 됐다.
자전거 논쟁
이런 사회적인 편견에도 불구하고 용감한 여성들은 자전거를 타고 거리에 나섰다. 이들의 영향으로 차츰 자전거를 타는 여성이 늘어났다. 여성들이 본격적으로 자전거를 타기 시작한 것은 세이프티 자전거가 등장한 1880년대 후반부터다. 세이프티 자전거는 바퀴가 하이 휠 자전거보다 작고 똑바로 앉아서 탈 수 있는 자전거였다. 이 자전거는 오늘날의 자전거와 같은 모양으로 여성들이 타기에도 아주 좋았다.
세이프티 자전거에 이어 공기타이어가 발명되면서 자전거 타기가 더 편해진 덕분에 자전거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세계적으로 자전거 붐이 일어난 1890년대를 '자전거 대유행기'라고 부른다.
자전거 대유행에 가장 크게 기여한 사람들이 바로 여성들이었다. 이때는 상류층뿐 아니라 거의 모든 계층의 여성들이 자전거를 탔다. 미국에서는 1888년 헤리엇 밀즈(Harriette H. Mills) 부인이 미국 최초의 여성 자전거 클럽을 만들었다. 미국 언론들은 많은 여성들이 자전거를 타고 있으며 미국 전역에서 여성 자전거 클럽이 생겨나고 있다고 보도했다. 전체 자전거 시장에서 여성의 수요가 3분의 1이상을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자전거 타는 여성이 늘어나면서 자전거가 여성에게 적합한지에 대해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성직자, 의사, 여성운동가, 언론인 등이 이 논쟁에 뛰어들었다. 당시 신문과 잡지에는 자전거가 여성에게 해로운 것인지 유익한 것인지에 대한 논쟁이 끊이지 않았다.
사회지도층 인사들 중에는 자전거가 여성에게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해를 끼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워싱턴의 여성 구조연맹은 자전거가 불임을 유발하고 남성과의 부적절한 관계를 부추긴다고 주장했다. 미국의 유명한 목사인 클리브랜드 콕스는 여성 라이더를 '빗자루를 탄 노파'에 비유하기도 했다.
자전거를 앞세우고 여성 대회에 나온 여성참정권운동가들19세기 말까지 자전거는 여권운동의 상징이 됐다.
여성이 자전거 타는 것을 옹호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어느 사이클 애호가는 "자전거 타기는 지금까지 개발된 스포츠 가운데 가장 상쾌하고 건강에 이로운 운동이다. 남성과 여성, 아이들 모두 자전거를 즐길 수 있다"고 말했다. 사이클링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적극적이고 주체적인 젊은 여성들이 다른 사람의 생각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전거를 즐기면서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가는 모습은 매우 신선하다"고 말했다.
가장 적극적으로 여성이 자전거 타는 것을 옹호한 사람들은 바로 여성참정권운동과 여성인권운동을 펼친 여성 지도자들이었다. 이들은 자전거를 여성해방의 도구로 인식하기에 이르렀다. 선구적인 여성 지도자들이 모든 계층의 여성에게 자전거를 적극적으로 권했다. 당시 사회적 관습에서 벗어나 남성과 여성을 동등하게 보고 자신의 권리를 적극적으로 찾으려는 새로운 유형의 여성들이 등장했는데 이런 여성을 '신여성(New Woman)'이라고 불렀다. 자전거는 신여성의 상징이 되었다.
자전거를 옹호한 대표적인 여성 지도자는 프란시스 윌라드(Frances Willard)와 수전 B. 앤서니(Susan B. Anthony)다. 윌라드는 미국 여성참정권운동가이자 세계기독교 여자절제회를 창설한 여성 지도자였다. 그녀는 53세가 되던 해에 건강을 위해 자전거를 배웠는데 그 뒤 자전거 예찬론자가 돼 여성에게 자전거를 타라고 권했다. 그녀는 《나는 어떻게 자전거를 배웠는가》라는 책에서 자전거가 여성의 독립심을 높이고 자신감을 갖게 한다고 말했다.
"자전거 타는 법을 배우는 데 성공하는 여성은 인생에서 성공하는 방법을 알게 될 것입니다."
자전거를 옹호한 대표적인 여성 지도자인 프란시스 윌라드
미국의 여성참정권운동가인 엘리자베스 캐디 스탠턴(왼쪽)과 수전. B. 앤서니(오른쪽)
윌라드는 여성들도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개척해 나가는 법을 알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19세기 후반 미국의 여성참정권운동의 지도자였던 수전 B. 앤서니는 "자전거 타기가 모든 여성을 위한 우아하고 건강에 좋은 운동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마침내 의학계의 권위자들도 적당한 사이클링이 남녀 모두에게 이로우며 건전한 운동이라는 데 의견을 모았다. 1890년 중반부터는 상류사회 사람들이 자전거를 타기 시작하면서 자전거에 대한 갖가지 반대 여론이 많이 누그러졌으며 자전거를 대중적인 스포츠로 인정했다.
사람들의 생각도 바뀌기 시작했다. 1891년 어느 여성라이더는 "자전거 타는 여성들이 더 이상 질서를 어지럽힌다는 비난을 받지 않으며 오히려 사람들이 자전거 타는 여성에게 미소와 격려의 말을 보낸다"고 말했다.
복장개혁을 이루다
빅토리아 시대에 서구 여성들은 몸에 꼭 끼는 코르셋, 긴 드레스, 모자, 장갑 때문에 생활하기가 아주 불편했다. 19세기 복장개혁론자들은 이런 답답한 복장에서 벗어나야 한다며 여성들의 복장개혁운동을 펼쳤지만 쉽게 이뤄지지 않았다.
1849년 미국의 아멜리아 블루머(Amelia Bloomer)는 무릎길이의 헐렁한 바지인 블루머(Bloomers)를 제안했다. 이 옷은 여성적인 면도 있는 데다 아주 실용적이고 편했다. 그런데 블루머는 일부 여성들의 지지를 얻은 반면 보수적인 사람들의 엄청난 비난을 받아 격렬한 찬반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이 옷이 비난을 받은 가장 큰 이유는 남녀를 구분할 수 없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의 시달림을 견디지 못한 블루머 여사와 그녀의 친구들은 결국 이 옷을 포기했다. 그 이후로 블루머는 일부 사람들만 입거나 자전거를 탈 때 입는 옷으로 남게 되었다.
19세기 여성들의 복장개혁은 뜻밖에도 스포츠에서 시작됐다. 당시 여성들의 스포츠나 여가 활동은 상류층에서 주로 즐기는 승마와 궁술 정도가 전부였다. 그러다 차츰 골프, 테니스 등으로 확대됐는데 운동을 할 때는 여성도 간편한 복장을 입을 수 있도록 허용됐다. 1890년대 자전거 붐이 일면서 간편한 옷을 입는 여성들이 많아졌다. 당시의 긴 드레스를 입고는 자전거를 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자전거 붐은 새로운 옷을 탄생시켰고 새로운 패션의 물결이 일어났다. 자전거를 타는 여성들은 간편한 블루머나 짧은 스커트를 입었다. 이런 옷은 보수적인 사람들의 반감을 샀다. 그러나 거리에 자전거 타는 여성들이 많아지면서 마침내 여성들은 불편하고 거추장스런 복장에서 해방됐다. 자전거 붐으로 복장개혁이 쉽게 이뤄진 것이다.
1897년 런던의 세인트 제임스 공원에서 자전거를 타는 여성당시 블루머를 입고 자전거를 타고 질주하는 여성들에게도 '폭주족'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블루머 여사는 실용적이고 편한 여성복인 '블루머'를 제안했다.
19세기 말의 전통적인 의상(오른쪽)과 자전거 의상(왼쪽)자전거 보급으로 복장개혁이 일어났다.
여성들이 자전거를 탈 기회가 많아지면서 여성들은 남성과 함께 자전거를 타고 부모의 감시를 벗어나 멀리 갈 수 있게 됐다. 남녀가 자연 속에서 함께 자전거를 타다 보면 자연히 연애감정이 싹트게 마련이다. 19세기 말 자전거 대유행기에는 자전거를 타면서 생긴 남녀의 로맨스가 신문과 잡지를 장식했다.
19세기 후반 미국 여성참정권운동의 지도자였던 수전 B. 앤서니는 1896년 〈뉴욕 월드(New York World)〉의 유명한 여기자였던 넬리 블라이(Nellie Bly)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전거는 여성해방을 위해 세상의 다른 어떤 것보다도 더 많은 일을 했습니다. 자전거는 여성에게 자유와 독립심을 가져다줬습니다. 저는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여성을 기쁜 마음으로 바라봅니다. 그것은 자유롭고 구속받지 않는 여성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자유의 기계
19세기 말이 되면서 여성들은 자전거를 타고 자유롭게 거리를 달릴 수 있게 됐다. 그전까지만 해도 이동할 때면 남성이 태워주는 마차를 기다리거나 남성의 도움을 받아야 했지만 이제는 여성들도 자전거를 타고 혼자서 얼마든지 이동할 수 있게 됐다.
자전거는 여성들의 활동 범위를 넓혀줬다. 집과 마을을 벗어나 좀더 넓은 세상을 향해 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자전거는 여성들에게 자유를 가져다줬다. 그래서 여성들은 자전거를 '자유의 기계(Freedom Machine)'라고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