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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03. 묵상글 들 ( 사순 2주 수요일 - 최악 너머의 선.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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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03.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사순 2주 수요일 - 최악 너머의 선
사순 2주 수요일-2018
오늘 주님과 제자들은 예루살렘 입성을 바로 코앞에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당신의 수난예고를 세 번째로 하시는데
제자들은 수난을 예감하고 각오하기보다는 수난과 반대되는 것을
예감하고 기대하는 것 같습니다.
제가 그동안 여러 차례 얘기한 것 같은데
미래 자기에게 닥칠 것에 대한 두 가지 상반된 태도가 있습니다.
그것은 기대와 각오로서 기대는 좋은 것을 기대하지만
각오는 나쁜 것을 각오하고, 경우에 따라 최악도 각오합니다.
이런 두 가지 태도의 결과는 어떻게 됩니까?
보통 좋은 것을 기대하면 거의 대부분 실망과 좌절을 경험하게 되지만
최악을 각오하면 그 어떤 결과도 최악보다는 좋은 것일 확률이 높지요.
최악을 각오한다는 것은 내가 기대하는 좋은 것은 하나도 없는,
즉 퍼센트/%로 치면 0%의 선을 기대하는데 1%의 선만 나와도
행운이 되고 50%의 선이 나오면 요즘 사람들이 많이 쓰는 말, 대박입니다.
다시 말해서 최악으로 죽을 것을 각오하면 죽지 않고
손가락 하나 부러진 것도 다행이라고 또는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합니다.
제자들의 경우 한두 번으로 안 되니까 오늘 주님께서는
세 번째로 당신의 죽음을 예고하시는데 제자들은 여전히
죽음을 각오하기보다는 아주 좋은 것을 기대하고 있지요.
고배苦杯를 각오하라고 하시는데 축배祝杯를 기대하고 있는 겁니다.
운동 경기 결과를 얘기하면서 자주 쓰는 표현이
우승을 기대했는데 고배를 마셨다고 하지요.
아무튼 주님께서는 당신이 마실 쓴 잔을 너희도 마시겠냐고 하시자
그들은 잠깐의 망설임도 없이 마시겠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분명히 당신이 마실 ‘쓴 잔’이라고 하시는데
제자들은 그 쓴잔이 승리의 축배가 쓴 술이던지,
아니면 승리 전에 잠시 겪을 수난 정도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오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도 마실 수 있느냐?”
그렇습니다. 어쩌면 우리도 무엇을 청하는데
지금 우리가 청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청하는지도 모릅니다.
저도 그랬지만 참으로 많은 성소자들이
수도 생활이 뭔지도 모르는 채 수도원 입회를 청합니다.
상당수가 수도 생활이 그리 쉬운 거 아니라고 예고해도
잘 안다고 하지만 나중에 보면 대부분 환상을 가지고 있었음이 드러납니다.
곧 수도원은 천사들만 사는 줄로 알고 있었고
그러지 않자 크게 실망을 하고 많은 사람이 수도원을 떠나는데
제가 청원장을 할 때 한 그룹은 100% 수도원을 떠나기도 했지요.
그런데 생각을 해보면 우리가 미래를 다 알면 누가 수도원 들어오겠습니까?
이런 사람인 줄 알면 누가 그와 결혼을 하고,
결혼 생활이 이런 것인 줄 알면 얼마나 결혼을 하겠습니까?
그러고 보면 요즘 수도원도 안 들어오고 결혼도 안 하는 젊은이들은
옛날의 우리하고 비교할 때 좋게 얘기하면 미래 환상이 없고
나쁘게 얘기하면 최악 너머의 선을 기대할 줄 모르는 것 같습니다.
아무튼 오늘 제자들은 선을 기대했는데
최악을 넘는 선인 줄 모르고 도전을 하였고
주님 말씀대로 결국 최악 너머의 선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우리도 최악 너머의 선을 각오하고 도전하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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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03. 사순 2주간 수요일.<무엇을 원하느냐?>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많은 사람이 으뜸으로 인정받고 그에 상응하는 대접을 받고 싶어합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대접을 받는 사람은 흔하지 않습니다. 겉으로는 그렇게 보인다 하더라도 진정한 존경과 사랑으로 인정을 받는 사람이 많지 않음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세속 안에 있으면서도 세속을 떠나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진정 존경을 받을 사람입니다. 세상은 높아지라고 하지만 오히려 섬기는 사람, 세상은 첫째만을 기억하지만 오히려 종이 되는 삶을 사는 사람이야말로 하느님께로부터 인정을 받는 사람입니다.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는 자기 두 아들이 주님의 오른편과 왼편에 앉기를 소망하였습니다. 어머니가 자식이 잘 되기를 바라는 것을 어찌 탓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아무 정성과 노력이 없이 좋은 자리를 차지하겠다고 하면 그것은 욕심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욕심을 지니게 되면 반드시 적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제베대오의 두 아들이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 한다는 낌새를 알아챈 다른 열 제자가 그 두 형제를 불쾌하게 생각한 것에서도 바로 그러한 마음을 대변해 줍니다.
“무엇을 원하느냐?” 물론 영광을 원합니다. 그러나 영광은 고통 없이 주어질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난과 죽음을 통하여 부활의 영광에로 나아가십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수난을 예고하시지만 제자들은 딴청을 부렸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마태20,22)하고 물으시자 “할 수 있습니다.”하고 대답하였지만 사실 그들은 의미도 모르고 대답한 것입니다. 그 잔은 모욕과 천대, 고통과 십자가의 죽음을 뜻했습니다. 종이 되어 남을 섬기는 낮아지는 삶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덥석 대답해 놓고는 딴전을 피우는 그들의 모습이 우리에게도 여전합니다.
세례성사를 받으면서 마귀를 끊어버리겠다고 선언해 놓고서는 어려운 일이나 우환이 닥치면 하느님 보다는 ‘어디 용한 사람이 없나?’ 살피게 됩니다. 허례허식을 버리겠다고 맹세하고는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 주변 사람에게 잘 보이려는 행동을 합니다. 남이 나를 섬겨주기를 바라는 허영의 마음이 가득할 때도 있습니다. 오로지 주님을 믿으며 주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삶을 믿는다고 고백하고서는 미사참례를 소홀히 할 때도 있습니다. 모처럼 손님이 오면 함께 미사 참례하자고 권유하면 좋으련만 그를 배려한다는 빌미로 주일미사까지 궐합니다. 약속된 영생에 대한 희망을 말하면서도 눈앞에 것에 흔들리는 것이 우리의 마음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아직도 아무 수고와 땀도 없이 영광을 바라느냐? 고 물으십니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기꺼이 “할 수 있습니다.” 대답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대답에 항구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군림해서 힘으로 내리누르는 삶이 아닌,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는 삶을 살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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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03. 사순 제2주간 수요일 /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20,17-28: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종이 되어야 한다
제자들은 주님의 수난과 부활에 대한 말씀을 계속 들어 왔지만, 주님의 기적을 보고도, 말씀을 듣고도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는 그것을 듣는 것 자체가 괴로운 말씀이었다. 그들은 지금까지 그분이 행하신 무수한 기적들을 보았는데, 이런 분이 고난을 겪으신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주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에 제배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아들들과 함께 나아가 예수님께 청하고 있다.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21절) 이 자리는 분명히 두 아들들이 원하는 것인데 그들은 어머니를 내세워 대신 청하고 있다. 주님께서는 지금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고 계시며, 그 길은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 것인데, 이 순간에 아직도 당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들을 볼 때, 더욱 서운하셨을 것이다. 자리다툼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22절) 복음에서는 잔과 세례라는 말씀이 나온다. 그런데 잔과 세례는 같은 것이 아니다. 잔은 수난을 의미하지만, 세례는 죽음 그 자체를 말한다. 예수님께 잔은 수난이었고 세례는 십자가의 죽음을 의미한다. 죽음에는 고통이 따른다. 그러나 모든 고통이 죽음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고난은 당했어도 죽임을 당하지 않은 사람도 많다. 이들이 고백자이다. 실로 주님의 잔을 마시기는 했어도, 예수님께서 받으신 세례는 받지 않았다. “할 수 있습니다.”(22절) 그들은 시련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이렇게 대답할 수 있었다. 전쟁을 모르는 사람은 전쟁놀이가 재미있다. 그 잔의 의미를 모르니까 그렇게 대답하였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의 길 앞에서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이 저를 비켜 가게 해 주십시오.”(마태 26,39) 하고 말씀하셨는데, 제자들이 그 잔이 어떤 것인 줄 알았다면 “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었을까? 수난의 괴로움은 참으로 크다. 그러나 죽음은 훨씬 더 무서운 것이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도 마시고,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내 오른쪽이나 왼쪽에 앉는 것은 내가 허락할 일이 아니라, 정해진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마태 10,39-40) 이 말씀은 거절하는 말씀이 아니다. 이 말씀을 듣고 나머지 제자들이 불쾌했다고 한다. 모든 사도가 세속적인 마음으로 주님을 따랐기 때문이었다. 주님께서는 사도들 사이에 형제애가 깨지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모두가 희망에 차게 해 주셨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민족들 통치자들의 예를 드시면서 그들과 같이 백성들 위에 군림하지 말고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26절)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것과 같이 하느님 안에 능력 있고 성숙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더 잘 섬길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28절)고 하셨다. 그분의 참된 제자직이란 참으로 섬기는 직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섬기는 삶으로 봉사직을 수행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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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03. 새벽을 열며. 사순 제2주간 수요일. 빠다킹 신부님.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한 봉쇄 조치로 가정 폭력이 증가했다는 뉴스를 보았습니다. 또 성폭력과 신체적 학대 등 사람들의 공격적인 행위도 눈에 띄게 늘어났다고 합니다. 이 모든 것을 코로나19 바이러스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런 현상은 함께 살아가는 법을 모르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즉, 사람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지, 코로나19 바이러스 자체의 문제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실 봉쇄 조치로 형제적 사랑의 감정이 표면화되면서 가족 간의 유대가 더욱 깊어졌다고 말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부모는 자식들과 놀아줄 시간이 더 많아졌고, 부부는 모든 문제를 더 깊이 상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정년 퇴임을 하고 집에만 있는 남편이 미워죽겠다는 어느 자매님의 고백이 생각납니다.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남편을 전에는 남편의 바쁜 직장 생활로 밤에만 보다가 이제는 온종일 집에서 봐야 하니 너무 힘들어서 못 살겠다며 황혼 이혼을 이야기합니다.
이 역시 함께 사는 법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함께 살면서 발전해왔습니다. 인류의 영장이 된 것은 함께 살기 때문입니다. 이를 거부하면 오히려 뒤로 가는 퇴보를 하게 되는 것은 물론이고, 살아갈 수도 없습니다.
이렇게 이웃과 함께 살아가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요? 돈과 권력이라는 힘으로 “나를 따라라.”라고 억누르면 될까요? 이 방법을 세상의 모든 사람이 사용합니다. 그래서 더 많은 돈을 모으려고 하고, 더 높은 지위를 얻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함께 살 수가 없습니다. 단지 힘으로 억누르며 함께 사는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세 번째 수난 예고를 하신 뒤에,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청한 하느님 나라에서 주님의 오른쪽과 왼쪽에 앉게 해달라는 청에 대한 답을 해 주십니다. 세상의 통치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백성에게 세도를 부르지만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는 안 된다.”라는 이 구절을 조금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되다’라는 동사의 미래형이 사용되는데, 여기에 부정어 ‘아니’와 함께 쓰일 때는 ‘엄격한 금령’을 뜻하게 됩니다. 즉, 무슨 일이 있어도 해서는 안 된다는 명령입니다.
세상의 권력자처럼 살려고 하면, 세상 사람들과도 함께 할 수 없으며 더 나아가 주님과도 함께 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보여주신 겸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섬기는 사람이 되고, 종이 되는 것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주님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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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눈 먼 것이 아니다. 더 적게 보는 게 아니라 더 많이 본다. 다만 더 많이 보이기 때문에, 더 적게 보려고 하는 것이다(랍비 줄리어스 고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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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레스를 줄이세요.
라디오에서 노래를 듣다가 이런 노래 가사를 들었습니다.
“흐르는 강물을 거꾸로 거슬러 오르는 연어들의….
연어는 고향에서 산란하기 위해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를 회귀본능이라고 하며, 자신이 태어났던 곳으로 다시 돌아와서 알을 낳고 죽는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연어가 죽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거친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느라 지쳐서 그랬을까요? 아니면 생물학적 프로그램 때문에 죽는 것일까요?
둘 다 아니었습니다. 연어는 글루코코르티코이드라는 호르몬을 엄청나게 분비한 뒤에 죽는다고 합니다. 이는 스트레스가 생겼을 때 분비되는 호르몬입니다. 즉, 연어는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게 되었고, 이것이 사망 이유가 되었습니다.
실제로 이 스트레스 호르몬은 노화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고 하지요. 스트레스를 받으면 폭삭 늙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다들 젊게 살고 싶어 합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오래 살고 싶어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스트레스를 받지 않아야 합니다. 세상의 법칙만을 따르면 스트레스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법을 따르고 주님과 함께해야 합니다.
가장 멋진 삶을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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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03.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태 20, 28)
몸값과
죗값을
치유하시는
하느님의
십자가가 있다.
우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러
오신 하느님의
사랑이시다.
사랑은
시련없이
완성되지
않는다.
시련은
우리의
참모습을
보게한다.
시련을 통해
이루시는
하느님의
일이시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에
십자가가 있다.
십자가 없는
은총은 없다.
십자가
자체가
함께하는
은총이다.
늘 뒤늦게
깨닫게되는
은총이다.
하느님께서는
어둠속에서도
선한 일을
준비하신다.
십자가를 통해
찬란한 빛이
새어 나온다.
목숨을 바치는
십자가는
하느님의
계획이다.
십자가 없는
아침은 없다.
십자가와
함께하는
아침이다.
십자가에
감사하는
오늘이다.
십자가는
사랑이다.
목숨을 바치는
십자가에
길이 있다.
길을 찾고
있는
우리들에게
십자가를 주신다.
하느님께서
계시다는 것은
우리에게
십자가가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목숨을 바치는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셨다.
십자가에서
생명의 의미를
만나게 된다.
하느님께
바치는
생명이다.
어둠을 뚫고
솟아오르는
십자가의 빛을
나는 믿는다.
십자가는
너와 나를
살리는
인격(人格)임을
또한 뒤늦게
깨닫는다.
우리의 구원자
하느님께서
십자가로
오신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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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03. 사순 제2주간 수요일.<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께서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할 수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 그러나 내 오른쪽과 왼쪽에 앉는 것은
내가 허락할 일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정하신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다른 열 제자가 이 말을 듣고 그 두 형제를 불쾌하게 여겼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태 20,22-28)”
1) 우리는 예수님을 ‘만물의 주님’으로,
또 ‘온 세상의 왕’으로(‘왕들의 왕’으로) 믿고 있고, 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백성 위에 군림하거나 백성에게 세도를 부리는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섬기시는 분이고,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바치신 분입니다.
그래서 그 나라에서는 아무도 다른 사람들보다 더 높은 자리에 앉아서
군림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세도를 부리지도 못합니다.
(그런 것을 바라는 사람은 그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나라는 남보다 높은 사람도 없고, 남보다 낮은 사람도 없는 나라,
‘모두가 모두를 섬기는 나라’입니다.
앞의 18장에,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마태 18,3).” 라는 예수님 말씀이 있습니다.
그 나라에 들어가기를 바란다면 ‘권력욕’과 ‘명예욕’을 버려야 합니다.
자기 안에 있는 그런 욕망과 이기심을 버리려면 회개해야 합니다.
(여기서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된다.’는 말은, 모든 욕망과 이기심을 버리고
순수하고 단순한 상태로 변화되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2) 야고보 사도와 요한 사도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알아듣지 못하고서,
가장 높은 자리를 청했습니다.
앞의 19장 28절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러운
자기 옥좌에 앉게 되는 새 세상이 오면, 나를 따른 너희도 열두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 라는 예수님 말씀이 있습니다.
야고보 사도와 요한 사도는 그 ‘열두 옥좌’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두 자리를 청한 것입니다.
(이 요청은 다른 사도들에게 자기들보다 ‘낮은 자리’를 주시라는 뜻이
되기도 하는데, 남들보다 높은 자리를 달라고 요청한 것도 문제이고,
남들에게 낮은 자리를 주시라고 요청한 것도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사도에게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라고 말씀하시는데, 이 말씀의 뜻은, “너희는 아직도 나의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모르고 있다.”, “너희는 아직도 내가 한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있다.”입니다.
두 사도가 모르고서 청했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면, 그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권력욕과 명예욕이 많아서 그런 요청을 한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 요청을 한 두 사도의 모습은 보통 사람들의 일반적인 모습입니다.
두 형제를 불쾌하게 여긴 다른 열 제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권력욕과 명예욕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은
아니고, 그 당시에는 예수님의 나라, 예수님의 왕권, 예수님의 낮춤과 섬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뿐입니다.
(“할 수 있습니다.” 라는 두 사도의 대답도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한 대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3)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라는 말씀은,
당신이 가시려고 하는 십자가의 길을 뒤따를 수 있느냐고 물으신 말씀입니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도 마신다면,
너희가 청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라는 뜻은 아닙니다.)
이 말씀은, “남들보다 높은 자리를 얻는 일 같은 것에 한눈팔지 말고,
내 뒤를 충실하게 따르는 일에만 집중하여라.”로 해석됩니다.
남들보다 높아지는 것만 신경 쓰는 것은, 또는 남들을 자기보다 낮추는 것만
신경 쓰는 것은, 한눈팔면서 딴 생각을 하는 것과 같은 일이고,
그렇게 해서는 예수님의 뒤를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잔’이라는 말이 ‘수난, 죽음’을 뜻하기 때문에,
이 말씀은 앞의 16장에 있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 라는 말씀에 연결됩니다.
권력욕, 명예욕, 소유욕 같은 세속적인 욕망들을 버리는 일도
자신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에 포함됩니다.
4)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 라는 말씀은, 두 사도가 겪게 될 박해와
고난과 순교를 예언하신 말씀인데, 두 사도가 지금 높은 자리를 요청했다고 해도,
그것은 잘 모르고서 한 일이고, 그들의 모든 삶이, 예수님 뒤를 따르는 길에서
크게 벗어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해 주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동시에 두 사도가 겪게 될 박해와 고난과 순교는,
그들이 청하고 있는 높은 자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내가 허락할 일이 아니라” 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최측근 제자라는 이유만으로
자동적으로 어떤 특권이 보장되어 있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당신과 인간적으로 친밀하게 지내는 것보다는
당신이 가르치신 대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생활을 하기를
더 바라시는 분입니다(마태 7,21).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 곧 예수님과 친밀하게 지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잘 안다고 주장하면서도, 또 예수님과 친하다고 주장하면서도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라고 말씀하십니다(마태 7,23).
“내 아버지께서 정하신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라는 말씀은,
상을 받을 사람들을 하느님께서 미리 정해 놓으셨다는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에 합당하게 살려고 노력하여라.” 라는 뜻입니다.
5)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라는 말씀은 ‘명령’입니다.
이 명령은 사도들뿐만 아니라 모든 신앙인에게 주시는 계명입니다.
<예수님의 계명을 어기는 것은 죄를 짓는 일입니다.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 사람들에게 세도를 부리는 것은 ‘죄’입니다.>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라는 말씀과 “종이 되어야 한다.” 라는 말씀은,
‘종처럼’ 행동하라는 뜻이 아니라, 실제로 종이 되라는 뜻입니다.
속마음을 감추고 겉으로만 섬기는 것은 위선입니다.
우리는 ‘진심으로, 또 실제로’ ‘낮춤’과 ‘섬김’을 실천해야 합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뿐만 아니라, 세상 사람들을 향해서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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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03. 사순 제2주간 수요일 / 최종훈 토마스 신부님.
오늘의 묵상
‘동행’이라는 말을 들으면 왠지 모르게 든든합니다. 낯선 거리를 혼자가 아닌 누군가와 함께 걸으면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먼 길을 떠날 때에도 누군가와 함께라면 외롭지 않고 힘이 되어 든든합니다. 또한 같은 목표를 가지고 같은 공간에서 함께 일하며 동행합니다. 가족들과 함께, 직장에서, 교회에서, 공동체에서, 그리고 사회에서 동행합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같은 길을 가고 있을 뿐 동행하지는 않습니다. 같은 공간에서 같은 목표를 가지고 일하지만, 저마다 생각이 다르고 가치가 다르며 목표를 이루려는 방법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함께 사랑한다고 하지만, 사랑을 나누는 방식이 다르고 사랑의 표현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같은 길을 가고 있지만, 동행하지 못하는 우리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도 같은 길을 갔습니다. 오랜 시간 함께 지냈고 하느님 나라와 복음을 같이 선포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가치와 삶을 오랫동안 보아 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동행하는 듯 보였던 제자들의 생각과 가치는 예수님과 달랐습니다. 제베대오의 두 아들도, 다른 제자들도 자신들의 욕심과 출세만을 위하여 예수님과 함께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수난과 십자가를 여러 번 이야기하셨지만, 그들은 듣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의 꿈과 가치만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과 같이 걸었지만, 동행하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는 동행하고 싶습니다. 혼자 걷기보다 함께 걷고 싶어 합니다. 특히 예수님과 함께,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동행하고 싶습니다. 그 동행을 위하여 자신의 가치와 생각을 강요하기보다 먼저 동행하는 이들의 생각과 꿈을 바라보았으면 합니다. 그래서 내가 앞장서 가는 것이 아니라 함께 걸어갈 수 있도록 조금씩 천천히 자신의 것을 내어놓으면서 걸어가면 좋겠습니다.
- 최종훈 토마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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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03. 사순 제2주간 수요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은총, 하느님 현존의 표지
오늘 독서에서 우리가 들은 이야기는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 주민들이 예레미야를 없애려고 꾸민 음모였습니다.
이에 대해 예레미야는 공포에 사로잡혀서, “선을 악으로 갚아도 됩니까?”(예레 18,20) 하고
하느님께 탄원하면서 자신의 의로움과 억울함을 호소하였습니다.
그의 심정을 대변한 기도가 오늘 미사의 입당송이었습니다:
“주님, 저를 버리지 마소서. 저의 하느님, 저를 멀리하지 마소서.
주님, 제 구원의 힘이시여, 어서 저를 도우소서”(시편 38,22-23).
그런가 하면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삼년의 공생활을 마무리하시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며 당신 제자들에게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셨습니다:
“나는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넘겨질 것이다.
그들은 나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로마인 총독에게 넘겨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사흗날에 되살아날 것이다”(마태 18-19).
하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은 스승께서 말씀하신 이 비장한
세 번째 예고를 듣고도 그 뜻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어머니를 통해 영광스런 자리를 청하기까지 했고,
그러자 이를 보고 있던 나머지 제자들은 불쾌하게 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답답해지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다시 한 번
당신의 수난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강조하셔야 했습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20,26).
스승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단의 이 엉뚱한 분위기는 사실,
첫 번째 수난과 부활 예고에서 베드로가 대놓고 반박하던 태도(마태 16,22)와,
두 번째 수난과 부활 예고에서도 나머지 제자들이 몹시 슬퍼했던(마태 17,23) 것으로
미루어보아 충분히 예견되던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스승님께서 수난을 당하지 않기를 바라셨던 것 같고,
물론 자신들도 수난보다는 모종의 영광을 기대하고 있었던 듯합니다.
어머니를 동원한 야고보와 요한의 로비와 그에 대한 나머지 제자들의 반응이 그 증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제자들의 몰이해와 엉뚱한 반응이 못마땅하셨겠지만,
그래도 당신의 소명에 대해 담담하게 털어 놓으셨습니다.
그 가르침 속에는, 닥쳐올 수난이 결국 공생활 동안 당신이 행하신 섬김의 결과라는 가르침과,
또한 이로써 악에 물들어 있는 세상 사람들의 죄까지 씻어 없앰으로써 모두가
부활의 영광으로 가능하게 될 새로운 세상에서 살 수 있게 되리라는 강한 암시가 담긴 가르침이었습니다.
요컨대, 악인들의 음모로 수난당하는 의인 예레미야의 탄원과,
역시 억울하게 음모에 빠져 수난을 앞두고 계시지만 이 수난을 부활의 관건으로 삼으시는 예수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아듣지 못하고 있는 제자들의 몰이해가 오늘 말씀의 초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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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년 한 해동안 우리 교회는 김대건 신부 탄생 2백 주년을 맞이하여
“당신은 천주교인이오?” 라는 주제로 특별한 해를 보내고 있습니다.
김 신부를 포함하여 만 명이 넘는 천주교인들이 이 질문을 받으며 배교를 강요받았지만,
끝내 치명하여 복음 진리를 당당하게 증거하였습니다.
죽임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느님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순교자들은
예수님을 따라 수난과 부활의 진리를 증거한 증인들입니다.
부활 신앙은 섬김의 수난 속에서도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현존하고 계심을 알아보는 안목입니다.
무상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생명과 온갖 자비하신 사랑을 깨닫고 감사할 줄 아는 이 안목이 바로 은총입니다.
단군 이래로 참으로 오랜 세월 동안 하느님을 알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온 우리 민족에게,
천주교인들은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알려주신 수난과 부활의 계시 진리를 증거함으로써,
참되게 하느님을 예배하는 방식을 알려준 것입니다.
사실 우리에게 요구되는 회개의 태도는 좀더 적극적이어야 합니다.
악인들이 꾸미는 음모와 그들이 저지르는 억압의 현실에 대해서
우리가 죄악을 떨쳐버리는 일은 기본일 것이요, 수난의 의미만 깨달아서도 불의한 현실을
개혁하기에는 모자라며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수난을 통한 부활의 삶을 살아야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세상을 이룩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알고 믿으며 섬긴다는 것은 죄를 피하고 착하게 살면서
그분께 우리에게 필요한 축복을 청하는 자세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개인의 운수를 점치고 인생의 대소사(大小事)에서 행운이 깃들기를 기원하며
팔자가 순탄하기를 바라는 것이 보통의 한국인들에게 인지상정(人之常情)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어디까지나 그것은 기복신앙(祈福信仰)일 뿐입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이미 거저 주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알아보는 안목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웃 사랑과 사회 공동선에 요청되는 섬김의 수난을
기꺼이 받아들이려는 용기도 필요합니다. 이것이 오늘 말씀에 비추어 요청되는 적극적인 회개입니다.
사람이 육체와 영혼으로 이루어져 존재하듯이,
“나라는 민족의 몸이요 역사는 민족의 혼(魂)”이라고 말합니다(李嵒, 1297~1364, 檀君世紀 序文).
그렇다면 그 혼에 하느님의 영이 결합되어 있어야 민족의 삶이 하느님 앞에서 살아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복적인 차원에 머물고 있는 우리 민족의 종교 의식(意識)에 복음적인 신앙 진리가
들어가게 된다면 현세적인 복을 비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이미 무상으로 주어져 있는 하느님의
현존에 대해 먼저 감사하며 나라와 민족을 위해 사회 공동선에 투신할 줄 아는 은총이 가능할 것입니다.
개인들도 민족도 하느님과 이어져 있어야 영혼이 살아있을 수 있고, 살아 있는 영혼이라야
은총을 느낄 수 있으며, 이 은총이야말로 하느님께서 우리 가운데 현존하신다는 표지입니다.
이것이 오늘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맡겨져 있는 선교적 과제인 동시에 회개의 목표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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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03. 이영근 아오스딩 수사님.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종이 되어야 한다.” (사순 2 수)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대한 세 번째 예고 장면과 섬김과 출세에 대한 말씀입니다.
오늘은 섬김과 출세에 대한 말씀을 보고자 합니다.
제베대오의 두 아들과 그들의 어머니는 예수님께 주님의 나라에서 하나는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있기를 청합니다.
곧 높은 자리를 청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결코 그들의 열망을 나무라시지는 않으십니다.
오히려 이를 보고 불쾌하게 여기는 다른 제자들을 함께 불러 당부하십니다.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종이 되어야 한다.”(마태 20,26-27)
이는 높은 사람, 으뜸인 사람이 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어떤 사람이 진정한 높은 사람인지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높은 사람이 되는 진정한 길을 가르쳐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높은 사람이란 남을 섬기는 사람이고, 그런 사람이 되고자 하면 먼저 종이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러니 왕이 되고 싶으며 ‘먼저’ 아내를 왕비로 대해야 하고, 왕비처럼 살고 싶으면 ‘먼저’ 남편을 왕으로 받들어야 하며, 성인이 되고 싶으면 ‘먼저’ 다른 사람을 성인으로 떠받들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남을 불신하고 신뢰하지 못하면 그렇게 신뢰받지 못하고 불신 받는 사람이 될 것이요,
남에게 자비로우면 남들에게도 자비를 입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누군가에게 억울함을 당하고 있다면, 필시 그도 나에게 억울함을 당하고 있을 것입니다.
결국, 섬기는 사람이 섬김 받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아버지를 섬기셨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었으며, 당신을 배신하고 도망쳐 버릴 그 제자들을 섬기셨기에 섬김 받으십니다.
그러나 단지 작고 낮은 자라고 해서 섬기는 자인 것은 아닙니다.
혹은 희생과 헌신으로 봉사한다고 해서 섬기는 자인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섬긴다는 것은 자신이 낮아진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높이고 떠받들며 존중하고 소중히 여기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자신을 낮춘다 하더라도, 상대방을 귀하게 여기는 ‘들어 올림’이 없다면, 진정한 섬김이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섬김은 내가 낮은 자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형제를 높은 자 되게 하는 데 그 본질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우리를 높이기 위해서, 곧 우리를 하느님 되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섬기셨듯이 말입니다.
묘하게도, 섬기는 사람은 섬기는 그 사람을 닮아갑니다.
스승이신 예수님을 섬기면 예수님이 되어가고, 진리를 섬기면 진리가 되어 갈 것입니다.
돈을 섬기면 탐욕스런 사람이 되어가고, 세상을 섬기면 세속적인 사람이 되어 갈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도 “주님을 섬기는 학원”(<베네딕도 규칙서> 머리말 45)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형제 섬기기를 통하여 주님 섬기기를 배워야 할 일입니다. 아멘.
-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마태 20,23)
주님!
제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원하시는 것을 주소서.
깨지기 쉬운 질그릇 같은 제 몸에
당신 생명을 담겨 있음을 잊지 않게 하소서.
오늘도 제 몸이 으깨지고 부서져,
당신의 생명을 드러내게 하소서.
언제나 당신의 죽음을 짊어지고 다니면서
당신과 함께 죽음으로써 당신의 생명이 드러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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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03. 사순 제2주간 수요일/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산보를 다니면서 강의를 듣는 것이 소소한 기쁨입니다. 오늘은 며칠 전에 들었던 강의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주제는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입니다. 서양과 동양은 ‘하늘, 땅, 사람’을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늘은 신들의 영역이라 생각했고, 하늘의 모습을 연구하는 학문은 천문학이 되었습니다. 땅은 생명이 자라는 터전이라 생각했고, 땅의 기운을 연구하는 학문은 지리학이 되었습니다. 사람은 하늘과 땅의 기운을 받아서 존재하는데, 사람의 존재이유를 연구하는 학문은 인문학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개천절을 단군이 나라를 시작한 날로 생각하는데, 개천절은 하늘의 신 환인이 아들 환웅에게 세상에 내려가 뜻을 펼치게 한 날입니다. 환웅은 사람이 되고자 준비를 열심히 한 곰과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고, 그 아들이 단군입니다. 이것이 우리 민족의 시작을 알리는 ‘단군신화’입니다.
서양의 신화에도 신과 인간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신과 인간 사이에서 태어난 사람을 ‘영웅(Hero)’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스 신화에는 영웅들의 이야기가 많습니다. ‘헤라클레스, 아킬레우스’는 대표적인 영웅입니다. 그런가하면 그리스 신화에는 반인반수(半人半獸)의 이야기도 나옵니다. ‘켄타우로스, 메두사’는 대표적인 반인반수입니다. 서양의 신화에서 신들은 윤리적이지 않고, 인간을 사랑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 동양에서는 하늘의 자손을 ‘천자’라고 불렀습니다. 천자를 ‘황제’라고도 했습니다. 황제는 신은 아니지만 신의 뜻을 받들어 백성을 다스립니다. 공자가 이야기한 유교는 황제가 백성을 다스리는 기본 원리가 있습니다. ‘삼강오륜(三綱五倫)’이 있습니다.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이 있습니다. 서양의 시간은 직선적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시간은 예수님의 탄생 이후의 시간입니다. 동양의 시간은 순환적입니다. 황제가 죽으면 시간은 무너지고, 새로이 황제가 등극하면 시간이 채워집니다.
성서에도 신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성서의 신은 그리스 신화의 신처럼 자유분방하지 않습니다. 성서의 신은 윤리적이며, 인간을 사랑하시며, 인간의 고통을 가슴 아파 하십니다. 성서의 신은 신의 뜻을 따르는 사람에게는 축복을 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성서에도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의 몸에서 태어나는 사건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셨고, 외아들을 믿고 따르는 사람을 구원하십니다. 이 사건이 동정 마리아를 통한 예수님의 탄생입니다. 사도들이 로마에 복음을 전할 때입니다. 로마인들은 예수님을 신과 인간 사이에서 태어난 ‘영웅’으로 이해했습니다. 초대교회는 예수님은 참 사람이면서, 참 하느님이시라고 고백하였고, 삼위일체 교리가 생기면서 예수님을 ‘영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단(異端)’이 되었습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충실하게 걸어갔던 영웅들을 ‘성인(聖人)’으로 공경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뜻과 세상의 기준으로 가려는 제자들에게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길을 알려주십니다.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사순시기를 지내면서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를 생각합니다.
사람은 하느님을 닮은 모습으로 가야 합니다.
그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 길은 섬김의 길입니다. 그 길은 겸손의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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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03. 사순 제2주간 수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을 닮은 참 좋은 사람 - 환대와 경청, 위로와 격려, 섬김의 사람 -
오늘 따라 시편성무일도중 마음 저리게 와닿은 구절입니다.
“내 세월을 한 뼘으로 줄이셨으니, 내 목숨은 당신 앞에 거의 없는 것,
사람이란 모두가 날숨과 같으오이다.
그림자처럼 인생은 지나가고, 부질없이 소란만 피우는 것, 모으고 쌓아도, 그 차지할 자 누구인지 모르나이다.
그렇거늘 이제 내 바랄 것이 무엇이오니이까? 내 소망 그것은 당신께 있나이다.”(시편39,6-8)
엊그제 거의 25년 전 방문해 2차례 고백성사를 봤던 분을 만나 거의 1시간 동안 면담성사를 드렸습니다. 그때는 60대 중반의 건강한 분이었는데 지금은 요양보호사의 돌봄을 받는 80대 후반의 환자입니다. 뇌졸중의 후유증으로 많이 어눌하여 알아듣기 힘들었습니다. 천사같은 재가 복지 센터장 자매와 요양보호사 부부가 헌신적 사랑으로 수도원에 차로 모셔 왔던 것입니다.
‘환대와 경청, 위로와 격려’가 화해성사에 얼마나 결정적 요소인지 깨달았습니다. 사실 고백자가 정작 필요로 하는 것은 충고나 조언보다는 위로와 격려일 것입니다. 그 형제는 줄곧 눈물을 흘리며 ‘참 편안하다’ 수없이 고백했고 보속의 처방전 말씀은 A4 용지에 큰 글씨로 써드렸습니다. 새삼 ‘환대, 경청, 위로’란 말마디가 깊이 각인된 날이었습니다. 마침 새벽 교황님 홈페이지를 여는 순간, 3월의 기도 지향이 한눈에 들어 왔습니다.
바로 기쁨을 가져다 주는, 우리와 하느님과의 사랑과 자비의 만남인 ‘화해성사’가 주제였습니다. 참으로 삶을 추스르고 새롭게 하는데 진정한 회개가 동반된 고백성사보다 더 좋은 성사는 없을 것입니다. 삶을 재정립하는데 이런 고백성사의 효과는 거의 임종어臨終語나 유언遺言, 묘비명墓碑銘과 좌우명座右銘에 견줄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피정지도때 자주 가상하여 써보도록 하는 것이 임종어나 유언, 묘비명이나 좌우명입니다. 참고로 제 좌우명은 ‘하루하루 살았습니다’입니다. 매일 새벽 성전에 들어가면 맨 먼저 바치는 기도입니다.
"주님, 하루하루 일일일생, 오늘 하루도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게해 주십시오."
어제 개봉한 봉헌함의 봉헌 봉투에 천효리 엘리사벳 자매의 여러 봉투가 눈에 띄어 새벽에 다시 읽어 봤습니다. 정성스런 필체로 “아버지 하느님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저의 전부이신 예수님, 사랑합니다. 진심 감사합니다.” “깨끗한 마음, 더 주님을 사랑할 수 있는 은총을, 절제의 은총을 주시옵소서”,말마디 마다 하트 모양의 표지가 몇 개씩 붙어있었습니다. '사랑과 감사'가 자매님의 좌우명처럼 생각되었고, 순수한 마음의 비결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환대와 경청, 위로와 격려의 하느님입니다. 참으로 주님의 환대와 경청, 위로와 격려를 체험한 사람은 저절로 환대와 경청, 위로와 격려의 참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과 제1독서의 예레미야의 처지가 흡사합니다. 두 분 모두 참 외롭고 고독해 보입니다. 고립무원, 사면초가의 궁지에 처한 예레미야의 네 번째 고백입니다. 마지막 결정적 피난처는 환대와 경청, 위로와 격려의 하느님뿐임을 깨닫습니다.
“주님, 제 말씀을 귀담아 들어 주시고 제 원수들의 말을 들어 보소서. 선을 악으로 갚아도 됩니까?---제가 당신 앞에 서서 그들을 위해 복을 빌어주고 당신의 분노를 그들에게서 돌리려 했던 일을 기억하소서.”
흡사 예언자의 순수한 사랑과 신뢰의 하소연같은 고백이 유언처럼 절박하게 들립니다. 얼마나 하느님과 깊고 친밀한 사랑의 관계에 있는 예레미야 예언자인지 마음 깊이 와닿습니다. 궁극의 위로와 격려의 피신처는 주님뿐임을, 참으로 외로움과 고독은 주님께서 부르시는 신호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처지 역시 참 외롭고 고독해 보입니다. 말그대로 동상이몽의 제자공동체와 함께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함께 해도 혼자의 외로움이자 고독입니다. 주님의 세 번째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신 심각하고 절박한 상황에 공감, 참여하기는커녕, 두 아들의 어머니는 예수님께 두 아들의 장래를 부탁합니다. 인지상정이라 두 형제에 대하여 불쾌해 하는 나머지 열 제자의 내심 역시 두 형제와 똑같습니다.
예수님의 환대와 경청의 자세가 참 진지합니다. 감정적 반응이 아니라 인격적 응답으로 대하시는 주님이시며, 겸손히 최종 결정권자는 아버지임을 밝히십니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자세로 살것이며 결과는 하느님께 맡기라는 것입니다. 모사謀事는 재인在人이요 성사成事는 재천在天이라, 일을 꾸미는 것은 우리이지만 일을 이루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 그러나 내 오른쪽과 왼쪽에 앉는 것은 내가 허락할 일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정하신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이어 예수님은 백성위에 군림 통치하며 세도를 부리는 사람처럼 되어서는 결코 안된다 하시며, 마지막 유언같은 위로의 말씀을 주십니다. 바로 어제 복음과 일치되는 섬기는 사람입니다. 다음 예수님 말씀은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주님의 유언처럼 들립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가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죽기까지,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의 비움과 섬김의 삶으로 일관하셨던 예수님이셨고, 이런 예수님의 삶자체가 우리에게는 최고의 위로와 격려가 피신처가 됩니다. 새삼 우리의 영성은 ‘섬김service과 종servant’의 영성뿐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주님을 닮은 ‘환대와 경청, 위로와 격려, 섬김의 삶’을, ‘섬김과 종의 영성’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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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03. 사순 제2주간 수요일.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는 예수님의 모습과 구약의 예언자 예레미야의 모습이 겹쳐집니다.
"제가 당신 앞에 서서, 그들을 위해 복을 빌어 주고, 당신의 분노를 그들에게서 돌리려 했던 일을 기억하소서."(예레 18,20)
예레미야는 예수님께서 겪으실 수난을 미리 보여 준 참 예언자의 전형입니다. 백성을 위해 성심껏 주님의 말씀을 전하지만 그에게 돌아오는 건 조롱과 배척, 죽음의 위협뿐이었지요.
자신을 적대하는 이들을 위해 복을 빌어 주고, 주님께 분노를 거두시길 청한 대가로 예레미야에게 돌아온 건 혹독한 배반과 무시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희생제물이 되시면서까지 인류를 위해 이루시고자 하신 축복과 속량의 대가와 다르지 않지요.
"그들은 사람의 아들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그를 다른 민족 사람들에게 넘겨 조롱하고 채찍질하고 나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다."(마태 20,18-19)
스승의 운명은 이처럼 제자들이 기대한 바와 정반대의 기류로 흐릅니다. 그런데 그들은 스승 덕에 출세와 권력을 거머쥘 환상에 사로잡혀, 누가 가장 높은 자리를 선점하느냐의 문제로 어머니까지 동원하고, 공동체 안에 분란을 야기하니 아직 갈 길이 꽤 멀어 보이지요.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태 20,28)
오늘의 복음 대목이 세 번째 수난 예고인데도, 제자들은 스승의 소명에 대해 전혀 알아듣지 못합니다. 인간적 야망과 기대가 내면을 가득 채워서일까요... 절벽 같은 제자들에게 반복해서 당신의 소명을 들려 주시는 예수님의 인내가 놀라울 뿐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진심과 정성을 이해받지 못하고 인정받지 못할 뿐더러, 수고와 희생이 폄훼되고 왜곡되어 비수로 돌아올 수 있음도 감수해야 합니다. 스승이 더 험한 대접을 받았는데 제자야 더 말할 나위가 없을 테니까요.
주님의 길, 제자의 길은 세상이 주는 찬사나 영광의 길과 방향을 사뭇 달리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축복과 중재의 소명을 멈출 수는 없습니다. 그건 그야말로, 상대의 반응과는 상관없이 우리에게 주어진 고유한 소명이기 때문입니다.
예러미야 에언자도 사람들의 공격에 지쳐 주님 말씀 전하기를 멈추려 하다가, 뼛속에 가두어 둔 주님 말씀이 타올라 결국 견디지 못하고 다시 그분의 목소리가 되었다고 고백하지요.(예레 20,9 참조) 겟세마니에서 피땀을 흘리시며 고뇌하던 예수님도 결국 당신의 잔을 마시셨듯이, 소명이란 그런 겁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를 섬기러 오셔서 당신 목숨으로 우리 죄의 값을 치르시고 희생 제물이 되신 예수님을 기억하며, 우리 각자에게 부여하신 소명을 되새기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세상의 달콤한 인정과 찬사와 성공보다, 조롱과 모욕과 업신여김을 받으신 바보 사랑꾼 예수님께 더 매력을 느낀다면 잘 따라가고 계신 겁니다. 주님의 길, 사랑의 길, 바보의 길에 동행하는 벗님을 축복합니다.
▶ 작은형제회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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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03. 사순 제2주간 수요일. 이병우 루카 신부님.
"사람의 아들은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넘겨질 것이다."(마태20,18)
예수님의 여정은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향한 여정이었습니다.
'갈릴래아'는 우리를 위해 땀을 흘리신 자리였고, '예루살렘'은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자리입니다.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죽으러 오셨습니다. 우리를 살리시려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위한 희생제물이 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당신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신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었습니다.
이 잔은 예수님께서 마시기에 너무 힘든 잔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위해 이 잔을 마셨습니다.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이 저를 비켜 가게 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마태26,39)
쌍둥이라고 불렸던 토마스는 동료 제자들에게 이렇게 외쳤습니다.
"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요한11,16)
우리도 이렇게 외쳐야 하는데...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죽으러 오셨는데...
그런데도 우리는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처럼 높은 사람이 되려고만, 첫째가 되려고만 하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태20,25-28)
나와 너 그리고 모두의 부활을 위해,
내가 먼저 죽는,
내가 먼저 낮아지는,
그런 멋진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함께 이렇게 외쳐 봅시다!
'당신멋져!'
'당당하게, 신나게, 멋지게, 져주면서 살자!'
이병우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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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03.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사순 제2주간 수요일]
그리스도인들에게 야망이 있다면 주님과 이웃을 위해 헌신하고픈 야망이어야 합니다!
야고보와 요한 사도의 어머니께서 예수님께 다가와 두 아들에 대한 인사청탁을 하는 모습을 묵상할 때 마다,
속으로 웃음을 터트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찌 그리도 오늘 우리 어머니들의 모습과 흡사한지, 혼자서 막 웃게 됩니다.
가끔씩 수도원 문을 두드리는 과정에서도 코믹한 상황이 연출됩니다. 가끔씩 여성분들이 성소에 대한 문의 전화를 합니다.
저희는 즉시 정확한 안내를 해드립니다. “죄송하지만 저희는 남자 수도원이어서 남성들만 성소 모임이 오실 수 있습니다.”
“네 그건 잘 알고 있습니다. 사실은 제 아들 때문에 전화를 드렸습니다. 입회 조건이나 절차는 어떻게 되나요?
사제로 서품되기까지 몇년이나 걸리나요? 해외 유학도 보내주시나요?”
이쯤 되면 어쩔 수 없습니다. 더 칼같이 선을 그을수 밖에요. “어머님, 죄송합니다만, 아드님 본인보고 직접 전화하라고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눈을 떠도 아들, 눈을 감아도 아들, 그저 아들 잘되기만을 간절히 바라는 어머니들의 마음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야고보와 요한 두 아들을 향한 어머니의 오롯한 일편단심 역시 납득이 갑니다.
그러나 두 사도의 어머니는 뭔가 크게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조만간 건설하실 왕국은 지상 왕국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아직도 갈길이 먼 어머니와 두 사도들 앞에 예수님께서 느끼셨던 자괴감은 하늘을 찔렀을 것입니다.
그러나 또 다시 예수님께서는 자상하고 친절하게 당신 사명의 핵심을 상기시켜주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마태오 복음 20장 26~28절)
우리 교회는 지상적인 영예와 세속적인 자리를 탐내고 추구하는 출세 제일주의자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단체가 아님을 기억해야겠습니다.
누군가가 교회를 통해 자신의 개인적인 야심과 출세욕을 충족시키고자 애를 쓰다면,
그는 예수님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가련한 존재로 추락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권력을 탐하고 추구하는 자는 스승 그리스도를 망신시키고 악용하는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종교가 한 개인의 야심을 실현시켜주는 도구가 될 때, 주님께서 참으로 슬퍼하고 분노하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야망이 있다면 그것은 주님과 이웃을 위해 헌신하고픈 야망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욕심이 있다면 그것은 주님과 이웃을 섬기고 싶은 욕심이어야 합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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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03. 전삼용 요셉 신부님. [사순 제2주간 수요일]
인간은 왜 고통을 감수할 이유를 찾았을 때 가장 행복한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수난과 부활에 대한 예고를 하십니다.
이 상황에서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자신 아들 둘을 가장 높은 자리에 앉혀달라고 청합니다.
예수님은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가려 하고 계시는데, 제자들은 높은 자리를 추구하려고만 하는 것입니다.
이는 인간이 추구할 수 있는 행복의 두 방향을 대조적으로 보여줍니다.
하나는 생존으로 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생존하게 만들기 위한 방향으로 가는 행복입니다.
진화론에서 말하는 행복의 기준은 ‘생존’에 있습니다.
내가 더 생존하고 나의 유전자를 더 전파할 수 있다면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에 따르면 자녀를 위해 희생하는 어머니가 죽으면서도 행복할 수 있는 이유는 자녀안의 유전자가 자신의 것보다 더 젊고 널리 전파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가장 행복한 사람은 징기스칸이라고 합니다.
현대인 200명 중의 한 명은 그의 유전자를 물려받았다고 말할 정도로 그가 씨를 많이 퍼뜨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생존만을 위해서 사는 것이 가장 고통스러운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모기나 기생충처럼 무리생활을 할 필요가 없는 것들이야 생존만을 위해서 살아도 되지만, 무리생활을 해야만 하는 동물들에게 생존본능은 오히려 행복을 앗아갑니다.
해리 할로우 박사는 ‘격리 원숭이 실험’에서 태어나자마자 부모에게서 떨어져 산 격리 원숭이는
심한 두려움 속에서 자해까지 했습니다.
그에게는 그저 살려고 하는 요구만 있었습니다.
그런데 살려고만 하는 욕구는 그에게 무리생활을 할 수 없게 만들었고 두려움과 고통만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구원자 원숭이를 만나고 자신도 동료 원숭이들에게 무언가 해 줄 수 있게 되었을 때 비로소 무리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고 행복을 찾았습니다.
격리 원숭이는 철사로 된 젖 주는 엄마보다 젖은 주지 않지만, 수건으로 감긴 따듯한 엄마를 엄마로 여겼습니다.
무리생활을 할 수 있는 동물들은 무리생활을 하는 것이 젖을 먹어 생존하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참 행복은 내가 속한 공동체에서 옵니다.
두 번째 행복의 단계는 고통을 없애는 것입니다.
생존본능이 고통의 원인이 된다고 믿기 때문에 그 욕구를 없애면 행복할 것이라 믿는 것입니다.
붓다는 이것을 깨달아 욕구를 없애면 행복하다고 말했습니다.
욕구가 고통의 모든 원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고통스럽지 않은 것이 곧 행복일까요?
그렇게 믿고 살아야 할까요?
먹고 싶지도 않고 사람을 만나고 싶지도 않아 아무런 욕구가 없다고 그 무기력함을 행복이라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생존 욕구를 없앴다면 그다음 욕구가 필요합니다.
바로 사랑의 욕구입니다. 사랑의 욕구는 생존 욕구와 반대됩니다.
그리고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것이지 본인이 원한다고 안에서 생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의 욕구는 자신을 사랑해주는 누군가로부터 받는 보이지 않는 실체입니다.
이 사랑의 욕구는 ‘피’를 통해서만 전해집니다.
자녀를 위한 부모의 피 흘림을 통해서만 부모의 사랑 욕구가 자녀에게 전달됩니다.
그러면 자녀도 그 욕구를 지니게 됩니다.
참 행복은 이렇게 사랑의 욕구를 전해주기 위해 죽을 수 있을 때 찾아옵니다.
이 사랑을 수혈해주기 위해 누워야 하는 침대가 십자가입니다.
영화 ‘수상한 그녀’(2013)는 일찍 남편을 잃고 평생을 아들 하나 키우며 살아온 욕쟁이 오말순 할머니의 이야기입니다.
오말순 할머니는 싸움닭입니다.
며느리는 시어머니인 오말순 할머니 때문에 쓰러져 병원 신세를 집니다.
손자들은 엄마를 위해서라도 할머니를 요양원 같은 곳에 보내는 게 낫겠다고 말합니다.
이 말을 들은 오말순 할머니는 쓸모없어진 자신을 한탄하며 한 사진관에서 영정사진을 찍습니다.
그런데 50년이 젊어진 것입니다.
처음엔 가족도 걱정이 되었지만, 이젠 자신이 하고 싶었던 가수의 꿈을 찾아 행복하게 살아보려 합니다.
점점 유명해지고 사랑도 싹틉니다.
그런데 자신이 속한 밴드에 자신의 손자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손자가 교통사고를 당하고 수술을 위해 긴급히 피가 필요합니다. 손자와 피가 맞는 것은 오직 자기 자신. 그러나 피가 빠지면 다시 늙게 됩니다.
젊어진 오말순 할머니는 손자를 위해 수혈을 하기로 합니다.
이때 그 젊은 여자가 자기 어머니인 것을 안 아들은 떠나라고 말합니다.
자기 아들은 자기가 알아서 살릴 테니까, 이젠 자신들 위해 희생하지 말고 당신 인생을 살아보라고 합니다.
이제부턴 남이 버린 시레기도 주워 먹지 말고 그 비린내 나는 생선 장사도 하지 말고 자신 때문에 아귀처럼 살지 말고 명 짧은 남편도 얻지 말고 자신처럼 못난 아들도 낳지 말고 제발 가셔서 한 번이라도 당신 인생을 살라고 말합니다.
그때 어머니는 말합니다.
“아니. 난 다시 태어나도 똑같이 살란다.
아무리 힘들어도 하나도 다름없이 똑같이 살란다.
그래야 내가 네 엄마고 네가 내 자식일 테니까.”
진화론자들이 생존하는 것이나 유전자를 후대에 물려주는 게 제일 행복이라고 주장하든, 불교에서 고통이 없는 것이 곧 행복이라고 말하든, 우리는 성령을 통한 사랑으로 나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나의 사랑을 수혈해주는 게 가장 큰 행복이라고 믿습니다.
이것을 고백하기 위해 우리는 십자가를 눈에 보이는 곳마다 달아놓습니다.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는 삶이 아니라 사랑을 위해 죽으려고 할 때 가장 살아있음을 느낍니다.
살아있음을 느끼는 게 행복입니다.
예수님은 그 길로 나아가시는 것입니다.
인간은 왜 고통을 감수할 이유를 찾았을 때 가장 행복할까요?
바로 당신과의 관계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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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03. 사순 제2주간 수요일 복음. 강만연 베드로 형제님.
오늘 복음에선 예수님이 자신이 죽을 곳을 향해 스스로 사지를 향해서 가고 계십니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곳에서 예수님의 죽음을 예고하십니다. 죽음을 넘어서 또한 다시 살아나신다고 미리 예고를 하십니다. 스승이 제자들을 향해서 말씀을 하시는데 이 말씀이 무슨 말씀인지 도무지 제자들은 이해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두 제자의 어머니는 예수님께서 다음에 이룩하실 나라에서 각각 한 자리씩 할 수 있도록 청탁을 미리 부탁하는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예수님의 말씀이 무슨 말씀인지 전혀 가늠을 할 수가 없었다고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설사 어머니는 그렇다고 해도 제대로 예수님의 뒤를 따르며 제자랍시고 그동안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가르침을 받았을 텐데도 그런 말을 하는 어머니를 보고도 복음의 내용만 보면 아무런 표현을 하지 않을 걸로 봐서는 제자들도 스승이신 예수님의 마음을 조금도 헤아릴 수 있는 제자가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을 지켜보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한마디로 갑갑하셨을 겁니다. 이들의 머릿속에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도래하는 메시아의 세상이 이 세상과는 조금은 다르지만 그래도 이 세상의 법칙이 적용될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비근한 예로 오늘 복음에서 보면 그들은 백성들 위에서 권력으로 세도를 부리면서 군림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런 세상을 꿈꾸었던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면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 같은 것을 보고 했기 때문에 뭔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메시아의 세상은 당연히 자기들이 봤을 땐 그런 세상일 거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한마디로 동상이몽을 꿈꾸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제 속에도 이런 제자의 모습이 있는지 한번 진지하게 묵상해봤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어떤 자리를 원했지만 아마 모든 사람들이 그렇다고는 할 수 없지만 우리는 이 세상에서는 아니더라도 다음에 하늘 나라에서는 뭔가 하느님으로부터 어떤 한 자리까지는 아니더라도 은근히 내심 이 세상에서 살면서 나름 하느님 일을 위해 열심히 봉사를 했다거나 어떤 업적을 이루어냈다면 그에 맞는 보상을 얻고 싶은 마음이 있지 않다고는 말하기 곤란할 겁니다. 좋게 표현하면 하늘 나라에서 상급을 받는 것이 될 것입니다. 설령 이 지상에서는 아니더라도, 하늘 나라에서 상급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달리 생각하면 순수성이 떨어지는 것 같은 면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뭔가 하느님과 거래를 하는 느낌 같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마실 잔을 마실 수 있느냐고 물어보신 후에 그들은 할 수 있다고 하지만 그들은 다 그 잔을 마시기는커녕 도망을 가고 배신을 하는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진정한 제자라면 그 잔을 피하면 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그동안 스승과 제자로서의 맺은 인연을 생각해서도 말입니다.
저도 오늘 솔직히 고백하면 이틀 전에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계명만 아니라면 한 일 이년 정도 하느님을 떠나서 조금 자유롭게 생활을 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물론 그렇게 할 수도 없지만 그런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렇게 할 수가 없었던 것은 제가 믿음이 좋아서 그런 게 아닙니다. 냉정하게 말하면 지금까지 저를 지켜본 본당 신자들에게 저의 그런 모습을 보게 되면 지금까지 저의 신앙생활을 나름 지켜보신 분들에게 실망을 안겨드릴 것 같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지금은 본당에 주보가 A4 단면으로 변경이 되어서 일면에 신앙의 글 같은 걸 싣을 수가 없지만 예전에는 제가 간혹 신앙의 글을 올리곤 했습니다. 그때 신앙도 제대로 되지 못한 사람이 글은 번지르르하게 쓴 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걸 생각하면 쉬고 싶어도 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측면에서는 그렇지만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나약한 인간이지만 그래도 신앙생활을 하면서 죽을 때까지 하느님만 바라보고 갈 수 있게 해주십사하고 기도도 숱하게 올렸는데 만약 하느님과 어느 시간 동안 거리를 두게 되면 그 기도가 그냥 허공에 한 기도가 되는 것 같아 하느님을 뵐 면목이 없을 것 같아 그렇게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쩔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벗어나고 싶은 유혹도 이겨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다른 건 몰라도 다음에 하느님 앞에 갔을 때 짧은 기간이라도 하느님을 등진 시간만은 가져서는 되지 않아야 하지 않겠나 하는 걸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다시 마음을 한번 다짐을 해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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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03. 김 로마노 형제님.
사순 제2주간 수요일 제1독서 (예레18,18-20)
"선을 악으로 갚아도 됩니까? 그런데 그들은 제 목숨을 노리며 구덩이를 파 놓았습니다. 제가 당신 앞에 서서 그들을 위해 복을 빌어 주고 당신의 분노를 그들에게서 돌리려 했던 일을 기억하소서." (20)
예레미야서 18장 14절에서와 마찬가지로 의문문을 이끄는 의문사'하'(ha)가 서두에 나와 본문을 수사 의문문으로 이끌고 있다.
선을 악으로 갚는 일은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일이 선민 이스라엘 공동체의 현실 가운데서 일어나고 있음을 예레미야는 주님께 탄원하고 있는 것이다.
예레미야는 멸망으로부터 동족을 구하려는 열정으로 주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한편, 주님께 이 백성을 위한 중재(중보)기도를 올렸다(예레14,7~15,9).
그런데도 이 백성은 오히려 그를 핍박하고 목숨을 해치려고 구덩이를 파기까지 했다.
그렇기 때문에 예언자는 이 백성의 포악한 행태를 참다 못해 주님께 아뢰며, 자신을 불쌍히 여겨주심을 간구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악행을 고발하고 그에 대한 책벌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성경에서 '구덩이'는 숨을 수 있는 '굴'(2사무17,9)이라는 긍정적인 의미로도 사용되지만, 대부분의 경우 '감옥','저수 동굴'(예레38,1~13), '웅덩이', '함정', '구렁'(시편35,7), '올무','올가미','덫'(시편140,6) 등의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여기서도 부정적인 의미로도 사용되었는데, 일차적으로는 '함정'이란 의미로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더 나아가서 '감옥'과 '매장지'라는 의미까지 염두에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남부 유다 백성은 예레미야를 저수 동굴(구덩이로 된 감옥)에 가두었고(예레38,1~13) 죽이려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 목숨을 노리며 구덩이를 파 놓았습니다'란 표현은 그들이 단지 예레미야를 적대시하였다는 의미 뿐만 아니라 그를 해치고 제거하기 위해 집요하게 노력했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제가 당신 앞에 서서 그들을 위해 복을 빌어 주고 당신의 분노를 그들에게서 돌리려 했던 일을'
'제가 당신 앞에 서서'에서 '서다'라는 뜻의 동사 '아마드'(amad)는 일차적으로 '서다'란 육체적 행동을 표현하는 말이지만, 구약 성경에서 본문처럼 '주님 앞에 서다'라는 표현은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말이다.
그것은 전형적인 중재(중보) 기도의 자세를 나타내는 문구이기 때문이다(창세18,22; 신명4,10).
예레미야는 '주님의 분노를 그들에게서 돌리려 했던~~그들을 위해 복을' 주님께 고하며 중재기도를 드렸던 것이다.
본문에서 예레미야는 이러한 사실을 기억해 줄 것을 주님께 간청한다.
이것은 단순히 자신이 주님 앞에서 옳게 행했음을 변론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선을 악으로 갚는 백성의 거역을 고발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을 향하여 하느님께서 판단하시고 그에 합당한 벌을 내리실 것을 간구하는 것이다.
사순 제2주간 수요일
십자가의 의로움이 드러나야 구원입니다.
(마태 20,17-28)
17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 열두 제자를 따로 데리고 *길을 가시면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 길이라는 단어를 굳이 넣은 것은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의 의로움을 위한 일, 곧 하늘의 길을 가고 계심을 뜻합니다.
(요한14,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로마3,24)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속량을 통하여 그분의 은총으로 거저 의롭게 됩니다.
= 하늘의 의로움, 그 진리의 길을 대적하는 예루살렘을 향해 가십니다.
죄인들의 죗값을 치루기 위해 속죄 제물로 가시는 길입니다. 그들에게 하늘의 의로움을 주시기 위해~~
18 “보다시피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 거기에서 사람의 아들은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넘겨질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사람의 아들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19 그를 다른 민족 사람들에게 넘겨 조롱하고 채찍질하고 나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은 사흗날에 되살아날 것이다.”
= 사흗날~ 창조 사흗날입니다.(창세1,13) 빈 땅을 위해 씨가 들어가 대신 죽어 맺은 열매, 사흗날의 일입니다. 곧 구원을 위한 하늘의 의로움의 열매를 맺을 수 없는 죄인(빈 땅)들을 위해 대신 죽으시고 부활하시는 예수님(씨)입니다.
(로마4,25) 이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잘못 때문에 죽음에 넘겨지셨지만, 우리를 의롭게 하시려고 되살아나셨습니다.
= 그렇게 우리 죄인들을 위해 하늘의 일을 하시려 당신의 죽음의 길을 가시는 그때에~
20 그때에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과 함께 예수님께 다가와 엎드려 절하고 무엇인가 청하였다. 21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무엇을 원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 부인이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 여자가 땅의 길, 예루살렘이 추구하는 인간들의 명예, 욕망을 청합니다. 하늘의 길을 깨닫지 못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오른쪽- 하늘나라입니다. 왼쪽- 땅의 나라입니다. (땅에 영원히 갇히는 것, 지옥입니다.)
그 의미를 모르는 엄마입니다. 오늘날 부모들이 자식을 위해 ‘무엇을 청하는지~기도하는지 생각하라’ 하십니다.
22 예수님께서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할 수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 죽음의 잔입니다.
2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 그러나 내 오른쪽과 왼쪽에 앉는 것은 내가 허락할 일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정하신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24 다른 열 제자가 이 말을 듣고 그 두 형제를 불쾌하게 여겼다.
= 모든 제자들 또한 다른 두 제자와 같은 마음이었기에 엄마까지 와서 특별히 청하니 불쾌합니다. 당신을 따라 오려면 그 땅의 욕망, 그 자신을 버리고 따르라 하셨는데(마태16,24) 제자들 모두는 버린척, 아닌척 예수님을 따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25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26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27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28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제자(죄인)들이 예수님 당신의 사흗날의 대속의 죽음과 부활로 하늘의 생명을 얻도록 그들을 섬겨 주셨습니다.
그럼 우리도 똑같이 하라는 말씀? 그런데 그렇게 대신 죽어줄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의 섬김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을 전해주어 이웃이 하늘의 생명을 얻도록 도와주는 그 섬김입니다. 낮은 종의 자세로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나 자신이 그 복음을 깨달아 간직해야 합니다. 성경(구약, 신약)의 모든 말씀을 십자가의 복음으로 깨닫는 것입니다.
(로마1,2) 이 복음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예언자들을 통하여 미리 성경에 약속해 놓으신 것으로,~
(요한5,39) 너희는 성경에서 영원한 생명을 찾아 얻겠다는 생각으로 성경을 연구한다. 바로 그 성경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그래서~~
(요한8,31-32) 31 예수님께서 당신을 믿는 유다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32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성경은 예수님의 의로움을 받으라는 말씀이지 우리 스스로 의롭게 되라는 책이 아닙니다. (물론 구원을 위한 의로움입니다.)
♡ 아멘
사순 제2주간 수요일 복음(마태20,17~28)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기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26~28)
'너희 가운데에서'에 해당하는 '엔 휘민'(en hymin; among you)이란 표현은 제자들을 다른 대상과 구분짓는 말로서, 이미 제자들은 이 세상 나라와는 구별되는 하느님 나라에 속한 자임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처럼 제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속한 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사고방식은 전혀 변화되지 않았기에, 예수님께서는 사랑과 겸손, 섬김이 기본이 되는 천국의 본질과 관련해서 역설적인 진리를 가르치신다.
여기서 '섬기는 사람'으로 번역된 '디아코노스'(diakonos; minister; servant)는 '심부름을 가다'라는 뜻이 있는 '디아코'(diako)에서 유래하여 '일꾼', '하인'(요한2,5.9), '하인'(마태22,13)이라는 의미를 지녔다.
초대 교회 때 교회 공동체 안에서 봉사하는 자를 가리키는 '봉사자', '집사' (필리1,1; 1티모3,12)라는 호칭이 이 단어에서 유래되었다.
한편, 마태오 복음 20장 27절에서 '첫째가'에 해당하는 '프로토스'(protos; first; chief)는 장소나 시간에 대해 '~보다 앞에'라는 뜻을 지닌 전치사 '프로'(pro)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여기서는 지위나 계급 등에 있어서 '제일 높은 자'를 가리킨다.
반면에 '종'에 해당하는 '둘로스'(doulos; servant; slave)는 '묶다'(마태13,30), '묶다', '결박하다'(마태12,29)라는 뜻이 있는 동사 '데오'(deo)에서 유래하여 주인에게 완전히 예속된 '노예'(slave)를 의미한다.
종은 자신이 아니라 주인을 위하여 필요하다면 자신의 목숨까지도 바쳐야 한다.
사랑과 겸손, 섬김이 기본이 되는 하느님 나라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이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여 상대방을 섬기는 자기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위의 마태오 복음 20장 28절의 말씀은 단순히 예수님께서 육화(강생)하신 목적만을 밝히시기 위해 주어진 말씀이 아니고, 제자들로 하여금 당신을 본받아 하느님 나라에 속한 자로서 합당한 자질을 갖도록 촉구하는데 있다.
여기서 '몸값'에 해당하는 '뤼트론'(lytron; a ransom)은 '풀다'(마태16,19), '벗다'(사도7,33) 등으로 번역되는 '뤼오'(lyo)에서 유래하여 '의무나 속박에서 풀어 주는 것'을 말한다.
말하자면 타인의 속박아래에 있는 노예나 죄수에게 자유를 부여해 주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바로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들을 죄와 죽음의 사탄의 권세에서 벗어나게 하여 참된 자유와 평화를 주시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인간들의 이러한 죄와 죽음과 사탄의 속박을 끊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무죄하신 당신 자신의 목숨을 그들을 대신하는 제물로 바쳐야 했다.
인간들의 죄로 말미암아 상처받은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과 의노를 풀어드리기 위해, 하느님 아버지와 위격이 같으신 무죄하신 예수님께서 죄지은 인간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상에서 대속 (代贖; Redemption)을 해야 하는 것이다.
한편,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대속물로서 죽으신 것은 '많은 이들'을 위해서이다.
'많은 이들'로 번역된 '폴론'(pollon; many)의 원형 '폴뤼스'(polys)는 수적으로 많다는 의미만이 아니라, 시간적으로 길다는 뜻과 정도에 있어서 광범위하다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
특히 여기서 우리는 '모든'이라는 뜻이 있는 '파스'(pas)라는 단어가 사용되지 않았다는 데에 유념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시지만, 모든 사람은 아니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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