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광개토태왕비
광개토태왕 비문 2면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선명하다.
八年戊戌 敎遣偏師觀帛愼土谷 因便抄得 莫0羅城 加太羅谷 男女三百餘人 自此以來 朝貢口事」 廣開土王碑文 永樂八年條
「8년은 무술년이다.
정예부대를 백신(숙신)과 토욕에 보내어 동정을 살피고, 막구라성과 가태라곡을 쉽게 차지하여 그 곳의 남녀 300여 명(귀족, 貴族)을 포로로 잡아 왔다. 그들은 이때부터 조공을 바쳐 오게 되었다.」
백신과 토욕의 정확한 위치는 사학자들 사이에 논쟁이 있으나, 백신은 숙신을 지칭한 것이다.
숙신은 고구려 서천태왕 11년(A.D 280년) 10월에 고구려의 변경을 침범하였다가, 달가의 역습을 받아 추장이 죽고, 단로성이 점령당하여 6-7개 소의 부락이 고구려에 항복하였다.
그 후 영락 8년(A.D 398년)에 고구려가 정벌한 백신은 동부여의 동쪽인 연해주 방면이다.
그리고 비문에서 눈여겨 보아야 할 지명 地名이 새롭게 등장한다.
‘土谷 토욕’
토욕(土谷)은 [위서(魏書) 토욕혼전(吐谷渾傳)]에 나오는 토욕혼(吐谷渾)을 지칭한 것이다.
이 토욕혼은 선비족 모용외의 일파였는데, A.D 4세기 초에 시조 토욕혼이 이복동생인 모용외와 사이가 벌어져서 모용외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서쪽으로 이동하였는데, 광개토태왕이 토욕혼을 정벌한 A.D 398년경에는 북위의 서쪽인 감숙성, 청해성 방면인 티벳지역에 있었다.
‘국내성에서 티벳까지 정벌이 가능한 일인가?’
라고 의문을 가질 수 있는데,
몽골초원에서 유럽까지 정벌에 나섰던 징기즈칸만 보아도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고구려는 기마국가 騎馬國家다.
그것도 화살도 쉽게 뚫지 못하는 찰갑 札甲으로 무장하고, 당시 최고의 명마라는 고구려의 말을 타고 달리던 기마국가였던 것이다. 몽골의 말은 하루에 칠백 리(300km)를 달렸다고 한다. 모본태왕 때 한나라가 고구려를 침공하자, 고구려는 어양-북평-태원에 이르는 원거리를 단번에 달려 반격을 가하기도 했다.
광개토태왕이 북위의 서쪽에 있는 토욕혼을 정벌한 것은 북위가 후연과의 싸움에서 이긴 후, 수도를 성락(盛樂 : 내몽고 호화호특 呼和浩特 부근)에서 평성(平城 : 산서성 대동)으로 옮기고, 후연의 유주를 압박하자, 북위의 배후에 있는 토욕혼을 정벌하여 북위를 포위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고,
백신을 정벌한 것은 동부여의 배후에 있는 숙신을 정벌하여 동부여를 포위.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광개토태왕은 토욕혼을 정벌한 그해에 북위 수도에 고구려 기술자 40여만 명을 정착시켰다. 이는 황하 이북 북부지역 즉, 동북아시아 전체를 고구려가 완전히 복속시켰다는 반증이다.
토욕혼이 어디냐?
당시에는 소월지 小月地라 불리던 지역이다.
지금의 티벳트 동부지역이다. 황하의 시원지까지 점령했다는 엄청난 업적이다.
그러니까, 만리장성 서쪽 끝 가욕관을 지나 돈황을 거쳐 티벳트까지 진출하였다는 기록이다.
자~ 이제야 비로소,
고구려 제19대 영락대왕 永樂大王을 광개토태왕 廣開土太王이라고 추서 追敍한 이유와 그 진면목 眞面目이 드러난다.
실제,
광개토태왕의 정복사업은 당시 중국의 모든 제왕들이 이룬 실적을 훨신 뛰어넘는 업적이었다
지금까지 우리가 배우고 알고 있는 기록은 적개토왕 適開土王의 기록이었다.
사대주의와 식민사관에 물들 자들이 주장하는 적당히 영토를 넓힌 군주로서의 일부 업적만 가르치고, 배우고 대부분이 그렇게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 '적당히'가 어느 정도 선이 맞으면 넘어갈 수도 있는데, 이 건은 아니다.
한편,
다시 염라수 지역으로 되돌아가서 고구려가 지속적으로 관리한 기록을 살펴보면,
그 근거는,
수양제가 35만의 대병력을 동원하여 제 3차 고구려 침공시 다시, 요하를 도하 渡河하여 요동성까지 진격하였으나, 보름 만에 갑자기 철수해 버린다.
요동 성주도 그 이틀 날 까지도 수나라 대군이 갑자기 사라진 그 이유를 명확히 몰라 관망하다, 그 다음 날에야 수양제의 유인 전략이 아니라, 실제로 도주한 것임을 비로소 알아차리고, 적군이 버려둔 보급품을 챙기고 추격을 시작한다.
수양제가 다급히 도주한 그 이유는,
진황도 즉, 산해관 부근의 보급기지 창고가 불타버린 것이다.
염라수에 주둔하고 있던 고구려군이 거란족을 이끌고, 수양제의 주 식량창고인 진황도를 공격하여 불태워버린 것이다.
수양제는 후방이 무너져 버리니, 발등에 불이 떨어진 다급한 처지가 되어버린 것이다.
적을 공격하기에 앞서 먼저, 자신의 안위 安危가 위태로워진 것이다.
이에 위기를 느끼고 다급해진, 수 양제는 요동벌에 주둔했던 모든 전쟁물자를 그대로 놔둬 버리고, 대군 大軍이 야반도주 夜半逃走하고 말았다. 정신없이 황급히 도망가 버린 것이다.
그 충격으로 수양제는 더 이상 고구려 침공을 포기하고 만다.
고구려를 공략하려면 적봉과 염라수 지역을 먼저 공격하여 점령하여야, 후방이나 보급로가 안전하게 확보되는데, 염라수의 높은 지형 地形과 곳곳에 흐르고 있던 하천 등, 여러 가지 지리적인 여건과 병력 분산이 우려되어 공략하기가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
그때까지 적봉과 염라수 지역은 장기간 고구려 영역임이 분명한데, 왜 우리 교과서에는 누락시키고 있는지 안타깝다.
그러니, 서요하(시라무렌하)의 서쪽 2 천여 리가 누락 되어있는 것이다.
토욕혼까지 계산하면 일 만여 리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강단의 사학자들이 고구려의 최대영토라고 그려 놓은 지도가 문자왕 시대의 영역이라며 겨우, 요하 중류(서요하와 동요하의 합류 지점)를 경계지로 하고 있다.
고구려의 영토가 반의 반 토막이 난 것이다.
초, 중등, 교과서와 대학교의 한국사 교재에 실려있는 현주소다.
북한의 교과서, 역사서에는 대흥안령산맥을 비롯하여 적봉과 염라수 지역까지 고구려의 영토로 표기해 놓고, 학생들에게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
러시아의 역사학자 UM 푸틴의 지적에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가 없다.
푸틴은 동북아시아 고대 역사학에 권위가 있는 전문사학가다.
특히 ‘고조선’에 관련된 깊이 있는 논문들을 발표하였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강단 사학자들은 단군조선에 관한 제대로 된 논문 한 편 없다.
아니, 상당수의 강단 사학자들은 아직까지도 고조선을 부정하고 있다.
그들의 주장은 ‘석기시대에 무슨 국가가 형성되고 존립할 수 있었겠느냐?’라고 말한다.
이기백 교수 같은 이는 대학교재 ‘한국통사’ 韓國通史에서
‘단군이 고조선이라는 나라를 세웠다라고 한다’
이렇게 기술 記述하고 있다.
‘고조선이라는’
‘세웠다라고 한다’
이 무슨 해괴망측 駭怪罔測한 서술어법인가?
먼 나라, 다른 국가의 일을 제삼자의 측면에서 보고 관망하듯이, 소가 닭 쳐다보는 듯한 관심 없다는 표현이다. 마치 강 건너편 남의 일 보는듯한 태도이다.
‘조선’을 부정하고 싶은데, 마지 못해 억지로 기술 記述하는 듯한 표현이다.
마치, 출처 出處가 불분명한 신빙성 信憑性 낮은, 다른 기록을 어쩔 수 없이 인용한 듯이 서술해 놓았다.
또한, 그의 저서에서 고조선에 대한 기록은 이것이 전부다.
참으로 간단명료 簡單明瞭하다.
이런 책자를 대학 교재로 인정하고, 이러한 자들이 지금까지 대학자 大學者로 자처하며, 국사를 연구하고 후학들을 가르쳐왔으니,
어처구니가 없다.
한편,
UM 푸틴은 ‘고조선’에 관련된 연구 논문과 그 증거들을 한국의 사학자들에게 제시하면서
“일반인들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당신들 선조들의 자랑스러운 고대사를 사실대로 올바르게 주장하지 아니하고 왜 주변국이 주장하는 대로 그대로 따라가느냐?”
한국의 강단 사학자들 당당하게 답한다.
“동양사는 동양인들이 잘 알지, 서양인이 왜 동양사에 개입하려고 애를 쓰냐?”
푸틴은 이렇게 한탄한다.
“중국과 일본은 없는 역사도 만들어내어 자기네들 역사라고 억지 주장하고 있는 판에, 한국인들은 있는 역사도 없다고 발뺌을 하니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나라다”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나라 강단의 사학자들은 떳떳하다.
‘남의 제사상에 콩 놔라 팥 놔라 할 것 없잖아’
말이 통하지 않는다.
21 세기 대한민국은 세계의 주목을 받으며, 선진국으로 도약하였다.
모두들 기적이라고 한다.
모든 분야에서 괄목한 성장을 이룬 것이다.
그런데,
현재 대한민국의 여러 분야에서 가장 낙후되고 발전성이 없는 아니, 오히려 퇴보하고 있는 학술 분야가 한 곳 있다.
한국의 강단 사학계 쪽이다, 특히 고대사 부분은 아주 심각하다.
발전은 고사하고 퇴보란 단어도 고급스러운 표현이다.
주변국들이 주장하는 그대로, 그들의 비위를 맞추어가며, 순한 양처럼 “예 예”하면서 코에 고삐 뚫린 암소처럼 힘없이 따라만 가고 있다.
산업 전사들은 국내외를 불문하고 각 분야의 현장에서 치열하게 싸우고 있다.
신제품 개발과 품질 향상 및 생산력 증대와 수출을 하기 위하여 온갖 정보를 수집. 분석하여 피땀으로서 선진화를 추구하는 동안,
어떻게 된 일인지?
강단의 사학자들은 주변국들의 비위 맞춰주기에 급급하다.
그 들의 장단 長短에 맞추어 북치고 장구치며, 기생 노릇하고 있다.
역사학계는 부패 되어있다. 특히 고대사 분야는 썩어 문드러진 분야다.
자신의 조상들의 빛나는 업적을 밝히기는커녕, 오히려 덮어버리고 치욕적인 부문은 침소봉대 針小棒大하고 있다.
역사의 시초 始初와 관할 영토는 최소한으로 축소시켜고, 힘 없이 침략당한 역사만 확대 기술하여, 배우는 학생들에게 자신들의 선조와 전통. 역사에 대하여 자긍심과 흥미를 잃게 만드는 특출한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는 강단의 사학자들,
배우는 학생들이 자기 나라의 역사에 흥미를 잃게 만든, 그 큰 죄를 어떻게 처분하여야 하나?
역사의식이 전혀 없는 함량 미달인 사학자들이 강단 講壇의 권좌 權座를 차지하고는 기존의 사대주의와 식민사관 세력을 등에 업고, 당당하게 버티며 도리어, 큰소리치고있는 적반하장격인 안타까운 현실이다.
대쪽 같은 이진희 교수님이 그리워진다.
* 이진희 李進熙 (1929`~ 2012`)
재일 한국인 역사학자. 1929년 김해에서 태어나 1956년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대학원 수사과정을 수료했고, 동 대학 강사와 와코대학[和光大學] 인문학부 교수를 지냈다. 저서 <광개토왕릉비의 연구>를 시작으로 고대한일관계사의 핵심쟁점인 광개토왕릉비의 연구에 주력하여 일본학계의 식민사학적 해석을 실증적으로 비판했다. <호태왕비와 임나일본부>를 비롯한 다수의 저서를 남겼다. 2003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이진희 교수는 일본의 심장부 도쿄에서 일본의 식민사학을 당당하게 비판하고, 임나일본부설 날조와 광개토왕릉비의 탁본 위조설을 주장하여, 일대(一對) 10여 명의 난상토론 爛商討論에서도 수적인 열세를 무릅쓰고도 기개를 굽히지 않고, 일본 사학자들이 주장하는 허구성을 조목조목 따져가며 하나하나 지적하여, 일본 본토 사학자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어, 그들의 말문을 닫게 만드신 분이다.
이처럼 일본에서 거주하며 일본대학과 현지의 일본방송에서도 다수자들과의 토론에서도 전혀 주눅 들지 아니하고, 역사의 진실을 당당히 밝히는 애국지사 愛國志士 분이 계셨던 반면에 우리나라에서는 대학에서 나라의 녹을 먹는 학자라는 사람들이 도리어 이웃 나라의 주장에 힘없이 이끌러 다니는 현 사태, 확연히 비교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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