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 시절의 추억
김시종
벌써 가을이다. 하늘은 높고 날씨는 청명하다. 조개구름이 몽실몽실 떠도는 구름의
흐름은 사춘기의 남녀의 마음을 심란하게 만든다. 들녘의 오곡 백화가 가을을 재촉하듯 가을은 깊어만 간다. 청명한 밤하늘의 별은 별자리를 지키며 휘황찬란하다. 이때 줌이 되면 그리워지고 보고 싶은 옛 친구가 생각난다. 그는 나를 만나면 때에 따라 답답한 심정을 토해낸다. 그 학생은 항상 해가 서산에 머물 때 등교하는 야간부 고등학생이다. 등교 길목인 삼덕 로터리에서 간혹 연모하는 여학생을 볼 때마다 가슴이 설렌다고 한다. 나는 그 친구의 로맨틱한 생각이 부럽기도 하였고, 우습기도 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면 날이 밝아 온다.
이른 새벽이다. 성당의 종탑에서 울려 퍼지는 종소리에 잠에서 깼다. 문틈으로 은은히 들리는 종소리가 파노라마가 되어 멀리멀리 퍼져만 가는 듯했다. 새벽 4시다. 잠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주섬주섬 주워 입고 대문을 나선다. 서울서 내려오는 통일호 열차 시간을 맞추기 위해서다. 대구역에 4시 30분에 통일호가 도착한다. 통일호의 각종 수화물 중 빠지지 않은 수화물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중앙지의 조간신문이다.
나는 자전거를 타고 새벽 공기를 가르며 대구역을 향해 부지런히 페달을 밟는다. 이른 새벽이라 적막감마저 감도는 공간 속에 나 혼자만이 자전거를 타고 새벽을 가르며 질주한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오래된 옛이야기이다. 육십 수년이 지난 세월이 추억 속에 가물거리는 듯했다.
대구역에 방금 도착한 통일호 화물칸에서 수화물을 하차하는 인부들의 손놀림이 분주하다. 나 역시 동아일보 서부지국의 신문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당시 신문한 뭉치가 천부씩 포장되어 있었다. 대구역에 도착한 수화물은 여러 신문사의 신문이 한꺼번에 도착하기 때문에 선별에 신경을 곤두세운다.
특히 동아일보 대구지사의 신문이 가장 많았고, 서부지국의 신문은 두 뭉치였다. 당시 자유당 시절이라“못 살겠다 갈아 보자”라는 구호가 전국 방방곡곡에 메아리칠 때 동아일보가 대중에게 가장 인기 있는 신문이었다. 고바우 만평이나 연재소설이며 정부를 비판하는 기사가 그러했다. 나는 지국의 신문 두 뭉치를 싣고 달성공원 앞 네거리에 있는 서부지국을 향해 달린다. 당시 지국장은 사진기자였다. 나는 서부지국의 신문 배달원으로 종사 중 성실함을 인정받아 총무로 승진했다.
총무는 동료들에게 동 구역별로 신문 부수를 나누어 준 후 새벽 6시경에 배달하기 위해 지국을 나선다. 내가 구독자에게 배달할 신문은 이백 부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가가호호를 방문하면서 신문이 젖지 않도록 주의하며 구독자에게 전달했다. 호별 방문 중 새로운 구독자를 확보하기 위해 신문값을 받지 않은 무가지 신문을 미래 구독자를 위해 투입할 때가 종종 있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 무가지 신문을 보낸 집을 방문하며 신문 구독을 권유하기도 했었다.
교복과 교모 차림의 학생이 구독 신청을 간청하면 새로운 구독자가 늘어나기도 했다. 신문 부수가 늘어나면 확장된 만큼 확장 수당이 있었다. 나의 신문 구독자는 날이 갈수록 불어만 갔다. 나 스스로 개척하고 확장한 독자들이다. 어떨 때는 구독자의 소개로 확장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날은 일수도 좋고 기분이 상쾌한 날이기도 하였다. 신문 배달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해는 중천에 떠 있다.
내가 신문을 배달하기 위해 새벽마다 걷는 길이 통상 사십 리가 넘었다. 매일 새벽 구독자를 찾아 호별 방문하다 보면 전신은 파김치가 된다. 구독자 중에는 다양한 사람이 많았다. 고교생이 있는가 하면 대학생 또는 주부, 직장인, 고령의 노인층 등의 구독자였다.
어떤 구독자는 날이 밝아지면 대문간에서 신문을 기다리는 독자도 간혹 있었다. 당시 시국이 어수선하고 급박하다 보니 오직 신문을 통해 세상사 돌아가는 세태가 궁금한 탓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방문 중 어쩌다가 여고생과 마주칠 때는 가슴이 멈칫할 때도 있었다. 비록 신문 배달을 할망정 여학생 앞에서는 자존심이 발동하는 듯 엄숙해지기도 하였다.
매월 25일이 되면 신문 구독료를 수금한다. 월말까지 수금해야 지국에서는 다음 달 초에 지대 값을 본사에 송금하기로 약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야간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새벽녘엔 신문 배달을 하였고, 낮에는 대장간에서 노동일을 하며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땅거미가 질 무렵 학교에 가면 피로에 지쳐 첫 시간부터 졸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러나 학교생활은 항상 즐거웠다. 수업 시간이 끝나 쉬는 시간이 되면 나를 찾은 급우들이 많았다. 사연인즉 연모하는 여고생과 사귀고 싶은데 그 여학생을 생각하면 가슴이 울렁거리며 설렌다고 하소연하는 친구들이 있었다.
3학년이 되면서 문예반장이 되었다. 실업학교에는 주간부와 야간부가 있었다. 전교에서 발행하는 「상혼」이란 교우지가 있었는가 하면 야간부에서는 별도로 간행하는「개척」이란 문예지가 있었다. 선배들의 전통을 이어가는 「개척」이란 순수 문예지 9호를 발행해야 할 책무가 나에게 있었다. 「개척」 9호에는 청마 유치환 선생님, 경대문리대학장이신 한솔 이효상 선생님의 글도 실리어 있었으며, 저의 단편소설 “불운아” 희곡 “살아가는 길”도 개재되어 있었다.
「개척」 10호에는 “감방 17호의 죄수”란 단편 소설도 있었지만, 애석하게도 1961년「개척」문예지는 10호를 끝으로 폐간되었고, 9호는 대구 문학관에 보존 중이다.
. 한편으론 뜻을 같이하는 동호인이 문등이(文登伊)구락부를 창설하여 학도시집「봄의 지열」을 발간하였고, 대한민국을 건국하신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 부통령 이시영 애국지사를 소재로 「아동 문학」을 발간하기 위해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원고를 모집하였고, 서문은 노산 이은상 선생님께서 창간에 따른 서문을 써 주셨다. 공교롭게도 3 ·15정 ·부통령의 부정 선거로 4· 19 혁명으로 인한 아동 문학지 발행이 좌절되고 말았다.
나의 학창 생활은 긴박하면서도 항상 즐거웠다.
나는 급우들의 부탁을 받고 연모하는 여고생에 보낼 러브레터(love letter)를 많이 써 주었다. 평소 접근하기 어려운 처지에 편지로 의사를 소통하며 교제하던 급우를 생각하면 한편 마음이 즐겁기도 하였다.
지금 그들도 백발이 무성한 황혼기에 접어든 고령의 노인네가 아닐까 싶어진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즐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