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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은 제자들에게 주어진 약속
마태복음 19장 27-30절/ 27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28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29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30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병행구절, 막 10:28-31; 눅 18:28-30)
본문의 배경
본문은“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라고 하는 말씀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여기서의‘이에’는‘그때’,‘그 당시’를 뜻합니다. 이‘그때’는 본문에 앞서 어떤 일인가가 있었던 것으로, 그 일의 내용이 있었던 그때에 본문의 내용이 등장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유대인의 관원이면서 부자인 한 청년이 예수님에게 나아와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을 것인지를 묻는 질문에 하나님의 계명에 온전할 것을 말씀하시면서 어렸을 적부터 그 계명을 다 지켜옴으로써 온전하다고 여기는 그에게 부족한 한 가지를 알게 해 주시니 그가 가진 재물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그는 그가 구하는 영생의 주이신 예수님을 따를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재물이 많은 부자 청년은 이로 인해서 잠시 근심하였습니다만 그가 택한 것은 영생하시는 주 예수님이 아닌 그가 탐하는 재물이었습니다. 그런 그는 예수님을 좇지 않고 떠났습니다. 그런 그를 보시면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다”고 하시며,“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울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9:23-24). 이 이야기를 듣는 제자들은 크게 놀라워하며“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마 19:25)라고 물었는데, 예수님은 그 답변을 주셨습니다.“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다”(마 19:26).
예수께 여쭙는 베드로의 의도
본문은 이러한 이야기가 오고 간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여쭙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베드로는“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겠습니까?”베드로는 어떤 생각에서 이러한 질문을 했을까요? 유대인의 관원이요 부자인 한 청년은 재물이 많은 까닭에 근심하다가 예수님을 따르지 않고 떠나는 것을 보면서, 그러한 그는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차라리 쉬울 만큼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며, 그 하나님의 나라를 들어갈 수 있기 위하여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하나님이 하신다는 말씀을 들을 때, 베드로를 비롯하여서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신 그 말씀이 의미하는 바를 깨달았어야 합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이에 대해서는 아무런 생각을 갖지 않고 다만 자신과 자신의 동료들을 그 청년과 비교를 하였습니다. 관원이요 부자인 청년은 재물이 많은 것으로 인해 근심하다가 예수님을 따르지 않고 돌아갔지만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은 자신들을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께서“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막 1:17) 라고 부르실 때 주저 없이 배와 그물도 놔두고 부친의 곁을 떠나 즉시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이는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에 베드로는 그러한 자신과 동료를 상기하면서 예수께“보십시오.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는데, 그러한 우리는 무엇을 받게 되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마가는 단지“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습니다”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누가도“우리가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 주를 좇았습니다”(눅 18:28)라고 하였으나, 마태는 보다 구체적으로 그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인 해석에 의한 베드로의 의도 : 그렇다면,“저희가 무엇을 받겠습니까?”란 베드로의 이 물음은 26절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과 연계하여 감안해서 볼 때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은 일에 대한 보상으로 구원(영생, 천국)이 있지 않겠느냐는 기대를 말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대체적으로는 베드로가 구원을 보상으로 원했다는 것으로 해석하여서 설명을 합니다만, 문맥에 의한 의미의 파악에서 보면 견해를 달리 합니다. (1)칼빈은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자신들을 그리스도께 바친 것이 헛되지 않은지 묻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주님에 의하여 더 나은 보상을 얻지 못하고 도리어 탈취를 당한다면 이는 극히 부당한 일일 것이니 확실히 어떤 보상이 제자들을 위해 별도로 마련되지 않았다고 가정하면 그들이 그들의 인생행로를 바꾼 것은 지극히 어리석은 행위였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칼빈이 이러한 해석의 입장을 취한 것은 당시 교황 정치에 가담하고 있는 거지라고 호칭되기에도 넉넉하지 못한 자들이 복음을 위하여 큰 손실을 당하고 있다고 오만하게 불평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있는 때문입니다. (2)도널드 헤그너는 베드로가 다른 제자들의 대변인으로 제자들이 예수를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린 대신 어떤 상을 기대할 수 있을지에 대한 질문을 제기하였다고 봅니다. 베드로의 이 질문은 앞에서 부자 청년이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줄 것을 거부했기 때문에 있게 된 것으로, 예수께서는 그 청년에게‘하늘의 보화’를 약속하셨으므로 제자들은 자신들의 순종으로 무슨 보상을 받을 수 있을지에 관심이 있었다고 본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를 따르기 위해 자신들의 모든 것을 버린 것이 그렇지 못한 부자 청년과 비교되어 자기만족을 드러내며 그에 따른 보상이 말씀될 것을 기대하였을 것으로 봅니다. (3)그런가 하면 제자들 가운데 대표라 할 수 있는 베드로는 자신들이 많은 재물로 인해 근심하며 예수를 떠났던 부자 청년과 달리 모든 것을 희생하고 예수를 좇았으나 구원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하나님이 하신다는 말씀을 들음으로 자신들의 구원의 확실성에 대한 불안한 마음에서 자신들이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물음으로써 자신들은 과연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 알고 싶었던 것이라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문맥적인 해석에 의한 베드로의 의도 : 그러나 베드로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름으로“우리가 무엇을 얻겠습니까?”라고 말하는 것에서의 보상에 대한 이해는 본문에 이르기까지 전개되어온 문맥에 의한 의미에서 볼 때 다른 개념으로서의 보상을 원하고 있었다고 여겨집니다. 본문과 가까운 문맥에서 마태복음 18장 시작되고 있는 제자들이 가진 하나님 나라와의 관계성은 누가 하나님 나라에서 더 큰 자일 것이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한 부자 청년이 자신을 어렸을 적부터 율법을 다 지켜왔다며 그러한 자신이 영생을 얻기에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를 예수님에게 물을 때“너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너는 가진 재물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나를 따르라”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부자 청년이 따르지 못하고 예수님을 떠남으로 부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고 하시는 말씀을 베드로와 제자들은 들으면서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은 자신들과 대조가 되었습니다. 더욱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면 과연 누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인지를 베드로가 물을 때 예수께서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는 말씀을 하시자 베드로는 마음에 품어오고 있었던 질문을 하게 되었습니다.“주께서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저희는 주님을 좇았습니다. 그런 저희는 하나님의 권능으로 구원을 받고 천국에서 영생하는 것 맞지요? 그런데 주님을 좇기 위하여 저희는 모든 소유를 버렸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저희는 주와 주의 나라를 위해서는 목숨을 버릴 희생도 각오되어 있습니다. 저희는 주의 곁 가장 가까이에 있으면서 주와 주의 나라를 위해서 살고 싶습니다. 하오니 주께서는 그러한 저희에게 무엇을 주고자 하십니까? 저희가 주께로부터 받을 것은 무엇입니까?”하고 주와 주의 나라를 위해서 충성스럽게 살고자 하는 자리(위치)를 묻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이 물음은 제자들이 물었던“천국에서는 누가 더 큰 자입니까?”(마 18:1))라는 것에서 여전히 단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못한 것이며,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무엇이든지 우리가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막 10:35)라고 하며“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막 10:37)를 구함에 있었던 생각에 계속해서 있는 것입니다. 여전히 천국에서는 어떤 사람이 가장 높으며 위대할 것이냐는 생각에서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러한 생각을 갖는 것은 자신의 영달을 위한 욕망에서는 아닙니다. 주의 곁 가장 가까이에서 주와 주의 나라를 위해 충성할 수 있는 자리를 생각하는 욕망에서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죽음을 당하실 것을 예고하실 때도, 예수께서 체포되실 때도 그 자리에 있었던 베드로가 한 말과 행동에서 잘 나타나 있습니다(마 16:22; 26:35)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른 제자들이 주께로부터 얻을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치심
이에, 예수님은 베드로와 그 동료 제자들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름으로 얻는 것이 무엇인지를 바르게 잡아주시는 말씀을 하십니다. 여기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모두 세 가지로 되어 있습니다.
첫째, 제자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름에 있는 것이 무엇을 위해서 있게 하신 일인가 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마태복음 본문에서는“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지파를 심판하리라”(28절)를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새 세상이 되어 인자가 하나님 나라에서 영광스러운 보좌에 앉을 때에 자신을 좇는 제자들도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새 세상을 언급하신 것은 예루살렘에 올라가 십자가에서 겪으실 죽음과 그 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는 부활을 아직 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이제 곧 이 일을 겪으심으로 오게 될 세상을 염두에 두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과 부활로 인하여 오게 될 하나님 나라로 인하여 새 세상이 되면 그 나라에서 영광스러운 보좌에 앉으시고는 이스라엘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은 이 하나님의 크신 자비를 입음으로써 새 세상인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이들이 그 나라에서 어떤 존재로 있게 되는가를“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지파를 심판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는“너희들은 하나님 나라에서 누가 더 큰 자가 될 것인가?”에만 관심이 있고 그로 인해서 받을 영광의 기대 속에 있는데“아니다! 너희들은 그런 기대를 단 조금도 가질 수가 없다. 너희들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면서까지 하며 주와 주의 나라를 위해서 살 것에 어울리는 적절한 자리가 주어질 것을 바라고 그 기대를 가지고 있지만, 너희들에게 그러한 행동이 취해지며 나를 좇은 것은 너희를 하나님 나라로 받으시는 하나님의 크신 자비에 따른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의 크신 자비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온 너희들은 그 나라에서 내가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아 내가 하는 일인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할 것에 너희도 함께 할 것이다”를 말씀합니다.
여기서 말씀해 주시고 있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열두 보좌에 앉아 열두 지파를 심판하실 것이라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요.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를 인하여 새 세상이 될 때 일어날 일인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보좌에 앉으신다는 것은 이해가 어렵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부활로 하나님 나라에서 왕으로 다스릴 영광을 받으시고 세상을 심판하실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데 제자들도“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는 약속을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제자들이 받은 약속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이후에 있을 장차 있게 될 일에 대한 것입니다. 이 약속에 의해서 제자들은‘열 두 보좌’에 앉아 재판장이신 예수님과 함께 열 두 지파를 심판하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열 두 보좌는 숫자적인 것이 아닌 뒤의‘열 두 지파’에서 말해지고 있는 이스라엘의 지파와의 연관에 의한 것으로, 열 두 보좌는 열 두 지파의 대표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보좌와 함께 할 열 두보좌에 앉게 될 열 두 지파는 구약적 관점에서가 아닌 새 세상에서 있게 되는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열 두 지파입니다. 열 두 지파로 형성되는 이스라엘은 장차 드러날 참이스라엘로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의 모사와 정형이 될 것으로, 이스라엘 나라에서 나오는 자들과 함께 동서로부터 나오는 많은 이방인들이 새로이 등장하는 이스라엘을 이룰 것입니다(마 8:11). 그렇다면 이 이스라엘은 사도 바울이 로마서 2:29에서 참 이스라엘을 말하는 바인“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에서 보는‘이면적 유대인’을 뜻하는 것이며, 이는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통일(연합)하여 하나 됨에 있는‘그리스도의 교회’를 이룹니다. 열 두 제자는 이 교회를 세움에 있는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의 연결을 위해 사도로 세움을 받은 자이니, 열 두 보좌에 앉을 새로운 열 두 지파로 대표됩니다. 예수님이 이 열 두 제자를 예수님이 앉으신 보좌의 곁을 의미하는 열 두 보좌에 앉히실 것을 말씀하시는 것은 자신의 곁에 두시고서 그들과 함께 하실 일을 알려주시는 것에서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사람들에게 버린바 되고 십자가에 달려 죽음을 당하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삼일 만에 부활하시는 것은 자신의 구원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을 온 땅에서 모아 새 세상에 참여시키실 것이며, 그들의 왕으로서 영원히 그들을 다스리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 그리스도의 왕 되신 통치에 예수님의 열 두 제자가 함께 하게 됩니다. 그러한 것에서‘심판하리라’란 말에 사용된 단어는‘통치하다’,‘다스리다’로도 번역될 수 있는 것으로, 이 뜻의 번역이 더욱 적절합니다.1) 이것의 실행이 언제 시작될 것인지를 예수께서는 승천하실 때 하신 말씀인 사도행전 1:8에서 알려주셨습니다.“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그러니 예수님의 제자들이 열두 보좌에 앉아 열두 지파를 심판하실 것을 말씀해 주신 것은 예수님이 열 두 제자를 부르는 일을 하시고 자신의 곁에 두시는 목적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 주시는 것으로, 구약의 이스라엘을 대신하는 새로운 이스라엘의 등장을 위한 것이라는 하나님이 작정하신 계획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제자들은 새로운 세상, 곧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예수님과 함께 장차 사도로서의 활동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이 앉으시는 자리로 말해지고 있는 보좌, 곧 열 두 보좌에 앉을 것이라는 말씀을 통해서 그들이 예수께 구하는 하나님 나라에서 입을 영광이란 것이 그들이 자기들의 모든 소유를 버린데 따라서 거기에 적절한 합당한 대우가 주어져 지위를 얻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권세로써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 나라로 모으는 것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해 주시고 있습니다(참조. 마 28:18-20). 따라서 예수께서 제자들이‘열 두 보좌에 앉아 열 두 지파를 심판하실 것’이라는 말의 참 뜻은 열 두 지파로 대표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스라엘을 대신하는 새로운 이스라엘을 이루게 되는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위하여 제자들이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을 말씀해 주십니다.
해서,“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에서 우리가 무엇을 받겠습니까?”라고 묻는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그들이 그러한 행동을 취한 결과로서 그들이 얻게 되는 기대치의 보상에 대하여 말씀해 주시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무엇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로 오셔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음의 고난을 받으신 후 부활하셔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 아직도 이해에 있지 못함으로 예수님을 따름에서 믿음을 보여야 할 믿음에 여전히 있지 못하고 하나님의 나라에서 큰 자가 되고자 하는 높은 자리에만 마음이 있음으로 예수님은 자신이 이루실 새로운 세상에 관심을 두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열 두 보좌에 앉아 열 두 지파를 심판(통치)함에 있게 되는 것은 그들이 자기 소유를 모두 버리고 주를 좇으며 주와 주의 나라를 위해서 살고자 구하는 것에 맞는 보응(보답/보상)에서가 아니라,“구원은 하나님이 하신다”를 말씀하시는 것에서 나타내신 예수님에게 있는 능력이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그들을 부르신 은혜에 따른 것입니다. 그러니 제자들은 자기를 위하여 사람의 일을 생각함에서 예수님을 따름에 있을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행하여 나가시는 구속 사역에서 하나님의 일을 생각함으로 예수님을 따름에 있어 나가야 합니다.
둘째, 예수께서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르며 주와 주의 나라를 위해서 사는 제자들이 주께로부터 받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시는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께서는“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어떤 사본에는,‘부모나’아래에‘아내나’가 있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가복음에서는“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누가복음에서는“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현세에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각 복음서는 표현을 약간씩 달리하고 있습니다만, 말씀해 주시는 내용과 의도는 같습니다. 그런데 이 구절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의도와는 다르게 해석되어서 설명되는 대표적인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분이 이 구절을 들어서 성도들에게 헌신을 강조하며 백배의 축복을 받을 것을 말하는지요!. 그러나 예수님이 하신 말씀의 의도를 이해하면 그것이 얼마나 하나님의 뜻을 곡해하여 잘못 가르치고 있는 것인지를 알게 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습니다. 그러니 하나님 나라에서 우리가 무엇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를 물을 때 새 세상이 되어 인자가 그 나라에서 영광스러운 보좌에 앉아 하시는 일이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로 말해지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다스리는데 있으며, 그 인자가 하는 일을 위하여 제자들의 부르심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해 주었었습니다. 그리고서 그 이야기와 함께 이 구절을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그런 연유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열 두 보좌에 앉아 열 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라고 하심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되는 새로운 이스라엘인 그리스도의 교회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을 좇기 위해서 소유하고 있던 그물과 배를 바닷가에 그대로 놔두고, 또한 부모로부터 떠남으로써 그 모두를 잃었다고 하는 제자들에게2) 예수님은 그들은 잃어버렸다고 하는 그 모든 것을 하나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 이상인 여러 배(또는 백배)를 얻고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좇기 위해서 모든 것을 버렸다고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의해 하나님 나라가 그들의 것이 됨으로 해서 그들이 소유하고 있었던 가족과 집과 토지 등 모두의 소유권이 하나님의 나라로 이전되어서“백배나 받을 것이다”란 표현이 지니고 있는 암시적 의미에서 말해지고 있듯이 더욱 풍성하게 받게 됨에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그의 집이며 땅이고, 그 나라의 모든 백성이 그의 가족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영생과 함께 얻습니다. 그러니 예수께서 말씀하신 의도는 하나님 나라의 영원성에 의한 소유 개념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가족과 집과 토지란 실상은 소유되지 않습니다. 그 모두는 없어질 것이어서 잃어버려지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심지어는 자기 목숨까지도 주를 위해서 희생할 것을 각오하였습니다. 그러한 베드로는 그렇게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리면서까지 주를 좇음으로 주께로부터 받을 더 나은 보응(보상)을 기대하였습니다. 그러한 베드로에게 주를 좇음으로써 얻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영생을 약속으로 주셨습니다. 그가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서가 아닌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보내심으로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고자 하는 하나님 나라와 영생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에 의해서 이제야 말씀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율법과 선지자들을 통해서 끊임없이 말씀해 오신 처음부터 약속으로 주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의 의도는 하나님이 뜻하신 대로 다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지금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는 것에서 비로소 약속으로 주시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선지자를 통해서 약속으로 주신 것을 재확인시켜 주시며 그 믿음에 있게 하시는 것으로서 약속하여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너희가 나를 따름으로 형제와 자매와 부모와 자식과 전토를 다 잃었느냐? 너희는 나를 따름으로 잃은 형제와 자매와 부모와 자식이 너희가 밟고 보는 땅의 티끌처럼(여러 배/백 배) 많을 것이니 광대한 하나님의 나라가 그 집을 이룸에 있는 터가 될 것이다. 그러니 모든 것을 버리고 나를 따른 너희는 그 보답으로 너희를 통해 세워나갈 교회를 통해 너희 주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받을 것이므로 내세에서 너희가 땅의 티끌처럼 받은 너희 형제와 자매와 부모와 자식과 함께 영생하지 못할 자가 아무도 없을 것이다!”를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것이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은 제자들이 그들의 주께로 받을 복입니다. 예수님은 이 약속을 성취시키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 것이며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하신 후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시는 일을 하시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이루신 이 약속 안에서 복을 받았습니다. 온 땅의 모든 사람들이 예수께 나와 그분의 몸으로 하나 됨에 있는 교회를 이루는 것을 통해서 광대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생함에 있는 한 믿음의 가정을 이룬 형제와 자매와 부모와 자식을 얻었으며, 이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많아지면서 더욱 커질 것입니다.
셋째, 예수님은“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누가복음에서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신 것은 베드로를 비롯하여서 제자들이 하나님 나라를 오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예수께 질문한 의도에서 자기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다는 것을 내세우며 주를 위해서 주의 가장 가까운 곁에서 충성스럽게 헌신할 어울릴 수 있는 자리를 기대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그에게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리고서 주를 좇았으며 주께 충성하여 자기의 목숨을 바칠 생각을 가지는 그것으로 하나님 나라에서 가장 높은 자가 되는 첫째 자리를 차지하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말씀해 주시면서, 그럼에도 그런 기대를 갖고 있다면 그는 첫째 자리의 가장 높은 자가 아니라 사실은 가장 말석의 낮은 자가 될 것이어서 그가 바라본 자리는 가장 말석의 낮은 자의 것이 될 것인데 이런 자가 많을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높은 자리에 앉던 자가 낮은 자리로 쫓겨나 바꿈을 하게 되고 대신에 낮은 자리에 앉던 자가 생각지도 못한 높은 자리에로 옮겨가게 된다는 자리의 순서가 뒤바뀌게 될 것을 말씀해 주시는 것에서가 아니라, 다음의 주의를 갖게 하는 두 가지의 가르침에서 입니다.
하나는, 하나님 나라의 질서는 이 세상 나라와 같지 않아 높은 자리와 낮은 자리의 서열 의식으로 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 생각에서 주를 따름에 있다면 그는 주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하고 가장 낮은 자리에 앉은 자에 다름 아닐 것입니다. 그러니 주를 따름에 있는 자에게서의 하나님 나라는 자기 소유의 포기에 따른 보상으로나 또는 자기의 목숨을 주께 바칠 헌신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자리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자비를 입음에 있어 그 은혜를 감사하며 하나님을 경외함에 있는 자에게서는 그를 위해 준비된 하나님의 보좌와 함께 하는 참으로 높은 고귀한 자리입니다.
또 하나는, 베드로의 물음에서 인간의 마음 깊이에서 끈질기게 나오는 본성의 악함을 예수께서 드러내 주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에는 베드로의 물음에서 나타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큰 자가 되고자 하는 욕망을 그 외의 다른 제자들에게서도 보게 되는 것임을 의도하고 있습니다. 복음서를 순차적으로 보면서 계속해서 여전히 보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하면서도 그들의 주께서 일해 나가시는 구속 사역의 이해에 따른 믿음에 여전히 있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그들은 언제나 자기를 위하여 품고 있는 육신의 욕망을 드러내고 있는 모습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알아보고 따르며, 예수님이 주님이심은 그리스도이시오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고 고백하는 믿음에 있어 오지만, 이 믿음에 있어 믿음으로 있어야 할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과 그와 관련한 구원과 하나님 나라 진리의 이해, 그에 따른 그리스도를 의존함 등에서 마땅히 보여야 할 믿음에서는 믿음이 없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에 따라서 예수께서 검과 몽치를 들고 온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보낸 큰 무리에 의해서 사로잡혀 서기관들과 모든 유대 지도자들이 모여 있는 대제사장 가야바 앞에로 끌려가 심문을 받을 때 베드로는 자신을 알아 본 한 여종의 고자질에 자신은 예수님을 모른다며 예수님의 제자임을 세 번이나 부인하였는데, 다른 제자들 또한 목자에게서 흩어진 양들의 모습이었습니다(마 26:47-75; 참조. 슥 13:7). 제자들에게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권능이 들어오기 전에는 이러한 인간의 악한 본성은 죄의 지배에 의해서 그 힘을 권세 있게 발휘합니다. 그에 따라 인간의 악한 본성에 자리하고 있는 죄의 권세는 베드로와 그의 동료 제자들에게서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른데 무엇이 주어질 것인지를 기대하는 욕망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러한 제자들에게서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것이 될 것인지를 말씀하셨으니, 자신들이 기대하며 바라보았던 모든 것을 상실함에 있게 될 것이란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다고 하였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은 그리스도의 교회 된 특성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릴지라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며, 영생하지 못합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선한 자가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선하신 분은 오직 한분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며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해 주셨고 자신의 생명 안에 우리를 두고 영생하게 해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의 주로 받아 믿는 것에서 보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로 말미암아 자기 마음에 품고 있는 바가 생각과 행동으로 나타나기 마련이니,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주 되님을 말하며 그분을 의존함에 있어 그분 안에서 하나님을 공경하며 선하신 하나님을 좇아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며 그 일을 해 나감에 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심에 있은 하나님의 능력은 구원 받은 자와 함께 하며 그의 삶을 어거(馭車)해 나가십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이것을 말해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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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태복음 19장 28절의 ‘심판하다’라는 말의 헬라어 원어는 ‘통치하다’로도 번역될 수 있다. ‘심판하다’라는 말은 제자들에게 임할 미래의 영광을 오직 그들이, 인자가 세상을 심판하는 일에만 참여한 것으로 제한하는 인상을 줄 수 있다. 그러나 20:21; 눅 22:29, 30; 계 3:21과 비교하여 볼 때, 예수께서 특별히 심판의 날 이후에 주어질 제자들의 영광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이라고 생각된다. 예수께서 다른 곳에서 심판 날에 대하여 말씀하실 때 인자를 동행 할 자는 제자들이 아니라 천사들이라고 말씀하셨다(마16:27; 25:31; 참고 계14:14-20). 그러므로 제자들이 심판에 참여하지 않을 것은 아니나, 이 단어는 ‘통치하다’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2) 제자들이 그물과 배와 가족 모두를 버린 것은 그들 자신의 목숨으로까지 확대된다. 요한복음 13장 36-37절에는 예수께서 아버지께로 돌아갈 때가 되었음을 말하자 베드로가 그 말의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서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를 물을 때 예수께서 “지금은 내가 네가 나와 함께 갈 수 없지만 언젠가는 네가 나를 따라올 것이다”라고 말씀하였는데, 그 말씀을 들은 베드로는 말하기를,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라고 말한다. 베드로는 이렇게 자신의 목숨을 내어 놓으면서까지 주님을 위해 죽을 각오가 있었으며 이는 진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