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잃은 양(My lost sheep)(눅15:1-7)
2023.11.12 김상수목사(안흥교회)
계절이 늦가을(晩秋)을 지나 겨울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 이제 가울 추수도 마무리 되어가고 있고, 다음 주일이면 추수감사절이다. 가슴에 품은 붉은 물감의 무게를 이기 못해 대지 품에 안긴 낙엽이 애틋한 감성을 샘솟게 하는 시기이다. 어쩌면 우리 사회가 가장 암울했던 시기에 청년 윤동주 시인이 고뇌하면서 “별 헤는 밤”이라는 시를 지었던 시기가 지금 이때쯤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우리들도 이 귀한 시간들을 어떻게 보내는 것이 하나님과 우리들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은 것인지를 고뇌할 필요가 있다. 분명한 것은 가장 의미 있고 귀한 것을 위해 시간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가장 의미 있는 일이고, 가장 귀한 것인가? 그것은 생명을 살리는 일이다. 세상에서 생명보다 귀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금보다 귀한 시간들을 일장춘몽 같은 헛된 것들에 허비하지 않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생명사역에 헌신하며 살아가기를 권면을 드린다(엡5:16-18).
“16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17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엡 5:16-18)
예전에 유대인 학살을 주제로 한 쉰들러 리스트(Schindler's List)라는 영화가 있었다. 이 영화의 말미에 보면, 아우쯔비치수용소에서 구출된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금이빨을 뽑아서 만든 반지를 자신들을 구해준 쉰들러에게 주는 장면이 있다. 그 반지에는 탈무드에 나오는 문구 하나가 새겨 있었다.
“누구든지 한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것은 곧 세상을 구하는 것이다’
(Whoever saves one life, saves the world entire)”
쉰들러는 이 반지를 보고 더 많은 사람들을 구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며 통곡한다. 이처럼 한 생명을 구하는 일은 세상에서 가장 귀한 일이다. 하나님은 이 자리에 있는 우리들과 이 글을 읽는 우리 동네 모든 분들을 포함해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생명을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으로 여기신다. 그래서 아우쯔비치수용소의 불구덩이 보다 더 무서운 지옥 불에서 우리들을 구해내기 위해서, 독생자를 아끼지 않고 이 땅에 보내주셨다.
생각해 보면, 성도들도 전에 주님을 알지 못할 때는 죽음의 불을 향해 걸어가는 사람들과 같은 대열에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구출되었고, 천국을 향하는 구원열차 속에 몸을 싣고 있다(엡2:1-8). 그렇기에 우리들도 주님의 마음으로 또 다른 사람을 천국행 생명열차에 태우는 일에 힘써야 한다.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주님은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듣기 위해서 가까이 올 때,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목적으로 환대하면서 음식을 함께 드셨다. 그러자 이 장면을 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렸다(뒷담화, 비난, 정죄 등). 그래서 주님이 영혼구원의 중요성을 3가지 비유를 들어서 말씀해 주셨다.
“1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2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3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눅 15:1-3)
주님께서 말씀해 주신 세 가지 비유는 잃은 양 비유, 잃어버린 드라크마 비유 그리고 탕자의 비유이다. 이 비유들은 똑같은 결론을 말씀하는데, 그것은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고 돌아오면, 하나님은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들보다도 그것을 가장 기뻐하신다는 것이다.
이 비유들 중에 오늘 우리들이 함께 읽은 설교말씀의 본문은 ‘잃은 양 비유’이다. 그 내용은 대략 이렇다. 어떤 사람(목자)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어 버렸다. 그래서 온갖 희생을 무릅쓰고 그것을 찾아낸 후에는 즐거워하면서 벗과 이웃들을 불러서 잔치를 벌인다. 그때 그는 이렇게 말한다.
“6 ....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눅 15:6-7)
양을 찾은 사람이 잔치를 벌이면서 했던 이 말씀이 바로 주님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죄인들뿐만 아니라 아 시간 우리들에게 말씀하시는 잃은 양 비유의 핵심이다. 여기서 “잃은 양”은 당연히 예수님 당시나 지금이나 동일하게 모든 죄인들을 뜻하고,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은 자신들은 의롭다고 생각하면서 뒤에서 수군거리기나 했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뜻한다.
그런데 오늘 설교 말씀을 위해 본문 말씀을 깊이 묵상할 때, 주님께서 특별히 눈에 띠게 하시고, 마음에 가슴 저리는 감동을 주신 주님의 표현이 있었다. 그것은 “나의 잃은 양(my lost sheep)”이라는 주님의 말씀이다. 이 표현에서 나(우리)를 향하신 예수님의 간절한 마음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렇지……. 나도 주님을 알기 전에는 잃은 양이었지…….”
“내가 주님을 알지 못할 때에도 주님이 나를 자신의 양으로 생각하셨구나…….”.
이 세상 모든 사람은 다 주님의 양이다. 우리들이 주님을 알지 못할 때에도 주님은 우리를 주님의 양으로 생각하셨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양은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찾은 양”이고, 다른 하나는 “찾아야할 양(my lost sheep)”이다. 둘 다 주님의 양들이다. 이것이 우리들이 가져야할 주님의 시각이다.
이 말씀을 자세히 보면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고 했다. 어쩌다가 눈에 띤 것이 아니고, 애타는 심정으로 찾아내신 것이다. 우리들이 주님을 떠난 잃은 양이었을 때, 주님은 불타는 심정으로 우리를 찾아내셨다. 오늘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나온 것이 언뜻 보면 내 발로 온 것 같지만, 사실은 주님이 나를 포기하지 않고 찾아내신 것이었다(잠16:9). 어떤 사람은 몇 년, 또 어떤 사람은 수십 년을 찾아내셨다. 이 과정 동안 누군가가 주님의 마음을 품고, 주님을 대신하여 찾아내는 눈물의 기도와 희생의 있었다.
성경은 도처에서 이러한 주님의 간절한 마음을 기록하고 있다. 주님은 “나의 잃은 양(my lost sheep)”이라고는 말을 요한복음 10장 16절에서는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라고도 표현하셨다.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요 10:16)
마태복음 9장 35-38절 말씀에 보면, 주님은 천국복음 전파하시면서,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하는 무리들(잃은 양들)을 불쌍히 여기셨다. 그래서 추수할 일꾼을 보내 주시기를 기도할 것을 말씀하셨다.
“36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37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38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마 9:36-38)
오늘 누가 가서 주님을 대신하여 간절한 마음으로 잃어버린 주님의 양들을 찾아낼까? 주님의 탄식이 우리의 영혼의 귓가에 들려오는 듯하다. 혹시 우리(내) 속에 잃은 양을 먼저 찾아나서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았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또는 탕자의 형(큰 아들)과 같은 요소는 없는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지역 주민 여러분들이여, 이 세상의 모든 영혼은 예외 없이 주님의 양들이다. 다만 ‘찾은 양’인지, 찾아야할 잃은 양‘인지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하나님은 지금도 불타는 심정으로 잃어버린 양들을 찾으시고, 찾아 나설 주님의 일꾼들을 찾으신다.
그러므로 “나의 잃은 양(my lost sheep)”이라고 표현하셨던 주님의 간절한 마음을 내 마음 삼고, 우리 주변에 주님을 알지 못하는 볼 때, “저 사람도 주님의 잃은 양이다”라는 시각을 갖자. 또한 만약 지금 자신이 잃은 양이라는 생각이 든다면 속히 항복의 두 손 들고 주님 앞으로 돌아와야 한다. 지금도 이 순간에도 금보다 귀한 시간이 빠르게 지나가고 있다. 더 늦기 전에 주님께 나아가자. 더 늦기 전에 잃은 양을 찾아내자. 주님이 우리와 늘 함께 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